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은 넓다. 평수로 약 2억 평 (605제곱킬로미터)이나 된다(참고로 제주도는 약 6억 평). 조선왕조의 수도 한양이 왕조의 멸망 이후 근현대에도 수도로서의 지위를 유지하게 된 것은 한양도성 밖으로 팽창할 수 있는 넓은들판을 갖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는 아테네, 로마 같은 고대도시들과는사뭇 다른 지형적 이점이다. 특히 한강 남쪽의 드넓은 강남 지역으로 인구가 대이동하면서 서울의 넓이와 깊이가 크게 확장되었다. - P5
이런 이유로 서울 사대문 밖의 역사문화 유적은 대부분 양주군·광주군·고양군·양천현 등 옛 조선시대 경기도 군현(郡縣)이 그대로 편입된것이어서 ‘서울적(的)‘이지 않은 것이 많다. 그 대표적인 예가 유네스코세계유산에 등재된 조선시대 왕릉이다. 신덕왕후의 정릉, 태종의 헌릉, 순조의 인릉, 성종의 선릉, 중종의 정릉, 문정왕후의 태릉, 명종의 강릉, 경종의 의릉 등 여덟 능이 서울에 있고, 여기에 서오릉의 다섯 능과 서삼릉의 세 능 등 여덟 능이 서울 근교인 경기도 고양시에, 동구릉의 아홉 능이 구리시에 있다. 이 왕릉들의 답사기를 쓰자면 미상불 별도의 한 권이 될 것이다 - P5
성북동은 여느 유적지와 다른 근현대사 답사처다. 이곳은 근대사회로이행하는 과정에서 새로 형성된 동네로 사대문 안의 북촌, 서촌과는 또다른 독특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본래 한양도성 밖 10리 지역은 ‘성저십리(城底十里)‘라고 해서 사람이 살지 못하게 했고, ‘선잠단‘ 등을 제외하고는 자연녹지 그대로 남겨두었다. 그러다 18세기 영조 때 둔전(屯田)이설치되면서 비로소 사람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이때 둔전 주민들이비단 표백과 메주 생산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집 주위에 복숭아를 많이심어 이곳은 ‘북둔도화(北屯桃花)‘라는 명승의 이름을 얻었다. 조선 말기가 되면 ‘성북동 별서‘ 등 많은 권세가들의 별장이 성북동 골짜기를 차지했다. - P7
1930년대 들어 경성(서울)의 인구가 폭증하면서 일제가 택지 개발을적극 추진할 때 성북동은 신흥 주택지로 각광을 받게 되었는데 이때 많은 문화예술인들이 들어와 살았다. 만해한용운의 심우장, 상허 이태준의 수연산방, 근원 김용준의 노시산방, 간송 전형필의 북단장, 인곡 배정국의 승설암, 조지훈의 방우산장, 구보 박태원의 싸리울타리 초가집, 수화 김환기의 수향산방 등이 있었다. - P7
한국전쟁 이후에도 시인 김광섭, 작곡가 윤이상, 화가 김기창과 서세옥, 박물관장 최순우 등이 들어와 살면서 전국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근현대 문화예술의 거리‘를 형성했다. 거기에다 백석 시인의 영원한 사랑 김자야의 요정 대원각이 법정 스님의 길상사로 다시 태어나고, 간송미술관과 함께 한국가구박물관, 우리옛돌박물관, 성북구립미술관이 들어서면서 품격 높은 문화예술의 동네가 되었다. - P7
‘망우리 별곡‘은 망우리 공동묘지 답사기다. 망우리 공동묘지 역시1930년대에 일제가 주택지를 확보하기 위하여 경성 근교 이태원, 미아리, 노고산, 신사동(은평구 고택골) 등에 있던 기존의 공동묘지들을 멀리이장시키기 위하여 마련한 공간이다. 1933년부터 시작되어 1973년까지40년간 4만 7,700여 기가 들어섰다. 1973년에 매장이 종료되고 이후 이장과 폐묘만 허용하면서 현재 약 7천 기의 무덤이 남아 있다. - P8
여기에는 만해 한용운, 위창 오세창, 호암 문일평, 소파 방정환, 죽산조봉암, 설산 장덕수, 종두법의 지석영, 독립운동가 유상규, 소설가 계용묵, 화가 이중섭과 이인성, 조각가 권진규, 시인 박인환, 가수 차중락 등많은 역사문화 인물들의 묘가 산재해 있다.이태원 공동묘지를 이장할때 무연고 묘지의 시신을 화장하여 합동으로 모신 ‘이태원묘지 무연분묘 합장묘‘에는 유관순 열사의 넋이 들어 있기도 하다. - P8
