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양 여운형을 말하자면 할 얘기가 너무 많다. 여운형이 1947년 암살되었을 때 그를 따르던 많은 분들이 정말로 안타까워했다. 1945년 잡지『선구(先驅)』가 실시한  ‘조선을 이끌어갈 양심적인 지도자‘ 여론조사를보면 여운형(35%), 이승만(21%), 김구(18%), 박헌영(16%), 이관술(12%), 김일성 (9%), 최현배(7%), 김규식 (6%), 서재필(5%), 홍남표(5%) 순이었다. - P169

몽양은 명연설가였고 조선체육회 회장으로 육체미를 과시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에게는 믿음직한 인간미가 있어 대중의 사랑과 지지를받았다. 소설가 이태준은 「악수」라는 글에서 "맹인이라도 몽양 선생의악수는 악수만으로도 몽양일 줄 알 것이다"라고 했다. 여운형이 살던 집은 계동 대동세무고등학교 입구에 있었다. - P169

백인제는 평북 정주 태생이다. 조상 대대로 관서 지방 명문가 출신으로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1916년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해 재학 내내수석 자리를 놓치지 않은 수재였다. 그러나 3학년 때 3·1운동에 참가했다가 10개월간 투옥되어 퇴학을 당했다. 다행히 학교 측의 노력으로 다시 복학해 1921년 수석으로 졸업했으나 전과가 있어서 총독부의원에서 2년간 복무해야 의사면허를 받을  수 있었다. 면허가 없던 탓에 총독부의원에 근무하면서 의사들이 기피하는 마취를 2년간 맡았는데 이때 습득한 마취 기술이 외과의사로서 대성할 수 있는 자산이 되었다. - P170

현상윤 집터
만보자는 다시 걷는다. 북촌로 비탈길을 따라 계속 올라가면 오른쪽으로 이목화랑이 나오고 여기서 조금 더 가면 기당(堂) 현상윤(相允,1893~1945)이 살던  ‘현상윤 집터‘라는 표지판이 나온다. 현상은 일본 와세다대학 유학 시절 송진우, 김성수 등과 가깝게 지낸 인연으로 귀국 후중앙학교 교사가 되었는데 1919년 3·1운동 때 천도교와 기독교의 연합및 민족 대표와 학생단체 사이의 연락책을 맡아 활동하여 2년간 옥살이도 했다. - P177

조선귀족회
조선귀족은 1910년에 강제 한일합병 조약이 체결됨에 따라 일제가일본의 화족 제도를 준용하여 내린 ‘조선귀족령(朝鮮貴族令)‘에 의거해대한제국의 고위급 인사와  한일합병에 공로가 있는 자들에게 봉작하고자 만들어낸 특수 계급이다. - P181

처음 작위를 받은 수작자는 76명 (후사 6명, 백작 3명, 자작 22명, 남작 45명)이고 1924년에 추가로 수작한 이항구, 수작자의 작위를 계승한 81명의 습작자 등 총 158명이 조선귀족으로 작위를 받았다. 처음 수작한 76명 가운데 작위를 거절하거나 반납한 사람은 윤용구, 한규설, 민영달, 유길준등 8명이다. - P181

최고의 수혜자인 후작으로는 이재완·이재극. 이해창 이해승 · 윤택영·박영효 등과 백작에서 승작된 이완용이 있으며, 백작으로는 이지용∙민용린과 자작에서 승작한 송병준·고희경 등이 있다. - P181

수작자 중에는 반일활동이나 형사처벌로 박탈되거나 습작되지 않는 경우가 있었다. 김사준·이용직·김윤식·윤치호·민태곤 등은 반일적활동을 했거나 충순이 결여되었다고 작위가 박탈되었다. 김가진은 작위를 반납하지 않고 상해임시정부로 망명했고 습작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 P181

또 민영린과 김병익은 아편 흡입죄로 실형을 받은 이유로, 조민희는도박으로 파산을 선고받은 이유로 예우가 정지되었으며, 이지용은 도박으로 실형을 선고받아 예우가 잠시 정지되었다가 해제되었다. 조동희는 집안  내 재산 분쟁으로 두 차례 예우 정지와 해제를 반복했다. - P181

일제가 조선귀족에게 베푼 경제적 혜택은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후작50만 엔에서 남작 25,000엔에 해당하는 ‘은사(恩賜)공채증권‘이 교부됐다.  이 공채에는 연리 5%의 이자가 매년 3월과 9월에 조선은행 또는 우체국에서 지불됐다. - P182

