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추적할 서사도, 꿰어맞출 조각들도 없어야 했다. 약간의 호기심이라도 생긴다면 내 정신을 깨끗이 비우고 연상작용을 제거하며 뇌와 눈과 신경과 심장의 세포를 신선하고 새롭게 하려는 내 임무에 방해가 될 터였다.

나는 정신을 굶겨 엇나가게 했다. 느끼는 것이 점점 줄었다. 말이 떠오르면 머릿속으로 그 말을 했고, 말들의 소리에 아늑하게 안겨 그 음악에 취했다.

문에 귀를 대고 들어봤지만 들리는 거라곤 내 얕은 호흡, 눈을 깜빡이는 소리, 입에 침이 고이는 소리, 침을 삼킬 때 목구멍에서 울리는 소리뿐이었다.

젖은 도로 위를 달리는 타이어 소리. 창문이 열려 있어서 그 소리가 들렸다. 달콤한 봄 향기가 흘러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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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르헤스 1971 Eduardo Comesaña






보르헤스의 수수한 집을 방문한 적이 없는 사람들은 그의 개인 도서관이 바벨탑처럼 어마어마할 것으로 상상했다. 하지만 보르헤스는 실제로는 수백 권의 책들만 보관했고 그것들조차 방문객들에게 선물로 줘버리곤 했다. 가끔 어떤 책들은 그에게 감상적인 혹은 미신적인 가치가 있었다. 하지만 대체로 그에게 중요했던 것은 그가 기억하는 몇 줄의 문장이었지, 그 문장이 수록되어 있는 책이라는 구체적 형태는 아니었다.

나는 그와는 정반대다. (중략) 위로는 아주 중요하다. 내가 스스로를 위로할 목적으로 침대맡에 놔둔 물건은 언제나 책이었다. 나의 서재는 그 자체로 위로와 조용한 안식의 장소였다. 나는 우리가 책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책이 우리를 소유하기에 이런 안식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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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작가란 무엇인가 - 요사 / 보르헤스의 수수한 집
    from 에그몬트 서곡 2022-09-25 19:24 
    '작가란 무엇인가'의 요사 인터뷰에 보르헤스에 관한 부분이 재미있다. 요사가 보르헤스의 집으로 인터뷰하러 가서 집이 수수해서 놀랐다고 말했더니(벽이 벗겨지고 지붕에서 물이 새는 지경이었다고), 보르헤스가 이 말에 맘이 상해서 다음부터 냉담하게 대했다는 것. 요사가 보르헤스로부터 직접 들은 건 아니고 옥타비오 파스가 알려 주었다고. 요사와 파스는 둘 다 노벨문학상 수상자들. 알베르토 망겔의 책 '서재를 떠나보내며'에도 보르헤스의 서재가 수수하다고 표현한
 
 
 
오디세이아 / 페넬로페의 꿈

망겔의 '서재를 떠나보내며'가 발췌글의 출처이다. 

보르헤스 1963 By Alicia D'Amico(1933-2001)


'보르헤스의 꿈 이야기'에 '두 개의 문'(아이네이스)과 '페넬로페의 꿈'(오디세이)이 나온다. 코엔 형제의 영화 '인사이드 르윈'에서 주인공은 율리시즈란 이름의 고양이를 맡게 되고, 뮤지션인 그가 오디션을 보러 간 시카고의 클럽 이름은 '뿔의 문'이다.  미국 시카고에 '뿔의 문'이란 이름의 공연장이 실제 있다고 한다.





오디세이아 제19권에서 페넬로페는 꿈에 대해 말하면서 그 꿈이 두 개의 문에서 온다고 말한다. 한 꿈은 은은한 유광의 상아 문을 통해서 오는데 우리를 속이는 꿈이다. 다른 한 꿈은 번쩍거리는 뿔의 문을 통해서 오는데 진실을 말하는 꿈이다. 어쩌면 작가들은 그들의 꿈(꿈을 꾸기는 했지만 지어낸 꿈)을 기록하는데 상아의 문만 사용하는 것에 만족해야 할지 모른다. 그와 동시에 그들의 재주가 거짓말을 하는 데 있다는 사실도 인식해야 한다. 다만 작가들의 거짓말을 가리켜 진실이 아니라고 해서는 안 된다. 그 거짓말은 단지 리얼하지 않을(현실에서 찾아볼 수 없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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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서로 알게 된 이후 리바는 시도 때도 없이 가정에 근거한 얘기를 늘어놓고 망상과도 같은 연애 감정을 끝없이 묘사했는데 그건 내게 일종의 자장가가 되었다. 리바는 내 불안에 자석 같은 역할을 했다. 내게서 불안을 쏙 빨아냈다. 그녀가 근처에 있으면 나는 불교의 선승과 같았다. 두려움도 욕망도 보통의 세속적 관심도 전부 초월했다.

그녀와 함께 있으면 지금을 살 수 있었다. 과거도 현재도 없었다. 생각도 없었다. 그녀의 모든 허튼소리에 좌우되기에는 내가 너무 진화했다. 그리고 너무 냉담했다. 리바는 화를 내거나 열의를 불태우기도 하고 우울함이나 환희를 느끼기도 했다. 나는 그러지 않았다. 그러기를 거부했다. 아무것도 느끼지 않고 빈 서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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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위로 구겨진 침대 시트 같은 구름이 흘러가는 걸 보고 오후 중반쯤이리라 추측했다. 로비에서 폭풍우에 유의하라는 수위의 인사를 무시하고 밖으로 느릿느릿 걸어나가 도로를 따라 걸었다. 보도 위와 도로 경계에 높이 쌓인 눈더미들 사이로 구불구불 나 있는 길이 사라지고 있었다. 사방이 고요했으나 공기는 사납고 축축했다. 눈이 더 내리면 도시 전체가 파묻힐 것 같았다. 길모퉁이에서 스웨터를 입고 씰룩거리며 걸어가는 포메라니안 한 마리와 그 돌보미 옆을 지나쳤다. 개가 다리를 하나 올리고 판판한 유리처럼 얼어붙은 보도 바닥에 오줌을 누는 모습이 보였고, 뜨거운 것이 치익 하며 얼음을 녹이는 소리가 들렸다. 얼음 안에 뚫린 둥근 공간에서 잠시 김이 오르다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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