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생각했을 때, 거의 동시에 ‘총포전래’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일오사삼 총포전래.’
1543년, 총포전래銃砲傳來.
어처구니없고, 스스로도 기가 막혔다.

그러나 비슷한 연대 맞히기를 몇 개쯤 기억해 내는 것은 가능하다. 좋은 나라 만들자 가마쿠라 막부. 무사고의 날 없음 다이카 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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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판 없는 거리

정거장 플랫폼에
내렸을 때 아무도 없어.

다들 손님들뿐,
손님 같은 사람들뿐,

집집마다 간판이 없어
집 찾을 근심이 없어

빨갛게
파랗게
불붙는 문자도 없이

모퉁이마다
자애로운 헌 와사등에
불을 켜 놓고, - P77

손목을 잡으면
다들, 어진 사람들
다들, 어진 사람들

봄, 여름, 가을, 겨울,
순서로 돌아들고. - P78

무서운 시간

거 나를 부르는 것이 누구요,

가랑잎 이파리 푸르러 나오는 그늘인데,
나 아직 여기 호흡이 남아 있소.

한번도 손들어보지 못한 나를
손들어 표할 하늘도 없는 나를

어디에 내 한 몸 둘 하늘이 있어
나를 부르는 것이오.

일이 마치고 내 죽는 날 아침에는
서럽지도 않은 가랑잎이 떨어질 텐데...

나를 부르지 마오. - P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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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밤

솨- 철석! 파도 소리 문살에 부서져
잠 살포시 꿈이 흩어진다.

잠은 한낱 검은 고래 떼처럼 설레어
달랠 아무런 재주도 없다.

불을 밝혀 잠옷을 정성스리 여미는
삼경(三更).
염원.

동경(憧憬)의 땅 강남에 또 홍수질 것만  싶어,
바다의 향수보다 더 호젓해진다. - P57

이적

발에 터분한 것을 다 빼어 버리고
황혼이 호수 위로 걸어오듯이
나도 사뿐사뿐 걸어보리이까?

내사이 호숫가로
부르는 이 없이
불리어 온 것은
참말 이적‘이외다.

오늘따라
연정, 자홀(自), 시기, 이것들이
자꾸 금메달처럼 만져지는구려

하나, 내 모든 것을 여념 없이,
물결에 써서 보내려니
당신은 호면(湖面)으로 나를 불러내소서.

1. 이적 (異蹟): 기적. - P60

아우의 인상화

붉은 이마에 싸늘한 달이 서리어
아우의 얼굴은 슬픈 그림이다.

발걸음을 멈추어
살그머니 앳된 손을 잡으며
"너는 자라 무엇이 되려니"
"사람이 되지"
아우의 설운 진정코 설운 대답이다.

슬며시 잡았던 손을 놓고
아우의 얼굴을 다시 들여다본다.

싸늘한 달이 붉은 이마에 젖어,
아우의 얼굴은 슬픈 그림이다. - P61

코스모스

청초한 코스모스는
오직 하나인 나의 아가씨,

달빛이 싸늘히 추운 밤이면
옛 소녀가 못 견디게 그리워
코스모스 핀 정원으로 찾아간다.

코스모스는
귀또리 울음에도 수줍어지고,

코스모스 앞에 선 나는
어렸을 적처럼 부끄러워지나니,

내 마음은 코스모스의 마음이요
코스모스의 마음은 내 마음이다. - P62

슬픈 족속

흰 수건이 검은 머리를 두르고
흰 고무신이 거친 발에 걸리우다.

흰 저고리 치마가 슬픈 몸집을 가리고
흰 띠가 가는 허리를 질끈 동이다. - P63

달같이

연륜이 자라듯이
달이 자라는 고요한 밤에
달같이 외로운 사랑이
가슴 하나 뻐근히
연륜처럼 피어나간다. - P66

장미 병들어

장미 병들어
옮겨 놓을 이웃이 없도다.

달랑달랑 외로이
황마차 태워 산에 보낼거나

뚜ㅡㅡㅡ구슬피
화륜선 태워 대양에 보낼거나

프로펠러 소리 요란히
비행기 태워 성층권에 보낼거나

이것 저것
다 그만두고

자라가는 아들이 꿈을 깨기 전
이내 가슴에 묻어다오. - P67

산골 물

괴로운 사람아 괴로운 사람아
옷자락 물결 속에서도
가슴속 깊이 돌돌 샘물이 흘러
이 밤을 더불어 말할 이 없도다.
거리의 소음과 노래 부를 수 없도다.
그신듯이‘ 냇가에 앉았으니
사랑과 일을 거리에 맡기고
가만히 가만히
바다로 가자.
바다로 가자.

1.그신듯이: 끌리듯이. - P70

자화상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 P71

팔복-・마태복음 5장 3-12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 - P75

병원

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 병원 뒤뜰에 누워, 젊은 여자가 흰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 놓고 일광욕을 한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앓는다는 이 여자를 찾아오는 이, 나비 한 마리도 없다. 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 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에서 금잔화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 안으로사라진다.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ㅡ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던 자리에누워 본다. - P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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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날 밤, 도시유키가 철야로 일을 정리하던 이유는 다음다음 날인 12일부터 회사 전체가 열흘간 여름휴가에 들어가기 때문이었다. 휴가를 받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규칙이다.

그러나 그동안에 밀리는 일을 누군가 대신 떠맡아 줄 리 없다. 사실을 말하자면 도시유키는 여름휴가를 받아야 했기 때문에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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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어요. 외박했다고 해도 언제나 하룻밤 지나면 돌아왔다구요."

요시코가 말하는 ‘외박’을 미사오는 ‘가스빼기’라고 불렀다.

― 가끔씩 가스빼기를 하지 않으면 난 정말 폭발해 버릴 것 같아.

도시유키는 무엇을 위해 일했던 것일까. 생각해 보면 가족 셋이 여행을 간 적도 한 번밖에 없다. 유카리를 데리고 가벼운 기분으로 동물원이나 유원지에 놀러 간 적도 손에 꼽을 정도다. 잔업은 연일이고 철야 작업도 결코 드물지 않았다. 그렇게 하면서까지 일을 했는데 경제적으로는 빨리 죽은 편이 이득이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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