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가운데 1907년에는 자연환경이 또다시 큰 선물을 안겨주었다. 바닷물이 이 도시와 북해를 다시 하나로 연결하였다. 브뤼헤는 문자 그대로 물 만난 고기가 되었다. 도시 경제가 힘차게 회생하기 시작하였다. 중세 이래 그 물길이 막히고 트이고를 반복할 때마다 행운과 불행이 교차하였다. 역사에 보기 드문 사례였다.

프라하는 날씨가 비교적 따뜻한 편이다. 습도도 낮아서 살기 편하다고 생각한다. 연간 강수량은 한국의 절반 이하인데 7월의 프라하는 기온이 지나치게 높지 않고 공기도 쾌적하다. 사철 다 좋지만, 여름의 프라하는 최상의 여행지가 아닐까 한다.

19세기의 프라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에서 굴지의 공업 도시로 인정받게 되었다. 특산품 중에는 정교한 무기도 포함되었다. 일제강점기 한국의 독립군도 체코제 기관총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1968년 1월, 프라하에서 일어난 자유화 운동은 소련에 대한 반발심에서 비롯되었다. 온 세계인의 주목을 받은 사건이었다. 그보다 10여 년 앞서 역시 동구권의 일부였던 헝가리에서도 자유화 운동이 일어났다(1956년 10월). 김춘수 시인은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이란 시를 지어 소련의 군홧발에 짓이겨진 헝가리 자유화 운동의 비극을 노래했다.

프라하에서 벌어진 이 사건을 분수령으로, 소련 다음으로 강성했던 현실 사회주의 국가 동독이 붕괴했다.

이어서 체코와 헝가리 및 폴란드 등 동구권 전체가 흔들렸고 곧 해체되기에 이르렀다. 프라하는 소련의 지배체제에 대한 본격적인 저항의 출발점이자 동구의 몰락에 결정타를 날린 종착지였다고 말해도 좋겠다.

얀 후스의 저항 정신이 살아 있는 곳

서로 사랑하라. 사람들 앞에서 진실 즉, 정의를 결코 부정하지 말라!

후스의 옥중서신에 나오는 문장이다. 그에게 사랑이란 정의를 실천하는 것과 같은 말이었다. 불의한 지배체제에 대한 저항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이었다.

종교개혁가 얀 후스(Jan Hus, 1372~1415)는 복음주의자였다. 그는 성서야말로 신앙의 유일한 근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로마가톨릭교회의 부패를 강도 높게 비판했다. 그러나 그 점이 문제가 되어 결국 콘스탄츠공의회에 불려갔고, 화형에 처해지고 말았다(1415년).

그런데 그에게는 특별한 점이 있었다. 후스는 시대의 한계를 넘어서 개인의 신앙적 자유를 추구했다. 『교회론(Deecclesia)』과 『강론집』 등의 저술에서,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영혼의 구원은 신이 예정한 대로 이뤄진다. 따라서 돈을 주고 구매한 <면벌부>(면죄부) 따위로는 죄의 문제를 결코 해결할 수 없다.’ 우리가 보기에는 당연한 말이었으나, 당시에는 위험천만한 주장이었다. 후스는 <면벌부> 판매에 골몰하던 가톨릭교회와 정면충돌하였다.

루터와 후스의 차이는 과연 무엇일까? 다행스럽게도 루터 곁에는 구텐베르크가 만든 금속활자가 있었다. 루터는 활자라는 새로운 매체의 가능성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는 금속활자로 인쇄된 글을 통해 자신의 견해를 온 세상에 널리 알렸다. 곧 그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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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유네스코는 브뤼헤를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구시가지 전부, 곧 430헥타르(약 130만 평)가 그 영예를 누린다. 이 도시를 찾은 방문객으로서 내 눈에 가장 먼저 띈 것은 성모교회였다. 이 교회의 첨탑 높이는 무려 115미터이다. 혹자는 이 첨탑이야말로 브뤼헤 상인의 자존심을 상징했다고 말한다. 그럴 법한 주장이다. 사이먼이 전하는 말에 따르면, 그것은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벽돌 건물이다.

한 마디로, 브뤼헤는 동서남북을 연결하는 유럽의 교차로였다. 그렇게 된 데는 무엇보다도 브뤼헤의 훌륭한 입지 조건이 한몫했다.

