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水中四維下上帝隆子於辰馬

삼수 가운데와 사방 아래 상제께서 아들을 진마에 내려보냈다.

先操鷄後搏鴨 此謂運滿一三甲

먼저 닭을 잡고 후에 오리를 칠 것인즉, 이를 일러 운수가 일삼갑에 찼다고 할 것이다.

暗登天明理地 遇子年中興大事

어둠이 하늘에 오르고 밝음이 땅을 다스릴 것이니, 자년이 되면 대사를 이루리라.

混跡沌名姓 混沌誰知愼興聖

종적과 성명이 혼돈을 이루나니, 혼돈 속에서 누가 진실로 성스러운 일을 일으킬 줄 알리요.

振法雷揮神電 於巳年中二龍見

법을 움직여 뇌성을 일으키고 신령한 번개가 번쩍이며, 사년 중에 두 마리의 용이 나타난다.

一則藏身靑木中 一則顯形黑金東

하나는 청목 속에 몸을 감추고, 다른 하나는 흑금의 동쪽에 모습을 나타내리.

智者見愚者盲 興雲注雨興人征

지혜로운 자는 볼 것이나 우매한 자는 보지 못할 것이니, 구름을 일으키고 비를 거느리며 사람들을 일으켜 정벌하리라.

或見盛或見衰 盛衰爲減惡塵滓

때로는 성하고 때로는 쇠할 것이니, 성쇠가 모두 악의 잔재를 없애기 위함이니라.

此一龍子三四遞代相承六甲子

이 한쪽 용의 아들 서넛이 서로 대를 바꾸어가며 여섯 갑자를 계승하리라.

此四維定滅丑 越海來隆須待酉

이 사유에서 기필코 축을 멸하고 바다를 건너와 융성하리니 반드시 유를 기다려라.

此文若見於明王 國泰人安帝永昌

이 글을 만약 현명한 임금에게 보이면 나라와 백성이 편안하고 제왕은 길이 번창하리.

吾之記凡一百四十七字

나의 기록은 모두 일백사십칠 자이니라.

"삼수중과 사유 아래 옥황상제가 진마에 아들을 내려보냈다는 것은 진한과 마한 땅에 아들을 내려보냈다는 뜻이 아니겠소? 또한 사년에 두 용이 나타나서 그 하나는 청목 속에 모습을 감추고 다른 하나는 흑금 동쪽에 모습을 나타냈다는 것은 청목은 곧 소나무니 송악을 일컫고, 흑금은 철을 이른 것이니 철성에 기반을 마련한다는 뜻입니다."

"특히나 이 글에 따르면 ‘축(丑)’이 멸하고, ‘유(酉)’가 일어난다고 했으니, 이는 정축년에 태어난 폐하가 멸하고, 정유년에 태어난 왕대인이 일어난다는 뜻 아니오이까? 이 내용을 폐하께서 아시면 당장 왕대인을 죽이려고 들 것인데, 이를 어쩌면 좋습니까?"

궁예는 처음부터 왕건을 죽일 계획이 없었다는 점이다. 그는 오히려 왕건을 더욱 확실하게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려고 했던 것 같다. 궁예는 왕건의 충성심을 시험했을 뿐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궁예의 행동은 왕건에게 위기감을 느끼게 하였고, 역모의 뜻을 품게 만들었다. 그러던 차에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이 왕건을 찾아와 모반을 도모하자고 하였다. 왕건은 망설이다가 부인 유씨의 설득에 힘입어 마침내 군사를 모아 왕성을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918년(무인년) 6월 병진일, 왕건은 드디어 왕으로 등극하여 국호를 고구려의 뒤를 잇는다는 의미에서 ‘고려(高麗)’라 하고 연호를 ‘천수(天授)’라고 하였다.

왕건은 고려를 건국한 지 4일 만에 반란이 일어나 죽을 고비를 넘긴다. 반란을 일으킨 사람은 마군장군 환선길이었다. 그는 왕건과 함께 고려 건국에 참여한 인물이었는데, 아내의 제의에 따라 왕권을 노리고 반란을 도모하게 된다.

그의 동생 환향식도 같은 혐의로 잡혀 죽었다.

이들 형제 이외에도 청주 출신들이 역모를 도모하기도 했다. 청주 출신 순군리 임춘길을 비롯하여 배총규, 강길아차, 경종 등이 반역을 도모하고 청주에 가서 반란을 일으킬 계획을 세우게 되는데, 이 계획이 복지겸의 정보망에 걸려 실패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왕건을 위협한 또 한 사람은 웅주(공주)성주 이흔암이었다. 이흔암은 왕건이 궁예를 내쫓고 왕이 되자 웅주성주를 포기하고 철원으로 상경한다. 이 때문에 웅주는 후백제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된다.

이들 외에도 명주(강릉)의 김순식, 명지성(경기도 포천)의 성달, 문소(경북 의성)의 홍술 등이 왕건의 휘하에 들기를 거부하였고, 웅성(공주)과 그 주변의 홍성, 서산 일대의 성주들이 대거 견훤에게 투항해버린다. 이로 인해 왕건은 한동안 고전을 면치 못한다.

