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 있는 것은 먹지 않는다.” 어느 비건이 한 이 말을 <시사인> 기사에서 읽은 적이 있다. 그가 이 말을 하는 2초 정도 시간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남이 모르거나 가닿지 못하는 진실을 혼자 알거나 가닿을 때 짓는 표정과 자신이 모르는 줄 모르면서 남이 아는 얘기를 할 때 짓는 표정은 아마도 같거나 적어도 비슷하지 싶다.

 

저 말은 얼굴이 대체 뭘까를 화자가 진지하게 생각해본 뒤에 하지 않았음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적어도 육식하는 사람이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는 의미에서) 비범해 보이는 저 말도 피상적일 가능성이 작지 않다. 왜냐하면 동물에게는 얼굴이 있고, 식물 또는 그 이전 생명체에게는 얼굴이 없다는 통속한 상식만으로 비범해 보이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다.

 

과연 식물 또는 그 이전 생명체에게는 얼굴이 없을까? 동물이 지니는 얼굴을 기준으로 삼으면 딱 잘라 그렇다고 대답하는 데 큰 고민이 필요하지 않다. 대체로 어떻게 생겼으며 무엇을 하며 무엇에 쓰이는지 상식으로 알 수 있으니 말이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생각할 수 있으나, 여기가 끝이 아니라고는 아무나 생각할 수 없어서 문제가 아연 어려워진다.

 

동물과 식물은 각각 다른 원리로 생존 전략을 구사한다. 동물은 기관 중심 시스템이다. 이동하는 생명체로서 선택하고 집중하는 데에 비교 우위를 지니기 때문이다. 얼굴도 그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식물은 모듈 분산 시스템이다. 이동하기 힘든 생명체로서 모든 조건을 견디며 생명을 보존해야 하기 때문이다. 얼굴뿐만 아니라 다른 기관도 지니지 않는다.

 

이런 차이를 고려하지 않고 얼굴 유무를 이야기한다는 자체가 동물 중심주의, 그러니까 종 편견에 해당한다. 얼핏 들어도, 정색하고 들어도 얼굴 없는 생명체를 낮게 평가하는 배음이 들려온다. 진실은 그 반대라고 생각할 수 없다면 이는 매우 심각한 무지 상태다. 전방위·전천후 생존 솔루션을 구축한 식물이 훨씬 더 고등한 생명체다. 모든 곳이 얼굴이니까.

 

여기에 반대할 수 있는 관용을 베푼다. 반박을 기대한다. 일단 다음 이야기를 더 하겠다. 얼굴이란 과연 무엇인가? 얼굴 전문가는 수없이 많다. 그 많은 전문가가 일제히 놓치고 있는 진실은 과연 무엇인가? 얼굴이 생식기라는 진실이다. 이 진실을 놓친 실패 또한 종 편견에서 발원한다. 좁은 의미 생식기가 얼굴에서 멀찌막이 따로 떨어져 존재하기 때문이다.

 

식물 생식기는 이와 다르다. 꽃은 인간 미감을 위해서가 아니라 생식을 위해 아름답게 핀다. 우리가 피상적으로 꽃이라 부르는 부위는 꽃잎, 암술, 수술, 꽃가루, (변형된) 꽃받침 모두를 포함한다. 이 통칭하는 꽃은 생식기와 얼굴을 함께 품고 있는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식물은 좁은 의미 얼굴도 지니고 있다. 그 얼굴은 곰팡이 얼굴 버섯에서 왔다.

 

버섯이라면 인간은 우선 식품으로 표상할 뿐 별달리 생각하지 않는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봐야 항암 효과 운운, 그리고 송로버섯 운운. 버섯은 곰팡이 생식기다. 곰팡이는 지구 생태계를 네트워크 시스템으로 설계한 창조자다. 이 창조자에게서 버섯이 왔고, 식물 꽃이 왔고, 동물 얼굴과 성기가 왔다. 인간은 버섯이 인간 성기를 닮았다며 무식하게 킥킥댄다.

 

말이 나온 김에 끝까지 간다. 비건은 버섯을 먹는가? 버섯을 식물이라고 생각하고 생각 없이 먹고 있음이 틀림없다. 버섯은 식물이 아니다. 곰팡이가 식물이 아니니 당연하다. 구태여 따진다면 버섯은 본성에서 동물 쪽으로 기울어진다. 생김새와 질감이 그 증거다. 무엇보다 동물 본성이 여기서 발원한 진실에 무지해서 인간은 뒤집힌 편견에 사로잡혀 있다.

 

마지막으로 먹는 행위를 도구화하고 있는 태도를 전복해야 한다. 먹는 행위는 자체로서 먹이가 되는 생명과 소통하는 제의이기도 하다. 제의란 인간 본성에 가닿는 행위다. 거룩하다. 거룩한 만큼 신난다. 얼굴 있네, 없네, 논의 따위가 얼마나 모욕적인지 알아야 한다. 먹는 행위를 도구화하는 주제에 감히 동물을 먹는다고 비난하는 우월감은 참으로 가소롭다.

 

비건이 동물을 먹지 않아서 뭐라는 거 아니다. 식물과 식물 이전 생명을 함부로먹기 때문에 시비한다. 동물권을 말하려면 식물권이라는 개념부터 알아야 한다고 다툰다. 동물 존중하는 일과 식물 성찰 없이 먹는 일을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고 톺는다. 부분 지식은 오류다. 관통하는 지식이 지혜를 낳는다. 스러지는 순간까지 관통을 멈춰서는 안 된다.

 

정색하고 다시 말한다. 모든 생명에는 얼굴이 있다. 얼굴은 생식기니까. 생식은 생명 궁극 본성이니까. 궁극 본성을 펼쳐내는 지성소를 두고 동물 중심주의가 자랑스레 지절거리는 소리를 더 이상 내버려 둬서는 안 된다. 그러기에는 시간이 너무 없다. 화급하다. 이렇게나마 외친다면 귀엽게 봐주기로 한다: 식물과 그 이전 생명을 위해 우리 동물 먹지 말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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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며

 

1990년대 후반 나는 한의대 입학을 위한 수능 공부를 경기도 용인에 있는 절에서 한 적이 있다. 절에 큰 행사가 있을 때 요사채 속인들이 울력에 동원되는 일은 오래 묵인된 관습이었다. 물론 어떤 경우에는 갈등이 빚어지기도 했다. 대부분 공부하러 들어온 사람들인데 승려들이 그런 배려 없이 일을 시키곤 했기 때문이다. 내게도 그런 사건이 느닷없이 일어났다.

 

잠시 머물면서 이따금 예불도 이끌고 요사채 있는 속인들과 족구도 하면서 안면을 튼 객승이 하나 있었다. 평소 자기가 두 바퀴 구른경지에 도달했다고 큰소리치던 자였다. 점심 식사 마치고 어느 처사 방에 모여 차 한잔하고 있는데 종무소 총무가 와서 법당 잡역 좀 도와달라 청했다. 농담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시간이 조금 지체되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갑자기 그 객승이 나타나더니 빨리 움직이지 않는다며 욕설을 퍼부었다. 모두 어안이벙벙해하는데, 사람들 눈길이 내게로 쏠렸다. 내가 그 객승보다 한참이나 연배가 높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냥 조용히 사람들을 이끌고 법당으로 이동해 일을 마쳤다. 돌아오면서 한 청년에게 일렀다. “아까 그 스님한테 말 전해라. 나한테 사과하라고.” 청년이 돌아와 말했다. “사과할 테니 스님 방으로 오시래요.” 내가 답했다. “사과할 사람이 와야지 받을 사람이 가는 법은 없다.” 마침내 그가 나타났다. 노기등등했던 모습은 사라지고 한껏 겸손한 표정으로 죄송하다고 했다. 내가 불교 신도였다면 그가 내게 사과했을 가능성은 없다. 그는 평소에 불자들이 뵙기를 청하면 삼배를 요구했다고 말기에 말이다.

