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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의 에티카 - 신형철 평론집
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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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하찮은 것이다. 시가 위대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시를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 시는 하찮은 것이지만 다른 대단한 것들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한다. 주체들이 앓고 있는 증상들을 언어라는 가장 기초적인 수단을 통해 표현하는 일을 한다는 점에서 시는 가장 근본주의적으로 하찮고 가장 진실하게 사소한 그 무엇이다. 도착적이고 반(反)고백적이며 환상적이고 비(非)계몽적인 이들의 시는 불투명한 우리 시대가 낳은 가장 투명한 증상들이다. 물론 진실은 언제나 건강한 자들이 아니라 앓는 자들의 편에 있다.(230쪽)

 

특별한 사상가 이반 일리히가 말했습니다.

 

"여러분, 안녕하세요. 제가 지구를 구할 방법을 가르쳐 드린다고 하니까 이렇게들 모이셨군요. 그럼 이제부터 지구와 인류를 구할 영웅이 되고 싶은 꼬마 친구들에게 스파이더맨이나 배트맨보다 더 쉽게 영웅이 되는 길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지구를 구할 방법은 딱 세 가지. 바로 자전거와 와 도서관이지요. 엄마가 자동차를 타고 대형 할인점에 가려고 하면, 자전거를 타고 동네 시장으로 가라고 일러 주세요. 나보다 잘 싸우는 친구가 개똥을 밟고 미끄러졌을 때, 배꼽을 잡고 웃지 못했다면 집에 가서 몰래 시를 쓰세요. 슬픔도 시로 쓰세요. 화나는 일도 시로 쓰고요. 시 쓰는 사람은 마음이 커질 테고, 시를 읽는 사람은 잊고 있던 소중한 것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도서관은 우리 모두가 평등하게 어울려 살아갈 수 있는 최고의 배움터입니다. 도서관은 학교처럼 시험으로 점수를 매기지 않으며, 이 책 읽어라 저 책 읽어라 강요하지도 않습니다."

 

이쯤 되면 시는 훌륭한 것, 위대한 것이 아닐까요? 지구를 구하는 삼총사 가운데 하난데!^^ 어째서 시는 하찮고 사소하다 했을까요? 심지어 시를 위대하다고 하는 사람은 시를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고까지 하니, 이거야 원!

 

여기에는 그만한 까닭이 있습니다. 시는 언어라는 가장 기초적인 수단을 통해 표현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표현하는 것이 앓고 있는 증상들입니다. 형식도 내용도 그야말로 대수롭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그러나 반전이 있습니다. 이 하찮은 시가 다른 대단한 것들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증상의 표현을 통해 언제나 건강한 자들이 아니라 앓는 자들의 편에 있는 진실을 드러내줍니다. 진실의 드러냄이야말로 훌륭한 것, 위대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결국 돌아왔습니다. 이 과정을 정리해보면 다음의 명제가 떠오릅니다.

 

“(통속적) 위대함은 과대평가된 사소함이다. (근본주의적) 사소함은 과소평가된 위대함이다.”

 

 

이 하찮은 자의 사소한 아침에도 위대한 감동이 있습니다. 권력이 바다에 빠뜨린 지 8일째인 지난 4월 23일 다른 세계의 생명으로 돌아온 수경이의 얼굴을 마주합니다. 수경이의 언니가 동생에게 편지를 씁니다. 이 대목에 이르러 기어이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습니다.

 

“아직 구조되지 못한 친구들도 빨리 사랑하는 부모님 품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수경이가 도와줘.”

 

아픈 사람만이 드러내주는 투명한 증상, 그 도저함이여! 통속적 대수로움, 저 권력이 무참히 짓밟은 이 하찮은, 사소한 사람들의 편에 있는 진실을 위해, 하찮고 사소한 사람들아, 하찮고 사소한 시, 이 시를 가슴 터지도록 껴안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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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14 11: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8-14 12:2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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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의 에티카 - 신형철 평론집
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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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화자나 지시체 없이 그 자체의 물리적 강렬함만으로 존재하는 언어의 세계, 주체도 대상도 없는 ‘과정으로서의 언어’로 이루어지는 어떤 상태(는)·······‘무의미하게’ 아름답다.·······“헛것이 취할 수 있는 가장 경건한·······”·······우리시대의 증상(이다.)(223-229쪽 *괄호와 그 안의 내용은 인용자 부가임.)

