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100년에 걸친센고쿠 호조 가문의 왕궁
오다와라 小田原

• 해당 지역 가나가와현
• 도시 인구 약 19만 명(2020년 기준)
간토를 대표하는 명성 오다와라성은 옛날에는 규모가 작은 성이었다. 간토로 내려간 호조 소운은 모락으로 이 성을 빼앗고 간토 제패의 근거지로 삼았다. 그 자손들도 군사와 민정 양쪽에서 수완을 발휘하여 오다와라는 선진적인 도시가 된다.
에도 서쪽의 현관이라고도 할 수 있는 오다와라는 에도 막부의 군사적 요충지였다. 성 밑은 도카이도에서도 손꼽히는 역참 마을로서 번영을 구가했는데, 여행자들은 여기서 여장을 꾸려 험준한 하코네산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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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 초기에 15만 명 정도였던 에도의 인구는 18세기 전반에 100만 명을 넘어선 것으로 추산된다. 통계 방법에 따라차이는 있지만, 당시 인구 100만의 도시는 베이징, 런던 등 세계적으로 손에 꼽을 정도였다.

흔히들 이야기하는 ‘808개의 마을을 거느린 대에도‘ 라는 말은 4대 쇼군 이에쓰나의 시대에 한 마을(가옥 20~30채 정도의 마을 공동체)당한 사람만 영업이 허가된 이발사가 808 명 있었다는 데서 유래한다. 그 후에도 에도는 확장을 거듭하여19세기에는 1,700개의 마을이 있었다고 한다.

지진과 전쟁 속에서 지켜낸 번영
에도 시대의 막바지에 해당하는 1868년 7월, 에도는 ‘도쿄‘로 명칭을 바꾼다. 문자대로 교토의 동쪽에 있는 도읍‘이라는 의미이다. 같은 해 10월에는 그때까지 교토에 있었던 천황의 거처가 에도성으로 옮겨지고 도쿄는 명실상부하게 일본의 수도가 된다. 이때 신정부의 수장인 오쿠보 도시미치는 오사카에 수도를 두는 것도 고려했지만, 정무 청사도갖추어져 있는 도쿄로 옮기기로 결정이 되었다.

이렇게 부흥을 이룩한 도쿄는 쇼와 시대에 다시 비극을 겪는다. 제2차 세계대전의 도쿄 대공습이다. 1944년 11월 시작된 미군 비행기의 공중 폭격은 106회에 이르렀으며, 이듬해 3월의 대공습에서는 10만 명 이상의 도민이 목숨을 잃었다.

패전 후 도쿄도의 부흥은 간토 대지진 때와 마찬가지로 구획 정리, 새로운 간선도로의 부설, 그리고 녹지대의 조성이 기본 방침이었다. 그러나 연합군 최고 사령부(GHQ)가 주도하는 일본 부흥 계획에 저촉되는 사례도 있어 사업 규모는 어쩔수 없이 축소되었다. 그 결과 건설이 예정되어 있던 폭 100미터 규모의 도로는 실현되지 못했고, 번화가를 비롯한 도내각 지역에는 다시 목조 가옥의 밀집 지대가 생겨났다.

도시계획의 관점에서는 다양한 문제를 안고 있었지만, 전후 일본과 도쿄의 경제 규모는 세제 개혁과 한국전쟁의 특수로기적이라고 불릴 만한 성장을 이루어 낸다. 1964년 도쿄 올림픽은 하나의 종착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020년에는 두 번째 하계올림픽이 개최되는 세계 도시 도쿄. 그 번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COVID-19로 인해 2021년여름에 개최됨).

09서구의 근대 문화를 수용하고발신한 문화의 입구
요코하마横浜
• 해당 지역 가나가와현
• 도시 인구 약 376만 명(2020년 기준)
도쿄만 연안의 항구 중에서도 수심이 깊어 대형 선박이 정박하기에 알맞고 대도시인 도쿄와 가까운 요코하마는 일본에서도 손꼽히는 무역항이 되었다.
가마쿠라와도 인접한 입지이기 때문에 요코하마 일대의 항만은 중세부터 이용되어 막부 말기의 개항 이후에 본격적으로 발전한다.
개항 후에는 외국인 거류지가 조성되고, 국가 프로젝트인 생사수출을 배경으로 철도가 부설되고 항구가 보수됨으로써 첨단 문화의 입구가 된 항구도시의 뿌리를 살펴보자.

꾸준한 발전으로 ‘일본 최초‘가 된 항구붉은 벽돌 창고가 늘어선 요코하마는 서양풍의 세련된 항구도시로 알려져 있다. 막부 말기에 개항한 이래 잇달아 서양의 물자가 유입된 요코하마는 첨단 문화를 수용하는 동시에 발신하는 중심지가 되었다. 일간지 간행, 은행 설립, 철도와전화 부설, 맥주 양조장과 서양풍 호텔 건설 등 다수의 분야에서 ‘일본 최초‘의 땅이 되었다.

