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은행 효자동지점 삼거리 우리은행 효자동지점 건물은 서촌의 랜드마크 중 하나이다. 은행 지점치고는 대단히 중후한데, 이는 전신인 상업은행 시절엔 청와대의 주거래 은행이어서 여느 지점과는 격을 달리했기 때문이다. - P77
자교교회 통인시장 맞은편 창성동에 있는 자교교회는 미국인 여성 선교사 캠벨이 내자동배화학당 기도실에 처음 설립한 뒤 1922년 현재의 터전에 2층 양옥의 붉은 벽돌집으로 세운 것이다. 어느덧 100년을 맞이한 오래된 교회다. - P81
신교 옛 모습 신교동의 ‘신교‘는 선희궁 터에 있던 다리 이름이다. 영조 40년에 영조의 후궁이자 사도세자 생모인 영빈 이씨의 사당으로 선희궁을 지으면서 새 다리를 놓고 신교라 불렀다. 1920년 개천 복개 때 사라지고 지금은터만 남았다. - P82
국립서울농학교 내 선희궁 터 선희궁은 훗날 칠궁으로 합사되었지만 사당 건물 자체는 국립서울농학교 내에 그대로 남아 있고 이름도 선희궁 터로 표시돼 있다. - P83
천막교실 한국전쟁 당시 부산 초량동 항도초등학교에 설치된 천막교실 모습이다. 내가 다니던 청운초등학교 건물 또한 한국전쟁 때 폭격을 맞아 교실이 부족했기 때문에 나는 2학년 때 국립서울농학교 안에 설치된 이런 천막학교에서 공부했다. - P84
국립서울맹학교 신교동 안동네에는 국립서울농학교뿐만 아니라 국립서울맹학교도 있다. 청각장애인을 위한 특수학교로 서울맹아학교라고 불리다가 2002년에 국립서울맹학교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P85
청운초등학교 청운초등학교는 제법 명문이었다. 나와 같은 37회 동창생으로는 개그맨 전유성과 여성 최초의 지방법원 부장판사였던 이영애 전 판사가 있다. - P86
동창생으로는 카페 ‘학교종이 땡땡땡‘의 주인장이기도 한 개그맨 전유성이 맹활약을 하는 것이 자랑스러웠다. 법조계에서 유리천장을 뚫고여성 최초로 지방법원 부장판사와 사법연수원 교수가 된 이영애 전 판사도 동창이다. 6학년 때는 모의고사가 끝나면 성적순으로 방(膀)이 붙었는데 나는 항상 6반 이영애와 9반 이영애 사이에 있어서 그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 우연히 그를 만났을 때 물어보았더니 37회 동기는 맞지만몇 반이었는지는 생각나지 않는다고 했다. - P87
겸재 정선의 <청풍계도> 청풍계는 청운초등학교 후문에서 조금 더 올라가다 왼쪽으로 난 가파른 비탈길에 있는 그윽한 골짜기였다. 여기에는 김상용의 저택이 있었는데 선조가 맑을 청(淸)과 바람 풍(風)을 써서 청풍(淸風溪)라는 이름을 내려주었다. - P89
원래 이름은 푸를 청(靑)과 단풍 풍(楓) 자의 청풍계(楓溪)였으나 선조가 맑을 청(淸)과 바람 풍(風)을 써서 청풍계(淸風溪)라는 이름을 내린후 바뀌었다. 청풍계 더 가까이에는 훗날 우암 송시열이 이 뜻을 기려 주희의 글씨를 집자해 새긴 ‘백세청풍(百世淸風)‘ 이라는 암각 글씨(청운기 52-111번지)가 지금도 남아 있다. - P91
