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소설가 마틴 케이딘Martin Caidin은사고로 두 다리와 한 팔, 그리고 한쪽 눈을 잃은 스티브 오스틴이라는 주인공이등장하는 소설 『사이보그』를 썼다. 큰 인기를 얻은 이 소설은 ‘600만 불의 사나이‘라는 제목의 드라마 시리즈로 제작, 방영되어 전 세계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 ‘600만불의 사나이‘가 인기를 끌면서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새로운 시리즈 ‘바이오닉 우먼‘이 나왔으며, 우리나라에서는 이것이 ‘소머즈‘라는 제목으로 방영되었다. 소머즈는 뛰어난 청각을 소유해서 재능을 발휘하는 여성 사이보그이다. 소머즈와 600만 불의 사나이는 같이 임무를 수행하기도 하고, 둘이 사랑에 빠지기도 했다.
만나는 모든 외계민족을 자신들처럼 보그화시켜버리는 이들은 외계를 정복하며 적과 싸울 때 딱 한 마디만 한다. "저항은 무의미하다Resistance is futile. 실로 무시무시한 사이보그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사실 인간이란 존재도 언제 죽을지모르는 유한한 존재이다. 그래서 하이데거 같은 철학자도 인간은 매일 죽음을 안고 사는 존재라고 표현하지 않았는가.
로이배티가 자신의 수명이 너무 짧다고 하자 이들의 창조주나 마찬가지인 타이렐 박사는그에게 레플리컨트의 삶은 목적에 충실한, 짧지만 불꽃같은 삶이니 그 삶에 만족하라고 한다.
나는 네가 상상하지 못할 것들을 봤어. 오리온 전투에 참가했고, 탄호이저 기지에서 빛으로 물든 바다도 봤어. 그 기억이모두 곧 사라지겠지, 빗속의 내 눈물처럼. 이제 죽을 시간이야.
불길한 로봇이 주인을 공격하고, 머리를 먹으려고 했다. 로봇 진공청소기가 여인을 잡아먹었다. 외신 보도에서는 놀랍게도 로봇이 어떤 의도를 가진 것처럼 묘사한 기사 제목이 많았다.
인간이 만든 대상이 결국 인간의 손으로 제어할 수 있는 영역을 넘어선다는 사고를 엿볼 수 있다.
로봇에 대한 두려움, 로봇의 제0법칙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최고 자본가와 노동자들이 화해를 한다. 여기서 영화가 주는 메시지는 노동자와 지배자 사이에 중재자가 필요하며, 그 중재자는 마리아나 프레더처럼 선한 존재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 중재자가 로봇 마리아처럼 미쳐 날뛰는 존재일 경우에는 양쪽 사람들이 모두 피해를 입는다는 것이다.
유명한 SF 작가 아이작 아시모프Isaac Asimov는 최초로 로봇의 3가지 원칙을 얘기했다.
첫째, 로봇은 인간에 해를 가해서는 안 된다. 둘째, 인간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첫 번째와 두 번째 원칙을 위배할 때를 제외하고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로봇에는 두 가지 프로토콜protocol이 입력되어 있다. 첫 번째는 어떤 생명체도 해쳐서는 안 된다는 것. 두 번째는 아시모프의 법칙과는 다른 것으로, 다른 어떤 로봇도 건드려서 변형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보스트롬이 『초지능』에서 말했듯이 AI는 인간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감정들을 공유하지 않는다는 생각과 공명하는 것이다.
모던보이의 눈에 비친 기이한 과학 경이의 대상, 문명의 상징으로서의 전기 영국의 과학자 출신 작가 찰스 스노가 ‘두 문화two cultures’에 대해 이야기한 것이 1959년이었다. 그는 물리학으로 대표되는 과학적 문화와 문학으로 대표되는 인문 문화 사이의 커다란 간극을 안타깝게 생각했다.
이런 두 문화 사이의 간극을 줄이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텐데, 그중 하나는 과학과 인문학이 만나는 접점들을 찾아서 이를 드러내는 것이다.