 

스누피를 그린 전설의 만화가 찰스 슐츠는 말했습니다. “내 인생에는 목표도, 방향도, 목적도, 의미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나는 행복합니다.”

 

상담 중에 이 말을 소개했더니 어떤 분은 이렇게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대박 난 인생을 살아가니까 그런 말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일리 있습니다. 그럼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는지요. “만일 그렇게 대박 난 찰스 슐츠가 커다란 목표, 바른 방향, 숭고한 목적, 깊은 의미까지 그 인생에 담았다면 더욱 행복하지 않았을까?”

 

이 또한 일리 있습니다. 그렇다면 정 반대의 생각을 해도 일리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는 의제擬制도 가능합니다. 대박 난 인생인가, 아닌가, 는 관건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이 불가피하게 헛것, 그러니까 무상無常한 것이므로, 의미에 집착하지 않고, 과정으로서의 삶을 순간마다 이어가면, ‘무의미하게’ 아름답다, 는 진실이 핵심입니다.

 

꽃이나 짐승이 아닌 인간인 한, 의미 속에서 아름다움을 말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게 우리의 오랜 관습임은 물론입니다. 좋습니다. 의미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은 사람이야 그렇게 말 하는 데에 거치적거릴 일이 없습니다. 의미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을 수 없는 사람에게는 그러면, 이 관습은 미상불 저주였을 것입니다. 의미의 저주를 풀 수 있는 길은, 삶 자체의 물리적 강렬함, 과정으로서의 삶, 오직 그뿐입니다. 제 몸을 태워 불로 번져가는 장작이 내는 소리의 “점멸”點滅(191쪽), 그 점멸의 과정만이 가장 경건한 우리시대의 증상, 그러니까 “참혹한 아름다움”(5쪽)입니다.

 

 

열여덟, 삶을 채 불태워보지도 못하고 차고 어두운 물속에서 죽음으로 내몰린, 닷새 만에 휴대폰을 움켜쥔 채 주검 되어 엄마한테 돌아온, 이 아이 앞에서 산 자들의 서사는, 의미는, 전언message은 죄다 꽃놀이 패일 따름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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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의 에티카 - 신형철 평론집
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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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곡을 통해 지시대상 자체를 소멸시키고 사건을 추상화해서 이미지의 구조물로 전환시킨다. 바로 그 순간·······소위 ‘환상’적인 것이 되며·······환상은 대개 ‘과잉’적인 것으로 나타난다.·······‘과잉’으로 치달으면서 자주 드러내는 현상 중의 하나는 공격적인 신체 훼손과 기관 분리 현상이다.·······소위 ‘환상’이란 그러므로 언어화·상징화에 저항하는 현실의 ‘실재’를 직접적으로 현시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면서 동시에 의식의 수준에서 작동하는 ‘욕망’이 아니라 신체의 층위에서 작동하는 ‘충동’의 운동을 포착하기 위한 시도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살아 있다’는 느낌을 회복하기 위해 스스로를·······면도칼(환상)로 자해하여 흘리는 붉은 피·······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실재를 환상으로 착각하지 말라.’(221-222쪽)

 

이른바 초기불전에 따르면 붓다의 가르침의 요체는 해체였습니다. 가령 어떤 사람의 얼굴이 예쁘다, 할 때 그 생각은 우리가 늘 보아온, 그래서 관습적인, 그러니까 어떤 선입견에 사로잡히는, 얼굴 전체의 느낌에 터한 것입니다. 눈, 코, 입들을 따로 떼어 들여다보면 전혀 다르고, 나아가 더 작은 단위로 잘라 보면, 예쁘다 뭐다 할 것도 없는 지경에까지 다다릅니다. 이렇듯 우리가 휘둘리는 대부분의 미망이 관습적인 덩어리 식 생각 때문입니다. 덩어리를 해체하면 비로소 진실의 문 입구에 서는 것입니다.

 

관습적인 언어와 상징은 욕망의 체계입니다. 욕망의 체계는 권력입니다. 권력은 정상적 이의 제기로 자신의 견해를 바꾼 적이 없습니다. 치열한 왜곡을 통해 소멸시키지 않으면 안 됩니다. 주도면밀하게 추상화해서 전환시키지 않으면 안 됩니다. 왜곡과 추상화가 바로 ‘환상’입니다. ‘환상’은 피 흘리는 자해, 그러니까 신체 훼손과 기관 분리를 감행하는 면도칼입니다. 면도칼로 긋는 ‘과잉’이 아니면 실재의 현시, 신체적 충동, 그러니까 ‘살아 있다’는 느낌을 회복할 수 없습니다. 관습적 서정이 우리로 하여금 실재를 환상으로 착각하도록 중독되게 했으니 ‘과잉’ ‘환상’으로 해독하는 것입니다. 이독제독以毒制毒!

