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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산, 그 숲으로 배어들고 배어나는 내 모든 일정을 끝냈다. 마무리는 해발 600미터 이상인 산 다섯, 그러니까 청계산·관악산·수락산·도봉산·북한산을 계곡으로 올라가 다시 다른 계곡으로 내려가기였다. 계곡은 내를 내고, 응달을 안음으로써 버섯을 피워 올리기 좋은 환경이다. 숲을 향하는 가장 큰 목적이 곰팡이가 이룩한 생명 네트워크에 참여하기이므로 이 마무리는 내게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가장 높은 북한산 계곡이 마지막 순서다. 성탄절 오전에 정릉천을 따라 올라가 오후에 북한천을 따라 내려왔다.

 

돌아보면 청계산은 없는 길을 만들어가며 올라갔던 기억이 짜릿하다. 관악산은 서울대 수목원이 제시한 우회로를 마다하고 막아 놓은 길 진입 방법을 기어이 찾아내 혼자 내려왔던 기억이 뿌듯하다. 수락산은 지도에는 없고 아는 사람들만 알아 호젓한 오솔길을 누군가 알려주어 신나서 내려왔던 기억이 탱탱하다. 도봉산은 무수골 올라갈 때 디오니소스적 정취에 젖었던 기억이 황홀하다. 이번 북한산은 눈 쌓인 계곡을 조심조심 오르내리는 와중에 들었던 얼음 아래 물소리가 지금도 들려오는 듯한 기억이 새롭다.


 

북한산 북쪽 사면은 눈이 녹지 않아 꽤 힘들었다. 아이젠이나 체인을 장착한 등산화가 아니고 평범한 운동화를 신었기 때문이다. 물론 차림새 전체가 도시 외출 복장이었으니 더욱 조심스러웠다. 미끄러지지 않으려 애쓰며 내려오는 나를 보며 내 또래 남자 사람 하나가 고개를 갸웃한다. “이런 날 등산하시면서···” 나는 말했다. “, 저는 등산이 아니고 출근입니다. 엿새는 도시로 출근해 사람을 돌아보고, 하루는 산으로 출근해 숲을 돌아봅니다.” 그의 다음 표정에 나는 관심 두지 못했다. 심하게 배가 고파서다.

 

인간 본성을 바꾸기라도 하려는 듯 내가 곡진하게 숲으로 배어드는 까닭은 숲이 내 존재 근거며, 내 생명이 숲 한 부분을 이루며, 숲과 단절된 상태로는 살 수 없다는 진실을 확인하며, 파괴된 진실을 직시하고 복원하는 길을 모색하기 위해서다. 이런 인식과 실천은 내가 능동적·적극적으로 일으키지 않았다. 무고하게 수탈·학살당하는 존재가 들려주는 소리를 듣지 못하면서도 듣는귀를 선물로 받았기 때문이다. 그 선물은 내 생을 관류하는 상실에 실려 증폭되며 다가왔다. 대폭발 지점은 다름 아닌 4·16이었다.

 

4·16을 기점으로 숲과 무고히 학살당한 사람은 동일 감수성으로 이어진다. 숲과 학살당한 세월호 아이들은 근본에서 같다. 학살당한 사람이 푸나무처럼 하찮다는 뜻이냐 물을 수 있으나, 이 말은 푸나무가 학살당한 사람만큼이나 고귀하다는 뜻이다. 애통한 각성은 세월호 아이들이 학살당한 뒤에야 들이닥쳤다. 없는 존재로 여겨지지만, 실제로는 숲과 학살당한 사람이 있는 존재를 존재이게한다는 진실, 생명은 비생명에서 왔고 그 둘이 상호작용으로 창발한다는 지구생태계 진리에 참여할 표상을 4·16이 건넸다.