대야성전투(927년 7월)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견훤의 20년 공든 탑

공산대첩(927년 9월)

-피눈물을 흘리며 달아나는 왕건

병산싸움(930년 1월)

-낙동강에 한을 뿌리고 돌아서는 견훤

임진해전(932년 9월)

-백제 수군, 개성을 안방처럼 드나들다

운주전투 (934년 9월)

-견훤, 양팔을 잃고 허탈감에 빠지다

비운의 혁명가 궁예(857~918년)

궁예는 신라인이니 성은 김씨이다. 아버지는 제47대 헌안왕이요, 어머니는 헌안왕의 후궁이었는데 그녀의 이름은 전하지 않는다. 혹자는 궁예가 48대 경문왕 응렴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그는 5월 5일 외가에서 태어났는데, 그때 지붕에 긴 무지개와 같은 흰빛이 있어서 위로는 하늘에 닿았다. 일관이 아뢰기를, "이 아이가 오(午)자가 거듭 들어 있는 날(重午)에 태어났고, 나면서 이가 있으며 또한 광염이 이상하였으니, 장래 나라에 이롭지 못할 듯합니다. 기르지 마셔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중사로 하여금 그 집에 가서 아이를 죽이도록 하였다.

불세출의 영웅 견훤(867~936년)

"견훤은 상주 가은현 사람이요, 함통(당나라 의종의 연호) 8년 정해(867년)에 났으니, 본래의 성은 이씨였는데, 뒤에 견(甄)을 성으로 삼았다. 그의 아버지는 아자개이니 농사로 생활을 하다가 광계(당나라 희종의 연호) 연간에 사불성(또는 사벌, 상주)에 자리를 잡고 자칭 장군이라고 하였다. 아들 넷이 있어 모두 세상에 이름이 알려졌는바, 특히 훤은 유달리 유명하고 지혜와 책략이 많았다."

친화력의 승부사 왕건(877~943년)

아버지 왕륭이 송악(개성)의 호족이며 궁예가 세운 태봉국 신하였다는 사실 이외에 왕건의 조상들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려진 이야기는 거의 없다. 다만 조선 문종대에 정인지 등에 의해 139권으로 편찬된 『고려사』의 ‘태조실록’에서 발췌한 3대 조상들의 추존 묘호만 전하고 있을 뿐이다.

승리의 화신 유금필(?~941년)

왕건이 통일을 이루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은 단연 유금필이다. 그는 왕건이 위기에 빠질 때마다 여지없이 난관을 타개하였고, 어떤 상황에서도 기필코 승리를 이끌어낸 고려 병사들의 수호신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유금필은 장령으로서의 전략을 가졌으며, 병사들에게는 늘 신망을 얻었다. 출정할 때마다 명령을 받으면 즉각 출발하였고, 집에 들러 잔 적도 없었다. 개선할 때면 태조는 반드시 마중을 나가 위로해주었으며, 시종일관 다른 장수들이 받지 못하는 총애와 대우를 해주었다."

그는 941년에 죽었으며, 시호는 충절이다. 성종 13년에는 태사 벼슬을 추증받았고, 태조 묘정에 배향되었다.

그에게는 긍, 관유, 경 등의 아들이 있었고, 태조의 제9비 동양원부인 유씨는 그의 딸이다.

5. 고려 개국공신 4인방

918년 6월, 왕건을 도와 고려 건국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사람은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 네 사람이다.

홍유(?~936년)

홍유(洪儒)는 경상도 의성 사람으로 초명은 술이다. 무장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언변과 논리가 뛰어났으며, 고려 건국 당시 왕건을 설득하여 왕으로 옹립한 장본인이다.

홍유에 대한 왕건의 믿음은 두터웠던 모양이다. 왕건은 홍유를 경상 북부지역을 안정시킬 수 있는 적임자라고 판단하고 의성의 호족장으로 대우하는 차원에서 그의 딸을 제26비로 맞아들인다. 그녀가 바로 의성부원군부인 홍씨로 왕건의 25번째 아들 의성부원대군의 어머니이다.

배현경(?~936년)

배현경(裵玄慶)은 경주 사람으로, 초명은 백옥삼이다. 그는 담력이 뛰어나고 무예가 출중하여 전장에서 많은 공을 세운 덕분에 궁예 휘하에 있을 때 일개 병졸에서 마군장군까지 오른 대단한 인물이다.

고려 건국 이후에는 개국 1등공신에 책록되었으며, 승진하여 벼슬이 정1품 대광에 이르렀다.

신숭겸(?~927년)

신숭겸(申崇謙)은 광해주(춘천) 사람으로 초명은 능산이며 본관은 평산이다. 그는 본래 전라도 곡성에서 태어났으나, 뒤에 춘천으로 옮겨 그곳에서 터전을 잡았다. 궁예가 후고구려를 건국하자 그 휘하에 들어갔으며, 신씨 성은 왕건에게서 받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복지겸 생몰년 미상

복지겸(卜智謙)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없다. 다만 그가 개국 당시 신숭겸, 홍유, 배현경 등과 함께 왕건을 옹립하여 개국 1등공신이 되었다는 것과, 면천 복씨의 시조라는 사실만 알려져 있다.

그의 초명은 사귀 또는 사괴라고 전하고 있으며, 고려 개국 이후에는 주로 감찰 일을 맡아보았던 것으로 보인다. 개국 초 왕건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반대하던 세력들을 일일이 색출하여 반란을 차단하는 역할을 했던 것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1. 태조 왕건과 민족 대화합의 결정체 ‘고려’

(877~943년, 재위기간:918년 6월~943년 5월, 25년)

2. 주름살 왕 혜종의 즉위와 계속되는 왕권 위협

(912~945년, 재위기간:943년 5월~945년 9월, 2년 4개월)

혜종은 태조와 장화왕후 오씨의 장남으로 912년 나주에서 출생했으며 이름은 무(武), 자는 승건(承乾)이다. 태조의 제1비 신혜왕후 유씨가 소생이 없었던 탓으로 아들을 보지 못했던 왕건은 나주의 미천한 집안 출신 오씨로부터 첫아이를 얻었으니, 그가 바로 혜종이다.