 

 

세월호참변으로 희생된 아이의 아버지가 죽음을 각오한 단식을 감행하고 있습니다. 얼핏 보면 과잉처럼 보입니다. 자세히 봐도 ‘과잉’입니다. 얼핏 보면 환상입니다. 자세히 봐도 ‘환상’입니다. 이 ‘과잉’ ‘환상’ 없으면 진실이 묻히고 말 것입니다. 이 ‘과잉’ ‘환상’이야말로 유일한 ‘엄정’ ‘실재’입니다. 이 땅의 관습적 언어와 상징이 얼마나 깊은 중독 상태에 있는지를 너무나도 잔혹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중독 세상 한가운데서 우리는 과연 무엇일까요? 과연 무엇이 우리를 인간답게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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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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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을 구축하(고자 하)는 자아의 목소리가 사라지고 누군가 말한다(On parle)’의 형식을 취하는 익명의 중얼거림’(들뢰즈)·······화자와 청자가 일정한 형식을 전제하고 준수하는 고백과는 달리·······말 그 자체만이 존재한다는 뜻에서 독백이라 부를 수 있을·······‘떠도는 말들은 기왕의 고백이 어떤 위기에 봉착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증상이다. 증상은 질문이다. 아름다운·······독백들은 종래의 서정적 고백의 형식이 어떤 미학적 곤경에 처해 있는 것은 아닌지를 묻고 있다.(216-217)

 

고백은 본디 (숨겼던) 진실을 있는 그대로 정직하게 말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종교적으로까지 나아가면 고해告解와 동의어가 되는 것입니다. 이 고백이 서정시에 이르러서는 또 하나의 상상적 자아를 창조하면서 진실을 한 번 더 회피하는”(212) 전략으로 전락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은 모양입니다.

 

시인도 인간이고, 인간인 한, 아프지 않을 수 없으니 그 아픔에게 시는 무엇인가, 하는 물음을 어찌 대하는가에 따라 시를 치유 또는 완화의 도상에 놓을 수도 있고, 방어 또는 악화의 도상에 놓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치유하려는 자는 감응(response)하고, 방어하려는 자는 반응(reaction)합니다. 감응은 아픔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자세이고, 반응은 쫓아내려는 자세입니다.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자세는 진실을 있는 그대로, 엄밀히는 접힌 부분을 활짝 펴서, 그러니까 예술적으로, 정확하게 드러내고, 쫓아내려는 자세는 진실을 일부는 과장하고 일부는 축소해서, 병적 자아 중심으로 접어서 드러냅니다. 펴진 증상은 제대로 질문이 되고, 접힌 증상은 그대로 훈계가 됩니다. 질문은 샘이 되고, 훈계는 늪이 됩니다.

 

고백은 그러면 어떻게 늪이 될까요. 이때의 고백은 설정입니다. 고백자의 매혹을 드러내 듣는 자를 끌어들이기 위한 전략입니다. 한 패가 되는 것과 함께 치유하는 것은 다릅니다. 패거리는 진실을 엄폐하고 치유연대는 진실을 엄호합니다. 마음치유 현장에서() 종종 패거리가 형성됩니다. 과정상 불가피한 경우가 있을 테지만 종당 패거리는 제거되어야 합니다. 오직 진실이 주는 걸림 없는 연대, 자유의 네트워크가 남을 뿐입니다.

 

 

 눈물 흘리며 날린 설정고백이 수많은 사람을 사로잡아 허위와 조작의 어둠 속으로 끌고 들어가는 현실을 우리는 지금 이 시각에도 목도하고 있습니다. 어둠의 패거리가 사회와 역사를 부끄러움으로 몰아가고 있는 이때, 고백 앞에 질문으로, 증상으로 마주서는 독백이란 참으로 대수로운 사소함일 것입니다. 물론 궁극적 화두가 하나 더 남아 있다는 것을 전제로 말입니다.

 

독백에서 쟁백諍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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