쩐빨 패거리(재계) 부역 서사

 

일족이 소유하고 경영하는 거대기업 집단을 재벌이라고 하는데, 이런 재벌은 대한민국에만 존재한다. 그래서 영어로도 chaebol이다. 이 재벌은 물론 말 자체뿐만 아니라 실재도 일제 財閥(ざいばつ/zaibatsu)에서 왔다. 일본 경우는 패전 후 미군정이 전쟁을 지원한 15대 재벌을 해체함으로써 사라졌다. 아직도 그런 유제가 남아 있으나 명목일 뿐이다. 일본에서 사라진 재벌이 대한민국에 엄존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대한민국은 경제적 측면에서도 여전히 식민지다. 현존 일본 우파보다 더 충성스러운 일제 주구가 대한민국 주류인 특권층 부역 집단인 사실을 고려하면 이런 말을 구태여 할 필요조차 없다. 참으로 더럽고 지질한 허울 국가다.

 

대한민국 재벌은 이름과 소유·경영구조만이 아니라 돈 자체를 일제에 부역해서 가져왔다. 일단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재계 부역자 명단부터 본다.

 

재계 [55]

 

강번 강창희 고한승 김건영 김기옥 김동원 김두하 김성호 김순흥 김신석 김연수 김영기 김영준 김일남 김정호 김한규 김형옥 김흥배 맹영옥 목욱상 문명기 민규식 민대식 민병도 박기효 박승억 박승직 박흥식 방규환 방응모 방의석 백낙승 백남신 백완혁 손창윤 신용욱 예종석 유명한 유재륜 이종만 장직상 장홍식 정명선 정재학 정치국 조병학 조진태 주성근 차남진 차준담 최승렬 최창학 한기방 현준호 홍충현

 

이런 문제에 아무 관심 없는 사람도 몇몇 사람 이름은 안다. 김연수, 박승직, 방응모, 현준호 등. 그중 현준호 경우를 본다. 현준호는 이미 세간에 잘 알려진 특권층 부역자로 현대 재벌 총수 현정은의 할아버지다. 현정은은 현대 창업주 정주영 큰아들 정몽헌의 처다. 정주영은 어떤 계기를 통해 재벌 반열에 올라섰을까? 여기에 적산 문제가 등장한다. 201975일 조혜정 기자가 민플러스(http://www.minplusnews.com)에 올린 글을 인용한다.

 

우리나라 재벌들의 토대가 된 것은 1945년 일본이 패망하면서 남기고 간 재산인 적산(敵産)’이다.

 

일본이 패망 후 적국(敵國)인 일본이 남기고 간 국·공유재산과 일본인들에 의해 축적된 재산은 주인 없는 재산으로 남았다. 이 적산은 미군정에 귀속됐다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대한민국에 귀속된다.

 

당시 독립운동가들은 일본인과 친일파들이 남긴 재산을 모두 국가가 소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주요 산업을 국유화하고 국가의 통제로 민족자본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는 우리 영토에 남은 재산을 민간인에게 헐값에 불하했다.

 

이승만 정부는 19491219일 귀속재산처리법을 제정·공포한다.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적산을 민간인에게 불하하는 법이다. 적산은 부동산 형태가 많았다. , , 공장, 기계들이다.

 

당시 일본인이 소유하고 있던 공장은 남한 전체 기업의 85%(2,700여 개)에 달할 정도로 귀속재산이 우리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어마어마했다. 이승만 정부가 이 적산을 민간에게 불하하는 기준은 1) 일제 치하에서 해당 기업의 주주나 경영인으로 있었던 자, 2) 그 기업의 관리인으로 있었던 자, 3) 그 기업에 돈을 빌려준 적이 있었던 자였다. 일본에 협조적인, 친일 행적이 우선순위로 작용했다.

 

적산은 거의 무상이라고 할 만한 가격으로 불하가 이뤄졌다. 상환기간은 짧게는 5~15년까지 분할 상환이 가능했다. 해방 이후 4년 동안 물가가 60배 가까이 오른 것을 감안할 때 거의 공짜로 가져가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렇다면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에 의해 불하된 적산을 차지한 자들은 누구일까? 적산을 토대로 지금의 재벌·대기업으로 성장한 곳. 말만 하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기업이 대부분이다.

 

가장 대표적인 적산 불하 기업은 지금의 SK그룹과 한화그룹이다. 일제강점기 선경직물의 관리인은 SK그룹의 창업주가 되었고, 조선화약공판의 관리인은 한화그룹 창업주가 되었다.

 

SK그룹 창업주 최종건은 10대 후반 일본기업 선경직물에 입사한다. 선경직물은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2, 군복의 안감으로 사용한 천을 만드는 회사였다. 즉 전범 기업이었다. 어린 나이에 선경직물의 조장(관리인)을 맡은 최종건은 해방 이후 적산으로 남게 된 선경직물의 불하를 신청해 1952년 공장을 불하받는다.

 

오늘날 한화그룹의 모태가 된 것도 적산으로 남은 일제강점기 조선화약공판이라는 공장이다. 조선화약공판은 조선에 있던 유일한 화약 판매 독점기업, 역시 전범 기업이었다. 한화그룹 창업주 김종희는 일제강점기 일본 순사의 도움으로 조선화약공판에 입사해 관리인을 거쳐 29살에 공장을 불하받는다.

 

그렇다면, 재계 1, 2위에 올라 있는 삼성과 현대가 궁금해진다.

 

삼성은 미쓰코시 백화점 경성점과 동방생명을 불하받아 신세계백화점과 삼성생명으로 키운다. 삼성이 한국 최초의 백화점이라고 자랑하는 신세계백화점의 뿌리가 일본 백화점인 것이다. 미쓰코시 백화점은 1962년 동방생명이라는 회사에 불하되는데, 바로 다음 해에 동방생명이 삼성에 인수된다. 그리고 1989년 동방생명은 삼성생명으로 이름을 바꾼다.

 

현대그룹 정주영은 미군정 시기인 1946, 서울시 중구 초동의 땅 200여 평을 불하받아 현대자동차공업사를 설립하고 사업 기반을 닦는다. 지금의 현대제철은 1978년 인천제철을 인수한 것으로, 인천제철은 1938년 일본 자본이 출자해 설립한 조선이연금속 인천공장으로 출발했다. 이 공장은 해방 후 귀속재산으로 남아 있던 것이다.

 

다른 기업들은 어떨까?

 

과거 두산기업의 주력상품이었던 OB맥주. OB맥주의 기원은 두산그룹 창업주 박승직의 아들 박두병이 불하받은 소화기린맥주다. 박두병은 소화기린맥주의 관리인으로 일했고, 창업주인 아버지는 이 회사의 주주였다.

 

이 밖에도 LG그룹의 창업주 구인회는 조선제련을 불하받아 LG금속으로 LG그룹을 키웠다. 쌍용그룹 역시 적산 기업인 조선직물의 토지와 공장건물을 불하받아 금성방직을 세웠고, 이는 쌍용그룹을 세우는 발판이 된다. , 동양그룹 창업주 이양구는 소야전시멘트 삼척공장을 불하받아 동양시멘트로 키워 지금의 동양그룹을 만들었다. 나가오카 제과(영강제과)는 그 직원이던 박병규 등에게 불하되면서 해태제과를 모기업으로 했던 해태그룹이 탄생하게 된다.

 

이렇게 적산을 차지한 기업들 모두 재계에서 손꼽히는 기업,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기업들이다.

 

SK그룹은 2003년 창립 50주년을 맞아 창업주 최종건에 대한 평전을 낸다. 평전 제목은 공격 경영으로 정면승부 하라. 이 책엔 해방 직후 청년 최종건은 선경치안대를 조직해 선경직물의 일본인 간부들이 무사히 일본에 돌아가도록 도왔다라고 적혀있었다. 그러나 10년 뒤인 2013SK그룹 60년사에선 최종건은 광복 후 혼란 속에서 선경치안대를 조직해 공장보호에 앞장섰다라고 문구가 수정된 일화가 있다. 문구는 수정됐지만 최종건의 친일 행적은 10년 전에 했던 고백에서 이미 드러난 후였다.

 

남의 땅을 침략해 35년간 호의호식한 적국(敵國) 일본이 물러나고 우리 땅에 남은 재산은 누구의 것이어야 했을까?

 

국가의 통제로 민족자본을 만들어야 한다라는 독립운동가들의 주장대로 일본인들이 남의 땅에서 축적해 놓은 재산은 해방과 함께 민족의 자립경제를 건설하는 물적 토대, 독립 국가를 건설하는 기틀로 사용되어야 했다. 그러나 이런 상식적 주장은 상식이 되지 않았다.

 

이처럼 일제가 남기고 간 재산 대부분은 일제와 목숨 바쳐 싸웠던 민족의 것이 되지 않고, 대부분 일본 가까이서 그들을 도운 사람들에게 넘어갔다. 재벌들은 스스로 자수성가해 자산을 키웠다고 주장하지만, 알고 보면 그 기반엔 적산이 있었다. 그들은 손쉽게 차지한 적산을 토대로 대기업과 재벌로 성장했다. 한국 재벌의 시작은 안타깝게도 이러했다.”

 

드라마에 나오는 재벌 집 안주인은 가난한 사람을 가리켜 근본 없는 물건이라 한다. 그가 자랑하는 근본은 일제가 가져다준 돈이다. 부역 역사에서 비롯한 돈이 지닌 특권을 근본으로 여기는 짓을 부끄러워할 줄도 모르는 그야말로 근본 없는 물건이다. 그러나 이 찐 근본 없는 물건들이 일류며 주류인 대한민국은 대체 어떤 나라인가. 경제 규모로 10대 국가에 들어가고 후진국에서 선진국으로 진입한 유일한 나라라는 국뽕이 정녕 국뽕일 수 있는가. 재벌이 일제 부역에서 왔고, 대한민국 경제가 그 재벌 손에 쥐어져 있다면, 그 국뽕의 은 일본제국이 아닌가. 왜 재벌이 일본 앞에서 알아서 기는지 더는 부연할 필요가 없으리라.

 

제국과 부역에 관한 글을 읽고 쓰는 내내 속이 속이 아니다. 읽다 말고, 쓰다 말고 벌떡 일어나 걷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을 수없이 마주하며 여기까지 왔는데 오늘은 더욱 속이 쓰리고 아프다. 글쓰기 도구인 컴퓨터, 그 옆에 놓인 전화기, 시원한 바람을 일으켜 삼복을 견디게 해주는 에어컨, 환자 대기실에 밤낮없이 켜져 있는 TV, 없으면 생활 자체가 불가능하다시피 한 스마트폰···죄다 재벌이 만든 물건이다. 숨이 막힌다. 비렁뱅이 부역자 내 꼬락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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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부도덕할수록 통치집단은 관변 조직을 왕성하게 키운다. 간접적이라 위화감을 줄일 수 있고, 자발적이라는 인상을 줌으로써 능동적으로 선전·선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조선총독부가 키운 부역 단체에 관해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을 통해 상세하게 밝힌 윤해동 님 글을 인용한다.

 

조선총독부에서는 시정 일반을 개선한다는 명목으로 조선인을 선별하여 또는 조선인 단체를 선별하여 지원금을 대여하고 그들을 육성하였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조선인에 대한 조선총독부의 동화·친일 정책은 매우 광범위하게 전개되었다. 3·1운동 직후京城日報에서 발간한朝鮮騷擾眞相에서는 조선인의 광범위한 저항은 총독정치, 식민지 통치에 대한 조선인의 무지와 이를 알리기 위해서는 온건한 인물을 키워 새로운 정치의 이해를 꾀하여야 한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일제는 개인의 효용성과 단체의 효용성을 두고 후자가 좀 더 조직적인 친일 활동을 전개리라고 판단하여 일진회와 같은 각종 친일 단체를 설치하였다. 친일 단체란 식민지 한국에서 조선총독부 및 일본 정부의 사주·지원으로 조직된 어용·반민족적 결사를 말한다. 총독부가 친일 단체의 조직에 관심을 보인 것은 사이토가 총독으로 부임하면서부터이다.

 

당국의 태도를 분명히 취하는 것만으로는 흑백을 가리기 어렵고 또한 흑백이 선명하게 가려지지 못한 결과로 압박정치라는 따위의 비난이 높아가는 것은 본의가 아니다. 따라서 이 기회에 일반 인민의 거취를 분명히 밝히도록 하는 방법으로서 믿을 수 있는 민간 유지를 시켜 은밀히 조선인 가운데 우리(일본)와 같은 이상과 정신을 지니고 신명을 걸고 일을 해 줄 핵심 인물을 골라낸다. 다시 이 인물로 하여금 귀족·양반·유생·갑부·실업가·교육가·종교가 등에게 각 계층과 사정에 따른 각종 친일 단체를 조직하게 하고 이에 얼마간의 편의와 원조를 주어 충분히 활동하게 한다(朝鮮總督府,朝鮮民族運動する對策,齋藤實文書4).

 

 이러한 친일 단체를 조직하게 된 것은 조선인의 저항을 미연에 방지하고 폭넓은 지지 세력을 만들기 위함이었다. 즉 식민지 각계각층에 침투하여 조직적으로 동화정책을 시행하는 데 친일 단체는 매우 유용하였다. 이렇게 해서 조직된 단체는 국내의 國民協會·矯風會·大東同志會·大正親睦會·維民會·小作人相助會·大東斯文會·商務社·相愛會·甲子俱樂部·同友會 등이며, 국외 특히 만주에서는 保民會·朝鮮人民會 등이 활동하였다. 이 가운데 조선총독부의 전폭적인 지지와 후원을 받으면서 친일 행위를 전개한 대표적인 단체는 국민협회다.

 

 국민협회는 191981閔元植이 세운 協成俱樂部를 개칭하여 친일 단체로 전환한 것이다. 19201월 경무국 사무관 마루야마 쓰루기치(丸山鶴吉)의 지원으로 조직되었다. 회장 민원식은 일본 수상 하라의 내지연장주의에 기대어 조선의 자치 청원 운동을 적극적으로 주장하면서 친일 여론을 조성하였다. 특히 민원식은 참정권 청원 운동에 진력하면서 일본의 자금 혜택으로 친일활 동을 지속할 수 있었다. 이는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가장 먼저 처단할 인사로 민원식을 지목한 데서 알 수 있듯이, 그의 행위는 친일의 전형적인 형태로 표출되었다. 이른바 신일본주의를 주창하면서 일제의 식민 통치를 합리화하고 나아가 조선인의 각성을 촉구하는 등의 행위를 하였다. 하지만 국민협회도 민원식이 梁槿煥에게 암살당한 이후 그 활동은 급격하게 퇴조하였다. 당시 국민협의의 대표적인 구성원은 金明濬·鄭丙朝·金甲淳·韓永源·李炳學·金錫永·申錫雨·朴鳳柱 등이었으며, 후일 有志聯盟의 조직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다음으로 평양에 본부를 두고 활동한 大東同志會를 들 수 있다. 평안남도 지방은 일본에 대한 저항 의식과 저항운동이 강한 지역이므로 일제로서는 이 지역에 대한 잠재적인 저항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전 통감부 간도파출소 핵심 인사였던 평남지사 시노타 지사쿠(篠田治策)의 지원 아래 선우순과 羅一鳳·金興健 등에게 대동동지회를 조직하게 하였다. 대동동지회의 친일 행위는 주로 강연과 선전에 의존하였다. 즉 친일 여론을 모으기 위하여 조선 민중이 최후의 행복을 얻을 수 있는 길은 일본 통치에 달려있다고 하는 조선총독부의 新政을 알리는 데 주력하였다. 하지만 평양에 본부를 두었기 때문에 그 이외의 지방에까지 세력을 넓히는 일은 어려웠다.

