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몇 년간 큰 정치·사회적 사건을 여럿 겪어서인지, 나는 우리 현대사를 예전과 조금 다른 시선으로 보게 됐다.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박근혜 대통령 탄핵과 신종 바이러스의 대유행을 겪으면서 나뿐 아니라 한국인이면 누구나 한국사회를 ‘재발견’했다고 생각한다.
첫째, 지난 6년 동안 일어난 중요한 사건에 대한 서술을 추가하고 인구·국민소득·소득분배 등 사회변화를 보여주는 시계열 데이터를 업데이트했다.
둘째, 한국사회에 대한 시민의 인식과 태도가 6년 전과 비교했을 때 변화했다는 사실을 반영하되 책이 지나치게 두꺼워지지 않도록 정보를 압축하고 문장을 전체적으로 손보았다.
셋째, ‘조금 달라진 시선’으로 에필로그를 다시 썼다.
나는 우리 현대사에서 희망의 단서를 찾고 싶었다. 현실이 암담할 때 역사 말고 어디에서 그런 것을 찾겠는가.
2020년의 현실은 우리 자신과 역사에 대한 믿음과 자부심을 품고 희망적인 미래를 기대해도 좋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안다. 역사는 그런 시간을 길게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을.
역사는 또한 환희와 낙관이 넘쳐나는 시대가 비극과 몰락의 시간을 예비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고 경고했다. 그런 두려움을 안고 격려를 받으며 나는 오늘의 역사를 산다. 그 과정에서 모인 생각과 감정을 나누며 독자들께 말하고 싶다. ‘역사는 우리가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2021년 1월 자유인의 서재에서 유시민
나의 한국현대사 1959-2020 | 유시민
모든 역사는 ‘주관적 기록’이다. 역사는 과거를 ‘실제 그러했던 그대로’ 보여주지 않는다. 방송뉴스와 신문보도가 현재를 ‘실제 그러한 그대로’ 전해주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역사학자 서중석을 석좌교수로 초빙하기로 했던 연세대는 그가 백낙준 초대총장의 친일행적을 비판한 적이 있다고 해서 취소했다. 이런 위험 때문에 박근혜 대통령의 지명을 받아 국회 인사청문회에 나온 공직 후보자들은 5·16을 쿠데타로 보느냐는 질문에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흐름 속에 있는 것은 사건만이 아니다. 역사가 자신도 그 속에 있다. 어떤 역사책을 집어들 때, 책 표지에 있는 저자의 이름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출간 일자나 집필 일자도 살펴보아야 한다. 그런 것이 때로 훨씬 많은 것을 누설한다. — 에드워드 H. 카, 『역사란 무엇인가』
"대구·경북의 프티부르주아 출신 지식 엘리트로서 젊은 나이에 공직을 맡고 이름을 알렸다가 문필업으로 돌아온 자유주의자." 나는 나를 그렇게 본다.
민주주의 선거제도는 훌륭한 사람의 당선을 보장하기 때문이 아니라 사악한 인물이 권력을 쥐어도 악을 마음대로 행할 수 없게 한다는 강점 덕분에 문명의 대세가 됐다.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이며,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이다."• "존재하는 것을 개념에 따라 파악하는 것이 철학의 과제다. 존재하는 것은 곧 이성이기 때문이다."•• 철학자 헤겔의 난해한 이 견해를 통속적으로 해석하면 이렇게 된다.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은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며, 그 이유를 말이 되게 설명하는 것이 지식인의 임무다.’
거듭 말하지만, 역사는 주관적인 기록이다. 누가 쓴 어떤 역사도 과거를 "원래 그러했던 그대로"• 보여주지 않는다. ‘현재’는 가상의 개념일 뿐이다. 현재의 모든 사실은 즉각 과거로 들어간다.
"원래 그러했던 그대로(wie es eigentlich gewesen war)"라는 말은 근대 서구 역사학의 아버지로 일컬어지는 독일 역사학자 랑케(Leopold von Ranke, 1795~1886)의 것이다. 랑케는 1824년에 출간한 『라틴 및 게르만 제 민족의 역사 1494~1514』의 서문에 "과거를 판단하거나 윤택한 미래를 위해 교훈을 제공해주는 것이 아니라 단지 과거를 원래 그러했던 그대로 보여주려고 한다"라고 썼다.
그때와 달리 고교 졸업생의 70%가 대학에 가는 지금은 대학졸업장이 괜찮은 일자리를 보장해주지 않는다. 우리 역사에서 모든 청년에게 ‘제대로 된 일자리(decent job)’가 주어진 적은 한 번도 없다.
극단적 관념론 철학인 주체사상을 국가이념으로 내세우고 생물학적 유전자를 따라 권력을 대물림하는 나라가 사회주의를 표방한다는 사실을 마르크스가 안다면 무덤에서 크게 화낼 것이다.
국부(國父)를 자처한 무능하고 이기적인 독재자가 통치하는 동안 국민의 삶은 불안하고 비참했다.