그리고 조선귀족회 차원에서 조합을 설립해 조선총독부로부터 임야및 삼림 불하 과정에서 무상으로 대부 및 불하를 받았다. 또한 일제는이들의 경제적 몰락을 방지하기 위해서 1927년에 ‘조선귀족세습재산‘을 제정하여 세습재산을 설정하고 보호받을 수 있게 했다. 가회동 일대의대저택들이 왜 조선귀족들의 소유가 되었는지 여기서 알 수 있다. - P182

조선귀족 수작자와 습작자는 1948년 9월에 제헌국회에서 제정한 ‘반민족행위처벌법‘ 제2조와 제4조 1항에 의해 당연범으로 처벌 대상이 되었다. - P182

이에 1930년대에 들어와서 신흥주택 건립이 붐을 이루어 많은 집이 지어졌지만 주택난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아 『동아일보』 1939년 4월21일자는 ‘집 없이도 사는 경성인‘이라는 제목하에 "물경(놀랍게도) 1만1천 동부족, 아무리 신축해도 부족이 연 2천 호, 주택난 실정의 첫 통계" 라며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 P189

이(통계)에 의하면 지난 3월 말 현재 경성부 주택 총수는 82,701동, 여기 거주자 148,656세대인데 차가(借家) 호수는 15,515호이고 가옥 소유자는 조선인 50,504인, 일본 내지인 8,319인, 기타 155인, 법인 523인이다. (...) 경성 인구 증가율은 연 3만 인의 증가로 적어도 매년 4천 동의 신축이 필요한데 지난 13년간 신축 가옥은 3,432호, 시가지 계획으로 철거된 가옥이 1,649호이니 결국 연 2,000호의 부족 상태다. - P189

북촌 한옥밀집지구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한옥밀집지구의 풍경은 정세권의 건양사, 김동수의 공영사 등 도시한옥의 대량생산을 주도한 건축업자들의 작품이다. - P191

건축왕 정세권
정세권(鄭世權)은 1888년 경상남도 고성 하이면에서  태어났다. 진주사범학교 3년 과정을 1년 만에 수료하고 졸업 직후인 1905년 참봉에 제수되었다. 1910년에 하이면 면장이 되었으나 2년 만에 사임하고 한동안하이면에서 생활하다 1919년 서울로 올라와 1920년 9월 9일 건양사를설립했다. - P196

정세권은 사업가적 기질을 발휘해 경성 전역의 부동산 개발을 주도했다. 특유의 통찰력으로 토지를 매입해 대단위 부동산 개발 프로젝트를 기획 및 실행하며 도시 개발과 주택공급에 영향력을 행사한 근대적 부동산 개발업자였다. 그는 1929년 『경성편람(京城便覽)』에서  매년 300여 가구의 주택을 신축했다고 밝혔다. 또 한옥을 더욱 개선하여1934년에는 ‘건양주택‘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개량 한옥 브랜드를 만들어내고 그대로 건설했다. 당시는 개발업자들을 흔히 청부업자, 집장사라고 불렸지만 정세권은 북촌·익선동 성북동 혜화동 창신동 서대문·왕십리 · 행당동 등 서울 전역에 한옥 대단지를 건설하면서 ‘건축왕‘이되었다. - P196

이렇게 일본인들이 북촌으로 진출하려던 추세에 정세권은 도시형 개량 한옥을 대량으로 공급함으로써 조선인의 주거지역을 확보해 오늘날북촌 한옥마을을 지켜낸 것이다. 그는 부동산 개발로 자수성가한 식민지 민족자본가이자 민족운동가였다. 당대의 지식인들과 교류하며 일제에 맞서 신간회 ·조선물산장려운동·조선어학회 등에 참여하며 언론인 안재홍, 국어학자 이극로 등과  동지적 관계를 유지했다. - P197

조선물산장려운동은 명망가들의 계몽운동 차원에서 일어났지만 정세권의 참여로 실천력을 가진 운동으로 발전했다. 정세권은 낙원동300번지에 조선물산장려회관을 지어 기증했고 재정을 담당했다. 또 이극로의 열정적 국어운동에 감명받아 화동 129번지에 조선어학회관을지어주고 역시 재정적으로 지원했다. - P197

이처럼 민족운동을 지원하면서 일제의 탄압으로 구금되어 고문을 받기도 하고 뚝섬의 토지 3만 5천여 평을 강탈당하기도 하면서 정세권의주택사업은 자연히 쇠락의 길에 빠졌다. 8·15해방 이후에는 행당동에거주했는데 한국전쟁 중인 1950년 9월 28일 서울수복 때 비행기 폭격으로 다리를 크게 다쳤다. 그리고 1950년대 말 고향 고성으로 낙향하여지내다가 1965년 향년 78세로 세상을 떠났다. 금년(2022) 5월 3일 경남고성군은 정세권의 생가를 정비한 준공식과 함께 전시회를 열어 그의위업을 기렸다. - P197