1400년경 브뤼헤 인구는 최대 20만 명을 헤아렸다. 현재 인구가 12만 명 수준임을 고려할 때 실로 꿈같은 일이었다. 당시 유럽에서는 가장 번화한 도시라도 5~6만 명을 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브뤼헤는 단연코 중세 최고의 도시라 해도 손색이 전혀 없었다.

인구로만 단순 비교를 하자면 그때 우리나라의 한양(서울)과 유사한 수준이었다. 다만 질적인 차이가 컸다. 한양은 통치기구에 종사하는 사람이 많았던 데 비해 브뤼헤는 상업과 수공업에 종사하는 인구가 대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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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인들 수중에 있었던 베니스공화국, 그 정식 명칭은 좀 길다. ‘가장 고귀한 공화국 베니스(원어 Serenìsima Repùblica de Vèneta)’이다. 그들의 자존심이 그대로 반영된 국호였다. 8세기부터 1797년까지 베니스는 무려 1천 년 동안 독립성을 유지했다. 실로 유서 깊은 도시국가였다.

물의 도시 베니스의 역사는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흥미롭게도 그것은 비극에서 출발했다. 5세기의 일이었다. 게르만족이 북이탈리아로 침입해오자, 사람들은 배를 타고 석호로 도망쳤다. 베니스는 일종의 피난처였다(452년). 피난지에 불과했던 볼품없는 마을들이 차츰 부유한 상업 도시로 발전했다. 막히면 통한다(窮則通)는 옛말이 생각난다.

찬란한 영광
그들은 갈수록 다양한 물품을 거래했다. 처음에는 목재와 노예가 주요 상품이었다. 그런데 교역망이 점점 확대되자 상품의 종류와 물량도 꾸준히 증가했다. 1000년경, 베니스는 동지중해의 명실상부한 강자로 부상했다. 그들은 헝가리,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달마티아 등 교역하던 여러 나라를 차례로 제압했다.

1204년, 베니스 공화국은 위험한 선택을 하고야 말았다. 그들은 제4차 십자군 원정을 후원하는 실력자로 등장하였다. 문제는 그들이 교황의 의지를 무시하면서까지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침공했다는 점이다. 신앙상의 목적으로 파견된 십자군이 동방의 기독교 국가를 약탈한 끔찍한 사건이었다.

120여 년 동안 두 나라는 네 차례 전쟁을 치를 정도였다. 전쟁의 마지막 승자는 베니스였다. 이후 세상에서는 베니스를 ‘레반트의 여왕’이라고 불렀다. 레반트는 ‘태양이 떠오르는 땅’이라는 뜻이므로, 베니스가 이제 동방의 지배자로 등극했다는 미칭(美稱)이었다.

역사를 바꾼 모험가, 마르코 폴로
역사란 아이러니로 가득하다. 베니스의 운명을 기울게 만든 사건이 대항해시대의 개막이라는 점은 누구나 안다. 그런데 그 시발점에는 한 사람의 베니스 상인이 있었다. 호기심 때문에 어떠한 모험도 마다하지 않은 불굴의 인물, 마르코 폴로(Marco Polo)였다. 『동방견문록』의 주인공 말이다. 그는 아버지와 숙부를 따라서 당시 서구 사람들이 세상의 끝이라 여기던 중국까지 여행했다. 길을 떠날 당시 마르코는 17살이었다.

우리는 카사노바를 제대로 모른다
이 도시의 역사를 음미해보면 모든 시대를 관통하는 한 가지 뚜렷한 특징이 있다. 억누를 수 없는 호기심과 모험심이 그것이다. 마르코 폴로의 경우가 대표적이었다. 그에 버금가는 또 한 명의 인물이 있었으니, 지아코모 카사노바(1725~1798)다.

카사노바는 단순한 난봉꾼이 아니었다. 그는 미지의 세계를 적극적으로 탐험한 대단한 모험가였다. 그는 저술을 통해 귀족 사회의 위선을 여지없이 폭로하기도 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의 욕망과 쾌락을 긍정하는 새로운 관점을 온 세상에 공표하였다. 그의 저서 『카사노바, 나의 편력』은 그런 점에서 인간성의 보편적인 측면을 세상에 알린 계몽주의의 연장선 위에 있었다.

