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은 사실 진짜 선생님이 아닌 거죠?"

태린이 그렇게 물어왔을 때, 이제프는 뜻밖의 질문에는 더이상 놀라지 않을 만큼 익숙해졌다. 태린이 그걸 어떻게 눈치챘는지 궁금하긴 했다.

그제야 이제프는 태린의 눈을 마주보았다. 지금까지 관찰 대상이었던 아이들이 어느 시점을 넘기지 못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이 아이들은 성장하며 자의식을 키워가기에, 결코 두 개의 의식이 공존할 수 없는 것이다. 고유한 인간으로서의 자아가 범람체와 강하게 충돌하기 때문에.

지금까지 이제프는 태린과 쏠이 형성하는 관계의 긍정적인 측면에 주로 주목해왔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을 간과했다. 어린 시절의 친구가 영원할 수는 없다. 무엇보다 쏠은 엄연한 의미에서, 친구가 아닌 기생하는 존재다. 태린이 살아 있지 않으면, 쏠도 그런 형태로 자아를 가지고 살 수 없는.

이제프는 태린에게 지상을 주고 싶었다. 노을과 별들을 주고 싶었다. 단지 파견자가 되어 지상을 경험하고 오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언젠가 태린이 파견자가 될 수 있다면 이제프와 함께 지상을 보게 되겠지만, 그것은 갈망을 증폭하는 일일 뿐 진정한 의미에서 지상을 얻는 것이 아니었다. 지상을 돌려주기 위해서는 지상을 되찾아와야 했다. 별과 노을과 바다가 있는 행성은 다시 인간의 것이 되어야 했다.

그렇게 되돌아온 행성을 목격하고 나면 태린도 이해할 터였다. 이 행성은 본래 인간의 것이어야 했다.

무언가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설득하는 것보다는, 이미 일어난 일을 받아들이자고 설득하는 편이 훨씬 쉽다.

그때는 태린도 이 모든 것이 선물임을 이해하겠지.

늪인들은 자신의 존재를 숨기려고 했다. 파견 본부의 사냥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그런데 왜 이 진동 신호는 늪인들이 숨기려고 했던 바로 그 이야기를 담고 있는 걸까? 그것도 한참 전부터.

—사랑해. 이제 모든 걸 함께 잊어버리자.

그리고 쏠은 스스로를 죽였다.

범람체의 본능을 거스르는 방식이었다. 불가능한 일이었다. 억압되어 있던 감각들이, 쏠이 그 순간에 느꼈던 고통과 두려움이 아주 짧은 시간 태린에게 밀려들었다. 쏠은 그 고통을 견디고 스스로 사라지기를 선택했다. 태린의 자아가 찢어져 죽음을 맞이하기 전에.

그들을 구하러 온 것이 아니었다. 단지 알고 싶어서 왔다. 정말로 이 모든 일이 사실인지 믿을 수 없어서, 직접 보아야 했다. 어떤 확신도 신념도 없었다. 문을 여는 그 순간까지도 도망치고 싶었다. 부정하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 태린은 알 수 있었다.

그들과 나는…… 다르지 않아.

"정태린, 난 너를 알아. 범람체가 있을 때도, 사라졌을 때도 너는 너였지. 네가 지닌 고유한 자아. 빛나는 눈빛. 그런 것들은 범람체에 의해 오염되지 않아. 그들은 다르지. 그들은……"

"결국 인류 전체를 저들의 숙주로 삼으려는 게 아닌가 싶군."

브리핑했던 여자가 그 말에 대꾸했다.

"사실 그들 입장에서 우리를 굳이 숙주 삼을 이유는 없어요."

"우리를 숙주 삼지 않아도, 지구는 이미 수백 년 전부터 범람체들의 행성이었으니까요."

무거운 침묵과 탄식이 회의실을 채웠다.

흐르는 물이 햇빛을 반사해 윤슬이 반짝였고 강 인근의 나무들은 범람화 정도가 크지 않았다.

밤의 바다는 많은 색깔들을 품고 있었다. 온몸으로 감각되는 빛의 조각들을.

—보다시피.