양반집으로는 지금은 사라졌지만 율곡 이이의 집 (인사동 137번지), 정암조광조의 집(낙원동 9번지), 종두법을 시행한 지석영의 집(낙원동 12번지), 충정공 민영환의 집(견지동 27-2번지) 등이 있어 집터 앞에 작은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 P206

그러다 1910년 일제강점기로 들어서면서 1914년, 전국의 행정구역을대대적으로 개편할 때 이 지역은 크게 건지동, 관훈동, 인사동으로 개편되었다. 이때 처음 등장한 인사동이라는 이름은 기존 관인방의 인(仁)자와 대사동의 사(寺)자를 조합해서 생긴 것으로, 인사동네거리의 동쪽낙원동까지 포괄하는 넓은 지역이었다. - P208

기미독립선언서태화관은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민족대표33인(지방에 있는 4인은 불참)이 기미독립선언서를 낭독한 기념비적인 장소이다. 이날 태화관을예약한 것은 손병희(孫秉熙, 1861~1922)였다.  손병희에게는 몇 해 전에 후처로 들인 기생 출신 주옥경(朱鈺卿, 1894~1982)이 있었는데 그녀는 14세에  평양기생학교에 들어가 기예를 배우고 19세에 서울로 올라와 명월관에서 근무했다. 기명은 산월(山月) 이었다. - P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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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은행 효자동지점 삼거리 
우리은행 효자동지점 건물은 서촌의 랜드마크 중 하나이다. 은행 지점치고는 대단히 중후한데, 이는 전신인 상업은행 시절엔 청와대의 주거래 은행이어서 여느 지점과는 격을 달리했기 때문이다. - P77

자교교회  
통인시장 맞은편 창성동에 있는 자교교회는 미국인 여성 선교사 캠벨이 내자동배화학당 기도실에 처음 설립한 뒤 1922년 현재의 터전에 2층 양옥의 붉은 벽돌집으로 세운 것이다. 어느덧 100년을 맞이한 오래된 교회다. - P81

신교 옛 모습  
신교동의 ‘신교‘는 선희궁 터에 있던 다리 이름이다. 영조 40년에 영조의 후궁이자 사도세자 생모인 영빈 이씨의 사당으로 선희궁을 지으면서 새 다리를 놓고 신교라 불렀다. 1920년 개천 복개 때 사라지고 지금은터만 남았다. - P82

 국립서울농학교 내 선희궁 터  
선희궁은 훗날 칠궁으로 합사되었지만 사당 건물 자체는 국립서울농학교 내에 그대로 남아 있고 이름도 선희궁 터로 표시돼 있다. - P83

천막교실  
한국전쟁 당시 부산 초량동 항도초등학교에 설치된 천막교실 모습이다. 내가 다니던 청운초등학교 건물 또한 한국전쟁 때 폭격을 맞아 교실이 부족했기 때문에 나는 2학년 때 국립서울농학교 안에 설치된 이런 천막학교에서 공부했다. - P84

국립서울맹학교  
신교동 안동네에는 국립서울농학교뿐만 아니라 국립서울맹학교도 있다. 청각장애인을 위한 특수학교로 서울맹아학교라고 불리다가 2002년에 국립서울맹학교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P85

청운초등학교 
청운초등학교는 제법 명문이었다. 나와 같은 37회 동창생으로는 개그맨 전유성과 여성 최초의 지방법원 부장판사였던 이영애 전 판사가 있다. - P86

동창생으로는 카페 ‘학교종이 땡땡땡‘의 주인장이기도 한 개그맨 전유성이 맹활약을 하는 것이 자랑스러웠다. 법조계에서 유리천장을 뚫고여성 최초로 지방법원 부장판사와 사법연수원 교수가 된 이영애 전 판사도 동창이다. 6학년 때는 모의고사가 끝나면 성적순으로 방(膀)이 붙었는데 나는 항상 6반 이영애와 9반 이영애 사이에 있어서 그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 우연히 그를 만났을 때 물어보았더니 37회 동기는 맞지만몇 반이었는지는 생각나지 않는다고 했다. - P87