카사노바는 법학박사로서 한때 가톨릭교회의 성직자로 일했다. 나중에는 음악가이자 외교관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는 유럽 여러 나라를 종횡으로 주유했다. 베를린, 마드리드, 프라하, 런던과 파리에 이르기까지 그의 활동 공간은 가히 국제적이었다. 게다가 그는 풍부한 인간성의 소유자였다. 왕후장상부터 거리의 부랑아에 이르기까지 기꺼이 다양한 사람들과 친교를 맺었다. 그의 친구 중에는 볼테르와 루소 등 당대의 이름난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여러 명이었다.

그는 뛰어난 상상력의 소유자로서 공상 소설 『20일 이야기』(1888)를 집필하기도 했다. 이 작품은 쥘 베른의 『지저(地底) 여행』의 예고편이라 해도 좋을 것이었다. 프란츠 카프카 역시 카사노바에게 영감을 받아, 『소송』을 창작했다고 고백하였다. 카사노바의 진정한 모습을 우리는 여태 잘 모르고 있었다.

1천 년가량 지중해 무역의 중요한 축이었던 베니스공화국이다. 매력적인 그 장소에서 나는 시대를 앞서 살았던 카사노바와 폴로를 떠올렸다. 역사를 비춘 찬란한 과거의 빛이 아직 남아 있는 공간에서, 선구자들의 불꽃 같은 생을 조용히 음미하는 것은 꽤 운치 있는 일이다.

브뤼헤(Brügge, 브뤼게라고도 부름)라는 도시를 아는 사람은 우리 가운데 별로 많지 않다. 인구 11만의 중소도시라서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역사 속 브뤼헤는 간단히 지나쳐도 좋을 정도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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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킹에게는 농토가 부족했다. 그래서 그들은 새로운 농경지를 확보하기 위해서 끝없이 노력하였다. 차마 웃지 못할 것이 그린란드라는 이름의 유래였다. 사실 그 섬에는 녹색의 초지가 전혀 없었다. 그러나 농경에 대한 꿈을 지닌 이주민을 많이 모으려고, ‘녹색의 땅’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비겁한 속임수라고 비웃기에는 바이킹의 소망이 너무도 절실했다.

뿔 달린 투구 쓴 바이킹은 없었다

바이킹의 가장 인상적인 활동은 동서남북으로 전개된 침략 활동이었다. 그들은 영국, 독일,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 스페인 해안을 습격하여 값진 보물을 약탈했다. 나중에는 이탈리아까지 쳐들어갔다. 수많은 인명을 살상했고,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납치해 거액의 몸값을 요구했다. 상당수의 포로를 노예시장에 내다팔았다.

잔인한 약탈자로만 알려진 바이킹이었다. 하지만 그들도 진정한 평화를 추구했다. 또, 바이킹의 대부분은 전사가 아니라 어부와 농부였다. 바이킹 사회에는 본래 솜씨가 탁월한 금은세공업자도 많았다. 해적질에 종사한 바이킹은 부족장 휘하의 몇몇 용사들뿐이었다. 우리가 잘 몰랐던 사실이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추리소설 『오리엔트 특급 살인』이 생각난다. 유럽의 주요 도시를 하나로 이어주는 호화로운 철도여행 중에 일어난 살인 사건을 다룬 명탐정 이야기다. 소설의 무대인 오리엔트 특급은 실제로 존재했다. 1889년 6월 1일, 첫 번째 특급열차가 파리를 떠나 이스탄불로 향했다. 1977년 5월 19일까지 이스탄불은 이 노선의 동쪽 종착점이었다. 이후 비행기가 여행 산업의 주류로 떠올랐고, 오리엔트 특급은 사양길에 접어들었다. 승객이 계속해서 줄어든 결과, 2009년 12월에 결국 노선 자체가 폐지되었다.

실크로드가 있었기에

콘스탄티노플의 융성은 실크로드(비단길)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동아시아에서 시작된 이 무역로의 서쪽에는 여러 도시가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콘스탄티노플은 로마로 들어가는 관문이자 실크로드의 가장 서쪽에 버티고 있었다. 거기서 동쪽으로 가면 알렉산드리아를 거쳐, 바스라와 바그다드 등이 차례로 나타났다.

‘실크로드’라는 용어는 비교적 새로운 것이다. 19세기 독일 지리학자 페르디난트 폰 리히트호펜이 처음 사용했다고 한다. 그는 중국에서 중앙아시아와 인도를 거쳐 유럽으로 이어진 고대의 교역로를 연구하다가 주된 교역상품이 중국산 비단이었다는 사실에 착안했다. 그래서 독일어로 ‘자이덴 슈트라쎄(Seiden Straße)’, 곧 ‘비단길’이라 이름 지었다.

