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우의 사물들 - 개정판
김선우 지음, 우창헌 그림 / 단비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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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상처가 많아질수록, 아름다운 것들이 쉽게 유린되는 것을 너무 많이 경험한 나이가 될수록 꽃을 꺾지 못한다. 꽃을 만지는 행위 하나에서도 윤리적 자아가 발동하게 된다는 것은 혹여 세계와 나의 타락의 방증은 아닐는지.”(43-44쪽)


읽다가 문득 멈추어 한참을 가슴으로 흘려보낸다. 세상에서 가장 먼저 울고 가장 나중까지 우는 숙명을 지닌 존재가 시인이라면 김선우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숙명이 아닌가. 김선우의 탱맑은 눈물 감각으로 말하자면 “타락” 이외에 다른 언어가 없으리라.


나는 醫者로서 김선우의 두 번째 문장을 이런 의학 버전으로 바꾼다.


꽃을 만지는 행위 하나에서도 치유적 자아가 발동하게 된다는 것은 혹여 세계와 나의 아픔의 방증은 아닐는지.


내가 풀이나 나무의 꽃, 잎, 열매, 대궁, 껍질, 뿌리를 직접 약으로 쓰는 한의사가 된 것은 김선우가 시인이 된 것과, 아마도, 같은 숙명일 것이다. 강원도 오대산 골짜기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내게 생명감각을 일깨운 것은 거의 모두가 그런 풀이며 나무였다.


서울이란 초거대 도시로 스며들어 살아온 지 오십 년이지만 지금도 감도는 오감의 기억이 여전하다. 넓은 잎 사이 바람결에 반짝이며 얼굴을 내밀던 동그란 호박은 어린 내게 경이로움 자체였다. 연두와 초록을 오가는 호박 특유의 색감에 대한 설렘은 특히나 생생하다.


그뿐인가. 잿빛 채 걷히지 않은 봄 들판 걷다 보면 홀연히 쏘옥 고개를 내미는 할미꽃, 엄마 얼굴 같이 동그란 해당화 고운 향기, 장독대 맵짜한 냄새와 어울려 빛나던 자두나무 높은 곳의 선홍 자두, 끝 부분 세모 접어 잠자리채 만들던 쑥 대궁의 그 쌉쌀한 향기.......


이상하리만큼 내 관심과 감각 모두에서 풀과 나무들은 향 맑은 자극제다. 급기야 나는 내 자신이 풀과 나무의 본질을 지닌 사람 아닐까, 생각하기에 이른다. 풀과 나무가 내게는 동물보다 훨씬 더 따뜻한 마음을 가지게 하니 그럴 수밖에 없다.


식물은 태어난 그 자리에서 일생 동안 모순된 조건을 견디며 살아내야만 한다. 뿐만 아니라 침습해오는 동물의 공격을 감당해내야 한다. 소리치거나 몸으로 저항하지 않으니 그 고통을 인정받을 수조차 없다. 이들은 사람으로 치면 우울증 앓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내가 풀과 나무를 대하는 근본 자세는 우울증 앓는 사람을 대하는 그것과 같다. 내가 우울증 앓는 사람을 대하는 근본 자세는 내가 나를 대하는 그것과 같다. 내가 나를 대하는 근본방식은 우울증을 오랫동안 앓아왔던 내 상처에 대한 치유, 바로 그것이다.


한의원 열면 주위에서 많은 풀과 나무를 선물한다. 대개 방치되다가 일 년 전후해서 죽기 마련이다. 내 경우는 다르다. 오래 산다. 내가 내 환우들을 치유하면서 읽어내는 “자기 존재 전부로 다만 아름다워진”(43쪽) 모습을 그 풀과 나무에게서도 읽어내기 때문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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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우 지음, 우창헌 그림 / 단비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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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이 될 일 아니라며 말렸지만, 나는 의자가 피워낸 ‘꽃’ 덕분에 국민 드라마 <허준>이 한의대 커트라인을 천정부지 끌어 올렸던 2000년, 사십대 중반 나이로 한의대에 합격했다. 그 누구보다 나는 내 자신한테서 인생 최고의 축하 인사를 받았다. 축하 인사는 그 뒤로도 계속되었다. 한의학의 시공간이 내가 삶의 기조로 자리 잡은, 질긴 우울증을 앓아 왔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해주었으니 말이다.


