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동
접동
아우래비 접동

진두강 가람가에 살던 누나는
진두강 앞마을에
와서 웁니다.

옛날 우리나라
먼 뒤쪽의
진두강 가람가에 살던 누나는
의붓어미 시샘에 죽었습니다.

누나라고 불러보랴
오오 불설워
시새움에 몸이 죽은 우리 누나는
죽어서 접동새가 되었습니다.

아홉이나 남아 되던 오랍동생을
죽어서도 못 잊어 차마 못 잊어
야삼경 남 다 자는 밤이 깊으면
이 산 저 산 옮아가며 슬피 웁니다.

김소월의 「접동새」

어느 산골 마을에 아홉 명의 아들과 한 명의 딸을 둔 사람이 있었다. 아들만 아홉 명 낳은 끝에 뒤늦게 고명딸을 본 부부는 물론 오빠들도 여동생을 끔찍이 귀여워했다. 산에 약초를 캐거나 나무를 하러 가면 막내 여동생을 생각하며 산딸기나 으름, 개암, 다래 따위 열매를 꼭 주머니에 넣어가지고 왔다.

예쁘기가 꼭 맑은 물에 똑 떨어진 새빨간 앵두 같아 어머니는 딸의 이름을 ‘앵두’라고 불렀다.

부엌에 들어가면 꼭 어머니가 있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마치 어머니와 대화를 나누듯 혼잣말을 했다.

그날도 그랬다. 밥을 지으러 부엌으로 나와 혼잣말을 했다.

"어머니, 오늘은 감자밥을 지을까요, 옥수수밥을 지을까요?"

그러자 부뚜막 뒤쪽에서 커다란 쥐가 한 마리 조르르 나와 딸을 빤히 바라보더니 감자가 든 이남박을 툭툭 건드리는 것이었다. 딸은 왠지 돌아가신 어머니가 쥐로 환생하여 자기 앞에 나타난 것만 같았다.

"죽으러 가는 년이 그건 먹어서 뭘 해."

아버지는 채찍으로 말 엉덩이를 내리치며 갈 길을 재촉했다.

"아버지, 돌아가시는 길에 배나무가 죽었으면, 앵두가 다 떨어졌으면, 으름덩굴이 시들었으면 내가 죄 없이 억울하게 죽은 것으로 아세요."

"접동 접동, 아홉 오라범 접동, 아홉 오라범 접동."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이상한 새의 울음소리였다. 그 새의 입안이 핏덩이라도 토해내듯 새빨갰다.

"아아, 내가 대체 무슨 짓을 했는가. 죄 없는 딸을 죽인 몹쓸 아비가 되었구나."

아버지는 산배나무 아래 떨어져 있는 딸의 고무신 한 짝을 주워들고는 가슴을 쥐어뜯으며 울음을 터뜨렸다.

억울하게 죽어 접동새가 된 여동생은 해질녘이면 아홉 명의 오빠들이 살고 있는 집의 울밖 나무에 날아와 앉아 ‘접동 접동, 아홉 오라범 접동, 아홉오라범 접동’ 하며 울었다. 밤새 피 토하듯 울고는 새벽닭이 울면 날아갔다.

강원도 화천군 상서면 마현리에 사는 한 젊은이가 과거를 보기 위해 괴나리 봇짐을 지고 집을 떠났다. 한양까지 가려면 화천읍 냉경지 나루를 건너 용암리와 삼화리 마을을 지나 용화산을 넘어야 했다. 용화산은 경치 좋기로 유명하였지만 그만큼 험하기도 한 곳이었다.

"이 시각에 산을 오르다니. 산에서는 날이 쉬이 저문다오. 곧 어두워질 텐데 도로 내려갔다가 내일 날 밝는 대로 산을 넘는 게 좋을 거요."
산에서 내려오던 나무꾼이 걱정스레 만류했으나 젊은이는 귀담아듣지 않고 부지런히 산을 올랐다.

젊은이와 무사는 마당바위로 내려갔다. 구렁이의 주검을 거두어 잘 묻어주고 두 번 절하는 예로써 장사지냈다. 하늘의 뜻이 어디에 있든, 인간 세상과는 다른 세상에 사는 그들의 질서나 계율이 어떠하든, 자신들의 손에 목숨을 잃게 된 것이 죄스럽고 가슴 아팠던 것이다. 또한 천년을 기다려 이무기가 되고 또 천년을 기다려 용이 되고자 했으나 끝내 하늘에 오르지 못한 구렁이의 원과 한이 가슴에 사무쳤던 것이다.

어느 마을에 일손 빠르기로 소문이 자자한 처녀가 있었다. 빠르기가 어느 정도인가 하면 누에씨를 받아 키워서 고치를 짓고, 그 고치를 삶아서 명주실을 잣고, 그 명주실로 옷감을 짜 물감 들이고 말려, 옷 한 벌 짓는 데 걸리는 시간이 고작 반나절이었다.