 

 한편 일제는 대지주·기업가를 포섭하고 보다 조직적인 활동을 전개하기 위해 維民會를 설치하였다. 또한 지역 유생들을 친일 세력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대동사문회·儒道振興會를 설립하였다. 유도진흥회는 1920116일 서울 및 지방 유림 88명이 서울에 모여 조직한 단체이다. 이 단체는 양주·남양·장단 등을 중심으로 빠르게 지회가 설치되었으며, 각 도지사 역시 적극적인 지원을 하였다. 유도진흥회의 설립목적은 유도를 진흥해서 피폐한 유풍을 되살리고 동양 도덕의 진원을 발휘하여 민심의 안정을 꾀하는 데 있다고 하였다. 이는 조선총독부의 식민 통치와 부합되는 것으로 金榮漢 등을 중추원의 참의로 우대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이 단체는 친일 유생을 이용하여 각 지역의 민중을 장악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일제는 보부상 단체인 商務社를 이용하여 식민지인에 대한 민간 감시체제를 더욱 강화하였다. 한국 근대사에서 보부상 집단은 주로 어용·반민족·전근대적 존재로 인식되었다. 이에 사이토 총독은 보부상을 상무사로 바꾸어 대민 감시를 강화했다. 당시 인물로는 李寅榮·金光熙·李址鎔·구연수 등이었다. 그러나 이 단체에 대한 민중의 반감은 매우 격렬하였으며 활동 역시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1920년대 국내에서는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이 커지면서 독립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일제는 이 대항책으로서 탄압과 회유를 목적으로 위축된 친일파 연합을 추진하였다. 이렇게 하여 조직된 각파유지연맹은 19241월 발기인대회를 통해 411일 경성호텔에서 창립총회를 개최하였다. 즉 국민회의·조선소작인상조회·유민회·동광회·노동회·조선경제회·교풍회·노동상애회·대정친목회·동민회·유도진흥회·청림교 등 12단체가 연합하여 친일 단체를 조직하였다. 이 연맹은 일본과 조선의 융합에 힘쓰며 한일합병의 대원칙하에 두 민족이 영원한 행복, 발전을 위해 일치단결해야 함을 강조하면서 이를 위해서는 과격사상의 배격, 총독정치에 절대적인 신뢰를 보내야 한다고 하였다. 이들 단체는 사회주의 사상의 만연과 이를 통한 식민지인의 저항이 광범위하게 전개될 것을 우려한 일제에 의해 조직된 허수아비 단체였다. 특히 이 과정에서 많은 조선인은 허울 좋은 일제의 식민 통치에 매몰되어 자기 민족을 가혹한 식민 통치의 수탈구조에 고착시켰다.

 

 일본제국주의는 이러한 친일 단체를 통하여 조선 민중에게 민족개량주의 사상을 침투시켜 식민지지배에 협력시키려고 하였다. 이 부르주아 상층부는 식민지지배의 달콤한 유혹에 현혹되어 독립 시기상조와 독립 불능을 주장하면서 적극적인 저항운동은 펼칠 수 없었다.”

 

관변 조직을 숙주 삼아 부역한 자들 484명 명단을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에 올렸다.

 

강근도 강병순 강병주 강성구 강영균 강영희 강용희 강이황 강인우 강일성 강홍범 고덕환 고용덕 고용종 고응민 고청룡 고황경 고희준 구연수 구창조 국기연 궁사청 궁하일 권병수 권우섭 권중기 권태동 길태홍 김갑명 김경식 김경호 김광엽 김광현 김구순 김권형 김규대 김규창 김기수 김기주 김기찬 김덕선 김동일 김동진 김동현 김두명 김두정 김두천 김명준 김명진 김명집 김몽필 김병걸 김병규 김병순 김병익 김복수 김봉기 김사연 김사영 김상익 김석연 김석진 김석태 김선술 김선재 김성렬 김세장 김세진 김시현 김신석 김연상 김연식 김영걸 김영구 김영설 김영우 김영준 김영희 김예현 김용진 김윤덕 김윤혁 김응구 김인창 김인하 김일수 김재곤 김재룡 김재순 김재익 김재홍 김재환 김정국 김정규 김정민 김정호 김제홍 김종완 김종헌 김준모 김준섭 김지련 김진태 김진하 김창도 김태섭 김태익 김태헌 김태형 김태훈 김택용 김택현 김한경 김한기 김해룡 김형태 김호중 김홍건 김환 김환성 김효순 김효진 남정관 노성석 노신근 노영근 노응린 노정규 동운경 문명기 문의홍 문익주 민영은 민원식 민재기 민정식 민태직 박계일 박구학 박규양 박규장 박규철 박병기 박병철 박봉윤 박선철 박성택 박순천 박승직 박영길 박영래 박영준 박영철 박우용 박은양 박주율 박준영 박지양 박창서 박창훈 박필원 박해묵 박혁준 박형채 박호병 박희도 방낙선 방운갑 방의석 배동운 배상하 백기수 백낙원 백동수 백윤호 백형수 변기택 사현필 서병은 서병조 서상건 서상환 서은상 서창보 서채 석문용 선우순 성원경 성준 소완규 손서헌 손영목 손응국 손재근 손치은 손홍원 송계원 송규환 송병천 송완섭 송은용 송재철 송종대 신국원 신동원 신동훈 신두현 신문언 신병휴 신석린 신승균 신영석 신영오 신의학 신재정 신태악 신태항 신효범 심도풍 심상직 심원섭 심의혁 안근모 안방렬 안순환 안익수 안인식 안종국 안준 안중수 안태영 양성식 양재익 양정묵 양주익 양지환 엄주명 엄주익 엄준원 여계보 염중모 염창순 예종석 오경식 오긍선 오기영 오두환 오성룡 오역선 오왕근 오응선 오필영 원덕상 원세기 원수남 원응태 유길수 유두환 유문경 유병문 유병의 유봉기 유봉주 유봉현 유상화 유석우 유영렬 유재한 유전 유제구 유지훈 유창만 유학주 유홍종 윤갑병 윤경순 윤귀영 윤규식 윤달수 윤대섭 윤대식 윤명진 윤범식 윤봉의 윤상우 윤상익 윤시병 윤익선 윤정식 윤창업 윤춘혁 윤치형 윤치호 이각종 이겸로 이겸제 이경렬 이경로 이경하 이규학 이규화 이근우 이기승 이기찬 이동락 이동영 이동우 이동초 이동혁 이두수 이문표 이민관 이방 이범승 이범찬 이범철 이병림 이병립 이병연 이병의 이보현 이석규 이석신 이석희 이선학 이선협 이성근 이성환 이승우 이승운 이승한 이승현 이승호 이영근 이용구 이용문 이용한 이우현 이원규 이원보 이익성 이인수 이인흡 이정봉 이정욱 이종만 이종용 이종춘 이준용 이중현 이찬모 이찬요 이창선 이창엽 이창환 이치로 이태윤 이필규 이학재 이항발 이행민 이현우 이희덕 이희두 이희섭 임병익 임봉석 임용상 장동환 장두현 장순창 장진원 장헌식 장홍식 전만영 전부일 전성욱 전영배 전영조 전위현 전창근 전태현 정경수 정계형 정교원 정규원 정규환 정대현 정도영 정병조 정석모 정세진 정연상 정용태 정원섭 정인순 정환종 조대묵 조덕하 조병렬 조병상 조선하 조성근 조승환 조용률 조인성 조진우 조흥원 주련 주병섭 주성근 주학현 지봉서 차재정 차준담 차화준 천영기 최건호 최기남 최동섭 최두환 최병창 최상익 최수길 최양호 최영구 최영년 최영욱 최운섭 최원교 최정규 최정덕 최정묵 최주현 최준집 최진현 최창학 최창호 최홍섭 탁태윤 편상영 하준석 한경원 한교연 한국림 한국현 한규복 한기방 한남규 한보순 한상건 한영호 한욱 한재익 한정규 한창회 한태섭 한화석 함창현 허균 허현 현영섭 현장호 현준호 홍규표 홍긍섭 홍남표 홍사훈 홍승균 홍승원 홍윤조 홍인순 홍종덕 홍종면 홍준 홍충현 황규현 황대원 황명중 황석건 황정헌 황종국 황종우 황철수

 

특권층 부역 집단 아이콘 윤석열이 최근 진심 중인 말로 카르텔이 있다. 자유총연맹, 재향군인회, 대한노인회, 새마을운동중앙회, 바르게살기운동 중앙협의회···이런 부역 조직과 반대되는 시민 단체를 포함해 부역에 동참하지 않는 온갖 대상을 싸잡아 일컫는 그 특유 냅다 집어던지는어휘다. 이 또한 부역 통치집단이 전가 보도로 휘두르는 언어 선점이다. 투사 전술이다. 대한총독부 수반답다. 소심한 소시민이 체감하는 모멸감은 조선총독부 치하보다 맹렬하게 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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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대한민국에서 정치적 야심이 있는 자라면 어떤 분야 누구라도 여의도행을 노린다. 사업을 하다가도, 대학 총장을 하다가도, 영화 배우를 하다가도, 바둑을 두다가도, 소설을 쓰다가도···성공했다는 마지막 표지로 국회의원이 되려 한다. 국가와 사회를 위해 봉사하겠다는 뜻이 아니라 국회의원이 상징하는 특권과 명예에 뜻을 두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국회의원은 세계에서 유례가 없을 정도로 특권을 누린다. 그들이 헌법기관으로서 국가와 국민에게 필요한 법을 제정하는 일 자체가 그런 특권을 누려야 할 논리적 근거일 수는 없다. 처음 헌법에서부터 박정희 유신헌법에 이르기까지 국회의원 특권적 지위를 창안하고 유지·강화한 주체가 특권층 부역 집단이기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 오늘날 대한민국 국회의원은 그 뿌리를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에 등재한 입법계 부역자에 두고 있다.

 

수작(습작) [138]

 

고영희 고중덕 고흥겸 고희경 권중현 권태환 김교신 김덕한 김병익 김사철 김석기 김성근 김세현 김영수 김영철 김정록 김종한 김춘희 김학진 김호규 남장희 남정철 민건식 민규현 민병삼 민병석 민상호 민영규 민영기 민영린 민영소 민영욱 민영휘 민종묵 민철훈 민충식 민태곤 민형식 민형식 민홍기 박경원 박기양 박부양 박서양 박승원 박영효 박용대 박정서 박제빈 박제순 박찬범 성기운 성일용 성주경 송병준 송종헌 윤강로 윤덕영 윤웅렬 윤의섭 윤택영 이강식 이건하 이경우 이규원 이규환 이근명 이근상 이근택 이근호 이기용 이기원 이능세 이달용 이덕용 이동훈 이범팔 이병길 이병무 이병옥 이봉의 이영주 이완용 이완용 이완종 이용원 이용태 이원호 이윤용 이인용 이장훈 이재각 이재곤 이재극 이재완 이정로 이종승 이주영 이중환 이지용 이창수 이창훈 이충세 이택주 이풍한 이하영 이항구 이해국 이해승 이해창 이홍묵 이홍재 임낙호 임선재 임선준 장석주 장인원 정낙용 정두화 정주영 정천모 정한조 조대호 조동윤 조동희 조민희 조용호 조원흥 조중구 조중수 조중응 조중헌 조희연 최석민 최정원 한상기 한상억 한창수

 

중추원 [335]

 

강경희 강동희 강번 강병옥 강이황 강필성 고영희 고원식 고원훈 고일청 고희경 구연수 구희서 권봉수 권중식 권중현 권태환 김갑순 김경진 김관현 김교성 김기수 김기태 김기홍 김낙헌 김돈희 김동준 김동훈 김두찬 김명규 김명수 김명준 김병규 김병욱 김병원 김부원 김사연 김상설 김상섭 김상형 김상회 김서규 김성규 김신석 김연상 김연수 김영무 김영배 김영진 김영택 김영한 김우영 김원근 김윤복 김윤정 김재환 김정석 김정태 김정호 김제하 김종흡 김준용 김진수 김창수 김창한 김춘희 김태석 김태집 김필희 김하섭 김한규 김한목 김한승 김현수 김화준 김희작 나수연 남궁영 남규희 남백우 노영환 노준영 노창안 문명기 문종구 민건식 민규식 민병덕 민병석 민상호 민영기 민영은 민영찬 민원식 민재기 민형식 박경석 박경양 박기동 박기석 박기순 박기양 박두영 박보양 박봉주 박봉진 박상준 박승봉 박영철 박영효 박용구 박의병 박이양 박제빈 박제환 박종렬 박중양 박지근 박철희 박필병 박해령 박흥규 박희양 박희옥 방의석 방인혁 방태영 백인기 상호 서병조 서병주 서상훈 서회보 석명선 선우순 성원경 성하국 손재하 손조봉 손창식 송문화 송병준 송종헌 송지헌 송헌빈 신석린 신석우 신우선 신응희 신창휴 신태유 신현구 신희련 심선택 심환진 안병길 안종철 양재창 양재홍 어담 어윤적 엄준원 엄태영 염중모 오세호 오재풍 오제영 오태환 원덕상 원병희 원응상 위기철 위정학 유기호 유만겸 유맹 유빈겸 유성준 유승흠 유익환 유정수 유진순 유태설 유혁로 유흥세 윤갑병 윤덕영 윤정현 윤치소 윤치오 윤치호 이갑용 이강원 이건춘 이겸제 이경식 이계한 이교식 이근상 이근수 이근우 이근택 이기승 이기찬 이도익 이동우 이만규 이명구 이범익 이병길 이병렬 이병학 이봉로 이선호 이승구 이승우 이영찬 이완용 이원보 이윤용 이은우 이익화 이장우 이재곤 이재정 이종덕 이종섭 이준상 이지용 이진호 이충건 이택규 이택현 이하영 이항직 이흥재 이희덕 이희적 인창환 임선준 임창수 임창하 장대익 장상철 장석원 장석주 장용관 장윤식 장응상 장인원 장준영 장직상 장헌근 장헌식 전덕룡 전석영 전승수 정건유 정관조 정교원 정난교 정대현 정동식 정병조 정석모 정석용 정순현 정연기 정인흥 정재학 정진홍 정태균 정해붕 정호봉 조경하 조민희 조병건 조병상 조상옥 조성근 조영희 조원성 조재영 조중응 조진태 조희문 주영환 지희열 진학문 진희규 차남진 천장욱 최남선 최린 최상돈 최석하 최승렬 최양호 최연국 최윤 최윤주 최재엽 최정묵 최준집 최지환 최창조 최창호 최형직 피성호 하준석 한규복 한상룡 한상봉 한영원 한익교 한정석 한진창 한창동 한창수 허명훈 허진 현기봉 현은 현준호 현헌 홍성연 홍승목 홍우석 홍운표 홍재하 홍종국 홍종억 홍종철 홍치업 황종국

 

일본 제국의회 의원(귀족원중의원) [11]

 

김명준 박상준 박영효 박중양 박춘금 송종헌 윤덕영 윤치호 이기용 이진호 한상룡

 

식민 지배 들러리 노릇이나 하면서 특권 위에서 놀던 이 자들 개인적 의식은 물론 제도적 무의식까지 고스란히 승계한 제1대 국회는 어떤 과정을 통해 구성되었고 국회의원은 누구며 무슨 짓을 했는지 살펴보면 그 뒤 역사가 흘러가는 방향을 알 수 있다. 202032일 민플러스(http://www.minplusnews.com) 김장호 기자가 쓴 기사를 발췌 인용한다.