 

이 시건방진 객승은 계를 받고 속가에 갔을 때 어머니한테 삼배를 받았다고 했다. 그가 과연 예외적 인물일까. 무슨. 계를 받아 정식 승려가 되면 부처님 가문 사람이 되므로 속인과는 격이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는 승려가 얼마나 될까. 이런 특권의식은 비단 불승에게만 국한하지 않는다. 개신교 목사도, 천주교 신부도 본질이 같다. 이들이 잘못을 저지르고도 성찰하지 않는 데에는 이런 오만이 자리 잡고 있다. 도덕과 윤리, 심지어 법 위에 있다고 믿는다. 부처나 하느님 법을 따르지, 세속법을 따르지 않는다고 공공연히 말하지 않던가. 초월자와 합일시키는 이 오만은 단순한 오만이 아니고 정신병 일종이다. 전광훈 입에서 튀어나온 하나님도 까불면 나한테 죽어!”라는 말은 웃자고 하는 수사가 아니다. 저들은 무도덕 경지에서 논다.

 

특권층 부역자로서 목사, 신부, 승려가 무슨 부역 행위를 저질렀으며, 사과하지 않고 역사를 왜곡했는지 비교적 소상하게 살폈다. 앞으로도 이 역사는 전복되지 않고 계속 반복될 가능성이 크다. 거대 통속 종교 프레임을 깨뜨리지 않는 한 변화를 기대하는 일은 난센스다. 프레임을 그러면 누가 깨뜨리는가? 목사, 신부, 승려는 할 수 없다. 초월적 기득권에 올라탄 특권층이기 때문이다. 각성한 평신도 부역자가 의문을 품음으로써 변혁은 시작된다. 가령 대한불교조계종 조계사 대웅전 앞에서 기도 올리고 있는 또 다른 평신도에게 묻는다: 대한불교조계종이 1941년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총독부 승인을 얻어 부역승들이 창종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총독부가 승인했다면 그 종헌과 조직 성격이 어떠했으리라 짐작하십니까? 해방되면서 종단을 자진 해체하고 대중 의지를 물어 재창종했어야 옳지 않습니까?

 

이 질문에 단도직입으로 답할 수 있는 평신도는 거의 없으리라 본다. 이 불모지에서 누군가가 첫발자국을 떼어야 한다. 각성한 평신도 부역자 하나가 어렵사리 또 하나와 손잡을 때 비로소 네트워킹이 열린다. 나아가 비인간 주체와 더불어 일궈내는 네트워킹이 열린다. 이 나지막한 영성 연대만이 제국주의와 부역 식민주의 종교 흑역사 뿌리를 뽑아낼 수 있다. 모두 그린 샤먼으로 거듭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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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악산은 한양도성 주산이고, 자하(창의)문 고개를 경계로 서쪽에 인왕산이 있다. 인왕산은 조선왕조 수호 산으로 불교 금강신 이름을 붙였고, 무악재 고개를 경계로 서쪽에 안산이 있다. 조선을 개국할 무렵 한때 이 안산을 주산으로 하여 도읍하려 했다고 한다. 그랬더라면 지금 연세대학교가 있는 자리에 궁궐이 들어서고 이를 중심으로 한양도성이 조성되었을 터이다. 풍수적으로 그만큼 좋다는 뜻일 텐데 풍수 잘 모르는 나로서는 걷기 좋은 숲이 확실하다는 말 정도만 할 수 있다. 다른 경로로 다섯 번 걸었는데 모두 좋았다. 산 무서워하는 아내와 함께 오면 딱 알맞겠다고 이번에도 생각했다.

 

안산은 생긴 모양이 말안장() 같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을 파자하면 혁명과 안정이라는 뜻이 나온다. 혁명해서 정국을 안정시키겠다는 정치적 야심을 지닌 패거리가 이 산을 끼고 돌며 더불어 놀았을 법하다. 마치 도봉천 계곡 일대에서 놀았던 기호 노론 패거리처럼 말이다. 시대 배경을 분명하게 알지 못하지만, 한양도성 주산이 될 수도 있었던 산에 그런 야심을 새겨넣는 일은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본다. 더군다나 서인이라면 말이다. 맞다. 서인이 그랬다.

 

이번에 안산으로 향한 까닭은 요즘 내가 계속해왔던 바로 그 제의 때문이다. 물론 현 부역 세력 뿌리인 서인과 안산에 얽힌 서사가 대상이다. 지도 보며 예정했던 바와 달리 미우관과 평화학사 사이 연대동문길을 따라 연세대학교 교정 동쪽에서 진입해 안산으로 향한다. 조금 가다 왼쪽으로 돌면서 왼쪽을 보니 제법 울창한 숲이 나타난다. 나는 직감적으로 청송대라고 알아차린다. 지난 1990년대 초반 연대에 강의하러 드나들면서 말로만 들었던 그 청송대를 30년 만에 뜻하지 않게 들어간다. 다양한 버섯들과 인사하며 이리저리 거닐다가 아주 조그만 도랑물을 발견한다. 호젓한 곳 택해서 정화 신목 버드나무 가지를 삼가 심는다. 간절하게 기도한다. 안산과 그 앞 벌판에 육중하게 자리 잡은 이 학교 숲이 정화 네트워킹을 고요한 함성으로 펼쳐주기를.



숲길은 연대 교정에서 안산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처음 얼마간 계속되는 소나무 숲이 참 아름다웠다. 내가 택한 길이 안산 서북 사면 쪽이기도 하지만 장마철이어서 촉촉한 분위기가 알맞게 배어 있었다. 주로 작디작은 버섯들이 곳곳에서 나를 부르고 있었다. 천천히 가장 긴 경로를 따라 한 바퀴 돌았다. 수시로 길을 놓쳤지만 작은 산에 워낙 많은 길을 낸 터라 금세 방향을 잡을 수 있었다. 마지막에 길이 막혔다 포기한 순간 나타난 쪽문을 통해 다시 연세대학교 교정으로 돌아왔다.

 

백양로를 그리며 길 따라 걷다 보니 하나둘 기억이 살아났다. 물론 백양로는 위치만 같을 뿐 대부분 생경한 풍경으로 바뀌어 있었다. 나중에 들으니 학교 측에서 교수·학생 의견을 무시하고 역사와 생태를 뒷전 한 채 재창조 프로젝트를 밀어붙여 이 모양이 되었다고 한다. 백양로라는 이름이 발원한 백양나무를 베고 그 자리에 은행나무를 심었다. 심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렇다고 하겠지만 은행나무가 마치 남의 집에 들어온 불청객처럼 엉거주춤하다는 내 느낌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천억 원이란 돈이 어디서 나와 이런 토목을 벌였을까. 140년 전통 영역을 싸구려 영화 세트장처럼 테라포밍한 이 살풍경이 식민지 공학 아니면 대체 뭐란 말인가.

 

단골 음식점에 앉아 국수를 시킨다. 먼저 막걸리부터 달래 한 잔 그득 따른다. 벌컥벌컥 소리 내어 마신다. 영혼이 발하는 신음을 목이 내는 소리로 바꾸니 답답함이 조금은 풀린다. 중첩 식민지 쌍것으로 태어나 똑 이와 같은 그림을 되풀이하며 살아가는 내가 뜬금없이 무섭다. 찰나마다 더 새로워지고 순간마다 더 즐거워지는 중독 제국에서 나는 좀비로 살고 있지 않은지 와락 겁난다. 가족과 약속한 장소로 향하는데 자꾸 목이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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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부역 서사

 

1. 통속 불교에는 아예 사회철학이 존재하지 않는다. ‘색공불이(色空不二)’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山是山 水是水)’를 읊조리며 제국에 부역하고 독재에 부복하는 일에 기탄없고 성찰 없다. 염불에는 관심 없고 잿밥에만 눈독 들이는 사판승은 그렇다 치고 견성성불(見性成佛)했다는 선승조차 군홧발이 절 앞마당을 더럽힐 때 자기 청정을 의심치 않는다. 그렇게 유지한 불교 조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중생제도는 대체 어떤 내용을 담고 있을까

 

사실 이런 문제는 모든 종교에 두루 통한다. 하필 불교만은 그래서는 안 된다고 말할 논리적 근거는 없지만 이 땅에 가장 먼저 들어온 고등종교로서 그동안 호국불교를 자부하며 쌓아온 전통은 일제 부역 논리 앞에서 무엇이란 말인가. 지킬 나라가 일본제국인가. 제국이 식민지 종교 따위가 지킬 대상인가.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으니 더는 빈말을 말아야겠다. 그저 부석암 주지 임혜봉이 기독교사상 20118월호에 게재한 글 전문이나 인용한다.

