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우의 사물들 - 개정판
김선우 지음, 우창헌 그림 / 단비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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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뜨거운 관심을 끌었던 드라마 <추적자>에서 한오그룹 서회장이 이런 말을 한다.


“입만 열면 옳은 소리 하는 놈들은 제 가족 굶긴다. 그게 죄다.


백홍석이 했음 직한 이런 말을 떠올려본다.


“제 가족만 배불리는 놈들은 정의와 선을 팔아먹는다. 그게 죄다.”


정확한 대칭을 이루는 말인가. 아니다. 앞 말은 현실(Sein)에 가깝다. 뒤 말은 당위(Sollen)에 가깝다. 앞 말은 나 같은 소인배의 폐부를 찌른다. 뒤 말은 ‘대인배’의 콧등을 간질일 뿐이다. 앞 말을 듣고 소인배는 고뇌에 빠진다. 뒤 말을 듣고 ‘대인배’는 정의와 선 개념 자체를 엎어버린다. 이 비대칭의 경사가 가파를수록 세상은 탐욕과 공포와 무지로 바글거리게 된다.


나는 매주 일요일 아침 일어나 습관적으로 고민을 하나 한다. 면도할 것인가, 말 것인가. 면도하지 않으면 가족과 외식하든, 서점을 가든, 산에 가든....... 꺼칠한 맨얼굴 가지고 사적으로 하루를 보낸다는 뜻이다. 면도하면 ‘공적으로’ 외출한다는 뜻이다. 그 공적인 외출이 대개 내 이익과 무관한, 저 ‘대인배’들한테 죄인 취급당하고 현실적 불이익을 받을 수 있는, 그런 것이기에 고민한다고 표현했다.


적어도 이 고민을 하는 순간, 내게는 위 두 말이 정확히 대칭을 이룬다. 서로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남들이 생각하는 만큼 한의사로서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사람이 결코 아니기에 늘 가족에게 미안하다. 앞 말은 비수가 된다. 이 사회의 어둠과 아픔을 내 세대의 어떤 사람보다도 깊게 넓게 겪어 알고 있다. 뒤 말은 벼락이 된다.


이 대칭은 옹골차 보이고 두 “경계는 단호해 보이지만 의외로 쉽게 무너진다. (대칭이란,) 경계란 그런 것이다....... 경계를 넘어가는 것들의 뒷모습은 유쾌하고 도도하다.”(96쪽) 내가 순간마다 고민하면서도 유쾌하고 도도하게 경계를 넘어가는 것은 김선우의 중얼거림을 듣기 때문이다.


소라의 몸이면서 소라의 집이었던 이 소라 껍데기 하나는 또 다른 누군가의 집이었을 것이다....... 내 손바닥 위에서 여러 생명이 지나간다. 소라 껍데기는 사물인가. 우리가 흔히 ‘사물’이라고 딱딱하게 규정하는 사물들의 기원은 따스하다. 그 어느 것이나 이 별의 핏물이 스며있고 고동치는 따스한 맥박이 번져있다. 소라 껍데기를 들여다보다가 중얼거린다. 나는 누구의 집이 되어줄 수 있을 것인가.”(103쪽)


나는 누구의 집이 되어줄 수 있을 것인가. 이 중얼거림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아니 인간이면 해야 하는 준엄한 질문이다. 이 때, 누구 속에 제 가족 밖 다른 사람이 없다면 여느 짐승과 다를 바 없으니 구태여 질문이랄 것도 없다. 피 한 방울 나누지 않은 머나먼 타인을 품 안의 인연으로 받아들이는 문제 앞에서 나지막이 중얼거리는 것이다.


