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정치적 평등은 매우 중요한 원칙인데 이는 선거에서 ‘일인일표一人一票’로 제도화되었다. 국왕이나 귀족이나 부자나 빈자나 모두 한 표씩의 동등한 권리를 행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 원칙은 잘 지켜지지 않았다.
우리 정치가 지역주의에서 벗어나 한 걸음 더 발전해가기 위해서는 지역 내의 다양한 정치적 의견이 고르게 대표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다양한 유권자의 의견이 대표되어야 정치의 다원성을 회복하고 양극적인 갈등을 해소할 수 있을 것이다.
선거 정치는 우리 정치사에서 커다란 정치적 격변이 있기 전에 의미 있는 시그널을 보내왔다. 또한 4ㆍ19 혁명이나 6월 항쟁 모두 선거와 깊은 관련이 있는 사건이었다. 민주화와 함께 절차적 민주주의가 복원되었고 이제 3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다.
그 사이 우리나라의 선거는 공정하고 자유로운 정치적 경쟁의 장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 누구도 공정하고 자유로운 선거 이외의 방법으로 권력을 추구할 수 없게 되었다. 여야 간의 권력 교체도 일반적인 현상이 되었다.
이제는 절차적 민주주의의 확립이라는 소극적 목표를 넘어 개방적이고 공정한 대표성의 확립, 정치적 표현과 선거운동의 자유, 비례성의 확보 등 민주적 가치가 보다 적극적으로 구현될 수 있는 방향으로 선거 정치를 개혁해나가야 할 때다.
정당은 본질적으로 권력을 추구한다. 그 권력이 국가와 시민사회를 연계하며 진정한 대의민주주의를 위해 사용될 때, 비로소 정당정치는 오늘날 포퓰리즘 위기의 대안이 된다.
권력에 눈이 어두워야 정당이다 미국의 정치학자 샤츠슈나이더E. E. Schattschneider는 말했다. "정당이 민주주의를 만들어냈고, 근대 민주주의는 정당과 관련하지 않고는 생각할 수 없다."
영국에서는 정당정치의 실패가 결국 2016년 브렉시트로 표면화되었고 장기간 정치적 혼란 속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미국에서도 2016년 트럼프와 같은 포퓰리스트 정치인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는데, 하버드대학교의 교수인 정치학자 레비츠키Steven Levitsky와 지블랫Daniel Ziblatt은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How Democracies Die』에서 그 원인을 미국의 정당정치에서 찾았다.
우리 사회 속 정당 역할의 본질 정당정치는 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는데, 그중 하나가 사회 갈등의 관리다. 정당은 국가에 대한 유권자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국가에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사실 민주주의 사회에서 합의consensus란 절대 만장일치unanimity일 수 없다. 이 복잡한 사회가 같은 생각을 갖는 이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볼 수는 없다. 따라서 민주주의 사회에서 합의는 여러 가지 형태의 토론과 협의에 의해서 만들어지며, 모두의 뜻이 합치되었다 하더라도 토론과 양보와 타협을 통해 이뤄진 다원적 만장일치pluralistic unanimity의 형태다. 사회란 원래 불일치나 다양성으로 구성되며 합의는 만들어지는 것consensusーbuilding이다. 정당정치는 이처럼 민주주의의 발달과 함께 비로소 자리 잡게 된다.
과거 박정희 정부 때 국론 분열이나 총화 단결과 같은 구호 모두 이러한 전체주의적 시각에서 파생된 것이다. 그때만 해도 사회란 여러 이해관계, 다양한 생각이 공존할 수 있다는 전제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부분이란 전체에서 어긋나는, 전체를 훼손시키는 것에 불과했다.
정당은 국가와 시민을 매개해야 한다 실제 우리나라의 정당은 시민사회와 국가를 어떻게 연계하고 있을까? 우리나라 정당법에서는 매우 통치적인 관점에서 정당의 역할을 정의내리고 있다. 정책의 추진, 후보자 추천, 여론 형성 등 국가와 관련된 정책 및 정치적 측면을 강조한 모습이다.
당시 김종필은 민주 정권 이양 이후 강력한 정당 조직을 통해 장기 집권을 위한 제도적 장치로 이를 활용하고자 했다.
독일 정당법이 말하는 대로 정당이 "역량 있는 사람들이 공공 책무를 담당하도록 훈련"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더욱 큰 문제는 제임스 2세 이후의 왕위 계승에 있었다. 제임스 2세의 왕위 계승을 인정했던 토리 또한 제임스 2세가 왕자를 낳게 되자 큰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러자 토리와 휘그는 단합하여 1688년 제임스 2세의 딸 메리Mary와 남편인 오렌지 공작William of Orange을 통해 제임스 2세를 내쫓고 권리 장전을 제정해 의회 주권에 기초를 둔 입헌 왕정을 수립했는데 이것이 명예혁명이자 정당이 만들어지게 된 첫 출발점이다.