 

불교계의 친일은 한일합병조약 이전부터 시작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를 최취허(崔就墟) 스님의 경우에서 볼 수 있다. 그는 승려의 도성 출입 금지의 해제에 노력한 일본 승려 사노 젠레이(佐野前勵)에게 감사장을 주었다. 승려의 입성 해금 문제는 다른 학자가 이미 지적했듯이 갑오경장(1896) 등 당시의 사회적 개혁 분위기로 볼 때 일본 승려의 활동이 아니었더라도 조만간 해결될 문제였다. 최취허는 1911년 사찰령이 반포되었을 때도 일왕과 데라우치(寺內正毅) 총독의 식민 통치를 성덕명정’(聖德明政)이라 찬양하였다.

 

한일합병조약이 체결된 직후 친일한 승려로는 이회광(李晦光, 1862-1933) 스님이 있다. 그는 병합 직후인 1910106, 조선불교 원종과 일본 조동종의 연합조약을 조인하였다. 나라가 강제로 일본에 병합된 지 45일 만에 조선불교를 일본 불교에 복속시킨 것이다. 이회광은 당시 조선 승려들로부터 매종역조’(賣宗易祖: 종단을 팔고 조상을 바꿈)의 망동이라며 많은 비판을 받았다.

 

한일합병조약 초창기에 아직 일제의 친일이 강요되기 전 한국 승려가 행한 대표적인 친일 행적은 두 가지를 열거할 수 있다. 첫째는 총독부가 191111월 사찰령을 반포했을 때이고, 두 번째는 일왕 메이지(明治)가 죽었을 때(1912730)이다.

 

총독부가 사찰령을 반포하자 30대 본산의 하나인 강화도 전등사의 주지 김지순(金之淳)은 사찰령 시행은 메이지(明治) 일왕의 강은홍택(降恩鴻澤)”이라는 내용의 성은(聖恩)으로 사법(寺法)인가라는 글을 <조선불교월보> 10(191211월호, 2~4)에 발표하였다. 이는 한국 승려가 총독부의 불교 정책을 일본 메이지 일왕의 성스러운 은혜라고 찬양한 것이다.

 

일왕 메이지가 죽었을 때도 자진해서 친일한 승려가 있었다. 1912730, 일왕 메이지가 죽자, 서울 봉원사의 주지 이보담 스님은 메이지의 위패를 법당에 봉안하고 절 안의 스님 60여 명을 독려해서 독경하였으며, 장례일에는 추도식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49재까지 지내주었다. 이때 이회광 스님과 양평 용문사의 주지 김용태 스님도 메이지를 추모하는 의식을 거행하였다. 이들처럼 합병 초기에 자진하여 친일한 한국 승려들은 극소수이다.

 

일제가 조선 민족의 황민화(皇民化:日本化) 운동을 전개한 것은 제6대 총독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 총독재임: 1931.7~1936.7)이다. 우가키는 만주사변(1931.9)과 그 결과로 성립된 만주국(1932.3)을 토대로 대륙을 침략하려는 일본 군부의 야망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식민지 조선에 황민화 운동을 시작하였다. 그것이 바로 심전(心田)개발운동이었다. 우가키가 주창한 심전개발운동은 조선 민족의 순량화(順良化)와 일본화(日本化) 작업의 일환이었다.

 

불교계는 이 운동의 심전이란 명칭이 불경에서 유래하였다 하여 호감을 표시하고 일부 승려들이 적극 호응하였다. 이 운동에 적극 참여한 승려는 조선불교 중앙교무원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본산 주지 5명과 학승 2명이었다. 즉 용주사 주지 강대련, 봉은사 주지 강성인, 범어사 주지 오리산(吳梨山), 화엄사 주지 정병헌, 월정사 주지 이종욱 스님 등과 <불교시보>의 발행인 김태흡(법명 대은) 및 중앙불교전문학교 교수 권상로(權相老) 스님이었다. 특히 김태흡과 권상로는 심전개발 관련 강연과 저술로 일제의 황민화 정책에 능동적으로 참여하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불교계의 친일은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중일전쟁(1937.7)이 시작되면서부터 일제는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불교계에도 노골적인 친일을 강요하였다. 더구나 중앙교무원의 주요 임원 스님들이 이에 적극 호응함으로써 불교계 전체가 친일 대열에 휩쓸려 들어갔다. 중일전쟁 초기 불교계의 친일 행위로는 다음과 같은 사례를 열거할 수 있다.

 

조선불교 중앙교무원의 31본사 주지 대표 이종욱(월정사 주지)과 전국 본사 31개 사찰은 1937725일과 812, 전 조선의 말사(末寺)와 포교소는 811회 오전 5시를 기하여 일제히 국위선양 무운장구 기원을 봉행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리하여 전 조선의 31개 본사와 136개의 말사의 승려 7천 명이 일본군의 승리와 일본의 국위선양을 위한 기원제를 거행하였다. 그리고 724일에는 교무원의 재무 이사 황금봉 스님이 조선군사후원연맹 결성식에 참석하였다. 이 연맹은 후방의 임전 체제 확립을 위해 만든 단체인데 불교계도 참석하여 일본군을 후원하는 일에 협력하기로 한 것이다.

 

총독부에서 중일전쟁과 관련된 전국 순회 시국강연반을 결성하여 193786일부터 2차에 나누어 13도 각처를 순회 강연했는데 강사는 1차에 22, 2차에 59명이 동원되었다. 전국 시국 강연회에는 권상로가 조선 불교계의 대표 연사로 1차는 경북지방, 2차는 함경북도 지방을 순회 강연하였다.

 

조선 불교계에서는 독자적인 시국 강연회도 개최하였다. 85일 서울 개운사에서 대일본제국 무운장구 기원 법요를 한 후 박성권, 김경주, 김영수 스님이 시국 관련 강연을 하였다. 그리고 86일에는 부민관(훗날의 서울시의회 건물)에서 국기요배 등 일본식 국민의례를 한 후 이종욱 스님의 사회로 시국에 대해 의미심장한 개회사를 하고, 권상로와 김태흡(대은), 두 친일 학승이 열변을 토하여 23백여 청중들에게 많은 감명(?)을 주었다.

 

중일전쟁이 시작된 지 1개월째인 193788일부터는 이종욱, 임석진, 황금봉 등 조선 불교계의 주요 간부 스님들은 중국으로 출정하는 일본군 부대의 환송을 나갔다. 이날 이후 조선불교 중앙교무원에서는 거의 매일이다시피 중일전쟁에 출정하는 일본군 파견부대의 환송 행사에 참석하였다.

 

중앙교무원은 일본군 부대의 송영과 아울러 전국 사찰에서 국방헌금과 위문금도 거두게 하였다.

1937831일 현재 교무원이 집계한 본사별 시국 대처 보고 일람에 의하면 각 본사에서는 725일과 81일에 국위선양 무운장구 기원 법요를 거행했다. 여기에 참석한 인원은 3,000명이었고, 시국 강연을 한 곳은 위봉사(87), 은해사(87), 성불사(726) 등이었다. 이때 거두어진 국방헌금은 누계 59860, 위문금은 합계 75124전이었고, 일본군 전사자를 위한 위령제를 지낸 본사는 성불사(819), 영명사(永明寺, 822), 법흥사 그리고 사리원의 고산사(高山寺)등이었다.

