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두구의 저주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제국주의 부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서구 지식인과 학자 담론은 자본주의, 그러니까 경제 환원주의 일색일까?

 

자본주의는 왜 그토록 지정학적 맥락이라는 현실에서 분리, 추상화됐을까? 자본주의를 한 시스템으로 바라보고자 하는 서구 근본주의 편향은 사악한 진면모를 감추려는 방편이다(세드릭 로빈슨). 이를 통해 우리는 서구 지식인과 학자 담론이 인종차별주의, 제국주의, 그리고 세계 권력 위계를 지탱하는 조직적 폭력구조를 본격적으로 다루기보다 추상적 경제 체제에 대해 논의하는 데에 더 편리하도록 기획돼 있음을 알 수 있다.”(166~171)

 

모든 문제를 돈 문제로 만들면 평평하고 납작한, 그러니까 매끄러운 추상 서사로 거짓말할 수 있다는 말이다. 누군가 특수한 사실을 이야기할 때 일거에 무너뜨릴 한마디는 다 그렇지 뭐.”. 본디 보편은 없다. 보편을 말하는 자가 사기꾼이다. 제국주의 사기꾼이 휘두르는 전가 보도가 자본주의다.

 

사기술로서 자본주의는 사회 모든 분야를 산업화로 낚는다. 산업화는 근대라는 신이 창조한 이적과 기사다. 의학이 예외일 리 없다. 산업의학은 평범한 사람 상상을 뛰어넘는다. 산업의학은 사회 전체를 의료화했다.

 

오늘날 인간은 태어나기 전부터 병원 관리를 받는다. 산업 출산은 기본이다. 이후 생애 모든 과정에서 의료 시스템 지휘 감독을 받는다. 마지막으로 죽음과 그 의식까지 병원에서 치른다. 마치 인간 생사 전체가 질병이기나 한 듯 온갖 일에 의료는 촉수를 뻗치고 돈을 빨아들인다. 생사를 볼모로 수탈하는 짓은 얼마나 반의학적인가. 산업의학은 돈에 미친 지배 권력과 엘리트 집단이 벌이는 협잡 수단이다. 그렇지 않은 면도 있다는 말은 구차하다. 이미 일극 집중구조가 굳어진 마당에 조선일보 문화면같은 부분이 있다고 한들 무슨 정당성을 확보하겠나.

 

날로 비대해지는 암 병원을 볼라치면 바로 그 암 병원이 암 덩어리라는 생각이 든다. 사람을 죽여가면서 벌어들이는 돈으로 향락적 삶을 구가하는 자들에겐 황금알을 낳는 거위일 테지만, 내게는 분노와 슬픔을 자아내는 어두운 동굴일 따름이다.

 

목하 암암리 성황리에 진행되고 있는 국가 주도 정신건강 사업도 마찬가지다. 토건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서구, 특히 미국이 짜놓은 정신의학 체계는 그야말로 장사판이다. 돈이 되면 넣고 안 되면 빼는 식으로 진열한 병명만도 370개가 넘는다. 370여 개의 돈줄 던져놓고 마음 아픈 사람 낚아 올리는 블루오션에 자본이 문어발 뻗는 일은 당연하다.

 

인간 몸도 맘도 제국주의 백색의학 돈벌이 수단이 된 오늘을 나 역시 살아야 한다. 불평등한 경제구조에 편승하고 다시 그 불평등을 촉진하는 제국주의 백색의학 거대한 힘 앞에서 변방 의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인욕하고 진욕(進辱)하는 길에서부터 반제국주의 녹색의학은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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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회룡 계곡 사건은 여전히 내 몸과 마음에서 현재진행형이다. 몸은 아직 여러 군데 상처를 끌어안고 있다. 길 없는 숲으로 들어가는 찰나에는 어떻게 그리 서슴없어지는지, 바위벽에서 굴러떨어지는 순간 , 이렇게 죽는구나!’ 하면서도 어떻게 다시 그런 행로를 밟아가는지, 직진 불가 절벽 끝에 섰을 때 들이닥치는 아뜩한 순간을 어떻게 가로지르는지, 지금도 내가 죽으려고 용을 썼지하며 살 떨곤 한다.