비단길은 한국과 일본은 물론 베트남이나 타이 등 유럽과 중동 및 아시아의 많은 나라를 직접 간접으로 이어주었다.

다시 400년이 흐른 15세기 중반 동로마제국이 명을 다했다. 콘스탄티노플이 이슬람의 지배 아래 들어가자 소피아 대성당도 모스크로 변신하였다. 본래 기독교 신앙을 묘사한 모자이크는 회칠해서 감춰졌다. 대성당에는 새로 미흐랍(mihrab)과 미나레(minare)가 설치되었다. 전자는 메카를 향해 만든 우묵하고 둥근 모양의 예배실이요, 후자는 이슬람 사원 특유의 첨탑이다.

십자군, 콘스탄티노플의 보배를 약탈하다

3일간 원정대는 무려 은화 90만 마르크 상당의 전리품을 얻었다. 그로 인해 세상에서 가장 풍요로웠던, 동방의 찬란한 기독교 도시가 이른바 십자군원정대의 말발굽 아래 처참하게 짓밟혔다. 기독교 국가가 십자군원정대의 침략으로 초토화되고 말았다!

콘스탄티노플 최후의 날

재앙은 쉬 끝나지 않았다. 이 사건이 일어난 뒤에도 주변 여러 민족이 잇따라 침략을 감행했다. 가진 것이 많아도 지킬 힘이 부족하면 도리어 재앙만 거듭될 뿐이다.

1453년, 드디어 운명의 날이 오고야 말았다. 나는 풍상을 이기고 아직 남아 있는 이 도시의 성벽 밑을 거닐었다. 산책 중에 콘스탄티노플 최후의 날을 추억했다. 군사전략에 빼어난 오스만튀르크의 술탄 메흐메트 2세가 문제의 핵심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콘스탄티노플을 빼앗아 이슬람제국의 새로운 중심지로 삼고 싶어 했다.

메흐메트 2세가 거느린 7만 대군이 물밀 듯 밀려왔다. 헝가리 출신의 기술자 우르반은 원정대를 위해 초대형 청동 대포를 만들었다. 53일 동안 69문의 대포가 불을 뿜었다. 5만 발의 무거운 돌덩어리가 성벽을 연속해서 때렸다. 날마다 1천 발의 포탄이 쏟아지자 드디어 철옹성이 무너졌다. 성벽의 길이는 6킬로미터, 높이는 30미터였는데, 포탄의 힘을 이기지 못했다.

이스탄불은 여전히 대륙 간의 중요한 교차로이다. 지금도 러시아와 미국의 이익이 여기서 굉음을 내며 서로 충돌한다. 기독교와 이슬람이라는 양대 문화가 갈등을 벌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양자는 꾸준히 교섭하며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스탄불의 어제와 오늘이 뚜렷이 증명하는 바이다.

산마르코 대성당에 가본 적이 있는 이라면 알 것이다. 나는 대성당의 장엄함에 감탄했다. 성당 내부를 둘러보고 광장 앞에 나섰을 때, 5월 한낮의 햇살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마치 샤워라도 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 나폴레옹이 했다는 그 말을 떠올렸다.

"산마르코 대성당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응접실이다!"

셰익스피어의 4대 희곡 가운데 하나가 『베니스의 상인』이다. 작중 인물 샤일록은 소문난 구두쇠였다. 냉혈한인 그는 부채를 제때 청산하지 못한 채무자 밧사니오의 심장을 꺼내 달라고 요구할 정도였다. 베니스의 상인들 가운데는 샤일록과 같은 수전노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베니스 상업계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는 증거는 없다.

이곳 상인들은 아프리카 황금을 두카트라는 금화로 만들어 유럽 금융시장을 거머쥐었다. 베니스 상인들은 무에서 유를 창출한 사람들이었다. 비엔날레를 기획한 상인들은 다름 아닌 그 후예였다.

피난처에서 부유한 상업 도시로

상인들의 용기와 모험정신이 이 도시를 키웠다. 그들은 자유로운 활동을 위해 왕정(王政)을 거부했다. 경제가 정치 권력에 종속되는 일을 막기 위해서였다. 베니스 상인들은 공화국을 선택했고, 부유한 상인들이 집권해 과두정치로 도시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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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누구라도 세계 곳곳에 있는 역사의 현장을 직접 방문할 수 있다. 참 좋은 일이다. 그러나 한 세대만 거슬러 올라가도 사정이 달랐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1980년대만 해도 해외여행은 거의 모든 시민에게 그림의 떡이었다.

