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학교 중심으로 살핀 부역 서사를 인물 중심으로 다시 본다. 교육자로 출세한 부역자 명단과 그 내용을 요약한 뉴스타파 기사를 인용한다. https://newstapa.org/article/fxFny에서 원문을 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자문기구인 중추원 참의를 지낸 김경진, 김원근, 박필병, 서병조 뿐만 아니라 일제 판사와 검사 출신의 계철순, 고재호, 김갑수, 김세완, 이호, 정재환, 그리고 조선총독부와 만주국 관료 출신의 김영훈, 박일경, 윤태림, 이인기, 최문경, 박이순 등이 해방 후 학교를 설립했거나 대학의 총장, 이사장 등을 지낸 것으로 파악됐다.

 

일제강점기 기준 경력으로 볼 때 교육·학술 분야에서 활동한 친일 인사가 29명으로 가장 많았다. 이어 종교계에서 친일 활동을 한 인사가 21, 총독부 관료와 군수 출신 16, 일제 검사와 판사 출신이 6, 중추원 참의 등 일제 고위직이 5, 경제계 4명 순이었다.

 

학교별로 보면, 동국대학교에서 총장, 이사, 이사장 등을 지낸 인물 8명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공표됐거나 친일인명사전 등재 인물로 나타났다.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 권상로, 일제 판사 고재호와 김갑수, 조선임전보국단 상무이사 이종욱, 일본군의 무운장구를 기원하는 법요를 열고 시국강연회에서 강연한 조계종 승려 김영수, 임석진, 허영호 등이다.

 

이화여자대학교는 6명이 친일 인사가 ()총장, 이사, 이사장을 지냈다.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지도위원 김활란, 이숙종, 서은숙, 일제에 국방헌금 1만 원을 내고 경기도군용기헌납발기인회 발기인으로 참여한 김순흥, 미영격멸간담회 발기인으로 참여한 변홍규 등이다.

 

숙명여자대학교는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지도위원 이숙종과 임숙재, 친일 판사 고재호,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위원 김두헌, 일제 군수 윤태림, 만주국 관료 출신의 이인기 등 5명이 총장과 이사장을 지냈다.

 

여러 대학의 총장과 이사장 등을 거친 친일파도 있다. 일제 징용과 학도병, 징병을 독려한 조동식은 상명학원 초대 이사장(1945), 성균관대학교 초대 이사장(1947)을 거친 뒤, 1950년 동덕여자대학교를 설립했다. 성신여대 설립자 이숙종은 성신여대 이외에도 숙명학원(숙명여대) 이사장(1964), 이화여대 이사(1952)를 맡았다. 신봉조는 이화예술고등학교를 설립(1953)하고, 상명학원(상명대) 이사장(1954), 이화학원 상무이사(1961) 등을 지냈다.

 

고황경, 곽종원, 김영훈 등 15명은 1968년 박정희가 공표한 국민교육헌장을 사회에 구현했다는 공로로 박정희와 전두환으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또 김준보, 윤태림, 조재호, 최문경 등은 5·16 혁명이념을 교육 현장에서 구현한 공로로 박정희에게 훈장을 받았다. 수여일은 19631217일인데, 박정희가 쿠데타 성공 후 대통령에 당선돼 임기가 시작된 때였다. 박정희가 초대 총재를 맡은 ‘5.16 민족상 재단의 이사와 심사위원을 맡거나 5.16민족상을 받은 인사도 송금선, 이병도 등 모두 5명이었다.

 

뉴스타파는 해방 후 대한민국 교육 분야에서 활동한 친일 인사 87명의 명단을 인터랙티브 페이지로 제작해 공개한다. 짙은 붉은색 배경으로 표시된 인물은 친일 부역 행위뿐만 아니라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등 독재 정권에 부역한 이력도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의 독재 부역 이력과 훈장 내역도 이 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각 인물 사진을 클릭하면 이들의 친일 행적과 해방 후 교육 관련 이력 등을 볼 수 있다. 또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자 1,006명에 포함된 인물인 경우 반민규명위원회가 2009년 작성한 결정 보고서 원문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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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도저히 여기서 이야기를 접을 수는 없다. 사학재단 문제를 좀 더 들여다보고서야 발길을 돌릴 수 있겠다. 능력 한계로 말미암아 내 연구 자료도 아니고 인용한 자료조차 그렇게나 따끈따끈하지 못해서 안타깝다. 아래 실은 글은 2014년 고발뉴스닷컴(필자는 아이엠피터’)에 실린 내용이다. 지면을 빌어 감사드린다. 특권층 부역자 정권이 들어선 오늘 상황은 그때보다 훨씬 더 심각하리라는 추정을 보탬으로써 증폭된 문제의식이 공유되기를 간절히 빈다.