 

2023820일 일요일 아침, 나는 가장 익숙하고 안온한 경로를 생각하며 지난주 사건을 짊어진 채인 심신과 포옹한다. 아내와 딸이 나간 뒤 적당히 휴식을 취한 다음, 가벼운 걸음으로 광화문 교보를 향한다. 광화문 교보는 읽는 인간으로서 내가 마음 모신 지성소다. 책만 보지는 않는다. 버드나무 책과 의자 조각, 그리고 5만 살 나무 책상과 인사하는 일을 빼먹지 않는다. 리베카 솔닛 길 잃기 안내서를 사 들고 도심 나무 순례를 거친 다음 북촌으로 향한다. 그럴 생각 없었는데 정독도서관 안으로 들어간다. 몇 차례 대강 둘러본 기억 위에 샅샅이 둘러봐야겠다는 생각이 느닷없이 얹어져서다.

 

느닷없는 생각에는 그만한 까닭이 있었다. 내가 본 측백나무 중 가장 큰 측백이 입구 비탈길에 서 있었다. 수백 살 회화나무도 거기 있었다. 80살 등나무도 있었다. 안쪽에 보호수로 지정된 4백 살 이상 된 회화나무가 또 있었는데 커다란 벌집을 거느렸다. 서쪽 끄트머리쯤에는 처음 본 수양벚나무도 가지를 늘어뜨린 채 무성히 잎을 피워내고 있었다. 뒤로 더 깊이 들어가니 우물 돌이 있는데 그 옆 안내판은 이 땅이 김옥균, 서재필 소유였다가 나중에는 매국노 박제순 손에 넘어갔다는 내력을 담아 놓았다. 읽는 이마다 느낌이 다를 테지만 제국주의 공부와 부역 사사 쓰기를 하는 내게는 아리고 쓰렸다.

 


대체 어느 이름 없는 장소를 찾아가야 제국주의와 부역 역사에서 자유로운 내력을 볼 수 있단 말인가관립 한성중학교가 화동 이 자리에 세워진 1900년 박제순이 우물 돌에 제 글을 새겨 넣었는데 전후 관계소유권 이전 과정도 알 수 없다그저 그런 내력이 뒤엉키며 흘러온 역사를 생각할 때 식민지 오욕은 결결이 겹겹이 육중해진다는 진실을 알 수 있을 뿐이다여기에 개인사가 포개지면 잔혹으로 번진다.


나는 박정희가 제 아들을 위해 입시제도를 바꾸는 바람에 인생이 송두리째 뒤집힌 장본인 중 하나다. 여기 경기중학교가 1971년에 폐교된 원인은 1969년 중학교 무시험 입학제가 전격 실시된 데 있다. 경기중학교 들어가 가난과 소외를 극복할 꿈에 부풀어 있던 최상위우등생은 이렇게 독재자 한 사람 사욕에 희생돼 험하디험한 인생 경사로로 미끄러져 내려가기 시작했다. 망연히 서서 만일 그때 경기중학교에 갔다면 내 인생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생각해본다. 물론 가정은 부질없다. 다만 특권층 부역 집단이 어떻게 내 인생에 직접 개입했는지 확인함으로써 진실에 더욱 통렬히 다가갈 수 있을 따름이다.

 

북촌에서 나와 버스를 타고 정릉으로 향했다. 정릉은 조선 태조 이성계 계비 신덕왕후를 모신 곳이다. 이성계가 신덕왕후를 총애해 본디 사대문 안 정동에 있었으나, 신덕왕후와 심하게 척을 졌던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자 이곳으로 쫓아냈다. 능을 묘로 낮추고 석물을 가져다 청계천 다리 공사에 씀으로써 사실상 주인 없는 무덤으로 만들어버렸다. 광통교나 인근 벽돌에 그 석물들이 지금도 증거로 남아 있다. 현종 때 송시열의 주청으로 복권·봉안했다. 이런 우여곡절에 아랑곳없이 능 풍경은 아름답기만 하다. 그러나 이방원 아닌 토건 부역 후손들이 야비하게 밀고 들어와 지금 능 숲은 눌려서 숨이 막힌다.