남들이 알지 못하는 삶의 틈바구니에서 나는 스스로 우울증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치료는 동시에 깊고 넓은 공부가 되었다. 한의학은 물론 서구 정신의학의 교과서적 지식이 알지 못하는 우울증의 세계를 탐색하면서 새로운 진단, 치료 패러다임을 빚어갔다. 우울증은 단순한 기분장애가 아니고 생명과 삶에 대한 자세에 생긴 치명적 문제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독자적인 상담 이론까지 만들기 시작했다.


내가 깨달은 바에 따르면 우울증의 본령은 자기 존재에 대한 모멸과 부정이다. 다시 말하면 한사코 자기 자신을 주변부로 밀어내는 것이다. 그 중심에는 언제나 다른 존재, 즉 유령들이 바글거린다. 그러므로 그 바글거림은 결국 텅 빈 무엇이다. 하여 우울증을 치료에서 자기 자신을 자기 삶의 한가운데로 다시 불러들이는 일은 필수불가결하다. 김선우의 의자가 빛을 쏘는 순간이다.


의자에 앉는 순간 우리는 풍경의 중심이 된다. 중심이 된다는 것은 즐거운 경험이다. 비어 있는 의자에 누군가 앉는 순간 새로운 중심이 생긴다....... 무언가 담는 순간 의자는 빛나기 시작한다. 중심으로 이동한 의자는 빛나기 시작한다. 중심으로 이동한 의자가 빛나기 시작하는 순간 당신의 우울은 이미 치료되기 시작한다.”(35쪽)


그렇다. 그래서 김선우 의자는 역설이다. 김선우 의자는 경계여서 중심을 사로잡는다. 김선우 의자는 텅 비어 있어서 충만한 앉음을 호린다. 김선우 의자는, 이렇게, 매혹이다. 김선우의 매혹 의자가 만들어내는, “관능적”(33쪽)인 경계의 틈에서 일으키는, 자유로운, 섹시한 사건들은 실로 웅숭깊은 중심의 치유를 행한다. 우울증 앓는 이가 김선우 매혹의자에 앉으면 명품 인간으로 빛나지는 까닭이 여기 있다.


나는 오늘도 김선우의 매혹의자에 앉는다. 거기서 우울증을 달여 낸다. 나는 오늘도 김선우의 매혹의자를 비워놓는다. 거기 앉아 우울증 달여 낼 누군가를 기다린다. 자기 자신을, 현실 삶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이는 낭창낭창함으로 변방과 중심을 가로질러 역설을 빚어낼 때, 나와 그 누구는 함께 김선우의 탱맑은 빛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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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우 지음, 우창헌 그림 / 단비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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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김선우보다 열서너 해 앞, 아마도 그가 태어나 자란 곳 그 너머쯤, 강원도 오대산 줄기 깊은 산골에서 태어나 자랐다. 그 시절 그런 산골 마을에 의자 달린 책상을 가진 아이는 전혀 없었다. 대부분 방바닥에 엎드려 하거나 밥상을 펴놓고 했다. 조금 나은 형편이면 앉은뱅이책상 있을 정도. 나 또한 그랬고 그렇게 공부하던 기본자세는 그 뒤로 아주 오랫동안 유지되었다.


늦어도 한참 늦은 나이에 한의학 공부하겠다고 수능시험 준비를 하던 때가 있었다. 내가 공부하던 곳은 경기도 용인에 있는 작은 암자였다. 그리 들어간 까닭은 수학 때문이었다. 스무 해도 훨씬 지나 다시 시작한 고교 과정 수학이 그렇게 어려울 수가 없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백 점 만점에 팔십 점을 못 넘기자 나는 수학책만 열한 권을 싸들고 법대생 시절 사시 준비할 때도 가지 않았던 절로 향했다.