 

19379월 중 조선 사찰에서 헌납한 국방헌금 상황은 다음과 같다. 전등사 본·말사에서 156, 은해사 본·말사에서 11350, 중앙불교전문학교 직원 일동이 16, 서울 각황사에서 27, 성불사 본·말사에서 4269, 해인사에서 100, 해인사 소속 암자인 삼선암에서 250, 약수암에서 5원을 국방헌금으로 바쳤다. 이어 김천 직지사에서 12, 남원 실상사에서 465, 선산 대둔사에서 12, 산청 새동포교당에서 740, 안동 포교당에서 13350전과 금가락지 1개와 천인침(千人針) 1매를, 철원 심원사에서 17235, 강릉포교당 30, 진주읍성외 불교부인회에서 105원 등을 헌금하여 합계 97788전이었고, 누계는 무려 354819전에 이르렀다. 이후 조선 불교계의 국방헌금은 19458, 일본이 패전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특기할 사항은 불교계에서 193712월 중국 화북지역에서 중국을 침략하는 일본군을 위문하는 북지(北支:북중국)황군위문사를 파견했다는 사실이다. 중앙교무원에서는 이종욱의 주도로 전국 사찰에서 경비를 조달하여 북지황군위문사로 최영환(최범술의 식민지 시대 이름), 이동석(선암사 승려), 박윤진(서울 흥국사 승려) 세 스님을 선발하였다. 이 세 스님은 모두 일본에 유학하여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한 엘리트 승려들이었다. 이들은 젊은데다 일본어를 유창하게 말할 수 있었다.

황군위문사 세 스님은 출발 전에 총독부, 용산의 일본군사령부 등에 가서 인사를 하고 음악가 문학준과 윤건영, 이종태, 그리고 총독부 직원 1명 등 모두 7명이 19371222일 서울에서 출발해 한 달 동안에 화북지역의 일본군을 위문하고 1938118일 돌아왔다.

 

193871,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창립총회가 부민관에서 열렸고, 이어서 정동연맹봉고제가 남산에 있는 조선신궁(서울에 있던 최고의 일본 신사)에서 개최되었다. 31본사 주지 대표 이종욱 스님은 조선불교 중앙교무원을 대표하여 두 곳의 행사에 모두 참석했다. 이종욱 스님이 주도하는 중앙교무원에서는 정동연맹의 회원 단체로서 연중 세 번 네 번 실시되는 총후(후방) 보국 강조 주간에 전 조선 사찰이 그 실시 요항을 잘 따르고 협력하도록 지도하였다.

 

불교계의 가장 이채로운 친일행각의 하나가 탁발 보국이다. 탁발은 발우에 음식을 얻어 식사를 해결하고 수행에 전념하는 불교 전래의 독특한 전통이다. 그런데 불교 고유의 탁발이 친일하는 데까지 이용되는 우스꽝스럽고 한심한 지경에 이른 것이다. 속칭 탁발 보국으로 불린 이 기이한 친일 행적은 중일전쟁 2년째에 접어든 1939년 초 황해도의 본산 성불사에서 시작되어 19416월까지 3년 동안 전후 여섯 차례나 실행되었다. 실례를 들면 황해도의 대본산 성불사에서는 본·말사 주지와 승려들은 1939년 신년을 맞이하여 부처님 앞에 일본군 전몰장병 영령을 위한 천도제를 지내고, 황군(일본군) 무운장구 기원식을 3일간 봉행하였다. 그리고 각 사찰의 주지와 대중 스님들이 탁발보국대를 조직하여 관내를 순회 탁발하여 모은 총액 17992전을 관내 경찰서, 신문사 지국에 전달, 헌납하여 일본군을 위한 국방헌금으로 바쳤다. 그 외 탁발 보국을 한 곳은 함남 흥남포교당에서 1939775일 동안 탁발한 3135전을 흥남경찰서에 국방헌금으로 내놓았다. 또 부산사원연합회의 탁발보국대(1939112, 6715), 직지사의 탁발보국(194011, 2백 원), 함북 경원군 월명사(19412, 50) 등지에서 탁발로 모금한 돈을 국방헌금으로 바쳤다.

 

중앙교무원에서는 총독부에서 만든 <황국신민의 서사>를 모든 불교도가 외우도록 하였다. 김태흡 스님이 발간하는 <불교시보>에서는 193811일 자로 발행된 제30호부터 게재하였고, 중앙교무원의 기관지 <불교>에서는 19391월호(19)부터 <황국신민의 서사>를 꼬박꼬박 실었다.

 

1940년은 중일전쟁 4년째이자 일본에 있어선 황기(皇紀) 26백 년이 되는 해였다. 일본은 황기 2600년을 대대적으로 경축하였는데 조선 불교계도 이에 호응하였다. 그래서 기관지 <불교> 20(19401월호)의 첫머리에 발행인 김삼도 스님이 우영(宇英)이란 필명으로 황기 1600년을 맞이하여라는 친일 권두언을 실어 군국 일본제국에 충성을 바쳤다. 내용은 일본식 황도불교(皇道佛敎)’로 일관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는 내선일체의 황국신민화 정책을 진제’(: 진리의 명제)라고 표현하는 곡학아세의 친일 곡필을 하기도 하였다.

 

황기 2600년에 즈음하여 대은(김태흡) 스님이 발간하는 당시 불교계의 유일한 신문이었던 <불교시보>도 대대적으로 친일 기사를 1면에 게재했다. <불교시보> 194011일자 1면에는 일본 천황 부부의 사진과 함께 흥아성업건설의 신춘, 천은 사해팔굉에 보점이란 제하에 황기 2600년을 맞이하여 일본 천황과 황실의 만수무강과 번영을 기원하며, 아울러 중일전쟁에 승리하여 대동아공영권을 건설하자며 부르짖고 있다. <신동아 건설과 내선일체>란 친일 일색의 연두사까지 실었다.

 

일본은 국민과 식민지 백성 등에게 일본의 우월함을 강조하여 중일전쟁에 승리하고자 19401110일과 11일 도쿄 궁성에서 황기 2600년의 기념식을 거국적으로 개최하였다. 이 행사에는 일본, 조선, 대만 등지의 각계각층의 대표 약5만 여 명이 참석하였는데, 조선 불교계에서는 31본사 주지 중 각 도를 대표하는 9명이 도쿄로 건너가 이 행사에 참석하였다.

 

총독부의 인가로 194151, 조선불교 조계종이 출범하였다. 종정은 오대산 상원사의 조실 한암 선사가 추대되었고, 종무총장(지금의 총무원장)은 월정사 주지 이종욱(지암)이 히로다 쇼이꾸(廣田鐘郁)란 창씨명으로 취임하였다. 그리고 종정 사서(司書)는 교무원 상임이사 허영호(창씨명 德光允), 재무부장은 통도사 주지 박원찬(창씨명 新井圓讚), 교무부장은 송광사 주지 임석진(창씨명 林原吉), 서무부장은 묘향산 보현사 주지 김법룡(창씨명 香川法龍)이 취임하였다. 종무총장 히로다 쇼이꾸(이종욱)와 교무, 서무, 재무부장은 <불교> 31(1941121)에 취임사를 발표하고 집무를 시작하였다. <불교> 31집의 서두는 조선불교 조계종의 출범에 따른 이들의 사진과 함께 친일 권두언과 취임사로 장식하였다. 이들은 자축 권두언에서 재출발신체제를 부르짖었다. 이들이 말하는 재출발은 친일불교로서의 재출발이었고 신체제는 일본의 결전체제에 적극 호응하는 총후보국체제로서의 신체제였다.

 

조선불교 조계종이 출범한 그해(1941) 128, 일본은 미국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공격하면서 태평양전쟁(‘대동아전쟁’)을 도발하였다. 이에 조계종 종무총장 이종욱은 태평양전쟁이 일어난 바로 그날, 소식을 듣자마자 전 조선 15백여 개의 사찰에 1215일부터 태평양전쟁 연전연승을 위하여 기도 법회를 열어서 일본군의 무운장구를 기도드리라는 통첩을 발하였다. 조선불교 조계종의 총본사 태고사(지금의 조계사)에서는 솔선수범하여 1223일부터 황군(일본군) 전승 기도회를 열어 승려와 신도 2백여 명이 궁성요배 등 친일 의례를 시작으로 기도 법회를 하였다. 그리고 조선불교 조계종은 <불교> 32집의 신년호(194211)신년을 맞이하는 전시의 각오라는 제목의 친일 시사문을 게재하여 불교도들에게 전시의 각오를 다지도록 독려했다.