허황하기 짝이 없는 ‘북진통일론’을 비판하고 ‘평화통일론’을 에둘러 주장한 죄로 교수형을 당한 그는 사형집행 임석 검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공산당도 아니고 간첩도 아니오. 그저 이승만과의 선거에 져서 정치적 이유로 죽는 것이오. 나는 이렇게 사라지지만 앞으로 이런 비극은 없어야 할 것이오."
1959년의 대한민국은, 말 그대로 목숨을 걸지 않고는 권력의 불의에 대항하거나 헌법이 보장한 기본권을 행사할 수 없는 나라였다.
일부 광물자원 이외에는 수출할 것이 아예 없었던 나라가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무역대국으로 올라섰으니 기적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대한민국이 모두에게 살기 좋은 나라는 아니다. 고르게 가난했던 독재국가 대한민국은 풍요롭지만 고르지 않은 민주국가로 변신했다.
20세기의 신생국가 중에 대한민국처럼 제국주의 수탈과 전쟁이 남긴 폐허를 딛고 거대한 현대적 산업과 정치적 민주주의를 세우는 데 성공한 나라는 없다.
나는 한국현대사를 만든 힘이 대중의 욕망(慾望, desire)이었다고 생각한다. 욕망이라는 단어가 주는 부정적인 느낌 때문인지 사람들은 욕구(慾求)라는 말을 선호하지만 어느 것을 쓰든 상관없다.
첫째, ‘생리적 욕망’. 사람은 숨을 쉬고 물을 마시고 밥을 먹고 잠을 자야 한다. 짝을 찾아 성적인 욕망을 채우려 한다.
둘째, ‘안전에 대한 욕망’. 사람은 두려움, 불안, 혼돈을 싫어한다.
셋째, ‘소속감과 사랑에 대한 욕망’. 사람은 고립과 소외를 싫어한다.
넷째, ‘자기 존중의 욕망’. 사람은 남한테 존경받고 자신을 긍정적으로 인식할 때 기쁨과 만족을 얻는다.
다섯째, ‘자아실현의 욕망’. 이것은 본성에 충실하고 잠재성을 실현함으로써 인간성의 정점에 오르려는, 겉으로 드러나는 모든 것을 넘어서는 최고의 내면·철학적 욕망이다.
고대 그리스와 중국에서 훌륭한 삶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남긴 사람은 직접 생산활동에 종사하지 않아도 되는 귀족과 지식인이었다.
자연이 진공을 허락하지 않는 것처럼 사회는 권력의 공백을 허용하지 않는다.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없는’ 신천지 대한민국의 권력은 냉전시대가 올 것임을 일찌감치 예견한 ‘빈손의 망명객’ 이승만 박사가 차지했다.
친일반민족행위자를 처단함으로써 민족사의 정통성을 세우려 했던 국회 반민특위는 친일파의 역습을 받고 해산당했다. 헌법이 현실을 지배하지 못하는 가운데 민주주의와 법치주의가 있어야 할 자리를 독재와 반칙과 부정부패가 점령해버렸다. 대한민국의 첫걸음은 남루했다.
사고하는 역사가는 엄밀하게 말하면 과거의 문제를 풀고 있는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를 짓누르고 있는 문제와 씨름하고 있는것이다. 그리고 가장 긴급하게 해결을 요하는 문제들 가운데하나는 바로 우리의 역사성에 관한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는책임감 있게 행동할 수 있기 위해서 우리의 역사를 회피하지않으면서 동시에 그것으로부터 우리를 분리해야만 하는긴장관계를 견뎌내야만 한다. - 한스 위르겐 괴르츠, 『역사학이란 무엇인가』
나는 조선과 중국을 오가면서 무장투쟁을 벌였던 김구, 안중근, 이봉창 같은 분들을 숭앙하며 미국 망명객이었던 이승만 박사가 조국 광복에 기여한 바는 별로 없다고 생각한다.
한반도 분단의 책임은 북위 38선을 경계로 남북을 분할 점령한 미국과 소련에 있다. 국가주권을 지키지 못했고 제 힘으로 찾아오지도 못했다는 이유로 국토 분단의 책임을 우리 민족에게 묻는 것은 강도 피해자에게 범죄의 책임을 지우는 것과 마찬가지다.
제2차 세계대전의 열전(熱戰)에서 막 벗어난 지구촌은 이념적 상호비방과 경쟁적 군비확대를 핵심으로 하는 냉전(冷戰)시대에 진입했다. 그리고 한국전쟁이 터지자 국토와 국가의 분단에 이어 민족마저 둘로 갈라졌다.
2013년 6월 국가정보원이 공개한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보면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노무현 대통령에게 "남쪽이 자주성이 결여되어서" 남북관계가 풀리지 않는다고 거듭 비판하는 대목이 있다. ‘자주’ 이념이 지금까지도 북한의 마지막 자존심으로 남아 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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