이 중얼거림에 실려 인간은 영성을 지닌 존재로 되어 간다. 자기 자신과 제 가족만을 위해 악착같이 사는 사람이 수직적 신성 속에 놓이는 것은 영성이 아니다. 자기 자신과 제 가족 너머, 존재의 드넓음(spaciousness)을 향해 무한히 삶의 지평을 열어가는 것이 참 영성이다. 이 영성에 실릴 때, 나 같은 소인배도 능히, 유쾌하고 도도하게 경계를 넘어갈 수 있다. 그렇게 경계를 넘어갈 때 비로소 천고의 진실 하나가 나의 오도송이 된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미끄러진다.”(10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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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우 지음, 우창헌 그림 / 단비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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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여성들도 바늘 쌈지를 지니고 다니지 않는 세상이다. 도무지 손수 바느질 할 일이 없으니 그럴 밖에. 그런 와중에도 남성인 나는 바늘 쌈지를 지니고 다닌다. 물론 나 또한 쓸 일은 거의 없다. 쓸 일이 거의 없지만 꼭 자리 잡고 있는 양복 윗주머니처럼 내 바늘 쌈지는 시간의 흔적을 몸에 지닌 채 나와 늘 동행한다. 내가 늘 바늘 쌈지를 지니고 다니는, 바느질도 웬만한 여성보다 잘 하는, 데는 그만한 곡절이 있다.


아버지가 이삼년이 멀다 하고 이혼 재혼을 거듭하는 동안 집안일은 연로하신 할머니 몫일 수밖에 없었다. 아들의 그런 모습 지켜보는 할머니의 신산한 마음을 그나마 위로해드릴 수 있는 내 나름의 배려는 집안일을 돕는 것이었다. 그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바느질이었다. 지금이야 이불 같은 것도 바느질이 필요 없도록 만들지만 그 시절엔 일일이 호청을 빨아 다림질해서 꿰매야 했다. 해진 옷가지도 마찬가지다. 요즘은 바느질 이전에 버리거나, 필요한 경우 세탁소 아니면 수선 집에 맡기면 그만이다. 그 시절엔 몇 번씩 꿰매 입었다. 바느질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처음엔 바늘에 실 꿰는 간단한 일로 시작했다. 나중엔 아예 이불이며 옷이며 양말에 이르기까지 내가 맡아서 바느질했다. 그러는 동안 내 바느질 솜씨는 어느덧 어설픈 단계를 넘어섰다. 급기야 할머니가 보조.^^ 보조로 물러앉으신 할머니는 끝내 원래 자리를 되찾지 못하셨다. 생애 가장 끄트머리에 치매가 시작되셨던 거다. 그러나 당신 내의조차 제대로 깁지 못 하시는 상태에서도 바늘을 놓지 않고 끈질기게 치매와 맞붙어 싸우셨다. 뭔가 알아들을 수 없게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실패한 바느질을 되살리려 애쓰시던 모습은 지금도 그렁그렁 내 영혼에 맺혀 있다. 

 

내가 지니고 다니는 바늘 쌈지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나는 마치 할머니 분신이기나 한 듯 바늘 쌈지를 지니고 다녔다. 결혼 전 20년 가까이 홀로 사는 동안은 물론이고 결혼한 뒤에도 여전하다. 바늘 쌈지만 지니고 다니는 게 아니다. 실제 지금도 바느질을 한다. 솔기만 뜯어졌을 뿐 버리기 아까운 옷가지나 작게 구멍 난 양말 정도는 기워서 입고 신는다. 긴 세월 이렇게 사는 동안 부지불식간에 여성성이 내게 자리 잡은 듯하다. 옛날 제자들한테는 엄마 같은 스승으로, 지금 아내에게는 영화 <여배우들>에서 고현정이 한 말 그대로 ‘아내 같은 남편’으로 자리매김 되었으니 말이다.


바늘, 이것은 아마도 내 운명, 아니 내 자신이지 싶다. 바늘 쌈지와 바느질에서 배어 나오는 여성성은 최근 십여 년 동안, 또 다른 인연으로 내 인격과 인생에 깊게 자리 잡았다. 바로, 침(鍼), 그것이다. 바늘보다 더 낭창낭창한 이 쇠붙이는 바늘과 달리 그 귀가 침놓는 사람의 손가락으로 만들어진다. 그러나 그 본질은 같다. 침은 사람 몸을 뚫고 들어가 통증을 가라앉히고 막힌 기혈을 소통시킨다. 공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외연) 결국은 받아들이고 보호하는 것이다(내면).