망우리 공동묘지는 폐장된 이후 ‘망우묘지공원‘으로 명칭을 바꾸었고, 1990년대 들어서는 이곳을 역사문화 위인들을 기리는 묘원공원으로가꾸려는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마침내 만해 한용운 선생의 묘가 국가등록문화재 제519호로 지정되고, 독립유공자 여덟 분의 묘가 국가등록문화재 제691호(1~8)로 일괄 지정되었다. 금년(2022) 4월 방문자 센터 ‘중랑망우공간‘이 개관하면서 이름도 ‘망우역사문화공원‘으로 바꾸었다. - P8
이번에 서울 답사기 두 권을 펴냄으로써 서울편은 4권으로 완결되었고,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국내편은 총 12권이 되었다. 돌이켜보건대『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권이 나온 때가 1993년이었으니 그로부터 장장 30년이 지나도록 끊이지 않고 이어가 이제 12권째를 펴냈는데도 아직 수많은 답사처를 남겨놓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이제 이 답사기 시리즈를 마감할 준비를 하고 있다. 당장 여기에서 끝내지 못하는 것은 경주남산, 남도의 산사, 경상도의 가야고분 등 시리즈 전체로 보았을 때 빠져서는 안 되는 유적들을 그대로 남겨두고 마침표를 찍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에 다음 답사기는 ‘국토박물관 순례‘라는 제목으로 그간 다루지않은 유적들을 시대순으로 펴내고 이 시리즈를 끝맺을 계획이다. 첫 번째 꼭지는 ‘전곡리구석기시대 유적‘이고, 마지막 장은 ‘독도‘가 될 것이다. 그때 가서 독자 여러분께 마지막 인사를 드리겠다.
2022년 10월 유홍준 - P9
서울 성북동 성북동은 한양도성 북쪽 성곽과 맞붙어 있는 산동네로 북악산(백악산)구준봉에서 발원한 성북천의 산자락에 성격을 전혀 달리하는 집들이 무리 지어 들어서 있다. 타동네 사람들은 성북동이라고 하면 번듯한 외국대사관저와 높직한 축대 위의 대저택들이 들어서 있는 부촌을 먼저 떠올릴 것이다. 드라마에서 부잣집 사모님이 전화를 걸 때 "여기는 성북동인데요"라는 대사가 나오곤 한다. 그러나 이 집들은 1970년 12월 30일, 삼청터널이 개통된 이후 양지바른 남쪽 산자락을 개발해 ‘꿩의 바다‘라는 길을 중심으로 들어선 신흥 저택들이다. 성북동에는 이곳 외에도 오랜 시간을 두고 형성되어온 묵은 동네들이 따로 있다. - P13
성북동 주민의 마전과 메주 성북둔의 설치로 30여 호의 집이 들어서면서 성북동은 비로소 사람사는 골짜기로 바뀌게 되었다. 그러나 이곳은 산비탈의 골짜기인데다오랫동안 버려둔 거친 땅이어서 농사에 적합하지 않았다.둔전사람들의 생계를 위해서는 별도의 일감을 찾아주어야 했다. 이에 물이 맑고 풍부하다는 이점을 이용해 베나 무명을 빨아 볕에 말리는 마전 일을 맡기게 되었다. 마전은 희게 표백하는 작업으로 포백(白)이라고도 한다. 내용인즉 도성 안에 있는 점포의 무명, 베, 모시 전부와 송도(개성)의 모시전부를 독점적으로 마전하는 권리를 준 것이다. - P23
권세가들의 별장(別莊)과 별시(別)가 들어서게 됐다. 별장과 별서는혼용되지만 대개 별장은 이따금 드나드는 곳이고, 별서는 본가에서 떨어져 있는 살림집을 말한다. 그렇기에 별장은 정자를 중심으로 하고, 별서는 아름다운 정원(庭園), 정확히 말해서 원림(園林)으로 꾸며져 있다. - P29
무성한 송림 사이로 흘러내리는 한 줄기 시냇물 몇 리를 가도 사람 하나 만나지 못하네 연기 피어 올리는 집 몇 채는 어디에 숨어 있는가 천길 절벽 위 망루 하나 외로운 봉우리에 기대 있네
一流水夾萬株松 數里行過人未逢 姻火幾家隱何處 城譙千仞倚孤峰 - P29
