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편은 이들에게 현금을 얻는 수단이자 만병통치약과도 같았다.
1953년에 라오스가 프랑스로부터 독립하자마자 친프랑스파 왕실 대 친베트남파 왕실 간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두 세력은 중립을 지키기 힘들 정도로 서로 멀어지기만 했다. 특히 1961년 1월에 단지평원이 빠텟라오와 중립파 세력에 의해 점령되자 몽 공동체는 더욱 분열되었다.
하늘에서 폭탄이 비처럼 쏟아졌던 나날들
1960년대 초 ‘리’ 씨족 공동체의 우두머리는 미국 중앙정보부에 매수된 라오스 군부와 손을 잡고 빠텟라오와 중립주의자들을 진압하기 위한 작전에 나섰다.
1965년 3월 미군이 남베트남에 상륙함과 동시에 베트남과 라오스 북부, 그리고 국경에 걸쳐 있는 월맹군의 비밀 물자보급로 ‘호찌민 트레일’을 중심으로 무차별 공습이 가해졌다. 단지평원은 말 그대로 불지옥이 되었다.
그때도 저렇게 헬기가 날아가고, 그 모습을 신기하게 쳐다보고 있었을 눈이 맑은 라오 사람들에게 폭탄 비를 퍼부었겠지. 그 헬리콥터가 태양 가까이 가서 타버렸으면 하는 생각마저도 들었다.
프레드 브랜프먼(Fred Branfman)은 2000명이 넘는 라오 주민들을 인터뷰했고, 이후 베트남 전쟁에 가려져 미국 중앙정보부의 ‘비밀작전’으로만 남아 있던 미군의 라오스 공습을 대중에게 알렸다.
1965~ 1973년 라오스에는 210만 톤의 폭탄이 투하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과 영국이 유럽에 투하한 폭탄이 270만 톤이었음을 생각하면 실로 엄청난 양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오히려 그 화려한 색깔은 이국적인 아시아 수예품을 수집하는 이들에게 자신들의 아픈 역사를 알아달라고 외치는 소리 없는 비명인 것만 같아 가슴이 먹먹해지곤 한다.
불발탄이 아닌 현재가 숨기고 있는 희망으로
전쟁의 상처가 깊지만 그런 역사를 뒤로할 수 있다면, 폰사완은 너무 아름답고 평화로운, 그래서 매력적인 도시다.
깔깔거리며 뛰어다니는 맑은 눈을 가진 아이들에게 과속방지턱이 없는 그 넓은 평원을 달리며 현재가 숨기고 있는 희망만을 보라고 말하고 싶었다. .
전쟁은 기억되어야 하고, 그 상흔은 치유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 일을 이 아이들이 살아갈 미래까지 미룰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다
사원을 중심으로 불교를 신봉하는 양곤 시민들의 일상을 보고 있으면 이곳이 바로 우리가 상상하던 소승불교의 나라 미얀마라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
미얀마는 동남아시아에서 소승불교를 가장 처음 받아들여 다른 대륙부 동남아시아 국가인 태국, 캄보디아, 라오스 등으로 전파했다
양곤은 군부독재 정권이 국호를 버마에서 미얀마로 변경하기 전까지 랑군(Rangoon) 으로 불렸고, 2006년 군부가 수도를 북부의 네피도(Naypyidaw)로 옮기기 전까지만 해도 미얀마의 오랜 수도였다.
양곤을 방문한 타고르의 절망
인도의 시성으로 추앙받는 노벨문학상 수상자 타고르는 1916년에 양곤을 방문한 뒤 이렇게 묘사한 바 있다.
이 도시는 국가라는 토양으로부터 난 나무처럼 성장하지 않았다. (…) 마치 시간이라는 조류 위의 거품처럼 떠도는 듯하다. (…) 나는 랑군(양곤)을 둘러봤지만, 그저 겉으로만 보았을 뿐이었고, 그 속에는 버마라고 여길 만한 것은 없었다. (…) 그 도시는 추상화다.
영국 식민통치의 고통을 받고 있던 인도인들이 같은 처지인 버마인을 ‘이등 제국민’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착취하고 있다는 사실에 절망했던 것이다.
미얀마의 진정한 원주민은 에야와디강을 중심으로 거주하던 퓨족(Pyu)과 몬족(Mon)이었다. 그러다가 800년경에 티베트 지역에서 이주해온 버마족이 에야와디강을 중심으로 정착한다. 현재 미얀마 인구의 70퍼센트에 달하는 버마족의 시작이다.
버마 지역에는 북부에 버마족과 샨족 중심의 아바(Ava) 왕조, 남부 몬족 중심의 페구(Pegu) 왕조, 동부에는 버마족의 따웅우(Taungoo) 왕조가 성립되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따웅우 왕조에 의해 통합되면서 버강 왕조 이후 미얀마의 통치를 확립한다.