대체로 손이 빠르면 솜씨가 거칠게 마련인데 그야말로 천의무봉, 흠 하나 잡을 데 없이 훌륭했다.

손끝 하나 움직이지 않고도 공짜로 여덟 칸 번듯한 기와집이 생기고. 그 너른 삼천 평 논의 모내기를 반나절에 끝내고 온 집안의 벼룩들을 말끔히 소탕했으니 그야말로 일석이조! 꿩 먹고 알 먹고! 도랑 치고 가재 잡고! 배 먹고 이 닦기! 손 안 대고 코 푸는 땡 잡는 일! 내일은 또 어떤 재주를 가진 녀석이 내 집 문을 두드리려는고? 꿈속에서도 주인 영감은 흐뭇하고 흐뭇하여 빙긋빙긋 웃었다.

이렇게 하여 세상에서 가장 손이 빠른 처녀는 생명의 은인이자 세상에서 가장 발이 빠른 총각과 결혼하여 오래오래 잘살았다.

어려서 돌림병으로 부모를 잃고 친척집을 전전하던 어린 김응하는 임진왜란 중 여덟 살 난 동생을 등에 업고 피란길을 떠났다. 많은 사람들이 난리를 피해 고향을 떠나 유리걸식하던 시절이었다. 3년 동안이나 유랑하는 무리를 따라다니며 얻어먹고 지내던 소년 응하는 왜병이 물러가자 고향인 철원에 돌아와 사촌형의 집에 몸을 의탁했다.

‘잔치가 들었나? 제사가 들었나? 운 좋으면 오늘밤 음식을 걸판지게 얻어먹겠는걸.’

"오늘밤 우리집에 저 산속 보타사의 도적떼가 오기로 되어 있소. 그들 눈에 띄었다가는 그 자리에서 참화를 당하게 될 터이니 다른 집으로 가보시오."

7년 동안이나 계속된 임진왜란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온 나라가 전장터가 되었던지라 그 땅과 사람살이의 황폐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먹고살 길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굶어죽거나 거지가 되거나 무리지어 도둑이 되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도둑떼가 온다구요? 그것 참 잘되었습니다. 내가 다 막아드릴 테니 저녁밥이나 두둑이 먹여주시오."

"공연한 객기로 젊은 목숨을 잃지 말고 일찌감치 피할 도리나 하시오."

"주인장, 아무 걱정 마시오. 내가 오늘밤 그 못된 놈을 박살내겠소. 오늘 대접받은 밥값을 톡톡히 치러드리겠소. 아무 염려 마시고 술이나 한 동이 갖다주시오."

"천하절색이라더니 천하장사일세. 버들잎처럼 나긋나긋 야들야들하다더니 순 거짓뿌랭일세. 무겁기는 어찌 이리 무거운고. 아이구, 이년아, 좀 살살 때려라. 아무리 매 끝에 정든다 해도 다짜고짜 주먹질이라니, 너는 귀한 양반집 규수라면서 서방님 맞이하는 예법을 이렇게 배웠느냐. 이게 무슨 짓이냐. 아이구 나 죽네, 마달이 죽네."

"염려 마십시오. 도둑놈들의 소굴을 완전히 소탕하고 마달이 놈에게 잡혀간 조카따님의 몸종도 찾아오고 스님들에게 절도 찾아주겠소."

"제게는 분에 넘치는 규수입니다. 주인장 뜻이 그러하시다 해도 아가씨는 어찌 생각할는지요?"

"제 뜻이 바로 아가씨의 뜻입니다."

"아가씨는 서울 재상집에서 귀하게 자라난 몸이나 나는 시골의 미천하고 보잘것없는 사람인데 오늘 이와 같이 부부의 연분을 맺는다는 것이 아무리 생각해도 맞지 않는 일인 것 같소."

"이 모든 일이 다 하늘의 뜻이 아닙니까? 하물며 도적에게 죽게 된 이 몸을 구해주신 은혜는 일생을 두고도 다 갚지 못할까 하옵니다."

김응하 장군(1580~1619)은 조선조 14대 임금인 선조 시대에 태어나 15대 광해군 때 활약한 장군이다. 24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두루 중요한 직책을 거쳤다. 광해군 10년, 중국 명나라에서 만주 남쪽의 여진족을 정벌하기 위하여 조선에 원병을 청하자 도원수 강홍립을 따라 군대를 이끌고 좌영장으로 만주에 출정하였다. 부하 삼천 명을 거느리고 육만 명의 적과 맞서 싸우다가 40세의 아까운 나이에 전사하였다.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를 충무라 한다.