 

“1대 국회 의석수는 200석에 입후보자는 942명이었다. 비례는 없었고 소선거구제를 채택했다.

 

선거 결과 이승만의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이하 독촉’)55명 당선으로 제1당이 되었고, 한국민주당(이하 한민당’)29, 무소속이 85석으로 가장 많았다.

 

독촉은 이승만 직계부대였고 235명을 출마시켰다. 한민당은 친일 지주 중심 정당으로 91명을 출마시켰다. 당시 무소속이 많았던 것은 정당 개념이 확립되지 못한 탓도 있었지만, 한민당이 친일파로 인기가 없어 무소속으로 나온 경우가 많아 실제로는 60~80석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좌익계를 물론이고, 김구 선생계열, 김규식 계열 등 이승만과 한민당을 제외한 대다수 세력이 남한만의 5.10 단독선거를 반대하고 선거에 불참하였다. 결과적으로 이른바 대한민국 제1대 국회, 제헌국회라는 것이 일부 무소속을 제외하고는 친일, 친미, 분단 세력으로 채워지게 되었다. 국회 적폐, 분단 적폐의 시작이었다.

 

해방 당시 우리 민중 누구도 이토록 오랫동안 나라가 분단되어 살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불과 미군정 3년 만에 모든 것이 바뀌었다. 2차 대전 말기 미국의 행보에 대해 우리 민족은 물을 것이 많다.

 

1) 소련의 대일 참전은 미국이 요구했다. 일본은 이미 457월에 항복 의사를 밝혔다. 그런데 미국은 기어이 일본에 86, 89일 원폭을 투하했다.

 

2) 독일은 전범국가로 동서독으로 분단되었다. 아시아에서 전범국가는 일본이었다. 그런데 왜 미국은 811일 한반도를 38선으로 분단했나? (전쟁부작전국 3대 국장이었던 존 헐 중장 녹취록에서 ‘38선은 포츠담((19457)에서 마련됐다’, ‘우리 전략가들은 3개의 주요 항구를 주목했으며, 그 가운데 2개의 항구(인천과 부산)는 우리 지역에 포함해야 하며, 서울 바로 북쪽에 선을 그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38선을 가장 좋은 위치라고 판단했다라고 회고했다.)

 

3) 미국은 점령군으로 남한에 들어왔다. 반면 소련은 원조자로 들어왔다고 했다. 미국은 조선 민중이 세운 인민위원회와 자주 관리를 철저히 부정하고 민중들을 탄압했으며, 친일파를 대거 등용했다.

 

4) 19451227일 동아일보는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에서 소련이 신탁통치를 주장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실제로 장기 신탁통치를 주장한 것은 미국이었다. 동아일보에 그 정보를 줄 수 있는 곳은 미국밖에 없었고, 미국 신문보도보다 먼저 보도되었다. 그리고 친일파들은 이때부터 애국자로 행세하기 시작했고, 민족역량은 두 동강이 났다.

 

5) 미국은 결국 미소공동위원회(146320, 247521)를 무산시키고 한반도 문제를 유엔으로 끌고 갔다(471114). 한반도 문제를 유엔으로 가져가는 것은 미소 합의에 어긋나는 불법일 뿐만 아니라 유엔 권한으로 다룰 수 있는 전후 처리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미국은 소련과 조선 민중의 어떠한 요구도 무시하고 결국 거수기 유엔을 도구 삼아 유엔감시 하의 남한 단독선거를 강행한다. 5.10 총선, 단독선거는 미군정 3년이 만들어낸 것이다.

 

분단을 막고 통일 민족국가를 수립하기 위한 전 민족적 노력이 곳곳에서 진행되었다. 중도파들은 461차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직후 좌우합작운동으로 조선인의 임시정부를 수립하여 통일을 이루고자 하였다. 여운형 선생은 좌우합작을 넘어 남북 합작에까지 힘을 기울여 다섯 차례 38선 이북을 방문하여 김일성 당시 북조선 임시 인민위원회 위원장을 직접 만나 임시정부 수립에 대해 논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여운형 선생은 1947719일 암살된다.

 

단독총선이 명확해지자 이번에는 김구 선생, 김규식이 나섰다. 김구 선생은 남북협상을 제안했고, 47419일 남북 제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가 평양에서 개최되어 공동성명을 발표한다.

 

공동성명서 4개 항 요지는 다음과 같다.

 

1) 외국군대는 우리 강토로부터 즉시 동시에 철거하는 것이 조선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정당하고 유일한 방법이다.

2) 남북 지도자들은 외국군이 철거한 이후 내전이 발생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한다.

3) 외국군대가 철거한 이후에 제 정당들의 공동명의로 전조선 정치 회의를 소집하여 조선 인민의 각계각층을 대표하는 민주주의 임시정부가 즉시 수립될 것이다.

4) 남조선 단독선거의 결과를 결코 승인하지 않을 것이며 지지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김구 선생도 단독선거 이후 49626일 암살된다. 민중들은 전평 30만 파업을 포함한 2.7구국투쟁과 4.3제주항쟁으로 단독정부 수립 반대 투쟁에 나선다.

 

그러나 이미 이승만 등은 단독정부의 길로 치닫고 있었다. 1차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후 194663일 일찌감치 이승만은 이제 우리는 무기 휴회된 공위가 재개될 기색도 보이지 않으며, 통일 정부를 고대하나 여의케 되지 않으니 우리는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야 할 것이다라고 발언한다.(정읍발언)

 

1대 총선을 위한 선거법은 1948317일 미군정법률 제175호 국회의원선거법으로 공포된다. 이 법안 작성에는 미군정이 단독정부 수립을 위해 만들어 놓은 조선인 과도입법의원들도 참가했다. 그런데 이들은 선거권·피선거권 나이를 25살과 30살로 높이려 했다. 청년들이 좌익이 많다는 이유로 이들을 배제하기 위함이었다. 기표 방식도 도장을 찍는 방식이 아니라 자서 방식(후보 이름을 쓰는 방식)을 택했다. 문맹률이 높았던 당시 상황에서 사실상 하위 계층을 선거에서 배제하기 위한 장치라는 지적이 나온다. 또 친일파와 부일 협력자들의 선거권·피선거권을 박탈하려는 법안은 우익 세력의 반대로 사문화되고 말았다. 차후 단독 선거 실시가 기정사실화된 후 미군정이 개입하여 선거권을 21세로, 피선거권을 25세로 일부 조항을 바꾼다.

 

선거 전후 분위기는 매우 험악했다.(이하 위키백과 주로 참조) 미군정과 우익은 총선거가 완전 독립과 통일을 위한 것이며 선거에 반대하는 것은 비애국적이라며 강압적 분위기를 강화했다. 1948329일부터 49일까지가 유권자 등록 기간이었다. 4월 말, 당시 신문들은 500명을 인터뷰한 결과 91%가 선거 등록을 강요당했다라고 보도했다. 경찰과 우익 세력은 쌀 배급과 선거인등록을 연계시키는 방법으로 강압적인 유권자등록에 나섰다.

 

428, 유엔 임시위원단은 투표자 등록 부정행위로 다음과 같은 사항을 지적했다고 한다: (1) 미곡 배급통장을 발급하는 지방 행정 사무실에서 등록을 실시한 사실 (2) 통장을 몰수하겠다고 위협해서 강제 등록 (3) 경찰과 청년단체가 등록을 권유한 건 일종의 강제로 간주됨. 유엔 임시위원단 위원장 야심 머기(시리아 대표)‘(남한은) 경찰국가일 뿐만 아니라 선거 지지파들이 경찰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또 지방 당국을 조정하여 완벽하게 선거를 좌지우지하고 있다. 남한에서 자유선거를 치르기 위한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지 않다라고 했다.

 

김구 선생도 국민은 경찰과 향토 보위단의 억압적인 태도 하에 등록하고 투표를 강요당했다라고 밝혔다.

 

선거 당일에는 서울에서 수천 명의 경찰과 특임된 민간인이 미군 지원 아래 중요 도로와 교차로에 바리케이드를 쳤으며 각 골목 입구에는 경비대가 배치됐다. 민간 경비대원은 도끼 자루, 야구 배트, 곤봉을 휴대했다. 경찰은 카빈 소총으로 무장했다. 외신 기자들은 이 광경을 계엄 하 도시 같다고 했다. 부인들은 투표장으로 가면서 가만가만히 주위를 살피는 기색이었다.

 

야심 머기는 투표소 주위나 안에서 향보 단원을 발견했다. 어떤 투표소엔 경찰이 투표소 안에 있었다. 어떤 투표소는 (투표의) 비밀이 보장되지 않았다라고 지적했다.

 

1대 국회는 531일 최연장자 이승만을 임시 의장으로 추대하고 이승만을 의장으로 신익희와 김동원을 부의장으로 선출한다. 또한 유진오 등이 주도하여 712일 헌법을 제정하고 20일 이승만과 이시영을 제1공화국의 정·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이로써 19458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다.···

 

1대 국회 흑역사는 단연 반민특위 해체다.

 

194897일 반민족행위처벌법이 통과함에 따라 반민족행위자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설치되어 활동에 들어갔다. 악질 친일 기업가 박흥식, 조국의 젊은이들을 일제 전쟁터로 내몰았던 최남선·이광수, 친일 경찰 노덕술 등이 특위 조사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은 당시 국회 부의장이던 김약수 등을 외국군 철수, 남북 정치 회의 등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남로당과 접촉하고 공산당에 협조한 혐의를 씌워 19495, 6월 국회프락치사건을 일으켜 구속한다. 이들은 반민특위 핵심 의원들이었다. 이후 194966일 반민특위가 친일 경찰 최운하를 체포한 것에 반발하여 내무차관 장경근 등이 주도하여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하고 반민특위 특경대를 무장 해제함으로써 사실상 반민특위가 와해된다. 결국 반민특위는 194910월 법 개정으로 해체되고 만다. 친일 매국노 청산은 여기서 무너지고 친일 기득권 세력이 장장 70여 년의 세월 대한민국을 지배하게 된다.”

 

여기서 대한민국 국회와 국회의원 기본 틀이 형성되었다. 미군정이 왜곡한 대의민주주의는 처음부터 이승만과 김성수를 아이콘으로 하는 두 부역 집단을 축 삼아 겉으로는 대립하고 속으로는 야합하는 가짜 구도를 세워 민주정치에 서투른 대중을 기만했다. 이승만 패거리는 보수를 전유하고 김성수 패거리는 진보를 전유해 참된 보수도 참된 진보도 설 수 없는 정치 지형을 만들어 놓았다. 보수적이든 진보적이든 자주 성향을 지닌 무리가 김성수 패거리 일부 계열을 이루기는 했지만, 그 자체가 잘못이었다. 자주 계열이 단일 대오를 형성해 특권층 부역 집단과 맞서는 정상적인 큰 구도를 세울 수 없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중첩 식민지 상태에 있는 대한민국에서 근원적 대립 구도는 보수: 진보, 독재: 민주 따위가 아니라 부역: 자주여야 하는데 이를 비틀어버린 것이다. 기왕 그렇게 된 바에야 김성수 패거리, 곧 오늘날로 말하면 민주당은 trickster로서 철저히 기능해야 했다. 그러나 결정적인 국면마다 특권층 부역 집단으로서 진면모를 드러내며 ‘2중대노릇을 해 정치를 퇴행시켰다. 어찌 보면 이승만 패거리가 저들 본능대로 처 저지른 포악보다 민주당 패거리가 자주·민주·통일이란 탈을 쓴 채 벌여 온 분열, 무능, 비겁이 더 유독했을 수도 있다. 총선 사상 유례없이 180명 국회의원을 내고도 정권을 팔아먹은 뒤 아무 짓도 하지 못하는, 아니 않는 작금 상황을 보면 그리 틀린 말은 아니지 싶다. 전망은 물론 아주 어둡다. 민주당 내부에 이런 각성을 한 자가 설혹 있다 하더라도 힘을 얻을 리 만무기 때문이다. 없거나 흩어져 숨어 있는 자주 기상을 어떻게 사회정치적 큰 힘으로 일으킬 수 있을까. 까마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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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3-08-02 14: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겉대속야 (겉으로는 대립하고 속으로는 야합하는) , 대한민국의 정치 구조를 이보다 더 명확하게 표현한 말은 없는 것 같네요.

bari_che 2023-08-08 15:27   좋아요 0 | URL
예, 아주 절망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다른 날보다 조금 일찍 떠나 영릉(英陵)으로 향했다. 전철을 두 번 갈아타고 경강선 세종대왕릉역에 도착하니 11시가 조금 넘었다. 장마 끝낸 열기는 이미 숨을 턱턱 막아선다. 처음에는 역에서 영릉까지 걸어가려고 했으나 무리라고 판단하고 버스를 타기로 했다. 20분 이상 기다려야 했다. 역에는 아무런 다른 편의 시설이 없었다. 시간표에 적혀 있는 시각보다 한참이나 늦게 도착한 버스가 짜증보다 반가움을 불러내는 까닭은 폭서 때문이다. 버스 기사에게 가볍게 인사를 건넸으나 아무런 반응도 돌아오지 않았다. 나도 그냥 무심히 차창 밖으로 눈길을 돌렸다.

 

사방이 토건 판이라 어수선하고 너절하다. 이미 지어진 건물, 닦여진 도로는 생경한 풍경을 함부로 드러낸다. 아직 덜됐거나 용도가 분명하지 않은 공간은 일부러 버린 듯한 살풍경을 대놓고 드러낸다. 그윽하고 아늑한 시간을 품은 공간은 없다. 역 이름도 세종대왕, 면 이름도 세종대왕, 거리 거리마다 온통 세종대왕을 떠받들고 있지만, 도무지 500여 년 역사가 지닌 묵직한 묵은 향기를 맡을 수가 없다. 식민지 장소성은 지방 도시에서도 가차 없이 본성을 과시한다.

 

능 바깥은 물론 능 안 풍경은 새로 조성한 티가 역력하다. 긴 시간을 두고 바른 고증을 거쳐 공들여 재정비했다고 하는데 때늦고 어설픈 감이 없지 않다. 이 또한 식민지 풍경 가운데 하나다. 식민지 출신 특권층 부역 집단이 통치하면서 얼마나 제 역사를 허투루 대해왔는지 풍경은 가감 없이 알려준다. 제국 정서를 그득 품은 유럽 풍경과 비교하면 대뜸 알아차릴 수 있다. 특권층 부역 집단을 보수나 우파로 표현하는 일은 잘못이다. 제 역사를 우습게 여기는 보수나 우파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깔끔하나 가벼워 보이는 단장을 마주할수록 가슴이 아려 온다.