겸재 정선의 <청풍계도> 
청풍계는 청운초등학교 후문에서 조금 더 올라가다 왼쪽으로 난 가파른 비탈길에 있는 그윽한 골짜기였다. 여기에는 김상용의 저택이 있었는데 선조가 맑을 청(淸)과 바람 풍(風)을 써서 청풍(淸風溪)라는 이름을 내려주었다. - P89

원래 이름은 푸를 청(靑)과 단풍 풍(楓) 자의 청풍계(楓溪)였으나 선조가 맑을 청(淸)과 바람 풍(風)을 써서 청풍계(淸風溪)라는 이름을 내린후 바뀌었다. 
청풍계 더 가까이에는 훗날 우암 송시열이 이 뜻을 기려 주희의 글씨를 집자해 새긴 ‘백세청풍(百世淸風)‘ 이라는 암각 글씨(청운기 52-111번지)가 지금도 남아  있다. - P91

김상용의 아우 김상헌은 칠궁 담장과 맞대고 살면서 이 일대를 노래한 「근가십영」에서 ‘우리 형님이 청풍계 태고정을 지었다‘고 했다. 김상헌의 손자 김수항을 비롯한 수(壽)자 돌림 5명과 증손자 김창집을 비롯한 창(昌) 자 돌림 6명이 모두 출세하여 이 5 6창‘의 안동 김씨가문은 ‘장동 김씨‘라고 따로 불리었고, 김창집의 4대손 김조순이 순조의 장인이 되면서 조선 최대의 세도가문을 이루었다. 김상헌의집터인 칠궁 담장 밖 효자동 무궁화동산(효자로 97 건너편)에는 김상헌 시비가 세워져 있다. - P92

청운동 일대에는 조선시대 명사들이 많이 살았다. 청운초등학교 자리에서는 송강(松江) 정철(鄭澈)이 태어나  자하문로 길가(청운동 123번지)에표지석이 놓여 있다. 경기상업고등학교 교정에는 청송(聽松) 성수침(成守琛)의  집터가 있다. 성수침의 아들이 우계(牛溪)  성혼(成渾)이니 단짝으로 유명한 송강과 우계가 어린  시절 같은 동네 살면서 얼마나 정을 나누었을까 안 보아도 본 듯하다. - P92

경복고등학교 뒤편 창의문로 큰길 건너편 북악산 기슭에는 중종 때 남곤(南袞)이 살던 집이 있었다. 남곤은  심정(沈貞)과 함께 기묘사화를일으킨 장본인으로  벽초의 『임꺽정』에서 무수한 흉떨림을 당했다. 이들을 미워하여 작은 새우로 만드는 젓갈을 ‘곤쟁(袞貞)이 젓‘이라고 하여 소인배를 일컫는 말이 되었다는 인물이다. - P93

정선의 <대은암도> 
대은암은 기묘사화를 일으킨 남곤의 집에 있던 큰 바위로, 승지가 된 남곤이업무에 바빠 함께 어울릴 수 없게 되자 그의 친구 박은이 크게 은거했다는 뜻으로 ‘대은‘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전한다. - P94

그러나 이 설은 재고될 여지가 있다. 근래의 역사학계 연구를 보면 기묘사화에서 가장 주도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중종 본인이었다. 남곤의 경우 실제로는 김종직의 일파로 훈구파이면서도 사림파와 가까웠던 인물이고, 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기묘사화 당시에도 조광조의 처벌을 주장하긴 했지만 사사에는 반대하고 그 죽음에 슬퍼하는 등의 모습을 보였다. - P94

동농은 청풍계 김상용의 후손으로 일찍이 관로에 진출해 1895년 농상공부대신을 지냈다. 갑오경장이 실패한 뒤에는 독립협회의 위원으로선임되어 독립문에 걸려 있는 한자와 한글의 이름패를 쓴 명필이기도했다. 1902년 궁내부특진관을 지낼 때 창덕궁 후원 공사를 차질 없이수행한 공로로 고종이 목재를 하사해 이듬해에 이곳에 백운장(白雲莊)이라는 한옥과 몽룡정(夢龍亭)이라는 정자를 지었다. - P98

동농 김가진의 장례식
동농 김가진은 상해임시정부에 합류한 지 3년 뒤인 1922년에 세상을 떠났다. 임시정부는최고 원로였던 동의 장례식을 이처럼 성대하게 치렀다. - P99

스스로 충청도 관찰사로 좌천해 지방으로 내려갔고 1908년에는 대한협회 제2대 회장으로 친일단체 일진회를 성토하고 나섰다. 1910년 강제한일합병 후 일제가 예우 차원에서 남작 작위를 수여하여 받았다. - P99