강원도 춘천에서 동북간 약 이십 킬로미터 지점, 지금은 소양댐 물속에 잠긴 북산면 내평리라는 곳에 눈이 화등잔같이 크고 키가 구척장신인 한 총각이 살았다. 일찍 어머니를 여읜 그는 이웃 동네에서 머슴살이를 하면서 홀로 된 아버지를 봉양하고 누이동생을 거두었다. 우직하고 부지런한 총각은 열심히 일했다. 초가삼간이나마 반듯하게 짓고 예쁘고 알뜰하고 마음 착한 색시를 얻어 아버지를 잘 모시고 싶었다.

끙끙 앓으면서도 끝내 산삼을 캐지 못한 아쉬움으로 한숨만 쉬던 아버지는 한겨울에 세상을 떠났다. 주먹으로 눈물을 씻으며 머리맡에서 임종을 지키는 아들에게 슬픈 유언을 남겼다.

"얘야, 착하고 부지런한 네가 부모를 잘못 만나 배우지 못하고 제대로 입고 먹지도 못하였구나. 이승에서의 지난날이야 돌이킬 수 없다만 내 죽어 혼이라도 네 앞길을 지켜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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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처럼 넓은 못에는 조각배 하나 보이지 않았다.
이 물을 어찌 건널꼬.
아내의 입속 탄식이 채 끝나기도 전
강아지가 물속으로 풍덩 뛰어들었다.
저 강아지만 따라가면 된다고 했거늘!
아내는 용기를 내어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옛사람들의 소박한 삶 속에 깃든 꿈과 소망, 슬픔과 그리움, 열망 들은 지금 이곳, 우리들의 삶에도 웅숭깊게 배어 있다. 그것이 생로병사로 조건 지어진 우리의 삶이 부박하기만 하거나 단색 판화일 수만은 없는 까닭이다. 그래서…… 그래서…… 그랬는데……. 그렇게 되었다지 뭐야……. 끝없는 이야기, 이야기들.

이야기들을 교훈이나 풍자, 해학, 한恨 등의 단어로 분석하고 풀이하는 것은 지난한 일이고 그다지 의미 있는 일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생명은 유한해도 이야기는 끝이 없다. 인생은 저마다 고유하게 빚어가는 자신만의 이야기라는 생각이 승해지는 이즈음 앞서 살아간 사람들, 그들의 시대와 세상이 한결 애틋하고 가깝게 다가온다. 삶을 찬가로 만드는 것은 이야기의 힘일 것이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단둘이 살아가는 남매가 있었다. 누나인 윤옥과 남동생 윤호는 이목구비가 뚜렷한 생김새며 나이에 비해 헌칠하고 늘씬한 체격이 마치 쌍둥이처럼 똑같았다.

윤호 역시 누나를 어머니처럼 믿고 의지했다. 불과 세 살 위였지만 윤옥은 생각이 깊고 행동거지가 어른스러웠다. 윤옥은 일하러 나가면서 가끔 윤호에게 ‘오늘은 강가에 나가 놀지 말라’거나 ‘산에 올라가지 말라’고 이르는 일이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런 날에는 동네 아이들 중 누군가 강물에 빠지거나 산에서 뱀에 물려 죽는 일이 일어났다.

"사람이 글을 배워 도리를 알지 못하면 짐승과 무엇이 다르겠느냐."

"사람이 글을 배워 도리를 알지 못하면 짐승과 무엇이 다르겠느냐."

"내가 너를 삼 년 동안 이대로 놓아두겠다. 삼 년 후 돌아와 다시 살려내겠다."

윤옥은 죽은 동생을 깨끗이 씻겨 잠재우듯 이불 속에 곱게 눕혔다. 그런 후 남자 옷으로 갈아입고 댕기머리를 올려 무명수건으로 질끈 동여매었다. 영락없이 총각의 모습이었다. 방문에 자물쇠를 채우고 간단한 봇짐을 꾸려 집을 떠났다.

"라오아돌고입몸고입혼라나아살여자은죽(죽은 자여 살아나라. 혼 입고 몸 입고 돌아오라.)"

그러자 궤가 스르르 열렸다. 궤 안에는 빨간꽃 하얀꽃 노란꽃 세 송이를 달고 있는 나뭇가지가 있었다.

"이것은 죽은 사람을 살리는 꽃이랍니다. 빨간꽃은 살살이꽃, 흰꽃은 뼈살이꽃, 노란꽃은 숨살이꽃입니다."

아내는 윤옥이 그것을 자세히 보기도 전에 재빨리 궤에 손을 얹고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궤는 언제 열렸었느냐는 듯 감쪽같이 닫혔다.

"누님, 제가 아주 오래 잠을 잤지요?"

