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반 태생인 유인석은 벼슬을 하지 않았다. 어떤 경우 하지 않음과 하지 못함은 같다. 그가 벼슬한 적 없음은 하지 못한 것일 터였다. 시골에서 공부만 하던 선비. 그에게 호좌의진 대장 노릇은 구국충정의 탈을 쓴 벼슬인 것이다. 그가 오래전에 과거 급제하여 현재 관직에 있었다면 과연 의병을 일으켰을지, 알 수 없다.

무슨 수를 쓰든지, 필요하다면 본대를 뒤집어서라도 김백선을 구하겠다고 꼬박 하루를 달려왔지만 어쩐지 이런 결과를 짐작했던 것 같다. 10년 전 평양 진위대가 가망 없었듯 이 호좌의진도 앞날이 없는 거라고. 앞날이 있는 부대에서는 선봉장을 잡아 가두는 따위의 짓을 할 리 없다고.

내를 처음 만났을 때 어땠는지. 첫날밤은 어찌 치렀는지. 어느 길목 주막 주모 이야기가 나오는가 하면 제 고향 동네에 사는 과부에 대해서도 말했다. 사내들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여인들은 하나같이 곱고 귀엽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어릴 때는 몰랐는데 나이 들어서 돌아왔더니 좀 많더라고요. 내가 떠나 있던 사이에 좀 늘기도 했나 봐요. 그게 전부 무남독녀인 내 거였고요. 아버지가 생전에 전부 내 이름으로 이전해주셨어요. 그러니까 당신이 장가를 잘 든 거죠. 귀엽고 총명한 아들에다 인자한 어머니에다, 부자에 어여쁘기까지 한 아내. 당신, 진짜 땡잡은 거예요. 이럴 줄 몰랐죠?"

눈 내린 벌판을 갈 때, 모름지기 어지러이 걷지 말 일이다. 오늘 내가 간 자취를 따라 뒷사람들 발길이 이어지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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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이 쓴 『열하일기』를 읽었다. 박지원의 눈에 비친 청국과 조선은 재미있고 자유롭고 아름다웠다. 침략하지 않고 침략당하지 않은 상태로 접하는 타국 문물은 신기하고 유쾌할 수 있음을 알게 했다.

책 속에 광활한 세상이 들어 있었다. 평탄한 시절이라면 책만 읽고 살아도 좋을 성싶었다. 누구도 평탄하게 살 수 없는 게 작금 조선 상황인지라 내 할 일이 있는 곳으로, 전장으로 돌아가야 할 때였다.

그 자리에서 범도는 예전 충의계 계수系首가 갑신정변을 주도한 김옥균이었으며 그가 작년에 상해에서 피살됐다는 사실을 들었다. 김옥균은 일본으로 망명했으나 내쫓겼다. 그는 일본과 청국과 조선이 쫓는 삼중 도망자가 되어 상해로 피했다. 그곳에서 조선 내각의 민씨 일파가 보낸 홍종우에 의해 피살됐다. 홍종우는 그 공으로 제주도 재판소 소장이 되어 내려가 있었다.

고조는 경래시오, 증조는 장양이시라, 조부는 문호시고, 아비는 준식이요, 어미는 황가 아희이고, 나는 홍가 범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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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 부대의 전투 기조는 단순했다. 일본 무기를 뺏어 일본 것들을 물리친다는 것.

"우리는 작금 조선에서 일어나고 있는 많은 의병 중 한 부대입니다. 혹 들으셨는지 모르지만 우리 부대는 한 달 전, 10월 10일 아침에 철령에서 전투를 개시했습니다. 철령에서 일본군 열둘을 사살하고 무기를 탈취했지요. 오늘 전투는 우리 부대의 두 번째 전투이고, 저는 이 의병부대 대장인 홍범도입니다. 의병대장으로서 제가 여러분께 드릴 말씀이 있는데, 들어주시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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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요. 내가 잡아볼까 하는 호시기는 조선을 향해 총질 해댄다는 왜국 종자들입니다. 왜국 것들은 물론이고 청국 것들, 미국 것들, 영국 것들, 독일 것들, 로서아 것들, 불란서 것들. 어느 족속이건 조선을 뜯어먹으려 드는 것들은 죄 호시기일 테니까 되는 대로 잡아볼까 생각하는 거죠. 몇 마리나 잡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요.”
말을 하고 나니 범도는 비로소 여기 앉아 있던 까닭을 알겠다. 결국 그거였다. 호시기 잡기. 호시기에 쫓기듯 살아왔던 지난날에서 돌아서 호시기를 쫓는 다른 세상으로 들어가기.