그 세계는 여전히 낯설고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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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라만상을 열치다 - 한시에 담은 二十四절기의 마음
김풍기 지음 / 푸르메 / 2006년 10월
평점 :
품절


p279~280
새봄을 눈앞에 두고 나 자신의
한해 살림살이를 돌아본다. 
나는 과연 헛되이 세월을 보내지는 않았는가.
절기의 순환과 함께 
나의 몸은 잘 변화하였는가. 
그에 따라 내 마음 역시 바뀌었는가. 
이런저런 상념에 겨울밤이 깊어간다.

글 읽던 당년에는 경륜에 뜻을 두어
해 저물어도 도리어 안회의 가난을 달가워했지.
부귀는 다툼 있어 손대기 어려웠지만
자연은 금하는 이 없어 몸편안히 할 수 있었다. 나물 뜯고 낚시해서 충분히 배채웠고 달과 바람 읊조리어 정신을 펴기에 넉넉했다.
배움이 의심 않는 데에 이르면 쾌활해짐을  아나니
헛되이 백년인생 되는 건 면하게 했네.

讀書當日志經綸 歲暮還甘安氏貧
富貴有爭難下手 林泉無禁可安身
採山釣水堪充腹 詠月吟風足暢神
學到不疑知快活 免敎虛作百年人

서경덕, <마음속 생각을 쓰다>, <화담집花潭集> 권1

서경덕은 조선 전기 선비로 평생 벼슬을 하지 않고 독서에 마음을 쏟았던 인물이다. 천하를 다스릴 뜻을 품고 열심히 글을 읽던 당시에는 가난을 달갑게 여겼다. 안회는 공자가 가장  총애하던 제자요 성인의 경지에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으나 집의 쌀독이 자주 빌 정도로  가난했다. 가난을 편안히 여기면서 도를 즐기는 이른바 ‘안빈낙도 安貧樂道‘ 고사의  주인공이다. 서경덕 역시 가난한 생활이지만 열심히 책을 읽으면서 그 가난을 달갑게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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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한小寒
매서운 추위 너머로 보이는 새 희망 - P261

 눈송이가 일으키는 흥취 
눈이 내리는 걸 한참 보고 있으면 내가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갈듯한 착각에 빠질 때가 있다. 눈송이가 반짝이며 하늘하늘 내리다가 어느샌가 무수한 흰 꽃송이로 빙빙 돌면서 쏟아지는 걸 보면 정말 눈이 일으키는 상상력이 대단하다는 것을 느낀다. - P261

우리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많은 가면을 쓴다. 착하고 순한 성품의 인물로 비춰지고도 싶고, 자신의 능력보다 훨씬 과하게 인정받고 싶기도 한 것이 인간이다. 그 때문에 무언가 느끼는 바나 말하고 싶은 점이 있어도 이리저리 재단한 뒤 판단을 하는 버릇이 생긴다. - P263

 코끝 쨍하게 매서운 겨울날에
나는 겨울을 좋아한다. 특히 바람 한 점 없이 맑은 겨울날 코끝이 쨍하고 시린, 콧구멍에 고드름이라도 달릴 법하게 매서운 날이정말 좋다. 그런 날이면 일부러 산책을 나설 정도다. 매서운 추위의 맑은 겨울날을 좋아하게 된 것은 십대 후반부터였다. 그 매서움은 흐리멍덩하게 살아가던 내 마음에 날카로운 긴장을 만들어주고, 무언지 모를 서늘함을 선사해준다. 그런 게 좋았다. - P264

대한大寒이 소한 집에 놀러왔다가 얼어 죽었다는  속담이 있을만큼 소한 무렵에는 매서운 추위가 몰아친다. 거기에 눈보라라도가세하면 움직이는 것은 천지에 찾아볼 도리가 없다. - P265

눈보라 종일 불어 창문과 사립문 때리니
궁벽진 골목엔 인적 없고 새도 날지 않는다.
백발 노인은 흙덩이처럼 홀로 앉아
적적하게 오직 병과 서로 의지해 있다.

