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 - 제15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최진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10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한 번 읽고 말기엔 아까워 어떤 구절의 표현, 어떤 대목의 내용을 살피면서 다시 읽었습니다. 소설 가운데 이런 경우를 만나기란 쉽지 않은데 말입니다. 선물해주고 싶은 사람이 몇 있어 더욱 좋았습니다.  


무엇보다 첫눈에 들어온 것은 첫 장을 0번으로 매긴 것이었습니다. 물론 맨 나중 것을 다시 0 혹은 00번으로 하지 않았을까, 혹시나 하면서 기대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오랜 동안 제 글쓰기 습관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맞아떨어졌습니다. 어떻게 이 어린(!) 이야기꾼이 똑 이런 발상을 해냈는지 신기했습니다. 심지어 19 뒤에 '다시, 19' 씩이나.......  


첫 장을 열어 읽기 시작하면서 ‘아, 보통 내기가 아니구나!’ 직감합니다. 생각의 무애자재한 지평과 방향, 거기에 상응하는 문장의 단소정한(短小精悍). 자지와 보지를 대놓고 말하는 단도직입의 거침없는 입심, 그래도 ‘거시기’ 선에서 일단 자제하는 절제의 주상절리. 순진무구를 길라잡이로 내세운 발칙한, 그러나 절묘한 도발 전략. ‘아, 무당 제대로다!’  


이야기는 진짜와 가짜의 대칭(대립)구도를 큰 틀로 하여 진행됩니다. 이 대칭구도 에는 다양한 변주가 등장합니다. 이름 있는 사람과 이름 없는 사람, 버리는 사람과 버려지는 사람, 예쁜 사람과 안 예쁜 사람, 착한 사람과 못된 사람, 가진 사람과 못 가진 사람, 가족인 사람과 가족 아닌 사람,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 행복한 사람과 불행한 사람, 그리고 선과 악, 마침내 삶과 죽음.......  


이런 대칭구도는 현실의 부조리를 일으키고 그것을 치밀한 갈등을 통해 지속시키는 공고한 장치로 작동합니다. 그러나 그 극단한 분별이 부질없어지고 마는 시공에서 적멸의 해법이 나타나 이 대칭구도를 뒤흔들고 마침내 무너뜨려버립니다.  


소녀는 시종일관 (누구나 다 아는) 어느 한 편에 서 있는 존재이나 스스로 그 경계 지점에 서기도 하고 자기 반대편으로 가로지르기도 하면서 대칭구도를 앙칼지게 쑤시고 가차 없이 베어 갑니다. 마침내 자기의 어떤 이름(유나)의 일부인 나리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나리의 새 아빠를 찔러 죽이고 그 칼에 찔려 뱃속의 아이와 함께 자기도 죽음으로써 진짜와 가짜, 선과 악, 삶과 죽음의 대칭구도를 붕괴시킵니다. 그러나 비참하지도 비장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이 죽음을 통해 그는 평화라는 이름을 얻습니다. 아니 평화 그 자체가 됩니다.  


이렇게 삶과 죽음의 경계를 간단히(!) 무너뜨릴 수 있었던 소녀의 ‘쿨’하거나 범상치 않은 정신성은 이미 처음부터 도처에 출몰했지만 결정적 형성은 아마도 나리 엄마를 만난 시공에서였을 것입니다.  


.......뒤늦게 나리의 엄마라는 사람이 경찰서로 왔다. 온몸을 보석으로 치장하고 세련되게 화장을 한 여자였다. 나리의 엄마는 울지도 않고 소리 지르지도 않고, 모든 일이 그저 조용히 정리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 여자의 무심한 목소리를 듣는데,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저 사람이다.  

저기 있다.

나의 진짜엄마는.

 거리를 떠돌며 내가 정했던 진짜엄마의 조건은 모두 껍데기고 포장이며 환상이고 거짓말이다.......이제야 알겠다. 그런 사람을 찾기는 너무 쉽고 너무 쉽기 때문에 나는 여태껏 못 찾고 있었다. 너무 흔하니까. 어디에나 있으니까.

거울을 보면, 그 속에도 있다.  

.......  


전 남편한테서 난 자기 딸이 현 남편한테 무수히 강간당하고 끝내 죽임으로까지 내몰린 현장에서 오직 자기 생존만을 챙기는 그런 엄마가 가짜가 아니고 진짜라는 사실을 홀연히 깨달은 소녀, 바로 그 다음 순간, 자신도 바로 그런 사람이라는 깨달음도 벼락 같이 얻게 됩니다.  