이 무렵엔 다른 과목 다 만점 맞고도 수학 팔십 점 맞으면 한의대를 갈 수 없었다. 하루 열다섯 시간 이상 수학공부만 하기 시작했다. 수도승과 다름이 없었다. 허나 그 수행(!)도 허사. 수능시험과 같은 조건으로 모의시험을 치면 늘 막히던 문제에 다시 막힌다. 막히면 불같이 화가 난다. 화난 채 풀면 점수는 오르지 않는다. 점수가 꼼짝 않고 똬리 튼 현실을 목도할 때 남는 건 절망뿐. 


바로 이즈음, 우연히, 앉은뱅이책상에서 공부하는 것이 의자 위에 앉아 공부하는 것보다 1.5배가량 체력소모가 심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가뜩이나 힘든 판에 그토록 체력까지 더 소모해가며 공부하면 안 되겠다 싶어 그 동안 정들었던(!) 앉은뱅이책상을 떠나 전격, 의자 위로 자리를 옮겼다. 이 공간이동, 자세이동이 어떤 예측 불가능한 자유를 몰고 온 것이 틀림없다.


.......우리가 의자에 앉아 있을 때, 의자의 받침 면과 다리가 만드는 ‘벌어져 있는 공간’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예측하기는 어렵다.......”(33쪽) 


.......의자에 앉아 있는 순간의 인체를 생각해보라. 가부좌를 틀고 바닥에 앉아 있을 때 우리의 몸은 흔히 질서와 지혜를 향해있다. 의자에 앉아 있을 때 우리의 몸은 ‘앉아 있다’는 측면에서 정적이지만, 정적인 고요를 깨뜨리지 않으면서 전자보다 훨씬 자유분방하게 움직인다.......”(34쪽)


여느 때와 다름없이 모의시험을 친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중후반부 어느 문제에서 막힌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수직으로 화가 솟구친다. 그런데! 바로 다음 찰나, 굵고 나지막한 한 음성이 들린다. “너, 왜 화를 내는 거냐?” 온 몸에 소름이 확 끼친다. 재빨리 뒤를 돌아본다. 아무도 없다. 있을 리 없다. 아, 내면의 소리로구나! 즉각, 연필을 내려놓는다. 가만히 물어본다.


“왜 화가 날까?” 답이 곧 나온다. “반드시 풀어야만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시 가만히 물어본다. “왜 반드시 풀어야만 한다고 생각할까?” 답이 곧 나온다. “내가 지금, 사십 넘긴 나를, 이십 여 년 전 공부 잘 해 이름 날리던 열아홉 살짜리 그 소년으로,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딩동댕! 과거의 어떤 기억, 그 기억으로 고정된 자아상에 사로잡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 경직성, 그게 답이었다.


현실을 현실로 해방하자 자유가 들이닥친다. 자유는 분노를 해체한다. 더 이상 화가 나지 않는다. 그게 변화의 진면목이 아니다. 화가 나지 않자 막혔던 문제가 풀리기 시작한다! 기적이다. 기적이 아니다. 정확무비하게 이치를 따른 것이다. 이치를 따르지 못하던 상태에서 이치를 따르는 상태로 변화한 것은 “‘벌어져 있는 공간’ 속에서”였다. 벌어져 있는 공간은 경계의 틈이다. 경계의 틈에서 꽃이 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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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우 지음, 우창헌 그림 / 단비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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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우는 불교 경전에 나오는 말리카 왕비 부부 이야기 끝에 붓다의 게송 한 편을 인용하고 있다.


이 세상 어디에도

나보다 기꺼운 것은 없도다.

그토록 소중한 것 남 또한 그럴지니

제 자신을 아끼는 이

남 해하지 않으리.”(28쪽)


이 게송은 프리모 레비의 시 <게달레 대장>의 후렴 연과 조우한다.


내가 나를 위해 살지 않는다면 
과연 누가 나를 위해 대신 살아줄 것인가? 
내가 또한 나 자신만을 위해 산다면 
과연 나의 존재의미는 무엇이란 말인가? 
이 길이 아니면 어쩌란 말인가? 
지금이 아니면 언제란 말인가?
 


유대인인 프리모 레비는 현자(랍비) 전승에 정통했음에 틀림없다. 사실 이 부분은 유대 전승에서 빼놓을 수 없는 위대한 현자 힐렐의 어록을 변용한 것이다. 힐렐의 세 문장은 이렇다.