김상용의 아우 김상헌은 칠궁 담장과 맞대고 살면서 이 일대를 노래한 「근가십영」에서 ‘우리 형님이 청풍계 태고정을 지었다‘고 했다. 김상헌의 손자 김수항을 비롯한 수(壽)자 돌림 5명과 증손자 김창집을 비롯한 창(昌) 자 돌림 6명이 모두 출세하여 이 5 6창‘의 안동 김씨가문은 ‘장동 김씨‘라고 따로 불리었고, 김창집의 4대손 김조순이 순조의 장인이 되면서 조선 최대의 세도가문을 이루었다. 김상헌의집터인 칠궁 담장 밖 효자동 무궁화동산(효자로 97 건너편)에는 김상헌 시비가 세워져 있다. - P92
청운동 일대에는 조선시대 명사들이 많이 살았다. 청운초등학교 자리에서는 송강(松江) 정철(鄭澈)이 태어나 자하문로 길가(청운동 123번지)에표지석이 놓여 있다. 경기상업고등학교 교정에는 청송(聽松) 성수침(成守琛)의 집터가 있다. 성수침의 아들이 우계(牛溪) 성혼(成渾)이니 단짝으로 유명한 송강과 우계가 어린 시절 같은 동네 살면서 얼마나 정을 나누었을까 안 보아도 본 듯하다. - P92
경복고등학교 뒤편 창의문로 큰길 건너편 북악산 기슭에는 중종 때 남곤(南袞)이 살던 집이 있었다. 남곤은 심정(沈貞)과 함께 기묘사화를일으킨 장본인으로 벽초의 『임꺽정』에서 무수한 흉떨림을 당했다. 이들을 미워하여 작은 새우로 만드는 젓갈을 ‘곤쟁(袞貞)이 젓‘이라고 하여 소인배를 일컫는 말이 되었다는 인물이다. - P93
정선의 <대은암도> 대은암은 기묘사화를 일으킨 남곤의 집에 있던 큰 바위로, 승지가 된 남곤이업무에 바빠 함께 어울릴 수 없게 되자 그의 친구 박은이 크게 은거했다는 뜻으로 ‘대은‘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전한다. - P94
그러나 이 설은 재고될 여지가 있다. 근래의 역사학계 연구를 보면 기묘사화에서 가장 주도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중종 본인이었다. 남곤의 경우 실제로는 김종직의 일파로 훈구파이면서도 사림파와 가까웠던 인물이고, 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기묘사화 당시에도 조광조의 처벌을 주장하긴 했지만 사사에는 반대하고 그 죽음에 슬퍼하는 등의 모습을 보였다. - P94
동농은 청풍계 김상용의 후손으로 일찍이 관로에 진출해 1895년 농상공부대신을 지냈다. 갑오경장이 실패한 뒤에는 독립협회의 위원으로선임되어 독립문에 걸려 있는 한자와 한글의 이름패를 쓴 명필이기도했다. 1902년 궁내부특진관을 지낼 때 창덕궁 후원 공사를 차질 없이수행한 공로로 고종이 목재를 하사해 이듬해에 이곳에 백운장(白雲莊)이라는 한옥과 몽룡정(夢龍亭)이라는 정자를 지었다. - P98
동농 김가진의 장례식 동농 김가진은 상해임시정부에 합류한 지 3년 뒤인 1922년에 세상을 떠났다. 임시정부는최고 원로였던 동의 장례식을 이처럼 성대하게 치렀다. - P99
스스로 충청도 관찰사로 좌천해 지방으로 내려갔고 1908년에는 대한협회 제2대 회장으로 친일단체 일진회를 성토하고 나섰다. 1910년 강제한일합병 후 일제가 예우 차원에서 남작 작위를 수여하여 받았다. - P99
그리고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 그해 10월, 동은 73세의 노구를 이끌고 허름한 늙은이로 위장하고서 육로로 몰래 빠져나가 상해임시정부에 합류했다. 병자호란 때 자결한 선원 김상용의 후손다운 애국심과 기개가 느껴지는 망명길이었다. 당시 『독립신문』은 동농의 망명 사실을보도하면서 그가 망명하는 심정을 노래한 한시 2편까지 실었다. (임형택「동농 김가진, 그의 한시」, 『역사비평』 2022년 가을호) - P99
