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르스나르 1982 By Bernhard De Grendel - Own work, CC BY-SA 4.0,위키미디어커먼즈






당신은 내가 너무 오랜 기도로 나를 지치게 한다고 부드럽게 나무랐소. 우리는 서로서로에게 절망적이리만큼 잘했소. 당신은 그 시기에 극심한 불면에 시달렸소. 나 역시 잠드는 것이 힘들었소. 우리는 서로에게 안타까움을 털어놓지 않으려고 잠이 든 것처럼 꾸몄소. 아니면 당신은 울었소. 내가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최대한 소리를 죽여 울었고, 그리고 나는 그 소리를 못 들은 척했소. 달래줄 수 없는 눈물이라면 모른 척하는 편이 나을 터요.

우리는 눈물에서 일종의 가련한 만족을 얻었소. 우리 둘의 상호간 비탄은 행복이 그랬을 것처럼 우리를 결합시켜놓기에 이르렀소. 당신 역시 변했소. 내가 당신에게서 예전의 조용함을 탈취해버린 듯했소. 그렇다고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들지도 못하고서 말이오. 당신도 나처럼 까닭없이 조급해졌다가 갑자기 침울해지곤 했소. 우리는 이제 서로 의지하는 두 명의 환자에 불과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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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oov3 - Own work, CC BY-SA 3.0,위키미디어커먼즈 [Her epitaph, in French, reads, "Plaise à Celui qui Est peut-être de dilater le coeur de l'homme à la mesure de toute la vie". This has been translated as, "May it please the One who perchance is to expand the human heart to life's full measure" in her novel The Abyss.]





자신이 남에게 야기시킨 고통은 맨 나중에야 알게 되는 법이오. 게다가 당신은 고통을 숨겼소. 초기에 나는 당신이 그런대로 행복한가보다 추측했소. 당신은 나를 기쁘게 하기 위해, 말하자면 당신을 가리려고 노력했소. 당신의 아름다움을 파묻어버리는 어둡고 두터운 옷차림을 했지요. 왜냐하면 조금만 공들인 단장도 마치 사랑의 제안이라도 되듯 나를 놀라게 했기 때문이오 (당신은 벌써 그것을 알고 있었소).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는 않았지만 당신에게 몹시 애틋한 애정을 품었소. 잠시만 당신이 곁에 없어도 나는 온종일 기분이 울적했소, 그러나 당신과 멀리 떨어져 있어서 괴로웠는지, 단지 내가 혼자된 것이 두려웠는지는 아무도 모를 노릇이었소. 나 자신도 어느 쪽인지 몰랐소.

우리 둘은 신앙 실천에 열렬히 빠져들었는데, 그러한 신앙은 더이상 우리의 진정한 믿음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었소. 모든 것이 결핍된 사람들은 하나님을 찾는데, 그러는 그 순간 그들에겐 하나님도 결핍되오. 자주 우리는 사람들이 여행중 찾아가는 어둠침침하고 환대적인 해묵은 교회당들을 오래 둘러보곤 했소. 우리는 그런 곳에서 기도하는 습관까지 붙였소. 우리는 저녁에 몸을 꼭 붙이고 적어도 공통적인 열정에 의해 결합되어 집으로 돌아왔소. 우리는 거리에 남아 다른 사람들의 삶을 바라보려고 핑계를 만들곤 했소. 다른 사람들의 삶은, 우리가 그 삶을 직접 사는 것이 아니니까, 언제나 쉬워 보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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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주네가 렘브란트에 대해 쓴 책을 발견, '장 주네 렘브란트'로 검색하다가 찾은 기사다. * [‘사랑의 이미지’…화가는 ‘사랑’을 그린다]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5/0000205436?sid=103

Hendrickje Bathing in a River, 1654 - Rembrandt - WikiArt.org * 렘브란트 반 레인 「개울에서 목욕하는 여인」http://www.jejudom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27560 재혼한 부인 헨드리케가 모델이다.


Hendrickje Stoffels in velvet beret, c.1654 - Rembrandt - WikiArt.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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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르스나르 흉상 By Jacques59370 - Own work, CC BY-SA 3.0, 위키미디어커먼즈







나는 기쁨이 우리에게 빚진 것은 없다고, 우리가 원통해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보다 공정하게, 자위했소. 추측하건대 우리가 합리적이라면 모든 것이 그나저나 피차일반일 것이며, 행복은 아마 보다 잘 견뎌낸 불행에 불과할 거요. 나는 속으로 그런 말을 했소.

왜냐하면 용기는 우리가 세상의 일을 변화시킬 수 없을 때, 그대로가 옳다 인정하는 것이니 말이오. 그렇다 해도, 무언가 부족함이 삶에, 혹은 단지 우리 자신 속에 들어 있게 되면, 그것에 대한 상실감이 덜어지는 것은 아니고 그로 인한 고통은 여전하오. 당신도 마찬가지로, 여보, 행복하지 않았소.

관습은 여인들에게 열정을 허용치 않소. 단지 사랑을 허용할 뿐이오. 그런 까닭에 아마 여인들은 그토록 전심전력 사랑할 거요. 당신이 쾌락적 생을 위해 태어났다 말할 수는 없으리다.

그 말에는 죄스러운 무엇이, 아니면 적어도 금지된 무엇이 내포되어 있으니 말이오. 나는, 여보, 당신이 기쁨을 체험하고 기쁨을 나누어주기 위해서 태어났다 말하고 싶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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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철학이나 종교 담론과 다르고, 소설가의 일이 ‘악’에 대한 질문에 논리적인 답을 내놓는 것은 아니다. 


제르맹 역시, “작품의 인물은 실험적 자아”라는 밀란 쿤데라의 말을 인용하면서, 소설 속 인물은 상상의 인물들이지만 작가가 다루는 것은 추상적 대상으로서 인간이 아닌, 현실의 인간을 성찰할 수 있는 실존적 존재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따라서 제르맹의 핵심적인 관심은 인간 내면 깊숙한 곳의 ‘어둠’을 탐사해 인간의 실존을 다루는 일일 것이다. 


그런데 그녀의 작품에서 그려지는 악은 적당한 수준에서 멈추지 않는다. 거짓과 광기, 이기심과 무정함, 집착과 근친상간, 심지어는 살인까지도 자행하는, 극단적인 수준의 ‘악’이 그려진다. 


근원적인 차원에서 정면으로 인간의 심연을 응시하고, 인간성을 성찰하려는 작가의 의지가 반영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제르맹이 ‘악’을 그리는 것은 일반적인 의미의 윤리적 기준을 제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성’ 자체를 탐색하는 일이다.


인간의 어둠을 성찰함으로써 빛을 발견하고 모색하는 것, 인간의 인간다움을 실현할 길을 묻는 것이다.] 


출처: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811778 실비 제르맹에게 있어서 악의 문제, 프랑스문화예술연구(ECFAF), 2022, vol.79, pp. 171-202 (32 pages), 유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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