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 부분인 흑해와 몸통(위장) 부분인 지중해(에게 해)를 이 해협과 다르다넬스 해협이 목구멍처럼 가늘게 연결하고 있는 모양새다. 그래서 당시 튀르크족들은 루멜리 히사르를 술탄이 처음 명명한 ‘보아즈 케센(Boğaz-Kesen)’이란 별칭으로도 불렀다. ‘해협의 칼날(Strait-Blocker)’ 또는 ‘목구멍의 칼날(Throat-Cutter)’이란 살벌한 의미로 해석된다.

콘스탄티노플에서 가까운 국경 지대에 자리 잡은 오스만은 처음에는 비잔티움과 사이가 좋았다. 우리는 안정과 평화를 원하였다. 봄부터 가을까지는 야산과 벌판에서 유목 생활을 하다가 겨울이면 부락으로 내려와 비잔티움 백성들과 어울리고 상거래도 하였다. 외세의 공격으로부터 그들을 지켜준 것도 우리였다.

그러나 기독교도들은 비열하다. 믿을 수 없는 놈들이다. 자신들이 원하여 맺었던 휴전 협정을 스스로 파기한 적이 한두 번이던가. 9년 전 내가 첫 번째 술탄으로 취임하자마자 어리다(12세)는 이유로 나를 얕잡아본 너희는 아나톨리아의 카라만(Karaman: 터키 중남부와 타우루스 산맥 북쪽에 위치한 튀르크족 계열의 나라)을 사주하여 우리를 동쪽에서 치게 하였다.

그러고는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나의 아버지와 맺은 10년간의 휴전 협정을 폐기시키고 십자군을 결성, 다뉴브 강을 건너 침공해 왔다. 그것이 바르나 전투34다.QR코드 14 전쟁을 일으킨 쪽도, 패망한 쪽도 모두 너희 기독교도들이다. 내가 어릴 적 어머니에게 들은 기독교 신앙과는 너무나 다르게 행동하는 비열한 위선자들인 것이다. 그것이 약속을 지키는 우리와 그렇지 않은 너희가 명백하게 다른 점이다.

이 전쟁은 자위권의 정당한 발동이며, 너희의 기만정책에 대한 오스만의 반격인 것이다. 다시는 십자군이란 이름으로 우리를 괴롭히는 못된 짓을 용납하지 않으리라. 무엇보다 우리를 위협하는 자는 상대가 누구든 철저히 응징할 것이다. 너희가 존재함으로써 비열한 이간질이 조장되고 정의와 질서는 유린당하고 있다. 나는 이것을 종식시켜야 할 의무가 있다. 이제 우리는 너희의 악행(惡行)에 대한 응징으로 정당한 지하드(jihād: 성전)를 수행하려는 것이다.

우리가 아닌 다른 누군가에 의하여 무너진다면 이 도시는 완전히 파괴되어 영원히 역사에서 사라질 것이다. 너희나 그들이나 도시를 유지할 능력도 의사도 없을 뿐만 아니라 평화를 지켜낼 의지 또한 없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 일은 오직 신의 계시를 받은 나만이 할 수 있는 과업이다. 누가 나를 철부지라 하는가. 나는 세계 정복에 나섰던 알렉산더(Alexandros) 대왕보다 아침 해를 더 많이 보았고, 그보다 훨씬 많은 병사를 갖고 있다. 나는 준비된 술탄이다.

알라여, 선지자 무함마드의 과업을 실현하려는 이 젊은 술탄 메흐메드에게 힘과 용기를 주소서. 신께 영광 바치겠나이다.