 

사립 초중고등학교 재단의 수익용 자산 규모는 4조 원가량이다. 수조 원이 넘는 자산을 가지고 있는 사학재단이 재단전입금으로 내놓은 돈은 총 1,342억 원에 불과하다. 서울지역 사립고등학교 재단전입금 상태를 보면, 재단전입금 0.00%인 학교가 전체 199개교 중 무려 17개교다. 1% 미만 재단전입금 가지고 학교 운영하는 사학재단이 124개교로 전체 60%를 넘는다. 기본적으로 사학재단은 자기 재산을 출연하여 학교를 운영해야 한다. 그런데 자기 돈은 거의 내놓지 않으면서 학교를 운영하니 재정이 좋을 리 없다.

 

법정부담금은 교직원 연금 부담금, 건강보험 부담금, 재해 보상 부담금 등으로 사학재단이 기본적으로 내야 할 돈을 말한다. 2011년 사립 초중고교 법인이 부담해야 할 법정부담금 2,797억 원 중 실제 사학법인이 납부한 금액은 615억 원으로 전체의 22%에 불과하다. 전국 1,723개 학교 중 법정부담금을 단 한 푼도 내지 않은 학교가 173개교(8.5%), 0%~5% 미만 학교가 574개교(33.3%), 5% 이상~10% 미만 학교가 313개교(18.2%), 100% 완납한 학교는 188개교(10.9%)에 불과하다.

 

사학재단의 가장 큰 문제는 학교를 가족 재산으로 여기며 세습을 통해 부를 축적하는 도구로 이용한다는 점이다. 그들이 부를 축적하는 방법에는 각종 편법과 비리, 불법이 동원되고 있다. 2011년 서울시교육청 감사 결과를 보면 사학비리는 단순 비리가 아니라 범죄다. 예컨대 진명학원 진명여고이사장은 수익용 기본재산 45천만 원을 횡령했고, 학교 돈 88,630만 원을 친척에 무단 제공했다. 발전기금 22천만 원을 개인 채무 변제 등에 사용했다. ‘상록학원 양천고는 바지 사장을 내세운 급식 비리 88천만 원’, 옹벽 공사, 소화 배관 공사를 통한 금품 수수 7천만 원등 각종 비리를 저지르며 부를 축적했다. 사학재단은 비리를 저질러서 아버지가 이사장직에서 물러나도 부인이나 아들, 딸이 그대로 이사장직을 승계한다. 진명학원 이사장도 비리로 물러난 아버지를 대신해서 아들이 이사장을 맡고 있다.

 