 

4·16 이후 지속적인 관심사는 학살당한 사람과 나 사이 관계 설정 문제였다. 이 관계 문제는 내 생명 윤리를 재구성하는 중대 사건이라는 사실만으로는 부족한, 더 깊은 존재론적 문제다. 단도직입으로 말하자면 지금 여기 없으나 분명히 존재하는 그 학살당한 사람과 어떻게 소통할 수 있느냐에 내 관심이 쏠려 있었다. 알아차릴 수 없는 기호로 다가오는 존재와 인과 세계 가로질러 소통할 길은 있는가. 이 고뇌는 인과율로는 알아차릴 수 없다는 공통점 덕에 종 너머 존재로까지 이어졌다. 숲과 소통할 수 있는가.

 

산 사람끼리도 소통이 되지 않는데, 하물며 죽은 사람, 심지어 숲과 소통하기를 바라다니. 어찌 보면 이 질문은 물색없고 부질없다. 물색없고 부질없기는 장구한 세월 문명 인류가 구가해온 통속한 생존 인간중심주의 소통 개념을 이길 그 무엇이란 없다. 지금 우리가 당면한 문제로서 소통은 저 소통이 아니다. 학살당한 사람이 부재함으로써 존재하는 피해자로서, 학살한다는 의식조차 없이 마구잡이로 숲을 학살하는 가해자로서, 자기 대멸종에 다른 생명까지 끌어들인 범죄자로서 삼가 엎드려 구하는 소통이다.

 

그 소통은 포타와토미족 주술사도 아인슈타인도 부처도 갈 수 없는 시공에서 창발한다. 패자 정체 의식과 승자 부채 의식이 화쟁하는 시공에서 네트워킹한다. 창발 네트워킹은 평등 위계로 겹을 이루고 위계 평등으로 결을 이루어 영웅주의와 개체주의를 전복한다. 소소한 존재가 더불어 무리를 이루어 미미한 냄새로, 소리로, 맛으로, 살결로, 모습으로 나지막이 서로 배어들고 배어난다. 이때 비로소 생사와 종 경계가 무너진다; 언어와 언어적 인식, 그리고 총체 인식마저 넘어선 실천으로서 통짜 소통이 격발한다.

 

통짜 소통 길을 궁구하는 동안 나는 뜨르르한 제국 지식인들이 최근에 쓴 인류학 서적들을 숙독했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답은커녕 실팍한 단서조차 없었다. 그들은 총론을 여러 변주로 현란하게 되풀이했다. 이원론을 극복한 정확한 용어조차 지니지 못하고 있었다. 식물 너머까지도 언급하지만, 고작해야 동물 주체성까지만 도달해 있었다. 제국과 식민지 경계에 내몰려 간신히 살아가는 모순으로서 자기를 옹글게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안은 나무 사람만이 사람 나무와 더불어 통짜 소통을 일으킬 수 있다.

 

나무 사람이 되려면 나무 향해 사람을 열어야 한다. 열기는 비우기다. 비우기는 지우기다. 지우기는 죽이기다. 스스로 죽이고야 사람은 나무에 가 닿는다. 스스로 죽이기는 죽임당한 존재가 부재 처리되는 과정에서 구성된 저항 윤리다. 이 저항 윤리는 식민 또는 매판·부역 프레임에 맞서 나무 생명 본성이 전해주는 혁명 강령을 전폭으로 수용한다: 분산(분권) 시스템, 공동체 네트워킹, 군집 지능(집단 지성). 온전한 자주·민주주의는 숲에서 왔다. 숲은 제국도 매판도 학살도 용납하지 않는다. 바로 그 숲이 너와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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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임을 전복하려면 기존 프레임이 지닌 어둠을 정확히 꿰뚫어야 한다. 길목에 제대로 서야 전복 들머리가 바로 보이는 법이다. 어디서 어떻게 그 길목을 제대로 확인할 수 있을까? 들으려고 작정하지 않아도 혹시나 하면서 들어간 시공에서는 언제나 침묵만 흐른다. 제의를 타고 강림하는 신은 잡귀다. 나는 오랜 숲을 떠나서 숲만큼이나 극진히 찾던 도심 속 서점으로 간다.