이념 지형의 맨 오른쪽에는 이승만, 김성수, 김구, 중도우파 안재홍, 중도파 김규식, 중도좌파 여운형, 그리고 맨 왼쪽의 박헌영 등 극우부터 극좌까지 상당히 다양한 정치적 지형이 형성된다.
더불어민주당은 자신들의 기원을 1955년 민주당에서 찾고 있으며 2015년에는 60주년 행사를 갖기도 했다. 하지만 민주당은 한민당에 뿌리를 두고 있었던 만큼 매우 보수적인 정당이었다.
실제로 민주당이 결성될 때 조봉암은 자신도 합류하기를 원했지만 결국 거부당했다. 좌익 전향자는 신당 발기에 참여할 수 없다고 조직 요강을 정했기 때문이다. 이후 조봉암은 독자적으로 진보당을 창당하지만 1958년 진보당 사건으로 해산되고 만다. 제2공화국에서 신파 중심의 민주당과 구파가 탈당해 만든 신민당이라는 보수 양당 체제가 자리 잡을 수 있었지만, 5ㆍ16 군사 쿠데타의 발발로 이 또한 무산되고 만다.
공화당을 둘러싼 논란과 ‘김종필 플랜’ 공화당은 우리나라 정당 조직에 상당히 큰 영향을 미친 정당으로, 앞서 설명했듯이 5ㆍ16 군사 쿠데타 이후 김종필의 주도 아래 2년 반의 군정 기간 중앙정보부에서 비밀리에 창당한 정당이다.
이는 군부의 장기 집권 계획의 일환으로 결성된 것으로, 군정 종식 후 민정으로의 이양 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민주화 직후 가히 ‘폭발적’이라고 할 만큼 거세게 터져 나온 지역주의의 원인은 1980년 광주 민주화 운동과 관련이 깊다. 신군부에 의해 가혹한 억압을 받은 광주 시민, 그리고 호남 유권자들에게 당시 그것과 관련하여 사형을 선고받고 고통을 겪은 김대중은 지역 주민이 갖고 있는 아픔의 상징이 되었다. 이후 민주화와 함께 정치적 공간이 열리고 김대중이 대통령으로 출마하면서 호남 유권자들이 정치적으로 결집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호남의 지역주의에 다른 지역 역시 유사한 형태로 반응하면서 지역주의 정당정치가 부상하게 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요인 이외에도 1987년 대통령 선거에 나선 후보자들이 은밀히 지역감정을 의도적으로 부추긴 측면도 있다.
본격적인 진보 세력의 출현은 2002년 이후에 이뤄지지만 ‘보수 대통합’을 주창한 3당 합당에 대해 민주당의 진보성이 가해지면서 한국 정당정치에서 정책적 차이나 이념적 차별성이 나타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된다.
3당 합당에 대한 반발로 노무현을 비롯한 몇몇이 모여 민주당을 만들고, 이는 평민당과 합쳐서 새정치국민회의가 만들어진다. 새정치국민회의 이후로는 이름만 바뀔 뿐 그 계보가 계속 이어져오고 있다. 새천년민주당 또한 열린우리당에서 다시 민주당으로 왔고 이후 대통합민주신당, 통합민주당, 민주통합당, 새정치민주연합, 더불어민주당까지 이어진다.
진보 정당인 국민승리21은 민주노동당으로 이어지나, 여기에서 민중 민주 성향을 가진 노회찬, 심상정 등의 의원들이 탈당하며 진보신당을 창당한다. 그러나 이후 다시 통합진보당의 출범으로 합쳐져 오늘날 정의당으로 이어지고 있다.
한국적 맥락의 보수와 진보 오늘날의 이념적인 형태의 정당 구도와 관련해 가장 중요한 정당은 열린우리당이다. 이때부터 한국 정치에서 보수 일변도라는 이야기는 사라지고 이념적 차별성에 기초한 정당정치가 본격적으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물론 유럽에서와 같은 이념적 차별성은 아니지만, 적어도 한국적 맥락에서의 보수와 진보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2002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노무현은 국민 참여 경선이라는 새로운 후보 선정 방식에 의해 새천년민주당의 후보가 되었다. 그러나 그 후 노무현의 지지도가 떨어지자 당내 일부 의원들은 후보단일화추진협의회를 구성하여 후보직을 정몽준에게 양보하고 사퇴하라고 요구했다.
대통령 당선 후에도 대북 송금 특검과 관련하여 노무현 대통령이 특검법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으면서 새천년민주당 내 친親 김대중계 의원들의 반발을 불러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2003년 9월 새천년민주당에서 탈당했다.
천정배, 신기남, 정동영 의원 등 친노 신당파 주도로 이부영, 김부겸, 김영춘 등 한나라당에서 탈당한 의원 5명과 유시민, 김원웅 등 개혁국민정당 의원 47명은 2003년 11월 11일 정치 개혁을 표명하며 열린우리당을 창당하고, 새천년민주당과 갈라선다.
이념이 한국 정치에서 중요한 요인이 된 것은 2002년 노무현의 등장, 그리고 특히 2004년 열린우리당의 성공과 관련이 깊다. 노무현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더라도 열린우리당을 통해 ‘세력’을 만들어내지 못했다면 진보 정치인 노무현의 등장은 그저 일회성으로 그치고 말았을 것이다.