과학은 바로 힘이자 문명이었으니 최초의 신소설로 평가되는 이인직의 『혈의 누』(1906)에는 주인공 옥련이 일본에서 신문명을 접하고 깜짝 놀라는 장면이 있다. 이인직은 일본의 문명을 "이층 삼층집이 구름 속에 들어간 듯"과 같이 묘사하면서 비약과 과장으로 그려냈는데, 이는 신문명을 처음 접한 주인공이 느꼈을 경이감을 전달하는 데에는 더없이 효과적인 수사였다.
이러한 변화는 더 큰 변화인 도시화, 문명화의 일부였다. 그는 "사방에 반작 반작 전기등"이 켜지고 전차와 인력거 소리가 도시에 울려퍼지는 것을 묘사하면서, 도시의 소리가 곧 문명의 소리라고 감탄했다.
염상섭의 소설 『삼대』에서 목사인 상훈은 술집에서 술을 마시다 다른 손님들과 시비가 붙어 파출소에 끌려가면서 겁을 벌벌 내는데, 그는 그 이유를 "낮같이 밝은 전등불이 눈 위에 반사되어 끌려가는 사람들의 얼굴들이 한층 더 분명하게" 보였기 때문이라고 하고 있다.
채만식의 『태평천하』에서는 서울에서 유곽에 들른 윤직원 영감의 아들 종수가 방에 들어온 기생이 부친의 둘째 첩 옥화라는 걸 알게 되는 장면이 있다. 종수는 밤에도 방 안을 환히 밝혀주는 전등 덕에 옥화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었다고 생각하고, "밤에 불을 가진 것이 참으로 고맙고 다행스럽다는 것을 절절히 느끼면서" 그 자리를 빠져나온다.
안드로메다은하에도 태양과 같은 항성이 수천 억~1조 개 정도 존재한다고 한다. 그럼 우주에는 다른 은하계가 몇 개쯤 존재할까? 적어도 1000억 개 정도는 존재할 것이라 가늠해볼 수 있었는데, 그 수는 차츰 늘어나 2000억 개 정도가 되었다가 2016년에 발표된 이론에 따르면 2조 개로 대폭 늘어났다. 우주는 광활하다. 아니 광활하다는 말로는 묘사하기 힘든 것이 우주의 실체이다.
칼 세이건은 우주 어딘가에 고등생명체가 존재할 확률이 매우 높다고 주장한다. 우주가 너무나 광활하기 때문이다. 이 광활한 우주 어딘가에 있는 행성에는 물이 있을 가능성이 높고, 물이 있다면 원시 생명체가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문과에 속했던 사람이든 이과에 속했던 사람이든, 고등학교 시절 끙끙대면서 배운 미적분이 인생에 얼마나 필요한가에 대해서 한 번 정도는 생각해봤을 것이다. 충만한 삶을 사는 데 미적분이 필요할까? 과연 도덕적인 삶을 사는 데 과학이, 수학이, 양자역학이 필요할까? 더 행복하고 충만한 삶을 사는 데 우리가 우주의 먼지라는 지식이 얼마나 중요한 걸까? 우리가 꼭 우주, 진화, 물리학을 알아야 하는 걸까?
문과에 속했던 사람이든 이과에 속했던 사람이든, 고등학교 시절 끙끙대면서 배운 미적분이 인생에 얼마나 필요한가에 대해서 한 번 정도는 생각해봤을 것이다. 충만한 삶을 사는 데 미적분이 필요할까? 과연 도덕적인 삶을 사는 데 과학이, 수학이, 양자역학이 필요할까? 더 행복하고 충만한 삶을 사는 데 우리가 우주의 먼지라는 지식이 얼마나 중요한 걸까? 우리가 꼭 우주, 진화, 물리학을 알아야 하는 걸까?
살인청부업자인 톰 크루즈는 그 질문에 이렇게 대답한다. "수백만 은하계와 수천만의 별들 중 한순간 반짝 하는 점 하나, 그게 우리다. 우주의 미아에 불과한 우리의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따라서 그 사람이 지금 죽건 늙어서 죽건 별 차이 없다." 이에 택시운전사는 살인청부업자의 말에 반박하고, 그때부터 이 둘의 긴장감이 고조되기 시작한다.