한국에 비리 사학재단이 늘어난 근원에는 친일 부역 집단이 있다. 민족 교육과 인재 양성을 표방하며 설립했던 학교 중 일제강점기 동안 살아남은 학교 대다수는 저들이 부역을 실천한 학교들이다. 해방 이후 사립 초중고가 급격하게 늘어난다. 이유는 당시 재원이 없어 학교를 세우지 못하자 부역 지주들에게 토지 몰수 대신에 학교 세우고 법인화하기를 요구했기 때문이다. 이승만 정권은 돈 없이 학교를 세울 수 있어서 좋았고, 부역 지주들은 토지 몰수 대신 자기 재산을 그대로 사학재단에 귀속시켜 부를 세습할 수 있는 통로가 생겨서 노났다. 사학재단을 정부가 통제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교육을 의무화해 놓고 재원을 부역 사학 기증 구조로 만들었기 때문에, 혈연이나 인척 비리가 생겨도 손을 대지 못한다. 사학재단들은 부역 집권층과 손잡고 재산과 특권 지키기 위한 노력을 전방위적으로 하고 있다. 사학재단 비리를 고발했던 교사들은 진실을 밝힌 대가로 오히려 해임되고, 복직 판정을 받아도 학교로 돌아가지 못한다. 2003년 서울시교육청 감사 결과 비리가 밝혀진 동일학원을 비롯한 사학재단들은 문용린 교육감에게 고액 정치기부금을 냈다. 왜 사학재단 비리가 근절되지 못하고 오히려 각종 특혜를 받고 있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다.”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사립학교라면 어디든 내 의심을 피해 가지 못한다. 아프지만 내가 나온 고등학교부터 촘촘히 톺아 보았다. 자료에 한계가 있어선지 부역 흔적을 찾지 못했다. 진즉 지웠을까? 모를 일이다. 끝까지 의심을 풀지 않겠다. 각성한 부역자로서 변혁에 참여할 trickster로서 살아가기 위한 필요 조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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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사립 중·고등학교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2023424일 이전까지 불렸던 어느 중·고등학교 학교 교가 가사를 보면 설명을 듣지 않아도 왜 그런지 단박에 알 수 있다.

 

먼동이 트이니 온누리 환하도다

환한 이 강산에 원석 두 님이 나셔서

배움 길 여시니 크신 공덕 가이 없네

성남 성남 우리 모교 무궁탄탄할지어다

 

가사 중 원석 두 님은 설립자 김석원과 원윤수 두 사람을 가리킨다. 이 두 사람이 설립한 학교가 서울특별시 동작구 대방동에 있는 성남중·고등학교다. 김석원은 일본육군사관학교 출신 군인으로서 원윤수는 사업가로서 일제에 부역한 대표적 특권층이다. ‘일제 치하에서 광복의 원동력이 될 인재 양성을 위한 민족학교 설립이라고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육군사관학교(일제) 준비 학교 특성을 위해 설립한 학교가 바로 성남중·고등학교다. [출처: 고발뉴스닷컴]

 

오늘날 성남중·고등학교는 어떤 은폐를 시도하고 있을까? 2023424일 새로운 교가를 제정해서 발표했다. 곡은 그대로 두고 가사만 바꾸었는데, 2절 가사는 이렇다.

 

의에 살고 의에 죽는 자랑스런 성남인

삼일칠의 정신 받아 자라나는 우리들

세우자 새 역사를 주인공은 우리들이다

성남 성남 우리 모교 무궁탄탄할지어다

 

의에 살고 의에 죽자는 교훈으로서 충무공 정신을 계승한다고 주장한다. “삼일칠 정신19600317일 성남고등학교 학생들이 일으킨 3.15 부정선거 규탄 의거를 기린다고 한다.

 

2023424일 성남중·고등학교가 벌였던 또 다른 행사가 있다. 1942년 만세운동을 펼쳤던 재학생 윤병운 외 7명을 기리는 <항일독립운동 공적비>를 교내 3·17민주공원 내 <3·17민주의거기념탑> 옆에 세웠다. 원승욱(원윤수 손자) 학교 법인 이사장은 의에 살고 의에 죽자는 교훈이 바로 독립투사 이분들이셨다.”라고 기염을 토했다.

 

충무공 정신이든 삼일칠 정신이든 항일독립운동 정신이든 설혹 가감 없는 사실이라 할지라도 김석원과 원윤수가 특권층 부역자로서 그에 부합하는 목적으로 설립한 학교 근원을 지울 수는 없다. 부분을 전부인 듯 말하는 협잡이 바로 전형적인 가짜 뉴스다. 특권층 부역 세력은 곳곳마다 깨알같이 이런 짓을 벌여서 역사를 희화하고 사회를 흑화한다.

