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도 초기에 15만 명 정도였던 에도의 인구는 18세기 전반에 100만 명을 넘어선 것으로 추산된다. 통계 방법에 따라차이는 있지만, 당시 인구 100만의 도시는 베이징, 런던 등 세계적으로 손에 꼽을 정도였다.
흔히들 이야기하는 ‘808개의 마을을 거느린 대에도‘ 라는 말은 4대 쇼군 이에쓰나의 시대에 한 마을(가옥 20~30채 정도의 마을 공동체)당한 사람만 영업이 허가된 이발사가 808 명 있었다는 데서 유래한다. 그 후에도 에도는 확장을 거듭하여19세기에는 1,700개의 마을이 있었다고 한다.
지진과 전쟁 속에서 지켜낸 번영 에도 시대의 막바지에 해당하는 1868년 7월, 에도는 ‘도쿄‘로 명칭을 바꾼다. 문자대로 교토의 동쪽에 있는 도읍‘이라는 의미이다. 같은 해 10월에는 그때까지 교토에 있었던 천황의 거처가 에도성으로 옮겨지고 도쿄는 명실상부하게 일본의 수도가 된다. 이때 신정부의 수장인 오쿠보 도시미치는 오사카에 수도를 두는 것도 고려했지만, 정무 청사도갖추어져 있는 도쿄로 옮기기로 결정이 되었다.
이렇게 부흥을 이룩한 도쿄는 쇼와 시대에 다시 비극을 겪는다. 제2차 세계대전의 도쿄 대공습이다. 1944년 11월 시작된 미군 비행기의 공중 폭격은 106회에 이르렀으며, 이듬해 3월의 대공습에서는 10만 명 이상의 도민이 목숨을 잃었다.
패전 후 도쿄도의 부흥은 간토 대지진 때와 마찬가지로 구획 정리, 새로운 간선도로의 부설, 그리고 녹지대의 조성이 기본 방침이었다. 그러나 연합군 최고 사령부(GHQ)가 주도하는 일본 부흥 계획에 저촉되는 사례도 있어 사업 규모는 어쩔수 없이 축소되었다. 그 결과 건설이 예정되어 있던 폭 100미터 규모의 도로는 실현되지 못했고, 번화가를 비롯한 도내각 지역에는 다시 목조 가옥의 밀집 지대가 생겨났다.
도시계획의 관점에서는 다양한 문제를 안고 있었지만, 전후 일본과 도쿄의 경제 규모는 세제 개혁과 한국전쟁의 특수로기적이라고 불릴 만한 성장을 이루어 낸다. 1964년 도쿄 올림픽은 하나의 종착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020년에는 두 번째 하계올림픽이 개최되는 세계 도시 도쿄. 그 번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COVID-19로 인해 2021년여름에 개최됨).
09서구의 근대 문화를 수용하고발신한 문화의 입구 요코하마横浜 • 해당 지역 가나가와현 • 도시 인구 약 376만 명(2020년 기준) 도쿄만 연안의 항구 중에서도 수심이 깊어 대형 선박이 정박하기에 알맞고 대도시인 도쿄와 가까운 요코하마는 일본에서도 손꼽히는 무역항이 되었다. 가마쿠라와도 인접한 입지이기 때문에 요코하마 일대의 항만은 중세부터 이용되어 막부 말기의 개항 이후에 본격적으로 발전한다. 개항 후에는 외국인 거류지가 조성되고, 국가 프로젝트인 생사수출을 배경으로 철도가 부설되고 항구가 보수됨으로써 첨단 문화의 입구가 된 항구도시의 뿌리를 살펴보자.
꾸준한 발전으로 ‘일본 최초‘가 된 항구붉은 벽돌 창고가 늘어선 요코하마는 서양풍의 세련된 항구도시로 알려져 있다. 막부 말기에 개항한 이래 잇달아 서양의 물자가 유입된 요코하마는 첨단 문화를 수용하는 동시에 발신하는 중심지가 되었다. 일간지 간행, 은행 설립, 철도와전화 부설, 맥주 양조장과 서양풍 호텔 건설 등 다수의 분야에서 ‘일본 최초‘의 땅이 되었다.
열강의 요구를 물리치고 개항 1853년 6월, 미국의 동인도 함대 제독 페리가 우라가(현재의 요코스카시)에 내항하여 막부에 개국을 요구한다. 이듬해 페리가 다시 찾아와서 현재의 나카구에 있는 요코하마무라에서 미일 화친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름은 만 쪽으로 가로로 긴 곳이 툭 튀어나온 지라는지금은 매립으로 완전히 지형이 바뀌었지만, 요코하마무라형에서 유래했다고 전한다.
10. 유구한 역사와 문학의 향기가스며든 천혜의 요새 가마쿠라鎌倉 • 해당 지역 가나가와현 • 도시 인구 약 17만 명(2020년 기준) 수많은 명소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고도 가마쿠라. 도시의 상징인 쓰루가오카 하치만구는 미나모토 가문의 수호신을 모신 신사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이 오래된 신사를 중심으로 가마쿠라 거리를 만들었다. 입지 면에서는 바다와 산으로 둘러싸인 천연 요새이고, 산의 표면을 도려내 뚫은 길은 가마쿠라 막부에 반기를 든 닛타 요시사다의 대군을 괴롭혔다. 센고쿠 시대에 접어들면서 가마쿠라는 차츰 쇠퇴기를 맞이한다. 근세에는 관광지로서 각광을 받았으며 메이지 이후에는 많은 문화인이 옮겨와 살았다.
가마쿠라의 매력을 세상에 널리 알린 미토 고몬 일본 국내뿐 아니라 해외여행자 사이에서도 인기가 높은 가마쿠라. 대표적인 관광지인 쓰루가오카 하치만구와 고도쿠인에 있는 가마쿠라 대불은 둘다 1,000년 가까운 역사가 있지만, 끊임없이 참배객으로 북적였던 것은 아니었다. 무로마치 후기의 가마쿠라는농업과 어업만으로 생계를 꾸리던 한촌이었다. 가마쿠라가 지금 같은 관광 도시가 될 수 있었던 계기를 만든 것은미토 고몬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미토번의 번주 도쿠가와 미쓰쿠니이다. 미쓰쿠니는 가마쿠라와 에노시마를 방문하고, 그것을 바탕으로240개가 넘는 명소와 경승지를 정리하여 『신편 가마쿠라 지리지라는 서적을 펴내도록 했다. 이 문헌은 지금으로 보자면 여행 가이드북으로, 가마쿠라는 에도 중기 이후 많은 관광객이 찾아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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