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다

박선호로부터 준비가 완료되었다는 보고를 받은 직후인 저녁 7시 40분께 김재규는 옆자리에 앉은 김계원을 톡 치면서 “각하 똑바로 모시시오” 하더니, 권총을 꺼내 차지철에게 “이 버러지 같은 새끼……” 하면서 한 발을 쏘았다. 차지철을 먼저 쏘았기 때문에 박정희의 추종자들은 김재규와 차지철의 갈등 때문에 김재규가 욱해서 우발적으로 차지철을 쏘고 흥분해서 박정희까지 쏘게 되었다고 믿고 싶어 한다. 김재규가 박정희에 앞서 차지철을 쏜 것은 그가 총을 갖고 있으리라 생각하여 먼저 제압한 것이었다.

차지철은 수도경비 사령부의 막강한 무력을 경호실의 통제 아래 돌렸지만 정작 결정적인 순간에 권총 한 자루 지니고 있지 않았다. 김재규가 총을 뽑고 조금 망설였던 탓인지 차지철은 팔로 방어 자세를 취했고 김재규가 쏜 총알은 차지철의 오른 팔목에 맞았다. 자신만이 박정희를 보호할 수 있는 것처럼 으스대던 차지철은 피를 흘리며 화장실로 도망갔다. 김재규는 차지철을 쫓아갈 듯 엉거주춤 일어서다가 앞에 앉은 박정희의 가슴을 향해 총을 발사했다. 자유민주주의의 회복이라는 대의를 위해 박정희와의 개인적인 의리라는 소의를 끊고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쏜 것이다. 김재규가 박정희를 향해 다시 방아쇠를 당겼으나 총알이 나가지 않았다. 김재규는 밖으로 나와 박선호의 총을 빼앗아 들고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그는 경호원을 부르며 화장실에서 나오는 차지철에게 한 발을 발사하고 식탁에 쓰러져 있는 박정희에게 다가갔다. 50센티미터 거리에서 김재규는 박정희의 뒷머리에 다시 한 발을 쏘았다.
실내에서 김재규가 첫 발을 쏘았을 때 경호처장 정인형과 부처장 안재송은 박선호와 대기실에서 TV를 보고 있었다. 해병대 동기인 정인형과 박선호는 휴가를 같이 가는 둘도 없는 친한 친구였다. 상황을 예측하고 있던 박선호는 총소리와 함께 먼저 총을 꺼내 들었다. 박선호는 “꼼짝 마!”라고 소리치며 정인형에게 “우리 같이 살자”고 애원조로 말했다. 국가대표 사격선수 출신으로 속사에 능한 안재송이 총을 뽑으려 하자 박선호의 총이 불을 뿜었고, 정인형도 총을 뽑으려 하자 박선호의 총이 다시 친구를 쓰러뜨렸다. 김재규는 그 직후 밖으로 나와 이 총을 가져가 박정희를 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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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여 년 전 마봉춘이 제정신이던 시절 〈이제는 말할 수 있다〉에서 ‘투기의 뿌리 강남공화국’ 편을 연출한 유현 피디는 어느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박정희, 전두환 정권 때 불법으로 사람 잡아다가 고문하고 때리고 한 거 용서할 수 없는 짓입니다. 그런데 이 프로를 만들고 보니까 그보다 더 나쁜 것은 모든 사람들이 투기를 꿈꾸게 만드는 사회구조, 도덕이나 근면 따위는 ‘웃기는 짜장’으로 만들어버리고 불로소득, 일확천금을 꿈꾸게 만드는 사회구조, 또 그 사람들이 더 높은 아파트를 쌓고, 타워팰리스를 쌓아 그들만의 세계를 만들고 호의호식하는 사회구조를 만들어버린 것이 오히려 박정희, 전두환에게 더 준엄하게 따져 물어야 할 죄악이 아닐까요?" 유신은 이렇게 오늘을 지배하고 있다.

문교부는 중학교의 일류병을 없애기 위해 서울의 경기중·서울중·경복중과 경기여중·이화여중 등 5개의 명문 중학교를 폐쇄하기로 했다. 국민 대다수는 이 조치를 "20년 동안 끌어온 입시지옥을 하루아침에 무너뜨린 학교군 추첨제의 혁명"이라고 환영했다.6 언론은 국민학교엔 환성이 터지고 어린이들의 얼굴엔 웃음꽃이 피었다고 보도했다.

중학교 입시 폐지를 발표한 권오병에 대해 당시 한 신문은 "폭탄적인 중학입시제 폐지를 발표, 600만 국민교생들로부터 존경을 받게 되었다"며 "이 정도라면 어린이 왕국에서 왕좌를 누릴 만하다"고까지 보도했다.