더 이상 뭘 찾아야 하나요? 아니, 더 찾을 것은 없습니다. 어디가 더 성장해야 하나요? 아니, 더 성장할 것은 없습니다. 소녀는 더 이상 성장담 속에 있지 않습니다. 하여 이 이야기의 마지막은 참 어른인 소녀의 오도송(悟道頌)이 됩니다. 소녀의 죽음은 독자에게 소녀 시대의 상징적 죽음을 환기시키는 은유가 아닙니다. 소녀의 죽음은  삶과 죽음의 통속한 이분법을 깨뜨리는 관통(貫通) 길을 날렵하고도 토실하게 보여줍니다.  


관통! 이는 우리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 바로 평화를 위하여 반드시 지녀야 할 삶의 방향이며 성격입니다. 세상이 들이미는 온갖 해악과 폭력을 ‘착하게’, (실제로는 ‘굴욕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해서는 안 되는 이치를 담고 있는 진실. 그것의 예리하고 강인한 움직임. 소녀의 최후 관통은 바로 목숨입니다. 의도 여부와 상관없이 그 속에서 완성된 답을 얻었으니 과연 통쾌하고 황홀한 관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뿐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고민하는 힘
강상중 지음, 이경덕 옮김 / 사계절 / 2009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제목만 보고 지나치다가 강상중이란 저자 이름 확인하고 책을 집어들었습니다. 함부로 책 쓰지 않았을 것이라는 신뢰 때문입니다. 

2. 처음 부분은, 진지함에 날카로움과 깊이가  따르지 못한다는 인상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이는 아마도 나쓰메 소세키와 막스 베버를 자기 앞에 세운 그의 필법 때문일 것입니다. 더 나아가 제가 그 두 대가를 잘 모르기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느릿느릿 읽어 나아가는 동안  저자가 말하듯 저 또한 전형적인 slow starter 라는 사실에 주의하면서 점점 깊은 공감의 바다로 갈앉았습니다. 드디어, 마지막 장. 아, 그래, 늙어서 '최강'이 되라, 그렇지! 그 동안 제 인생의 화두였던 두 마디를 이렇게 딱 집어서, 먼저  만천하에 돋을새김을  해주는 선배가 있으니 아직도 세상의 쓸쓸함은 견딜 만하구나,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1) "교란 하는 힘"을 지닌 노인으로 살자.

(2) "뻔뻔하게" 살자. 

두 가지 모두 만만치 않은 내용을 지닌 말입니다. 느끼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적어도 제게는 천하의 의미심장함입니다. 오십대 중반 의자(醫者)인 제게 (1)은  대승적 삶을 정향하는 준엄한 과제입니다. 오랜 우울증 병력이 있는 제게 (2)는 실존적 삶을 정향하는 현실적 과제입니다. 목하 용맹정진하고 있습니다.

3. 만 원 미만의 돈으로 이런 행복을 누릴 수 있어 감사하며 다시 한 번 책을 집어 듭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뇌 과학의 함정 - 인간에 관한 가장 위험한 착각에 대하여
알바 노에 지음, 김미선 옮김 / 갤리온 / 2009년 8월
평점 :
절판


 

1. 현대 학문의 거대한 흐름에서 뇌과학을 제외할 수는 없습니다. 정신계의 큰 스승인 달라이 라마가 이런 흐름을 주도하는 한 축이라는 사실은 뇌과학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를 말해줍니다. 뇌과학 연구 덕분에 많은 사실들이  새로이 밝혀지고 있으며 관련 학문으로 영향이 파급되고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뇌과학 관련 연구들을 접하다 보면 뇌의 위치가 마치 빅뱅 이론의 폭발점과 흡사하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인간 생명과 인간의 삶 전체가 뇌에서 터져 나온 작은 우주처럼 여겨진다는 뜻입니다. 이는 아마도 연구 주체 대부분인  서양인들이 지닌 주객 이원론과 기독교 무의식이라는 토양에서 비롯하였을 것입니다.  