2. 정종의 짧은 치세와 서경 천도계획

(923~949년, 재위기간:945년 9월~949년 3월, 3년 6개월)

개경파를 완전히 제거하고 무력으로 왕위에 오른 정종은 즉위 초부터 개경 세력과 백성들의 강한 반발에 부딪히게 된다. 이 때문에 그는 서경으로 천도하기 위해 많은 인력을 강제 동원하여 평양에 왕성을 쌓기 시작한다. 하지만 천도 계획은 오히려 민심을 이반시키는 결과를 가져와 정종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안겨다준다.

1. 광종의 과감한 개혁작업과 호족들의 수난

(925~975년, 재위기간:949년 3월~975년 5월, 26년 2개월)

고려는 광종(光宗)의 즉위로 전환기를 맞이한다. 광종은 정종과 달리 집권 초기에는 무리한 정책을 삼가고 관망하는 자세를 보였지만 한동안의 모색기를 거친 다음에는 과감한 개혁정책으로 일관한다. 개혁의 초점은 왕권을 강화하고 호족의 힘을 약화시켜 중앙집권화를 확립하는 것이었다. 광종의 이러한 개혁정책은 당연히 호족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이 때문에 광종 집권기는 왕과 호족들 간의 힘싸움이 계속될 수밖에 없었다.

1. 경종의 화합정책과 호족 공신들의 재등장

(955~981년, 재위기간:975년 5월~981년 7월, 6년 2개월)

광종이 죽자 고려의 정국은 새로운 양상을 띠기 시작한다. 광종 대 말기부터 서서히 힘을 회복하던 호족들이 경종(景宗)의 즉위와 동시에 재등장하게 된 것이다. 조정의 요직을 차지한 호족들은 가장 먼저 광종 대의 수모를 앙갚음하기 위해 복수전을 펼쳤고, 그로 인해 고려 조정엔 또다시 피바람이 몰아친다.

경종은 955년 9월 광종과 대목왕후 황보씨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이름은 주(), 자는 장민(長民)이다.

1. 유학 정치이념의 실현자 성종과 중앙집권 체제의 완성

(960~997년, 재위기간:981년 7월~997년 10월, 16년 3개월)

유학적 소양을 두루 갖춘 성종(成宗)이 집권하면서 고려는 유교사회로 전환하기 위한 대대적인 체제 정비작업에 돌입한다. 충효사상을 강조하고 계급질서 확립에 주력함으로써 무반과 문반으로 이뤄진 양반사회와 농·공·상으로 이뤄진 평민사회, 노비와 천민으로 이뤄진 천민사회의 구분이 명확해진다.

논리로 80만 대군을 물리친 서희와 강동 6주

서희는 광종 대에 대광 내의령을 지낸 서필의 아들이다. 서필은 광종의 귀화인 중용정책에 반대했던 인물로 사치를 싫어하고 스스로 검소하여 몇 번에 걸쳐 왕의 사치를 경계하는 간언을 하기도 했다. 또한 광종이 귀화인들에게 지나친 대접을 하며 신하들의 집을 빼앗아 그들에게 나눠주자 이에 반발하여 스스로 자기 집을 내놓겠다고 하여 광종의 잘못된 행각을 중지시키기도 했다.

1. 동성연애자 목종의 나약한 정치와 강조의 반란

(980~1009년, 재위기간:997년 10월~1009년 2월, 11년 4개월)

18세의 어린 목종(穆宗)이 집권하자 왕권은 그의 모후 헌애왕후 차지가 된다. 유난히 정권욕이 강했던 헌애왕후는 김치양과 부부연을 맺고 그들의 소생으로 왕위를 이으려는 음모를 꾸미게 되고, 왕권을 상실한 목종은 도탄에 빠진 나머지 남색을 즐기며 정치를 외면한다. 이에 따라 조정이 일부 척족과 권신들의 손아귀에서 놀아나면서 고려는 점점 혼란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2. 수난을 먹고 자란 군주 현종과 고려의 국력 신장

(992~1031년, 재위기간:1009년 2월~1031년 5월, 22년 3개월)

현종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거란의 침입으로 몽진하는 신세가 된다. 하지만 이미 수난에 이골이 난 그는 계속되는 어려움을 극복하고 성종 대 이후 과거로 등용된 인재들과 함께 고려의 위상을 새롭게 정립하는 데 성공한다. 이로써 고려는 성종 이후 제2의 도약기를 맞이하게 된다.

현종은 992년 태조의 제5비 신성왕후 김씨 소생 안종 왕욱과 경종의 제4비 헌정왕후 황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태어나면서 어머니와 사별하고 성종에 의해 궁중에서 양육되었으며, 1003년(목종 6년)에 12세의 나이로 대량원군에 책봉되었다. 그리고 1009년 2월 목종이 강조에 의해 폐립되자 대신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이 때 그의 나이 18세였다.

4. 거란의 2차 침입과 불굴의 용장 양규

거란군이 압록강을 건너 제일 먼저 진출한 곳은 흥화진(평북 의주)이었다. 40만 대군으로 흥화진이 포위되자 흥화진 도순검사 양규가 낭중 정성과 부사 장작 등과 함께 방비책을 세우고 성을 고수한다.

순식간에 고려군은 포위되었고, 강조는 포로가 되어 거란왕에게 끌려가야 했다. 강조를 보자 거란왕은 자신의 신하가 되길 맹세하면 살려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강조는 "고려 사람으로 거란의 신하가 될 수 없다."고 거절했다. 그때 행영도통부사 이현운이 "두 눈으로 이미 새 세월을 보았거늘 어찌 일편단심 옛 산천만을 생각할 수 있으랴." 하면서 거란의 신하가 되길 청했다. 이에 강조가 "너는 고려인인데 어째서 그 따위 말을 하느냐?"고 꾸짖었다. 그 소리를 듣고 거란왕은 강조를 죽이라고 명령했다.