예리한 바늘 끝과 다소 뭉툭한 바늘의 귀, 극도로 심플한 바늘의 몸은 이 두 극점으로 자신의 외연과 내면을 소통시킨다.”(86쪽)


어디서 이런 사유가 나왔을까. 김선우의 생각 힘에 감탄하면서 거기 힘입어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보자. 내 상상력은 바늘이 양성구유의 완전체를 형상화한 것이라 여긴다. 예리한 끝과 둥근 구멍은 각각의 성기다. 예리한 끝은 관통하며, 둥근 구멍은 흡수한다. 관통과 흡수, 이것이 생명의 요체 아니던가. 바늘은 관통으로 시작하여 흡수로 끝나는 삶의 전형을 보여준다.


바늘은 자기 몸에 실을 꿰고 온 몸으로 옷감-현실을 관통한다. 그리고 숨는다. 바늘은 현실에 깊숙이 관여하면서도 자신의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바늘에게는 아상(我相)이 없다. 찢어지고 떨어지고 조각나고 해진 것들을 이어 붙이고 매달아주고 기워주면서 자신의 존재를 타자 속에 스미게 한다. 바늘의 자아는 그 자신의 이름으로써가 아니라 자신이 이어 붙이고 부활하게 한 옷감으로 증명된다.......”(86쪽)


자신의 흔적을 남기지 않고 자신의 존재를 타자 속에 스미게 하는, 이 붓다 급, 그리스도 급 흡수라니! 인간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직업 가운데 나는 의자(醫者)가 이런 존재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위 마지막 문장을 이렇게 바꿔보자.


“의자의 자아는 그 자신의 이름으로써가 아니라 자신이 치유하고 건강하게 한 환자로 증명된다.”


그렇지 않은가. 그런데 요즘 의자들은 자신의 이름으로 자아를 증명한다. 물론 돈 때문이다. “죽음의 신은 목숨만 가져가지만 의자는 돈까지 가져간다.”는 인도의 고대 속담은 교통사고와 자살로 죽는 사람보다 의료사고로 죽는 사람이 더 많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완벽하게 의미롭다. 사람 건강과 목숨을 돈벌이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부패한 의자들의 영혼에게 김선우의 바늘은 숨은 자의 글썽이는 꿈으로 웅숭깊이 은유 되어지이다.


자기의 온 몸으로 자기를 넘어가는 바늘의 흔적은 고요하다.”(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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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우 지음, 우창헌 그림 / 단비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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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누른 카메라 셔터 속에 정지되어 있는 사람들. 정지된 시간은 정지된 바로 그 순간부터 인간의 관습적 사고가 흔히 향해가는 지점과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자신의 시간을 움직여갈 수 있는 자유를 얻는다. 표상이 정지한 바로 ‘그’ 순간의 무의식은 일상적인 지시 체계로부터 벗어나 한없이 자유로운 호흡을 시작한다. 정지된 시간은 전혀 엉뚱한 지점에서 무언가를 낳고 있는 시간이다.” (72쪽)


천하시인 김선우다운 통찰이다. 나는 문득 도덕경 제1장을 여기다 포갠다.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 명가명비상명(名可名非常名).”


통속한 도덕경 해석을 따르면 어긋난 포갬일 테다. 그러나 해석을 정신의학의 후각으로 접근하면 이 포갬에 공감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마음의 병을 치료한답시고 약만 가지고 덤비면 이런 진실을 만날 수 없음은 물론이다.


치료를 넘어 전인적 치유로 가는 길목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 치유상담이다. 마음의 병은 그 자체로 이야기인 병이기 때문에 아픈 사람이 스스로 하는 자기 이야기가 치유의 관건이다. 이것을 나는 자기언급(self reference)라 한다.