 

타자들의 생태학(필리프 데스콜라, 2022)을 찾으러 인류학 코너로 향한다. 글 읽기를 멈춘 바로 그 자리에 다시 서기 위해서다. 책이 쉽게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싶은 바로 그 순간, 전혀 엉뚱한 일이 벌어진다. 수년 동안 인류학 코너에 잘못 꽂혀 있던 독을 품은 식물 이야기(임경수·손창환·김원학, 2014)가 와락 눈길을 잡아챈다. 다음 순간 천둥소리가 들려온다. 그 책을 집어 들자 이내 타자들의 생태학도 두 팔 벌려 달려든다. 나는 여기가 길목임을 즉각 알아차린다. 청안한 심경으로 국시 집을 찾는다. 막걸리부터 벌컥벌컥 들이켠다.

 

사실 내가 글 읽기를 전격 중단한 계기는 알고 있다는 착각(질리언 테트, 2022)에 있다. ANTHRO-VISION을 이리 평평하게 번역한 내막은 알지 못하지만, 제목 자체가 전달해줄 수 있는 핵심과 중량에서 한참 벗어난 실패로 보인다. 책을 읽는 내내 심사가 불편했다. 그 중 미군은 한국전쟁에서···인류학자를 활용했다.”라는 문장이 유발한 모멸감은 실로 맹렬했다.

 

인류학이라는 학문은 서구 제국주의 마름 이론으로 시작되었다. 200여 년 지나면서 본디 모습을 많이 벗어던졌다고는 하지만, ‘인류라는 용어에 붙잡혀 있는 한 여전히 근본 오류와 한계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그 서구 인류학이 나와 같은 인류에게 인류학 관지를 전수해준다. ‘인류들은 서구인들이 지은 책을 번역하고 그 번역본을 읽음으로써 감사히 진실 앞에 선다. 인류는 자기 힘으로 이런 진실을 밝히지도 전수하지도 못하는가? 이런 진실은 인류본성에 속하지 않던가? 내 불편함, 모멸감은 바로 여기서 비롯하였다.

 

일제 식민지였던 우리 경우, 미군정이 식민지 부역 집단을 비호하고 식민지 체제를 승계토록 해 명실상부하게 자주독립으로 나아가는 길을 원천 봉쇄했다. 그 덕에 부역 집단은 사회 모든 분야 지배층으로 승승장구하고 제국 학문과 교육 구조는 엄존한다. 부역 세력 후손은 본국인 제국으로 유학해 절대다수 인민을 영구히 인류로 붙박아두는 학문과 교육을 이어가고 있다.

 

근원적으로 성찰하면, 보수 진보 가림없이, 나아가 개인적으로 부정해도 서구 또는 일본에서 배워 와 한국에 그냥 써먹는 학문·교육 자체가 부역·매판성을 지닌다. 사회과학이 특히 그렇지만, 인문학도 심각하긴 마찬가지다. 심지어 자연과학도 청정지역은 아니다. 누구보다 이 문제에 민감한 나조차 최근 몇 해 동안 이 나라에서 벌어진 크고 작은 사건을 경험하면서 진실이 지닌 결과 겹을 옹글게 마주할 수 있었다. 매판 마르크시스트, 좌파 부역자가 준동하는 꼴을 목격하고야 탄식하며 절망했다. 거기서 나를 뺄 수 없다는 사실이 더 참담했다.

 

철부지 시절은 그렇다 치더라도 치열하게 읽고 쓴 중년 이후 삶에도 빈틈없이 배어 있는 식민지 냄새가 내 체취를 앗아가 버렸다. 최근 공부한 낭·(식물), 돌꽃(지의), (), 곰팡이(), 버금바리(세균/박테리아), 으뜸바리(바이러스) 거의 모든 지식도 서구나 일본에서 왔다. 이렇게 한 방향으로만 흐르는 문화가 쌍방향으로 흐르는 날이 오기는 할까. 아득하다는 생각이 너무 깊다.

