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듣건대, 옛날 걸주가 주색에 빠져 황음을 그칠 줄 몰랐습니다. 이로 인하여 정사가 문란하고 국가가 망하였습니다. 앞서 가는 수레의 바퀴가 엎어지면 뒤 수레는 마땅히 이를 경계하여야 합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대왕은 허물을 고치고 자신을 새롭게 바꿔 국가의 수명을 영구히 하소서."
당시 중국 당나라는 안녹산의 난으로 전국이 혼란에 빠져 있었다. 이순은 당을 앞서 가는 수레에 비유하여 경덕왕에게 충고를 한 것이다.
능유(?~831년)
능유는 흥덕왕의 장남이며 정목왕후 김씨 소생이다.
그의 출생과 성장에 관한 기록은 없다. 다만 『삼국사기』에 831년 2월에 왕명을 받아 승려 아홉 명을 이끌고 당나라에 진봉사로 갔다가 7월에 돌아오는 길에 바다에 빠져 익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1. 희강왕의 짧은 영화와 김명의 반란
(?~서기 838년, 재위기간:서기 836년 12월~838년 정월, 1년 1개월)
희강(僖康)왕은 원성왕의 손자인 이찬 김헌정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포도부인 박씨이다. 이름은 제륭 또는 제옹이라고 하며, 헌덕왕과 함께 애장을 제거하는 데 가담하여 권좌에 올랐다.
1. 민애왕의 왕위 찬탈과 처참한 말로
(?~서기 839년, 재위기간:서기 838년 정월~839년 윤 정월, 1년 1개월)
민애(閔哀)왕은 원성왕의 손자 대아찬 충공의 아들이며, 귀보부인 박씨 소생이다. 이름은 명이며 헌덕왕 대로부터 여러 벼슬을 거쳐 희강왕을 보좌한 덕으로 상대등에 임명되었다가, 838년 정월에 시중 이홍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왕위를 찬탈했다.
"옛 말에 정의를 보고도 실천하지 않는 자는 용기가 없는 자라고 했으니, 내 비록 용렬하나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장보고는 군사 5천을 동원하여 친구인 정년에게 주며 말했다.
1. 악몽에 시달리는 신무왕과 등에 난 종기
(?~서기 839년, 재위기간:서기 839년 윤 정월~7월, 6개월)
신무(神武)왕은 원성왕의 손자 균정의 아들이며 진교부인 박씨 소생으로 이름은 우징이다.
사실, 그 무렵에 신무왕은 이미 중병을 앓고 있었다. 그래서 즉위한 지 몇 달 만에 앓아 누웠는데, 원인은 종기였다. 묘하게도 종기가 난 자리는 꿈에 이홍이 쏜 화살에 맞은 곳이었다.
종기는 순식간에 크게 퍼졌고, 얼마 되지 않아 신무왕은 명을 달리했으니, 이때가 즉위년 7월이었다.
1. 불안감에 시달리는 문성왕과 해상왕 장보고의 죽음
(?~서기 857년, 재위기간:서기 839년 7월~857년 9월, 18년 2개월)
문성(文聖)왕은 신무왕의 장남이며, 정종왕후 소생으로 이름은 경응이다.
헌안왕의 이 부자연스런 선택의 배경에는 모종의 거래가 도사리고 있을 법하다. 「헌안왕실록」에서 이미 밝혔듯이 이는 헌안왕의 왕위 승계와 관련이 있다. 즉, 헌안왕은 제륭파의 도움으로 왕위에 올랐고, 그 결탁의 대가로 제륭의 자손을 사위로 삼아 그에게 왕위를 계승하게 했던 것이다. 이는 오랫동안 지속되던 제륭파와 균정파의 왕위 계승 다툼의 종결을 의미한다.