 

한편 조선불교 조계종은 두 번째 종회인 19411117일 일본군에 군용기 한 대를 헌납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전국 사찰의 스님과 신도들에게 헌납기금 53천 원을 각 본·말사별로 할당하여 징수하였다. 이렇게 거의 강제적으로 모금한 5만 원은 비행기 대금으로, 3천 원은 국방헌금으로 일본 군부에 헌납하였다. 헌납식은 1942131일 거행하였다. 이날 일본군의 특별 배려로 조선불교호로 명명된 구칠식(九七式) 전투기 1대를 용산의 일본군사령부에서 종무총장 이종욱 등 조선 승려들이 참석한 가운데 엄숙하게 헌납식을 봉행했다. 불교계의 비행기 헌납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묘향산 보현사와 통도사, 그리고 경남 각 사찰에서 각각 비행기 한 대씩을 헌납하였고, 조선불교 조계종에서 2차로 비행기 한 대를 헌납하였다. 이로써 조선 불교계에서는 태평양전쟁 기간 모두 군용기 5대를 일본에 헌납하였다. 보현사, 통도사 등에서 헌납한 비행기 대금은 8만 원씩이었는데 이 금액은 당시 쌀값으로 환산하면 쌀 45백 가마니값에 해당하는 거금이었다.

 

일제는 태평양전쟁을 수행하면서 종래의 전시체제를 한층 강화하고자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을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국민총력조선연맹(이하 총력연맹)으로 재출발시켰다. 총력연맹은 1941128일 일본 천황이 미·영에 선전포고한 것을 대조봉대일’(大詔奉戴日)이라 하여 떠받들었고, 종교계에는 태평양전쟁 필승을 기원하는 기도회를 봉행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리하여 불교계에서는 매월 8, 전국 각 사암에서 대동아전쟁필승기원법요식을 거행하였다. 이어 조선불교 조계종은 총력연맹의 전시체제에 협력하여 황민 정신의 앙양, 징병·학병의 독려와 후원, 증산, 국방헌금과 공출, 군인 원호 등 총후 총력 운동을 전개하였다.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기간의 전시체제에서 일본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승려들은 중앙교무원과 조선불교 조계종의 간부 스님들과 31본사의 주지들이었다. 이런 연유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승려들도 중앙교무원과 조선불교 조계종의 주요 임원들과 19377월 중일전쟁 이후 본사 주지로 재직한 스님들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중앙불교전문학교의 교수로 재직하면서 친일 활동을 한 권상로와 김동화 스님, 그리고 기관지 <불교>를 친일 성향으로 편집한 김삼도와 장도환, <불교시보>를 친일 신문으로 발간한 김태흡 스님, 복지황군위문사였던 이동석, 박윤진, 최영환(최범술) 등의 친일 행적도 두드러지게 많았다.

 

중일전쟁 이후 불교계의 최고 친일 거두로는 이종욱(지암) 스님을 첫손가락에 꼽고, 조선불교 조계종의 서무부장 김법룡, 재무부장 박원찬, 교무부장 임석진(기산) 스님의 친일 행적도 많은 편이다. 그리고 일제 초·중기의 승려로는 이회광과 강대련 스님이 친일 행적을 많이 남겼다. 이들 중 두 승려의 친일 행적을 간략하게 살펴보자.

 

이종욱(1884-1969)은 월정사 재직 승려로 3·1운동 때는 이탁(李鐸) 등과 함께 ‘27결사대의 일원으로 매국 역적을 제거하는 일에 참여하였고, 한성임시정부에 불교계 대표로 참가하기도 하였다. 이어 상해임시정부 의정원의 의원(강원도 대표)이 되었으며 청년외교단과 애국부인회에 관여하는 등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그런데 이종욱은 1923년부터 월정사 부채 정리에 공을 세워 월정사 주지가 되었고, 중앙교무원의 간부로 활동하였다. 그는 총본산건설위원회의 31본산 주지 대표가 되어 조선불교 조계종의 총본산 태고사를 건립하고, 종무총장으로 취임하였다. 이종욱은 중일전쟁이 시작되면서 친일로 전향하여 본격적으로 친일하였다. 그는 월정사 부채 문제를 정리하기 위해 총독부를 수시로 드나들면서 차츰 친일 성향을 드러냈고,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기간에는 항일 투사에서 친일 거두로 변신하였다.

 

이종욱이 남긴 친일 행적으로는 11편의 친일 시사문이 <불교>지와 <불교시보>에 게재되었고, 조선임전부국단·국민총력조선연맹 등의 친일 단체에 불교계 대표로 참여하였다. 그는 국방헌금, 군용기 헌납, 일본식 성명 강요(‘창씨개명’), 일본군 위문 등에 앞장섰고, 일제의 조선인 징병제 시행과 학병 권유에도 적극 협조하였다. 또한 그는 한국 사찰의 범종 및 기타 금속류 공출에도 적극 나서 일본군의 무기 제조에 필요한 범종, 바라, 경종, 촛대, 향로, 다기 등 절 안의 모든 금속을 일본 군부에 공출·헌납하는데 앞장섰다.

 

불가사의한 것은 변절한 친일파였던 이종욱이 광복 후인 1977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인 국민장을 서훈받고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는 사실이다. 최근 이종욱 등 선항일 후친일의 인사 19명의 건국훈장이 취소되긴 했으나 국가보훈처에서는 독립유공자의 서훈 심사에 더 세심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권상로(1879-1965)는 문경 김용사 출신의 승려로 <조선불교월보><불교>(1924.7-1933.8)의 편집 겸 발행인이었고, 중앙불교전문학교의 교수였으며 해방 후 동국대학교 초대 총장을 역임한 최고의 문필가이자 뛰어난 학승이었다. 그러나 그는 중일전쟁 이후 친일 시국 강연의 주요 강사로서 일제의 침략 전쟁에 협력할 것을 부르짖었고, 승려들에게도 일본군에 지원할 것을 권유하였다. 권상로는 국민총력조선연맹에 참사라는 직함의 간부가 되어 많은 친일 강연을 하였고, 또한 광적인 친일 논설을 많이 집필하여 발표하였다. 권상로의 친일불교 가운데 하이라이트는 단행본으로 일본의 침략 전쟁을 미화하고 찬양한 임전(臨戰의 조선불교(만상회, 1943)를 간행한 일일 것이다. 일본에 충성할 것을 주창한 이 책자는 그의 많은 친일 시사문과 함께 근래에 발간된 그의 방대한 유고집 외경당전서10권 속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는 이처럼 많은 친일을 저질렀음에도 단 한 번의 참회도 없이 광복 후 동국대학교의 총장이 되고, 대통령으로부터 문화훈장을 받았으며(1962), 불교 승려로서 진실한 포살과 자자(불교식 참회 의식)도 없이 1965년 입적하였다.

 

이상으로 식민지 시대 불교계의 친일 행적을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일제의 식민지 기간에 우리나라 불교계는 불교도와 민족에게 숱한 친일 악업을 행하였다. 그러므로 식민지 시대 한국 불교사는 암울하였고, 해방 후에도 그때 배출된 대처승들로 인하여 1954년 이래 비구승들의 정화 운동으로 많은 분규를 겪었다. 이제 한국불교는 식민지 시대의 친일불교를 청산하고 중흥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조국과 민족에게 참회의 삼천 배를 올리고, 진정한 의미에서 새 출발을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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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부역 서사

 

2019.2.21. 한겨레신문에 이런 기사가 실렸다.

 

한국 천주교가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과거사를 참회하고 사과했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의장 김희중 대주교는 20일 발표한 3·1운동 100주년 기념 담화를 통해 백 년 전에 많은 종교인이 독립운동에 나선 역사적 사실을 우리는 기억한다라며 그러나 그 역사의 현장에서 천주교회가 제구실을 다 하지 못했음을 고백한다라고 밝혔다.

 김 대주교는 한국천주교회는 시대의 징표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 채 민족의 고통과 아픔을 외면하고 저버린 잘못을 부끄러운 마음으로 성찰하며 반성한다라고 말했다.

