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 Mal du Pays, 프랑스어예요. 일반적으로는 향수나 멜랑콜리 같은 의미로 사용되지만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전원 풍경이 사람의 마음에 불러일으키는 영문 모를 슬픔’. 정확히 번역하기가 어려운 말이에요."* * 무라카미 하루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양억관 옮김, 민음사, 2013.
메뉴판을 보니 제주산 양식 광어회가 눈에 띈다. 주문을 받는 분은 여기 광어가 한국에서 온 거라고 몇 번을 강조하고 돌아갔다. 뉴욕 퀸스에서 제주도 출신 생선을 만나다니, 21세기의 놀라운 공급사슬과 유통망에 새삼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일단 인터넷이 되지 않는다. 지하철을 탄 시간만이라도 잠시 책을 본다든가 생각에 잠길 수 있는 여유를 시민들에게 제공하려는 MTA의 배려일 리는 없고, 어차피 뉴욕의 지하철은 오프라인의 작은 평화조차 허용하지 않는다.
하우스턴스트리트를 걷다가 친구에게 한마디 들었다. 길에서 나는 지린내를 언급하는 것은 뉴요커답지 못한 태도라는 것이다.
"우리 내려서 걸을까?" 친구에게 이야기했다. 교통 체증이 심한 뉴욕은 택시보다 걷는 게 더 빠를 때가 있다. 하지만 꼭 그래서 걷자고 한 건 아니었다. 그냥 오랜만에 인파에 묻혀 타임스스퀘어를 걸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가장 자주 먹는 피자는 동네에 있는 베쪼(Vezzo)라는 식당의 루콜라를 잔뜩 올리고 네 가지 치즈로 토핑한 화이트치즈피자다. 완벽한 피자란 언제나 ‘지금 당장 먹을 수 있는 피자’이기 때문에.
외국에서 살아본 적도 없었고, 유학은커녕 어학연수 한번 못해봤는데 모국어가 아닌 언어를 쓰면서 밥벌이를 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도대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대체로 용기는 무지에서 나온다).
외국어로 사는 것은 IQ를 30퍼센트쯤 디스카운트해서 사는 일이다. 이 30퍼센트는 한국어가 영어로 바뀌는 사이 어디론가 사라져버린다. 한국어로 축적한 지식들은 생각처럼 바로바로 번역되어 나오지 않았다.
모국어로 쌓아놓은 사회, 문화, 경제, 역사 지식들이 빈약한 내 영어 어휘와 1 대 1로 잘 연결되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던 지식이더라도 영어로 재습득해서 용어와 개념, 논리까지 재구성해놔야만 원하는 형태의 문장이 되어 입 밖으로 나왔다.
머릿속으로 아무리 복잡한 사고를 한다고 해도 입이나 글로 풀어져 나오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이 말이 되어 나오지 않으면, 나는 알고 있는 걸까 모르는 걸까? 마치 선불교의 공안 같은 질문이다.
결국 외국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한 수준에서 생각하고, 생각한 수준에서 대화한다. 영어가 느는 속도는 매우 느린 반면, 사고의 깊이는 빠른 속도로 얕아진다.
톨킨의 말을 빌리자면 "헤매는 사람이 다 길을 잃은 것은 아니다(Not all those who wander are lost)". 모국어로는 길을 잃은 느낌 없이 결론을 찾아가는 여정을 순수하게 즐길 수 있다. 하지만 영어로는 잠시 샛길로 빠졌다가 다시 원래 가려던 길로 돌아와서 마치 계획했다는 듯 유려하게 결말을 내는 일이 불가능하다.
처음 뉴욕에 왔을 때 길을 물어보는 나에게 한 노인분이 해준 말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젊은 친구, 이 도시를 여행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길을 잃는 것이라네(Best way to get around the city is to get lost in the city, son).” 뉴욕에서 길을 잃는 건 꽤 멋진 일이다.아무튼, 뉴욕 : 편견과 편애의 리스트 | 신현호
뉴욕에서 길을 잃는 건 꽤 멋진 일이다"단순한 사랑이란 없다. 사랑이 단순하다고 느껴진다면 아마그건 욕망에 더 가까운 감정일 것이다. 뉴욕이 좋다고 확신할수 있었던 시절의 나는 뉴욕을 사랑하기보다는 욕망했던 걸까?상대의 모든 면을 나열하고 나면 귀납적으로 어렴풋하게나마감정의 형체를 짐작할 수 있게 된다. 무언가를 좋아하는 일이란그 대상에 대해 조금 더 장황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또는 사랑의 가장 사소한 답을 찾아내는 일이다. 나는 지금,누더기같이 콜라주된 이 모순된 도시를 사랑한다고 고백하는중이다. 그러니까 앞으로도 이 리스트를 계속 이어가볼게."
