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은 인간의 영혼을 잠식한다. 각자가 나를 어떤 존재로 지을 것인가의 자유를 누릴 수 없다. 불안 때문에 그런 생각 자체를 하지 못한다. 이 사회의 지배적인 가치관은 소유에만 관심이 있고 소유물이 무엇이며 얼마나 되는지가그 사람의 가치를 규정한다. 그래서 더 많이 소유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인간성을 훼손하는 불안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도 공적 분배를 통한보편복지의 확충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모든 사회 구성원들이 인간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도록 해주는 사회, 그렇게 더불어 사는 사회, 사회적 연대가 살아 있는 사회, 모두가 소박하게 살지언정 최소한의 인간 존엄성만큼은지켜주는 사회로 가야 하는 것이다. 이런 사회 환경에서 구성원들은 자기 자신의 존재를 가꿀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머리(의식)도 중요하지만, 머리보다 가슴(공감 능력)이 더 중요하고, 가슴보다는 발(실천)이 더 중요하다"라고 말하는 것인데, 신자유주의가 유일사상으로 지배하는 한국 사회에서는 가슴이나 발은커녕 머리도 찾기 어려운 실정이다.

박해와 죽음의 위험에서 벗어나고자 피난처를 찾아 한국 땅을 찾아온 난민들을 환대하기는커녕 혐오하는 동시대인들이 너무 많다. 이 땅을 찾아온 난민은 난민이라는 거울을 통해 투사된 우리의 자화상을 드러낸다.

독일 국내 극우 세력의 반대뿐 아니라 소속 기독교민주당의 반대도 무릅쓰고 100만 명 이상의 난민을 받아들인 앙겔라 메르켈의 담대한 정치철학은 물론, 그런 지도자의 결단을 결국 수용한 독일인들의 수준도 놀랍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인종주의에 관한 탁월한 책을 쓴 타하르 벤 젤룬은 이방인에 대한 두려움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방인을 두려워할 권리를 갖는 것, 그것이 바로 두려움에 대한 승리가 된다. 두려움에 정면으로 맞서고, 우리 자신의 허약함의 거울 속에서 자신을 냉철하게 직시하는 대신에 우리는 우리의 두려움을 적에 대한 무기로 만들고 방패로 사용하려고 두려움을 내면화한다. 그리하여, 위협인 이방인은 넘어올 수 없다."

자공이 물었다.
"평생 동안 실천할 만한 한 가지 말씀이 있습니까?"
"서(恕)다. 자신이 원하는 바가 아니면 남에게도 행하지 말라."

『논어』 위령편에 나오는 구절이다. 예수님도 "남이 너에게 대접해주길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대접해주어라"라고 말씀하셨다.(마태복음)

캐나다의 중도파 자유당의 쥐스탱 트뤼도 대표는 선거 캠페인 중에 "총리에 선출된다면 2015년 말 이전에 2만 5,000명의 시리아 난민을 받아들이겠다"고 약속했다.

트뤼도 정부의 존 맥컬럼 이민부 장관은 이렇게 말했다. "여러 해 전부터 세계의 난민 위기가 더 심각해지는 터에 다른 나라들이 문을 닫을 때 우리는 문을 열 것이다." 또 "가장 중요한 도전은 난민을 위한 주택과 언어 교육, 그리고 일자리다"라고 말했는데, 실제로 69퍼센트의 시리아 난민들은 입국한 지 석 달도 지나지 않아 주택을 제공받았다.

우리가 자주 말하곤 하는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의 뜻은 꾈 유(誘) 자를 써서 확장되어야 한다. 돈이 없으면 죄가 되는 것에 머물지 않고 죄를 짓도록 이끌기 때문이다(無錢有罪→無錢誘罪).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고 말했을 때 사람들은 나를 성자라고 불렀다. 그러나 가난을 만드는 구조를 바뀌어야 한다고 말하자, 사람들은 나를 빨갱이라고 불렀다."