나는 특히 공성용(攻城用) 무기 개발에 주력하였다. 선대 술탄들이 콘스탄티노플 정복에 실패한 가장 큰 요인은 바로 성벽을 무너뜨릴 무기가 취약했던 탓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기존의 투석기나 파성퇴(Battering Ram: 성문이나 성벽을 두들겨 부수는 데 쓰던 거대한 공성용 망치)로는 역부족이다. 그리하여 나는 난공불락이라 일컬어지는 테오도시우스의 성벽을 박살 낼 화력이 어마어마한 거포를 새로 개발, 완성하였다. 이름하여 ‘우르반(Urban)의 거포’이다.

신께 영광 바치겠나이다. 알라 이외에 신은 없도다.

라오니코스는 현대 고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치리아코(앙코나 출신 여행가)가 1446년 미스트라(Mistra)를 방문했을 때 고대 스파르타의 유적지 등으로 그를 안내했다. 치리아코는 미스트라에 2년 남짓 머물며 고대 그리스 문명에 대한 방대하면서도 세세한 자료를 남겼다. 『The Immortal Emperor』의 저자인 도날드 M. 니콜은 "우리는 모두 그에게 빚을 지고 있다"며 치리아코가 남긴 기록물을 높이 평가했다.

주님, 장자도 아닌 저를 제국의 황제로 삼으신 뜻을 알고 싶습니다. 선왕인 큰형에게 아들이 없는 것은 무슨 연유이며, 다른 형들이 저보다 먼저 죽은 것은 무엇을 의미하나이까. 오, 주여! 불쌍한 이 나라와 백성을 굽어살피소서. 주께서는 정녕 저에게서 대가 끊어지는 일을 바라시나이까.

일기가 변화무쌍한 콘스탄티노플에서는 특히 위생에 신경을 써야 한다. 내 머리와 군사들 머리를 삭발한 것도 그래서였다. 이교도들처럼 지저분한 머리는 청결은 물론 전투 수행과 정신 위생에 좋지 못하다. 적들이 장기전에 약한 이유는 그런 기본 상식조차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막사에 항상 온수를 비치하고, 담요 지급을 충분하게 할 것을 아울러 지시하였다. 병사들의 사기는 건강에서 나온다.

"튀르크군 1만 명의 행군보다 기독교 군대 100명이 움직이며 내는 소음이 더 요란하고 시끄럽다"(15세기 프랑스 여행가 베르트랑동 드 라 브로키에르의 1430년대 여행기에서 인용)고 하였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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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가 아닌 한 사람의 비잔티움 병사로서 장엄하게 최후를 맞겠다는 결의였을까? 황제는 자줏빛 망토를 벗어던졌다.
제위(帝位)를 상징하는 문장(紋章)도 버렸다. 왕권을 표상하는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내 심장에 창을 꽂아줄 기독교도가 단 한 사람도 없단 말인가."
탄식하듯 혼잣말을 내뱉고 난 황제는 검을 뽑아들고 눈사태처럼 밀려오는 오스만군의 무리 한가운데로 말에 박차를 가하며 달려나갔다.

249년 전 이미 제4차 십자군에 의해 처참하게 유린됐던 하기아 소피아는 그렇게 또 한 번의 수난을 맞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위엄을 잃지 않고 있는 이 대성당에 가장 관용을 보인 사람은 다름 아닌 술탄 메흐메드 2세였다.

"알라후 아크바르(알라는 위대하도다)!"
이때부터 메흐메드는 ‘파티(Fatih: 정복왕)’라는 경칭을 얻게 되었다. 오스만 623년(1299~1922년) 역사상 유일무이한 ‘정복자’ 칭호다.

"용을 죽이기 전까지 작은 뱀은 평화 속에 둔다"(두카스의 표현)는 것이 정복 전쟁 중 그의 일관된 생각이었다.

크리토불로스를 비롯해 이 분야에서 신뢰성을 확보한 역사학자들은 대체로 그 수를 4000명 안팎으로 보고 있다. 전체 주민 수의 10분의 1가량이므로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대량 학살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탈출에 성공한 사람들은 점령군의 무자비한 살육과 강간 등이 빈번했던 아비규환의 도시로 묘사하고 있으나 사선(死線)을 넘은 사람들의 격한 감정이 가시지 않은 표현으로 봐야 할 것이다.