"이제 내가 살던 대감 집으로 떠나거라. 너는 이제부터 그 집의 사위라는 것을 잊지 말아라. 우리는 이렇게 똑같이 닮았으니 그 집에서도 네가 나인 줄 알 것이다. 부디 잘살거라. 그러나 내외간의 정에만 매여 혼자 남은 이 누이를 잊으면 안 된다. 내년 이날, 복숭아꽃이 필 때 꼭 날 보러 오너라. 나는 널 보듯이 네 옷을 지으면서 기다리마."

때는 봄이었다. 마당 귀퉁이, 해묵은 복숭아나무 가지에는 분홍빛 복숭아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나고 있었다.

어느 봄날, 아내와 후원의 연못가를 거닐던 윤호는 연못물에 하르르하르르 떨어져내리는 복숭아 꽃잎을 보며 문득 까닭 모르게 찌르르 가슴이 저려왔다. 그 애달픈 연분홍빛이 그대로 마음에 물드는 것 같았다.

날이 밝을 무렵, 절에서 새벽 예불 종소리가 뎅뎅 울려오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이게 웬일인가. 윤옥이, 앉은 자리에서 구렁이가 되어 방고래 속으로 스르르 사라지는 게 아닌가.

강원도 시골 마을에 아들 삼형제를 둔 부부가 살았다. 비록 살림은 넉넉지 못했지만 건강하게 잘 자라는 아들이 셋이나 있으니 남부러울 것이 없었다. 다만 예쁜 딸이 하나쯤 있으면 더 좋을 것 같았다.

"딸이 하나 있으면 빨강치마 노랑저고리를 입혀 매일 데리고 다니며 자랑할 텐데……."

구렁아 구렁아 혓바닥을 내놓아라.
구렁아 구렁아 네 허물을 내놓아라.
내놓지 않으면 토막토막 잘라서 구워먹어버리겠다.

동네 아이들은 우르르 몰려와 집에 돌팔매질을 하고는 잽싸게 달아났다.
사람들의 왕래가 끊긴 집은 점점 외톨이로 적막해졌다.

"네가 이제 고기맛을 들였으니 목숨 가진 것들이 네 앞에서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사람과 뱀의 사는 길이 서로 다르니 이제 이 집을 떠나거라. 그것만이 너도 살고 우리도 사는 길이다. 언젠가는 허물을 벗고 사람이 되어 돌아오거라."

그런데 어쩐 일로 셋째딸이 구렁이에게 시집을 가겠노라고 하는 게 아닌가.

"네가 미쳤구나. 구렁이와 혼사를 맺은 집 딸을 누가 데려가겠니? 너 때문에 우린 시집도 못 가게 생겼다. 제발 마음을 돌려라."

"어떻게 시집을 가든 다 제 복대로 사는 법이다. 비록 구렁이 남편일지라도 네가 마음과 정성을 다하면 하늘이 좋은 날을 주실 것이다."

자신의 경솔한 언행 탓에 벌어진 일인지라 주인 영감은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만 제 발등을 찍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제 과거를 보러 떠나려 하오. 내가 돌아올 때까지 부디 뱀 허물을 잘 간직하고 있으시오. 딱히 언제 돌아온다는 기약을 할 수는 없지만 저기 서 있는 미루나무가 집 쪽으로 다가오는 듯이 보이면 내가 집으로 오고 있는 것이고 멀어지면 내가 오던 발길을 돌려 다시 떠나는 것으로 아시오."

"이젠 되었소. 내가 이제야 완전한 사람이 되었소. 뱀 허물을 태워버렸기에 사람 세상에 돌아가지 못하고 이곳 물속 세상에 있게 되었던 거요. 이렇게 당신이 찾아오기를 오랫동안 기다렸소. 이제 당신의 손을 잡고 사람 세상으로 갈 수 있게 되었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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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대륙에서 유태인들이 산 역사는 최소한 2천 년은 족히 된다. 유태인 파울로스(바울)가 1세기 중엽 기독교 복음을 전하러 그리스로 들어왔을 때(돌 1장 참조), 그를 환대하거나 박해한 주역들은 이미 로마 제국 도시들에 자리 잡고 살던 유태인들이었다.

이후 세월이 흘러가며 때로는 추방당하고 때로는 죽임도 당하며 늘 차별받으면서도 유태인들은 유럽 여기저기에서 자신들의 전통을 지키며 살았다. 제2차 세계대전 직전에 유럽 대륙에 살던 유태인은 9백만 명에 육박했다. 전쟁 기간에 나치스에 의해 6백만 명에 가까운 유태인이 학살당한 후 유럽의 유태인들은 미국이나 이스라엘로 대거 빠져 나갔다.