雪風終日打窓扉
窮巷無人鳥不飛
白髮老翁塊獨坐
寂家唯與病相依
신익상申翼相, 
<소한 하루 전 눈이 내린 뒤에 바람이 크게 불었다
小寒前一日 雪後大風>, 《성재유고醒齋遺稿》 3책 - P265

대숲에 소리 없이 쌓이는 눈과 눈보라를동반하면서 창문으로 몰아치는 눈은 전혀 다르다. 소한 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날, 눈보라까지 쳐서 바깥출입은 엄두도 못 낸다. - P266

작중 화자는 곤궁하고 궁벽스러운 골목 안쪽에서 살아가는 도시의 가난한 선비다. 평소에도 인적이 없을 법한 골목길 안쪽으로 눈보라가 종일 몰아치니 더더욱 사람 기척은 없다. 평소에는 더러 오가던 새 역시 자취조차 없다. 그 쓸쓸한 집 밖의 풍경처럼, 집안의선비 역시 외롭고 힘든 현실을 견디고 있다. 노쇠한 몸의 백발노인은 마치 흙덩이처럼 아무 움직임도 없이 그저 앉아 있기만 한다. 그렇게 앉아 있는 표면적 이유는 몰아치는 눈보라에  있지만, 실제이유는 몸에 병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병과 서로 의지하여 살아간다는 말에서, 우리는 그가 오랫동안 병고에 시달려왔으리라는 짐작을 할 수 있다. - P266

노장에 조예가 깊던 분의 일화를 읽은 적이 있다. 그분은 말년에 암으로 투병생활을 하시면서 힘든 나날을 보내셨다고 한다.제자가 문병을 갔다가 고통스럽지 않느냐고 여쭈었더니, 그분은이렇게 말씀하셨다. "병이 내 몸속으로 들어왔다면 잘 모시고 살면서 대접을 잘 해줘야지." - P266

푸른 적삼 홀로 소한날에 길을 가며
달빛과 닭소리에 새벽길을 헤아려본다.
말의 언 발굽에선 버석이는 소리 들리고
여러 산 다가오는 형세 분명히 각인된다.
늘그막 인생에 되려 나그네 되니
세상 일 탈도 많아 다시 서울로 들어가네.
어디일까. 깊은 계곡에서 신선 노래 부르며
눈보라에 사립 닫는 일 모를 곳은.

靑衫獨犯小寒行 月色鷄聲蒲曉程
一馬凍蹄聞寂歷 衆山來勢認分明
人生抵老猶爲客 世事多端又入京
何處芝歌深谷裏 不知風雪掩柴荊

신광수, <신미년 겨울 막바지에 말미를 얻어 고향으로 가다가 도중에 공무 때문에 다시 발길을 돌려 서울로 들어갔다. 새벽에 갈산을 출발하였는데, 이날은 소한이어서 추위가 너무 심했다. 그때 말 위에서 시 한 수를 지었다
甲申冬末, 受由下鄕, 中路以官事, 牽回入京, 曉發葛山, 是日小寒寒甚, 馬上得一首>,《석북집石北集》8 - P268

대한大寒
늦겨울과 새봄 사이의 변화의 기운 - P271

겨울의 끝자락에서
양력을 중심에 놓고 날짜나 절기를 헤아리는 지금의 감각으로보면 소한에서 대한으로 넘어가는 시기가 바로 섣달 그믐이다. 그러나 음력으로 보면 겨울의 끝자락에 대한이 위치한다. 겨울에서봄으로 옮겨가는 중간 지점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동시에 만난다. - P271

겨울의 끝이 보일 무렵이면 겨울 방학도 거의 끝물이고, 새로운학년으로의 진급을 눈앞에 두게 된다. 새로운 교과서와 선생님, 친구들이 궁금하긴 하지만 역시 가는 겨울을 아쉬워하기라도 하는듯 우리는 종일 밖으로 나돌았다. 연도 날리고, 공터에서 비석치기나 자치기 등을 하기도 했다. 여럿이 모이면 좁은 공터에서 축구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어떻게 하루가 가는지 모르게 하루하루를 즐겁게 보냈다. 그리하여 겨울이 끝날 때쯤이면 남은 것은 여기저기터서 갈라진 손등과 감기뿐이었다. 이런 기억 때문에 겨울과 봄이교체되는 때가 되면 나는 언제나 감기를 떠올리는 것이다. - P273

새봄과 섣달 모두 아련한데
살짝 내린 눈에 겨울 매화는 대나무 울타리에 비친다.
술 떨어지자 강가 나그네 돌아가려 하고
석양 옮겨가자 들새들 막 돌아온다.
병이 두려워 약 구하는 것도 그만두었으니
근심 물리치려 부질없이 시 짓는 일도 쓸데없다.
오직 물과 구름 아득한 천리의 꿈만 있어
푸른 도롱이에 긴 젓대로 하늘 끝을 지나간다.