하늘에서 본 영릉(출처: 문화재청)  


완만히 오른쪽으로 돌아 금천이 합류하는 지점을 지나면 홍살문이 우뚝 서 있다. 거기서 곧게 펼쳐지는 향로(香路), 어로(御路) 너머로, 좌우로 들어오는 풍경이 수려하다. 최고 임금을 모신 최고 명당임을 실팍하게 느낀다. 일설에 따르면 영릉 덕택으로 조선이 백 년 이상을 더 견뎠다고 한다. 이런 말을 비과학적이라고 일축할 수는 없다. 풍경은 서사로 존재한다. 풍경이 제 말을 하고 풍경이 인간 말을 듣는다. 한 왕조가 500년을 지속한 경우는 우리나라 말고 어디에도 없다. 그 힘이 어디에서 발원했다고 하건, 거기에는 우리 공동체 고유 서사가 간직돼 있다.

 

그 서사가 공동체를 구성하며 보전하며 창발한다. 서사는 언어로 갈무리된다. 그 언어를 구성하는 글자를 창제한 세종대왕 얼이 깃든 영릉이야말로 내가 최근 연속적으로 행해온 제의를 상징적으로 마무리할 적소가 아닐 수 없다. 나는 극진히 합장하고 정음창제에 대한 감사 예를 올렸다. 제국과 특권층 부역 집단, 그리고 그중에서도 최고헌법기관을 사유화한 인간에 대한 여덟 자 참소리 축원을 올렸다. 작은 돌 여덟 개를 거둬 지성소를 세웠다. 아무쪼록, 부디, .


가장 가까이서 본 영릉


천천히 숲 따라 난 길을 걸어 능을 나온다. 세종대왕릉역 화장실 벽에 걸린 액자가 문득 떠오른다. 여성 노비가 출산을 앞두면 30일 동안 노역에서 제외하고, 출산하면 100일 동안 출산 휴가를 주며, 그 남편에게도 30일 동안 휴가를 주도록, 세계보건기구가 출산 휴가 개념을 만들기 500년 전에 세종대왕이 제도화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놀라운 일이다. 그 민본주의가 현대 민주주의와는 다르다고 떠들지만, 그 잘난 민주주의 대한민국에서는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세종대왕은 왕 이전에 팡이실이였다. “팡이실이는 특권층 부역자의 반대말이다.


 


* 팡이실이는 이미 심하게 오염된 영어 단어 networking, networker를 대체한 순우리말이다. 팡이실은 균사(菌絲/hypha)를 가리키는 순우리말이다. 균사 상호작용이 지구생태계 네트워킹을 창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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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특권층 부역자 윤석열이 정권을 잡으면서 전방위·전천후로 불거지는 문제 본질은 공적 논리를 사적 욕망으로 붕괴시키는 협잡질이다. 사건이 터질 때마다 모든 책임을 현장 말단 개인에게 뒤집어씌우는 한결같은 작태는 시스템 은폐로 공적 관리 개념을 공동화하려는 꼼수다. 이 꼼수는 최고 헌법기관을 민영화, 아니 사유화할 윤석열이라는 특권층 부역자가 대통령이 되는 순간 이미 예견된 결과다. 제국 출신 관료에게는 제국적 시스템, 그 공적 에토스가 작동하지만, 식민지 출신 부역 관료에게는 오로지 사적 파토스만 작동하는 법이다. 이 사적 파토스가 저들이 말하는 자유다. 이 자유가 대한민국 허울 민주주의에 들러붙으면서 저들이 전가의 보도로 휘두르는 자유민주주의이데올로기가 되었다. 식민지 시대 관료 파토스는 해방 이후 대한민국 관료에게 이렇게 고스란히 우아하게 승계되었다. 그 승계 궤도 위를 달리는 폭주 열차에 치여 젊은 교사 하나가 참혹하게 죽임당했다. 대통령을 포함한 모든 고위 관료가 사적 파토스를 보위하기 위해 이 사건 역시 왜곡·조작하는 데 여념이 없다.

 

참담하고 참담하다.

 

이 참담한 시공에 걸맞은 문장이란 없다. 너무 길다. 2~3자로 된 특권층 부역자 이름 2,474개만으로도 우리 숨은 격해진다.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행정 관련 부역자 명단은 다음과 같다. 당연히 그 규모가 압도적이다. 이 자들 이름을 낱낱이 기억할 필요까지는 없겠지만 하나하나 불러주는 일만으로도 지금 우리가 어떤 세상을 살고 있는지 실감할 수 있다. 이 자들 가운데 상당수는 여전히 살아 준동할 테고, 그 후손은 이보다 더 엄청난 규모로 대한민국 행정을 장악한 채 끗빨 날리며 날뛸 테니 말이다.


행정 관료 [1,207]

 

강경희 강계항 강규원 강근하 강대철 강명옥 강보형 강봉서 강상위 강성희 강세진 강신창 강원달 강원로 강원수 강익석 강인원 강준배 강진수 강창구 강창인 강창희 강태원 강태현 강필성 강홍대 경훈 계광순 계순 계용각 계용권 계응규 계찬겸 고관식 고긍명 고병권 고영준 고원식 고원훈 고윤수 고재열 고학진 고희승 고희준 공탁 곽인호 곽진 곽한탁 곽화태 구연복 구자경 구자록 구종명 국순옥 권갑중 권만주 권병선 권병필 권순구 권영석 권영세 권영택 권완주 권익채 권종원 권주상 권중만 권중명 권중수 권중식 권중익 권중형 권중환 권창섭 권태소 권태영 권태용 권태형 권한상 권혁병 권현섭 길원봉 김경배 김경배 김경태 김경희 김관현 김광일 김교명 김교철 김교필 김구연 김구현 김규년 김규목 김규승 김규호 김극일 김기득 김기선 김기영 김기준 김기홍 김기환 김대우 김덕기 김덕현 김도현 김돈희 김동곤 김동선 김동완 김동우 김동운 김동준 김동철 김동항 김동훈 김두천 김면수 김면필 김명련 김명연 김명찬 김백수 김병규 김병규 김병숙 김병엽 김병우 김병욱 김병제 김병직 김병태 김병필 김병호 김병호 김병희 김보현 김복규 김봉두 김봉식 김봉진 김봉진 김봉진 김상계 김상규 김상덕 김상봉 김상수 김상연 김상엽 김상윤 김상익 김상필 김상현 김상호 김서규 김석빈 김석영 김선재 김성두 김성윤 김성한 김성환 김성환 김수오 김수철 김순경 김순봉 김순조 김승운 김승원 김승표 김시권 김시명 김시욱 김신욱 김심영 김업 김연상 김연식 김연하 김염배 김영건 김영걸 김영국 김영근 김영기 김영기 김영년 김영도 김영두 김영묵 김영배 김영상 김영석 김영석 김영선 김영섭 김영섭 김영수 김영일 김영제 김영진 김영집 김영필 김영화 김영훈 김영훈 김예현 김오섭 김옥현 김완진 김용근 김용래 김용성 김용제 김우식 김우영 김우진 김우현 김원선 김원태 김원회 김윤성 김윤수 김윤옥 김윤정 김응준 김의영 김의용 김익삼 김장현 김재석 김재항 김재호 김재환 김정규 김정기 김정덕 김정배 김정제 김정태 김정현 김정희 김종석 김종섭 김종순 김종식 김종진 김종칠 김종화 김종휴 김주혁 김준보 김중삼 김진민 김진선 김진현 김진희 김찬오 김찬욱 김창균 김창두 김창수 김창수 김창영 김창욱 김창한 김창현 김처순 김천수 김철정 김철호 김태근 김태년 김태동 김태석 김태익 김태진 김태호 김택림 김학성 김학수 김학응 김한경 김한목 김한식 김한은 김현두 김형도 김형운 김형태 김홍규 김홍식 김홍채 김화준 김훈 김흥수 김희덕 김희선 김희준 나기정 나지강 나창섭 나호 남계룡 남궁영 남기윤 남기홍 남용희 남정구 남정학 남진우 남진우 남필우 남흥우 노봉익 노영빈 노일 노태식 독고위 마동규 마현희 맹건호 명인화 목원학 문동호 문명호 문무성 문병서 문작지 문정창 문창규 문태선 문태원 문태준 문학명 문혜관 민기호 민상현 민영오 민원식 민인호 민재호 박광렬 박규원 박근수 박기석 박기환 박낙승 박노태 박도순 박동익 박동호 박만수 박문웅 박민하 박봉구 박부양 박붕서 박상준 박선철 박성규 박성완 박성주 박승건 박승관 박승민 박승봉 박승수 박승원 박승장 박승준 박승호 박영근 박영근 박영빈 박영준 박영진 박영찬 박영철 박용관 박용구 박용득 박용섭 박용익 박용하 박용현 박우현 박윤동 박이순 박이순 박일경 박일헌 박재섭 박재수 박재홍 박정 박정규 박정수 박정순 박정욱 박제균 박제륜 박제승 박종만 박종선 박종순 박종식 박준성 박중양 박지양 박진영 박찬동 박철 박철희 박초양 박태병 박태순 박해령 박해주 박현모 박형균 박호근 박홍래 박희택 방규홍 방진태 방한복 방환악 배석린 배선만 배철세 백낙삼 백남일 백남준 백붕제 백원필 백정기 백철용 백흥기 변경삼 변기찬 변시붕 변영진 변영화 변정규 변종환 부완혁 부인식 상호 서극형 서기순 서병린 서병소 서병업 서병주 서병현 서상덕 서상면 서상준 서성극 서세갑 서승표 서윤석 서재덕 서재식 서정악 서회보 석명선 석봉희 석진형 선우렴 선우박 성낙영 성두식 성정수 성창기 소진우 소진은 소진하 손경수 손석도 손영기 손영목 손응린 손종권 손지현 손해진 손현수 송갑수 송문헌 송문화 송양호 송원섭 송원홍 송인섭 송주순 송주옥 송찬도 송태승 송택영 신광휴 신규선 신기덕 신병찬 신복근 신석린 신석하 신양선 신양재 신우선 신우영 신원배 신응희 신익균 신재영 신좌균 신창렬 신창섭 신창휴 신철균 신철균 신태건 신태무 신태빈 신태완 신태진 신택영 신현구 신현구 신현태 신현호 신희련 심규택 심노욱 심능익 심상국 심상준 심상희 심의승 심종석 심종순 심종협 심헌택 심환진 안국선 안기선 안배항 안병춘 안병헌 안성호 안승렬 안승복 안식 안영수 안용대 안용백 안윤옥 안정기 안종철 안창선 안창환 양관용 양봉제 양원탁 양익현 양재만 양재창 양재하 양재홍 양홍묵 어용선 어윤적 엄구현 엄민영 엄영택 엄주완 엄창섭 엄형섭 여구현 연관 염규환 오경린 오광은 오국영 오극선 오두환 오병문 오석룡 오석유 오세윤 오세흥 오수환 오영건 오영세 오영전 오유영 오재규 오재순 오종수 오찬갑 오치한 오태근 오태여 오태영 오태환 오해건 왕우순 왕종성 원대규 원은상 원응상 원의상 원정한 원진희 원훈상 위수봉 위종기 유경환 유광렬 유광준 유규정 유기덕 유기량 유기호 유대진 유만겸 유봉석 유봉환 유빈겸 유상범 유석기 유성렬 유성준 유승해 유승흠 유시태 유시환 유엽 유영준 유영호 유완종 유용진 유익렬 유인수 유진명 유진세 유진순 유진창 유진혁 유진호 유철희 유태영 유태훈 유혁로 유홍순 유홍종 유훈섭 윤갑병 윤건용 윤관 윤관일 윤길중 윤남철 윤덕명 윤명수 윤명은 윤범행 윤병희 윤사혁 윤상구 윤상학 윤상희 윤석중 윤석필 윤석호 윤성희 윤수병 윤승로 윤응규 윤자록 윤종완 윤종화 윤창현 윤태림 윤태빈 윤필 윤필구 윤필오 윤하영 윤헌구 윤형남 윤희성 윤희재 은치황 이경선 이경식 이경준 이계록 이계석 이계한 이계호 이공후 이관구 이관희 이규룡 이규완 이규진 이규한 이규홍 이근무 이근수 이근양 이근직 이기 이기명 이기방 이기백 이기상 이기원 이기원 이기주 이대용 이덕상 이덕응 이돈영 이동관 이동우 이동진 이동한 이동혁 이두황 이만식 이만용 이맹성 이면익 이명원 이명헌 이명환 이무성 이문하 이민구 이민영 이민하 이방협 이범관 이범기 이범래 이범소 이범승 이범익 이병년 이병렬 이병렬 이병민 이병석 이병숙 이병식 이병식 이병재 이병천 이병휘 이보상 이복영 이봉구 이봉종 이봉화 이사묵 이사필 이상균 이상만 이상철 이석구 이석기 이석희 이선호 이선호 이성근 이성호 이세영 이소영 이승구 이승근 이승조 이승채 이승칠 이승한 이심훈 이연회 이영식 이영준 이영태 이영택 이영화 이완직 이용수 이용수 이용학 이용한 이용휘 이용희 이우경 이우범 이운붕 이원구 이원국 이원규 이원보 이원영 이원찬 이원창 이원호 이유관 이유석 이윤세 이윤실 이윤영 이윤영 이은즙 이응원 이의풍 이인규 이인수 이인용 이인화 이일 이장우 이장희 이재성 이재신 이재탁 이재학 이재화 이정기 이종국 이종극 이종기 이종소 이종수 이종원 이종원 이종은 이종준 이종태 이종택 이종환 이준식 이준호 이준호 이준홍 이중현 이진호 이찬 이찬영 이찬용 이찬욱 이창규 이창근 이창룡 이창욱 이채욱 이탁응 이태근 이태용 이택규 이택수 이택준 이필국 이필동 이학귀 이학규 이한성 이한일 이한창 이항녕 이해용 이해익 이현재 이호승 이홍운 이화원 이훈영 이흥배 이흥우 이흥재 이희순 인태식 임관호 임대규 임동훈 임명순 임문석 임문환 임병억 임시재 임연상 임영준 임용준 임원용 임응목 임준희 임진섭 임창규 임창재 임철호 임춘성 임충재 임한덕 임헌영 임헌평 임홍순 임홍재 임흥재 장기창 장도건 장문화 장석원 장성화 장수길 장순응 장연철 장영두 장영한 장용환 장윤규 장윤식 장일정 장진석 장헌근 장헌식 장현태 장훈 장휴 전관연 전규락 전기대 전덕룡 전봉빈 전봉엽 전봉훈 전석영 전성오 전성진 전예용 전임봉 전재억 전재우 전종순 전지용 전창림 전창섭 전치덕 전태흥 전택수 전하식 전형순 전흥문 정경모 정계열 정교원 정국채 정규봉 정규원 정기창 정낙훈 정난교 정동일 정민조 정민조 정병기 정병현 정복 정수철 정순방 정연기 정용기 정용신 정용한 정우용 정운구 정운성 정원모 정응록 정인소 정인위 정인택 정일채 정자현 정재남 정재상 정재성 정종연 정종진 정직모 정진기 정진동 정찬선 정천모 정천종 정충원 정하형 정해용 정해운 정해인 정호기 정홍섭 정희찬 조경하 조경호 조구현 조긍현 조기행 조동민 조동선 조동순 조두석 조두환 조문제 조병계 조병교 조병연 조병우 조병우 조병칠 조상만 조성구 조영찬 조재풍 조정두 조정환 조제균 조종춘 조종현 조주현 조중관 조춘원 조충현 조풍호 조한욱 조한철 조희갑 조희련 조희문 주공건 주석균 주시헌 주영린 주영설 주영환 주영환 주우 주재영 주종덕 주진덕 진염종 차남하 차상열 차석민 차윤홍 차종호 차화선 채규항 채린 채선일 채수강 채수현 천장욱 최경식 최경진 최기영 최기집 최남교 최덕 최동근 최두연 최두영 최만달 최문경 최병상 최병원 최병철 최병혁 최병협 최봉기 최상봉 최상진 최상태 최석현 최승칠 최양호 최연식 최용덕 최운상 최원순 최원식 최응두 최익하 최인용 최일봉 최재익 최재호 최정덕 최주영 최준석 최중옥 최지환 최진한 최창한 최창홍 최탁 최태봉 최태현 최하영 최학래 최학수 최항묵 최형직 최홍섭 최화석 하국원 하준환 하태서 한경렬 한교 한교서 한국부 한규복 한동석 한복 한봉섭 한상용 한상헌 한석명 한승린 한영렬 한욱 한인근 한재경 한종건 한진범 한창수 한철우 한홍석 한희석 한희석 한희항 함기섭 함덕중 허강 허섭 현두영 현석호 현순관 현의섭 현장호 현정 홍난유 홍석현 홍성욱 홍순용 홍순욱 홍순일 홍승균 홍승표 홍승훈 홍영선 홍우도 홍우숭 홍운표 홍윤남 홍은식 홍응관 홍의식 홍일룡 홍재설 홍종국 홍종만 홍종무 홍종욱 홍종한 홍종희 홍창섭 홍필선 홍하규 홍한표 홍헌표 황남시 황덕순 황동준 황명수 황문연 황병희 황석교 황영수 황우찬 황운성 황윤동 황의박 황익연 황진성 황탁린 황한용 황항근 황희민