자기언급은 의학용어가 아니다. 철학용어다. 이것을 의학 안으로 들여와 치유상담 임상 현장에 적용한 것이다. 자기언급은 환자가 자신이 처한 현실을 표현하는 행위 자체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표현된 풍경이다.


자기언급으로 표현된 병적 상태의 자기 내면 풍경은 표현된 순간 자기 자신이 아니게 된다. 그 순간, 화면은 정지하고 흐르는 생명에게서 분리되기 때문이다. 여기까지는 통속한 해석으로도 포착이 가능한 진실이다.


문제는 표현된 풍경의 정지 화면을 만드는 행위와 그 행위를 빚어가는 사람 사이의 무엇이다. 자기 자신이 아닌 자기 풍경 만들기를 계속하는 모순된 행위 주체는 순간마다 그 풍경과 다른, “엉뚱한” 시공으로 자기 자신을 형성해간다.


행위와 행위자 사이에서 창조되는 엉뚱함, “한없이 자유로운 호흡”, 바로 이게 치유상담이 바라는 바다. 모순을 달여 역설로 빚어내는 행위, 바로 이게 치유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도덕경 제1장 해석은 전복된다!


도를 도라 표현하는 순간, 비상한, 그러니까 “엉뚱한”, 그러므로 “한없이 자유로운” 치유의 도가 된다. 우울(증상)을 우울(증상)로 표현하는 순간, 비상한, 그러니까 “엉뚱한”, 그러므로 “한없이 자유로운 호흡”, 곧 치유된 우울, 기품 있는 인격이 된다.


비상(非常)은 통속한 해석에서처럼 부정적인 의미의 볼모로 잡을 것이 아니다. 비상은 그야말로 비상한(surpassing) 것이다. 그 비상함은 정지된 시간, 거기 담기는 풍경을 빚어내는 “바로 ‘그’ 순간의 무의식”의 해방이다.


물론 무심코 저지르는 정지는 생명을 죽이는 것이다. 유심히 빚어내는 정지가 비상한 자유를 낳는 것이다. 마음이 아픈 사람은 모름지기 문득, 문득, 알아차리고 숨을 멈출 일이다. 거기 치유가 숨 쉬고 있다. 엉뚱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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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우 지음, 우창헌 그림 / 단비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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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하면 내가 먼저 떠올리는 말은 “가슴에 못 박는다.”다. 내가 남의 가슴에 못 박은 적도 있을 테고, 남한테 못 박힌 적도 있을 테다. 사는 동안 이렇게 서로 가슴에 못을 박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오직 하나의 이유, 그렇다, 인간이기 때문이다.

 

한 연구에 따르면 사람이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가슴에 못 박는 일 가운데 가장 빈번하고 신랄한 것은 가족 사이에서 일어난단다. 가족은 서로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는 게 아니다, 라는 따스함 맞은편에 바로 이런 뼈아픈 진실이 있는 거다.

 

내 삶의 경험에서도 그러하다. 내 가슴에 가장 깊은 못을 박아 넣은 사람은 다름 아닌 어머니(들)와 아버지다. 물론 그 분들이 작정하고 특별한 언행을 지어낸 것이 아니다. 늘 하던 대로 한 것이다. 사실은 그래서 더욱 섬쩍지근하다.

 

엄동설한 깊은 밤, 아버지가 아홉 살짜리 나를 계모 눈앞에서 발가벗겨 내쫓은 적이 있었다. 나는 지금도 어떻게 아버지가 그리 행할 수 있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 한다. 그런데 그 때 아버지 표정과 언어는 전혀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헤어진 지 30년 만에 벼락처럼 다시 만난 어머니가 나를 보자 던진 첫 마디 말이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지 아느냐?”였다. 나는 지금도 어떻게 어머니가 그리 말할 수 있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 한다. 어머니 표정과 언어 또한 너무도 심상했다.

 

부모가 가슴에 박아 넣은 못들은 한 동안 격심한 통증을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염증을 유발해 신열에 뜨게 만들었다. 분노와 원망이 마음의 병을 확대재생산하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럴 만했다. 그러나 그게 끝이라면 이 무슨 횡액이랴.