권오병은 "중학교 무시험 추첨제가 의무교육 9년 연장을 위한 첫 조치"라면서 "수익자에게 과중한 부담 없이 정부의 중등교육비로 3년 안에 중학교의 평준화를 기할 수 있다고 장담"했다.

박정희는 "공부는 고등학교에서 더 시키고 중학교의 어린 학생에게는 과도한 입시경쟁에서 벗어나 심신을 고루 발달시키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학벌과 일류 고등학교를 따지는 의식이 팽배해 있는 사회에서 중학과 고교의 평준화는 박정희가 늘 입에 달고 살았던 ‘가난한 농민의 아들’다운 정책이며 그가 행한 가장 급진적인 사회개혁이었다.

YH 사건으로 구속되었던 시인 고은은 1970년대의 시작과 끝을 이렇게 노래했다. "1970년 전태일이 죽었다/1979년 YH 김경숙이/마포 신민당사 4층 농성장에서 떨어져 죽었다/죽음으로 열고/죽음으로 닫혔다/김경숙의 무덤 뒤에 박정희의 무덤이 있다/가봐라"

사건이 터졌을 때, 나는 대학교 2학년이었다. 여기저기서 남민전이 얼마나 무모하고 분별없고 소영웅주의적이고 모험적이고 맹동적이고 운동에 해만 끼쳤는가를 성토해댔다. 그 와중에 누군가가 물었다. "가만, 그래도 연장이라도 한번 들어본 게 지리산에서 다 깨진 다음에 처음이잖아!" 반년쯤 지나 광주에서는 수천의 시민군이 총을 들었다.

사람이 한번 세상에 태어나서 불의 앞에 납작 엎드려 있어도 죽고, 마주 싸워도 죽어야 할 운명이라면 마주 싸우는 것이 도리가 아니겠는가. 김남주는 미지근한 싸움은 차라리 참는 게 낫다고 했다.(〈진혼가〉) ‘얼어붙은 강을 으깨어’놓기 위해 전사 김남주가 원했던 것은 ‘철의 규율’과 ‘불의 열정’과 ‘바위의 조직’이었다.(〈강〉)

경찰의 완강한 봉쇄에 막혀 주춤하던 학생들은 구 정문 옆의 담장을 힘껏 밀었다. 때로 부실공사도 민주화에 기여하는가, 힘없이 무너진 담장 밖으로 학생들은 몰려나가기 시작했다.

김재규는 "대장부로 이 세상에 나서 내가 할 수 있는, 내가 죽을 수 있는 명분을 발견"했다고 생각했기에 법정에서 자신의 목숨을 구걸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부하들만큼은 꼭 살리고 싶어 했다. "혁명 이념에 완전히 동조한 사람이면 저세상에 데리고 가도 좋지만 아무것도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죽는다는 것"에 대한 죄의식 때문이었다.

김재규는 최후진술에서 "국민 여러분, 자유민주주의를 만끽하십시오"라는 말로 국민들에 대한 작별인사를 대신했다.

김재규가 사형당한 것은 광주에서 민중항쟁이 한창이던 1980년 5월 24일이었다. 김재규를 죽인 전두환은 광주 시민들의 항쟁마저 짓밟고 생명이 다한 것 같았던 유신체제를 간판만 바꿔 달아 신장개업했다. 전두환의 내란은 그렇게 완성되었고, 그로부터 33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아직도 자유민주주의를 만끽해보지 못했다.

황제 나폴레옹의 동상이 거꾸러져 산산조각이 나기 위해 조카 루이 보나파르트의 어깨에 황제의 망토가 걸쳐져야 했던 것처럼,31 박정희의 향수도 또 어떻게든 한 번은 소비되어야 했다. 역사의 법정에서 박정희와 김재규가 제대로 마주 서게 되는 것은 그 후에야 가능할 것이다. 지금은 대중들에게 자신이 왜 박정희를 쏘았는지를 이야기할 기회조차 제대로 갖지 못한 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김재규의 재평가를 위한 준비를 시작할 때다.

모두 죽기를 각오하고 도청에 남았지만 워낙 화력 차이가 커 순식간에 제압당한 탓인지 꽤 많은 사람들이 살아남았다. 《오월의 사회과학》의 저자 최정운 교수는 "살고 싶었던 사람은 다 살았고, 죽기로 작정한 사람도 한 반은 살았다"고 썼다.

1983년 9월 김근태를 의장으로 하는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이 결성되었을 때 민청련의 상징은 두꺼비였다. 옴두꺼비는 뱀의 길을 가로막아 스스로 잡아먹히지만, 뱀의 몸 안에 독을 뿜어 죽게 하고 그 몸 안에 알을 낳아 수백 마리의 새끼 두꺼비들이 뱀의 몸을 파먹으며 자란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나 몇 년 전 방영된 드라마 〈여인천하〉의 중전마마 대사를 빌려 딱 한 말씀만 드리겠습니다.