 

경찰 [880]

 

강경희 강낙중 강난희 강남기 강노영 강덕호 강만표 강면욱 강보형 강봉서 강사영 강상혁 강영춘 강용건 강원생 강이황 강익엽 강인수 강인우 강재근 강정선 강진풍 강찬빈 강쾌열 강태규 강태만 강헌 강호순 계광순 계난수 고규윤 고원훈 고윤상 고정준 고제선 고창덕 고피득 곽두금 곽병호 곽을룡 구강 구연수 구연춘 구자경 권만진 권부용 권영대 권영중 권오용 권위상 권익채 권준상 권중익 권중철 권태형 권형철 금낙순 길병성 길소진 길옥열 길용일 김경구 김경배 김경업 김경용 김경태 김계현 김광호 김구배 김구열 김귀동 김규영 김규현 김극일 김근식 김기수 김기조 김기태 김난석 김대원 김덕기 김덕순 김덕양 김덕홍 김도식 김도원 김동선 김동설 김동숙 김동욱 김동진 김득률 김만근 김맹철 김면규 김명찬 김명환 김문용 김병렬 김병연 김병욱 김병주 김병철 김복길 김복의 김봉규 김봉문 김봉수 김봉인 김봉적 김봉준 김봉호 김봉희 김사연 김삼익 김상규 김상섭 김상순 김상욱 김상윤 김석기 김석기 김석칠 김석택 김석호 김성균 김성대 김성범 김성부 김성수 김성철 김세륜 김세보 김소복 김소직 김수만 김수일 김순 김순희 김승연 김승연 김승종 김승찬 김시욱 김양성 김억조 김영걸 김영규 김영동 김영배 김영상 김영석 김영선 김영세 김영수 김영순 김영식 김영주 김영진 김영하 김영호 김옥현 김요현 김용벽 김용선 김용완 김용우 김용제 김용헌 김용희 김우종 김운섭 김원조 김유하 김윤만 김윤복 김윤집 김윤철 김은제 김을도 김응권 김의수 김익권 김인봉 김인영 김인옥 김장환 김재덕 김재성 김재영 김재환 김정만 김정욱 김정탁 김정태 김정택 김정혁 김제병 김제성 김제현 김종가 김종관 김종구 김종두 김종석 김종원 김종주 김종진 김종현 김종환 김주환 김준권 김준홍 김중식 김중호 김증옥 김지연 김진봉 김진영 김진탁 김차봉 김찬욱 김창수 김창영 김창완 김창욱 김천리 김철수 김태석 김태형 김태희 김택근 김택원 김판동 김필수 김학규 김학석 김항곤 김해룡 김해일 김혁태 김현욱 김현철 김형권 김형수 김형순 김형조 김형진 김호우 김홍걸 김홍국 김홍식 김흥률 김희택 나구하 나규렴 나진용 남기윤 남기훈 남승희 남학봉 남효근 노기주 노덕술 노인국 노정근 노정순 노주봉 도광환 도세호 도헌 마동휘 마현희 맹해성 문경필 문관현 문대길 문성옥 문시창 문원보 문진상 문천목 문치재 문태영 박경진 박계봉 박광희 박권수 박귀환 박근수 박기남 박남주 박남진 박내창 박내춘 박달중 박덕용 박명석 박문기 박범룡 박병규 박병조 박병화 박보라 박사룡 박상용 박순상 박승관 박승수 박영근 박영수 박영우 박영화 박영환 박영환 박영환 박영희 박용 박용갑 박용암 박우빈 박운구 박원도 박윤성 박윤철 박을수 박응줄 박의창 박인종 박인훈 박장환 박재수 박재원 박정길 박정로 박정로 박정순 박제도 박제훈 박종숙 박종호 박준호 박진영 박진춘 박진하 박진항 박진호 박차숙 박찬구 박태선 박태언 박학로 박학진 박형로 박호양 박희정 방인형 방효선 배경훈 배귀암 배도준 배만수 배병모 배석린 배영원 배용표 배정자 백능수 백명갑 백성수 백영권 백원교 백의용 변성규 변영화 변종철 변훈 서기순 서기영 서상영 서상용 서소봉 서승렬 서육권 서재욱 서재익 서정국 서정국 서정진 서태하 선우갑 선우박 선우형 성낙영 성봉규 성은주 성정수 소진은 손경수 손석도 손양한 손영남 손해진 송남섭 송덕수 송병주 송병헌 송세태 송수용 송시경 송영호 송인석 송종태 송주호 송희철 신두영 신두현 신면동 신상호 신수일 신양재 신우균 신정식 신종섭 신철갑 신태균 신태현 신태희 신형수 신흥만 심능유 심두근 심상우 심재억 심형택 안경선 안병록 안수병 안승복 안정국 안정옥 안종렬 안종철 안창준 안형식 안흥준 양금룡 양성순 양익현 양재덕 양재홍 양주한 양형건 어봉룡 어윤호 엄명섭 엄의섭 엄주면 여경엽 여동춘 여태현 연성희 연태윤 염은준 오경팔 오기선 오도련 오동주 오동환 오봉수 오석근 오석유 오세기 오세영 오세윤 오수만 오연태 오영근 오영세 오용근 오이석 오준영 오치한 오태여 오학영 왕인식 왕희필 원세호 위금봉 위종기 유경시 유금열 유금용 유기룡 유남선 유만종 유명렬 유배한 유복문 유부룡 유석화 유성삼 유승운 유인근 유재춘 유정식 유진문 유진후 유창렬 유치억 유치엽 육무철 윤경로 윤만중 윤병희 윤상일 윤수현 윤시영 윤용대 윤용원 윤작로 윤정봉 윤정선 윤정희 윤종화 윤찬수 윤태남 윤학기 윤학행 윤학현 윤화규 윤훈모 은성학 은한섭 이경재 이경회 이계한 이교승 이구범 이국섭 이군돌 이규채 이규한 이근섭 이기영 이기현 이난수 이능섭 이덕근 이동섭 이동재 이두환 이면근 이면식 이명흠 이무갑 이민권 이민택 이민행 이민호 이배훈 이백규 이병면 이병식 이병호 이보운 이봉래 이봉선 이봉인 이봉재 이사은 이상배 이상섭 이상윤 이상춘 이성근 이성도 이성실 이성옥 이수달 이수협 이순만 이순재 이신규 이영관 이영근 이영근 이영우 이영춘 이완두 이용만 이용승 이용천 이원극 이원보 이원용 이원우 이원찬 이유하 이윤종 이은섭 이을룡 이응양 이응진 이인근 이인식 이인주 이재붕 이정근 이정남 이정술 이정용 이종국 이종만 이종무 이종수 이종식 이종한 이주완 이중수 이중화 이지균 이지춘 이진상 이진하 이찬익 이창배 이창순 이창우 이채순 이천주 이철봉 이춘근 이태순 이태훈 이택 이하주 이한구 이한선 이헌규 이현수 이현우 이홍순 이흥세 이흥식 이희영 임권택 임만선 임병식 임응기 임인식 임일성 임학용 임헌영 임형순 임호영 임흥재 장강선 장계택 장기석 장덕영 장두만 장성근 장성동 장세권 장우상 장우식 장준근 장춘갑 장헌근 장혜순 전규태 전기완 전남수 전문순 전병록 전봉덕 전봉설 전세엽 전영찬 전용환 전익서 전재우 전정윤 전진원 전창림 정관모 정규봉 정규혁 정기영 정기창 정낙서 정낙영 정낙주 정뇌호 정두형 정병규 정봉기 정석우 정성식 정세호 정쌍동 정연주 정우현 정운복 정운필 정이숙 정인영 정인하 정인회 정일룡 정재현 정정석 정정옥 정제봉 정준모 정준택 정진환 정창근 정충원 정치훈 정태휴 정태흥 정필화 정한영 정해인 정환선 정희영 조갈범 조갑이 조관빈 조규림 조기찬 조남재 조동흥 조성구 조연광 조익로 조익제 조익호 조인옥 조점제 조정관 조종춘 조종훈 조진원 조진호 조찬현 조창현 조천동 조태환 조희창 주익상 주찬오 주홍섭 지약영 진대성 진순길 진용섭 진형우 차대환 차원준 차정준 차창순 채규병 채규철 채규한 천경식 천규문 최경진 최관선 최규진 최금남 최기남 최기성 최동규 최동섭 최동수 최동주 최동직 최두천 최백순 최병두 최병식 최봉달 최봉오 최상덕 최상룡 최상욱 최석현 최성수 최순정 최승준 최여옥 최연 최연식 최영근 최영우 최용학 최원균 최원복 최응두 최인범 최재석 최제현 최주영 최준성 최지순 최지환 최진태 최창렬 최창학 최창한 최창홍 최치림 최탁 최태경 최태선 최태현 최한석 최형준 최흥선 표한용 하선진 하판락 한달원 한동석 한동희 한두형 한석명 한성구 한영기 한용 한용수 한인순 한 장현 한정석 한종건 한종수 한태헌 한호석 함병헌 함양수 함희창 허규원 허기엽 허섭 허현 허효연 현기언 현석준 현시달 현응팔 홍낙구 홍명후 홍병식 홍상옥 홍석창 홍성섭 홍성준 홍순관 홍순근 홍순봉 홍영언 홍재일 홍정길 홍종익 홍형표 황경준 황봉진 황산봉 황신태 황영철 황용석 황윤수 황인환 황재락 황치수 황태근 황헌성

 

[387]

 

강기태 강동렬 강병일 강석호 강영태 강재순 강재호 강창선 강태민 강필룡 강필우 강혁신 강흥약 계병로 계인수(계인주) 고경수 고기범 고병억 고영균 고준봉 고준열 구동욱 구학서 권승록 권영한 권인채 권정식 권태한 권희수 김경천 김광언 김교선 김기백 김기원 김기주 김기호 김대식 김동하 김명덕 김묵 김민규 김백일(김찬규) 김복연 김부갑 김사석 김석람 김석범 김석원 김석원 김성규 김성운 김성훈 김송 김송산 김순길 김순선 김신도 김안도 김약선 김영 김영각 김영록 김영수 김영신 김영철 김영택 김영한 김옥기 김용국 김용기 김용헌 김용호 김원기 김응남 김응선 김응조 김인성 김인욱 김인욱 김일운 김일환 김임석 김재명 김재풍 김정렬 김정일 김정호 김정희 김종석 김종식 김주찬 김준원 김중규 김진길 김진무 김진창 김창규 김창룡 김천흥 김철남 김청송 김최길 김충남 김치반(김치학) 김태원 김학원 김해도 김현묵 김형섭 김호량 김홍준 김희선 김희초 나흥순 남우현 남희철 노태순 도일평 마동악 문용채 문이정 민덕호 박동균 박동준 박동춘 박두영 박문병 박범집 박병두 박봉조 박성도 박승훈 박영철 박영철 박요섭 박원석 박임항 박재흥 박정희 박준호 박창하 박춘식 박태희 박풍조 방득관 방문수 방영주 방원철 방인섭 방태욱 백겸 백경춘 백문린 백선엽 백세걸 백인섭 백인준 백창기 백홍석 서영철 서일보 서정필 석석봉 석주암 석희봉 선우갑 손병일 송석구 송석하 송오송 송진탁 신봉균 신상묵 신상철 신우균 신응균 신태영 신학진 신현준 심의진 안광수 안병범(안종인) 안영길 안영치 안옥기 안익조 안홍도 양국진 양대진 양진동 어담 엄주명 염창섭 오규범 오명복 오문강 오세훈 오준걸 오진영 왕유식 우종현 원용국 원용덕 유경식 유관희 유광렬 유기성 유병권 유승렬 유영림 유원식 유원효 유재흥 윤국상 윤덕병 윤상필 윤송남 윤수현 윤춘근 윤태일 이각 이강우 이광원 이국권 이규일 이근묵 이기건 이기영 이대영 이덕순 이덕진 이동암 이동준 이동훈 이두만 이명세 이명신 이문악 이병건 이병교 이병권 이병규 이병주 이봉수(이원길) 이봉춘 이상렬 이상묵 이상진 이선풍 이성림 이송승 이순 이승녕 이승칠 이영걸 이영산 이영춘 이용문 이용성 이용원 이용호 이용호 이원춘 이원형 이응구 이응준 이의풍 이일신 이재기 이제규 이제정 이종성 이종찬 이주일 이준(이준옥) 이준섭 이집룡(이룡) 이천택 이청갑 이춘성 이춘원 이학래 이학문 이한림 이해봉 이형근 이형석 이호연 이호진 이흥국 이흥권 이희겸 이희두 이희태 임달수 임병규 임병두 임재춘 임충식 장기섭 장기승 장기춘 장기형 장석윤 장성환 장수암 장연용 장연창 장영석 장유근 장택민 장효봉 전길룡 전남규 전영헌 전원상 정래혁 정상수 정세진 정운홍 정은용 정일권 정일평 정해붕 정현 정훈 조경성 조대호 조동윤 조명륜 조병권 조성근 조성엽 조영원 조용구 주선갑 주영걸 주재준 지인태 지장화 지진국 지치룡 차만재 차명환 채낙순 채병덕 채청송 최경만 최구룡 최귀창 최기청 최남근 최명하 최병혁 최복수 최세창 최수부 최승업 최우석 최재범 최재범 최재항 최정근 최주종 최진창 최창륜 최창식 최창언 최철근 최충의(최충희) 최학진 태용범 한광두 한기걸 한문권 한왕룡 한용현 한천봉 허수병 허영록 홍무 홍문과 홍사익 홍청파 황검추 황대천 황치삼

 

생각해본다. 이들 가운데서 국무총리가 나오고 장관이 나왔다. 역대 대통령 가운데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을 제외한 전원이 특권층 부역자 또는 그 후손인데 다른 결과가 나오겠는지. 저 뜨르르한 특권층 부역자 면면을 조금만 살펴도 패거리는 패거리끼리만 논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백낙준, 이갑성, 장면, 장택상, 백두진, 정일권, 최규하···노덕술 아들 노재봉, 김연수 아들 김상협···. 생각해본다. 식민지 치하에서 나으리는 얼마나 무서운 존재였는지. 그때 나으리가 지금 나으리. 평민을 개돼지로 지칭하는 이들이 그들이다. 생각해본다. 그들인 이들이 오늘날 우리를 똑같이 끗빨로 조지는 풍경 속에서 우리는 얼마나 두렵게 순치되어왔는지. 군대와 경찰 수뇌부 부역 풍경을 더 세밀하게 들여다보면 우리 생각은 그만 집중력을 잃고 만다. 오마이뉴스 2020.8.20. 기사를 인용한다.