우선 가고 싶은 도시를 선택하고, 여러 달 동안 그 도시와 나라의 역사를 자세히 공부한다. 마침내 목적하는 도시에 도착하면 열흘 이상 그곳에 한가로이 머문다.

여행자들은 대개 짧은 시간에 되도록 많은 명소를 둘러보려고 애쓴다. 다시 오기 어렵기 때문이다.

나는 구태여 많이 보려고 하지 않는다. 하루에 한두 곳만 자세히 살피고, 그 향기를 깊이 느끼는 것으로 족하다.

새것을 구경하기보다는 지나간 역사를 반추하는 데 여행의 목적을 두기 때문이다.

내가 찾아가는 도시의 정치적 변천을 포함해 그곳의 사회경제적 변천을 미시적 또는 거시적 관점에서 들여다보는 작업이 내게는 여간 흥미로운 일이 아니다.

이 책은 한 역사가의 수학 여행기와도 같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여행 정보를 담은 책은 아니다. 내가 둘러본 모든 유물 유적을 빠짐없이 기록한 여행안내 책자도 아니다. 이 책은 내가 가장 애호하는 유럽 도시들에 관한 일종의 문화적 체험담이다.

역사상 최초로 등장한 국가들은 모두 도시였다고 볼 수 있으니, 도시는 어디서나 역사의 중심 무대였던 셈이다.

조용히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한편으로 나는 이런 도시를 어떻게든지 떠나고 싶어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 매력에 빠져 깊은 애착을 느끼고 있음을 발견한다.

유럽의 종교인 기독교도 근본적으로는 동아시아의 유교, 불교에 못지않게 금욕적이었다. 하지만 유럽 사람들은 교회의 가르침에 별로 구애되지 않았다. 그들은 우리 조상과는 달리 물질적 욕망을 추구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멀리 떠남으로써 도리어 가까워진다. 산속에서 길을 잃은 사람은 우선 꼭대기에 올라갈 일이다. 그래야 언덕과 수풀에 가려 보이지 않던 길이 손금처럼 환히 드러난다.

그리스의 관문은 예상 밖이었다. 깐깐한 입국 절차는 없었다. 허술하다 못해 허망할 정도였다.

전국 어디든 영어, 중국어, 일본어를 총동원해 사소한 지명까지도 일일이 표기한 우리나라의 과잉 친절과는 너무도 다른 풍경이었다.

지금 나는 아테네 사람들의 무신경을 은근히 비꼬는 것이 아니다. 외부인에 대한 그들의 무관심 또는 약간의 불친절에 도리어 감사를 느꼈다. 덕분에 아테네 여행은 훨씬 자유롭고 평안했다. 그곳에 머문 2주일 동안 아테네는 매우 친숙하면서도 때로는 낯설어 보이는 친구처럼 다가왔다.

우리들의 조상은 이미 오래전에 어느 특정 민족이나 영토의 범위를 벗어났습니다. 이미 여러 세기 전에 그들은 그리스를 벗어나 서구로 갔고, 새로운 사람들과 어울려 새 문명을 만들어냈습니다. 이제 서구인들은 그리스 문화를 이해하고 존경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며, 또 그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고대 그리스를 아끼고 사랑하는 모든 이의 선조가 된 것입니다.(니코스 카잔차키스, 『모레아 기행』)

옳은 말이다. 고대 그리스 문명에서 서구 문명이 탄생하였고, 이것이 발전하여 전 지구를 지배하는 현대문명이 이룩되었다. 우리가 지구상 어느 나라에 살든지 우리는 소크라테스를 비롯한 그리스 철인과 예술가와 신들의 후예요 제자가 된 것이다. 모두가 그리스이다.

우리의 기억 속에서 낭만적이기만 한 고대 황금기의 그리스는 거대한 통일국가가 아니었다. 그리스는 강력한 중앙집권적 국가를 경험한 적도 없다.

기원전 5세기에 특히 찬란한 빛을 내뿜었던 휘황한 영광도 지리적 결핍의 산물이었다. 날 선 산맥으로 인해 국토가 종횡으로 갈라진 데다가 설상가상으로 날씨 또한 덥고 건조했다.