그 핵심 인물 중 한 명이 유명한 독립영웅 아웅산(Aung San) 장군이다. 현재 평가는 엇갈리지만, 그는 미얀마의 가장 유력한 정치인인 아웅 산 수 치(Aung San Suu Kyi) 여사의 부친이자 가장 중요한 정치적 자산이다.
하노이는 고전미와 현대적 경관이 어우러진 도시다. 이 도시는 과거에 오랫동안 탕롱(Thang Long, 昇龍)이라고 불렸다. 탕롱은 "용이 날아오른다"는 뜻이다. 리(Ly, 李) 왕조는 1009년에 수립된 후 이듬해 수도를 지금의 하노이로 옮기며 도시 명을 탕롱이라 붙였다.
문묘는 공자를 모신 사당이고 국자감은 과거의 대학이니 한국의 성균관과 형제뻘이 되는 셈이다. 베트남이 중국에 대한 저항심에도 불구하고 유교를 들여와 국가의 기본 질서를 세운 것이다.
리 왕조가 망하자 리롱뜨엉(Ly Long Tuong, 李龍常) 왕자는 고려로 이주해 화산 이씨의 시조가 됐으니, 하노이는 한국과도 인연이 깊다.
베트남은 1940년 후반부터 일본의 침공으로 프랑스와 일본의 이중 지배를 받다가, 1945년 8월 일본이 항복하면서 9월 2일 하노이에서 베트남민주공화국을 선포했다.
중국을 물리친 칼과 말뚝
베트남의 역사를 북거남진(北拒南進)의 역사라고 한다. 북쪽의 중국에 항거하고 중남부의 참파(Champa)와 남부의 크메르, 즉 옛 캄보디아의 영토를 획득해 확장한 역사를 말한다.
베트남은 기원전 111년부터 1000년 동안이나 중국의 직접 지배를 받았고, 938년 중국을 물리치고 이듬해에 독립국을 선포한 후에도 여러 차례 중국의 침공을 받았다.
1946년 말부터 두 나라는 전쟁에 돌입했는데, 이것이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다. 베트남은 1954년 5월까지 서북부 산간지대인 디엔비엔푸에서 치른 마지막 대항전에서 간난신고 끝에 프랑스를 물리치고 전쟁을 마무리했다.
남북 베트남은 서로 대치하다가 각각 외국의 지원을 받으며 1964년부터 열전을 치른다.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 곧 베트남 전쟁이다. 이 전쟁은 1975년 4월 북베트남이 남베트남을 무력으로 점령하며 끝났다.
호찌민시행 보딩패스의 목적지는 ‘SGN’이라고 적혀 있다. 국제항공운송협회(IATA)가 세계 공항을 표기하는 ‘쓰리 레터 코드’인 ‘SGN’은 ‘Sai Gon(사이공)’을 뜻한다. 도시명이 호찌민시로 바뀌었어도 옛 사이공은 여전히 거기에 있다.
사이공은 영문으로 ‘Ho Chi Minh City’이며 줄여서 HCMC라고 표기한다. 호찌민은 베트남 국부의 이름이니, ‘호찌민’과 ‘호찌민시’는 구분해야 한다
이 지역이 개발되기 전에는 목화나무가 많았는데, 사이공이라는 지명은 목화나무의 한자 표기인 ‘자곤(柴棍)’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프랑스가 남부를 식민 지배하면서 지명이 ‘사이공’이 됐다.
사이공을 한자로 ‘서공(西貢)’, 중국어 발음으로는 ‘시꽁(꿍)’이라고 한다. 베트남어 ‘Sai Gon’을 발음에 맞춰 한자로 표기하다 보니 ‘서공’이 된 것이다.
베트남은 프랑스의 지배를 받다가 1941년 후반에 일본에게 점령되어 두 나라의 공동 지배를 받게 된다. 1945년 8월에 일본이 패망하고 9월에 베트남민주공화국이 수립된 후 그 동상은 철거됐다.
베트남에 거주하던 중국인 부호의 면모는 장 자크 아노 감독이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소설을 각색한 영화 〈연인〉에서 잘 보여준다.
양가휘(梁家輝)가 연기한 주인공 남성은 열여섯 살의 프랑스 소녀와 성관계를 갖는다. 그는 그 프랑스 소녀를 사랑하지만 아버지의 재산을 물려받으려면 그녀와 결혼할 수 없다. 두 사람은 메콩델타의 사덱(Sa Dec)에서 사이공으로 가는 배에서 처음 만났다.
소녀는 꼭 돈 때문에 그와 계속 만난 것은 아니었으나 남성이 주는 돈은 그녀를 풍족하게 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그런 딸의 연애를 방조한다. 부도덕한 프랑스인 어머니와 타락한 그의 형제들은 식민지에 살던 몰락한 프랑스인 가정을 보여준다.
베트남도 한국처럼 음력설을 쇠는데 이를 ‘뗏(Tet)’이라고 한다. 베트남 전쟁이 끝나고 미국 대사관은 빈 채로 남아 있었다. 1995년에 베트남과 미국의 관계가 정상화되었고, 1999년 옛 대사관을 허문 자리에 새로 총영사관이 들어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