 

편향으로 흐르는 문화는 압제하는 권력이며 착취하는 금력이다. 제국과 자본 겹 굴레를 쓰고 살아가야 하는 인류에게 이 문화는 중독을 부르는 마약으로 작용한다. 마약을 사서 팔아먹는 부역 세력은 학문과 교육, 언론과 사법, 종교와 예술로 포장해 식민지 체제 영속화를 꾀한다. 부역/매판 정치경제학을 사회 해석과 변혁 범주로 사용하지 못하도록 모조품 제국 이론을 끊임없이 재생산한다. 이 진실을 깨달은 인류만이 자기 눈으로 자기 세계를 보고 바꿔낼 수 있다. 각성한 주체 인류자신 손으로 진정 인류학을 빚어야만 한다.

 

진정 인류학을 빚는 인류는 식민지 상태로 살아가는 모든 존재다. 여성, 아동, 성소수자, 장애인, 유색인···. 인간 너머 낭·, 돌꽃, , 곰팡이, 버금바리, 으뜸바리, 그리고 무엇보다 무고히 살해당한 모든 존재가 진정 인류다. 진정 인류란 진정 네트워크를 일으키는 존재다. 진정 네트워크는 제국 패거리와 맞서 싸우는 평등한 공생·화쟁 공동체다. 낮고 작은 이야기다.

 

내가 짐짓 타자들의 생태학에 다가간 까닭은 이 진실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제국 시민이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보겠다는 심산. 진정 네트워크는 한발 앞서 내게 독을 품은 식물 이야기라는 이정표로써 들머리를 가리켰다. 내가 갇혀 있었던 어둠, 깨달음으로써 처하게 된 모순, 역설을 창조해야 하는 천명을 알려주었다. 산 존재와 죽임당한 존재, 인간과 인간 아닌 존재, 생명과 비생명 존재 사이 공생·화쟁 운동을 일으켜 인간이 세운 제국에 맞서는 격을 띄웠다. 첫걸음은 부역/매판 정치경제학인가? 변방 무명 임상의가 할 수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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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읽지도 쓰지도 않은 지 100일이 넘었다. 극진히 관심 둔 곳은 서울 산이었다. 서울 안과 경계에는 표고 200m 이상 산이 22개 있다: 봉산(209), 백련산(228), 앵봉산(235), 남산(271), 망우산(282), 대모산(293), 아차산(296), 안산(296), 구룡산(308), 우면산(313), 천림산(327), 인왕산(338), 백악산(343), 용마산(348), 호암산(393), 삼성산(481), 불암산(510), 청계산(617), 관악산(632), 수락산(641), 도봉산(740), 북한산(836). 이미 넘은 산을 제외한 나머지 모두에 배어들고 배어나는 일로 더 깊이 침묵했다. 마침내 1127일 망우산에서 일정을 마무리했다. 모두 합해 8,937m를 넘은 셈이다. 딸아이가 웃으며 말했다. “고산증 없는 wellbeing 히말라야네!”

 

마지막 일정을 망우산으로 잡은 까닭이 있다. 수많은, 특히 버려진 무덤으로 말미암아 더 육중한 고요에 잠겨 있는 산이기 때문이다. 스치는 행인 이외에 인기척 느낄 일 없는 길가 무덤이든 이목 끄는 표지판까지 갖춘 역사적 인물 무덤이든 고요하긴 마찬가지지만 들으려는 산 자 발길이 끊어진 무덤은 인간 윤리, 그 하찮음을 압도적으로 깨우친다. 산 자가 스스로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말하는 삶 이야기 아닌 죽은 자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말하는 삶 이야기를 알아듣지도 못한 채 깨닫기에 한사코 그 무덤 사이를 지나고 또 지난다. 지나는 동안 문득 깨닫는다: 모든 산은 그 자체로 무덤이다. 무언 무덤에서 인생 언어가 돌연 우꾼한다.