물론 인간이 인간의 정신을 뇌과학에 기대어 연구할 때 뇌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어쩌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겠지요. 그리고 뇌에 집중해서 정신을 말하는 동안 다른 요소를 언급하지 않았다고 해서 오직 뇌만을 정신의 좌소, 나아가  창조자로 여겼다고 몰아붙일 수 없는 측면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지금의 뇌과학은 몸의 다른 부분에 대해 배타적 지위를 뇌에 부여한 게 사실입니다.  정신을 뇌가 빚은, 적어도 뇌에서 빚어진 무엇(being)으로 인식한 것도 사실입니다. 서양인, 특히 지식인 특유의 홀로주체적 사유법, 명사적 어법에 갇힌 탓입니다. 알바 노에는 바로 이 부분을  정조준하고 있습니다. 

2. 정신(마음)은 뇌의 산물(being)이 아니고 뇌를 포함한 몸 전체와 환경이 주고받는 상호작용(doing)이라는 게 저자의 생각입니다. 상호주체적 이고 동사적인 사유법에 터잡고 있지요. 더 나아가 마지막에 담담히, 그러나 단호하게 마무리 하듯 "우리는 세계 속에 있으며 세계의 일부이다. 우리는 집에, 정겨운 우리 집에 있다."고 함으로써 장(field) 사유에 깃듭니다. 

사실 이런 생각은 우리 동아시아 사람들에게 아주 익숙한 것입니다. 알바 노에가 매우 논쟁적인 자세로 대립각을 세우고 각종 증거와 반론, 그리고 절묘한 비유로 주류 지식판을 뒤흔들지만 읽는 내내 제 마음은 고요했습니다.  이따금 마치 자신의 말을 못 알아듣는 상대방에게 반복해서 같은 말을 하는 듯한 인상마저 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서양인 동료들을 향한 그의 정념적, 정치적 글쓰기에 공감했기 때문에 정성껏 읽었습니다. 

군데군데 나타나는 촌철살인의 묘사, 은유가 저자의 비범함을 한껏 드러내주는 한편 독자의 읽는 묘미를 더해주기도 합니다. 특히 에필로그 첫머리에 나오는 "우리는 경계가 유동적이고 성분이 변화하는 여러 패턴의 능동적 맞물림이다."라는 표현, 가히 전권을 한마디로 요약하는 절창(!)입니다. 아, 맞물림! 이거, 원어가 무엇인지 모르지만 번역된 우리말로서도 기막힌 표현 아닌가요....... 

어린아이들은 세계와의 연속성 속에서 사고한다, 정신은 오솔길 내기이다, 주지주의는 인간을 삶에 대한 초보자로 만든다, 생명은 의식의 하한선이다, 보면 믿는 게 아니라 믿으면 보인다, 노련한 선수는 뇌가 할 일을 과제가 대신한다, 그것은 접근의 문제다, 현실이 우리를 정박시킨다, 태초에 상황이 있었다.......기억나는 것만 대충 헤아렸는데, 청량한 소다수 맛이 나는 문장들입니다. 

3. 그리고 무엇보다, 맨 마지막, 주석 달기의 신선함! 13,800원이 제공하는 즐거움 치고는 실로 짜릿합니다. (그야말로) 사족: 더러 번역의 문제가 있긴 하되 옥의 티로 넘길 수 있으나, 역자 후기에서 번역자가 저자의 정념과 정치의식을 "눈 뜨기의 크고 작음' 수준으로 격하(?)시킨 부분은 동의할 수 없군요.  왜냐하면 이 것은 근본적인 세계관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정(精) 일독을 삼가 권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유비쿼터스 시대의 지식생산과 문화정치 - 예술-학문-사회의 수평적 통섭을 위하여 문화과학 이론신서 55
심광현 지음 / 문화과학사 / 2009년 8월
평점 :
품절


 

1. 쉽지 않은 책입니다. 각기 쓴 논문/에세이 형식의 글을 묶어놓았기 때문에 유연한 흐름을 타고 읽음으로써 난해함을 상보하는 이익이 차단되는가 하면  일반인을 독자로 상정하지않았기 때문인지 거침없이 나타나는(!) 개념과 내용의 불친절함도 있습니다.  그러나 전체적 맥락을 잃지 않고 울퉁불퉁하게 넘어가면서 읽다 보면 거듭 나타나는 저자의 사상과 문제의식이 선명하게 들어오므로 마다마디 어려운 부분들을 미련없이 제끼고 나아갈 배짱(!)이 생깁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책이지 싶습니다. 