"그 입 다물라!"

유신시대가 부활할지도 모르는 절박한 상황에 처한 2012년에 대학교수와 언론인을 비롯한 지식인의 수는 유신시대에 비해 수십배 늘어났다. 그러나 유신의 부활을 막기 위해 발 벗고 나선 지식인은 불행히도 그리 많지 않았다. 장준하, 리영희, 송건호 같은 거룩한 이름을 다시 떠올리게 되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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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은 모든 인민이 이밥에 고깃국 먹는 날을 고대하며 "쌀이 곧 공산주의"라고 주장했다. 비슷한 시기 남쪽의 박정희도 주곡인 쌀의 자급자족을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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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절대로 거저 좋아지지 않는다. 10월 2일의 시위 기사가 뒤늦게나마 나갈 수 있었던 것도 젊은 기자들의 몸부림이 있었기 때문이다.

화형식을 당하고 ‘개와 기자는 출입 금지’라는 야유의 대상이 되지 않더라도, 기자다운 기자이고 싶었던 한 인간의 부끄러움이 젊은 그들을 여기까지 밀고 왔다.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 부끄러워할 줄 아는 자와 모르는 자들…….

"아무리 철면피한 입장으로 타락한다 하더라도 500원, 1,000원 그 없는 주머니를 털어 동아를 지켜주려 몸부림치는 저 독자들의 눈을 어떻게 마주 보겠습니까?"

무등산은 넉넉한 산이지만 없는 게 많았다. 무등산 타잔에게도 없는 게 많았다. 그에게는 제인도 없었고, 치타도 없었고, ‘아~ 아아~ 아아아아~’ 하고 부르면 달려와 줄 사자도 고릴라도 없었다. 무등산에는 타잔만 있었고, 치 떨리는 가난이 있었다.

군대에서 살아 돌아와 군 복무했던 쪽을 보고는 오줌도 누지 않고 살아온 이 땅의 예비역들이여! 채 피지 못하고 쓰러져간 6만의 젊은이들에게 "받들어총!" 자식을 가슴에 묻은 12만의 아버지 어머니께 "받들어총!" 통곡을 하며 통곡을 하며 "받들어총!"

이런 안보궐기대회 열풍을 문제 삼은 것은 남장 여자로 유명했던 신민당의 김옥선 의원이었다. 김옥선은 10월 8일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전쟁심리 조성, 사이비민주주의 제도, 안정에 대한 약속 등이 강권통치의 특징이라는 독일의 정치학자 프란츠 노이만의 이론을 소개하면서 최근의 안보궐기대회를 관제 데모라고 주장했다. 그는 "전국을 뒤흔든 각종 안보궐기대회, 민방위대 편성, 학도호국단의 조직, 군가 보급, 부단한 전쟁 위협 경고 발언, ‘싸우면서 건설하자’는 구호 등은 국가안전보장을 빙자한 정권 연장의 수단"일 뿐이라며 박정희의 1인 통치를 정면 비판했다.

김옥선이 "전쟁도발 가능성의 판단은 오로지 독재자의 전유물이며 독재자는 자신의 실정을 국가안보라는 절대적 명제로 깔아뭉개고 국민을 사병화"한다고 발언하자 국회에서는 난리가 났다. 공화당과 유정회가 김옥선의 제명을 추진하자 김영삼은 김옥선을 보호하지 않고 사퇴를 종용했다.6 남장 여걸 김옥선이 눈물을 머금고 사퇴하자 신민당에는 예리한 면도날을 담은 항의 편지가 날아들었다고 한다.

김일성이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만들고 처음 다룬 안건은 연필 생산에 관한 정령이었다. 식민지에서 갓 해방된 백성들, 너나없이 못 배운 한에 사무친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법을 그는 알았던 것이다.

쿠바를 떠나기 전 체 게바라는 "둘, 셋보다 많은 베트남을 만들자"라는 유명한 연설을 했다. 체 게바라는 볼리비아를 베트남으로 만들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쳤고, 김일성은 베트남을 한국의 제2전선으로 보고 대규모 파병을 단행한 박정희에 맞서 한반도를 베트남의 제2전선으로 만들기 위해 이북 사회가 조금이나마 유연성을 견지할 수 있는 가능성을 포기했다.

"새벽종이 울렸네/새아침이 밝았네/너도나도 일어나/새마을을 가꾸세/살기 좋은 내 마을/우리 힘으로 만드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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