新春殘臘共依依 小雪寒梅映竹籬
江客欲歸沾酒盡 野禽初返夕陽移
還因畏病休求藥 不用排愁浪作詩
唯有水雲千里夢 綠蓑長笛過天涯

이경전 李慶全, <동지 지난 뒤에 臘後>,
《석루유고石樓遺稿》권2 - P274

병은 모든 사람들에게 찾아오는 달갑지 않은 손님이다. 나이의많고 적음이나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병에서 자유로운 사람은아무도 없다. 그것을 벗어나고 싶은 욕망이 신선의 세계를 구축한다. 건강할 때는 내 삶의 기쁨을 누릴 줄 모르지만, 막상 호되게 아파본 경험이 있다면 건강할 때의 기쁨을 충분히 알아차린다. 물론몸이 나아서 다시 건강하게 되면 잊어버리는 경우도 있다. 나이가들수록 병은 자주 찾아오고, 이제 그 병은 벗이 되기까지 한다. - P276

한해 동안 땀 흘리며 노력한 끝에 결실 맺은 것들을  되돌아보며 나 자신을 점검하는 것은 겨울에 주로 하게 된다. 노동의 윤리와 그 현실적 결과들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하고, 조만간 맞은 새봄에는 어떤노동이 필요한가를 점검한다. 이것이 바로 겨울의 역할이다. - P277

텅 빈 창에 눈 들이쳐 촛불 가물거리는데
달은 솔 그림자 체질하며 서쪽 지붕머리에 어른거린다.
밤 깊자 산바람 지나가는 걸 알겠나니
담장 밖으로 우수수 대숲에서 소리 난다.

雪遍窓虛燭滅明 月篩松影動西榮
夜深知得山風過 墻外騷蕭竹有聲
이우李, <우계현 동헌에서羽溪縣軒韻>,
 《송재집松齋集》권1 - P277

책을 읽는 사람들에게는 자신만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독서가 있을 것이다. 내게 있어서 책을 읽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항상 반문하게 마련인데, 그런 점에서 서경덕徐敬德의 독서는 참 흥미롭기도하고 부럽기도 하다. - P278

글 읽던 당년에는 경륜에 뜻을 두어
해 저물어도 도리어 안회의 가난을 달가워했지.
부귀는 다툼 있어 손대기 어려웠지만
자연은 금하는 이 없어 몸 편안히 할 수 있었다.
나물 뜯고 낚시해서 충분히 배채웠고
달과 바람 읊조리어 정신을 펴기에 넉넉했다.
배움이 의심 않는 데에 이르면 쾌활해짐을 아나니
헛되이 백년인생 되는 건 면하게 했네.

讀書當日志經綸 歲暮還甘安氏貧
富貴有爭難下手 林泉無禁可安身
採山釣水堪充腹 詠月吟風足暢神
學到不疑知快活 免敎虛作百年人

서경덕, <마음속 생각을 쓰다>, <화담집花潭集> 권1 - P279

서경덕은 조선 전기 선비로 평생 벼슬을 하지 않고 독서에 마음을 쏟았던 인물이다. 천하를 다스릴 뜻을 품고 열심히 글을 읽던당시에는 가난을 달갑게 여겼다. 안회는 공자가 가장 총애하던 제자요 성인의 경지에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으나 집의 쌀독이 자주빌 정도로 가난했다. 가난을 편안히 여기면서 도를 즐기는 이른바 ‘안빈낙도 安貧樂道‘ 고사의 주인공이다. 
서경덕 역시 가난한 생활이지만 열심히 책을 읽으면서 그 가난을 달갑게 받아들였다. - P279

새봄을 눈앞에 두고 나 자신의 한해 살림살이를 돌아본다. 나는과연 헛되이 세월을 보내지는 않았는가. 절기의 순환과 함께 나의몸은 잘 변화하였는가. 그에 따라 내 마음 역시 바뀌었는가. 이런저런 상념에 겨울밤이 깊어간다. - P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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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가명강 시리즈 전 35권
서울대 가지 않아도 들을 수 있는 명강의 ?