문화유산의 가치는 학문적 통섭을 통해 총체적으로 규명할 때 제빛을 발한다는 귀한 교훈을 얻었다. - P32
망국의 왕손으로서 수난받은 일생이었으나, 그는 끝까지 일제에 굴하지 않은 기개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의친왕 시절 성북동 별서의 일은별로 알려진 것이 없고 동아일보』 1927년 12월 23일자에는 ‘이강공 별저 화재‘라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나온다. - P39
20일 오후 12시 경에 시외 숭인면 성북리 이강공 전하 별저에 불이나서 오전 1시까지에 안채열네 간이 전소하고 부속 건물 한 채가 반소하였는데 원인은 온돌을 너무 지나친 것이라 하며 손해는 건물2,000원에 가구 100원, 합이 2,100원이라더라. - P39
동소문 밖 성북동은 호수가 70여 호에 생업되는 바는 다만 포백 장사뿐으로 (・・・) 요사이 가뭄으로 인하여 동리 우물이 29개소나 말라버리고 또는 시냇물이 또한 말라서 포백을 할 수 없으므로 부득이 그 업을 폐지하다시피 전부 중지하고 그 대신 짚신과 미투리를 삼아서 겨우 호구하기 때문에 동민의 생활난을 부르짖는 소리가 창천하던바, 요사이로 가끔 비가 시작되어 다시 시냇물이 회복되었므로 전과 같이 포백업을 시작하고 동민들은 매우 낙관을 하는 모양이라 하더라. - P41
이런 추세 속에서 성북동 ‘성저십리‘에도 주택 붐이 일어났다. 그 실상을 이태준은 「집 이야기」(1935)에서 이렇게 말했다.
요즘 성북동과 혜화동에 짓느니 집이다. 작년 가을만 해도 보성고보에서부터 버스종점까지 혜화보통학교 외에는 별로 집이 없었다. 김장배추밭이 시퍼런 것을 보고 다녔는데 올 가을엔 양관), 조선집들이 제멋대로 섞이어 거의 공지(空地) 없는 거리를 이루었다. (안동네인) 성북동도 (・・・) 공터라고는 조금도 없다. - P54
이 쌍다리께의 문인촌 중 지금도 옛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은 상허(尙虛) 이태준(李泰俊)의 ‘수연산방(壽硯山房)‘이다. 이태준은 1933년에 초가집을 사서 들어와 이듬해에 이를 헐고 아담한 한옥을 지었다. 이후 1946년 7월 무렵 월북할 때까지 12년간 그의 문학을 꽃피우고 잡지 - P56
『문장(文章)』을 주관하며 생의 전성기를 여기서 보냈다. 특히 이곳은 근원 김용준, 인곡배정국등자칭 ‘호고일당(好古一黨, 옛것을 사랑하는 사람들)‘들의 사랑방 구실을 했다. 그래서 이태준의 수연산방은 성북동 근현대 문화예술인 거리의 랜드마크가 되었고 집 앞으로 난 길에는 ‘이태준길‘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 P57
이태준은 이 집을 지을 때 고미술의 아름다움에 흠뻑 젖어 있던 자신의 안목을 유감없이 구현했다. 이태준은 목재부터 생목을 쓰지 않고 자신의 고향인 철원의 고가를 해체한 것을 옮겨왔다고 한다. 목수도 고급인력을 썼다며 목수들」이라는 수필에서 이렇게 말했다. - P58
이런 노인들은 왕십리 어디서 산다는데 성북동 구석에를 해뜨기전에 대어 온다. (…) 그들의 연장 자국은 무디나 미덥고 자연스럽다. 이들의 손에서 제작되는 우리 집은 (・・・) 날림기는 적을 것을 은근히기뻐하며 바란다.(『문장』 1권 8호) - P59
이태준의 상고 취미 본래 이태준에게는 뿌리 깊은 상고(尙古) 취미가 있었다. 그의 상고취미는 한마디로 조선시대 선비들의 문인 취미를 이어받은 것으로 그의롤모델은 추사 김정희였다. 수연산방이란 ‘오래된 벼루가 있는 산방‘이라는 뜻으로,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이 집 현판으로 새겼다. - P60
건넌방에 걸린 ‘문향루(聞香樓)‘ 글씨는 ‘향기 맡는 누대‘ 라는 뜻으로 차 마시는 것을 이렇게 표현한 추사의 글씨를 모각한 것이다. - P61