통주에서 강조가 이끌던 고려 정예군을 대파한 거란은 다시 흥화진으로 향했다. 그들은 강조의 편지를 위조하여 항복을 권유하였으나 양규는 "우리는 왕의 명령을 받고 이곳에 왔으므로 강조의 항복 지시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한마디로 거절했다.

구주의 별장 김숙흥이 중랑장 보량과 함께 적군을 기습하여 1만여 명을 죽였으며, 양규는 적의 주둔지인 무로대를 급습하여 적군 2천여 명을 죽이는 승리를 거두며 포로 3천여 명을 구출한다. 그 후에는 이수에서 적군 2천5백을 무찔렀으며, 여리첨에서도 1천여 명을 섬멸시켰다.

전쟁이 끝나자 현종은 양규의 전공을 포상하고 공부상서직을 추증하였으며, 그의 처 홍씨에게는 매년 벼 1백 석을 내리고 은율군군이라는 봉작을 주었다. 또한 아들 양대춘에게는 교서랑이라는 관직을 내렸다. 한편 별장 김숙흥에게는 장군직이 추증되고 그의 어머니에게 매년 곡식 50석이 내려졌다.

현종 10년에 양규와 김숙흥 두 사람에게 공히 공신록권이 발급되었고, 현종 15년에는 삼한후벽상공신 칭호가 내려졌다. 현종은 교서는 양규에 대해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병사들을 지휘하매 그 위엄은 사기를 앙등시켰고, 원수들을 추격하니 그 위력은 강토를 평안히 하였다. 정의의 칼이 빛나는 곳마다 만인이 다투어 도망쳤고, 6균(鈞)의 활을 당길 때마다 적병들이 모조리 투항했다. 이로써 성과 진이 보전되고 사기 또한 드높았다."

고려 역시 거란의 대대적인 침략을 예상하고 20만 군대를 조성하였다. 20만 군대의 상원수는 평장사 강감찬이 맡았다.

강감찬은 병력을 이끌고 흥화진으로 나아가 쇠가죽을 꿰어 흥화진 동쪽으로 흐르는 내를 막았다. 그리고 거란군이 건너기를 기다렸다가 물을 터뜨리고, 복병으로 하여금 흩어지는 거란군을 공격케 하여 크게 승리하였다.

흔히 구주대첩으로 불리는 이 싸움을 이끈 인물은 강감찬이었다. 그는 경주로부터 금주(시흥)로 이주해와 금주 호족으로 성장한 강여청의 5대손이다. 아버지는 고려 건국에 공로가 있어 삼한벽상공신에 오른 강궁진이며, 본관 금주에서 949년에 감찬을 낳았다. 자칫 무인으로 알기 쉬운 그는 성종 대에 과거에 장원급제한 문인이며 누차에 걸쳐 승진을 거듭한 끝에 예부시랑, 국자제주, 한림학사, 승지, 좌산기상시, 중추사 등을 역임하고 거란의 3차 침입 당시에는 정2품의 서경유수 겸 내사문하사 평장사에 올라 있었다.

1. 덕종의 짧은 치세와 오래 기억된 ‘덕(德)’

(1016~1034년, 재위기간:1031년 5월~1034년 9월, 3년 4개월)

현종 후기의 안정은 덕종(德宗) 대에도 이어진다. 16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를 이은 덕종은 나이답지 않은 너그러움과 섬세함을 바탕으로 명민한 정치를 펼쳐나가지만 병약한 탓으로 왕위에 오른 지 3년여 만에 생을 마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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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이족의 맏형 고구려를 생각함

아, 고구려!

언젠가 모 신문사가 주최한 전시회의 제목이다. 이 전시회를 보면서 ‘왜 한국인은 고구려를 떠올리기만 하면 가슴이 뛰는 걸까?’ 하고 반문해 보았다.

고구려가 가슴을 뛰게 하는 것은 고구려의 역사와 그 대지에 대한 그리움 때문일 것이다. 세계지도를 볼 때마다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 끝으로 눈길이 가고, 그 순간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안타까움 섞인 한숨을 쏟아낸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인다.

아, 고구려만 망하지 않았어도…….

역경의 세월을 이기며 고구려는 동명성왕 이후 28대에 걸쳐 700년을 지속했다. 그 기간 동안 중국 대륙에서는 서한, 신, 동한, 삼국의 위·촉·오, 진, 서진과 동진, 변방 5족의 16국, 남북조의 송·제·양·진·북위·동위·서위·북제·북주, 수, 당 등이 몰락과 성장을 거듭했다.

이렇듯 한나라에서 당나라에 이르기까지 수십 개나 되는 나라가 발전과 멸망을 거듭하는 가운데 고구려는 무려 700년 동안이나 북방의 맏형으로, 동이족의 버팀목으로 우뚝 서 있었던 것이다.

그 역사의 향기를 맡으며 다시 한 번 나지막하게 외쳐보길 바란다.

아, 고구려!

삼국사를 다룬 대표적 사서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동명성왕의 성은 고씨, 이름은 주몽(朱蒙, 추모 또는 중해)이며 해모수와 유화가 그의 부모라고 기록하고 있다.

『삼국유사』는 주몽의 아버지 해모수를 북부여의 시조라고 소개하고 있으며, 어머니 유화는 하백의 딸이라고 전하고 있다. 또한 해모수에게는 부루라는 아들이 있었으므로 주몽과 부루는 이복 형제라고 해석하고 있다. 이는 유화가 해모수의 후비이며, 주몽은 그의 서자라는 주장을 가능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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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백제는 두 차례에 걸친 위나라와의 전쟁을 통해 대륙 영토의 상당 부분을 회복하고, 국제 무대에서도 그 영유권을 인정받았던 것이다.