 

대한민국 초대 육군참모총장은 국가 공인 친일파 이응준이다. 일제강점기 일본군 장교로 무려 30여 년을 복무한 인사다. 당시로서는 매우 드물게 조선 출신임에도 일본군 대좌(대령)까지 올랐다. 이런 인물이 해방 후 우리 군의 중추가 돼,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 인사들이 대한민국 국군의 요직을 차지하는 데 마중물 역할을 했다.

 

해방 후 미군정과 긴밀히 접촉한 이응준은 미군정청 국방사령부 국방사령관 고문으로 위촉됐다. 이후 김백일, 백선엽, 채병덕 등 일본군 및 만주군 출신 군인들을 미군정이 운영하는 군사영어학교에 입학하도록 주선했다. 군사영어학교를 나온 이들은 국군의 전신인 국방경비대에 입대해 국군의 핵심이 된다. 이응준은 194812월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첫 번째 육군참모총장이 됐다. 이 때문에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 머리맡에 있는 장군 제2묘역에 묻힌 이응준의 묘에는 군의 아버지라는 글이 새겨졌다.

 

하지만 이응준은 일제강점기 내내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일제를 위해 헌신한 인물이다. 1941년 일본군 육군 대좌로 승진한 이응준은 후방에서 일제의 침략 전쟁을 지원하며 여러 차례 조선의 청년들이 일본 군인이 돼 전쟁터로 나가 목숨을 바쳐 천황에게 충성을 다해야 한다라고 공개적으로 발언했다. 2009년 대통령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이응준을 국가 공인 친일파로 선정해 공식 보고서에 올렸다. 같은 해 발간된 친일인명사전에도 이응준의 이름은 등재됐다.

 

3대 육군참모총장 신태영과 6대 이종찬, 7대 및 10대 백선엽 역시 모두 이응준과 마찬가지로 대통령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공인한 친일파이자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간한 친일인명사전 등재된 인물들이다.

 

신태영은 아들 신응균과 함께 부자가 국가 공인 친일파로 선정된 인물이다. 이응준과 마찬가지로 일본 육사를 나와 시베리아 간섭전쟁과 태평양전쟁에 참전해 일제 부역했다. 김원웅 광복회장이 지난 15일 광복절 기념사에서 조선 청년의 꿈은 천황폐하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야스쿠니신사에 묻혀 신이 되는 것이라고 말한 주인공이 바로 신태영이다. 그는 3대 육군참모총장을 거쳐 4대 국방부장관을 역임했다. 그의 묘 역시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 머리맡에 있다.

 

6대 참모총장 이종찬은 할아버지 이하영, 아버지 이규원과 함께 3대가 국가 공인 친일파로 선정된 인물이다. 1937년 중일전쟁에 참전해 상하이 방면에서 크게 활약했다. 이러한 공적을 인정받아 일제는 일제강점기 조선인 출신 일본군 장교 중 최초로 최고등급인 금치훈장을 이종찬에게 수여했다. 당시 중일전쟁의 여파로 중국 상하이, 항저우, 난징 등 지역에서 활동하던 우리 독립운동가들은 일제의 총검을 피해 중국 내륙으로 피난길에 올라야 했다. 해방 후 이종찬 역시 육군참모총장을 거쳐 국방부장관을 역임했다. 서울 현충원 장군 제3묘역 최상단에 그 묘가 있다.

 

지난 710일 사망해 대전현충원에 안장된 백선엽 역시 정부에서 공인한 친일파다. 대통령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공식 보고서에는 백선엽이 ‘1941년부터 1945년 일본 패전 시까지 일제의 실질적 식민지였던 만주국군 장교로서 침략 전쟁에 협력했고, 특히 1943년부터 1945년까지 항일세력을 무력 탄압하는 조선인 특수부대인 간도특설대 장교로서 일제의 침략 전쟁에 적극 협력했다라고 기록됐다.

 

이외에도 2대 참모총장 채병덕과 5대 정일권, 9대 이형근은 모두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인물들이다. 태평양전쟁 당시 만주 전선과 후방에서 일군과 만군에 소속돼 직간접적으로 독립군 토벌에 역할을 한 일본군 장교들이었다.

 

대한민국 11대 육군참모총장 송요찬은 일제강점기 지원병 출신으로 일본군 오장(부사관)으로 복무한 인물이다. 일본군으로 복무 당시 그는 전선에 나가는 대신 훈련소에서 조교 등으로 복무하며 조선 출신 청년들을 전선으로 내보내는 데 일조했다. 해방 후 군사영어학교 1기로 졸업했다. 송요찬은 제주4.3 진압군 지휘관으로 군의 중심에 자리 잡았다. 육군참모총장과 국방부장관을 역임했다.

 

12대 최영희, 14대 장도영, 15대 김종오, 16대 민기식, 17대 김용배, 18대 김계원, 19대 서종철 등은 모두 학병 출신으로 1944~1945년 태평양전쟁 후반부 일본군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그러나 전선에 나가 독립군을 토벌했다는 공식 기록은 없다.

 

13대 최경록은 11대 송요찬과 마찬가지로 일본군에 지원병으로 자원입대한 인물이다. 하사관 후보생을 거쳐 일본 육군 예비사관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육사 입학을 위해 대기하던 중 부상당해 일본군 장교가 되지 못했다. 21대 이세호 역시 1944년 일본 육군항공대 간부후보생으로 지원해 일본에서 교육받던 중 종전을 맞았다. 그래서 전선에서 활약하지 못했다. 20대 육군참모총장 출신 노재현은 일제강점기 후반부 행적이 다소 묘연한 상태다. 일부 언론에서 일본군 경력이 전혀 없다라고 강조했지만, 일본 육사를 거쳐 일본군 소위를 역임했다는 기록 역시 발견되고 있다. 다만 전선에서 활약했다는 기록은 찾을 수 없는 상태다.

 

광복회 관계자는 19<오마이뉴스>와의 통화에서 ‘1대부터 21대 대한민국 육군 참모총장들은 모두 일본군과 만주군에 소속돼 활약한 인물들이라면서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군과 만주군의 존재 목적은 일왕에 충성 맹세를 한 뒤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광복군에 맞서서 명백하게 침략 전쟁을 수행했던 군대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친일파라는 범주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일본군과 만주군에 부역한 친일 행적에 관한 만큼은 1대부터 21대까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국민의 군대가 국민이 세운 정부를 쿠데타로 무너뜨리고, 독재자에 맞서 일어선 국민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는 일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이보다 더 명쾌하게 증명할 수는 없다. 황군 출신이 만들고 황군 출신이 이끄는 군대가 대한민국 군대다. 지금은 다른가무슨. 이런 전통은 물론 미군정이 기초를 놓았다. 그런 시각에서 경찰 문제를 이야기해본다. 20201026일 임영태 님이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에 쓴 글을 인용한다.

 

미국은 남한 점령 후 당분간 총독부를 유지하며 남한을 통치하려 했으나 해방된 이 마당에 일본인들의 명령을 또 들어야 한다는 말이냐?’라며 반발하는 한국인의 분노에 애초의 계획을 바꿔야 했다. 아베 총독에 이어 엔도류사쿠(遠藤柳作) 정무총감과 총독부의 일본인 국장들도 해임했으며 군정장관에 아놀드 소장, 경무국장에 조선 주둔군 헌병대장 쉬크(L. E. Shick) 준장, 그 외 국장에 미군 장교들을 임명했다. 914일 미군정장관 아놀드는 기존 경찰기구의 행정적 이용, 새로운 경찰체계의 성격과 기능을 밝혔다. 이는 새로운 미군정 경찰의 탄생을 의미했다. 아놀드는 새로운 경찰권의 근거가 미군정에 있음을 4개 항목으로 설명하였다.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첫째, 연합군최고사령부 포고 제1호 제2조에 의하여 북위 38도선 이남의 경찰기구는 그 기능을 계속하고 있다, 둘째, 정치단체나 귀환병단체 또는 일반 시민대가 경찰력 또는 그 기능을 행사하며 또한 행사하려는 것을 금한다, 셋째, 현재의 경찰기구는 종전의 일본 정부와는 전혀 관계가 없고, 군정장관 밑에 운영되어 그 조직의 실권은 군정장관인 내가 직접 부여하며, 그 조직은 헌병사령관 시크 준장의 지휘하에 놓인다. 넷째, 경찰관은 군정장관으로부터 1) 무기의 휴대, 2) 체포, 3) 분쟁의 진압, 4) 법규 및 질서의 유지, 5) 한국인과 일본인으로 되어 있는 현재의 경찰은 결국에는 전부 한국인으로 조직되도록 한다는 등의 직권을 보유한다.

 

또한 미군정은 군정법령 28호를 통해 사실치안단체와 사실군사단체의 해산명령을 내리고 치안대, 학대도, 보안대 등에 의한 치안 활동과 경찰기구 접수 운동을 불법화했다. 이로써 해방 직후부터 시작된 건국준비위원회와 치안대 활동, 인민공화국과 인민위원회 등의 지역 민중 자치 조직들의 활동은 미군정에 의해 배척되기 시작하였다. 미군정은 미전술군과 군정 경찰의 무장력을 바탕으로 인민위원회, 치안대 등 민중 조직을 배제하고 군정 통치 기반을 구축하려 함으로써 민중 자치 조직과 충돌하지 않을 수 없었다.

 

926일 일반 국민의 무장해제 조치를 취하였고, 929일에는 무기 또는 탄약·폭발물의 불법 소지를 금지하는 내용의 군정법령을 발표하였다. 109일에는 일제 여러 악법인 정치범 처벌법, 예비검속법, 치안유지법, 출판법, 정치범 보호관찰령, 신사법(神社法 ), 경찰의 사법권(경찰서장의 즉결처분권 등) 등이 폐지되었다. 이를 통해 일차적으로 중앙에서 경찰권을 확보하고 경찰기구를 재편한 미군정은 각 지방의 경찰권 장악에 나섰다. 지방의 경찰권과 치안권 장악은 일차적으로 미 전술군에 의한 지역 점령에서 시작되었고 1945년 말까지 38선 이남 지역의 전술군 배치에 의한 점령은 완료되었다. 미군정의 전술군 주둔과 함께 진행된 경찰권 장악에 따라 19468월 말이 되면서 전국적으로 민중 자치 조직으로서 치안대는 거의 해체되기에 이르렀다.

 

한편, 지방에서는 치안대의 경우, 누가 장악하고 있었는가에 따라 미군정 경찰과의 관계가 결정되었다. 치안대가 우익에 장악되어 있었을 경우 군정 경찰조직에 흡수하였으나 좌익이 장악한 경우는 모두 해체되었다. 경기도의 경우는 경찰이 치안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전술부대가 동원된 경우가 거의 없었으나 경상도, 전라도의 경우는 군정 경찰이 치안권을 장악하지 못할 경우 미군 전술부대가 질서유지를 위해 동원되어야 했다.

 

미군사령부는 912일 아놀드 소장을 군정장관에 임명함과 동시에 헌병사령관 쉬크 준장을 경무국장에 임명해 총독부 경무국을 그대로 인수했다. 미군정은 일본인을 포함한 모든 경찰을 존속시키고 그 기능을 지속하게 함으로써 빠르게 총독부 경무국이 갖고 있던 경찰조직을 장악할 수 있었다. 또한 초기 미군정 경찰은 일제와 다름없이 헌병 경찰조직이었다. 헌병사령관 쉬크 준장이 헌병과 경찰을 총괄, 장악했고, 전술군과 적극적으로 협조하여 경찰 업무를 수행했던 것이다.

 

미군정은 일제시기 총독부의 조직체계를 물려받았을 뿐만 아니라 경찰조직을 더욱 중앙집권화했다. 일본의 맥아더 사령부는 일본의 국립경찰이 지역의 대중적 통제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전제적이며 억압의 도구로 사용되었다고 보고 중앙집권화된 경찰제도를 폐지하였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경찰조직을 일제보다 더욱 중앙집권화했다.···

 

19451021일 미군정청은 경찰 중앙기구로 경무국(The Bureau of Police, The Police Bureau)을 설치함으로써 중앙집권적인 경찰 제도를 확립하였다. 경무국의 설치와 함께 도지사 아래 도경찰부가 설치되었으나 이는 일제 경찰조직을 답습한 것이었고 실제로는 경무국의 통제를 받았다. 미군정은 경무국을 설치하면서 국립경찰이라는 용어를 썼는데, 실제로는 미군정의 군정권에 근거를 두고 있었으므로 군정 경찰이었다. 그럼에도 미군정이 국립경찰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미국의 경우 주경찰·시경찰 등과 같은 지방자치단체가 운영하는 자치경찰이 있고 연방경찰이 있는데, 당시 미군정 경찰은 전국적으로 조직되었다는 의미로 국가경찰, 국립경찰이라는 용어를 쓰게 된 것이다.

 

미군정 당국은 1029일 챔패니(Arthur S. Champeny) 육군대령을 경찰 감찰관으로 임명, 군정경찰에 대한 감찰을 시행하게 했다. 챔패니의 감찰 결과를 바탕으로 19451227일 군정장관의 명령으로 국립경찰의 조직에 관한 건을 발표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조선 경찰은 하나의 국립경찰부대임. 조선인 경무국장은 조선 내 전 경찰의 최고사령관임.

 

2. 경무국장은 국립경찰의 조직·관리·훈련·수속·활동·인사 등에 관하여 책임이 있음

 

3. 경찰국 예산 자금은 경무국장에게 배당되며 경무국장은 이를 각도 경찰부장에게 할당함. 이에 대하여는 여하한 정부 기관도 간섭할 권한이 없음.

 

4. 각도 경찰부장은 기() 도내에서 법률과 질서를 유지하고 경찰에 부과된 직무를 완수함에 있어 도지사에 대하여 책임이 있음. 도지사는 이 목적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지시를 각 경찰부장에게 할 수 있음. 도지사는 경찰의 조직·관리·수속·재정·인사에 관한 명령을 발할 권한이 있음.

 

5. 시 최고 경찰 책임자는 시 관할 구역 내에서 법률과 질서를 유지하고 경찰에 부여된 직무를 완수함에서 시장에 대하여 책임이 있음. 시장은 이 목적을 달성하는데 필요한 지시를 시 최고 경찰 책임자에게 할 수 있음. 시장은 경찰의 조직·관리·수속·재정·인사에 관한 명령을 발할 권한이 있음.

 

6. 경무국장은 상례적 사항에 관하여서는 각도 경찰부장과 직접 통신함. 각 경찰부장은 그 도내의 모든 예하 경찰관과 직접 경찰 사항을 처리하고, 그 도내에서 발생한 모든 중요 사건을 도지사에게 통보할 것. 시 경찰 책임자는 시에서 발생한 모든 중요 사건을 시장에게 통보할 것.