내가 나를 위하지 않으면 누가 나를 위하는가?

내가 내 자신만을 위한다면 내가 무엇인가?

지금이 아니면 언제인가?


인간의 삶을 요약하면 사실, 딱 이뿐이다. 누구에게나 삶은 자기 삶이니 자기가 살아내야만 한다. 이 사실은 내게 그런 만큼 남에게도 그러하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나의 삶을 사는 사람은 남의 삶도 꼭 그만큼 소중히 한다.


붓다의 게송은 나중에 한자어로 이렇게 압축된다.


자리이타(自利利他)!


그렇다. 바로 대승불교가 그리 하였다. 붓다의 가르침이 인도를 넘어 동아시아로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은 이 압축언어 덕분이다.


마찬가지로! 힐렐의 세 의문문은 나중에 단 하나의 명령문으로 압축된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그렇다. 바로 예수가 그리 하였다. 힐렐의 가르침이 유대민족을 넘어 유럽으로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은 이 압축언어 덕분이다.


두 말은 정확히 그 뜻이 같다. 물론 통속 대승불교와 통속 기독교 모두 이 말을 사실상 곡해함으로써 사회적 실천 문제에서 실패했고, 실패하고 있다는 것 또한 같다. 자기 위상과 사명을 과도하게 의식한 나머지 이타(利他), 이웃사랑의 망상에 빠져 자기 사랑, 자기 신뢰를 등한히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자기기만은 물론 사회 전체를 기만하기에 이르렀다.


생각해보라. 지금 통속 대승불교와 통속 기독교가 우리사회에서 과연 무엇인가? 두 종교의 교인- 각기 주장하는 대로 통계를 낸 숫자-을 합하면 대한민국 국민 숫자를 넘어선다. 이타(利他),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종교인으로 차고 넘치는 이 나라의 현실은 과연 어떤가? 참으로 가소로운 노릇이 아닌가.


그러면 어찌 하여 이런 참담한 현실을 마주할 수밖에 없는 것인가? “자리(自利)”와 “네 몸과 같이”란 말이 품고 있는 치명성을 제대로 간파하지 못 했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신뢰하는 일이 대체 무엇이며, 또 얼마만한 일인가, 하는 문제를 건너뛰고 어설프게 큰 수레의 자비와 십자가의 영성을 선취했기 때문이다. 색(色)을 모른 채 공(空)을, 에로스를 모른 채 아가페를 뇌까렸기 때문이다.


갈 데 없는 과대망상이다. 과대망상은 결국 관념의 장난일 뿐이다. 이 관념의 장난이 은폐한 물적 현실은 어떠한가. 승려가 호텔방에서 포커를 치고, 목사가 알바 고용해 불법선거운동을 한다. 해탈과 돈 사이, 천국과 권력 사이, 과연 무엇이 똬리 틀고 있는 것인가. 바로, 지금, 불자와 기독자는 김선우의 이 담담한, 그러나 준열한 말을 영혼에 새기라.


자신에 대한 사랑은 거의 언제나 자신에 대한 질문을 포함하며 자신에 대한 질문은 거의 언제나 자신과의 싸움을 포함한다.”(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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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우의 사물들 - 개정판
김선우 지음, 우창헌 그림 / 단비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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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숟가락이 불러 일으키는 향수는 흔히 세상의 어미들에 대한 그리움을 동반하는데, 아마도 '둥긂'과 '먹인다'는 것 때문일 것이다. 어머니들은 먹이는 일에 열렬하다. 밥 먹는 아이들을 대견하게 바라보는 어머니들의 풍경은 지상에서 가장 흔하고 가장 아름답고 또 조금은 슬픈 듯해 보이는 풍경이다.

 

먹는다는 일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이다. 모든 살아 있는 존재들에게, 살아 있기를 희망하는 존재들에게필연적으로 부과되는 일.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점에서존재의 치명적인 약한 고리이며 그리하여 먹는 일과 먹이는 일은 도덕적, 미학적 가치 부여 이전에 그 행위 스스로의 위엄으로 순결해진다."(17쪽)

 

읽고 또 읽어도 그 때마다 가슴이 먹먹해진다. 문득 프리모 레비 한 대목이 포개져 온다.