스페인 바야돌리드Valladolid를 구글에서 검색하면 축구 관련 기사들이 검색 페이지를 메운다. 축구 명가인가? 스페인 프로 축구 리그에서 바야돌리드가 차지하는 위상을 점검하기에 앞서 이 도시를 존중하고 기억해야 할 이유는 따로 있다. 이 도시는 우리 시대의 화두가 된 ‘인권’ 개념이 처음으로 학술적인 논쟁 주제로 다뤄진 곳이다. 죄 없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무참히 죽인 스페인 사람들의 행위를 비판하는 쪽과 옹호하는 측은 이 도시의 대학에서 1550년에서 1551년에 걸쳐 역사적인 논쟁을 벌였다.

바르톨로메 데 라스 카사스Bartolomé de las Casas(1484~1566). 그는 세비야Sevilla에서 태어나 일찍이 아메리카 식민지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살며 스페인 사람들이 원주민을 학살하고 학대하는 광경을 생생히 목도했다. 본인도 한때는 그 대열에 낀 적이 있다. 그는 가톨릭 사제의 신분이었음에도 노예 농장주를 겸했다. 그러나 라스 카사스는 본국에서 온 도미니코회 수사들이 스페인 사람들의 만행을 꾸짖는 설교를 듣고 양심의 가책이 날로 심해져 자기 소유 노예를 모두 총독에게 반납했다. 그 후 도미니코 수도회에 입문, 수사로 살며 원주민들의 인권을 보호하는 데 여생을 바쳤다.

라스 카사스는 스페인과 아메리카를 오고가며 본국 정부와 교황에게 아메리카의 현실을 알리기 위해 진력했다. 본국의 일반인들도 아메리카 식민지의 실상을 알 수 있도록 『인디오 땅 파괴에 관한 짧은 역사Brevísima relación de la destrucción de las Indias』를 써서 1552년에 출간했다. 그는 국왕을 움직여 원주민 보호법령을 제정하게 했고, 교황을 설득해 원주민의 인권을 존중하라는 칙령을 얻어냈다.

‘상그레 데 토로Sangre de Toro’(황소의 피)는 스페인 서민들이 부담 없이 마시는 대중적인 레드 와인이다. 음식의 동반자 레드 와인 브랜드가 ‘황소의 피’일 정도로, 스페인은 황소를 찔러 피 흘려 죽게 만드는 투우의 나라다. 오늘날 반대의 목소리도 없지 않다. 동물의 권리를 존중한다며 2013년 카탈루냐Cataluña주 의회가 투우 금지법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2016년 헌법 재판소가 그 결정을 뒤집었다. 정치인들이 스페인 문화에서 투우를 도려낼 권리를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유럽인은 여러 형태의 돼지고기를 즐긴다. 반면에 유럽 남쪽 이슬람권에서는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 유럽에 흩어져 살던 유태인들(발 7장 참조)도 마찬가지다. 이들의 경전에서는 돼지고기 먹는 것을 금한다. 그런데 오늘날 유럽에서는 종교적인 이유와 상관없이 육식을 거부하는 이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개중에는 조용히 자신의 식습관을 고수하는 데 그치지 않고 남들의 육식도 방해하려는 운동을 벌이는 이들도 있다.

그단스크Gdańsk 구도심 부두에서 가장 눈에 잘 띄는 것은 붉은색 원형 건물 두 개를 양쪽에 거느린 채 우뚝 솟아 있는 검은색 구조물이다. 폴란드 내륙에서 싣고 온 곡물들을 이곳에서 배에 싣던 15세기 크레인이다.

이 고색창연한 크레인이 분주히 돌아가던 시대에 도시 경제를 주도한 사람들은 독일인들이었다. 이 도시의 독일식 이름은 ‘단치히Danzig’. 단치히에서 곡물을 실은 배들은 뤼베크(돈 7장 참조) 등 한자 동맹 도시들로 출항했다.

독일군은 단치히에 진주하자마자 1천 500명의 ‘열등 인간’ 폴란드인을 색출해 총살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사망자들은 전혀 열등한 존재가 아니었다. 폴란드 혈통의 교사, 종교인, 언론인 등 폴란드인의 지도자들이었다. 먼저 지식인들을 제거한 후 나머지 폴란드인들은 그야말로 열등한 상태로 만들어 노예로 부려서 멸종시키는 것, 그것이 그들의 작전이었다.

와인 애호가들이 가장 선호하고, 따라서 가장 값이 비싼 포도주는 프랑스 부르고뉴Bourgogne 지방에서 나온다. 부르고뉴의 중심 도시 디종Dijon에서 코트 드 본Côte de Beaune까지 50킬로미터되는 거리 안에 최고급 부르고뉴 와인 ‘그랑 크뤼Grand Cru’ 원산지가 집중되어 있다. 디종에서 출발하는 ‘그랑 크뤼’ 와인 투어는 이 도시만이 제공할 수 있는 문화 체험 관광 상품이다.