피정복민들이 격렬하게 저항하지 않는 한, 칼에 피를 묻히지 않는 것이 이슬람과 유목민의 불문율일뿐더러 또 불필요한 살생보다는 포로로 잡거나 노예로 파는 편이 훨씬 더 이득이라는 생각을 대체로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라드 2세 시대의 대신 중 자아노스 파샤와 마흐무드 파샤, 이스하크 파샤 등 몇몇을 제외하고는 그 뒤 대다수가 몰락의 길을 걸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살아남거나 요직에 기용된 대신들은 대부분 비(非) 튀르크 출신 개종자(改宗者: Proselyte)들이었다. 이로써 술탄 메흐메드 2세는 유목 시대부터 이어진 부족주의적 전통과 지방 호족 및 문벌 세력을 누르고 강력한 중앙집권적 절대군주권을 확립하는 기틀을 닦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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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우스 1세와 헬레나 사이에서 태어난 고대 로마 황제. 정적 막센티우스와 리키니우스를 꺾고 제국을 재통일, 단독 황제가 되었다. 313년 밀라노(Milano) 칙령을 통해 기독교를 공인하고, 325년 니케아(Nicaea) 공의회에서 신성론자들의 손을 들어주었으며, 330년 수도를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플로 옮겼다.

독실한 크리스천 어머니를 존경했던 그는 자신의 끊임없는 행운을 신의 가호 때문이라고 믿었다.

하기아 소피아(Hagia Sophia: ‘거룩한 지혜’란 뜻을 지닌 교회. 1626년 로마에 성 베드로 대성당이 지어지기 전까지 세계 최대 최고의 교회 지위를 유지했다)

아르슬란: 만약 우리의 처지가 뒤바뀌어 내가 그대의 포로가 되었다면 그대는 나를 어찌하겠는가.
로마누스: 아마 죽이거나 아니면 콘스탄티노플 거리로 끌고 다녔을 거요.
아르슬란: 나의 처벌은 그보다 더 잔인하다오. 그대를 용서할 터이니 그대 나라로 돌아가시오.
황제는 대폭 할인된 배상금을 물고 콘스탄티노플로 귀환한다. 술탄은 2명의 장군과 100명의 호위대를 딸려 보내며 황제와 근위대에게 두둑한 선물까지 안겨준다. 평화 협정은 당초 아르슬란이 제안했던 대로 체결되었다.

그전까지 비잔티움의 지배 아래 있던 기독교인들이었지만 오스만은 이민족·타 종교에 대한 관용적 통치로 피정복민들의 반발과 저항을 최소화하며 영토를 확장해나갔다.

대세는 완연히 기울었다. 건국 이래 500번 넘게 전쟁을 치르고, 20여 차례의 도성 직접 공격에도 꿋꿋이 버텨냈던 삼중 성벽과 이 도시의 운명은······. 오스만은 건국 이래 모두 일곱 번 콘스탄티노플을 포위 공격했다. 바예지드가 네 번(1391, 1395, 1397, 1400년), 무사(1411년)와 무라드 2세(1422년)가 각각 한 번이었고, 이제 막 또 한 차례의 결정타가 임박해 있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로 시작한 이 제국은 개국시조와 이름이 똑같은 콘스탄티누스 11세에 이르러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그리스도가 재림할 때까지 영속하리라 믿었던 제국의 역사는 그렇게 마침표를 찍고 말았다. 동시에 그 자리엔 인종도, 언어도, 종교도, 문화도, 생활 방식도 전혀 다른 오스만 세력이 지배하는 새로운 제국이 등장했다.