이태준은 「고완」에서 조선백자의 미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조선의 그릇들은 일본 것들처럼 상품으로 발달되지 않은 것이어서도공들의 손은 숙련되었으나 마음들은 어린아이처럼 천진하였다. 손은 익고 마음은 무심하고 거기서 빚어진 그릇들은 인공이기보다 자연에 가까운 것들이다. 첫눈에 화려하지 않은 대신 얼마를 두고 보든물려지지 않고, 물려지지 않으니 정이 들고, 정이 드니 말은 없되 소란한 눈과 마음이 여기에 이르러선 서로 어루만짐을 받고, 옛날을 생각하게 하고, 그래 영원한 긴 시간선에 나서 호연(浩然)해 보게 하고, 그러나 저만이 이쪽을 누르는 일 없이 얼마를 바라보는 오직 천진한심경이 남을 뿐이다. - P63
성장소설 사상의 월야 소설가 이태준의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는 아무래도 「달밤」(1933)을꼽아야겠지만 내가 가장 감동적으로 읽은 것은 그의 성장기를 다룬 자전적 소설인 사상(思想)의 월야(月夜)」(1946)다. 이를 읽으면서 상상하기조차 힘든 역경을 헤쳐온 어린 시절 이태준의 삶에 무한한 동정과 존경을 보냈고, 그의 문학에 깔려 있는 짙은 인간애는 어린 시절 겪었던아픔을 승화한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문장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지. - P64
이태준은 1904년 강원도 철원 용담에서 큰 부잣집 서자로 태어났다. 개화에 눈뜬 아버지는 이태준 나이 5세 때인 1909년에 식솔(어머니 ·누나. 외할머니)을 전부 이끌고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 그런데 부친은 가자마자 죽고 말았다. - P64
이에 유족들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배를 탔는데 함경도 청진을 지날 때 임신 중이던 어머니가 배 안에서 누이동생을 낳았다. 가족들은 어쩔 수 없이 청진에 정착했고 외할머니는 강원도집이라는 작은식당을 하면서 살아갔다. 이때 이태준은 서당에서 천자문을 배웠다. 그런데 8세 되는 1912년 어머니마저 폐결핵으로 죽었다. - P64
이후 이태준이 갖은 고생과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외할머니의 극진한보살핌 속에 어린 시절을 보내는 과정은 애처로움을 넘어 소년 이태준의 불굴의 의지에 감탄을 보내게 한다. 철원 봉명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했으나 칭찬해줄 부모가 없는 것이 서러웠고, 새 옷이 없어 누나 결혼식에 가지 못하고 추석날이면 동네 아이들을 피해 밤이 오기를 기다렸다고 한다. - P64
이태준의 문학세계 누가 뭐라 해도, 또 누구나 말하듯 이태준은 한국 현대문학사의 빛나는 별이다. ‘시에 정지용이 있다면 소설에 이태준이 있다‘고 일컬어지는한국 단편소설의 완성자이다. - P67
이태준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달밤」 「복덕방」 「가마귀」 「밤길」 「돌다리」 같은 작품을 읽고 나면 그 주인공의 애처롭고 안타까운 모습에 가슴이 아려와 책장을 덮고 한동안 빈 천장을 바라보게 된다.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모진 세월을 어처구니없는 아픔으로 살아가는 밑바닥 인생들인데 전편에 흐르는 따뜻한 인간애는 가슴이 미어지게 한다. - P68
그리고 그 문장은 얼마나 아름답던가. 「패강랭(浿江)」의 "하늘과 물은 함께 저녁놀에 물들어 아득한 장미꽃밭으로 사라져버렸다" 같은 자연에 대한 묘사라든지, 「해방전후(解放前後)」의 "글쎄요‘ 하고 없는 정을 있는 듯이 웃어 보이니…" 같은 심리 묘사가 나오면 밑줄을 긋게 한다. 특히 이태준의 소설은 맨 마지막 문장에서 그 미문(美文)의 진수를볼 수 있다.