 

7. 도지사는 경찰의 행동에 관하여 불만히 생각하는 관계가 있으면 경찰국장을 통하여 군정 장관에게 보고할 것.

 

8. 도지사·각 경찰부장·시장·시 경찰 최고 책임자는 이 경찰체제를 원활히 운영하는 데 모든 노력을 다할 의무가 있음.

 

9. 지방 분권적으로 운용하는 동시에 중앙집권적 통할을 하는 것이 현 경찰조직의 관건임. 이것은 각자 관할 지역에서 통치기관으로서 그 임무를 다하는데 책임질 수 있는 경찰로서의 필요한 부속기관의 특징을 갖추 조직체로서 조선인이 잘 아는 바임.

 

군정장관의 명령에 따라 종래 도지사의 권한 아래 있던 경찰행정권을 분리해 도경찰부를 독립시키고, 도경찰부 밑에 총무·공안·수사·사찰·통신 등 5개과를 두기로 결정했다. 이 명령의 핵심은 군정경찰을 중앙의 경무국장의 배타적 관할하에 두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군정 경찰의 조직·관리·훈련·수속·인사·재정 등 모든 면을 경무국장이 배타적으로 장악하고, 각도 경찰부를 도지사의 관할에서 배제, 독립시켜 경무국 산하의 조직으로 개편, 경무국장이 직접 장악하는 것이었다. 이는 경무국이 군정청 내에서 하나의 부서로 독립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고 따라서 경찰의 고도의 중앙집권적인 조직으로 탈바꿈하는 것을 의미했다. 이에 따라 1946116경무국 경무부에 관한 건이라는 군정 명령에 의해 경무국은 경무부로 확대, 개편되었고, 과는 국으로 바뀌어 총무, 공안, 수사, 통신, 교육 등 5개 국이 편성되었다. 이와 함께 경찰직급은 경무부장, 도경찰부장, 차장, 총경, 감찰관, 경감, 경사, 순경 등의 9계급제로 바뀌었다.

 

1946년 경무부 국장급 이상 간부들은 경무부장 조병옥, 차장 최경진, 총무국장 조주영, 공안국장 한종건, 수사국장 최능진, 통신국장 조응천, 교육국장 김정호, 감찰실장 조병설 등이었다. 당시 경찰 정원은 제복 경찰관과 형사를 합해 24,900명이었고 전체의 15%가 형사 관련 부서에 배치되었다. 경기도 6,300, 강원도 1,700, 충북 1,800, 충남 2,600, 전북 2,800, 전남 3,100, 경북 3,300, 경남 3,300으로 경기도와 경남북에 50% 이상이 배치되었다.

 

1946411국립경찰조직에 관한 건이라는 군정명령에 따라 지방경찰이 개편되었는데 경기도 경찰부가 경기도청에서 분리하여 제1관구경찰청으로 독립하였다. 관내 경찰서도 종래 지역 명칭에서 번호제를 실시, 9개의 경찰관구청이 생겼다. 경찰계급의 명칭도 경찰부장을 경찰청장으로, 경찰부차장은 경찰부청장으로 변경했으며, 중앙의 경무부장을 제외하고 시도에는 경찰청장, 경찰부청장, 총경, 감찰관, 경감, 경위, 경사, 순경의 8등급의 경찰계급이 있었다.

 

도경찰부와 시·군경찰서를 번호제로 한 것은 도명을 사용하는 도지사와 지방경찰의 병립적 관계를 나타낸 것으로 19451227일의 명령으로 도지사로부터 경찰권을 분리한 후 재차 독립된 행정기구로서 경무부의 통일적인 체제를 갖춘 것을 의미했다. 이러한 개편은 군대와 같은 명령계통을 가지고 규율적으로 복무하기 위해 경무부와 일원적 연락 아래 두는 것이 목적이었으며 남조선 경찰을 한층 강화하고 기동적인 활동을 위한 것이었다.

 

미군정청은 19469173개의 경무총감부를 설치하여 관구경찰청의 조직과 활동을 중앙집권적으로 통제할 수 있도록 하고 대대적인 인사 개편을 단행하여 중앙집권적인 경찰체제를 완성하였다. 1경무총감부는 제1·2관구를 관할하며 본부는 서울, 2경무총감부는 제3·6·8관구를 관할하며 본부는 전주, 3경무총감부는 제4·5·7관구를 관할하며 본부는 대구에 두었다. 이때 단행된 인사 내용은 다음과 같다.

 

1경무총감부(서울)는 제1관구경찰청장 장택상이, 2경무총감부(전주)는 황옥 경무총감이, 3경무총감부(대구)는 제4관구경찰청장 박재수가 각각 보임되었다. 또한 수도관구경찰청장 장택상, 수도관구경찰청부청장 이익흥, 한종건 경무부 공안국장, 공안국부국장 장영복, 공안국공안과장 이만종, 1관구경찰청장 박명제, 1관구 경찰청부청장 김태일, 2관구경찰청장 김상봉, 제관구경찰청 부청장 박병춘, 4관구경찰청장강보성, 6관구 경찰청장 송병섭, 7관구경찰청장 장자관, 7관구경찰청부청장 유금렬, 8관구경찰청장 박승관, 제주감찰청장 김대봉, 5관구경찰청 부청장 강수창 등이 임명되었다.

 

미군정 기간 내내 지방경찰의 활동과 관련해 도지사의 권한과 중앙 경무부의 지휘 통제를 놓고 계속 논란이 되고 갈등이 있었으나 기본적으로는 중앙 경무부의 통제에 따라 움직이는 단일화된 조직의 성격을 지녔다. 이는 미국인들의 생각이기도 했다. 중앙집권적 통제 아래 놓인 경찰력을 동원해 남한의 혁명 상황을 제어하고 좌익을 억누르는 것이 가장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미군정은 일제의 경찰 구조와 한국인 경찰관들을 재활동하여 경찰기구를 창설하였는데, 중앙집권적으로 조직된 경찰기구는 주로 일제 경찰과 민족 반역자, 그리고 월남한 경찰이 중용되었다. 미군정이 마땅히 청산되었어야 할 인간들을 재고용한 것은 인민공화국과 인민위원회 및 여타 좌익조직들을 한국에서 미국의 목표 실현에 방해가 되는 위협적 요소로 간주했기 때문에 그들을 파괴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으로서 경찰에 의존해야 했기때문이다. 이를 통해 한국 경찰은 미전술부대와 더불어 치안유지와 소요 진압의 가장 중요한 물리력으로 등장했다.

 

미군정은 일제의 경무국 조직을 인수, 개편하면서 일본인을 면직하고 그 자리를 한국인들로 채워나갔다. 미군정은 하급 경찰관들을 채용하기 위해 916일 경찰관 강습소(102일 경찰학교로 개칭)에서 채용시험을 거쳐 대거 충원하였다. 시험은 한글을 해독하고 자신의 이름 석 자를 쓸 정도면 합격했으며, 교육 기간도 3일에 불과했다.

 

그런데 문제는 사실상 남한 치안을 책임질 이 비대한 기구의 수뇌부를 누구로 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미 점령군 사령관 하지 중장의 고문이었던 윌리엄스 소령은 1017일 한민당 수석총무인 송진우를 비롯하여 원세훈, 조병옥 등 한민당 수뇌부와 면담하고 반공사상이 철저한 인물을 경찰 책임자로 추천해 달라고 부탁했다. 송진우는 한민당의 총무로 활동하고 있던 조병옥을 추천하였고, 미군정은 조병옥을 경무국장에 임명했으며, 조병옥은 군정 경찰의 조직과 간부 충원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미군정 당국은 19451021일 부민관에서 경무국 창설식을 거행했는데 당시 경무국장은 아고 대령이었고, 관방총무과장에 조병옥, 수사과장에 최능진이 임명되었다. 조병옥은 이때 미래의 경무국장으로 내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조병옥은···해방 후 대표적인 친미 인사로서 공산당은 물론이고 여운형의 건준 세력과도 철저한 대립 관계를 유지했으며, 군정 경찰의 총수가 된 뒤에는 민중 억압과 좌익 탄압으로 악명을 떨쳤다. 정부수립 후에는 제주4.3사건과 국민보도연맹사건, 부역자처벌 등에서 민간인 학살에 관여한 주요 인물로 지목되고 있다. 조병옥은 일본 경찰 출신이라고 모두 Pro-JAPAN(친일파)이 아니라 생계를 위한 Pro-JOB(전직)도 있었다라며 프로 재팬, 프로 잡’(‘pro-Japan, pro-Job’) 주장을 폈다. 의도적으로 자신의 영달을 위해 민족운동을 방해하거나 민족운동가를 살해한 자 이외에는 일제 경찰을 프로잡(pro-Job)’으로 보아 등용해야 한다고 주장이었으나, 조병옥이 등용한 인물들은 거의 사찰과, 보안과, 고등경찰계 출신으로 독립운동가 체포에 앞장선 가장 악랄한 친일 경찰들이었다.

 

조병옥과 더불어 또 한 명의 경찰 지휘부로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 장택상이다. 장택상은 1946116일 제1관구 경기도경찰청장(후에 수도경찰청장)에 임명되었으나 그 전부터 경기도와 서울 등 수도 경찰의 조직과 활동에 주도적으로 관여하였다. 경북 칠곡 북삼읍 오태동(현재 구미시 임오동)의 대지주 장승원(허위의 제자 박상진이 만든 대한광복회의 군자금 요청을 거부하다 살해됨)의 아들로 태어난 장택상은 영국 에든버러 대학 중퇴하고 국내로 돌아와 활동하던 중 1938년 청구구락부 사건으로 경찰의 조사를 받은 바 있다. 장택상은 제1관구(경기도)경찰청장이 된 뒤 청구회 사건 때 자신을 조사했던 가창현을 불러 어느 시대나 자기 직책에 충실하면 높이 평가 받는 거야라며 칭찬한 뒤 1계급 특진시켜 수원경찰서장에 임명했다. 그 후 가창현은 인천, 평택 서장을 거쳐 정부수립 후에는 서울시경 사찰과장의 요직을 맡기도 했다. 장택상은 경찰권 강화, 경찰의 대폭적인 증원, 민족 경찰의 숙청, 모든 좌익지도자의 체포 등을 가장 먼저 명령했을 정도였다.

 

당시 미군정관리였던 리차드 로빈슨은 이 두 사람(조병옥과 장택상)을 경찰기구 최고 책임자로 임명한 후, 미군정 당국은 경찰 간부와 요원들을 충원하기 시작했다. 과거에 경찰로서의 경험이 있는 사람들필연적으로 일제 경찰에 근무한 자들이 오히려 선호되었다. 따라서 애초부터 경찰 간부와 사병의 대다수는 일제하에서 훈련받은 경찰 출신들이었다라고 평했다. 또한 리차드 로빈슨은 조병옥과 장택상이 경찰의 월권행위, 부패 그리고 법 집행에서 정치적 편파성의 묵인등으로 인해 그들에게 남아 있던 최소한의 명성마저도 파괴되고 말았으며, ‘194731일 서울에서 좌우익의 총격전이 벌어지고 난 후에, 미국의 수석 경찰 고문 중의 한 사람이 내게 말하길, 자신은 조병옥이나 장택상이 그 사건의 전반을 치밀하게 조작한 것이라고 해도 전혀 놀라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계속해서 자신의 서류철에는 이 두 사람을 몇 번씩이라도 교수형에 처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증거들이 확보되어 있으며, 또한 이 두 사람이 권력을 쥐고 있는 한 경찰의 무분별함을 줄일 희망은 전혀 없다고 설명했다라며 비판했다.

 

조병옥과 장택상의 행태를 비판하며 민족 경찰, 민주 경찰, 친일 경찰 청산을 외쳤던 이가 바로 최능진이다. 최능진은 평양 숭실중학교 졸업 후 중국을 거쳐, 미국 듀크대학 체육학과를 졸업한 뒤 안창호의 흥사단에서 활동했다. 1929년 귀국, 평양 숭실전문학교 체육학과 교수로 부임한 그는 19376월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검거되어 2년간 투옥되었다. 조병옥은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함께 검거되었던 동지였지만 해방 후 경찰의 진로를 놓고 심각한 갈등과 대립을 벌였던 것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하다. 해방 후 조만식 밑에서 평안남도 건국준비위원회 치안부장을 지냈으나 소련군의 진주 이후 공산당과 갈등을 일으켜 월남하게 되었다. 처음 경무국장 자리를 놓고 조병옥과 경쟁하였으나 결국 밀려 경무국 수사국장이 되었다.

 

최능진은 조병옥과 장택상의 친일 경찰 기용과 고문 수사를 비판하고 민주 경찰 건설을 주장하며 이들의 행태에 제동을 걸었다. 특히 1946101일 대구에서 시작된 민중의 불만이 거대한 10월 민중항쟁으로 폭발하게 된 것은 친일 경찰에 대한 민중의 분노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에 최능진은 경찰 인사에 있어 일제 경찰 출신, 특히 일제하에서 항일애국자를 탄압·박해하던 악질 고등경찰 출신을 해방된 오늘 경무부 당국이 등용, 특히 수사 경찰의 일선에 배치하였다. 비록 공산주의자라 할지라도 경찰 기술자라는 명목으로 그들을 체포·고문하는 사실은 한국인의 감정을 지극히 손상했다. 그 결과는 군정 경찰에 대한 일반 민중의 반감을 사고 있으므로 이를 시정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미국인들이 좌익의 준동을 척결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며 절대적으로 조병옥과 장택상을 편들었기 때문에 그의 노력은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런 갈등의 와중인 1946125일 경무부장 조병옥은 국립경찰의 사기를 진작하고 명령계통을 확보하는데 유해하다는 이유를 들어 최능진을 파면시키는 조치를 취하였다. 이에 최능진은 조병옥 경무부장에게 보내는 공개장을 통해 소직(小職)은 국립경찰을 위하여 초지를 달성치 못하고 탐관 모리만을 전념하는 귀하에게 국립경찰을 일임하고 나아감은 양심이 허락지 않을뿐더러 3천만 민중이 허락지 않는 중차대한 문제라고 생각하는 동시에 귀하가 추궁한 세 조건은 충분한 증거를 제시치 않고 막연히 운위함은 경찰관의 자격을 스스로 잃은 추태(醜態)라고 생각한다라며 조목조목 반박하며 강력히 비판하였다.

 

그러나 조병옥은 최능진뿐만 아니라 그와 뜻을 같이하는 민족 경찰을 모두 경찰에서 제거하기 위해 128일 대규모 인사를 단행, 경무부 내에 있던 최능진 계열 간부들을 좌천시키거나 사표를 받아냈다. 10월 민중항쟁을 계기로 경찰 내에서 본격적으로 제기된 친일 경찰과 일제 잔재 청산 요구는 오히려 조병옥·장택상 등 친일 경찰 두호 세력의 반일·민족 경찰, 민주 경찰 세력에 대한 대량 해임과 좌천 등의 인사 조치로 실패하고 말았다.