 

내가 지아비가 되고 아비가 되는 삶의 여울을 따라 내 상처와 병은 씻기고 바래지고 정화되어 갔다. 그것은 무슨 특별한 요법이나 교설에 힘입은 것이 아니다. 인간이기에, 인생에서, 그런 일이 일어난다는 일상적 공감과 수긍 덕분이었다.

 

어쩌겠는가. 상처 없는 사람이란 없는 것이다. 가슴을 대지 삼아 뿌리를 내리며 자라고 있는 상처들 앞에서 나는 종종 기꺼이 가슴을 열기도 한다. “어쩌겠는가. 못이 없는 집이란 없는 것이다. 수직의 벽을 대지 삼아 뿌리를 내리며 자라고 있는 못들 앞에서 나는 종종 즐겁게 벽이 되기도 한다.

 

그러면 가끔 알게 될 때가 있다. 상처가 오롯이 상처로 깊어지면 상처에서 꽃이 피기도 한다는 것을. 못의 뿌리가 닿는 자리들이 간질거리며 무엇인가 자꾸 피워내고 있다는 것을. 상처 난 살갗에 새살이 돋을 때처럼, 새순이 돋아나기 시작한 겨울나무 가지 끝처럼, 못 견디게 간질거리는 어떤 그리운 느낌이 못의 뿌리로부터 대지로 번져나가는 것을.

 

인간은 희한하게도 기쁨과 즐거움이 아니라 슬픔과 아픔을 통해서 깊은 인격으로 나아간다. 상처가 꽃을 피운다. 상처가 그리움을 번지게 한다. 병이 성숙을 이끈다. 병이 자유를 열어간다. 그러기 위해 “그 황홀한 통증의 뿌리들은 침묵으로 일관하면서 자기 무게의 수십 배가 넘는 사물들의 무게를 지탱한다.

 

못들은 힘이 세다.”(이상 인용 70쪽) 상처들은, 병들은 힘이 세다. 나는 그 힘으로 오늘 나를 살아낸다. 나는 그 힘으로 오늘 나를 찾는 환우를 함께 살아낸다. 그러니 어찌 상처 입은 사람이 상처 입은 사람을 치유한다고 말하지 아니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니 어찌 이 삶을  황홀하다 아니 할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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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우 지음, 우창헌 그림 / 단비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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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을 밝히기 위해 인간이 만들어낸 모든 빛 중에서 어둠에 배타적이지 않고 어둠을 껴안으면서 스스로 영롱해지는 것은 유일하게 촛불이다....... 촛불은 동화된다. 강렬한 빛으로 어둠을 제압하려 하지 않는다. 어둠을 자신 속으로 스미게 하여 그 힘으로 꽃을 피운다.”(55쪽)


어둠을 껴안아....... 자신 속으로 스미게 하여 그 힘으로 꽃을 피운다는 표현과 마주했을 때, 내가 먼저 떠올린 건 사실, 유년시절의 호롱불이었다. 강원도 깊은 산골 칠흑의 어둠 속에서 호롱불은 최대한 빛을 내려 한다기보다 최소한, 그러니까 어둠이 열어주는 틈새까지만 발맘발맘 다가가는 순박한 빛이었다. 그러기에 호롱불 아래 앉아 있노라면 어느새 코끝에 어둠 요정이 달라붙곤 했던 것이다.


호롱불은 자신의 빛이 어둠과 적대적 모순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새까맣게(!) 모르는 듯하다. 하기는 그 모순이라는 게 인간의 생각이고 개념이지 호롱불에게야 귀신 씨 나락 까먹는 소리 아니랴. 그러니 호롱불은 자신의 빛으로 어둠을 물리친다고 느끼지 않았던 것이 틀림없다. 만일 그랬다면 자신 곁에서 공부하는 아이들이랑 바느질하는 엄마들이랑 모두 멀찌감치 보내 어둠을 막아서도록 했을 것이다.