나라가 깨지고 임금도 잃고 사직이 무너졌으되 치욕스런 마음으로 죽음을 참으며 여태껏 살아왔는데 늙은 몸이 상기도 하늘 찌를 뜻을 품어 단숨에 하늘 높이 몸을 솟구쳐서 만리길을 떠났노라 - P100
國破君亡社稷傾 包羞忍死至今生 老身尙有沖霄志 一舉雄飛萬里行
올해(2022)는 등농 서거 100주기가 되는 해이다. - P101
안평대군은 풍류를 좋아하여 부암동 무계정사와 용산 담담정을 지은바 있는데 이곳 수성동에도 별서를 지었던 것이다. 그래서 수성동계곡에서는 친형 (세조)에게 죽임을 당한 낭만의 왕자 안평대군의 자취를 느낄 수 있다. - P111
치마바위에는 중종의 첫 왕비인 단경왕후의 애틋한 전설이 서려 있다. 단경왕후는 좌의정을 지낸 신수근(愼守勤)의 딸로 연산군 5년(1499)에 진성대군과 결혼했는데 그가 왕(중종)이 되면서 자연히 왕비가 되었다. 그런데 왕비가 된지 7일 만에 역적의 딸이라고 폐위되어 궁궐에서쫓겨났다. - P111
사연인즉 아버지 신수근은 권세가문의 명신으로 그의 누이동생은 연산군의 비였다. 일설에는 1506년 연산군을 몰아내는 중종반정의 주모자인 박원종이 신수근에게 넌지시 "누이와 딸 중 누가 더 중하냐고 물어보며 거사에 동참할 것을 권했다. 그러나 신수근은 "내가 매부를 폐위하고 사위를 왕으로 세우는 일은 못하겠다"고 거절하자 박원종은 자객을 보내 신수근을 철퇴로 쳐 죽였다. 그래서 단경왕후는 졸지에 역적의딸이 되었다. - P111
단경왕후는 명종 12년(1557) 나이 70세에 세상을 떠나 양주에 있는 친정집 거창 신씨 묘역에 묻혔다. 그후 영조 15년(1739)에 복위됨으로써 새로이 왕릉으로 조성하고 능호를 온릉(溫陵)이라고 했다. 그리고 신수근 또한 복권되어 사람으로부터 고려 말의 정몽주와 같은 충신으로 추앙받게 되었다. - P112
중인 시인인 장혼(張混)도 송석원 곁으로 이사해 집을 짓고 이이엄(而巳嚴)이라 했다. 이후 중인들이 이 일대에 모여들었다. 중인문학을 위항문학(委巷文學), 또는 여항문학(巷文學)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꼬불꼬불한 골목, 사람들이 많이 사는 동네를 가리킨다. 양반들은 넓은 집에 살았으나 중인들은 좁은 골목에 모여 살았기 때문에 나온 말이다. - P123
벽수산장의 윤덕영 친일귀족 윤덕영은 나라를 일제에 넘긴 공로로 막대한 하사금을 받아 송석원과 그 일대의 집을 모두 사들이고 벽수산장을 지었다. ‘벽수산장‘이라는 글씨 옆에는 추사가 쓴 ‘송석원‘ 글씨가 흐릿하게 보인다. - P127
"아닙니다. 제가 고맙죠. 오늘 저는 선생님께 크게 배운 것이 있어요. 그건 오거리 길들이 직선이 아니라 곡선이고 그것은 개천을 따라 자연스럽게 난 것이라는 점요. 저는 집만 보았지 길의 특징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었거든요. 사실 저는 인사동길이 S자로 휘었다는 것을 여태 의식하지 못했어요. 제가 느끼는 인간적인 체취가 이 자연스러운 길에서나온다는 것도요." - P137
‘제비‘는 이를테면 이제까지 있었던 가장 슬픈 찻집이요, 또한 이상은 말하자면 우리의 가장 슬픈 동무이었다.