“그랬대요. 그 백성들, 그 중들이, 나라에서 무슨 은혜를 받았겠어요? 은혜는커녕 관헌들이 자행하는 탐학과 주구誅求에 시달리며 살죠. 그럼에도 조선이 내가 사는 우리나라이기 때문에 의병으로, 승병으로 일어난 거라고요. 우리끼리는 죽네 사네 하며 싸우기도 하지만 외세에 침탈당할 때는 한 몸인 듯이 외세에 대적해야 한다고요. 그게 백성이라고요. 그렇지 못하면 우리 백성들끼리 싸울 일조차 없어져버린다는 말씀이셨죠.”



나는 홍범도 | 송은일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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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새벽 동트기 전에 여기 이르러 내리 있는데, 형씨가 처음 지나가는 사람입니다. 여태 빈속으로 있다가 고기를 데운 참에, 먹을 복 있는 형씨가 나타난 거죠. 아, 나는 홍범도입니다. 형씨 성명은 어찌 됩니까?"
"나는 김수협입니다. 무진년(1868년)생이고요."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나. 무엇을 위해 여기 왔나. 범도는 그 생각을 하고 있었다. 평양 진위대에서 우영장 유등한테 대섰다가 영창에 갇혔다. 내일이면 참수형에 처해지기로 된 밤에 좌영장 주홍석이 탈출을 도와줬다.

그놈을 죽였다. 신계사 의성 대사와 지담 스님을 만나 글을 깨치고 몸을 단련했다. 모지 스님 이옥영을 만나 사랑하고 혼인했으나 그이를 놓쳤다. 그이를 놓치게 했던 덕원 건달 여섯 놈을 찾아가 복수했다.

"나는 호랑이 밥이 될 것인가, 호랑이를 잡을 것인가! 그 궁리 하고 있어요. 호랑이한테 나 여기 있다고 알려주느라 고기 냄새 피우는 거고요. 생고기 구울 때 풍기는 과격한 냄새가 나지 않아서인지, 호랑이가 기척이 없네요."

"드물게 썩 용감한 자, 혹은 드물게 아주 우둔한 자만이 모든 위험을 무릅쓴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나는 용감한가, 우둔한가! 용감함과 우둔함 사이에 앉아서 호시기를 불러다 앞에 두고 계속 그 말을 생각하고 있었어요."

"맞아요. 내가 잡아볼까 하는 호시기는 조선을 향해 총질 해댄다는 왜국 종자들입니다. 왜국 것들은 물론이고 청국 것들, 미국 것들, 영국 것들, 독일 것들, 로서아 것들, 불란서 것들. 어느 족속이건 조선을 뜯어먹으려 드는 것들은 죄 호시기일 테니까 되는 대로 잡아볼까 생각하는 거죠. 몇 마리나 잡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요."
말을 하고 나니 범도는 비로소 여기 앉아 있던 까닭을 알겠다. 결국 그거였다. 호시기 잡기. 호시기에 쫓기듯 살아왔던 지난날에서 돌아서 호시기를 쫓는 다른 세상으로 들어가기.

"그랬대요. 그 백성들, 그 중들이, 나라에서 무슨 은혜를 받았겠어요? 은혜는커녕 관헌들이 자행하는 탐학과 주구誅求에 시달리며 살죠. 그럼에도 조선이 내가 사는 우리나라이기 때문에 의병으로, 승병으로 일어난 거라고요. 우리끼리는 죽네 사네 하며 싸우기도 하지만 외세에 침탈당할 때는 한 몸인 듯이 외세에 대적해야 한다고요. 그게 백성이라고요. 그렇지 못하면 우리 백성들끼리 싸울 일조차 없어져버린다는 말씀이셨죠."

"아니, 예전에 스승께서 하신 말씀이 떠올라 물어봤소. 이러셨소. 자신이 운이 나빠서 뭔가에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실상 힘이 없는 것이다. 스스로 갖춘 실력이 없거나 낮은 거다. 실력 갖춘 이는 운을 탓하지 않는다. 운에 의존하는 사람은 실력을 닦지도 않는다. 너는 네가 운이 나쁘다고 생각해본 적 있느냐?"

"이제부터 우리는 총을 쏘아야 하므로 손을 보배처럼 여겨야 해. 손가락은 곱게 놔두고 대신, 결의를 다지기 위한 말을 한마디씩 하는 게 어떨까?"
"뭐라고 하지?"
"좀 거창하게, 조선을 지키는 우리, 져도 이긴다! 어때?"

"져도 이긴다? 나는 진다는 말이 싫은데? 조선을 지키는 우리, 끝내, 끝끝내 이긴다! 이렇게 어때?"

"조선을 지키는 우리, 끝내, 끝끝내 이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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