동 에우데르 카마라 대주교의 말이다. 브라질의 빈민 지역에서 활동한 뒤 생을 마감한 카마라 대주교는 활동 초기에 부자들에게 가난한 이들을 위한 구제 활동에 참여해줄 것을 호소했다. 그러나 그가 부자들의 기부에 의한 복지사업으로는 가난의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개인적 선행의 한계는 가난한 사람들로 하여금 자긍심을 갖지 못하게 한다는 데 있다. 스스로 자신을 형성할 수 없고 동정에 의존해 살아가야 하는 사람에게는 자긍심이 아니라 부끄러움이 남는다. 그래서 카마라 대주교는 청소부에게 정말 부끄럽게 여겨야 하는 것은 일하느라 거칠어지고 더러워진 손이 아니라, 사람들을 자기중심적인 태도에 머물게 하는 사회구조라고 말했던 것이다.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은 인간의 존엄성과 행복 추구권이다.

결국 인간성을 훼손하는 불안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도 공적 분배를 통한 보편복지의 확충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모든 사회 구성원들이 인간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도록 해주는 사회, 그렇게 더불어 사는 사회, 사회적 연대가 살아 있는 사회, 모두가 소박하게 살지언정 최소한의 인간 존엄성만큼은 지켜주는 사회로 가야 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물질이 아니라 모든 이웃들에게 존엄한 삶을 보장해줄 수 있는 연대의 정신과 성숙한 정치다.

장발장은행은 그런 사회를 향한 작은 씨앗의 하나일 뿐이다. 빨리 문을 닫는 게 장발장은행의 목적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에 ‘가난의 상태’가 지속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우리가 바라는 사회를 남이 대신 만들어주지 않는다고 할 때, 시민들의 적극적인 연대활동과 올바른 정치 참여만이 그 길을 열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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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 : 거칢에 대하여
홍세화 지음 / 한겨레출판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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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스스로 사회주의자라고 언명한—사회주의자이면서 자유주의자라고 했는데, 아무튼—조국 씨가 청와대에 입성하는 것을 보며 신선함을 느꼈다. 그런데 진보를 말하는 것과 진보를 사는 것이 다르고, 사회주의를 말하는 것과 사회주의를 사는 것은 다르다. 우리는 신이 아닌 사람이므로 말과 실제 행동은 다를 수밖에 없다. 공자님은 “말은 항상 지나치고 행동은 항상 미치지 못한다” “군자는 말이 행동보다 지나치는 것을 부끄러워한다”고 말씀하셨다. 누군가 말했듯이, 위선은 말과 행동을 다르게 사는 사람이 아니라 말과 행동을 다르게 살면서도 다르지 않게 산다고 말하는 사람을 일컬을 때 사용하는 말이다. 조국 씨는 SNS 활동에 무척 열심이었고 성찰이라는 말을 빈번히 사용했다. 그의 성찰은 그의 말과 행동의 간극을 조금도 줄여주지 않은 듯했다. 나에게 그는 점차 해석하기 어려운 인물로 비쳤는데, 수많은 동시대인들이 “우리가 조국이다!”라고 말하는 놀라운 상황을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조국 가족은 하면 안 되는 일까지 포함하여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총동원해서 리브스가 말한 기회의 사재기에 나섰는데, 서초동에서 “우리가 정경심이다!”라고 외친 그 수많은 사람들이 “삼루에 태어나… 삼루타를 치는” “기자, 학자, 기술자, 경영자, 관료들, 이름에 박사(PhD), 의사(Dr)와 같은 알파벳이 붙는” 사람들이었을까?

1886년 5월 1일, 미국 시카고의 노동자들은 하루 ‘8시간’ 노동제를 주창하며 시위에 나섰다. 하루에 보통 12시간, 적어도 10시간씩 일해야 했던 그들은 하루 24시간을 3으로 나누어 8시간은 잠자고, 8시간은 빵, 즉 일용할 양식을 위해 일하고, 나머지 8시간은 장미, 즉 자아실현을 위한 자유시간을 갖기를 바랐다. 미국 경찰은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여 사상자를 냈고 폭발물 사고를 빙자해서 노동운동 지도자들에게 내란죄를 적용하여 사형을 선고하고 집행했다. 5월 1일, 전 세계의 노동자들이 노동자의 생일로 기념하는 노동절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결 : 거칢에 대하여 | 홍세화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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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군정청의 여론국이 38선 이남 주민 8,453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도했다. 질문 항목 중에 "귀하는 어느 것을 찬성합니까?"라는 물음이 있었는데, 이에 대한 답변 분포는 다음과 같았다.