신현호미국 뉴욕에서 10년 넘게 거주 중인 회사원. 실용적 낙관주의자이자 산책 애호가. 주 40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에는 음식과 여행에 관한 글을 쓰거나 요리를 한다. 뉴욕의 겨울을 싫어한다. /
자기 스스로를 100퍼센트 사랑할 수 있을까? 만약 스스로를 완벽하게 사랑하는 것이 어렵다면 자신이 사는 도시를 100퍼센트 사랑하는 일도 불가능하다.
내가 살고 있는 도시에는 만남과 헤어짐, 고통과 즐거움, 밥벌이의 고단함 등등 온갖 감정들이 뒤섞여 있다. 잠시 스쳐 가듯 여행하는 사람처럼 적당한 거리를 둔 산뜻한 관계가 될 수는 없다. 좋은 것을 사랑하는 동시에 끔찍한 것도 견딜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100퍼센트가 아니어도 사랑하는 방법은 존재한다. 사실 꼭 100퍼센트일 필요도 없다.
한때 서울은 나에게 명백한 오답이었다. 하지만 떠나고 나서야 비로소 서울을 진심으로 좋아할 수 있게 되었고 그곳에도 다른 버전의 정답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젊은 친구, 이 도시를 여행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길을 잃는 것이라네(Best way to get around the city is to get lost in the city, son)."
뉴욕에서 길을 잃는 건 꽤 멋진 일이다.
1부 뉴욕에서 길 잃기
〈섹스 앤드 더 시티〉의 도입부에 나오는 클라이슬러빌딩도 옆에 있었다. 그랜드센트럴은 뉴욕의 첫인상 그 자체였다. 이 역은 맨해튼의 심장과도 같은 곳이다.
"지금의 너를 이 자리에 데리고 온 건 큰 성공들이 아니라 작은 실패들이었다"라는 위로의 문자를 받았다. 정말 그랬다.
생각해보면 원하는 곳에는 모두 떨어졌지만 거기에서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플랜A가 성공한 적은 한 번도 없었고 그 문은 닫혔지만 다른 쪽에서 새로운 문이 열렸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플랜B로 잘 채워진 인생을 살아왔던 것이다.
미래완료형은 자기실현적 예언의 시제이다. (자기개발서 같은 결론이지만) 예언은 그 자체로 예언을 이루어내는 힘이 있다. 그래서 현재를 사는 일은 종종 오래된 미래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일이기도 하다.
뉴욕이라는 도시는 어떤 개인을 망가뜨릴 수도, 행운이 따르기만 한다면 성취감을 줄 수도 있다. 스스로 이런 행운을 기꺼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만 뉴욕에 와야 한다.* * E. B. White, 『Here is New York』, Little Bookroom, 2000.
지인들이 인사말처럼 ‘언제 한번 갈게’라고 했지만 실제 여행 오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여행을 하기에 뉴욕은 썩 좋은 도시는 아닐지 모른다. 물가는 살인적이고 하루 종일 앰뷸런스의 사이렌 소리가 들리고 거리에서는 마리화나와 불쾌한 노상 방뇨 냄새가 난다. 같은 시간과 비용이라면 훨씬 더 쾌적한 선택지들이 많이 있다.
심지어 지구를 침공하는 외계인들에게도 뉴욕은 기회의 땅이다. 마치 외계인들은 모두 지구정복 가이드북 같은 걸 읽고 있는 것 아닐까 싶을 때가 있다. 그 책의 첫 페이지에 뉴욕이 소개되어 있고 그래서 다들 일단 뉴욕부터 침공을 시작하는 것이다.
그 변호사의 마지막 인사말은 ‘우리가 운이 좋(아 뉴욕에서 생존한)다면 다른 공연에서도 만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외관적으로 포위된 상태 속에서의 연대 책임을 시민들에게 강요하던 질병은 동시에 전통적인 결합 형태를 파괴하고 개개인을 저마다의 고독 속으로 돌려보내고 있었다.* * 알베르 카뮈, 『페스트』, 김화영 옮김, 민음사, 2011.