열강의 요구를 물리치고 개항
1853년 6월, 미국의 동인도 함대 제독 페리가 우라가(현재의 요코스카시)에 내항하여 막부에 개국을 요구한다. 이듬해 페리가 다시 찾아와서 현재의 나카구에 있는 요코하마무라에서 미일 화친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름은 만 쪽으로 가로로 긴 곳이 툭 튀어나온 지라는지금은 매립으로 완전히 지형이 바뀌었지만, 요코하마무라형에서 유래했다고 전한다.

10. 유구한 역사와 문학의 향기가스며든 천혜의 요새
가마쿠라鎌倉
• 해당 지역 가나가와현
• 도시 인구 약 17만 명(2020년 기준)
수많은 명소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고도 가마쿠라. 도시의 상징인 쓰루가오카 하치만구는 미나모토 가문의 수호신을 모신 신사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이 오래된 신사를 중심으로 가마쿠라 거리를 만들었다. 입지 면에서는 바다와 산으로 둘러싸인 천연 요새이고, 산의 표면을 도려내 뚫은 길은 가마쿠라 막부에 반기를 든 닛타 요시사다의 대군을 괴롭혔다.
센고쿠 시대에 접어들면서 가마쿠라는 차츰 쇠퇴기를 맞이한다. 근세에는 관광지로서 각광을 받았으며 메이지 이후에는 많은 문화인이 옮겨와 살았다.

가마쿠라의 매력을 세상에 널리 알린 미토 고몬
일본 국내뿐 아니라 해외여행자 사이에서도 인기가 높은 가마쿠라. 대표적인 관광지인 쓰루가오카 하치만구와 고도쿠인에 있는 가마쿠라 대불은 둘다 1,000년 가까운 역사가 있지만, 끊임없이 참배객으로 북적였던 것은 아니었다. 무로마치 후기의 가마쿠라는농업과 어업만으로 생계를 꾸리던 한촌이었다.
가마쿠라가 지금 같은 관광 도시가 될 수 있었던 계기를 만든 것은미토 고몬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미토번의 번주 도쿠가와 미쓰쿠니이다. 미쓰쿠니는 가마쿠라와 에노시마를 방문하고, 그것을 바탕으로240개가 넘는 명소와 경승지를 정리하여 『신편 가마쿠라 지리지라는 서적을 펴내도록 했다. 이 문헌은 지금으로 보자면 여행 가이드북으로, 가마쿠라는 에도 중기 이후 많은 관광객이 찾아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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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라는 지명은 ‘이리에入江(바다가 육지로 파고든 작고 좁은 만이나 강어귀를 가리킨다 - 옮긴이)의 입구’를 의미한다. 당시 에도의 해안선은 현재와 크게 달라서 에도마에지마江戶前島(현재의 도쿄역, 유라쿠초, 신바시 일대)라는 반도가 돌출되어 있었다. 이 반도의 서쪽에 있었던 것이 히비야이리에日比谷入江이고, 해안선은 에도성의 바로 동남쪽까지 닿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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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 통일의 종착지이자 새로운 권력의 탄생지

문헌상 처음으로 ‘에도江戸’라는 이름이 등장하는 것은 가마쿠라 시대의 역사서 『아즈마카가미吾妻鏡』이다. 헤이안 말기, 간무 헤이시桓武平氏(간무 천황의 자손으로 다이라라는 성씨를 받은 가계 - 옮긴이)의 혈통을 잇는 지치부 시게쓰나의 아들 시게쓰구는 무사시(현재의 도쿄도와 사이타마현)의 에도고江戸鄕로 이주하여 에도 씨를 자처했다. 주거로 사용했던 저택은 훗날 에도성 혼마루, 현재의 고쿄 히가시교엔皇居東御苑(일본 왕실의 부속 정원 - 옮긴이)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에도 가문은 가마쿠라 막부의 멸망 후 쇠퇴하여 에도고를 떠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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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아이즈와카마쓰시는 인구가 12만 3,000명 정도로 아이즈 지방의 중심 도시로서 기능하고 있다. 농업이 번성한 지역이면서 동시에 풍부한 관광 자원을 활용한 관광 도시의 면모도 갖추고 있다. 시의 동쪽에는 일본에서 네 번째로 큰 호수인 이나와시로호가 있으며 중심에는 아이즈번의 거성이었던 와카마쓰성(쓰루가성), 그리고 히가시야마 온천 등이 있다.