2. 나카자와 신이치 이야기를 하면서 말씀드렸듯 제 학문 간, 사상 간 가로지르기는 이미 대세가 되었습니다. 그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필수적으로 전개되는 쌍방향적 사유, 은유적 소통과 그 너머의 역설적 화해, 그로 말미암은 수평적 통섭(通攝)은 바야흐로 인류의 존망과 연결되는 critical 한 화두입니다. 

이는 단순히 학문이나 기술의 문제를 넘어 문화정치적 권력과 자본의 거대 시스템적 행태의 문제이기 때문에 향유하면 더 좋고 없어도 그만이라는 차원에서 다룰 것이 결코 아닙니다. 개인과 사회, 사회와 자연 사이의 인간, 문명과 생태계, 유비쿼터스적 전천후 행복과 완벽 독재의 딜레마.......이 모순을 꿰둟고  흐르는 문제적, 그리고 해결적 상상력의 한 복판에 예술을 터 잡게 하는 안목의 적확함에 공감, 동의하면서 결단하고 실천해야 할 과제입니다.

물론 독자의 다양한 사회적 위치와 관심사가 각기 다른 반응 스펙트럼을 낳겠지요.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인류의 사유 역사가 오늘 여기서 우리에게 제압적 서구문명의 형식논리, 단치(單値)논리를 극복하고 모순을 끌어 안아 전체를 사고하는 (은유, 나아가) 역설의 논리, 다치(多値)논리 시대를  열도록 요구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요구에 부응하여 각자 자신의 처지에 맞게 앞서거니 뒤서거니 자유로우면서도 든든한 연대를 이루어 참으로 사람의 얼굴을 한 위대한 통섭의 시대를 열어야 합니다.

3. 책의 내용 가운데 한의사로서 제가 눈여겨 본 대목은 기(氣), 천지인(天地人), 주역의 음양상보, 한의학의 흑상(black box) 시스템론 등으로 동서 사상의 통섭을 이야기한 부분입니다. 물론 아직은 선언 수준에 지나지 않지만 이런 과정에서 한의학은 분명하고도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참여할 주체임에 틀림없습니다. 한의학을 어떤 이들은 사이비 의학이라 매도하지만 동아시아 고등 문명을 수천 년 동안 지탱해 온 보건의료 체계임을 인정하는 한 함부로 폄훼할 수 없는 아우라가 존재합니다. 무엇보다 한의학은 기술과학과 인문과학이 융합되어 있는 사유체계라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사유를 꿰뚫는 쌍방향 흐름, 역동적 맞물기가 가히 예술적 차원까지 획득함으로써 이 책이 지향하는 바와 명실상부하게 맞아떨어지는 면이 있습니다.  

하여 이 책을 읽는 내내 제대로 된 한의사라면 한약과 침으로 병 고치는 기술자를 넘어서 시대의 요구를 담은 고민에 동참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다행히 지난 90년대부터 20년 가까이 우수한 인재들이 한의학 주체로 흘러들면서  기본적 인적 토양은 형성되었다고 봅니다. 문제는 그들이 어떻게 문제 의식과 실천의 네트워크를 만들어 나아가느냐 하는 것이겠지요. 한의학도 자신들은 물론 사회 전체가 이 문제에 깊은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4. 관심사, 전공, 지적 수준과 무관하게 이 책을 읽으면서 함께 고민을 나눌 수 있다면 참 좋겠다, 생각합니다. 이웃의 통(通) 일독(一讀)을 삼가 권하면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카자와 신이치의 예술인류학 - 예술학과 인류학의 창조적 융합을 위하여
나카자와 신이치 지음, 김옥희 옮김 / 동아시아 / 2009년 7월
평점 :
절판


 

1. 제 나이 열 아홉 때 운명처럼 한 사유의 단서가 찾아들었습니다. 읽다 버린 일간 신문 쪼가리에 실린 글 한 편이 우연히(!) 눈에 들어 왔습니다. 어떤 사학자가 쓴 칼럼 비슷한 것이었습니다. 내용은 지금 거의 기억나지 않습니다. 다만 역사에서 변성(變性)과 항성(恒性)이라는 대칭적 논의가 전개된 글이었다는 기억이 이상하리만치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을 뿐입니다.

