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은 사흘을 거푸 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흩날리는 눈발을 오래도록 깊이 바라보다가 눈길을 거두었다. 보리차를 컵에 따르는데 전화 벨이 울렸다. "여보시요, 평화상회죠?"
황토 | 조정래
"여기 ××경찰섭니다." 수화기의 크고 컬컬한 목소리는 다급한 그녀의 말을 밀어붙였다. "박동익의 조난 사고를 알립니다. 보호자는 곧 본서로 출두하십쇼. ××경찰섭니다."
"지금 몇 신디유. 아줌마 어디 아프셔유?" "잔소리 말고 어서 서둘러라."
"죽기밖에 더하겠니?" 복실이 말이었고, 셋은 이내 시무룩한 표정이 되어 각기 일손을 놀렸다. 어디선지 들려오는 철 늦은 쓰르라미 소리가 바람결에 애틋하고 쓸쓸했다.
"무서워? 그래, 점예 너 같은 애들은 특히 조심해야 돼. 그 예쁜 얼굴을 지키는 주인이 없어봐라. 당장 매가 병아리를 채듯 휘이익……." "얘 시끄러워. 무서워 죽겠다."
힘이 약해서 빼앗긴 것이라고 했다. 그럼 왜 힘이 약해진 것인가. 나라를 다스린 임금이며 양반들은 무엇을 어찌 했길래 나라를 뺏길 정도로 힘이 약한 나라가 되게 했다는 것인가. 그 답을 알고 싶었다. 오래전부터 속 시원히 그 내막을 알고 싶었지만 가르쳐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동양 전체를 집어먹고 싶은 야욕을 가졌던 이토 히로부미는 ‘내지인 3백만만 이주시키면 한반도땅은 영원히 우리의 것이 될 수 있다’고 공언했다. 그래서 그는 안중근 의사의 총을 맞을 수밖에 없었다.
매——, 큰이모가 언뜻 병아리를 채가는 매로 둔갑하는 것 같았다. 순간 점례는 아들을 꼭 끌어안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누르고 있었다. "점예야, 부엌에 좀 나가봐라. 이모 시장하시겠다."
그러면……, 머리를 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그러나 너무나 늦은 깨달음이었다. 밤늦게까지 모여 앉아 무엇을 했던가를 이제 겨우 알게 된 것이었다.
"피는 못 속여. 애비의 피를 그대로 받은 거지. 허나 애비야 조국 광복을 위해 싸우다가 떳떳이 죽었지만 저놈은 반대로 나라를 망치는 선봉장이 되어 저꼴로 날뛰니, 그 피는 그 핀데 잘못 풀린 거지. 뭐 노동자, 농민의 해방? 너나없이 고루 잘사는 지상천국을 건설하는 공산주의? 가당찮다, 녀석." 이모부는 마른 입술에 침을 발라가며 이런 말로 분을 터뜨렸다.
"이모부나 이모는 날 배은망덕한 놈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거야. 하지만 그분들이 가난한 사람들 괴롭히며 한평생 호의호식하고 살아온 걸 생각하면 그나마 살아 있다는 걸 고마워해야지.
나는 그동안 철공장에서 일한 대가로 먹고 살았지 그냥 아무 일도 안 하고 놀면서 월급이나 받아먹는 못된 짓은 하지 않았어. 그러니까 이모네한테 은혜를 입은 일은 하나도 없는 거지. 그런데도 이모부나 이모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거야.
그게 다 남 부리며 편코 배부르게 먹고 살아온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뻔뻔스러운 생각이지. 그런 생각 하루빨리 고쳐먹지 않으면 그분들은 결국 새 세상에서 살아갈 가망이 없는 사람들인 거지."
점례는 세상 돌아가는 것에 차츰 관심을 쓰기 시작했다. 세상의 변화가 너무 희한하기도 했고, 새 세상에서 남편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은근히 동하기도 했던 것이다.
"흥, 꼴좋게 됐구나. 그따위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떵떵거리던 놈도 달아날 때는 별수 없구나. 제 처자식 버리고 도망갈 꼬락서니에 뭐 인민 해방을 해? 덜떨어진 자식 같으니라구. 그래, 제 놈 좋을 때는 부위원장이고, 도망치면서는 처자식을 나한테 떠맡겨? 인민위원회 부위원장 처자식 숨겨줬다가 큰 복 받게 생겼구나. 암, 큰 복 받고말고."
──참 네 팔자도 기구하고 험하구나. 원, 얼굴값을 하느라고 그러는지 묏자리를 잘못 써서 그러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이번 전쟁은 미군들이 다 알아서 하는 것이고, 미군 빽은 곧 하느님의 빽이나 똑같다고 이미 소문이 다 퍼져 있었다. 그래서 ‘미군은 하나님과 동창생’이라는 얄궂은 말까지 생겨 나 있었다.
세상에 떠도는 3대 거짓말이란 말은 괜히 생겨난 것이 아니었다. 처녀 시집가기 싫다는 말, 노인들 빨리 죽고 싶다는 말, 장사 밑지고 판다는 말.
누군가가 가져온 양주를 서너 잔씩 마시고는 <홍도야 우지 마라>고 <굳세어라 금순아>고를 불러대다가 서로 부둥켜안고 울음바다가 되어버렸다.
도로 38선 그 근방에서 끝난 그 전쟁은 이긴 쪽도 진 쪽도 없는, 왜 싸웠는지 모를 이상하고도 어이없는 전쟁이었다.
피라는 것은 분명 단순히 빨간색의 액체만이 아니었다. 거기에는 서로를 알아보고, 서로를 끌어당기는 인연의 마술적 힘이 들어 있는 것이었다.
사람이 서로 차등 없이 공평하게 사는 세상을 만들고자 했던 남편의 꿈이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 잘못된 것은 남북 정치인들이 정면으로 맞서다가 일으킨 전쟁이었다. 남편은 그 전쟁의 불길에 휩쓸려 어디로 갔는지 자취가 없었다. 한 가지 희망이 있다면 남편이 북쪽에라도 살아 있었으면 하는 것이었다. 살아만 있다면 그 언젠가……, 그 언젠가……, 그날이 오면 만나게 될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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