 

"모두 자신에게 가장 어울리는 방법을 찾아 삶과 작별했다. 기도를 하는 사람도 있었고 일부러 곤드레만드레 취하는 사람, 잔인한 마지막 욕정에 취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들은 여행 중 먹을 음식을 밤을 새워 정성스레 준비했고 아이들을 씻기고 짐을 꾸렸다. 새벽이 되자 바람에 말리려고 널어둔 아이들의 속옷이 철조망을 온통 뒤덮었다. 기저귀, 장난감, 쿠션, 그리고 그밖에 그녀들이 기억해낸 물건들, 아기들이 늘 필요로 하는 수백 가지 자잘한 물건들도 빠지지 않았다. 여러분도 그렇게 하지 않겠는가? 내일 여러분이 자식들과 함께 사형을 당한다고 오늘 자식들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을 것인가?"(<이것이 인간인가> 15쪽) 

 

아우슈비츠 마지막 끼니를 먹이는 유태인 어머니와 한사코 숟가락으로 감자 껍질을 벗기는 김선우의 어머니는 영원히 같은 어머니다. "그 행위 스스로의 위엄으로 순결해지는" 먹임의 어머니.......

 

김선우에게 이런 어머니가 계셨기에 그 사랑과 그리움을 달여내어 저 탱맑은 김선우 문학을 이루었으리라. 이 점에서도 김선우는 신께서 편애한 생명임에 틀림없다. 내게 숟가락,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기억은 아홉 살 어느 날 아침, 계모가 '밥을 너무 많이 먹는다'면서 숟가락 모를 세워 머리통을 찍었던 일이다. 그 다음부터 '내가 대체 밥을 얼마나 많이 먹나' 숟가락질 수를 세는 습관이 한 동안 계속되었다.

 

기쁜 눈물 번지게 하는 김선우의 숟가락은 그에게 문학적 상상력을 수북수북 담아 떠먹이는 오목한 힘이 되었다. 슬픈 눈물 번지게 하는 내 숟가락은, 아마도 내게 의학적 치유력을 다독다독 부추기 볼록한 힘이 되었을 터이다. 이 볼록한 힘은 매 순간마다 내 슬픔을 일깨운다. 슬픔이 일깨워져야 내게 마음을 맡긴 사람의픔에 공감할 수 있겠에 신은 내게 숟가락의 볼록한 진실을 보이신 모양이다.

 

김선우가 신의 편애를 받았다는 말은 오목한 쪽 진실이니 어찌 보면 볼록한 쪽 진실에선 내가 편애를 받았는지도 모른다. 피장파장인가. 아니, 매우 치명적인 한 부분에서 여전히 김선우는 편애 받은 거다. 김선우의 숟가락은 삶을 '놀이'로 오목히 떠먹였다. 그게 문학의 찬란한 결이 되었다. 내 숟가락은 내 삶에서 '놀이'를 볼록히 앗아갔다. 지나친 진지함 '놀이'를 대신했다. 나는 그렇게 의학에 귀의다.  

 

하여 나는 놀이를 잘 모른다. 놀이에서 느끼는 즐거움과 경이로움의 감각이 발달하지 못 한 거다. 북콘서트와 강연 자리에서 김선우를 비교적 가까이 본 바, 그는 타고난 놀이 감각을 지녔다. 그의 목소리, 웃음, 몸짓, 그리고 마음짓 모두에 놀이 감각이 다글다글 굴러다닌다. 내가 오직 그런 김선우를 묘사하기 위해 만든 새로운 말이 '탱맑음(膨淸)'이다. 아마도 신은 내 것 모두를 거두어 그에게 주셨을 거다.^^

 

이제, 신과 대좌해야겠다. 내 의학과 치유에 놀이 감각을 되심어달라고 담판 지을 요량이다. 여생이 얼마일지 모르지만 지금부터 노는 의학, 노는 치유를 위해 신나게 놀아 봐야 하지 않겠나. 김선우의 응원을 기다린다. ㅍ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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