그리고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 그해 10월, 동은 73세의 노구를 이끌고 허름한 늙은이로 위장하고서 육로로 몰래 빠져나가 상해임시정부에 합류했다. 병자호란 때 자결한 선원 김상용의 후손다운 애국심과 기개가 느껴지는 망명길이었다. 당시 『독립신문』은 동농의 망명 사실을보도하면서 그가 망명하는 심정을 노래한 한시 2편까지 실었다. (임형택「동농 김가진, 그의 한시」, 『역사비평』 2022년 가을호) - P99

나라가 깨지고 임금도 잃고 사직이 무너졌으되
치욕스런 마음으로 죽음을 참으며 여태껏 살아왔는데
늙은 몸이 상기도 하늘 찌를 뜻을 품어
단숨에 하늘 높이 몸을 솟구쳐서 만리길을 떠났노라 - P100

國破君亡社稷傾
包羞忍死至今生
老身尙有沖霄志
一舉雄飛萬里行

올해(2022)는 등농 서거 100주기가 되는 해이다. - P101

안평대군은 풍류를 좋아하여 부암동 무계정사와 용산 담담정을 지은바 있는데 이곳 수성동에도 별서를 지었던 것이다. 그래서 수성동계곡에서는 친형 (세조)에게 죽임을 당한 낭만의 왕자 안평대군의 자취를 느낄 수 있다. - P111

치마바위에는 중종의 첫 왕비인 단경왕후의 애틋한 전설이 서려 있다. 단경왕후는 좌의정을 지낸 신수근(愼守勤)의 딸로 연산군 5년(1499)에 진성대군과 결혼했는데 그가 왕(중종)이 되면서 자연히 왕비가 되었다. 그런데 왕비가 된지 7일 만에 역적의 딸이라고 폐위되어 궁궐에서쫓겨났다. - P111

사연인즉 아버지 신수근은 권세가문의 명신으로 그의 누이동생은 연산군의 비였다. 일설에는 1506년 연산군을 몰아내는 중종반정의 주모자인 박원종이 신수근에게 넌지시 "누이와 딸 중 누가 더 중하냐고 물어보며 거사에 동참할 것을 권했다. 그러나 신수근은 "내가 매부를 폐위하고 사위를 왕으로 세우는 일은 못하겠다"고 거절하자 박원종은 자객을 보내 신수근을 철퇴로 쳐 죽였다. 그래서 단경왕후는 졸지에 역적의딸이 되었다. - P111

단경왕후는 명종 12년(1557) 나이 70세에 세상을 떠나 양주에 있는 친정집 거창 신씨 묘역에 묻혔다. 그후 영조 15년(1739)에 복위됨으로써 새로이 왕릉으로 조성하고 능호를 온릉(溫陵)이라고 했다. 그리고 신수근 또한 복권되어 사람으로부터 고려 말의 정몽주와 같은 충신으로 추앙받게 되었다. - P112

중인 시인인 장혼(張混)도 송석원 곁으로 이사해 집을  짓고 이이엄(而巳嚴)이라 했다. 이후 중인들이 이  일대에 모여들었다. 중인문학을 위항문학(委巷文學),  또는 여항문학(巷文學)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꼬불꼬불한 골목, 사람들이 많이 사는 동네를 가리킨다. 양반들은 넓은 집에 살았으나 중인들은 좁은 골목에 모여 살았기 때문에 나온 말이다. - P123

벽수산장의 윤덕영 
친일귀족 윤덕영은 나라를 일제에 넘긴 공로로 막대한 하사금을 받아 송석원과 그 일대의 집을 모두 사들이고 벽수산장을 지었다. ‘벽수산장‘이라는 글씨 옆에는 추사가 쓴 ‘송석원‘ 글씨가 흐릿하게 보인다. - P127

"아닙니다. 제가 고맙죠. 오늘 저는 선생님께 크게 배운 것이 있어요.
그건 오거리 길들이 직선이 아니라 곡선이고 그것은 개천을 따라 자연스럽게 난 것이라는 점요. 저는 집만 보았지 길의 특징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었거든요. 사실 저는 인사동길이 S자로 휘었다는 것을 여태 의식하지 못했어요. 제가 느끼는 인간적인 체취가 이 자연스러운 길에서나온다는 것도요." - P137

‘제비‘는 이를테면 이제까지 있었던 가장 슬픈 찻집이요, 또한 이상은 말하자면 우리의 가장 슬픈 동무이었다.