 

이런 현장이 어디 성남중·고등학교뿐이겠는가. 중앙여중·고등학교(황신덕), 성신여중·고등학교(이숙종), 광신중·고등학교(박흥식), 영훈중·고등학교(김영훈), 휘문중·고등학교(민영휘), 풍문여중·고등학교(민영휘 증손 덕기), 상명중·고등학교(배상명), 화곡중·고등학교(나채성-나경원 아버지), 용문중·고등학교(김문희-김무성 누나)···이루 다 열거할 수 없는 많은 사학을 특권층 부역 집단 돈으로 세웠거나 접수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사학은 식민지 시대에는 부역 행위 일환이었고, 대한민국 초기에는 신분 세탁과 세금 포탈 통로로 활용돼 특권층 부역 집단이 쌓아 놓은 기득권을 지키는 데 거의 독보적 수단이었다. 학교는 말할 필요조차 없고 교사, 학생, 심지어 학부모까지 부역과 수구 정신으로 물들게 하는 가장 강력한 채널로 작동해왔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부역 사학 그 본진은 결국 사립 중·고등학교일 수밖에 없다. 이들이 있는 한 엄밀한 의미에서 공교육이란 이 나라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교육을 받고 자라는 세대에게 참된 민주주의를 기대할 바도 아니다. 국토 전반에 걸쳐 똬리 틀고 검은 네트워킹하는 이 사악한 사학재단이야말로 대한민국을 영원한 식민지로 재생산해내는 자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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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m 넘는 용문산을 마지막으로 산행에 해당하는 숲 걷기를 멈춘다. 더 가면 내가 숲에 들고나는 목적과 맞지 않을 수도 있겠다 싶어서다. 홀가분하게 다녀올 수 있는 길을 고른다. 마을버스를 타지 않고 걸어서 까치 능선까지 간 다음, 생태 다리 두 개로 관악산과 연결해 놓은 길을 따라 숲 깊숙이 들어간다.



걷기 쉬운데다가 계곡 물소리가 들려 좋기는 한데 시끄럽다. 산악회 무리가 지나가면서 숲 전체를 흔들어댄다. 날카로운 영남 사투리는 특히나 귀에 거슬린다. 서둘러 능선에 올라 얼마쯤 걷다가 마당 바위를 지나자마자 길인지 아닌지 구분이 잘되지 않는 소로로 접어든다. 얼마 가지 않아 탄성이 절로 나온다. 그래, 이런 숲이어야 한다! 사위가 고요에 잠기자 비로소 내 몸과 공생하는 미소 생명들이 숲 생명들과 나누는 속삭임이 들려온다. 살짝씩 길을 잃어가며 걷는데 물소리가 들려온다. 홀린 듯 다가가 물과 놀며 옮아가다 보니 또 길이 아니다. 애써 길을 찾고는 다시 물에 홀린다. 손 넣어 만지고, 한 움큼 떠먹고, 야릇한 충동에 휘감기며 이리저리 물길을 감듯 넘나들며 계곡을 내려온다.



인적 없는 상태로 한참 내려오다가 홀연 인기척을 느낀다. 나뭇가지에 가려져 있다 모습을 드러낸 인상 좋은 남자 사람 하나가 개울 건너편 바위 위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다. 눈길이 마주치자 그가 묻는다. “정상 쪽에서 내려오시는 길입니까?” 내가 그렇다고 하자 그가 말한다. “대단하시네요!” 그 흔한 등산화조차 신지 않고 평상복 차림으로 산 타는 늙은이 모습을 보고 그리 말했으리라. 내가 말한다. “이 길 너무 좋습니다.” 그가 답한다. “여기가 관악산 속 지리산입니다. 아는 사람 거의 없지요.” 과연 그렇다 싶다. 인사를 나누고 조금 내려오니 제법 낙차 있는 폭포가 기다린다. 거기서 불과 100m도 떨어지지 않는 곳에 서울대 학생 생활관이 있다. 학생들이 관악산 속 지리산을 알면 좋으련만.

 

먼발치에서나마 강감찬 사당 향해 합장하고 식당을 찾는다. 한참 돌다가 비교적 큰 골목에 왜 보지 못했을까 싶게 떡하니 있는 추어탕집으로 들어간다. 어이쿠, 여기도 영남 사투리가 점령하고 있다. 물경 개신교도다. 여남은 명 앉아 큰 소리로 식사 기도하고 큰 소리로 정치 얘기한다. 나는 애먼 막걸리 맛이나 탓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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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전 세계에 유례없이 국립대학교(인 서울대학교)가 원톱으로 부동 군림하는 고등교육 지정학이야말로 대한민국 상징적인 부역 풍경이다. 그 아래 자리 잡은 사학 가운데 실팍한 부역 서사를 지니는 몇몇 대학교 이야기를 해본다.