 

한국 천주교가 일제강점기의 천주교 잘못을 구체적으로 언급하며 공개적으로 사과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천주교는 2000쇄신과 화해라는 과거사 반성문을 발표했지만, 포괄적인 형식을 취했다.

 천주교는 1919년 당시 3·1운동에 참여하지 않았다. 민족대표 33명은 천도교(15), 기독교(16), 불교(2) 인사들만으로 구성됐다.

 

김 대주교는 외국 선교사들로 이뤄진 한국 천주교 지도부는 일제의 강제 병합에 따른 민족의 고통과 아픔에도, 교회를 보존하고 신자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정교분리 정책을 내세워 해방을 선포해야 할 사명을 외면한 채 신자들의 독립운동 참여를 금지했다라며 나중에는 신자들에게 일제의 침략 전쟁에 참여할 것과 신사참배를 권고하기까지 했다라고 밝혔다.

 그는 이와 함께 당시 교회 지도자들의 침묵과 제재에도, 개인의 양심과 정의에 따라 그리스도인의 이름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한 천주교인들도 기억하고자 한다라고 덧붙였다. 그는 그러나 이는 한국천주교회의 지난 잘못을 덮으려는 것이 아니라, 시대의 아픔과 좌절에도 쓰러지지 않고 빛과 소금의 역할을 했던 그들을 본받고 따르기 위함이라고 말했다.

 김 대주교는 한반도 평화에 기여하겠다는 뜻도 밝혔다. 그는 우리는 3·1 운동의 정신을 이어받아 서로의 다름이 차별과 배척이 아닌 대화의 출발점이 되는 세상, 전쟁의 부재를 넘어 진정한 참회와 용서로써 화해를 이루는 세상을 만들고자 한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한국천주교회는 과거를 반성하고 신앙의 선조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후손이 되어, 한반도에 참 평화를 이루고, 더 나아가 아시아와 세계 평화에 이바지할 수 있도록 기도하며 끊임없이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 담화가 침묵하는 개신교와 비교되면서 긍정적 평가를 받는 모양이다. 내 생각은 다르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가 대내외적으로 한국 천주교를 대표한다고 하지만 원칙적으로 각 교구는 독립 단체다. 친일인명사전이 발표한 천주교 친일 인사, 특히 노기남 대주교 부분에 이의를 제기했던 서울대교구가 기존 태도를 바꿨을까? 아는 바 없다. 이 문제는 중요하다.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기독교인 가운데 천주교인이 상대적으로 적은 -개신교 56, 천주교 7- 이유가 조직 특성상 천주교 부역은 교단 차원에서 행해졌기 때문이다. 뒤집어 말하면 조직 뒤에 개인이 은폐되는 이중성을 지녔다는 뜻이다. 부역 이중구조가 참회와 사과에도 관철되는 한 가치는 공동화한다. 이런 식으로 참회, 사과하고 넘어가서는 안 된다.

 

더군다나 잘못을 구체적으로 언급했다고 하지만 여전히 포괄적이다. 포괄적 언어로 공유할 실체적 진실이 과연 있을까. 정말 구체적인 이야기를 듣기 위해 천주교 마산교구 민족화해위원회 집행위원장인 시인 김유철이 <기독교사상(2011-8)>에 게재했던 글(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2011.8.16.<친일, 천주교는 천주교식대로>라는 제목으로 전재) 전문을 인용한다.

 

아픈 가슴을 다시 열며

 

잊을만하면 돌아오는 일들, 잊을만하면 돌아오는 말들, 잊을만하면 돌아오는 장면들이 있다. 한 개인의 삶 속에서도 그런 기억들이 구석구석 묻혀있는 것처럼 집단은 집단대로 그런 기억이 존재하는 법이다. 더욱이 그것이 잊고 싶을 만큼이나 저리도록 욕되고 창피한 기억이라면 그것은 말할 것도 없다.

 

문제는 그런 기억을 자기 스스로 망각할 뿐 아니라 후손들에게 망각을 강요하고 심지어 역사적 사실에 대한 부인을 넘어 탈색, 변색, 위장, 변장, 전도, 허위, 외면의 방법을 통해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몰염치한 일들은 모두를 우울하게 한다. 그것도 하느님아버지로 부르는 집단과 사람들이 말이다. 격랑과 같은 삶을 살기에 누구나 잘못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기에 우리를 신이 아닌 허물 많은 사람이라 부르지 않는가?

 

예수가 살아생전 바위라 부르던 베드로마저 주님을 모른다고 도망친 못난 제자였지 않았는가? 우리 주 예수의 죽음을 죽음이라 부르지 않으며 하느님께서 친히 살려주셨다고 부활이라 받아들이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첫째 믿음이지 않는가? 그럼에도 한국천주교회는 일제강점기 시절 죽지 않으려 발버둥을 쳤었다. 그렇게 하면 천주교회의 싹이 없어질 줄 알고 역사의 대목마다 좌고우면한 숱한 일들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임이 틀림없다. 십자가를 통한 죽음이 부활로 가는 길이라는 것은 교리 책과 기도문과 미사전례문 안에서만 맴돌 뿐 그 스스로 십자가도, 의로운 죽음도 없이 그저 신분을 보장받는 현실 안주에만 급급했을 뿐 부활에 대한 믿음은 애초에 없었던 것이다.

 

필자는 민족의 해방절을 맞으며 한국천주교회의 원죄와도 같은 친일의 역사를 부끄럽지만 함께 열어보고자 한다. ‘극소수의 사람들이라고 애써 포장하지만, 한국천주교회는 일제강점기 시절 참으로 욕된 일을 민족 앞에 했었다. 지금이라도 그것이 민족에게 욕을 보인 것이고 주님이 걸었던 십자가 길에서 멀리 떨어진 행동이었음을 해마다 고백하고 가슴을 찢어야 할 일인 것이다. 마침표는 긋는 것이 아니라 찍는 것이다.

 

곰곰이 생각할 몇 가지 장면들

 

최초의 한국인 주교 岡本鐵治. 岡本鐵治는 노기남 주교의 창시개명한 일본식 이름이다.

 

194213일 천주교경성교구연맹 이사장이며 명동성당 보좌신부인 오카모토(노기남)신부가 경성교구장(현 서울대교구장)이 된다. 그는 같은 해 1114일 최초의 한국인 주교로 임명된 이후 그는 1967년 은퇴할 때까지 25년간의 주교직을 수행한다.

 

다음은 그가 경성교구장에 취임하며 한 말 일부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열심한 가톨릭자가 되고 충량한 황국신민이 되어야 한다. 대개 열심한 신자요, 충량한 국민은 자기 책임 수행에 심혈을 기울이며 그 책임이 중대한 것이면 자기 생명까지라도 아낌없이 희생한다. 현금 국가의 시국은 그런 국민을 요구하고, 현금 교회의 정세는 이런 신자를 요구한다. 우리 모든 이가 열심한 가톨릭자로서 국가에 대한 책임에 이런 태도로써 나선다면 이보다 더 나은 종교 보국은 있을 수 없다. 우리 모든 이가 정성으로써 교회 유지와 발전에 임한다면 극복하지 못할 어려움은 있을 리 없다.

 

위에 말한 두 가지 커다란 책임을 실행함에 있어 본직은 별다른 새로운 실천 사항을 지시치 않는다. 다만 무언 복종과 일치협력, 이 두 가지를 극력 권장할 뿐이니 이는 실로 유구한 황국 26백여 년 역사가 밟아오고 가톨릭 근 2천 년 연륜을 통일시킨 위대한 원리이다. 국가의 시국을 돌파키 위하여 행정당국에서 지시하는 바는 절대 신뢰하고 무언 복종하라. 누구보다 당국에서 앞뒤 정세와 그에 대하여 국민이 밟아야만 할 길을 가장 잘 알고 있으니 비록 약간 어렵고 불편할지라도 공연한 비판이나 한탄을 말고 일치 협력하여 무언 복종하라." (1942118일 경성교구 교구장. 평양춘천교구관리자 바오로 岡本鐵治 <경향잡지> 943, 19422월호, 1942.02.15, 4-5.)

 

<경향잡지>1911년에 창간한 한국천주교회 공식 기관지다.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잡지이기도 하다.