불우하기는 구본웅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전쟁 중인 1952년 급성폐렴으로 누하동 이 집에서 46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는 벗이상을 그린 <친구의 초상> <푸른 머리의 여인> <여인>이라는 주옥같은작품들을 남겼고 그의 예술가 유전자는 후손에게 전해져 외손녀 강수진이 희대의 발레리나가 되었다. - P143

필운대는 인왕산 아래에 있다.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이 어렸을때에 대 아래에 사는 원수 권율의 집에 처가살이하였으므로 자신의 호를) 필운이라 불렀다. 석벽에 새긴 ‘필운대‘ 세 글자는 곧 백사의 글씨다. 대곁 인가에 꽃나무를 많이 심었기 때문에 경성 사람들이 봄철 꽃구경할 곳으로 반드시 먼저 여기를 꼽았다. - P144

인왕산은 2018년 5월부터 완전 개방되어 지금은 누구나 자유롭게 등반할 수 있게 되었다. 청와대의 경호·군사 목적 시설물이 배치돼 일반인접근이 부분적으로 통제된 인왕산 지역을 완전히 개방하기에 앞서 인왕산의 폐쇄적인 군사시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함께 검토하기 위해2018년 3월 10일 문재인 대통령과 나, 건축가 승효상이 함께 등반에 나섰다. - P147

이때 본래 초소란 사방 경계를 하기 가장 좋은 위치에 지은 것이기 때문에 이곳을 전망대로 활용하는 것이 역사성도 살리는 방안이라고 건의하여 지금 등반객들이 가장 애용하는 ‘초소책방‘이 탄생했다. - P147

중학교 때 국어 교과서에 나오는 너새니얼 호손(Nathaniel Hawthorne)의 큰 바위 얼굴」을 배울 때 소년 어니스트가 바라보며 살았다는 얼굴바위보다 우리 인왕산의 부처바위가 더 미덥고 멋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미술사를 전공하면서 인왕仁王)이 부처님 세계의 수호상임을 알게 되면서부터는 우리 부처바위가 서울을 수호하고 나라를 지키는바위라고 생각했다. 거기에다 산자락에 서울성곽이 둘러 있어 더 믿음이 갔다. - P149

북촌 1경 창덕궁 전경: 돌담 너머로 창덕궁의 전경이 잘 보인다.
북촌 2경 원서동 공방길: 창덕궁 돌담길 따라 빨래터까지 올라가는 길.
북촌 3경 가회동 11번지: 한옥들과 전통문화 체험 공방이 있다.
북촌 4경 가회동 31번지 언덕 기와지붕들 너머의 북촌 조망.
북촌 5경 가회동 골목길(내리막): 한옥들이 맞대어 빼곡히 늘어서 있다.
북촌 6경 가회동 골목길(오르막) 한옥 돌담들이 길게 뻗어 있다.
북촌 7경 가회동 31번지 : 1930년대에 지은 한옥밀집지구이다.
북촌 8경 삼청동 돌계단길: 경복궁 인왕산이 조망되는 돌층계길. - P152

북촌이라고 하면 우리는 막연히 조선왕조 대대로 내려오는 양반 동네를 떠올리기 쉽다. 북촌이라는 말의 유래 때문이다. 예부터 한양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청계천과 종로를 중심으로 남쪽 남산 아랫동네는 남촌, 북쪽 동네는 북촌이라고 불러왔다. 매천 황현은 『매천야록(梅泉野錄)」에서 이렇게 말했다.

서울의 대로인 종각 이북을 북촌이라고 부르며 노론이 살고 있고, 종각 남쪽을 남촌이라고 하는데 소론, 남인,  북인 삼색(三色)이 섞여살았다. - P154

근대의 지성들이 여기에 많이 모여 살면서 북촌에서는 개화사상이일어나고, 갑신정변이 모의되었고, 동학·대종교·불교의 종교운동이 일어났고, 3·1운동 준비가 이루어졌으며, 『동아일보』 창간되고, 진단학회 · 조선어학회 · 조선민속학회 등이 창립되었다. 해방공간에서 암살된대표적인 정치인인 우익의 송진우, 중도좌파의 여운형이 살았으니 북촌은 우리 개화기와 근대 지성의 심장이었다고 할 수 있다. - P155

왜 공공기관 건물의 정원은 다 이렇게 천편일률적으로 되었는가를조사해보니 이것이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관에서 건축비 예산을 잡을 때조경 비용을 아주 낮게 책정하고 또 관급공사는 이렇게 해야 뒷말이 없어 ‘공무원표‘로 귀착된 것이라고 한다. 이를 일컬어 돌과 영산홍과 회양목으로 이루어졌다고 해서 ‘돌·영·회‘라고 한다나. - P158