1. 무령왕의 출생과 즉위 과정

『삼국사기』는 무령왕을 동성왕의 차남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이는 옳지 않다. 동성왕은 20대 초반인 479년에 왕위에 올라, 약 22년간 재위하다가 40대 중반에 죽었다. 그런데 이 때 무령왕의 나이는 이미 40살이었다. 따라서 동성왕은 무령왕의 아버지일 수 없다.

아이는 축자국의 각라도라는 섬에서 태어났는데, 그 때문에 아이의 이름을 도(島, 일본어로 시마 또는 사마)라 하여 도군(島君)이라고 불렀다. 무령왕을 ‘사마왕’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 때문이다.

2. 대국화(大國化)를 이끌어낸 무령왕과 백제의 위상 강화

(서기 462~523년, 재위기간:서기 501년 11월~523년 5월, 21년 6개월)

무령(武寧)왕은 개로왕의 아들이며, 곤지의 양자이다. 462년 왜로 가는 도상인 각라도에서 태어났고, 이름은 융이며, 생시에는 주로 사마(斯麻)왕이라고 불렸다.

523년 5월, 그는 62세의 나이로 의욕에 가득 찼던 생을 접어야 했다. 백제의 대국화에 열정을 쏟던 그였지만, 세월을 이길 수는 없었던 것이다.

원래 ‘붕’은 황제의 죽음을 가리키고, ‘훙(薨)’은 왕의 죽음을 가리켰다. 따라서 무령왕에게 ‘붕’이란 표현을 썼다는 것은 백제인들이 자국의 왕을 중국의 황제와 동일시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젠 그런 시각에서 과감히 탈피해야 한다. 역사는 감정의 대상이 아니고, 학문의 대상이다. 역사를 감정의 골 속에 가둬두면 둘수록 우리의 역사는 점점 미궁에 빠져들 수밖에 없고, 그것은 결국 우리의 역사를 축소시키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임나에 대한 해석 문제는 이제 감정적 차원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래야만 임나의 역사가 우리의 역사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

1. 희대의 책략가 성왕의 불운과 추락하는 백제

(?~서기 554년, 재위기간:서기 523년 5월~554년 7월, 31년 2개월)

성(聖)왕은 무령왕의 아들이며, 이름은 명농이다.

1. 위덕왕의 생존 전략과 국제 정세의 급변

(서기 525~598년, 재위기간:서기 554년 7월~598년 12월, 44년 5개월)

위덕(威德)왕은 성왕의 장남이며, 이름은 창이다.

어쩌면 성왕과 위덕왕의 진짜 목적은 거기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즉, 불교를 지렛대로 삼아 왜국 조정에 친백제파 세력을 키우려 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백제가 왜에 불교를 전파한 행위는 정치적 목적에 따른 음모의 일환이라고도 볼 수 있다.

1. 늙은 혜왕의 왕위 찬탈과 짧은 재위

(?~서기 599년, 재위기간:서기 598년 12월~599년 12월, 1년)

혜(惠)왕은 성왕의 둘째 아들이며, 이름은 계(季)다. 그는 위덕왕과 함께 성왕을 보필하였으며, 왕자 시절부터 정치에 깊이 관여했다.

1. 왕권 강화를 위해 불제자를 자처한 법왕

(?~서기 600년, 재위기간:서기 599년 12월~600년 5월, 5개월)

법(法)왕은 혜왕의 맏아들이며, 이름은 선(宣) 또는 효순이다(『수서』는 그를 위덕왕의 아들이라고 했는데, 정황으로 봐서 혜왕의 아들이 맞을 것이다).

1. 한낱 서동에서 왕으로 등극한 무왕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무왕을 법왕의 아들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북사』와 『수서』는 위덕왕의 아들로 쓰고 있다.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따른 것이고, 『수서』는 『북사』의 기록을 따른 것이기에, 무왕의 혈통은 『삼국사기』와 『북사』의 내용 중에 어느 것을 옳게 보느냐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그런데 무왕은 여느 왕손과는 성장과정이 크게 달랐다. 대궐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것도 아니요, 제왕 수업을 받은 것도 아니다. 『삼국유사』는 그가 홀어머니 손에서 자랐으며, 마를 캐는 서동(薯童) 생활을 했다고 전한다.  이는 무왕의 왕위 승계 과정이결코 평탄치 않았다는 사실을 시사해준다.

2. 마지막 전성기를 구가한 무왕과 격변하는 국제 정세

(?~서기 641년, 재위기간:서기 600년 5월~641년 3월, 40년 10개월)

무왕은 위덕왕의 서자이며, 이름은 장(璋)이다. 600년 5월에 법왕이 죽자, 신하들에 의해 추대되어 왕위에 올랐다. 『삼국사기』는 그에 대해 풍채가 훌륭하고, 뜻이 호방하며, 기상이 걸출했다고 쓰고 있다.

1. 해동증자 의자왕과 백제의 패망

(?~서기 660년, 재위기간:서기 641년 3월~660년 7월, 19년 4개월)

의자(義慈)왕은 무왕의 맏아들로 무왕 재위 33년(632년)에 태자에 책봉되었으며, 641년 3월에 무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그는 부모에 대한 효심이 지극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남달라 중국의 현인증자(曾子)와 같다 하여 ‘해동증자’로 불리었다고 『삼국사기』는 전하고 있다.