제노바의 꿈은 당찼다. 지중해 동편은 베네치아가 장악했으나 서편은 자신들이 지배하길 원했다. 같은 꿈을 꾸던 이웃 공화국 피사를 제치고(돌 3장 참조) 제노바의 꿈은 실현되는 듯했다. 14세기에서 16세기까지 제노바 전성기의 별칭은 ‘바다의 지배자’. 근대가 열리며 원대한 꿈이 점차 왜소한 현실로 바뀔 무렵에도 제노바는 18세기 말까지 독립 공화국의 지위를 지켰다.

파리 관광 코스에 빠짐 없이 끼어 있기 마련인 베르사유의 넓고 긴 궁전을 둘러보려면 끝없이 몰려드는 단체 관광객의 물결에 시달릴 각오를 해야 한다. 이 도시와 궁전을 건축한 왕이 혹시 살아서 다시 돌아온다면 펄쩍 뛸 상황이다.

‘내가 전 세계에서 몰려온 별의별 얼굴색의 오합지졸에게 구경거리가 되라고 이 궁을 지었나?’

루이 14세Louis XIV(1638~1715)가 멀쩡한 루브르궁을 놔두고 이곳에 새로 궁을 지은 이유는 파리의 인파에 질렸기 때문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재미있는 일이 많은 그 도시를 왜 싫어했을까? 루이는 아직 어릴 때 파리의 시민과 법관들이 왕권에 도전하는 혁명 사태를 겪었다. 미성년자 왕은 루브르궁에 가택 연금 상태로 여러 달을 보내기도 했다.

"내가 성인이 되면 파리를 떠날 것이다. 그리고 말 많은 법관들과 파리 시민들 눈치 보지 않고 내 뜻대로 통치할 것이다."

러시아의 표트르Pyotr 대제(1672~1725)는 사냥터였던 시절의 베르사유보다 훨씬 더 열악한 땅에 새로 석조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Sankt Peterburg를 건설하고 1712년에 수도를 모스크바Moskva에서 그곳으로 옮겼다. 이곳에 거주할 궁전을 짓고 ‘몽플레지르Mon plaisir’(나의 기쁨)로 명명했다. 표트르는 이 궁을 유럽인들이 ‘러시아의 베르사유궁’으로 불러주기를 기대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건설은 베르사유궁 공사에서 죽은 인원보다 수십 배 더 많은 목숨을 앗아갔으나, 표트르 대제가 그런 사사로운 문제에 흔들릴 사람은 아니었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도 권세를 만천하에 과시하려는 야심에 있어서는 루이 14세든, 표트르 대제든, 그 누구에게도 밀릴 사람이 아니었다(피 6장 참조). 그는 베를린에서 약간 떨어진 포츠담Potsdam에 베르사유궁을 닮은 궁을 지어 ‘상수시Sanssoucci’(근심거리 없는)라고 이름 붙였다. 상수시궁을 지은 프리드리히 2세는 1747년에 궁을 완공한 후에도, 그 전이나 마찬가지로 주변 왕국들과 끝없이 전쟁을 벌였고 많은 이들에게 많은 근심거리를 듬뿍 선물했다.

1621년 6월 4일. 스웨덴 예테보리Göteborg는 생일이 분명한 도시다. 이 도시를 낳은 사람은 스웨덴 왕 구스타브 2세Gustav II(구스타브 아돌프Gustav Adolf, 1594~1632). 도시의 ‘아버지’는 스웨덴 예타Göta강이 북해로 빠지는 하구에 태어난 이 항구 도시가 스웨덴이 북해를 주름잡는 강국이 되기 위한 교두보가 되기를 기대했다.

예테보리는 스웨덴 도시이지만 네덜란드인이 건설했다. 독일인과 스코틀랜드인도 도시 개발에 적극 참여했다. 초기에는 도시 건설에 공로가 컸던 네덜란드인의 입김이 매우 강했다. 스웨덴인이 도시의 권력을 장악한 것은 1650년대 이후의 일이다.

마케도니아의 미친 자에서 그 스웨덴 사람까지,

이른바 영웅이라는 자들이 사는 목적은 괴상하게도

온 인류를 적으로 간주하거나 적으로 삼는 것.

― 『인간론Essay on Man』, 편지 4번

때는 19세기 초, 장소는 앙굴렘Angoulême 한구석에 있는 낡은 인쇄소 겸 주택. 인쇄된 종이가 널려 있고, 인쇄기가 돌아가기는 하나 일감은 많지 않고, 수입은 초라하다.