사악한 가격, 전자책도 싸지 않다.
서울대 못가는 사람이니 책은 비싸게 사서 읽으라ㅡ

그래서 네24 ㅋㄹㅁㅋㄹ
월정액 회원제 5500으로 읽고있다.
다 있진않다. 5개부족

내가 띠리리해서인지 명강의 인진 모르겠다.
그냥 책이다.

네24 ˝네˝다
한달에 한권만 읽어도 이득이다.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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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설명은 된다. 뉴로브릭은 기억을 보강하는 도구였다. 철 지난 라디오 소리도, 태린의 뇌 속에 잠재되어 있던 기억이라고 본다면 말이 되었다.

바투마스 B—30 채광창으로 향하는 계단 앞에 인부들이 모여 있었다. 한참 동안 방치되어 있던 채광창이라 대규모 작업이 필요해서인지 평소보다 인원이 많았다.

범람화된 온갖 동물의 사체와 그것들에 얽혀 자란 덩굴, 그리고 사체를 양분 삼아 인간의 키만큼 자라난 거대한 범람 산호들. 바닥에는 도대체 뭐가 고인 건지, 태린이 한 걸음을 뗄 때마다 밑창에 찐득찐득한 것이 들러붙었다. 사체가 썩어가면서 내는, 사람의 깊은 곳 어딘가를 건드리는 악취가 풍겨왔다. 계단 부근에도 범람체의 실끈들이 널브러져 있어서, 반장이 인상을 쓰며 그것을 옆으로 밀어냈다.

이제프는 성급하게 뉴로브릭의 연결을 끊기 전에 그 환각과 환청이 언제, 어떤 상황에서 주로 발생하는지 확인해보라고 했다. 태린은 그 조언을 따르기로 했다. 그렇다면 선오가 조사하려는 그 신호도 일종의 단서가 될 수 있었다. 몇 달 전부터 지상과 지하를 잇는 규칙적인 진동이 발생하고 있었다. 선오는 그것이 자연재해나 붕괴 사고의 전조가 아니라, 어떤 메시지가 담긴 진동 같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태린은 알고 있었다. 광증 발현자들이 보이는 증상 중에는 지상으로 나가려고 발버둥치는 둔주 증상도 있었다. 그들 중 일부는 채광창에서 밖으로 나가는 해치를 열지 못해 그 앞에서 붙잡히거나, 환기구에서 수분이 다 빠진 참혹한 시체 상태로 발견된다고 했다.

오류에 이름을 붙이니, 어쩐지 그 문제가 좀더 실체를 지닌 것처럼 느껴졌다. 그전까지는 문제가 무엇인지조차 알 수 없었고, 그저 불가해한 재난에 휘말린 것 같았다면 지금은 적어도 문제의 형태를 파악할 수는 있었다. 곤란한 문제 덩어리라는 것 자체는 변하지 않았지만.

첫번째, 무시하기.

두번째, 몰아붙이기.

세번째, 구슬려보기.

"넌 네가 나와는 다른 존재라고 생각하잖아. 네가 뭔지를 궁금해하고, 어떻게 내 머릿속에 들어왔는지 알고 싶어하잖아. 한 존재의 과거와 현재에 대한 서사를 인식하는 것, 그게 자의식이야."

—나, 과거 있어.

"과거가 있다니? 네가 뭔지 기억한다고?"

—내가 아니. 기억 못해. 하지만 과거 있어.

"그게 대체 무슨?"

통증을 느낀다. 태린의 일부였던 것을 강제로 떼어내는 통증. 분리되는 통증. 뇌가 쪼개어지는 고통. 그리고 그 고통은 태린만의 것이 아니다. 연결되어 있다. 다른 아이들의 고통이 곧 태린의 것이다. 무엇이 누구의 것인지 분간할 수 없어질 때쯤……

"그동안 뭘 했어?"

—무의식에 묻혀 있는 연습.

"며칠 사이에 말을 제법 잘하게 됐다?"

—네 언어, 배웠어. 기억났어.