(가) 자본주의 1,189인(14%)
(나) 사회주의 6,037인(70%)
(다) 공산주의 574인(7%)
(라) 모른다 653인(8%)
(『해방일기』 4권, 너머북스)

남한의 농지개혁은 ‘유상몰수, 유상분배’로 실시되어 북한의 ‘무상몰수, 무상분배’에 비하면 훨씬 온건한 방식이었지만, 자본주의 체제에서 사유재산권을 누르고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이 관철되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무관심은 잔인한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은 매우 활동적이며 강력한 힘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무관심은 무엇보다도 추악한 권력의 남용과 탈선을 허용해주기 때문이다." 『경제적 공포』를 쓴 비비안느 포레스테의 말이다.

상징폭력은 피지배자들로 하여금 사회적 위계를 정당하거나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함으로써 지배자들에게 복종하도록 이끄는 지배 기제다. 몸에 대한 물리적 폭력 행위가 그 순간의 복종을 이끌어내는 반면에, 상징폭력은 피지배자들에게서 지속적인 복종을 이끌어낸다.

나는 스스로 사회주의자라고 언명한—사회주의자이면서 자유주의자라고 했는데, 아무튼—조국 씨가 청와대에 입성하는 것을 보며 신선함을 느꼈다.

그런데 진보를 말하는 것과 진보를 사는 것이 다르고, 사회주의를 말하는 것과 사회주의를 사는 것은 다르다. 우리는 신이 아닌 사람이므로 말과 실제 행동은 다를 수밖에 없다.

공자님은 "말은 항상 지나치고 행동은 항상 미치지 못한다" "군자는 말이 행동보다 지나치는 것을 부끄러워한다"고 말씀하셨다. 누군가 말했듯이, 위선은 말과 행동을 다르게 사는 사람이 아니라 말과 행동을 다르게 살면서도 다르지 않게 산다고 말하는 사람을 일컬을 때 사용하는 말이다.

조국 씨는 SNS 활동에 무척 열심이었고 성찰이라는 말을 빈번히 사용했다. 그의 성찰은 그의 말과 행동의 간극을 조금도 줄여주지 않은 듯했다.

나에게 그는 점차 해석하기 어려운 인물로 비쳤는데, 수많은 동시대인들이 "우리가 조국이다!"라고 말하는 놀라운 상황을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조국 가족은 하면 안 되는 일까지 포함하여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총동원해서 리브스가 말한 기회의 사재기에 나섰는데, 서초동에서 "우리가 정경심이다!"라고 외친 그 수많은 사람들이 "삼루에 태어나… 삼루타를 치는" "기자, 학자, 기술자, 경영자, 관료들, 이름에 박사(PhD), 의사(Dr)와 같은 알파벳이 붙는" 사람들이었을까?

<르 몽드>의 정치평론 기자 실비 코프만은 "인터넷과 사회적 관계망에서 사용되는 알고리듬은 모든 시민들을 서로 모순되는 정보와 부딪히지 않은 채 똑같은 방식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지적, 미디어적 환경에 가두는 인식틀을 형성한다"고 지적했다.

조국 사태는 "서로 모순되는 정보와 부딪히지 않은 채 똑같은 방식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지적, 미디어적 환경에 가두는" 게 ‘조중동’만의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우리가 만나는 세계 소식을 비유적으로 표현하자면, "우리는 파리지앵이다!"는 크게 보이지만 "우리는 시리아인이다!"는 거의 볼 수 없다. 하지만 국제정치에서 우리의 처지가 파리지앵보다 시리아인에 더 가깝다고 인식한다면 "우리는 시리아인이다!"라고 말할 줄 알아야 할 것이다.

‘정치적 중립’이라는 말은 우리 사회에서 현실이라는 말만큼이나 억압적이다. 정치적 중립을 지키라고 요구할 때, 누구 또는 무엇을 기준으로 중립을 요구하는 것인지 물을 줄 알아야 한다.

그 기준은 말할 것도 없이 권력이다. 따라서 중립을 지킨다는 것은 권력의 요구에 따르라는 것으로, 그 대부분은 요령을 체득한 비겁함의 다른 이름이다. 현실적인 힘의 작용 앞에서 적절히 보신하면서 명분을 챙기는 태도에 가깝고 그것은 자유인의 대척점에 있다.