박영효는 1931년 이광수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개화파의 신사상은 모두 내 일가인 박규수대감 집 사랑방에서 나왔소. 김옥균, 홍영식, 서광범 그리고 나의 형박영교가 모두 재동 박규수 대감 집 사랑에서 모였지요. - P159

재동 백송을 보고 헌법재판소를 나오면 바로 재동초등학교 네거리다.
재동이라는 동네 이름은 1453년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기 위해 일으킨 계유정난 때 황보인 등 단종을 보필하던 대신들을 이곳으로 유인해 참살하면서 흘린 피가 내를 이루므로 동네 사람들이 집 아궁이에 있던재를 가지고 나와 길을 덮었다고 해서 잿골 (灰洞)이라 부르던 것이 한자명으로 재동(洞)이라고 표기된 것이라고 한다. - P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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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토박이
1993년, 서울시는 정도600년 사업의 일환으로 ‘서울토박이‘를조사했다. 선정 기준을 ‘선조가 1910년 이전의 한성부에 정착한 이후, 현서울시 행정구역 내에 계속 거주해오고 있는 시민‘으로 확정해 조사한바, 서울시민 1,100만명 중에서 해당자는 오직 3,564가구, 1만 3,583 명에 불과했다.
- P59

나는 그중 한 명인 서울토박이다. 내가 중학생이던 1960년대에도 사대문 안 서울 알토박이를 조사한다며 윤보선 대통령도 했고 누구도 했으니 해당되는 사람은 신고하라고 했다. 그때 큰아버지께 우리 집안도신고하자고 했더니 "그런 거 신고하면 주민세만 더 내라고 할지 모르니쓸데없이 신고할 생각하지 마라" 하셔서 못했다. 당시 결과는 모르지만 아마도 몇 천명에 불과했을 것이다. - P60

갑자기 서촌이라는 이름이 등장한 것은 북촌의 가회동 한옥마을이요즘 말로 ‘핫플레이스‘로 떠오르자 여기에도 한옥마을이 있다는 것을내세우기 위해 서촌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이후가 분명하다. 더 정확히는 북촌의 시가가 올라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이 생기고 들어갈 여지가 좁아지자골목골목 전통마을의 분위기가 살아 있는 이쪽으로눈길을 돌리면서부터 생긴 이름이다. - P61

젠트리피케이션

gentrification

낙후된 구도심 지역이 활성화되어 중산층 이상의 계층이 유입됨으로써 기존의 저소득층 원주민을 대체하는 현상을 가리킨다.



https://naver.me/Ft8uF08j

인왕산 아랫동네 서촌 
조선시대에 서촌은 한양의 서쪽인 서소문 정동 지역을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요즘은 인왕산 아랫동네를 서촌이라고 부른다. 필운대에서 백운동까지 인왕산 자락 아랫동네를 옛날엔 장동이라고 불렀다. - P62

박수근의 <아기 업은 소녀>는 생활은 가난했지만 따뜻한 온정이 넘치는 이 시절 골목 풍경을 그린 것이다. 그리고 그 소녀의 마음을 가장 잘표현한 시는 이오덕 선생이 펴낸 『일하는 아이들』에 실려 있는 문경 김룡초등학교 6학년 이후분 어린이의 「아기 업기」이다.

아기를 업고
골목을 다니고 있자니까
아기가 잠이 들었다.
아기는 잠이 들고는
내 등때기에 엎드렸다.
그래서 나는 아기를
방에 재워놓고 나니까
등때기가 없는 것 같다. - P69

선생님은 비록 이름을 세상에 널리 펼치시지 못했지만 이 세상의속물적인 부와 명성을 뛰어넘는 더 큰 사도(道)를 이루셨습니다. - P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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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엄마 손을 잡고 따라온 한 중학생이 내게 바짝 붙어 다니면서 마치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옛날이야기를 듣듯 재미있어하는 것이었다. 인왕산 수성동계곡에서 잠시 쉬어 갈 때도 내 곁에 붙어 앉아서는 무슨 얘기라도 해주려나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고는 스스로도멋쩍었던지 손에 든 귤을 까서 권하는 것이었다.
"고마워요. 근데 뭐가 그렇게 재미있어요?"
"선생님 어렸을 때 얘기가요."
"실례지만 몇 살이세요?"
"선생님과 띠동갑이에요." - P5