하기야 어딘들 다른 풍경이랴. 조선 왕릉 40기가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자랑하지만, 막상 그 숲은 국적 없는 토건 바다에 떠 있는 섬에 지나지 않는다. 제국 과거는 현재와 연속을 이루면서 자부심에 찬 풍경을 과시하지만, 중첩 식민지 허울 대한민국 과거는 현재 삶과 유리된 예능 역사 담론에 불과하다. 무슨 출입 금지 푯말이 이렇게나 많은지. 내 역사와 더불어 호흡하지 못하게 한다. 박제 고가품 취급한다.

 

나는 1965년 서울 와 돈암동 산동네에서 10대를 보냈다. 집에서 작은 능선 하나를 넘으면 정릉 원찰인 흥천사, 다시 하나를 넘으면 정릉이다. 강원도 월정사 입구 마을에서 태어나 시생대를 살아온 내게 두 장소는 더할 나위 없이 정겨웠고, 그 풍경은 안온했다. 도시 빈민으로서 겪는 가난과 소외를 견디게 해주는 너른 품이었다. 요즘처럼 무슨 놀이기구나 먹을거리가 있을 리 없었다. 그냥 재잘거리며 오가고, 숲속을 쏘다니고, 먼 듯 가까운 옛 향기를 맡는 일만으로 유소년의 시간은 탱탱해졌다. 정릉 품은 백악산 자락은 그렇게 60년 가까이 내 생애 내력과 곡절에 엮이며 함께 서사를 구성해왔다.

 

나는 오늘 가장 익숙하고 안온한 경로를 따라 걸었다. 부작위 휴식이 아니라 작정하고 길 잃지 않는정도에서 길 잃어도 되는 저난도 일상을 살아 낸 셈이다. 사실 회룡 계곡 사건도 나를 피곤으로 몰아넣지는 않는다. 피곤하지 않으면 주파수를 낮출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삶을 살지 않으려 이런 흐름에 나를 놓아둘 뿐이다. 어찌 살든 걷고 머문 장소, 그 내력에 주의하며, 내가 걷고 머문 풍경, 그 곡절에 집중하는 동안, 내가 인간이며 남성이며 이성애자며 비장애인이라는 사실에 사로잡히지 않으려 한껏 실컷 생을 맡길 따름이다. 나는 완전하게 불완전하며, 불확실하게 확실한 도상에 있다.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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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 전통은 법학, 신학, 의학을 3대 신성 학문이라 일컫는다. 법관·사제·의사는 공식 업무를 행할 때, 가운을 입는다. 가운을 걸친 채 보수적이지 않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3대 신성 학문은 자연스럽게 보수가 된다. 아니다. 태생 자체가 보수 본성을 지닌다.

 

통속한 인식에서 보면 의학을 놓고 보수 운운하는 일은 낯설다. 정치와 무관한 학문처럼 보이니까. 제대로 알고 보면 의학처럼 정치적인 학문도 없다. 정치적 승자, 그러니까 지배 권력 시선으로 질병을 규정·진단·치료하는 서사가 의학이다. 현대 주류의학은 제국주의 주체 세력인 백인(특히 앵글로아메리칸남성·성인 의학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인류 최초로 금융제국을 이룩한 미국 지배 엘리트 집단이 초국적 제약회사와 보건성을 장악하여, 각종 질병을 만들어내기도 하고 없애기도 하면서, 세계를 지배하는 의학적 방식이다: 백색 가운 입은 자들이 제국에 부역하는 의료적 방식이다.