성충은 부여씨로서 백제 왕족 출신이며, 문리에 깊고 병법에 밝아 가히 하늘이 낳은 재사라 할 만했다. 그는 어릴 때부터 꾀가 많기로 이름이 높았는데, 『조선상고사』에는 그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다음과 같은 일화 하나가 소개되고 있다.

낙랑군(樂浪郡)과 낙랑국(樂浪國, 동예)

백제사에 등장하는 낙랑은 대륙의 낙랑군과 한반도의 낙랑국으로 구분될 수 있다. 대륙의 낙랑군은 한나라 무제 때 설치한 4군의 하나이고, 한반도의 낙랑국은 흔히 동예(東濊)로 불리던 나라이다. 하지만 『삼국사기』 편자들은 대륙의 낙랑군과 한반도의 낙랑국을 혼동하여 서술했다. 이는 근본적으로 진수가 편찬한 『삼국지』의 왜곡된 역사 서술에서 기인한 것이다.

1. 다루왕의 조직 정비와 영토 확장

(?~서기 77년, 재위기간:서기 28년 2월~77년 9월, 49년 5개월)

다루(多婁)왕은 온조의 맏아들로 이름과 태어난 시기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서기 10년 2월에 태자에 책봉되어 도성과 지방의 군사에 관한 일을 맡다가 서기 28년 2월에 온조가 죽자 백제 제2대 왕에 즉위하였다.

1.기루왕의 유화정책과 끝없이 이어지는 천재지변

(?~서기 128년, 재위기간:서기 77년 9월~128년 11월, 51년 2개월)

기루(己婁)왕은 다루왕의 장남이며, 언제 출생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그가 다루왕 6년(서기 33년)에 태자에 책봉되었고, 그로부터 44년 뒤인 77년에 왕위에 올라 51년 동안 재위한 사실을 감안할 때, 태어난 뒤 곧바로 태자에 책봉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용은 원래 기린, 봉황, 거북과 더불어 사령이라 불려온 상상의 동물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용은 많은 전설과 신화를 남겼지만, 서양의 드래곤과 동양의 용은 근본적으로 그 의미가 달랐다. 서양의 드래곤은 인간이 물리쳐야 할 괴물로 인식되는 반면, 동양의 용은 인간이 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왕의 상징으로 쓸 만큼 신령스럽게 여겨졌다. 그런 탓에 서양에선 용을 물리친 자가 왕이 되고, 동양에선 용의 힘을 빌린 자가 왕이 되었다. 즉, 동양에서의 용은 곧 왕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용은 인충 중의 우두머리로서 그 모양은 다른 짐승들과 아홉 가지 비슷한 구석을 가졌다. 즉 머리는 낙타와, 뿔은 사슴과, 눈은 토끼와, 귀는 소와, 목덜미는 뱀과, 배는 큰 조개와, 비늘은 잉어와, 발톱은 매와, 주먹은 호랑이와 비슷하다."

1. 불안한 정치적 입지를 딛고 왕위에 오른 개루왕

(?~서기 166년, 재위기간:서기 128년 11월~166년 모월, 약 38년)

개루(蓋婁)왕은 기루왕의 아들이며, 출생 연도와 이름은 남아 있지 않다. 서기 128년 11월에 기루왕이 죽자, 왕위를 계승하였다. 왕위 계승 과정에 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나, 그가 기루왕의 장남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기루왕과 나이 차이가 크게 나는 것으로 보아 정실이 아닌 후실의 소생, 즉 서자일 것이다.

1. 초고왕의 영토 확장 노력과 신라와의 세력 다툼

(?~서기 214년, 재위기간:서기 166년 모월~214년 10월, 약 48년)

초고(草古)왕은 소고(素古)왕이라고도 불리며, 이름은 남아 있지 않다. 개루왕의 아들인 것은 분명하나 장자는 아니며, 서기 166년에 개루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1. 털북숭이 거인 구수왕의 20년 치세

(?~서기 234년, 재위기간:서기 214년 10월~234년 모월, 약 20년)

구수(仇首)왕은 귀수(貴須)라고도 불리며, 이름은 전해지지 않는다. 초고왕의 장남으로 214년 10월에 초고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구수왕은 신장이 7척이고, 풍채가 특이했다고 전한다.

1. 모래 반쪽 인생 사반왕

(생몰년 미상, 재위기간:서기 234~234년)

사반(沙半)왕은 구수왕의 맏아들이다. 구수왕이 234년에 죽자, 그가 왕위를 이었다. 하지만 그는 왕위에 오래 있지 못했다. 그의 묘호 사반은 ‘모래 반쪽’이라는 뜻인데, 그의 재위기간은 그야말로 모래 반쪽에 비유될 정도로 짧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듯하다.

1. 고이왕의 왕위 찬탈과 왕실의 분란

사반왕을 내쫓고 왕위를 찬탈한 고이(古)왕에 대해 『삼국사기』는 개루왕의 둘째 아들이자, 초고왕의 동복 아우라고 기술하고 있다. 하지만 이 기록은 신빙성이 없다.

2. 고이왕의 대륙 진출과 백제의 위상 정립

(?~서기 286년, 재위기간:서기 234년 모월~286년 11월, 약 52년)

고이왕은 개루왕의 방계 후손이며, 이름과 출생 관련 기사는 남아 있지 않다. 234년에 구수왕이 죽고 어린 사반왕이 왕위에 오르자, 그를 쫓아내고 왕위에 올랐다.