"밖으로 나왔어."

쏠이 머릿속에서 마구 헤엄치고 있었다. 기쁨을 표현하는 것처럼. 태린은 믿을 수 없는 기분으로 밖을 향해 걸어나갔다.

"뉴로브릭에게 이름을 붙여줬다고 해도, 그걸 정말 자아나 의식을 가진 존재라고 믿으면 안 돼."

이제프의 입에서 나온 말은 조금 뜻밖이었다.

"인간이 아닌 것이 자아를 가진 것처럼 흉내내기는 생각보다 쉬워. 이전 문명에서도 증명된 사실이고. 하지만 정말로 네가 그걸 자아를 가진 존재로 대하는 건 다른 문제야. 우리에겐 뭐든 의인화하려는 습성이 있지. 하지만 때로는, 문제를 있는 그대로 봐야 해."

도시를 점령한 범람체들이 각자 경쟁이라도 하듯 빛깔을 드러내고 있었다. 색이란 색은 모두 사용한 거대한 유화 작품으로 지상을 덮은 것처럼, 마치 색이 그 자체로 살아 있어 도시를 통째로 움켜쥔 것처럼 범람체는 존재감을 발했다.

"범람체는 인간을 미치게 한다. 이성을 집어삼켜 광기와 죽음에 빠뜨린다……"

그 사실을 잊지 않으려고 태린은 소리를 내어 중얼거렸다. 이 도시는 생명이 아니라 죽음으로 가득찬 곳이라고. 인간은 이 색채들 속에서 살아갈 수 없다고.

이 조직의 목적은 하나다. 우리는 평화를 바라지 않는다. 우리는 승리를 바란다. 궁극적인 승리를 바란다. 우리는 싸우기 위해 한 걸음 물러섰다. 그렇기에 이 전제를 다시 한번 되새기자.

결국은 이 또한 분명한 전쟁임을. 상대를 절멸시키기 전에 전쟁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단지 한 걸음 물러나, 숨죽이며 때를 기다리는 것뿐이다.

—에반 바노스의 기고문 〈파견 본부 설립에 부치며〉 중

"파견자 시험 직후에 추방당하는 불명예를 짊어지는 것보다는, 그 일을 해결하고 오는 편이 자네에게도 우리에게도 좋은 결말이겠지."

마일라는 중간 목적지 역시 지상 기지의 후보 지역 중 하나라고 말했는데, 막상 와보니 후보 지역으로 선정될 이유가 하등 없는 장소였다. 간이 장비로 범람체의 연결 정도를 분석해보아도 특이점이 없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중간 목적지에서 최종 목적지로 가는 길 자체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마일라가 야영 캠프를 설치하는 동안 태린과 네샤트는 마일라의 주장을 검증해보고 돌아왔는데, 그의 말이 맞았다.

태린은 한 번도 진동으로 된 언어를 배운 적이 없었다. 그런 것이 존재하는지조차 의문이었다. 파견자 수업 때 부호를 통한 소통 방법을 배우긴 했지만 그것으로는 아주 단순한 의미 교환만 가능할 뿐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지금은 이 울림이 말을 걸어오고 있다는 느낌이 들까.

우리와 합쳐지는 것이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야.

스벤의 말에 따르면 그것은 인간들의 공동체보다 훨씬 더 본능적이고 무의식적으로 작동하며, 그러면서도 좀더 파편화되어 있고 체계가 없는 형태라고 했다. 범람체들은 범람화된 생물, 즉 범람체에 의해 신경망이 점령된 생물을 그들의 연결망 일부로 여긴다. 그 안에서도 먹고 먹히는 생태계는 유지되지만, 범람화된 개체들은 서로를 완전히 다른 개체로 보는 대신 느슨하게 이어진 집단의 일부로 본다.

"그의 절반, 범람체."

스벤의 절반은 범람체이기 때문에, 이것이 그에게 도움이 된다는 뜻일까. 태린은 내밀던 손을 멈추었다.

꽤 긴 시간이 지났는데도 아이들은 건강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아이들에게서는 지금껏 관찰된 적 없는 특이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범람체와의 지적, 정서적 상호작용이라는 현상이.

"제가 관찰당하는 거 알아요. 저는 연구 대상인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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