 

반가웠지만 예상하지 못했던 조국해방이었을까?

 

19458월 중순부터 9월초 사이에 한국천주교회는 친일파 청산문제에 대해 아무런 공식적이고 권위 있는 입장표명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간접적으로나마 이 문제에 대한 교회의 태도를 파악할 수 있는 몇 가지 사건이나 단서를 지적할 수 있다. 가장 먼저 주목할 사실은 공식적인 침묵이다. 노기남 주교는 1945817일자의 고유문을 통해 신자들에게 경솔한 언어와 행동을 삼가 피하여 극렬 자중할 것을 지시하였다. 그렇다면 일차적인 침묵과 자중의 숨은 의미는 없을까,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으로 모아진다. (강인철, 한국 천주교의 역사사회학, 한신대학교 출판부, 2006, 185)

 

고유문

"교구 내 모든 신직과 교우들에게 강복하노라. 세계의 참담한 전쟁은 그치고 이제 우리 조선에도 새로운 질서가 성립됨에 이르른 현금 시국은 우리 앞길에 중대한 관계를 좌우하는 열쇠를 잡고 있는지라, 그러므로 경솔한 언어와 행동을 삼가 피하여 극렬 자중하는 동시, 새로운 우리의 정당한 정부가 조선 내에 자리를 잡고 모든 정무를 완전 인수할 때까지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기 위하여 천주 성신의 총광을 비는 뜻으로 매일 기구 드리기를 명하노라. "(1945817일 경성교구 바오로 노주교)

 

194599일에 이르러서야 승전과 해방의 미사가 명동성당에서 거행되었고 926일 노 주교 집전의 세계평화 회복을 감사하는 장엄미사와 미군 장병 환영식이 명동성당에서 거행되었다. (강인철, 앞의 책, 186.) 환영식은 애국가 제창, 미국 국가 연주, 노 주교의 미군 환영사, 하지 사령관을 대신한 군정장관 아놀드 소장의 답사, 꽃과 기념품 증정, 조선 독립 만세 삼창, 미군 승전 만세 삼창의 순서로 진행되었다. 111일에는 역시 명동성당에서 제2차 세계대전에서 희생된 모든 미군의 영혼을 위한 대미사가 노주교 집전으로 거행되었다. (강인철, 앞의 책, 240)

 

그러나 유감스럽지만 노주교가 집전한 희생된 미군의 영혼은 한때 흰 바탕 붉은 해깃발 아래 섬멸되어야 할 적국의 장병에 불과했었다. 한국천주교회는 한 입으로 두말하게 된 연유를 이미 그때 용서를 구하고 민족과 죽어간 적국의 병사들에게 잘못을 고백했어야 했다. 한국천주교회 공식 기관지에 실린 말을 두 눈 똑바로 뜨고 다시 보자.

 

"흰 바탕에 붉은 해를 그린 국기는 대일본제국의 표징으로서 그 의장은 간단하나마 심장한 의미가 있고 또 극히 아름다워 모든 나라의 국기를 멀리 초월한다. 이 국기 앞에 충군 애국에 불타는 얼마나 많은 가슴이 뛰놀았으며, 이 국기 앞에 황군 용사의 피는 얼마나 거룩히 흘렀으며, 이 국기 앞에 적국의 함정은 얼마나 많이 바다 속에 격침되고 적국의 비행기는 얼마나 많이 추락되고 적국의 장병은 얼마나 많이 섬멸되었는가!" (<경향잡지> 960, 19437월호, 1943.07.15, 1)

 

새벽의 7이 아닌 7인의 친일 가톨릭인사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는 2008429일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할 친일인물 4,800여명의 명단을 공개했다. 그중에 가톨릭 인사로 7명이 포함되었다. 그러자 한국천주교회를 대표하는 한국천주교주교회의(CBCK)나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CCK)이 아닌 서울대교구는 단 하루가 지난 430일 성명서를 통해 깊은 유감을 표했으며 가톨릭계 기관지인 <평화신문>(서울대교구), <가톨릭신문>(대구대교구) 들은 2008511일 자 기사와 사설에서 교회의 반성이 아닌 우린 무죄다라고 하소연했다. 심지어 <평화신문>은 친일 명단에 오른 7명의 공로를 부각시키며 물타기에 나섰다.

 

서울대교구는 친일 대상자에 대한 사회의 논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거룩한발걸음을 계속했다. 학교법인 가톨릭학원(이사장 정진석 추기경)2008611일 서울 동작구 사당동에 지은 교원 기숙사 축복식을 통해 건물의 이름을 '노기남관'으로 명명하고 서울대교구장 정진석 추기경 주례로 축복식을 거행했다. 노기남관의 입구에는 노기남 주교 부조와 문장, 라틴어 사목 모토 피앗 볼룬따스 뚜아’(fiat voluntas tua, 당신 뜻대로 내게 이뤄지소서)를 설치했으며, 1층 현관에도 노기남 주교의 삶과 신앙을 담은 사진 자료들을 게시했다고 교회 언론들은 전했다. 정 추기경은 노기남 주교의 삶과 영성을 오늘날 많은 사제와 신자들이 기억했으면 한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천주교회의 바람과는 정반대로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2005년에 발족한 국가기관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200973일 관련법에 의거 노기남 주교의 행위를 친일반민족행위로 결정한다는 통지서를 서울대교구에 보내왔다. 그럼에도 서울대교구는 이의 제기 공문을 통해 "위원회 결정은 형식적 조건에만 일방적으로 치우치는 바람에 형식보다 중요한 실질적 내용, 즉 일제 협력 행위에 나서게 된 현실적 동기, 행위 주체에 대한 정체성, 행위의 상대적 정도 등을 전혀 감안하지 않았다"고 노기남 주교의 친일 행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천주교회는 천주교회식대로 산다?

 

서울대교구 산하의 한국교회사연구소는 201010월 명동성당 꼬스트홀에서 노기남 대주교와 한국천주교회를 주제로 심포지엄을 진행했다. 학술 심포지엄의 분위기는 시종일관 팽팽한 긴장속에서 진행됐다고 교회 언론은 전했지만 결론은 당연히 우리는 무죄다였으며 역사 해석에는 절제와 조심성이 있어야 하며 당시 실상을 균형 잡힌 시각으로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라는 준엄한 충고로서 결론 삼았다. 아무튼 노기남 주교를 비롯한 가톨릭 인사 7인은 무죄였으며 그들을 친일 대상자로 지목한 사람들이 무고죄와 함께 절제와 조심성이 없는 불균형한 시각을 지닌 자들로서 유죄가 된 셈이다.

 

서울대교구가 발행하는 <평화신문>2011년 들어 새로운 기획물로 시대의 등불이 된 재속 프란치스칸들을 연재하고 있다. 그러나 공교롭고 유감스럽게도 현재까지 시대의 등불로 소개된 인물 중 장면, 오기선, 남상철은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사람들이다. 한국천주교회로서는 시대의 등불로 부르고 싶겠지만 민족에게는 손가락질받는 친일자인 것이 천주교회와 천주교인에게는 어떻게 보이고 있는 것일까? 욕됨을 욕됨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런 역사는 반복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천주교회는 천주교회식대로 살겠다고 세상을 외면할 것인가?