 

의학 제국주의에 맞선 혁명 운동이 다름 아닌 녹색의학이다. 반제국주의 녹색의학은 불의한 권력과 그 지배에 반대한다. 반제국주의 녹색의학은 인종주의를 거부한다. 반제국주의 녹색의학은 성 불평등을 용인하지 않는다. 반제국주의 녹색의학은 아이들 학대에 맞선다. 반제국주의 녹색의학은 정치적 평등·자유를 근본 기치로 삼는다.

 

반제국주의 녹색의학 정치적 기치 문제에서, 정치적 관점이나 성향 문제와 의학 내용 문제는 분리 불가능하다. 불의한 제국 권력이 토건으로 병을 일으킬 때는 의학 이론을 조작하기 마련이다. 진단과 치료에 동원되는 조건 구축 과정 또한 기획한다. 미국을 위시해 이른바 선진국이라 불리는 제국은 이렇게 병과 진단 기술, 그리고 (약이라 주장하는) 화학합성물질을 만들어 식민지에 하달한다. 각기 다른 여러 인종·남녀·나이 조건을 고려하지 않은 폭력이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이 의학 토건 볼모로 징발되어수탈당하고 있다. 반제국주의 백색의학은 학문을 조금 섞어 넣어 만든 신흥종교 체계다. 이 악성 이데올로기 쌍끌이기선저인망이 암과 DSM표 정신장애다. 우리는 제국주의 백색의학 정치적 정신장애, 정치적 암에 반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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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내 생각에 일대 전환을 가져오게 한 육두구의 저주에 나오는 이야기부터 다시 한다. 이 내용은 이미 쓴 <의학 제국주의: 제국주의 의학> 대부분을 그대로 가져왔다. 근간 문맥 형성에 앞서 서구의학, 그러니까 백색의학이 어떻게 역사적 사실로서 제국주의에 봉사했으며, 나아가 제국주의 한 축으로 작동했는가를 극명하게 드러내 주는 장면을 제시하기 위해서다.


백인 신체가 본디 생물학적으로 우월하다는 믿음은 미국 역사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주제다.···

  수 세기 동안 아메리카 토착민과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놀랄 만큼 불균형하게 많이 죽어간 여러 유행병을 거치면서 그 같은 믿음은 점점 더 굳건해졌다. 예컨대 남북전쟁 이후 노예 신분에서 해방된 자유민 유행병 치사율은 백인보다 2배 이상 높았다. 물론 이 결과는 주로 빈곤·영양실조·강제 이주·폭력 같은 구조적 요인이 어우러져 빚어낸 현상이지만, 타고난 생물학적 결함 때문이라고 해석되었다. 당시 의학계는 그런 해석을 지지했을 뿐만 아니라 부추기기까지 했다.···

  코로나19 팬데믹은 미국에서 인종 간 생물학적 차이에 대한 믿음이 여전히 널리 퍼져 있음을 확실하게 보여주었다. 미국 특정 인구통계집단이 자기네가 다른 집단보다 코로나19에 더 강하다고 믿는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새로운 증거가 연일 쏟아져 나왔다.”(육두구의 저주235~236)

 

대한민국 대부분 양의사가 한의사를 의사로 인정하지 않는 이유는 양의학, 그러니까 서구의학은 과학이고 한의학은 비과학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따져보자.

 

저들이 과학이라고 믿는 서구의학은 어디서 기원했을까? 질병이라는 부역자를 지지했을 뿐만 아니라 부추기기까지 했던 제국주의 제노사이드 현장, 바로 거기가 서구의학 뿌리다. 이 제국주의 의학이 세계체제로 뻗어나갈 수 있게 한 거대한 음모는 록펠러와 카네기가 합세해서 만든 <플렉스너 보고서>에 담겨 있다. USA 제국이 세계를 제패하는 과정과 제국 의학이 세계를 석권하는 과정은 본질상 같은 궤적을 그릴 수밖에 없다.

