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계〉의 권두언은 대부분 장준하가 썼는데, 1961년 6월호의 무기명 권두언 "5·16 혁명과 민족의 진로"에서는 5·16을 4월혁명의 연장 선상에서 "부패와 무능과 무질서와 공산주의의 책동을 타파하고 국가의 진로를 바로잡으려는 민족주의적 군사혁명"으로 높이 평가했다. 장면 정권에 깊숙이 개입한 장준하였지만 극우반공주의자로서 학생과 혁신 세력의 통일 논의에 대해 가졌던 불안감이 이런 식으로 표출되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장준하의 뒤를 이어 문익환이, 문익환의 뒤를 이어 백낙청이 한국의 통일운동에서 상징적인 위치를 이어받았는데, 백낙청은 이때 미국에 유학 중인 홍안의 수재 청년이었다. 경기고등학교 재학 시절 유엔총회장에서 열린 세계고교생 토론대회에 한국 대표로 나가 이름을 떨친 백낙청은 명문 브라운 대학에서 졸업연설을 하여 〈동아일보〉 사회면 톱에 올랐다.
사상사의 첫 출판물은 장준하가 저자이자 발행자였던 《돌베개》였다. 함석헌이 ‘밤중에 우는 장사의 칼’이라 평한 이 책은 청년 장준하가 학병으로 끌려갔다가 탈출해 광복군이 되어 환국하기까지의 과정을 담았다. 그는 이 책의 발문 ‘돌베개에 붙이는 말’에서 "광복조국의 하늘 밑에는 적반하장의 세상이 왔다. 펼쳐진 현대사는 독립을 위해 이름 없이 피 뿜고 쓰러진 주검 위에서 칼을 든 자들을 군림시켰다. 내가 보고 들은 그 수없는 주검들이 서러워질 뿐, 여기 그 불쌍한 선열들 앞에 이 증언을 바람의 묘비로 띄우고자 한다"라고 썼다.
고은 시인의 〈그 꽃〉에서 "내려갈 때 보았네/올라갈 때 못 본/그 꽃"이 딱 들어맞는 순간이었다. 장준하가 만난 ‘그 꽃’은 채 피지도 못한 채 수유리에 잠들어 있었다.
암울한 식민지 시대, 장준하 같은 청년들에게는 대륙으로 가서 ‘탈출’할 길이라도 있었다. 일본군의 마수에서 벗어났지만 아직 안전지대에 도착하지 못했을 때 젊은 장준하는 ‘광막한 중원대륙 수수밭 속에 누워 침 없이 마른입으로’ ‘못난 조상이 또다시 되지 말아야 한다’고 수없이 되뇌었다고 한다. 분단된 조국에 돌아와 50대가 된 장준하에게는 이제 ‘탈출’할 곳도 없었다. 10여 년 전 학생들이 소박한 애국적 정열만 갖고 덮어놓고 통일하고 보자는 식의 환상적인 주장만 펴고 있다고 비판했던 장준하가 이제 모든 통일은 좋은 것이라고 장엄히 선언하게 되었다.
그런데 통일을 외치면 꼭 죽였다. 조봉암이 죽었고, 〈민족일보〉 조용수가 죽었고, 사회당의 최백근이 죽었고, 통혁당 사람들이 죽었고, 전략당 사람들이 죽었고, 뒤의 일이지만 인혁당과 남민전 사람들이 죽었다. 분단된 조국에서 참된 민족주의자의 길은 죽음으로 가는 길이었다.
장준하는 1967년도에 이미 ‘대통령의 자격’을 거론하며 대한민국 국민 29,999,999명이 대통령 될 자격이 있어도 일본군 장교 출신 다카키 마사오만큼은 대통령 될 자격이 없다고 갈파한 바 있다.
양심적인 것과 진보적인 것은 전혀 다른 기준을 갖지만, 박정희같이 기회주의적 변신을 일삼은 자가 권력을 잡은 사회에서는 양심을 지키는 것이 엄청나게 진보적인 역할을 하게 되기도 한다.
장준하는 보수와 진보의 이분법으로 재단할 수 없는 삶을 살았다. 그는 사상의 보수성을 삶의 진정성과 준엄함으로 극복한 분이다. 장준하의 사상이 진보적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와 동시대를 산 사람 중에 그보다 더 치열하게 진보적인 삶을 살아낸 분은 없다.
"죽음에서 본 4·19"라는 글에서 장준하는 "혁명은 하늘이 하는 것이며 백성을 시켜서 하는 일이다. 4·19 혁명은 백성이 한 혁명이 아니고 학생들이 한 혁명이었다. 그래서 그 혁명은 완전한 혁명이 되지를 못한 것이다"라고 4월혁명의 한계를 지적했다.
이제 장준하는 통일운동에 나서며 "통일은 감상적 갈망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하루하루 사는 생활과 직결되는 것"이기에 "통일은 처음부터 끝까지 민중의 일"이며 "통일 문제는 민중 스스로가 관여하고, 따지고, 밀고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대중 자서전》은 장준하의 죽음을 독재정권에 의한 살인으로 확신했던 함석헌이 이렇게 말했다고 전한다. "장준하는 김대중과 화해한 것이 죽음을 불러왔어. 저놈들이 둘이 합치면 어찌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지. 둘 중 하나는 죽어야만 했을 것이야."
장준하는 박정희에게 윤보선이나 김대중 같은 정적이나 정치적 위협은 아니었다. 그러나 일본군 장교와 얼치기 광복군 출신으로 두 차례나 국헌을 짓밟았던 박정희에게, 진짜 광복군 출신이자 진짜 민족주의자 장준하는 감히 어찌할 수 없는 존재론적 위협이었다.
가요 〈애모〉가 나오기 훨씬 전의 일이지만 "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가 딱 장준하 앞에 선 박정희의 처지였다.
1945년생으로 《별들의 고향》, 《바보들의 행진》 같은 소설을 써서 당시 청년문화의 기수로 꼽히던 최인호는 엘리트와 대중의 이분법에 격렬히 반발했다. 그는 "청년문화선언"이란 글에서 "오늘날의 청년문화는 소수의 엘리트에 의해서 대표되는 그런 문화가 아니"라며 "고전이 무너져가고 있다고 불평"하지 말고 "대중의 감각이 세련되어가고" 있는 것을 주목하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렇게 외쳤다. "그들을 욕하기 전에 한번 가서 밤을 새워보라. 음악에 몸을 맡기고 종전처럼 둘이 추는 춤이 아니라 혼자 떨어져 격식도 없이 몸을 흔들어대는 춤추는 젊은이들의 감은 눈을 보라. 노름판에 끼어들려면 최소한도 판돈을 대고 덤벼들어야지!"
청년문화 논쟁에 대해 당시 대표적인 통기타 가수였던 대학생 양희은은 "청바지 가수도 할 말 있다"란 글에서 "우리들은 모두 가난했다"며, 자신들을 "우울하고 가난하게 자란 미운 오리 새끼들"이라고 주장했다.5 그럼에도 그들은 적어도 교육과 문화적인 면에서는 선택받은 소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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