 

194510월 초 미군정은 서울 시내 10개 경찰서장을 임명했는데 모두 친일 경찰이나 친일 관료 출신이었다. 이 인선 작업에는 미군 대위 스털링과 해임된 뒤에도 한동안 보좌역으로 근무했던 오카 전 경기도 경찰부장, 해방 직전 경기도 경찰부 형사과장이었던 최연 등이었다. 특히 최연은 식민지 시기 조선인으로서는 사실상 최고의 계급이었던 경시로서 황해도 보안과장과 경기도 형사과장 등 경찰 요직을 지냈으며, 김일성의 보천보 습격 사건 후 혜산진 사건(조국광복회 관련자들의 대량 검거 사건) 수사에서 박달 등 관련자들을 검거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고 해서 일제 경찰 최고 훈장인 경찰 공로 기장을 받았던 인물이다. 해방 직전 경기도 경찰부 형사과장이었던 최연은 해방 직후 건준에서 일본 경찰 출신들이 모여 만든 건준 경위대를 조직하고 서울 시내 경찰서 접수에 나서자 이에 대항하여 대조선경찰대를 조직해 미군 진주 때까지 막았다.

 

해방 후 친일 경찰의 대부 역할을 한 최연의 보좌를 받아 미군정이 10월 초순 서울 시내 경찰서장에 임명한 10명은 종로서장 이성실, 중부서장, 손석도, 동대문서장 김정제, 성동서장 이회상, 성북서장 김일성, 서대문서장 최운하, 마포서장 박주식, 용산서장 김정채, 영등포서장 윤명운, 창덕궁서장 변종현 등 모두 친일 경찰 또는 친일 관료 출신들이었다. 서울을 제외한 21개 서장도 반은 신인이고, 반은 일제 경찰 출신으로 임명되었다. 경기도 경찰부의 과장으로 임명된 이들도 전부가 일제 경찰 간부였다. 인사권을 쥔 경무과장 최연을 비롯하여, 보안과장 전봉덕, 형사과장 홍병식, 정보과장 한승린, 건축과장 정덕현, 경제과장 문형식, 소방과장 김정배 등이었다. 독립 국가라면 민족 반역자로서 피고인석에 앉아야 마땅할 고등계 형사 최연이 인사 실무를 담당하는 경무과장을 차지함으로써 그 뒤 북한에서 내려온 친일 경찰 등 일제 경찰 간부들이 군정 경찰로 들어오게 하는 창구 구실을 담당하였다.

 

친일 경찰, 친일 관료 출신 군정 경찰 간부의 충원은 1946년에 들어서면서 월남한 친일 경찰과 관료들이 대거 진출하면서 더욱 두드러진다. 경찰 간부들의 반탁운동으로 1946년 초 서울 시내 8개 경찰서장이 임시정부 내무부장 신익희를 만나 경찰 총파업 등을 논의했다는 이유로 해임되었는데 그들이 해임된 자리에 새로 임명된 경찰서장들 전원이 친일 경찰 출신이었고 거의 월남한 자들이었다. 북한에서는 소련군이 인민위원회로 하여금 총독부의 행정권을 접수하게 하여 총독부의 고위 행정·사법 관료층은 물론이고 경찰관, 헌병도 모두 재판받게 하였고, 재판을 피하려고 38선을 넘어 이남으로 도피하는 인사들이 줄을 이었다. 북한에서 일찍부터 친일파 경찰, 사법관료, 행정관료들을 처벌함으로써 이들이 남으로 도피하게 되어 남한의 친일파 경찰과 관료들은 더욱 넘쳐나게 되었다.

 

월남한 대표적인 친일 경찰관들로는 평남경찰부 보안과장 출신의 노덕술(월남 후 경기도 경찰부 수사과장)을 비롯하여 이익흥(내무부장관), 이호우(일제 평남 영원서장), 이하영(경기도 경찰국장), 윤우경(치안국장), 홍병희(서울시경 부국장), 김태일(수도청 부청장), 김원일(가평서장), 문석재(평택서장), 홍택희(서울시경 사찰과 부과장), 장영복(경무부 공안부국장), 박사일(경기도 경찰국장) 등 주요 간부급만 해도 수십 명에 이르러 한국 경찰의 주요 인맥을 형성했다. 이들 월남 친일 경찰, 관료들을 미군정 경찰과 관료층에 매개하는 역할을 담당했던 인물이 경무부 차장이자 조병옥의 보조관이었던 최경진과 수도경찰청 보좌관이었던 최연이었다. 이렇게 해서 1946년 말까지 군정 경찰 간부 중 경위급 이상 1,157명 중 82%949명이 친일 경찰 출신으로 채워졌다.”

 

경찰이 어떻게 국민 아닌 권력의 개노릇으로 일관하며, 빨갱이로 몰아 마을 사람 전체를 불태워 죽이며, 고문으로 사람을 죽이며, 시위 중인 시민에게 물대포를 쏘아 죽이는지 소름 끼치게 실감할 수 있다. 대한민국 경찰은 여전히 조선총독부 경찰이다. 그렇게 출세한 자들 후손은 또 그렇게 동족을 개돼지로 여기며 명문가 끗빨 날리며 승승장구 살아간다. 조병옥의 두 아들이 조윤형, 조순형이다. 둘 다 민주당 계열 사람으로서 육중한 정치적 지위를 점했던 자들이다. 대한민국은 이런 나라다.

 

앞에 인용한 글들과 기본적인 취지를 같이 하면서 다른 시야를 열어주는 글 일부를 소개한다. 미디어오늘(http://www.mediatoday.co.kr) 2023412일에 고승우 님이 쓴 글이다.

 

미국이 2차 대전 후 남한에서 군정을 실시할 때 가장 중요시한 것은 소련이나 공산세력의 아시아 진출을 저지하기 위해 패전국 일본을 반공의 보루로 삼는 것이었다. 그에 따라 미국은 일본에 천왕제의 유지와 관대한 전범 처리로 일본 지배계급과 연대하게 되는 방향을 추진했다.

 

미국은 동시에 남한을 대륙 진출의 교두보로 삼으면서 공산주의 세력의 저지선으로 삼기 위해 일본 등과 연합해야 할 필요성이 크다고 보고 남한 정부에 친일 세력이 대거 진출할 수 있는 조치를 취했다.

 

미군정은 이를 위해 미군사고문단이 일본군 장교 출신 친일 조선인들을 앞세워 남한 내 치안을 담당할 군경을 조직하는 작업을 벌였다. 그런 과정에서 친일 인사를 우대하는 대신 독립군 출신 참여는 배제하면서 친미 세력 확충의 기반을 만들었다.

 

미군정은 군사영어학교를 개설해 일본군 장교출신 조선인들을 대거 입교시켜 친미세력의 배출처로 삼았다(Sawyer, Robert. Military Advisors in Korea: KMAG in War and Peace. Washington: Office of the Chief of Military History, 1962).

 

그 결과 1946년 남조선국방경비대 육군 사령관에 이어 이승만 정부 수립 이후 임명된 육군참모총장의 경우 초대부터 196918대까지 일본육군사관학교나 미군정의 군사영어학교 졸업자들이었다.

 

오늘날 군 일각에서 주권 국가의 당연한 위상인 자주국방보다 한미동맹과 미군 주둔을 통한 군사적 예속이 최상이라는 주장을 펴는 것은 미군사고문단에 의해 의식화된 결과로 추정된다.

 

일제 치하에서 관리를 지낸 조선인 부역자들은 미군정 덕분에 반민족 세력으로 청산되기는커녕 하루아침에 해방정국의 가장 강력한 권력 집단으로 변신했다. 미군정은 행정 편의를 위한다면서 일제가 만든 관공서의 기능을 일부 부활시키면서 친일 부역자들을 기용한 것이다.

 

통계에 따르면 미군정기 전체 25,000명의 경찰관 중 일제 경찰 출신이 5,000여 명으로 전체 20%였다. 독립투사를 고문하던 노덕술, 하판락 같은 악질 일제 경찰 출신들도 미군정하에서 경찰이 된 것이다.

 

그러면 당시 광복군 출신이 경찰이 된 경우는 얼마나 될까? 놀랍게도 달랑 15명이었다. 이런 사실이 밝혀진 것은 문재인 정부 들어선 뒤인 201812월이었다.

 

경찰청의 임시정부 100주년 기념사업 TF’가 광복군 유공자 567명의 행적을 전수 조사한 결과, 경찰 입직이 이미 확인됐던 3명 이외에 12명이 경찰관으로 활동한 사실이 새롭게 발굴됐다. 광복군 출신 독립유공자 중 15명이 대한민국 경찰에 투신했던 것으로 조사된 것이다(KBS 2018122).

 

친일파들은 미군정 하에서 군과 경찰 등에 광범위하게 포진해 있으면서 미군정의 친일 청산을 적극 저지했다. 이들은 민족 반역자 또는 부일협력자의 선거권을 박탈하고, 고등경찰을 지낸 자에 대한 피선거권을 박탈하려는 특별조례법의 시행을 저지했다. 이들은 이 조례법의 입법 추진에 뇌물 제공 등을 통해 반대하는 로비활동을 벌이다가 통과되자 미군정에 취소 탄원서를 제출해 결국 이 법이 시행되지 못하게 만들었다.

 

미군정은 친일 경찰을 두호했다. 그것은 미군정은 친일 경찰 청산을 주장한 경찰 간부를 파면한 것에서 드러났다. 미군정은 1946101일 식량 수급 정책에 반발하는 '대구 사건'이 발발하자 그 원인분석 결과 일제 경찰 청산 등 경찰쇄신 문제가 제기됐지만 수용하기를 거부했다.

 

미군정 당시 경찰력의 20%가 일제 침략자들에게 부역한 인물들로 채워지면서 경찰은 민중의 지팡이가 아니라 민중을 고문, 학살하는 살인마와 같은 쇠몽둥이가 되어버렸다. 그들은 해방정국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무기가 반공, 멸공이라고 보고 민중을 빨갱이로 몰아가는 짓을 수없이 저질렀다.

 

친일 경찰은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 치하에서 온갖 반민족적인 범죄행각을 자행했는데 그 선봉에 선 인물의 하나가 조병옥이었다. 제주4·3사건 진상 규명 및 희생자 명예 회복 위원회가 공개한 조병옥에 대한 관련 자료는 아래와 같다.

 

조병옥은 4·3 발생 직후 일제 강점 시기에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살인적으로 고문한 친일 경찰들을 대거 현장에 투입해 진압하게 했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제주도민이 학살당했다. 특히 조병옥의 비호를 받는 서북청년단의 무차별적 테러가 4·3 사건의 직접적 원인이라는 주장도 제기된 바 있다.’

 

이승만 정권은 미군정이 기용한 일제 경찰들을 그대로 이어받은 데 이어, 서북청년단을 경찰 인력으로 흡수했다. 그 결과 경찰은 6·25를 전후해 수많은 양민을 불법적으로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친일 경찰의 만행 가운데 가장 심한 것 가운데 하나는 194966일 자행한 반민족행위자 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를 습격한 사건이다. 이승만은 친일파 처벌에 부정적 견해를 가지고 반민특위의 활동을 비난하는 담화를 여러 차례 발표했다. 나아가 반민특위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반민족행위처벌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하는 등 반민특위의 활동을 불법시하고 친일파를 적극 옹호하였다.

 

이승만은 제주 4·3 비극이 진행되는 동안 반민특위가 친일 경찰들을 구속하자 반민특위를 와해시키는 식으로 친일 경찰을 적극 두호했다. 반민특위를 주도했던 국회 소장파 의원 13명을 남로당 프락치라고 체포한 데 이어 백범 김구 선생을 암살하면서 특위는 극도로 위축되어 업무 개시 8개월 만에 무력화된다.

 

그 후 194910월에 반민특위, 특별검찰부, 특별재판부는 해체되었고 반민족행위처벌법은 19512월에 폐지되어 친일파를 처벌할 수 있는 법적 장치는 완전히 사라졌다. 이승만이 친일파 청산을 방해하면서 한국 사회는 수십 년 동안 혹독한 대가를 치렀다.

 

친일 경찰은 이승만 정권하에서 경찰력의 중심 세력으로 뿌리를 내렸으며 다수가 정부 훈장을 꿰차기도 했다. 지난 2016년 뉴스타파의 보도에 따르면, 친일 인사 222명에게 해방 후 440여 건의 훈장이 수여됐다. 일제로부터 훈장과 감사장을 받은 뒤, 해방 후 대한민국 훈장을 받은 친일파도 48명으로 집계됐다. 그 가운데는 친일 경찰로 가장 악명 높았던 노덕술도 포함됐다.”

 

“3·1운동이 발생한 뒤 1백여 년, 광복이후 70여 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독립운동 유공자가 발굴되고 있다. 이는 이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모든 것을 던진 사람들에 대한 후손들의 작업이 부진했다는 사실의 반증이다. 이승만이 친일세력과 손을 잡고 반민족적 정치를 한 결과의 하나로 그 후유증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발굴과 서훈 작업은 물론 독재정권에 항거해 민주주의 확립에 기여한 민주인사들에 대한 처우도 지지부진 상태다.

 

국가보훈처가 지난 수십 년간 독립운동 발굴과 서훈 등에 비판을 자초하는 자세를 취했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며, 이런 부적절한 태도는 독재정권에 항거해 민주주의 쟁취에 헌신한 민주인사들에 대한 정당한 예우에 소홀한 것에서도 반복되고 있다.

 

이승만 정권 이래 수년 전까지 실시한 국가유공자 지정 등 국가 차원의 보훈 결정 96%는 군과 경찰에 집중되어 있고 독립유공자와 민주유공자는 모두 합쳐 4% 수준에 그치고 있다. 이는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을 하면 본인은 물론 가족이 대를 이어 고생한다는 말이, 참혹한 현실을 고발하는 진실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수치다(한겨레 20190508).

 

국가보훈 대상자는 국가보훈기본법 제3조 제1항에 네 개의 범주로 나눠 규정하고 있다. 첫째 일제로부터 조국의 자주독립, 둘째 국가의 수호 또는 안전보장, 셋째 대한민국 자유민주주의의 발전, 넷째 국민의 생명 또는 재산의 보호 등 공무수행이다.

 

20192월 발표된 국민중심보훈혁신위원회 의결 권고안에 따르면, 이 법에 따른 보훈 대상자는 20171231일 현재 2,573,100명으로 그 96.3%가 군인(일부 경찰 포함)이고 독립유공자는 2.9%(75,068), 민주유공자는 0.8%(21,128)에 불과하다. 민주유공자는 4·19혁명 및 5·18 유공자뿐이다.

 

4·19혁명 및 5·18 민주화운동 외에 민주주의 발전에 헌신한 민주인사들, 이른바 민주 관련자들을 민주유공자에 포함하기 위한 입법 추진이 2000년 이후 최근까지 여섯 번째 발의되었지만, 현재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이에 따라 전태일, 박종철, 이한열, 김세진, 이재호 등 자신을 희생해 민주주의 발전에 헌신한 인물 등도 국가유공자 대열에 끼지 못하고 있다. 이런 불합리를 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지난 20년간 계속되었으나 아직도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

 

윤석열 정권 국가보훈처는 아예 대놓고 특권층 부역자들이 국가 보훈 대상자 심사를 하도록 판을 엎어버렸다. 심사위원에서 광복회 회장을 배제하였다. 자신들 신분을 세탁하고 특권을 배가하기 위한 협잡질이다. 현재진행형 대한민국 모습이다. 알면 알수록 고통이 깊고 무거워진다. 한평생 기조 우울증에 시달리며 살아왔는데 황혼이 짙어가는 지금 더 엄중한 상태로 미끄러지는 중은 아닌지. 이렇게 살아봐야 우리 공동체에 어떤 이득도 남기지 못하는 건 아닌지. 물색없는 노인이 주책없이 벌이는 삽질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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