달밤은 그에게도 유감한 듯하였다.(「달밤」) 밤 강물은 시체와 같이 차고 고요하다.(「패강랭」) - P68
이태준의 문학세계를 말할 때면 으레 프롤레타리아문학에 대립해김기림 · 정지용·박태원 이상 등과 순수예술을 추구한 ‘구인회(九人會)‘의 핵심 멤버였다가, 8·15 해방이 되자 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KAPF, Korea Artista Proleta Federatio), 즉 카프와 함께하는 조선문학가동맹의 부위원장을 맡은 것을 두고 뜻밖의 사상의 전환처럼 회자되곤한다. - P68
그러나 이태준의 지향은 ‘예술을 위한 예술‘의 순수문학이 아니라, 문학을 사회변혁의 ‘도구‘로 보는 경향이 강한 카프 방식에 반대하면서도민중적 삶의 운명을 ‘진짜‘ 문학으로 구현하는 것이었다. 그러다 일제강점기가 끝나고 시대상황이 돌변하면서 이를 적극 실현할 의지를 굳혔을 뿐이다. 최원식 교수의 표현대로 ‘평지돌출‘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당시 이태준의 마음과 결심은 무엇보다도 「해방전후」에 명확히 드러나있다. - P69
그러나 이태준이 1946년 여름 벽초(碧初) 홍명희(洪命憙)와 월북한 것은 그의 인생에서 돌이킬 수 없는 실족이었다. 그의 문학이 망가진 것은말할 것도 없고 인생 자체가 비극으로 끝나고 마는 안타까운 선택이었다 - P69
차는 다시 떠난다. 객은 모두 다시 눕는다. ‘이곳을 누워서 지나거니!‘ 깨달으니 문득 나의 머리엔 성삼문의 생각이 떠오르는 것이다. 세종께서 지금 내가 쓰는 이 한글을 만드실 때 삼문을 시켜 명(明)의한림학사 황찬(黃瓚, 음운학자)에게 음운을 물으러 다니게 하였는데 황학사의 요동 적소(所)에를 범왕반십삼도운(凡往返十三度云)으로 전하는 것이다.… (그것도 걸어서) 1, 2왕반도 아니요 13도라 하였으니성삼문의 봉사도 끔직한 것이려니와 세종의 그 억세신 경륜에는 오직 머리가 숙여질 뿐이다. - P71
"근원은 항시 거기는 어떤지 한번 가봐야겠다고 말했어요." - P91
"남에 있었으면 북으로 올라갔을 거고, 북에 있었으면 남으로 내려왔겠지."
일제강점기라는 불우한 시대를 살다가 마침내 희망찬 해방을 맞이했으나 어지러운 해방공간에서 길을 잘못 들어 결과적으로 불행하게 생을마감한 그분들과, 동족상잔의 전란 속에 남에서 북으로, 혹은 북에서 남으로 올라가고 내려오고 한 지식인들의 삶이 안타깝게 다가오기만 한다. - P92
문장 전 26호 상허 이태준의 수연산방, 인곡 배정국의 승설암, 근원 김용준의 노시산방을 답사하면서 이분들의 ‘호고일당‘으로서 모습만 말하고 정작 이들이 합심하여 혼신의 힘으로 펴낸 『문장(文章)』을 말하지 않는다면 성북동 근현대거리 답사로서 크게 부족한 것이다. - P92
『문장』은 민족문학의 계승과 발전을 기치로 내걸고 1939년 2월에 창간했다. 이태준이 편집주간이었고 발행인은 이태준의 휘문고보 동창생으로 그의 일본 유학을 도와준 김연만이었다. 표지화와 권두화는 주로근원 김용준이 맡았고, 인곡 배정국은 광고주로 지원했다. 『문장』은 성북동 문인들의 합작이었던 것이다. 이들이 매달 『문장』 편집을 위해 수연산방에 모여 술상, 찻상을 앞에 두고 의견을 나누었을 모습을 능히 상상할수 있다. 어쩌면 『문장』이 있어서 우정이 더욱 깊어갔는지도 모른다. - P92
총26호를 펴냈다. 『문장』은 창작(소설), 평론·학예, 시, 수필, 고전번역 등으로 구성 및 편집되었다. 총 26호에 실린 작품 편수는 각각 소설 162, 시 180편, 시조 34편, 수필 183편, 희곡 6편 시나리오 2편, 평론 119편등이다. - P93