1965년 가을 서울에 올라온 강원도 산골아이가 가장 놀란 것은 낮의 자동차, 밤의 전깃불이었다. 배타적이고 공격적인 이 두 물질은 해끔하고 쌀쌀맞은 서울아이들보다 한 발 먼저 산골아이의 기를 꺾어 버렸다. 운전 경력 20년이 지난 지금도 그는 자동차 운전과 주차를 잘 못한다. 하다못해 전자기기 시그널의 작은 빛조차 꼼꼼히 단속하지 않으면 지금도 그는 잠들지 못한다. 운전이야 않으면 그만이지만 불면증, 참 야속한 거다.


산골아이가 호롱불 대신 도시에서 발견한 것은 바로 촛불이었다. 개집보다는 넓지만 결코 사람 운신할 공간이 못 되는 비좁은 다락방에 올라가 촛불을 켜고 보스락거리다가 별스럽단 소리 들은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정전이 자주 되던 시절, 그 때마다 켤 수밖에 없었던 촛불의 아늑함은 마치 산골 집 호롱불 느낌과 같았다. 정전을 핑계로 숙제 멈추고 빛과 어둠의 가장자리에 고즈넉이 눕는 시간은 참으로 감미로운 것이었다.


촛불은 무욕하다. 몽상과 기도와 응시의 힘으로 자신의 양식을 만드는 촛불 아래서, 그 나직한 들숨과 날숨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나는 부끄러워진다. 자신을 태우면서 마침내 무소유에 이르고자 하는 마음이 가난한 자의 정결한 혼. 촛불 밑에선 누구나 시인이 된다.”(60쪽)


물론 그 시절, 그 촛불에서 무욕의 체취나 마음이 가난한 자의 정결한 혼향(魂香)을 맡을 수는 없었다. 다만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는 어수룩한 인생경영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무욕, 무소유인 상태가 되었을 뿐이니 오히려 부끄러울 따름이다. 내가 촛불에서 정결한 혼을 본 것은 나이 오십이 넘어서였다. 어찌 보면 매우 뜻밖이랄 수 있는 기회였다. 지난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둘러싸고 전개되었던 촛불집회, 거기였다.


나는 그 촛불 속에서 무욕의 바다를 보았다. 마음이 가난한 자의 정결한 혼, 그 신령한 불을 보았다. 즐거운 몽상, 간절한 기도, 해맑은 응시를 보았다. 중학생인 내 딸에게, 그 아이 손잡은 내게, 물대포 맞으며 “온수!”를 연호하는 시민에게 무슨 탐욕이 있었을 것인가. 수많은 날들 거대하게 너울거리던 촛불, 그것은 다만 촛불이 아니었다. 어둠을 자신 속으로 스미게 하여 그 힘으로 촛불이 피워낸 꽃이다. 캔들 플라워다!


자기 의사를 드러내는 데 촛불을 드는 행위만큼 배타적이지 않고 상대를 껴안아 자신 속으로 스미게 하는 것이 또 있을까. 권력자는 빨갱이 운운하며 배후를 밝히라고 호통 쳤다지만 나는 심히 부끄러운 마음으로 딸아이 손을 잡고 거리를 걸었다. 내 부끄러움은 필경 김선우의 그것, “....... 촛불 아래서, 그 나직한 들숨과 날숨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나는 부끄러워진다.”는 그 부끄러움과 본질상 같을 터이다.


무욕한, 마음이 가난한, 촛불 아래서 부끄러움을 아는 자의 발걸음은 “발꿈치를 살짝 들고 땅과 공기의 중간쯤을 걷는 듯한. 현실에 있되 현실 조금 위쪽을 꿈꾸는 듯한 걸음걸이”(김선우「캔들 플라워」368쪽)다. 그 걸음걸이 자체가 몽상이며 기도며 응시다. 즐겁고도 간절하며, 간절하면서도 해맑은 놀이가 아니면 모순을 흔쾌히 받아 안아 세상 바꾸는 꽃으로 피워낼 다른 무엇이 있으랴. 촛불은, 바로,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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