 

파란만장한 이야기를 지닌 홍익대학교부터 시작한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이 학교는 대종교 단군 신앙에 근원을 둔 민족주의 이념-홍익인간 이화세계-으로 해방 직후 세워졌다. 해방 직후 정치 공간은 민족주의 진영 주축이었던 홍익대학교가 반공주의·공산주의 모두에게 소외당하는 상황을 낳았고, 학교와 재단 소유는 물론 교육 이념마저 흔들리고 왜곡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1949년 백범 김구 암살은 민족주의 진영에게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이를 반민족주의 세력이 민족주의 진영에 가한 쿠데타라고 표현하기도 한다(대종교 총전교였으며, 홍익대학교 초대 이사장이었던 이흥수의 손자 이주혁). 이어서 1950년 이른바 보도연맹 사건을 일으킨 이승만 부역 정권은 홍익대 주요 인물들을 빨갱이로 몰아 축출했다. 한국동란이 발발하고 이들이 입북하거나 납북되면서 홍익대는 거점을 거의 다 상실했다. 전후 학교 상황이 더 어려워지자 그 틈새를 자유당 이도영과 그 세력이 파고들어서 학교를 접수하고 본디 대종교와 이흥수를 역사에서마저 도려내기 시작했다. 박정희 집권 이후 상황은 더 나빠졌다. 저들이 조선총독부 마지막 학무국장이었던 특권층 부역자 엄상섭을 이사로 밀어 넣으면서 학교는 민족 자주에서 친일 부역으로 본성을 바꿔버리고 말았다.(이상 내용 출처: 프레시안) 한참 뒤 홍대 재학생 김승구에게서 우연히 촉발한 역사 되찾기 투쟁이 어느 정도 열매를 맺기는 했지만, 여전히 홍익대학교는 특권층 부역자 손아귀에 있다. 저들이 앞으로 무슨 짓을 할지 여태껏 저질러 온 짓이 있는 한, 꼭 물어봐야 알 일은 아니다.

 

경희대학교 이야기도 만만치 않다. 이 학교는 본디 우당 이회영 6형제가 만주에 세운 신흥무관학교를 모체로 한다. 신흥무관학교는 1911년부터 1920년까지 3,900명 졸업생을 키워내며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기록에 남아 있지 않지만 청산리 전투 김좌진 장군도 이 학교에서 배웠다고 한다. 해방 후 6형제 중 홀로 살아남은 성재 이시영이 신흥전문학원으로 계승하고 나중에 신흥대학까지 나아갔다. 한국전쟁으로 운영이 어려운 틈을 타서 자유당 쪽 인물인 조영식이 접수하면서 재단과 학교 이름 모두를 바꾸어 오늘에 이르렀다. 조영식은 물론 그 아들 조정원도 경희대학교 역사에서 신흥무관학교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역사를 되살리고자 하는 여러 노력에 계속 묵묵부답이다. 이유를 꼭 물어봐야 알 일은 아니다.

 

누구나 그 주장을 익히 들어서 알고 있는 민족사학고려대학교. 그 전신인 보성전문학교는 본디 이용익(대한제국 탁지부 대신)이 설립했다. 보성이라는 이름을 고종황제가 직접 하사하고 황실 내탕금을 지원한 사실에서 알 수 있듯 민족적 인재를 양성하는 데 설립 목적이 있었다. 실제로 이용익은 독립운동에 참여하면서 교장직을 아들에게 물려주었다. 그 뒤 운영에 어려움을 겪는 과정에서 천도교 손병희를 거쳐 우여곡절 끝에 김성수가 인수해 오늘에 이르렀다. 김성수가 시작하고부터는 그 후손이 대를 이어가며 고려대학교 이사장을 맡고 있다. 고려대학교 이사장은 그대로 동아일보 회장이다. 말하자면 고려대학교와 동아일보는 하나다. 김성수가 특권층 부역자였다는 사실을 차치하고라도 오늘날 상황에서 동아일보 사주가 점하는 사회정치적 위상을 보면 고려대학교를 어떻게 경영할지, 그렇게 경영되는 학교를 단칼에 민족사학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지, 꼭 물어봐야 알 일은 아니다.