불우하기는 구본웅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전쟁 중인 1952년 급성폐렴으로 누하동 이 집에서 46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는 벗이상을 그린 <친구의 초상> <푸른 머리의 여인> <여인>이라는 주옥같은작품들을 남겼고 그의 예술가 유전자는 후손에게 전해져 외손녀 강수진이 희대의 발레리나가 되었다. - P143
필운대는 인왕산 아래에 있다.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이 어렸을때에 대 아래에 사는 원수 권율의 집에 처가살이하였으므로 자신의 호를) 필운이라 불렀다. 석벽에 새긴 ‘필운대‘ 세 글자는 곧 백사의 글씨다. 대곁 인가에 꽃나무를 많이 심었기 때문에 경성 사람들이 봄철 꽃구경할 곳으로 반드시 먼저 여기를 꼽았다. - P144
인왕산은 2018년 5월부터 완전 개방되어 지금은 누구나 자유롭게 등반할 수 있게 되었다. 청와대의 경호·군사 목적 시설물이 배치돼 일반인접근이 부분적으로 통제된 인왕산 지역을 완전히 개방하기에 앞서 인왕산의 폐쇄적인 군사시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함께 검토하기 위해2018년 3월 10일 문재인 대통령과 나, 건축가 승효상이 함께 등반에 나섰다. - P147
이때 본래 초소란 사방 경계를 하기 가장 좋은 위치에 지은 것이기 때문에 이곳을 전망대로 활용하는 것이 역사성도 살리는 방안이라고 건의하여 지금 등반객들이 가장 애용하는 ‘초소책방‘이 탄생했다. - P147
중학교 때 국어 교과서에 나오는 너새니얼 호손(Nathaniel Hawthorne)의 큰 바위 얼굴」을 배울 때 소년 어니스트가 바라보며 살았다는 얼굴바위보다 우리 인왕산의 부처바위가 더 미덥고 멋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미술사를 전공하면서 인왕仁王)이 부처님 세계의 수호상임을 알게 되면서부터는 우리 부처바위가 서울을 수호하고 나라를 지키는바위라고 생각했다. 거기에다 산자락에 서울성곽이 둘러 있어 더 믿음이 갔다. - P149
북촌 1경 창덕궁 전경: 돌담 너머로 창덕궁의 전경이 잘 보인다. 북촌 2경 원서동 공방길: 창덕궁 돌담길 따라 빨래터까지 올라가는 길. 북촌 3경 가회동 11번지: 한옥들과 전통문화 체험 공방이 있다. 북촌 4경 가회동 31번지 언덕 기와지붕들 너머의 북촌 조망. 북촌 5경 가회동 골목길(내리막): 한옥들이 맞대어 빼곡히 늘어서 있다. 북촌 6경 가회동 골목길(오르막) 한옥 돌담들이 길게 뻗어 있다. 북촌 7경 가회동 31번지 : 1930년대에 지은 한옥밀집지구이다. 북촌 8경 삼청동 돌계단길: 경복궁 인왕산이 조망되는 돌층계길. - P152
북촌이라고 하면 우리는 막연히 조선왕조 대대로 내려오는 양반 동네를 떠올리기 쉽다. 북촌이라는 말의 유래 때문이다. 예부터 한양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청계천과 종로를 중심으로 남쪽 남산 아랫동네는 남촌, 북쪽 동네는 북촌이라고 불러왔다. 매천 황현은 『매천야록(梅泉野錄)」에서 이렇게 말했다.
서울의 대로인 종각 이북을 북촌이라고 부르며 노론이 살고 있고, 종각 남쪽을 남촌이라고 하는데 소론, 남인, 북인 삼색(三色)이 섞여살았다. - P154
근대의 지성들이 여기에 많이 모여 살면서 북촌에서는 개화사상이일어나고, 갑신정변이 모의되었고, 동학·대종교·불교의 종교운동이 일어났고, 3·1운동 준비가 이루어졌으며, 『동아일보』 창간되고, 진단학회 · 조선어학회 · 조선민속학회 등이 창립되었다. 해방공간에서 암살된대표적인 정치인인 우익의 송진우, 중도좌파의 여운형이 살았으니 북촌은 우리 개화기와 근대 지성의 심장이었다고 할 수 있다. - P155
왜 공공기관 건물의 정원은 다 이렇게 천편일률적으로 되었는가를조사해보니 이것이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관에서 건축비 예산을 잡을 때조경 비용을 아주 낮게 책정하고 또 관급공사는 이렇게 해야 뒷말이 없어 ‘공무원표‘로 귀착된 것이라고 한다. 이를 일컬어 돌과 영산홍과 회양목으로 이루어졌다고 해서 ‘돌·영·회‘라고 한다나. - P158
박영효는 1931년 이광수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개화파의 신사상은 모두 내 일가인 박규수대감 집 사랑방에서 나왔소. 김옥균, 홍영식, 서광범 그리고 나의 형박영교가 모두 재동 박규수 대감 집 사랑에서 모였지요. - P159
재동 백송을 보고 헌법재판소를 나오면 바로 재동초등학교 네거리다. 재동이라는 동네 이름은 1453년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기 위해 일으킨 계유정난 때 황보인 등 단종을 보필하던 대신들을 이곳으로 유인해 참살하면서 흘린 피가 내를 이루므로 동네 사람들이 집 아궁이에 있던재를 가지고 나와 길을 덮었다고 해서 잿골 (灰洞)이라 부르던 것이 한자명으로 재동(洞)이라고 표기된 것이라고 한다. - P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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