『삼국유사』에는 경문왕이 왕위에 오른 뒤로 계속해서 귀가 커져 당나귀 귀처럼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그 비밀을 알고 있던 사람은 왕의 두건을 만드는 기술자 한 사람뿐이었다. 그는 평생 그 비밀을 지키다가 죽기 직전에 도림사 대나무 숲에 들어가 아무도 없는 데서 이렇게 소리쳤다고 한다.
"우리 임금 귀는 당나귀 귀 같네!"
그 후 바람만 불면 대숲에서 그 소리가 들려왔다고 한다. 경문왕은 그 소리가 듣기 싫어 그곳의 대나무를 모두 베어 버리고 산수유를 심었다고 한다. 그 뒤로 바람이 불면 "우리 임금 귀는 크다네." 하는 소리만 났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경문왕이 귀는 크지만 백성의 소리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을 비꼬아서 누군가가 고의로 지어서 유포한 듯하다.
1. 덕치를 펼친 헌강왕과 오랜만에 찾아든 태평성대
(?~서기 886년, 재위기간:서기 875년 9월~886년 7월, 10년 10개월)
헌강(憲康)왕은 경문왕의 맏아들이며, 문의왕후 소생으로 이름은 정이다. 경문왕 재위 6년인 866년에 태자에 책봉되었고, 875년 9월에 경문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삼국유사』는 헌강왕 시절의 인물인 처용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동해왕의 일곱 아들 중 하나로 묘사된 것으로 봐서 처용은 지방 호족의 자제였던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처용의 아내는 대단한 미인이었다. 그녀가 너무나 아름다웠기 때문에 역병 귀신조차 밤마다 사람으로 변하여 그녀를 취하였다.
동경 밝은 달에 밤 이슥히 놀고 다니다가
들어와 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고나.
둘은 내 것인데, 둘은 누구 것인고.
본디 내 것이지만, 빼앗긴 걸 어쩌리.
그러나 처용가의 내용 중에 서라벌을 ‘동경’으로 묘사한 것을 볼 때, 이 노래는 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서라벌을 동경이라 부르기 시작한 것은 고려 태조 이후이므로, 아마 처용가도 처용의 설화를 기반으로 고려 때에 만들어졌을 것이다.
이는 처용이 "본디 내 것이지만, 빼앗긴 걸 어쩌리."라고 하는 한탄조의 시구로 노래를 끝내는 부분에서도 확인된다. 처용으로서는 도저히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는 상대가 그의 아내를 취했던 것이다. 그 상대는 역병 귀신이 아니라 바로 헌강왕이었을 것이다.
1. 타락한 진성왕과 무너지는 천년왕국 신라
(?~서기 897년, 재위기간:서기 887년 7월~897년 6월, 9년 11개월)
진성(眞聖)왕은 경문왕의 딸이며, 문의왕후 소생으로 이름은 만이다. 헌강왕이 후계자 없이 죽자 정강왕이 왕위를 이었으나, 그 또한 재위 1년 만에 죽었다. 정강왕의 유언에 따라 887년 7월에 그녀가 왕위에 올랐으니, 선덕과 진덕에 이어 세 번째 여왕이다.
설상가상으로 진성왕은 색욕에 눈이 멀어 정사를 뒷전으로 밀어놓았다.
우공이 통곡하니 삼 년이나 가물었고,
추연이 슬퍼하니 오월에도 서리 내렸네.
지금 나의 깊은 시름은 옛일과 같건만,
하늘은 말도 없이 창창하기만 하구나.
급기야 889년에 사벌에서 민란이 일어났다.
사벌의 농민 봉기를 주도한 인물은 원종, 애노, 아자개 등이었다.
사벌의 아자개, 죽주(안성)의 기훤, 청주의 청길, 북원(원주)의 양길, 중원(충주)의 원회 등이 그 대표적인 세력이었다. 이들은 대개 지방의 호족들로 농민들을 선동하여 난을 일으키고, 그 지역의 관아를 장악하는 과정을 통해 군벌로 성장했기 때문에, 조정에서는 그들을 모두 도적이라 일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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