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학이란?STS(Science and Technology Studies/Science, Technology and Society)STS는 과학기술과 사회의 상호작용을 규명하는 학문이다.사회가 과학기술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그 내용과 방향을 어떻게 바꾸는지, 반대로 과학기술이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를 분석한다.과학기술이 제한적인 사고와 감정을 가진 인간에 의해서,특정한 시기의 사회적이고 물질적인 조건 속에서 발전한다는 ‘상식’에서 출발한다. 과학은 인간의 활동이라는 것이 STS의 출발점이다.
기술과학(technoscience) 대개 과학이 기술을 낳는다고 생각하지만, 기술의 발전이 과학의 진보를 가져오기도 한다. 과학과 기술은 하나의 네트워크 속에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이런 의미에서 ‘테크노사이언스’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다.
융합(融合) 하나의 분야와 다른 분야의 접목. 융합의 목적은 우리에게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인데, 이 책에서는 과학과 인문·예술의 융합을 통해 나를 둘러싼 사회적 조건을 극복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유토피아(utopia) ‘좋은 곳’이라는 뜻의 ‘eu-topia’, ‘아무 데도 존재하지 않는 곳’이라는 뜻의 ‘ou-topia’의 합성어로,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이상향을 뜻한다. 1516년 출간된 토머스 모어의 책 『유토피아』에서 처음 사용된 말이다.
디스토피아(dystopia) 유토피아의 반대말로, 미래의 끔찍한 어떤 사회를 뜻한다. 19세기에 만들어진 말로, 산업혁명 이후 사회적 불평등이 확산되면서 널리 사용되었다.
인공지능(AI, Artificial Intelligence) 인간의 여러 능력을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구현한 기술. 인공지능에 대한 인간의 두려움과 동경은 각종 대중문화 콘텐츠로 나타나는데, 이 책에서는 인공지능이 발전했을 때의 여러 가능성과 문제점 등을 소개한다.
초지능(superintelligent) 기계 똑똑한 사람들의 지적 능력을 훨씬 초월하는 기계. 초지능 기계가 인간보다 더 뛰어난 기계를 만들 수 있을 것이며, 그렇게 되면 기계의 진화로 지능의 폭발이 가능할 것이라는 예측이다.
프라이버시(privacy) 개인의 사생활을 보장받을 권리. 19세기 산업화 이후 생긴 개념으로, 오늘날에는 자신의 정보를 스스로 공개하는 등 프라이버시가 자연스럽게 그 의미를 잃어가는 것이 아니냐는 논쟁적인 주장이 펼쳐지고 있다.
유전자가위(CRISPR) 유전자에서 원하는 부분을 잘라내는 기술. 이 기술을 통해 병을 유발하는 특정 유전자를 자르면 병을 예방할 수 있다. 이 기술이 광범위하게 쓰일 경우, 그 결과를 예측하기 힘들다는 점에서 윤리적 비판이 일고 있다.
우생학(eugenics) 진화가 인간에게도 적용되며 생존에 적합한 인간은 살아남고 그렇지 않은 인간은 자연스럽게 사라지는 것이 자연의 순리라는 견해이다. 1920년대 미국의 이민 제한법, 2차 세계대전의 홀로코스트 등이 이것을 기반으로 시행됐던 나쁜 정책들이다.
사이보그(cyborg) 컴퓨터, 기계, 약물 등을 통해 활동 능력이 극대화된 인간. 수학자 노버트 위너가 주창한 사이버네틱스와 유기체를 의미하는 오거니즘의 합성어이다. 사이보그에 대한 인간의 관심은 오래되었지만, 2차 세계대전 이후에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두 문화는 1959년에 영국의 작가이자 화학자였던 찰스 스노Charles Snow가 케임브리지대학교 강연에서 처음 한 말이다.
진입장벽을 낮추고 두 문화 사이의 간극을 좁히기 위해서 과학자들은 과학자들 나름대로, 인문학자들은 인문학자들 나름대로 자신의 학문 분야를 쉽게 서술한 대중서를 출판한다.
가치(윤리나 종교)의 이름으로 사실(과학)을 재단하려고 해서도 안 되고, 사실의 이름으로 가치를 말해서도 안 되는 것이었다.
우리에게 각인된 과학자의 이미지는 어떤 모습인가.통상 괴짜이거나 지독한 몰입형 인물로 그려지지만 애초 대중문화 속에서 과학자는 희한한 미치광이로 등장하기도 했다. 아무도 몰랐던 과학자의 이미지, 왜곡된 참 모습을 찾아보자.