 

용마산과 아차산 사이 고랑을 따라 올라가 능선 가로질러 아차산과 용마산 그리고 망우산 사이 고랑으로 다시 내려간다. 적정 지점에서 둥글게 돌아 아차산과 용마산을 이어주는 능선길로 되돌아온다. 이 계획에 문제가 생겼다. 지도에는 길이 있는데 아무리 찾아도 없다. 물어볼 사람도 없다. 그 상황에서 택할 수 있는 대안은 둘: 왔던 길을 되돌아가거나 눈에 보이는 다른 길로 감으로써 행로를 수정한다. 이는 안주 아닌가. 나는 안주하는 생을 거절하고자 이 침묵을 택했으니 그럴 수는 없다. 내 길은 하나다: 길을 스스로 만들기. 나는 오로지 내가 향하고자 했던 능선 방향만 응시한 채 망설이지 않고 절벽에 가까운 사면을 오르기 시작했다.

 

길이 될만한 공간을 탐색하면서 나아갔지만, 순간마다 아뜩해지곤 했다. 돌아가면 안 된다는 절박함으로 한발 한발 올라갔다. 얼마를 헤맨 끝에 길일 수밖에 없게 생긴 지점에 이르렀다. 거기서 보니 본디 정했던 능선길과 만나는 방향이 순식간에 눈으로 들어왔다. 그 방향으로 한참 걸어가자 마침내 저만치 앞에 사람 모습이 어른거린다. 숲은 내게 길을 감춤으로써 스스로 길 만들 기회를 주었다. 왜 글을 읽어야 하는지, 왜 글을 써야 하는지, 여태까지 해온 식에 안주해서는 답이 나오지 않으므로 새로운 길을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고 명토 박아주었다. 숲, 곧 사인칭 관지는 내게 오늘을 전복 카이로스로 해석하도록 이끌었다. 큰 틀이 결정됐으니 시름 하나 잊는다忘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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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대 중동 마루 넘어 70대로 속절없이 미끄러지던 어느 날 문득 나는 오랜 습관 하나를 정색하고 마주한다. 글 읽기와 글쓰기, 특히 직업도 아니면서 운명처럼 여겨온 글쓰기를 향해 질문한다. 왜 쓰는가? 필연으로 이어 질문한다. 마치 쓰기를 전제하기라도 한 듯 다른 사람 글을 왜 읽는가?

 

질문에 잠겨 나는 길게 침묵한다. 침묵 전 마지막으로 읽은 질리언 테트 알고 있다는 착각ANTHRO-VISION, 진은영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정화진 끝없는 폭설 위에 몇 개의 이가 또 빠지다가 예전 같으면 글쓰기를 기다렸을 테지만, 지금은 오히려 내 침묵에 무게를 더해준다. 여간해서 깨지지 않을 침묵 한가운데서 그 침묵을 위해 변명하려고 이 글 아닌 글을 쓴다.

 

나는 왜 침묵하는가? 글쓰기가 내게 무엇인지 답하지 않은 채 글쓰기를 계속해서는 안 되는 카이로스 상에 내가 섰기 때문이다. 건강하게 생각하고 활동할 수 있는 날이 얼마쯤일까 생각해보니 더는 미룰 일 아니라는 판단에 다다른다. 침묵하는 동안 답을 내려면 관지觀地를 바꿔야 한다. 죽은 내 관지에서 이미 지나간 내 삶을 거꾸로 들여다보는 사인칭 어법 아니면 안 된다. 사인칭 어법은 나도 아니고 남도 아닌 관지가 이끈다. 나는 이제 막 그 비대칭 대칭 세계로 들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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