의원들 모두 편의점을 하나씩 가지고 있는 것인데, 이들에게 본사의 이익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 내 가게만 잘 된다면 아무것도 문제될 것이 없다는 식이다.
민주주의는 더 이상 이념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피와 땀으로 얼룩진 민주화 운동의 성취로 우리의 일상 속에 살아 숨 쉬고 있다. 이제 보다 나은 민주주의를 위해 시민사회의 역할을 찾을 때다.
일본은 우리나라 다음의 22위를 차지했다. 중국은 평균 3.32로 권위주의 국가군에서 속하며 167개국 중 130위를 차지했다. 여기에서 수년째 167위를 차지하는 국가는 변함없이 북한이다. 북한은 평균 1.08로 꼴찌인데 선거 절차와 다원성, 시민적 자유에서는 0점을 받았다. 북한보다 순위가 하나 위인 166위는 독재자 알아사드Bashar al-Assad가 지배하는 시리아였다.
그런데 이러한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대한민국은 두 가지 중요한 가치를 정체성으로 갖게 되었다. 하나는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반공 국가, 또 하나는 자유민주주의 국가다. 그런데 이 두 가지 가치는 그 자체로 절대 모순될 수 없다.
반공의 목적이 바로 자유민주주의 가치를 수호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왜 공산주의에 반대하느냐 하면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를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이때 목적은 자유민주주의가 되고, 수단은 반공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이후에 전개됐던 한국 정치는 반공을 목적으로 삼아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를 훼손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목적과 수단이 전도된 것이다.
우리나라 민주화의 역사는 이처럼 왜곡된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를 회복하고자 하는 저항의 역사였다.
이처럼 우리나라 개헌의 역사는 대부분 자유민주주의의 본질적 가치나 질서를 훼손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4ㆍ19 혁명은 기본적으로 도시 중심의 사건이었지만,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게 되면서 이제는 시골을 포함한 전국의 모든 사람들이 ‘나라님’이라도 법을 지키지 않고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면 저항해야 하는 것이고 물러나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서구의 낯선 자유민주주의 개념이 4ㆍ19 혁명을 거치면서 우리 안에 점차 내재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전의 다른 정권과 달리 제5공화국은 그들만의 독특한 특성 때문에 정의내리기 어렵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과 함께 당시 대다수 국민은 민주주의를 염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는 총칼로 유신을 연장했다. 여러 정치학자들이 제5공화국을 "잉여剩餘 군사정권" "태어나서는 안 될 정부" "유신 체제의 아류" "박정희 없는 유신 체제"라고 평가하는 것도 그 이유에서다.
6ㆍ29 선언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여야는 합의하에 대통령 직선제로 개헌하고, 이를 바탕으로 대통령 선거를 진행해 1988년 2월 평화적으로 정부를 이양하기로 했다. 또한 자유로운 출마와 공정한 경쟁이 보장되어 국민의 올바른 심판을 받을 수 있는 내용으로 대통령 선거법을 개정했다.
김영삼과 김대중은 지지세 확대와 정통성 확보를 위해 경쟁적으로 재야 정치 세력을 편입시키고자 애썼다. 예컨대 김근태는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초대 의장 출신으로 1985년 민주당에 입당했고, 노무현은 국본 부산본부 상임집행위원장 출신으로 1988년 통일민주당에 입당했다. 김문수는 서노련 지도위원 출신으로 1994년 민자당에 입당했다. 이재오 또한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조국통일위원회 위원장 출신으로 1994년 신한국당에 입당했다. 2000년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김대중 대통령은 당시 ‘젊은 피 수혈’이라는 명분하에 당시 386세대 학생운동권 출신을 영입했다. 송영길, 이인영, 우상호, 임종석, 오영식 의원 등이 이때 정치권에 들어오게 되었다.
두 번째 권력 공유는 이른바 DJP 연합에 의해 이뤄진다. 1997년 12월 18일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김대중과 김종필은 공동 정부 구성을 합의하고, 당선 후 총리직을 비롯해 거의 절반의 내각 각료직을 자민련에 배당하기로 한다. 실제로 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된 후 김종필은 국무총리가 되었고 자민련은 장관직의 절반을 차지했다.
촛불집회가 우리나라 대의민주주의의 취약함으로 보여주었는데, 국민의 대표자라는 국회의원들까지 의회 정치를 버리고 거리로 나간다는 것은 정말 심각한 문제다. 국회의원은 국회에서 문제를 해결해야 할 사람들이지 거리까지 나와서 일반인들처럼 문제를 제기해야 할 입장은 아니다.
과거 급속한 경제 발전이 놀랄 만큼 단기간에 이뤄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독재자 박정희와 경제 건설자 박정희가 같이 만났기 때문이다. 독재라는 것과 국가 주도의 경제 발전이라는 것은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다. 이러한 패러다임은 오늘날에는 결코 적용할 수도, 효과를 낼 수도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