그리스의 도시국가는 자급자족하지 못했다. 살기 위해서는 푸른 파도가 넘실대는 지중해 바다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역경에 굴복하지 않은 그리스인들의 용기가 그들을 고대의 무역 대국으로 키웠다.

그리스인들 가운데서 상대적으로 운이 좋았던 쪽은 스파르타였다. 들판이 넓고 토질이 비옥했다. 그리하여 스파르타 사람들은 자급자족하는 농업사회에 그쳤다. 그들은 지중해로 진출해 외부세계와 활발하게 교역하는 일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다.

아테네는 이 동맹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제국주의적인 침략 야욕을 실현할 군사, 외교적 도구로 이용하였다. 선한 군사동맹 같은 것은 역사상에 존재하지 않았다고나 할까.

어떤 역사가들은 이 신전이 델로스 동맹의 중앙은행 역할까지 했다고 주장한다. 신탁으로 이름난 델포이 신전이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보물창고 또는 은행이었다면 이곳은 아테네의 금융센터였다는 뜻이다. 그럴 법한 주장이다.

파르테논신전, 이야말로 고대 아테네의 영광을 길이 후세에 전하는 금자탑이요, 갖은 악조건에도 꺾이지 않고 다시 일어서고야 마는 아테네 시민들의 용기와 지혜를 상징하는 기념탑이다. 머지않아 그리스는 현재의 경제적 고난을 이기고 반드시 다시 비상할 날을 맞이하고야 말 것이다.

역사는 과연 진보하는가

이곳에 머무는 동안 나는 한 사람의 역사가로서 이른바 ‘발전론’이란 것이 얼마나 허무한지를 거듭 깨달았다. 역사는 한 단계 한 단계씩 차근차근 앞으로 나아가리라는 믿음은 허황한 것이다. 그리스문화를 살펴봐도 그렇다.

지금은 이들 여러 강대국이 그리스의 지정학적 가치를 제대로 평가하고, 자국의 이익을 키우기 위해 마구 이용하려고 하는 모양이다. 중국은 피레우스 항구를 사실상 독차지했고, 미국은 북대서양조약기구를 통해 그리스를 지배한다. 그런가 하면 독일은 유럽연합의 깃발 아래 이 나라를 실질적으로 통치한다. 러시아 역시 그리스 반도에서 자국의 영향력을 강화하려고 백방으로 노력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이 나라가 투명성과 청렴성을 자랑하는 현대국가로 재탄생하기까지는 앞으로도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그럼 우리들의 조국 대한민국은 어떠한가. 여기에도 허다한 비정상적 관행이 차고 넘친다. 두말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손들에게 어려운 일이라면, 단군 자손에겐들 쉬울 리가 있을까.

전설 속 로물루스 형제가 티베르 강가에 나라를 세우고 1천 년이 지난 뒤였다. 전성기를 지나 오랫동안 혼미를 거듭하던 서로마제국이 게르만의 용병대장 오도아케르에게 무너졌는데, 공교롭게도 로마의 마지막 황제도 그 이름이 로물루스였다.

"흐르는 물은 썩지 않는다." 로마제국의 속담이다. 로마인들은 유난히도 변화와 실용을 좋아했다. 그리하여 타민족의 기술, 특산품 및 장점을 수용하는 데 조금의 주저함도 없었다. 좋게 말해 로마 사람들은 실질을 숭상했다. 일반적으로 완고하기 이를 데 없는 법률 같은 것조차 로마인은 다르게 대했다.

그들은 누구보다 유연해, 정복지의 사정에 맞추어 법률을 개정하였다. 그들은 광대한 영토를 점령했고, 통치는 현지의 지배 세력에게 위임했다. 그러면서도 정복지의 백성들을 로마 시민으로 탈바꿈시키는 비상한 재주를 가졌다. 로마 이후에도 곳곳에서 거대한 제국이 들어섰으나, 로마처럼 피정복지역의 동화에 성공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역사의 실험실 ’ 이탈리아

하필 내가 로마에 있을 때 한 사람의 이름난 천재가 세상을 떠났다(2016.2.19.). 『장미의 이름』(1980)으로 유명한 움베르토 에코(1932~ 2016)이다. 그로 말하면 현대 유럽을 대표하는 최고의 작가요 언어학자이자 고전학자였다. 유럽 문화에 박통했던 그는, 이탈리아를 ‘역사의 실험실’이라고 불렀다. 옳은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평소에 나도 그와 비슷한 생각을 하였던 터이다.