헤이안 시대의 아이즈와카마쓰는 교토와 나라, 가마쿠라, 히라이즈미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불교의 도시이다. 반다이산 자락에는 아이즈 불교의 중심인 거대한 사찰 ‘에니치지’가 건립되었다. 아이즈와카마쓰시 내에는 에니치지의 말사인 엔메이지 지조도地蔵堂가 있다.

07정치·경제·문화, 세 개의 얼굴을 지닌 요충지
우쓰노미야 宇都宮
○ 해당 지역 도치기현
○ 도시 인구 약 51만 명(2020년 기준)
신사 마을, 성하 마을, 역참 마을, 에도 시대의 우쓰노미야는 다양한 특색을 가진 도시였다. 거기에는 중세부터 이 땅을 지배했던 우쓰노미아 가문이 깊이 관련되어 있다.도쇼구(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시신이 안치된 그를 신으로 모시는 신사-옮긴이)가 있는 닛코에 가깝고,  간도 북부에서 에도의 방어 거점에 해당한다는 점도우쓰노미야가 발전하는 요인이 되었다.
그리고 메이지 시대, 새롭게 육군 사단이 주둔함으로써 군사 도시로서의 면모도 더해졌다.

칼을 찬 승려, 우쓰노미야의 두 얼굴
도치기현의 현청 소재지로서 기타칸토北関東 (간토 지방의 북부와 중북부 지역을 아우르는 이름으로 이바라키현 도치기현, 군마현의 세현을 가리킨다. 여기에 사이타마현이 포함될 때도 있다 - 옮긴이)의 중심 도시인 우쓰노미야는 인구 약 52만 명의 중핵시(인구 30만 이상으로 도시 행정에 관한 일반 사무를 독자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일본 지방 자치법상의시-옮긴이)이다.  간토평야의 북단, 기누강좌안의 높은 지대에 있으며, 시가지 북쪽으로는 우쓰노미야 구릉이 돌출되어 있다. 그 구릉을 끼고 흐르는 다가와강과 가마가와강이 시내에서 합류한다.
우쓰노미야 구릉의 남단에는 후타아라야마 신사가 있고, 그 남쪽 평지에는 우쓰노미야성 터가 있다. 두 유적 모두 우쓰노미야의 역사를 상징하는 장소이다.

08천하를 통일한 이에야스의피땀눈물의 도시
도쿄東京
○ 해당 지역 도쿄도
○ 도시 인구 약 1,400만명(2020년 기준)
일찍이 에도로 불렸던 일본의 수도 도쿄 동설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막부를 열기 전에는 가난하고 쇠락한 마을이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많은 상가가늘어선 항만도시였다고 한다.
그 후 에도는 이에야스의 노력으로 국정의 중심이 된다. 애초부터 많은 인구를 거느렸던 것은 아니었지만 대대적으로 만의 연안을 대립하고 하천의 물줄기를바꾸는 공사로 시가지를 넓혀 세계에서 손꼽히는 대도시로 다시 태어난다. 그 배경에는 막부의 정성뿐 아니라 선진적인 인프라 정비가 있었다.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에도로 간 이에야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천하통일로 마무리된 오다와라 전투 때의 일이다. 히데요시는 이시가키산에서 함락 직전의 오다와라성을 내려다보면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이렇게 말했다.
"호조 가문을 멸하고 나면 간토 8주에도 시대 간토 8개국의 총칭으로 현재의 간토 지방에 해당한다 - 옮긴이)를 그대에게 줄까 하네.
그때는 오다와라도, 가마쿠라도 아닌 에도에 본성을 짓는 것이 좋겠지."
물론 히데요시가 아무 대가 없이 간토 8개국을 주었던 것은 아니다. 미카와(현재의 아이치현 동부)와 도토미(현재의 시즈오카현 서부) 등 도쿠가와 가문의 영지 5개국을 가져가면서 영지를 다시 배치한 것이다. 도쿠가와의 녹봉 자체는 늘었지만 조상 대대로 소유했던 땅을 내놓는 데 가신들은 난색을 보였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숙고한 끝에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히데요시는 왜 간도를 이에야스에게 주었을까. 당시 에도성 주변 마을은 띠로 지붕을 엮은 민가 100호 정도의 규모였다고 한다. 에도성도 성문 앞에 배의 널조각을 늘어놓아 계단으로 삼은 변변찮은 소성이었다고, 막부의 정사인 ‘도쿠가와 실기德記』에 적혀 있다.  즉 히데요시는 실력자인 도쿠가와 가문을 쇠락한 벽지에 몰아넣음으로써 도요토미 가문의천하를 반석처럼 더욱 견고하게 만들려고 획책했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통설이다.
그러나 후세의 연구에서는 실제의 에도가 적어도 스산하고 가난한 한촌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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