인쇄소 사장은 젊은 청년. 인쇄소는 부친의 소유였다. 부친은 지독한 구두쇠다. 읽지도 쓰지도 못하지만 사업 수완이 좋아 인쇄소를 운영하며 제법 돈을 모았다. 그러나 그 돈은 한 푼도 자식에게 줄 뜻이 없다. 외아들을 파리에 보내 최신 인쇄 기술을 배우게 한 것, 그것으로 자기 할 일은 다했다고 자부한다.

조르조 데 키리코Giorgio de Chirico(1888~1978)의 그림들에는 도시가 자주 등장한다. 그러나 도시의 정체를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제목을 안다고 해도 별 도움이 안 된다. 1914년 작품 〈몽파르나스 역(우울한 출발)Gare Montparnasse(The Melancholy of Departure)〉에서 당시 파리 몽파르나스 역의 우아한 원형 아치나 삼각형 지붕의 조화로운 자태, 바글거리는 이용객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대신 적막한 콘크리트 기둥들과 경사진 평면이 화폭을 지배한다.

"이 도시는 놀랄 거리가 많다. 근사한 유령들이 출몰하고 섬세한 아름다움 속에 중세가 아직 살아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페라라의 ‘형이상적’ 매력은 과거와 현재가 겹쳐 있는 역사성이다. 그가 근무했던 페라라의 ‘산탄나Sant’Anna’ 병원도 당시에는 아직 15세기에 건축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페라라는 자치 도시 자격을 13세기 후반에 상실하였으나, 도시를 다스린 에스테Este 가문은 자신들의 궁궐만 치장한 것이 아니라, 도시 전체를 아름답게 가꾸는 데도 열심이었다.

메스Metz(독일어로는 ‘메츠’)는 프랑스와 독일이 서로 만나고 충돌해온 로렌Lorraine의 중심 도시다. 메스가 도시로 변하는 시점에서 만남과 충돌의 주역은 로마 군대와 갈리아인들이었다. 기원전 1세기 중반,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의 갈리아 원정대는 오늘날 프랑스 땅을 두루두루 정복한 후 모젤Moselle강까지 진격해 이 지역을 평정한다.

전쟁과 전쟁 사이에서, 프랑스에서 독일로, 다시 독일에서 프랑스로, 또다시 프랑스에서 독일로 국적이 바뀌는 혼란을 겪던 메스. 이 도시는 독일과 프랑스를 화해시키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위대한 정치가 한 사람을 배출한다.

로베르 슈만Jean-Baptiste Nicolas Robert Schuman(1886~1963). 이름은 프랑스식, 성은 독일식으로 발음한다. 슈만은 룩셈부르크Luxemburg에서 태어났으나 메스에서 중등학교를 다녔고 독일에서 대학 교육을 받았다.

우리는 지금 위대한 실험을 하고 있습니다. 천 년 동안 유럽인들이 계속 꿈꿨던 바를 실현하려 합니다. 그 꿈은 전쟁을 종식하고 영원한 평화를 보장하는 기구를 만드는 것입니다.

모든 음악은 끝나기 위해 시작한다. 한 음악의 끝은 다른 음악의 시작. 음악은 순수한 과정 그 자체다. 끝을 향하는, 끝을 두려워하지 않는 아름다운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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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케임브리지 시 한가운데 시원하게 펼쳐진 파커스 피스 한쪽에는 이곳이 축구 규칙이 태어난 곳임을 알리는 기념비가 세워졌다.

기념비에는 케임브리지 대학생들이 만든 규칙이 새겨져 있다. 또한 ‘축구’를 뜻하는 세계 각 나라의 언어가 기념물을 장식한다. 케임브리지 대학교는 숱한 학자와 위인들을 배출했지만, 이 학교 학생들은 학문과 상관없는 스포츠 발전에도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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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작은 나라 포르투갈이 아프리카, 아메리카, 인도, 아시아의 해안을 지배하는 해상 제국으로 부상한 15세기 말. 수도 리스본Lisboa에서는 이제껏 유럽 어느 나라에서도 본 적 없던 신기한 장터가 열렸다.

부둣가에서 멀지 않은 도시 한복판, 펠로리뉴Pelourinho(형틀) 광장. 구매자들이 어슬렁거리며 살 ‘물건’을 살펴본다. ‘물건’들은 꿈틀거린다. 네 발 달린 짐승들? 아니다. 꼿꼿하게 두 발로 서서 앞을 응시하는 인간들이다. 벌거벗은 몸, 늠름한 몸매, 검은 피부. 이들의 손과 발에는 쇠사슬이 채워져 있다. 각 사람의 목에는 헝겊 조각 같은 것이 걸려 있다. 양피지에 적어 놓은 ‘가격표’이다.