1. 대륙백제의 영토 확장에 주력한 책계왕

(?~서기 298년, 재위기간:서기 286년 11월~298년 9월, 11년 10개월)

책계(責稽)왕은 청계(靑稽)라고도 불리었으며, 언제 태어났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는 고이왕의 아들이기는 하나 장남은 아니었으며, 체격이 장대하고 의지와 기품이 걸출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1. 분서왕의 짧은 치세와 안타까운 죽음

(?~서기 304년, 재위기간:서기 298년 9월~304년 10월, 6년 1개월)

분서(汾西)왕은 책계왕의 맏아들이다. 언제 태어났는지는 분명치 않으며, 298년 9월에 책계왕이 전사하자 왕위에 올랐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풍채가 걸출하여 책계왕의 총애를 받은 것으로 전한다.

1. 비류왕의 한성 장악과 백제의 분열

고이왕 대 이후 백제는 대륙 정책을 가속화하여 산동 지역의 대방을 중심으로 영토 확장에 주력했다. 고이왕의 대륙 정책은 그의 아들 책계왕과 손자 분서왕에게로 이어져 대륙에서의 백제의 힘은 한층 강화되었다. 고이왕이 대륙 진출에 지나치게 집착한 것은 무엇보다도 왕위를 찬탈한 부도덕한 행위를 영토 확장과 국력 강화를 통해 상쇄시키려는 의도가 컸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책계왕이 대륙에서 전사하고, 분서왕마저 낙랑의 자객에 의해 살해됨으로써 고이왕 대에 시작된 대륙 정책은 힘을 잃고 만다.

2. 분단 상황에서 이어진 비류왕의 40년 치세

(?~서기 344년, 재위기간:서기 304년 11월~344년 10월, 39년 11개월)

비류왕은 구수왕의 방계 혈통으로 보이며, 성격이 너그럽고 인자하여 사람을 아낄 줄 알았다고 전한다. 그는 원래 평민이었다가 분서왕 재위시에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였으며, 분서왕이 죽자 무력을 앞세워 한성을 장악하고 왕위에 올랐다.

1. 베일에 가려진 계왕의 즉위와 죽음

(?~서기 346년, 재위기간:서기 344년 10월~346년 9월, 1년 11개월)

계(契, 또는 설, 결, 글로도 발음됨)왕은 분서왕의 장남이다. 그는 천성이 강직하고 용맹스러웠으며, 무술이 뛰어났던 것으로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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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불운한 어린 군주 구이신왕과 팔수태후의 난정(亂政)

(서기 405~427년, 재위기간:서기 420년 3월~427년 12월, 7년 9개월)

구이신(久尒辛)왕은 전지왕의 맏아들이며, 팔수왕비 소생이다.

1. 비유왕의 전방위 외교와 나제동맹

(?~서기 455년, 재위기간:서기 427년 12월~455년 9월, 27년 9개월)

비유(毗有)왕은 전지왕의 둘째 아들이며, 왕후 해씨 소생이다.

곤지(?~477년)
곤지(昆支)는 비유왕의 셋째 아들이며, 누구 소생인지는 분명치 않다. 그에 대한 기록은 『일본서기』 웅략천황 5년(462년, 개로왕 8년) 4월 기사에 처음 보이는데, 이 기록에 따르면 그는 개로왕에 의해 왜로 보내진 것으로 되어 있다

1. 개로왕의 파란만장한 삶과 한성시대의 종말

(?~서기 475년, 재위기간:서기 455년 9월~475년 9월, 20년)

개로(蓋鹵)왕은 비유왕의 맏아들로 근개루왕이라고도 불리었으며, 이름은 경사(慶司)이다.

1. 위기의 백제와 살얼음판 위의 문주왕

(?~서기 477년, 재위기간:서기 475년 9월~477년 9월, 2년)

문주(文周, 혹은 汶洲)왕은 비유왕의 둘째 아들이며, 개로왕의 아우이다[『삼국사기』는 그가 개로왕 대에 재상격인 상좌평의 직위에 있었다고 했는데, 이는 그가 태자나 왕자가 아니었음을 방증한다.

1. 세 근(斤)짜리 어린 왕 삼근왕의 서글픈 치세

(서기 465~479년, 재위기간:서기 477년 9월~479년 11월, 2년 2개월)

삼근(三斤, 혹은 임걸(壬乞)이라 하고, 『일본서기』엔 문근(文斤)으로 기록되어 있음)왕은 문주왕의 맏아들로 465년에 태어났다.

1. 왜에서 건너와 왕위에 오르는 모대

삼근왕이 죽은 뒤에 왕위에 오른 사람은 곤지의 아들 모대(牟大)였다. 『삼국사기』는 모대가 어떻게 해서 왕위에 오르게 되었는지 전혀 기록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일본서기』 웅략천황 조에 그의 즉위와 관련한 기사가 보인다.

(?~서기 501년, 재위기간:서기 479년 11월~501년 11월, 22년)

동성(東城)왕은 비유왕의 아들이자 개로왕과 문주왕의 동생인 곤지의 차남이며, 이름은 모대(혹은 마모)이다. 462년에 어린 나이로 아버지 곤지를 따라 왜에 갔으며, 478년 4월에 백제 조정의 요청을 받은 왜왕 웅략천황에 의해 백제 왕에 천거되어 귀국했다.

『삼국사기』는 이 때의 일을 동성왕 10년(488년) 기사에 ‘위나라가 우리를 침공하였으나 우리 군사가 그들을 물리쳤다.’는 짧은 문장으로 처리하고 있다. 중국 대륙 북방을 장악하고 있던 위나라가 바다 건너 한반도에 위치한 백제를 침략했다는 기록은 『삼국사기』 편자들을 당혹스럽게 했을 것이다. 바다 건너에 있는 위나라가 백제를 침략했다면, 당연히 배를 타고 공격해와야 하는데, 전혀 그런 내용이 없었던 것이다.