 

일제 식민지 시대를 관류하며 제국주의 특권층 부역자 대열에 자연스럽게 합류한 대표적 기회주의자 가운데 하나가 서구의학을 배운 의사, 그러니까 양의사다. 직업이 지니는 비 정치적 이미지 때문에 열외 대접받으며 순조롭게 승승장구해 여기까지 왔다. 저들이 얼마나 정치적 골수 특권층 부역 집단인지 모르는 사람은 여전히 모른다. 물론 알면서, 아니 도리어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각성 없는 회색지대 대중들은 더욱 양의대 몰빵으로 질주하고 있다.

 

결국 저들 서구의학·의료, 그 지향에 줄 선 인간 모두 제국주의 구조 일부일 뿐이다. 제국주의 구조는 그 자체로 오류에 기반하고 있다. 오류 구조에 충성하고 있는 서구의학을 과학이라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출산, 아니 임신에서 장례까지 인간 생사 문제를 모조리 병원이 거머쥐고 있는 과잉 의료 사회임에도 질병과 그 고통은 도리어 날로 증가하는 근저에 제국주의 사이비의학이 도사리고 있다는 진실을 통렬히 직시해야 한다.

 

백인이 신체적으로 유색인보다 우월하다 믿는 서구 제국주의 양의사에게서 배운 일제 양의사는 일본인이 신체적으로 조선인보다 우월하다 믿었다. 일본인이 신체적으로 조선인보다 우월하다 믿는 일제 양의사에게서 배운 한국 특권층 부역자 양의사는 한국 특권층 부역자가 신체적으로 생계형부역자나 부역 구조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지고자 애쓰는 사람보다 우월하다 믿는다. 이런 양의사가 고치는 질병은 무엇이며 퍼뜨리는 질병은 무엇인가.

 

아닌 사람도 있다고? 개인 하나하나를 겨냥한 이야기가 아니다.···양의사 집단은 통째로 특권층 부역자임을 겸허하게 인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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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나는 스스로 사람을 사랑해 사람이 된 나무라고 생각하며 산다. 내가 구성해온 본성 서사다. 그러나 엄연히 나는 사람이다. 그리고 사람으로서 사람 질병을 치료하는 의자다. 의자로 살면서 의자로서 제국주의에 기생한 무지렁이 부역자다. 그 참회와 속죄부터 해야 순서가 맞다. 순서를 삼가 따른다.

 

1. 한의학은 식물, 그러니까 녹색 생명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의학이다. 엄밀히 따지면 서구의학을 포함한 모든 의학이 그렇지만, 특히 한의학은 약물 처방을 대부분 식물 자체로 구성하므로 이렇게 말한다. 한의사는 약으로 어떻게 무슨 식물을 쓸지 고민하는 일로 평생을 보낸다. 식물을 훤히 꿰뚫고 있을 듯 보이는 바로 그 점이 함정이다. 필요한 사항만 알기에 식물 서사 전체는 잘, 아니 전혀 모른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으면서 아닌 듯 오랜 세월 살아왔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내가 나무 사람 아니, 사람 나무라고 한평생 굳게 믿으면서 살아왔기 때문이다. 내 믿음은 마냥 허구가 아니었으나 바로 그 점이 또 더 깊은 함정이었다. 전제하면 의심하지 않는 법이다. 그러던 어느 날

 

내게 알 수 없는, 그러니까 비 인과적 경로를 통해 식물이, 식물 본성 자체로 내게 들이닥쳤다. 그 순간부터 주업과 부업이 뒤바뀌었다. 광화문 교보 식물 코너에 더 이상 읽을 책이 없을 때까지 나는 식물 공부에 심취했다. 공부 중 아픈 사람이 치료받으러 찾아오면 맹랑한 부아가 치밀어오를 정도였다. 공부는 식물에서 멈추어지지 않았다. 지의류, 균류, 박테리아, 마침내 바이러스까지 나아갔다. 세계의식이 확장일로를 걷는 동안 인간중심주의는 남김없이 무너졌다. 자연스럽게 지구 생태계, 기후 재앙, 지구 위기 문제가 더한층 날카로운 화두로 자리 잡았다. , 이제는 구체적, 실용적 차원에 뿌리를 내려야겠구나, 하는 순간, 홀연히 내 눈을 사로잡은 책이 앞에서 본 육두구의 저주(아미타브 고시)였다.