자, 그렇다면 비잔티움 제국 최후의 날인 1453년 5월 29일, 그 도시에선 도대체 어떤 일들이 벌어졌던 걸까. 백마를 탄 청년 술탄은 수만 대군 앞에서 장엄한 연설을 마친 다음 지휘봉을 높이 들고 외친다.
"가자, 도시로!"(To the City!: 이스틴 폴린-이스탄불!, İstanbul!***)

비잔티움 또는 비잔틴은 독일 사학자 히에로니무스 볼프가 1557년 처음 쓴 이래 17세기 중반 프랑스에서 ‘비잔티움’이란 이름의 여러 역사서가 출판되고 몽테스키외를 비롯한 프랑스 작가들이 두루 사용했다. 19세기 이후 서방 세계에서는 일반 용어로 굳어져 보편화되기 시작했다.

어원은 기원전 660년 그리스 메가라의 비자스(βυζας, Byzas. 또는 비잔타스: Byzanthas)가 세운 나라라 하여 비잔티움(비잔티온: Byzantion)이라 불렀다. 터키에서는 ‘비잔스(Bizans, Bizantiniyye)’라 호칭된다.

"그대들 앞에는 현생의 전리품과 내세의 낙원이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만약 물러서거나 도망치려는 자가 있다면 비록 그가 새의 날개를 가졌다 할지라도 내 응징의 칼날보다는 빠르지 못할 것이다."(술탄의 연설문, 부록 Ⅰ-4, 386쪽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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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3년 5월 29일,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됨으로써
비잔티움 제국이 무너지고 그 자리에 오스만 제국이 세워졌다.
세계사의 한 장이 접히고 새로운 장이 펼쳐진다.

다시 쓰는 술탄과 황제 (개정판) : 1453년 콘스탄티노플 함락 전쟁 완결판, 1453년 콘스탄티노플 함락 전쟁 완결판 | 김형오

무엇보다 5월 29일 새벽부터 시작된 콘스탄티노플 함락 전쟁 묘사는 참으로 압권이다. 눈앞에서 전쟁이 막 펼쳐지고 있는 듯한 박진감 넘치고 절절한 장면들은 영화보다도 더욱 실감나고 역사보다도 더욱 생생하게 다가온다. 이 역작이 국내 독자는 물론 번역되어 동서양 독자들에게 널리 읽힐 수 있기를 바란다.

이희수_한양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AD 330년부터 1453년까지,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한 비잔티움* 제국의 역사는 길고 또 파란만장했다. 무려 1123년. 단일 제국으로서는 지구상 가장 오래 존재했던 나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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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도 같은 밥 같은 찬을 먹는 따뜻한 봄날


"정말 멋진 곳이네요. 역시 현지 주민이 알려주는 정보는 달라."

"길을 잃고 헤맨 덕분이지."

"그렇다면 나의 길치 기질 덕분이겠네요."

"당신, 지도에 까막눈인 건 학창시절부터 변함이 없군."

"장례 끝나고 형님이 단단히 잡도리해주신 것 같아. 어머니와 형과 내가 있는 이상 삼촌 내외한테는 아버지 유산이 한 푼도 넘어가지 않을 테니까."

"주인이 바뀐 걸까요? 주차장도 지저분했잖아요."

"거기는 그냥 주차용 공터더군. 기계도 전부 철거되고."

"이런 곳에서도 시간은 흐르는군요."

"하지만 풍경은 변하지 않았어. 역시 멋지군."

"그건 중2병이 아니라 고2병이군. 엄마 마음 다치게 하는 말을 툭툭 던지고 싶은 나이지."

산을 내려가는 여행 역마다 꽃이 피어나네

근무하는 병원 중정에 매화가 터지기 시작할 즈음, 스다 하루에春恵는 어머니 가즈코의 편지를 받았다. 어머니는 수신인 이름을 ‘하루에春江’라고 잘못 적었다.

"인생의 힘겨운 오르막길을 다 올라왔으니 이제는 느긋하게 내려가는 거야. 내려가는 여행길에는 꽃이 가득 피어 있지―라고 하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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