위나라 오랑캐가 기병 수십만을 일으켜 백제를 공격하였는데, 그 경계 안으로 들어가니, 모대가 장군 사법명, 찬수류, 해례곤, 목간나를 보내 군대를 통솔시켜, 오랑캐의 군사를 기습하여 크게 물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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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로왕이 근초고왕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고, 근구수왕의 이름을 들먹였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이 내용은 371년의 평양성 공략을 주도했던 사람은 근초고왕이 아니라 당시 태자였던 근구수왕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이렇듯 『삼국사기』는 근초고왕과 근구수왕이 모두 외척에게 정사를 맡긴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렇다면 왕은 그들에게 정사를 맡겨두고 무엇을 했단 말인가?

이 의문은 한반도 백제와 대륙백제로 나뉜 당시 백제의 영토 관리 체제를 이해해야만 풀린다.

한반도 백제는 당시 외척으로서 힘을 행사하고 있던 진씨 일족이 정사를 맡아 다스리고, 대륙백제는 왕이 직접 다스리는 형태를 이해해야만 『삼국사기』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즉, 근구수왕도 왕위에 오른 뒤로는 근초고왕이 그랬듯이 한반도 백제는 외척인 진씨 일족에게 일임하고, 자신은 대륙백제의 정사를 주관했을 것이라는 뜻이다.

1. 침류왕의 짧은 치세와 불교의 전파

(?~서기 385년, 재위기간:서기 384년 4월~385년 11월, 1년 7개월)

침류(枕流)왕은 근구수왕의 장남이며, 어머니는 아이부인이다. 근구수왕이 384년 4월에 죽자, 왕위에 올랐다.

침류왕 대에 주목할 만한 사건이 있다면 인도 승려 마라난타에 의한 불교 전파이다. 마라난타가 백제에 도착한 것은 384년 9월이었다. 침류왕이 그를 궁중으로 불러들여 크게 우대하고 공경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데, 이는 마라난타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라 침류왕의 초청으로 왔다는 뜻이다.

1. 진사왕의 불행한 죽음과 백제의 위기

(?~서기 392년, 재위기간:서기 385년 11월~392년 11월, 7년)

진사(辰斯)왕은 근구수왕의 둘째 아들이며, 침류왕의 아우이다.

관미성은 대륙백제의 황하 이북 지역 최대 거점이었다. 때문에 관미성의 상실은 대륙백제의 힘이 황하 이남의 산동 지역으로 축소되었다는 의미였다(‘대륙백제의 위축과 관미성’ 참조).

이 한수 문제는 삼국사 전체의 구도를 바꿔놓을 수 있는 중요한 변수가 될 수 있다. 때문에 한수에 대한 새로운 접근은 곧 삼국사 자체를 다르게 해석하는 열쇠가 될 것이다.

『삼국사기』에 한수(漢水)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백제본기」 온조 편의 백제 도읍지와 관련된 부분이다. 여기서 이 책의 편찬자들은 한수를 지금의 한강으로 보도록 기술하고 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대륙백제에 대한 그들의 무지에서 비롯되었다고 판단된다.

능비문에서는 지금의 한강을 ‘아리수’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한수를 모두 한강으로 단정할 수 없는 근거라고 할 수 있다. 『삼국사기』 편찬자들은 대륙백제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중국의 하수(河水, 황하)를 모두 한반도의 한강으로 착각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광개토왕이 392년에 점령한 ‘한수’ 북쪽의 11개 성은 모두 하수(황하) 북쪽에 위치한 백제의 요서군에 속한 땅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때 그의 수군 4만이 상륙한 곳이 아리수(한강) 이북이었다는 것은 396년 당시에도 한강 이북이 백제의 땅이었다는 말이 된다. 이는 392년에 광개토왕이 장악한 한수 이북의 10개 성이 한강 이북에 위치하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한다. 만약 392년에 광개토왕이 한수 이북을 장악했다면 굳이 396년에 한강 이북을 재차 공격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1. 굴욕의 왕 아신왕과 백제의 위축

(?~서기 405년, 재위기간:서기 392년 11월~405년 9월, 12년 10개월)

아신(阿莘)왕은 침류왕의 맏아들이며, 진사왕의 조카이다. 『일본서기』에는 아화왕(阿花王)이라고 적혀 있으며, 『삼국사기』에는 ‘아방(阿芳)’이라고도 불렀다고 하였고, 『양서』에는 이름이 ‘수(須)’라고 되어 있다.

왜에 전해진 백제의 문화는 비단 칠지도와 같은 상징물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백제가 일본사에 큰 의미로 남는 것은 백제의 발달된 선진문화와 학문의 전래였다. 거기에는 백제인으로서 일본에 건너가 학문과 기술을 전함으로써 일본인의 영원한 스승으로 남은 사람들의 역할이 컸다.

3. 아신왕과 광개토왕의 지속되는 라이벌전

아신왕과 광개토왕은 둘 다 391년에 정권을 장악하고 392년에 왕위에 올랐다. 당시 광개토왕은 18세, 아신왕은 이십대 중반의 나이로 모두 혈기 왕성한 때였다. 이들은 젊은 혈기를 바탕으로 동북아시아의 패자를 자처했고, 그것은 결국 전쟁으로 이어진다. 선제 공격을 가한 쪽은 광개토왕이었다.

2. 온건주의자 전지왕과 해씨 세력의 득세

(?~서기 420년, 재위기간:서기 405년 9월~420년 3월, 14년 6개월)

전지(腆支)왕은 아신왕의 맏아들로 『양서』에는 이름이 영(映)으로 기록되어 있고, 『일본서기』에는 직지왕(直支王)으로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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