무솔리니의 등장, 이것이 마침내는 1945년 이후에 전개될 미국 중심의 새로운 세계 질서를 낳았다고 볼 수 있다. 이탈리아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역사의 산파 노릇을 한 셈이다.

로마제국은 양극화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지 못했다. 통치자들은 로마의 기득권층을 설득하여 경제적으로 양보하도록 유도하지 못했다. 그들은 대중주의라는 우회적인 수단을 선택하였는데, 끝내는 그것이 제국의 비극적 운명을 낳은 독배가 되었다.

스톡홀름은 스웨덴의 수도요, 스칸디나비아반도에서 제일 큰 도시이다. 14개의 섬을 57개의 다리로 연결한 도시라서 ‘북방의 베네치아’라는 별명이 있다. 알다시피 스웨덴은 지구상에서 복지제도가 가장 완벽하게 갖춰진 나라이기도 하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한때는 가장 무자비했던 바이킹의 후예들이다. 그들이 마침내 자유와 평화를 구가하는 복지국가를 만들었다는 사실이 경이롭다.

생각해 보니, 바이킹 시대에도 그들의 가공할 힘은 협동에서 나왔다. 우두머리의 명령에 따라 바이킹 전사들은 한몸처럼 움직였다. 그들은 용머리가 장식된 기다란 배, 즉 용선을 타고 죽음의 바다로 곧장 나아갔다. 위험천만한 항해였다.

바이킹은 강의 상류에 이르러 물줄기가 끊어져도 항해를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기름칠한 통나무를 땅바닥에 일정한 간격으로 깔았다. 그 위로 용선을 조금씩 밀었다. 이런 방식으로 바이킹은 수십 킬로미터 숲길도 헤쳐나갔다. 강물 줄기가 나올 때까지 배를 끌고 밀면서 전진하였다. 우두머리는 강한 용기와 신념으로 무장되어 있었다. 부하들의 단결심과 복종심도 대단해, 바이킹의 침략으로부터 안전한 곳은 유럽 대륙 어디에도 없었다.

노벨과 아바, 린드그렌에서 이케아까지

이후 영국에서 일어난 산업혁명의 물결이 스웨덴에도 이르렀다. 그때 알프레드 노벨이 등장하여 창의적인 사업가로서 크게 성공했다. 알다시피 그는 다이너마이트 사업으로 거부가 되었다. 그러나 재산을 가족에게 물려주지 않았고, 유언장을 작성해 모든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였다. 노벨은 문명 발달에 공헌한 사람들을 찾아내 고무 격려하고자 했다.

오늘날의 스톡홀름은 탁월한 문화도시이다. 음악을 좋아하는이라면 누구나 그룹 아바(ABBA)를 기억할 것이다. 1972년부터1982년까지 활동한 4인조 남녀 혼성 그룹 말이다. 아바의 앨범은 무려 3억7천만 장 넘게 팔렸다고 한다. 아바의 리듬과 선율에 담긴 북유럽 특유의 독특하고 순수한 정서가 전 세계 대중음악 팬을 사로잡았다.

문화 이야기가 나왔으니, 아스트리드 린드그렌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그는 초등학교 교사였다. 어느 날인가 사랑하는 딸이 병석에 누웠다. 엄마는 즉석에서 지은 이야기를 들려주며딸을 간호했다. 이런 인연으로 그 유명한 『내 이름은 삐삐 롱스타킹』이 탄생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동화를 통해 은연중 주입되는 얌전한 소녀상과는 거리가 한참 멀었다. ‘삐삐 롱스타킹’은 여성의 동등한 권리를 주장하고, 한걸음 더 나아가 어린이의 인격적 독립을 촉구하는 무언의 항의이기도 하였다.

여행이란 한 사회의 겉모습만이 아니라 깊이 숨어 있는 본질을 실감하는 기회이기도 한 것 같다. 그런 이유로, 나는 틈만 나면 유럽의 여러 도시를 즐겨 찾는다.

1879년, 스웨덴 사람 라스 올슨 스미스가 앱솔루트 보드카를 처음으로 생산했다. 보드카는 물론 러시아 국민주로 유명하지만 가장 도수가 높은 보드카를 만든 것은 스웨덴 사람이었다. 흥미로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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