이광수·김동인 · 이태준·이기영 · 채만식·한설야·현진건·유진오 ·박태원 · 계용묵. 이효석·김유정·이무영 ·정비석 · 나도향 등 기라성 같은 소설가의 명작이 실렸고, 정지용·김기림 · 김광균·이육사·오장환·백석·신석정·변영노유치환 등 당대 시인들이 망라되어 있으며, 고전문학 번역과논문에는 이병기 최현배·이희승·조윤제 · 양주동, 수필에는 김진섭·이양하·이하윤· 고유섭·김소운·이능화·이극노·김상용 등이 있으니 근대 지성사의 인물들이 대부분 필자 명단에 들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P93
『문장』은 2호부터 전선문학선(戰線文學)‘이라는 고정란이 있었다. 여기엔 간혹 일제의 군국주의에 동조하는 이른바 ‘친일문학‘ 글들이 실려 있는데 이것은 당시 책 간행의 조건이자 굴레였다. 마치 1970년대 음반 테이프에 ‘건전가요‘가 한 곡 들어가지 않으면 발매할 수 없었던 것과 똑같은 강압이었다. 이태준이 1940년 『문장』(2권 9호)에 기고한 지원병 훈련소의 1일은 어쩔 수 없이 잡지의 생존을 위해 편집인이 희생한글이었음을 우리는 이해해야 한다. - P96
그런데 급기야 일제의 탄압이 극에 달하여 1941년 4월, 『문장』. 『인문평론』ㆍ『신세기』를 병합하고 일본어와 조선어를 반씩 실어 황국신민으로서 황도(道) 앙양에 적극 협력하라는 조치가 내렸다. 이에 『문장』은불응하고 자진 폐간을 단행했다. - P97
『문장』 마지막호 표지에 ‘폐간호‘라고 굵게 쓰여 있는 세 글자에는 패전을 앞두고 장렬하게 자결하는 장수의 죽음을 보는 것 같은 처연한 비장미가 깃들어 있다. - P97
수화 김환기 예술에서 전통 수화는 1913년 전라도 신안 안좌도에서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서울로 올라와 중동학교를 다니다가 1933년 니혼(日本)대학 미술과에 유학하면서 화가의 길로 들어섰다. 그는 대학 재학생 시절부터 동경유학생들과 백만회(白蠻會)를 결성하고 아방가르드 미술운동을 벌였다. 백만회라는 이름은 ‘백의민족(白衣民族)‘과 포비슴(fauvism, 야수파)의 ‘야만(野蠻)을 결합한 것이었다. - P105
<16-IV-70#166>이라는 그의 유명한 점화(點畵)를 출품했다. 화면 전체가 무수한 점들로 가득 찬 이 작품은 미니멀리즘을 수화가 재해석한 것이다. 대상의 표현을 ‘맥시멈‘이 아니라 ‘미니멈‘으로 절제하는단순성을 점이라는 형태로 나타냈지만 그 점을 그리면서 수화는 ‘서울의오만 가지를 생각하며‘, 보고 싶은 얼굴을 그리며, 고향에서 들려오는 뻐꾸기 소리를 상상하며 그렸다고 한다. 그리고 이 작품에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라는 부제를 붙였다. - P107
이 제목은 그의 중동학교 선배이자 성북동의 시인인 김광섭의 "저녁에"(1969)라는 시에서 따온 것이다.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서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 P107
길상사의 관음보살상 1997년 12월 14일 길상사 창건 법회 때 법정 스님이 대시주자인 김자야에게 마이크를 넘겨주자 그는 "저는 불교를 잘 모르는 죄 많은 여자입니다. 제가 대원각을절에 시주한 소원은 다만 이곳에서 그 사람과 내가 함께 들을 수 있는맑고 장엄한 범종 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 입니다"라고 말했다. - P122
1999년 11월 14일 자야는 임종을 앞두고 유언하면서 "내가 죽으면 화장해서 길상사에 눈 많이 내리는 날 뿌려달라"고 했다. 백석의 시 나와나타샤와 흰 당나귀」의 시구처럼 눈이 푹푹 내리는 날 백석에게 돌아가고 싶었던 것이다. 이 순애보를 이생진 시인은 「내가 백석이 되어로었다. 길상헌 뒤쪽 언덕에는 김자야의 공덕비가 세워져 있다. - P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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