그 때 이후 35년 동안 이 대칭성의 사유는 제 삶에서 거대한 흐름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법학을 공부할 때도, 신학을 공부할 때도,  한의학을 공부할 때도 이 흐름은 연속과 불연속의 거듭되는 겹침을 통해   절차탁마 되어 왔습니다. 때로는 들뢰즈한테서 때로는 하이젠베르크한테서 때로는 융한테서 때로는 김상일한테서 때로는 김상봉한테서 때로는 황진이한테서 때로는 <충청도 아줌마>한테서 이 도저한 쌍방향 사고, 모순을 끌어안고 역설을 달여내는 사고, 대칭구조를 자발적으로 깨뜨리는 사고, 끊임없이 유동하는 가로지르기의 사고를 익히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통시성과 공시성, 다양성과 통일성, 주체와 객체, 개체와 전체, 초월과 내재, 발전과 순환, 구조와 운동, 이론과 실천, 형식과 내용, 분석과 종합, 우연과 필연, 당위와 자연, 사건과 해석, 입자와 파동.......이루 다 헤아릴 수 없는 대칭이 존재할 때 그 사이를 요동하며 뒤틀리며 공중제비 하며, 시중(時中)하는 조화, 선택, 양보, 선취, 공존, 희생을 넘나들었습니다.  모호함에 대한 혐오를 참지 못하고  쾌도난마 형식논리를 타고 여러 사람 다치게 하기도 했으며 , 양비론의 누명을 뒤집어 쓰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좌충우돌 20대와 30대를 거친 후 40대에 한의학에 발을 들여놓았지요. 

기대가 컸습니다. 음양론이란 대칭성에 터 잡은 학문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전통적인 음양론은 음양의 대대(對待)라는 구조 중심의 사고에서 전혀 벗어나 있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다양성 운운하며 오행 이야기가 중구난방으로 펼쳐지는가 하면, 형상(形象)이나 사상(四象)으로 사유틀을 고정하는 흐름이 워낙 강해 예과 1학년 때 이미 "이건 아니지." 결론을 내려버렸습니다. 그리고 한의학 사상의 슈퍼텍스트 <황제내경(黃帝內經)>의  맞은편에  서 있는 <상한론(傷寒論)>이란 텍스트를 잡았습니다. 여기서 비로소 저 쌍방향사고의 진수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하여 지금 사람의 생명과 병을 읽는 감각, 약과 침을 쓰는 이치, 우울증 환우와 상담하는  논리 모두가 <상한론>의 사상에 터 잡고 있음은 물론입니다. 앞으로도 엄청나게 넓고 깊은 미지의 지평으로 나아가야 하겠지만 <상한론>은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 고통과 깨달음, 질병과 정치, 문화와 과학, 기술과 영성, 의학과 예술을 통섭(通攝)하는 사유와 실천의 고향이 될 것입니다. 여전히 들뢰즈, 하이젠베르크.......들에 귀 기울이며 <상한론>의 경계를 넘나들겠지요.

2. 이 와중에 접한 책이 나카자와 신이치의 <예술인류학>이었습니다. 각각 독립된 글을 모은 책이어서 깔끔하게 잡아채는 끝맛이 없긴 하지만 이런 주제에 대한 기대로 흥미롭게 읽는 데는 문제가 없습니다. 좀 더 나아간 논의를  전개한 글이 하나만 더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 빼고는....... 특유의 섬세한 관찰에서 나오는 언어에 대한 이해, 원시시대의 동굴과 유럽의 광장을 연결한 이야기, 예수와 기독교 이야기, 토러스-뫼비우스 띠-크로스캡 이야기, 플라톤의 이데아와 코라 이야기 등 모두 다글다글한  내용입니다.

개인적으로 제 경우 한약 처방에는 이미 "모순을 끌어안은 채 전체 사고를 하는 직관지"(본문 74 쪽)가 발휘된 지 오래입니다. 지금은 한창 상담의 예술성을 심화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물론 형식에서도 내용에서도 그리 돼야 하겠지요. 제 상담에는 두 개의 기둥이 있습니다. 은유치유와 역설치유입니다.  '바로 이게 예술성이다' 하고, 나카자와 신이치를 읽다가 문득 깨달았습니다. 

이 책에는 모든 언어는 은유와 환유라는 말이 있습니다. 구태여 문학의 차원에 기대지 않아도 말이나 글을 통한 치유상담은 근본적으로 예술인 셈입니다.  게다가 의자(醫者) 자신의 이야기를 함으로써 상담 내용 자체가 은유가 되게 하면 더 역동적이겠지요. 나아가 병과 가치의 모순을 모두 받아들여 전체 사유를 하게 하면 은유의 절정인 역설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병과 사람이 모두 흘러  통섭(通攝)의 강을 이룹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