트럼프는 공식 석상에서 코로나바이러스를 ‘중국 바이러스(Chinese Virus)’라고 불렀다. 팬데믹에 지친 사람들의 분노를 특정 인종에게 돌려 더 많은 차별과 혐오를 만들어내는 치명적인 표현이었다. 코로나바이러스가 퍼진 뒤 뉴욕에서는 아시아인을 표적으로 하는 증오 범죄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차별과 혐오는 사실은 공기 같은 것이다. 막상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마치 기압처럼 언제나 나를 둘러싸고 일정한 압력을 만들어내는 무언가이다.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특정 시간을 기억하는 방법 중에 하나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마르셀이 ‘홍차에 적신 마들렌’을 통해 자신의 유년 시절을 회상하듯, 프룬을 생각하면 한가로운 주말 오전 뉴욕에 여행 온 친구들과 함께 나눴던 대화들, 지독한 숙취의 기억과 블러디메리 두 잔에 적당히 취해 이스트빌리지 거리로 나왔을 때 쏟아지는 햇살 같은, 팬데믹 이전의 어떤 뉴욕을 떠올릴 수 있다.
내 입에서 나오는 대부분의 단어는 내 감정과 딱 맞아 떨어지지 않았다. 그때 나는 모국어에도 역시 내 마음과 딱 맞아 떨어지는 단어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낯선 외국에 살기 시작할 때까지 그것을 느끼지 못했을 뿐이다. 나는 유창하게 모국어를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 가끔 구역질이 났다. 그 사람들은 말이란 그렇게 착착 준비되어 있다가 척척 잽싸게 나오는 것이고 그 이외의 다른 것은 생각하거나 느낄 수 없다는 인상을 주었기 때문이다.* * 다와다 요코, 『영혼 없는 작가』, 최윤영 옮김, 을유문화사, 2011.
"어머, 황 여사님은 생각하는 게 어쩜 그리 저이하고 똑같으지요? 저이도 박태준 회장님은 참 아까운 대통령감이었다고, 나라에 좋지 않은 일이 생길 때마다 안타까워하고는 해요. 보수이면서도 진보도 잘 이해하고 존중했던 폭넓은 분이었다고요."
"아아, 광양 재첩국 맛은 언제나 기가 막힙니다." 이태하가 먼저 감탄을 터뜨렸고, "어머나, 이 맛! 서울 재첩국은 재첩국이 아니에요." 황연주가 잇따라 감탄했다.
"상큼하고, 알싸하고, 풋풋하고, 은은하고, 그러면서 깊고, 진하고……, 참 맛이 뭐라고 표현하기 어렵게 특이하고 묘해요. 이 국물 색깔도 푸르스름한 게 아주 곱기까지 하구요."
사회학적 측면에서 보면 인간은 돈이 생겨난 이후 5천여 년에 걸쳐서 줄곧 돈의 노예였소. 그런데 자본주의가 등장하고, 사회주의와의 대결에서 사회주의가 스스로 몰락하면서 자본주의가 독불장군으로 세계 지배력을 장악하게 되고, 그 세월이 30년이 넘으면서 이 나라 청소년과 젊은이 들까지 돈의 마력에 완전히 휘말리게 되고 말았소.
개보다 못한 사람
‘군중 속의 고독…….’문득 떠오른 생각이었다. 1학년 교양 국어 시간에 교수가 그 말을 설명하면서 바로 이런 건널목을 예로 들었던 것이다.
‘미친것들, 개 새끼한테 영어를 가르쳐? 미국이 그렇게도 좋으냐? 웃기고 자빠졌네.’ 너무 역겨워 이렇게 욕을 해댄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던 것이다.
"네, 회장님. 저도 개를 좋아합니다. 해피가 해피하도록 잘 하고, 많이 사랑하겠습니다."
그러나 회장이 원하는 것이고, 회장의 마음에 들어야 하니까 전진혜는 해피를 해피하지 않은 마음으로 회장이 만족할 수 있도록 목욕시켰다.
"어쩌겠어. 돈이라는 게 그런 거 아닌가. 한때 척결의 대상으로 삼았던 자들에게, 병들어 보험 애걸을 하고 다니며 거절을 당하는 처지니 이보다 리얼한 실존이 어디 있고, 이보다 리얼한 부조리가 어디 있겠나. 그게 돈이라는 흉물이 부리는 괴력일 거야."
"회사에서 퇴직금 정산한 것으로 모든 관계를 끝낸 것 아닐까?"
이태하는 사무실을 나섰다. 드높은 빌딩들만 치솟아 하늘이 좁아질 대로 좁아진 도심의 하루가 저물고 있었다. 넓은 거리에는 숨 가쁘게 돌아친 도시의 일과에 지친 사람들이 가득 걸어가고 있었다. 이태하도 복잡한 생각이 뒤엉킨 채 그 사람들 속으로 섞여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