과학자의 이미지,미쳤거나 괴짜거나 괴물이 아닌 과학자, 프랑켄슈타인
사실상 고전이라는 것이 익히 그렇듯 실제로 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본 사람은 극히 드물다. 이는 대다수의 사람이 프랑켄슈타인이라는 이름을 소설에 나오는 괴물의 이름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실제로 프랑켄슈타인은 그들이 생각하는 괴물 이름이 아니다. 정확히는 괴물을 만든 과학자의 이름이다.
괴물은 그냥 이름 없는 괴물이고 그 괴물을 만든 과학자가 프랑켄슈타인이다.
『프랑켄슈타인』은 영국의 여성 작가 메리 셸리Mary Shelley가 쓴 소설이다.
새로운 시대의 ‘프로메테우스’로서의 과학자 권두화 오른편에 놀란 표정으로 문을 열고 도망가는 인물이 주인공 프랑켄슈타인 박사이다. 그리고 왼쪽에 나동그라져 있는 존재가 바로 프랑켄슈타인이 만든 괴이한 피조물이다.
새로운 지식을 발견한 대가로 고통을 당하는 프로메테우스와 프랑켄슈타인의 이미지는 이후 과학자의 전형적인 이미지 중 하나가 되었다.
메리 셸리는 당시 과학자들이 많이 하던 실험에서 소설의 아이디어 하나를 빌려왔다. 앞서 언급한 이탈리아의 과학자 루이지 갈바니Luigi Galvani의 죽은 개구리 다리 실험이 그것이다. 갈바니는 죽은 개구리 다리를 잘라 전극을 이었을 때 그 다리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대고 펄쩍 뛰기도 하는 것을 발견했고, 이로부터 생명체를 유지하게 하는 것은 전기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잘 보이지 않고 드러나지 않을 뿐 생명체의 몸에는 전기가 흐르고 있는데, 죽어서 전기가 다 빠진 상태의 개구리 다리에 전기를 공급해주니까 다시 움직인다는 것이 그가 실험을 해석한 방식이었다.
그런데 연구 자체는 성공적이었지만, 그 결과는 결코 그가 바라던 것이 아니었다. 아니, 참담했다. 박사 나름대로는 인간의 멋진 부분들을 조합해 만든 창조물이 결과적으로 대단히 괴기한 형상으로 등장한 것이다.
결국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자신의 피조물을 버리고 도망간다. 그리고 괴물은 혼자 돌아다니다 한 시골 농가에 들어가 숨어 지내면서 사람들이 사는 방법과 말을 배운 후 자신을 창조한 아버지 프랑켄슈타인을 찾아 나선다. 박사와 괴물은 눈이 덮인 산에서 한 번 조우하게 되는데, 그때 괴물은 박사에게 묻는다. 왜 자신을 만들었고 그리고 왜 버렸느냐고.
박사는 괴물의 요청을 거절하고, 이에 화가 난 괴물은 급기야 박사의 친구와 이제 막 결혼한 박사의 신부를 또 죽이고 도망간다. 박사는 괴물을 쫓아가고, 결국 얼음으로 뒤덮인 북극에서 둘이 같이 죽는 것으로 소설의 마지막이 장식된다.
그런데 그렇게 얻은 지식이 책임감 있게 사용되지 못하고 통제가 안 되었다는 것이 이 작품이 전하는 중요한 메시지라 할 수 있다. 자신의 피조물을 버리고 도망간다든지, 짝을 만들어달라는 요청을 승낙했다가는 다시 파기하는 등 지식(과학)을 만들어낸 사람이 그 결과에 대해 온전히 책임지지 못하고 우유부단하며 책임 회피에 급급해 자신과 주변을 파멸시키기에 이른 것이다.
첫 번째가 아주 사악한 연금술사evil alchemist이다. 그리고 두 번째가 영웅의 이미지hero, 세 번째가 어리석은 과학자의 이미지foolish scientist이며, 네 번째가 비인간적인 연구자inhuman researcher, 다섯 번째가 모험가scientist as adventurer, 여섯 번째가 미친, 나쁜, 위험한 과학자mad, bad, dangerous scientist, 일곱 번째가 무기력한 과학자helpless scientist이다.
과학자들이 연구를 한다. → 혁신적 결과를 내놓는다. → 그 혁신적 결과가 과학자의 통제 범위를 벗어나 사회에 해악을 미친다. → 궁극적으로 연구 결과는 연구자 자신에게 복수의 칼이 되어 되돌아온다. 이 패턴은 『프랑켄슈타인』의 스토리와 정확히 일치한다.
내게 이 영화에 대한 평을 하라고 한다면 나는 이렇게 말하겠다. 이것은 냉전과 핵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뛰어넘어 기술과 인간의 본성의 관계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제공하는 영화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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