 

국민대학교 이야기도 해방 이후 우리 현대사 전형에 해당한다. 아래 내용은 뉴스타파(2019.7.25.) 박중석 <족벌 사학과 세습> 일부를 그대로 가져왔다. 지면을 빌어 감사드린다.

 

대한민국 대학 역사에서 국민대학교는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대한민국 최초의 민립대학이자, 임시정부의 독립운동가들이 건립을 주도했다. 국민대학교 설립 기성회가 결성됐는데, 고문에는 백범 김구와 김규식, 명예회장은 조소앙, 회장에는 신익희가 선임됐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511월 고국에 돌아오자마자 국민대학 설립을 미군정청의 도움 없이 독자적으로 추진했다. 해방 조국에서 임시정부의 독립 정신을 계승하고 새로운 민주국가의 건설에 필요한 인재를 키울 교육기관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자식들에게 배움을 주지 못해 한으로 남았던 독립운동가들의 간절함도 담겨 있었다.

 

교사 터와 시설을 불하받지 못하는 등 당시 미군정청의 비협조에도 국민대학교는 19469월 문을 열었다. 신익희가 초대 학장과 이사장을 맡았다.

 

그러나 신익희가 물러나고, 반민특위가 좌절되면서 분위기가 달라졌다. 국민대는 이승만의 비호 속에 친일 세력이 득세하면서 서서히 변질하기 시작했다. 총독부 관료 등 친일 인사들이 잇달아 학장 자리를 차지했다.

 

초대 학장 신익희가 물러난 국민대에는 친일 전력을 지닌 이들이 총장과 이사장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2대 학장, 박이순은 일제강점기 군수로 친일인명사전에 올라 있다. 그는 국방헌금, 애국기 헌납자금 모금 등 일제 침략전쟁에 협력했다. 19385월 박이순은 황국신민으로서 일제 침략전쟁에 협력할 것을 독려하는 기고문을 썼다.

 

4대 학장 최문경도 일제 강점기 군수 출신이다.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낸 아버지 최연국과 함께 친일인명사전에 올랐다. 최문경은 박정희 정권에서도 잘나갔다. 외무부 차관과 대사 등 요직을 두루 맡았다. 독립운동가에게 중형을 내려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지정된 일제 판사 김세완도 국민대 학장과 이사장이 됐다.

 

독재에 부역했던 이들도 국민대 총장과 이사장을 꿰찼다. 1984년부터 4년 동안 국민대 3대 총장을 지낸 정일영은 박정희 유신독재 시절 유신정우회 의원을 두 차례 지냈다. 1980년 전두환 군사정권에서 국보위 위원에 참여한 정범석은 그 이듬해 국민대 초대 총장에 올랐다. 박정희 정권 때 장관과 부총리를 거쳐, 전두환 정권에서는 국정자문위원에 임명되는 등 줄곧 군사독재에 부역했던 신현확도 4년 동안 국민대 이사장을 맡았다.

 

현재 국민대 이사장은 쌍용그룹 창업자 김성곤의 손자다. 독립운동가들이 만든 국민대학을 친일 반민족 행위자와 독재 부역자들이 지배하다가, 이제는 재벌 후손이 쥐고 있다. 이계형 국민대 특임교수(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 전문위원)는 말한다, “언젠가는 임시정부가 지향했던 대학을 만들지 못한 일에 대한 반성이 필요하다.”

 

사립대학 부역 이야기를 이 정도에서 접는다. 그야말로 빙산 일각이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대한민국 사립대학은 썩은 부분을 도려내면 먹을 만한 과일이 아니라 통째로 버려야 할 썩은 과일이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는지 나로서는 아득하다. 끝내 해결은 되지 않고 적정한 해소만이 답일까. 참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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