"(과학적) 사실로부터 가치, 윤리, 도덕 같은 것들이 나올 수 없다"라는 문장이 낯설지 않다. 동시에 우리는 과학과 인문・예술은 상호보완적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전자는 사실, 후자는 당위를 다룬다는 의미에서이다. 결국 이 모든 이야기는 과학과 인문학을 한 테두리 안에 두기보다는 과학의 영역, 인문학의 영역이 각각 따로 존재한다는 생각을 바탕에 두고 있는 것이다.
"과학과 인문학이 상호보완적이다"라는 취지의 언급을 맨 처음 했던 철학자는 잠바티스타 비코Giambattista Vico라는 이탈리아의 사상가였다.
갈릴레오는 그 편지를 받고 "당신이 맞다. 그런데 당신의 실험이 내 이론을 틀렸다고 논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내 이론적 증명은 저항이 없는 공간에서 성립하기 때문이다"라는 요지의 답을 했다.
갈릴레오는 관성의 법칙이나 자유낙하의 법칙을 발견한 것이 아니다. 이런 법칙은 자연에서 찾아질 수 없다. 그는 마찰이 없는 평면, 저항이 없는 공간을 상상함으로써 이런 법칙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다시 말해서 갈릴레오는 자신의 법칙이 만족되는 상황을 창조해낸 것이다.
뉴턴은 지난 1000년간 존재했던 과학자 중 가장 천재적인 과학자로 꼽히는 사람이다. 뉴턴 이전 시대에 살았던 천문학자 케플러는 행성들이 태양을 타원의 형태로 돈다는 것을 밝혔다. 그는 자신의 스승이었던 튀코 브라헤Tycho Brahe의 정확한 관측 결과를 이용해서 행성의 궤도가 원이라는 오래된 관념을 처음으로 극복할 수 있었다.
칼 세이건은 그렇듯 멀리서 찍은 지구 사진을 보다 보면 지구상에서 서로 미워하고, 싸우고, 심지어 서로의 이념과 명분에 ‘목숨을 거는’ 행위가 얼마나 우스운 것인가를 알 수 있다고 했다. 지금까지 태어나서 죽은 모든 사람들이 그 하나의 점 위에 살았고, 지금 종교 때문에, 이데올로기 때문에 서로 싸우고 으르렁거리는 사람들 모두가 그 점 위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 우주의 중심이라고 믿는 우리의 오만, 내가 우주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망상은 우주에서 찍은 지구의 사진 한 장으로 근거가 사라진다는 것이다.
우주 속에서 우리의 위치를 알게 되면 우리의 삶의 터전인 희미한 푸른 점을 아끼고 보존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주에 그렇게 많은 별이 있고, 그렇게 다양한 조건을 가진 별들이 많이 존재할 수 있는데, 왜 고등 생명체의 흔적이 없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한 가지 답변은 이렇다. 사람이 언제까지 생존할 수 있을까? 많은 종들이 멸종한다. 특히 최상위 포식자들이 가장 빨리 멸종하기 마련이다. 공룡도 그렇게 멸종했다. 환경이 바뀌었을 때 멸종하고 말았다. 인간이 100만 년을 더 살 수 있을까? 인류의 문명은 앞으로 고작해야 수천 년 정도 지속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꽤 많다. 지구 나이가 50억 년 정도이니 수천 년이라는 시간은 한 점에 불과하다.
인간이 전자기파, 즉 전파를 발견한 것이 100여 년 전이고, 우주로 전파를 쏜 것은 불과 몇 십 년이 되지 않는다. 다른 모든 행성에서 고등 생명체가 전파를 발견한 뒤에 수천 년 정도 더 생존하다가 멸종되었다고 생각하면, 인간과 비슷한 모든 고등 생명체는 점 정도에 불과한 기간을 살다 소멸하는 것이다. 고등 생물체가 소멸한 이유는 핵에너지를 잘못 관리해서이다. 오만해서인 것이다.
다른 행성에서 비슷한 생물체가 우리와 같은 과정을 겪었고 과학을 발전시켜서 원자 에너지를 사용하다가 핵전쟁이 발발해서 절멸되었다면, 우주에 왜 우리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고등 생명체가 없는지 이해할 수 있다. 왜 인간이 수십 년 동안 메시지를 보내도 왜 답이 없는지 말이다. 우리의 미래는 우주 속에서의 인간의 위치에 대해 우리가 얼마나 성찰하는가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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