크레모나Cremona는 이탈리아 롬바르디아Lombardia주의 도시 중에서도 결코 큰 편은 아니지만 바이올린의 세계에서만은 홀로 우뚝 솟아있는 거봉이다. 크레모나가 바이올린의 성지가 된 것은 과르네리Guareri와 스트라디바리Stradivari(라틴어로 스트라디바리우스Stradivarius)라는 두 현악기 명장의 가문이 크레모나 출신으로 이곳에서 활동했기 때문이다.

지중해 푸른 바다를 바라보는 모나코Monaco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작은 국가다. 면적이 2.1제곱킬로미터에 불과하다. 서울 여의도의 면적도 채 안 되는 크기인 데다 여의도처럼 고른 평지도 아니다.

이 좁은 나라는 모든 이에게 활짝 문이 열려 있다.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부동산을 취득할 수 있다. 집값이 좀 비싸긴 하다. 평균 1제곱킬로미터당 10만 유로로, 한국 돈으로는 1억 3~4천만 원이다. 그러나 부자들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나라가 없다. 소득세는 한 푼도 내지 않는다.

그러면 국가를 어떻게 운영할까? 이 나라 재정의 비밀은 이름 하나에 담겨 있다. 몬테카를로 카지노Casino de Monte Carlo.

몬테카를로 카지노. 세계 어디에서 어떻게 벌었는지 알 수 없는 거액을 물 쓰듯 하는 외국 손님들만을 위한 이 도박의 성전은 다른 이들에게는 몰라도 그리말디 가문에게는 무한한 축복이다. 카지노 덕에 소득세를 안 내는 모나코 시민들에게도 복덩어리임은 분명하다.

뤼베크에 남아 있는 것은 한 위대한 작가의 자취만은 아니다. 돈을 벌되 돈의 노예가 되지 않고, 인간에 대한 신용과 하느님에 대한 신앙이 상업을 지탱했던 자랑스러운 전통이 그 도시에 서려 있다.

짧게는 일주일에서 길게는 한 달 넘게 스페인 북쪽 도시 산티아고Santiago까지 매일 걷고 또 걷는 오늘날의 ‘순례자’ 대부분은 일반 관광객이다. ‘카미노 데 산티아고Camino de Santiago’, 산티아고로 가는 길이 관광 상품이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이다. 1985년만 해도 불과 690명만이 그 길을 완주했으나 2017년부터는 그 수가 30만 명을 넘었다. 천 년 넘는 세월 동안, ‘카미노 데 산티아고’는 관광객이 아니라 ‘순례자’의 발길을 안내했다.

‘산티아고’는 도시이자 한 사람의 이름이다. 인종은 유태인, 원래 이름은 ‘야고보Jakobus’. 2천 년 전에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활약한 예수의 제자로, 예수의 복음을 전하다 죽임을 당했다. 최초의 순교자 중 한 명인 그는 일찍이 성인으로 추앙되었다. 라틴어 ‘성 야고보’(스페인어로는 Sant Iago)가 스페인 토착어로 변하며 ‘산티아고’가 됐다.

주교가 왕에게 이 사실을 알리자 왕도 와서 직접 눈으로 확인했다. 그리고 즉각 거기에 교회를 지을 것을 명령했다. 교황도 이 소식을 듣고 지체 없이 기적임을 인정했다. 귀한 성인의 시신을 찾는 데 별빛이 결정적으로 기여했기에 산티아고의 지명에는 ‘별의 들판’이라는 뜻의 ‘데 콤포스텔라de Compostela’가 덧붙는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는 중세 유럽인 사이에서는 기독교 문명권의 3대 순례지 중 하나로 꼽혔다. 다른 두 성지는 예루살렘과 로마. 둘 다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대도시다. 반면에 산티아고는 오로지 성 야고보의 시신 덕분에 생겨난 소도시로, 엄청난 영예가 아닐 수 없었다.

‘비첸차Vicenza’라는 도시의 이름은 한 인물의 이름, 안드레아 팔라디오Andrea Palladio(1508~1580)와 떼어놓을 수 없다. 그가 남긴 건물들은 이 도시가 자랑하는 문화 자산이다.

비첸차 시내와 외곽에 흩어져 있는 23개의 팔라디오 건축물을 감상하려면 장시간의 산책을 각오해야 한다. 눈이 즐거우려면 발의 협조가 필수적이다. 건물과 건물 사이를 이동할 때뿐만 아니라 건물에 도착해서도 마찬가지다.

여럿이 모여 공 하나를 차는 놀이를 영국에서는 중세 시대부터 ‘축구football’라고 불렀다. 정확한 규칙은 알려진 바 없으나 이 ‘축구’는 일종의 민속놀이로, 마을과 마을이, 도시의 한 동네와 다른 동네 사람들이 집단으로 대결하는 경기였다. 공놀이는 쉽게 패싸움으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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