 

육두구의 저주는 항일무장투쟁 선봉에 서셨던 증조부 덕분에 생긴 제국주의에 대한 정서 중심 시각을 단칼에 베고, 제국주의 속살을 결결이 들여다보는 이성적 시각을 구축해주었다. 더군다나 현실 문제를 자본주의라는 납작한 범주로만 해석하던 피상성마저 날려버렸다. 지구 위기 문제가 어떻게 제국주의에서 발원했는지 알고 나서 나는 <녹색의학 이야기>를 새로이 쓸 수밖에 없다는 자각 먼저 했다. 그 자각을 2023522일부터 717일까지 브런치스토리에 고쳐 쓴 글을 올림으로써 실행으로 옮겼다. 이제 다시 좀 더 핍진한 반제국주의 의학 서사가 되도록 또 한 번 고쳐 쓴다. 그 시작을 2023818일에 한다.

 

3. 나는 한의학으로 의료행위를 하는 의자다. 중첩 식민지 무지렁이 부역 의자로서 내가 처한 상황을 진단하고 처방하는 일이 과연 어떠해야 하는지, 스스로 묻고 답하는 작업을 하려 한다. 내 눈에 나를 둘러싼 풍경은 그대로 질병 포르노다. 병 걸리도록 중독적으로 유혹하는 의료독재 살풍경 말이다. 의료독재가 제국주의를 부추겨 극한 파국으로 밀어 가고 있다. 아니다. 거꾸로다. 어제 제국주의가 의료독재를 구성했으므로 오늘은 그 모진 업보다.

 

여기서 의학이란 무엇인가. 이치에 따라 말한다면 의학은 제국주의에 맞서 혁명하는 논리와 실천이어야 맞다. 현실이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의학, 특히 주류 서구의학은 도리어 제국이 부리는 마름으로서 수탈체제 거대한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나는 이를 백색의학이라고 이름한다.

 

백색의학에서 백색이라는 말은 크게 세 가지 함의를 지닌다. 하나, 제국 권력 집단이 혁명 운동에 가하는 탄압으로서 백색공포라는 백색이다. , 제국 자본주의라는 백색이다. , 화학합성약물이라는 백색이다.

 

백색의학에 맞서 질병 포르노 제국을 혁명할 논리와 실천을 창조하는 실재로서 나는 반제국주의 녹색의학을 제시한다. 그동안 온갖 잡다한 마케팅에서 이 말을 써왔음이 사실이다. 익히 알기에 나는 이 말을 재정의해 혁명 언어로 거듭나도록 한다.

 

반제국주의 녹색의학에서 녹색은 크게 세 가지 함의를 지닌다. 하나, 제국 권력 집단이 혁명 운동에 가하는 탄압인 백색공포에 항거하는 자유로서 녹색이다. , 제국 자본주의에 항거하는 평등·평화 팡이실이(networking)로서 녹색이다. , 치료를 가장한 제국 제약회사 화학합성물질 공격에 항거하는 진정한 치유와 박애로서 녹색이다.

 

대략 이런 방향과 내용을 담고, 흐르는 대로 생각을 펼쳐보려 한다. 때에 따라서는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digression)’도 없지 않다. 그동안 이런저런 지면, 하다못해 술자리에서 했던 말들도 나와 돌아다닌다. 그때 했던 말과 어긋나는 말도 한다. 함께 어우러져 이 묵시적 상황에서 내가 흔쾌히 결곡히 쉴 숨 길, 할 말 길, 갈 짓 길을 열었으면 좋겠다. 질병 포르노 식민지에 반제국주의 녹색의학 이야기가 팡이실이 길잡이로 읽힐 수 있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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