 

빙산의 일각이지만 한국천주교회가 피해갈 수 없는 친일 사례들 한국천주교회로서는 부끄러운 일이지만 아래의 자료들은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1. 일본 정신 발양 주간 실시에 관한 건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에 가입한 우리 교회 단체로서도 전적으로 그 취지에 찬동하고 성의껏 모든 주간행사에 참여하되 경성교구 각 지방 본당 신부는 황실의 안녕과 국위선양을 기원하는 뜻으로 미사성제를 거행하고 될 수 있는 대로 교회가 중심이 되어 모든 행사를 각 지방 형편에 따라 계획하여 실시하되 만일 실시 형편상 교회 단독으로 행키 어려운 경우에는 교우들이 그 군이나 면 연맹에서 하는 여러 행사에 다수 참가하여 국민으로서의 본분을 다하기를 부탁하노라."(<경향잡지> 894, 19391월호, 1939.01.28, 4)

 

2. 경성교구 애국 행사 성적

 

"국민정신총동원경성교구연맹에서는 황기 26백 년의 기원 가절을 기회로 과거 3년 동안에 행한 각종 애국 행사를 보면 동양의 평화, 황군무운장구, 전몰장병의 위령을 위한 각종 기원성제 29622, 동상 목적을 위한 기도 55452, 국방헌금 362423, 제일선 장병위문금 9324, 병기 헌납 보조금 42239, 제일선에 보내는 위문주머니 691, 시국을 위한 강연회와 좌담회 11592, 출전 장병의 가족 위문 151, 부상 장병 위문 37, 기타의 각종 행사 165회로써 천주교회는 비록 겉으로 떠들어 남의 이목을 끄는 일은 별로 아니할지라도 자기의 당면한 책임은 얼마나 은근하고 충실하게 꾸준히 계속 시행하여 나가는지를 여실히 보이고 있다."(<경향잡지> 920, 19403월호, 1940.03.12, 17)

 

3. 매월 제일주일은 교회 애국일로

 

"우리는 천황폐하와 국가의 혜택을 받을 뿐 아니라 천주교 신자로서도 또한 폐하와 국가의 혜택을 받고 있는 우리들이다. 만일 오늘이라도 폐하와 제국의 현명한 통치가 없었던들 우리가 오늘날 천주교회 신자로서 교회의 모든 본분을 안온하게 지켜가고 있었을지가 의문이다. 애국 주일을 위하여 여러분께 간절히 부탁하는바 현금 국책수행을 위하여 정부당국에서 명하는 일체 행사는 물론이오, 교회 당국으로부터도 교회 행정을 위해서나 시국 극복을 위하여 명하는 행사가 있을 때 불편이 다소 있을지라도 봉사 봉공의 정신을 가지고 솔선하여 모든 행사에 협력해 주시기를 바라는 바이다. 애국주일에 무운장구 기원 미사를 거행할 것과 미사 전후하여 애국식을 거행할 것과 미사 중 시국에 관한 강론과 미사 후 신궁 혹은 신사참배를 단체로 할 것 등이다."( <경향잡지> 931, 19412월호, 1941.02.12, 15-17)

 

4. 1전 헌금의 결정

 

"국민총력경성교구연맹에서는 병기를 헌납하기로 하여 모든 교우들이 매월 매인 1전 헌금하기로 되었다 함은 당시 기보한 바와 같거니와 작년 연말에 그 수합된 총액이 1만 원에 달하는 좋은 성적을 보였던바 동 연맹에서는 당국에 병기의 종류에 대하여 문의하였더니 당국에서는 현금 그대로 헌납함이 더욱 좋다 하므로 동 연맹 이사장 노기남 신부는 이를 조선군 사령부에 헌납하여 당국자를 감격시켰다."( <경향잡지> 942, 19421월호, 1942.01.15, 10)

 

5. 총독각하는 반도 민중의 영광

 

"근년 같은 시국에 우리가 남차랑 총독 같은 이를 모셨다는 것은 큰 다행이었다. 그가 시작하고 실시한 반도교육령의 개정, 창씨제도, 지원병제도, 기타 내선일체의 대방침은 착착 실현되고 또 그 실적이 일반의 예상 이상으로 양호하였다. 그리하여 반도 민중이 시험에 합격하여 적자, 완전한 황국신민에 편입된 데에는 남총독 각하의 공적이 자못 큰 바이니 남총독은 실로 반도 민중을 구원한 큰 은인이다."( <경향잡지> 947, 19426월호, 1942.06.15, 1)

 

6. 대망의 징병제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정신이니 황국을 위하는 정신과 내선일체의 정신을 더욱 철저하게 가져 실현하기로 힘쓸 것이오, 국어(일본어-인용자 주)를 모르는 청년들은 하루바삐 국어에 달통하도록 힘써 응소된 다음에 여러 가지 불편이 없도록 할 것이며 내지 군인들의 장점을 지금부터라도 배우기를 힘쓸지니 서로 일치단결하는 마음과 자기가 맡은 책임은 죽는 한이 있을지라도 반드시 수행하고야 마는 그 견고한 책임 관념과 아무리 어렵고 괴로운 일을 당할지라도 실망 낙담 하는 일 없이 꾸준히 끝까지 최후의 한 방울 피까지 갈진히 하려는 백전불굴의 정신 등은 황군이 세계에 자랑하는 바이다. 심신 양 방면으로 이렇게 모든 준비를 다하여 반도 청년들이 군문에 들어가는 날에는 반도 동포도 내지 동포와 추호도 다름없는 완전한 황국신민의 자격을 갖출 것이다."( <경향잡지> 955, 19432월호, 1943.02.15, 1)

 

7. 금속품 헌납

 

"우리가 날마다 애용하던 식기를 헌납하여 이것이 어뢰가 되어 적국의 군함을 격침시키고 우리의 자녀들이 밥을 먹던 수저가 헌납되어 이것이 포탄도 되고 폭탄도 되어 혹은 적국의 비행기를 떨어트리고 혹은 적군의 진지를 괴멸시키고 하는 것은 생각만 하여도 얼마나 통쾌하며 얼마나 우리와 우리 자녀들에게 자랑스러운 일이 되는가? 이런 쾌감은 그 자체만 보아도 우리가 금속품을 남모르게 감추고 비밀히 애지중지하는 그 애착심에 비하여 훨씬 고상하고 깨끗하고 대장부다운 맛이 있는 것이다."(<경향잡지> 957, 19434월호, 1943.04.15, 1)

 

8. 비행기를 보내자

 

"비행기! 비행기! 현대전쟁에는 무엇보다 비행기가 많아야 한다. “비행기를 한 대라도 어서 빨리 보내라.” 이것은 남태평양 제일선에서 주야의 분별없이 악전고투를 하는 황군용사들이 국민을 향하여 외치는 주문이다. 1선에서 귀화하는 여러 장병들의 보고에 의하면 적군보다 비행기의 수효가 더 많을 필요도 없다. 동등의 수효이기만 하면 적의 항공 병력을 분쇄시키는 것은 문제도 안 되는 것이다. 이것은 황군의 분투정신과 민첩 무쌍한 기술을 생각하면 누구나 긍정할 것이다."( <경향잡지> 967, 19442월호, 1944.02.15, 1)

 

"이후 1944211일부터 429일까지 전개된 총력연맹의 미영격멸 비행기 2백 대 헌납운동은 예상보다 훌륭한 성적을 내어 248대분인 24,818,36671전의 헌금이 만들어졌다."( <경향잡지> 970, 19445월호, 1944.05.15, 2)

 

아직도 교회는 할 말이 있는가?

 

필자는 천주교인으로서 할 말이 없다. 그러나 천주교회는 특별히 서울대교구는 아직도 할 말이 있는 듯하다. 노기남 주교는 19421220일 주교취임을 한 날 명동 바오로수녀원에서 축하 오찬회가 있었다. 이 오찬회 석상에서 노 주교는 대동아전쟁의 필승을 다짐하고 황국 신민화 운동을 수긍하는 체하는 발언을 했다. 그러나 노 주교는 즉시 혀를 깨물고 싶도록 후회했다.” (노기남 대주교, 박도원, 한국교회사연구소, 1985, 228-229)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후회는 친일의 마침표가 아니라 친일의 서막에 불과했던 것이다. 한국천주교회가 자랑하는 첫 한국인 주교는 민족해방과는 상관없는 교회의, 교회에 의한, 교회를 위한 주교였을 뿐이다. 노기남 주교는 그리고 지금도 그를 옹호하는 자들은 그것이 무슨 잘못이냐고 항변하고 있지만 그들이 주님이라고 고백한 예수는 노기남 주교가 그토록 지키려는 교회 안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일본인들에 의해 핍박받던 위안부징용자징병자독립군 등을 비롯한 억눌린 민족 가운데 계셨음을 몰랐던 것이다. 지금도 예수 없는 교회를 붙들고 있는 그대들은 누구인가? 예수의 목소리는 이천 년 전부터 들려오고 있다.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공동번역 요한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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