독일인들은 학생들에 대한 정치교육과 관련하여 다음 세 가지 원칙에 합의했다.

첫째, 교화 금지 - 학생들에게 지식이나 이념의 주입과 같은 강제적 교육을 금지한다,

둘째, 논쟁성 유지 - 학문과 정치에서 논쟁이 되는 것은 수업 속에서도 논쟁성을 유지해야 한다.

셋째, 이해관계 인지 - 학생들이 스스로 자신의 정치적 상황과 이해관계에 따른 정치적 안목을 기르고, 자신의 정치적 이익에 부합하는 정치 참여 역량을 기르게 한다.

수구 세력이 질서나 안보를 강조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들이 누리는 기득권이 흔들려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질서, 안보를 강조하는 지배 이념에는 사회 변화를 바라지 않거나 두려워하는 의식이 깔려 있다.

슬라보예 지젝은 말했다. "우리가 단호하게 거부해야 하는 것은 정치를 모든 긍정적인 기획을 포기하면서 단지 최악의 선택을 피하고 차악을 선택하는 것으로 전락시키는 피해의식에 가득 찬 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이다."

자유인은 언제나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가는 길이 어려운 게 아니라, 어려운 길이므로 우리가 간다."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에서 벗어나도록! 일거에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묘책은 없다. 다시 강조하건대, 잡초는 없앨 수 없다. 다만 뽑을 수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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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라는 질문이 죽은 사회는 토론 문화가 죽은 사회, 논리의 추구, 합리성의 추구가 죽은 사회다. 키케로라는 로마의 공화주의자이자 정치가가 2,000년 전에 반어법으로 사용한 "논리로 안 되면 인신을 공격하라!"가 오늘 한국 사회에 그대로 적용되는 이유다.

인문사회과학은 인간에 대한 물음, 사회에 대한 물음의 학문으로 정답이 없고 사유와 논리가 중요하다는 말을 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강조해왔다. 사회, 역사, 지리, 경제, 정치, 윤리, 철학, 언어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신민을 길러내던 학교가 시민을 길러내는 학교로 탈바꿈하는 대신 고객을 상대하는 학원이 되었다는 점이다. 바로 이것이 적지 않은 학생들이 교실에서 거리낌 없이 잠잘 수 있게 된 배경이다.

신민이 타율성으로 복종하는 존재라면, 시민은 자율성을 가진 주체적인 존재다. 자율성을 형성하지 못한 채 고객이 되었으니 ‘제멋대로’ 하는 것이다.

올바른 교육이라면 ① 그 교과목을 학습해야 하는목표 ②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학습 과정 ③ 그 과정을 통해 목적에 얼마나 다가갔는지에 대한 평가의 세부분에서 통일성을 이루어야 한다.

학이불사망(學而不思則罔)
사이불학즉태(思而不學則殆)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얻는게 없고
생각하기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

우리가 안고 있는 모순은 계급 모순, 분단 모순, 지역 모순, 젠더, 생태 문제등으로 전 세계에서 가장 복합적이다. 모순이 워낙 첨예한 탓도 있겠지만, 활동양태나 주장들도 온유하지 못하고 거칠다. 각자가 자기만의 래디컬을 주장하게 되면 결국 모두 극단주의로 치달을 위험이 있다. 우리 모두에게 겸손함이 필요하다. 의지로 회의하는 자아가 되어 나부터 변화하고 성숙하자. 나도수시로 설득된다는 조건 아래 내 가족과 이웃과 동료를 설득해야 한다.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에서 벗어나도록! 일거에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묘책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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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사람>은 로댕이 단테의 『신곡』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한 <지옥문>의 한 부분이었다. 문에는 지옥으로 들어가는 인간 군상의 고통과 죽음의 상들이 펼쳐져 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데카르트의 명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중세와 결별하고 근대를 알리는 변곡점이었다.

중세의 인간관은 성서에 나와 있듯이 "하느님에 의해 하느님의 형상에 따라 창조되었다"는 창조론에 입각해 있었는데, 그것이 무너지자 의문을 품었던 데카르트는 생각하는 존재로 근대의 인간관을 말했다.

유럽의 아이들이 가장 많이 사용한 단어는 첫째가 ‘엄마’, 둘째가 ‘왜?’였다. 아이가 엄마에게 ‘왜?’를 묻는 것은 생각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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