하나는 『천변풍경』의 박태원이 소설 기법으로 받아들였다는 고현학(考現學, modern-ology)이다.  고현학은 과거의 유물을 연구하는 고고학(考古學,  archae-ology)의 방법론을 현대 생활사에 적용하는  민속학적 방법론으로 일본의 곤 와지로(今和次郞)가  관동대지진(1923) 이후 도쿄의 주거생활을 연구하면서 내건 개념이다. 이런 고현학의 입장에서 본다면 서울 묵은 동네에 대한 나의 기억과 서술은 그 나름의 의의를 지닐 수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 P6

또 하나는 서성(書聖)으로 일컬어진 왕희지(王羲之)가  자기 집 정원인 난정(蘭亭)에서 벗들과 한차례 계회(契會)를 베풀고 그 모임을 기념하여 난정계서(蘭亭契序) 를  쓰면서 말한 마지막 구절이다.
후대 사람이 지금을 보는 것은 마치 지금 사람이 옛날을 보는 것과마찬가지일 것이니 (・・・) 후대에 이 글을 펼쳐보는 사람에게는 나름의감회가 있지 않겠는가.
後之視今 亦猶今之視昔(…)
後之攬者 亦將有感於斯文 - P6

북악산
서울의 주산, 그 오랜 금단의 땅 - P11

서울의 주산, 북악산
북악산(北岳山, 명승 제67호)은 높이 342 미터의  화강암 골산으로 서울의 주산(主山)이다. 백악산(白岳山)이라고도 불리며 전체 면적은 약 360만제곱미터(약 110만평)이다. 산줄기의 흐름을 보면 백두산에서 시작된 백두대간의 중간지점에 있는 금강산에서 서남쪽으로 갈라져 나온 한북정맥(광주산맥)이 북한산을 거쳐 북악산에서 문득 멈추고 양팔을 벌린 형상이다. - P11

서울이 조선왕조의 도읍이 되어 도시계획을 세울 때 경복궁 북쪽 담장 밖 북악산 지역은 한양의 지세를 보호하기 위해 일반인 출입을 금지시켰다. 수도 한양의 방위체제상 도성의 북문인 숙정문과 북문인 창의문은 평소에는 닫아두고 필요할 때, 이를테면 창의문은 군사 이동이 있을 때, 숙정문은 가뭄이 심해 기우제를 지낼 때만 열어두었다. 당시 한양의 인구가 10만 명 정도였기 때문에 공간 운영에 여유가 있었던 것이다. - P14

백악사
북악산은 금단의 구역이었기 때문에 동쪽삼청동과 서쪽 청운동 사이에는 오직 백악사(白岳祠)라는 사당만  있었을 뿐 어떤 건물도 축조되지 않았다. 백악사는 북악산의 산신에게 제사 지내는 사당이다. - P14

북악산은 진국백(鎭國伯)으로 삼고, 남산은  목멱대왕(木覓大王)으로 삼아 경대부와 사서인(士庶人) 모두 제사를 올릴 수 없게 하였다.

실록에서 말하고 있는 백악사는 북악산 정상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아직 명확한 위치는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북악산 정상에서는 조선 초기 기와편이 다수 수습된 바가 있다. - P15

조선왕조는 국난을 수습하면 그때마다 공신을 책봉했다. 공신에게 주어지는 혜택은 엄청난 것이었고 자손에게 상속되었다. 그러니 나라에공을 세우라는 것이었다. 공신책봉은 태조 때 나라를 세운 공이 있는개국공신부터 영조 때 이인좌의 난을 수습한 분무공신까지 모두 28번(삭제된 것을 제외하면 24번) 있었고 여러 형태의 공신회맹제가 열렸다. - P16

이 영빈관 건물은 박정희 시대 우리 관공서 건물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 정면정관의 권위를 앞세우면서 골조가 콘크리트든 석조든 전통 지붕을 얹어 한옥의 이미지를 살리겠다는 뜻이 들어 있는데 결과적으로갓 쓰고 자전거 타는 어색함을 면치 못하고 있다. 그 때문에 건축가가누구인지 알 수도 없고 또 알 필요도 없이 권위주의 시절의 자취만을 볼수 있을 뿐이다. - P37

결국 나는 광화문 대통령 시대를 여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기자들에게 공표했다. 그때 내 개인 생각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관저만은 옮기는 것이 맞는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우선사람이 사는 생활공간으로서 부적합하고 ‘풍수‘를 보아도 관저는 옮겨야 한다고 답했다. 이후 나는 청와대의 풍수 문제가 나올 때마다 구설수에 오르고 있다. 그러나 내가 말한 풍수는 청와대 터가 아니라 관저 건물에 국한해 말한 것이었다. 청와대 자리야 예부터 ‘천하제일복지(天下第一福地)‘라고 칭송되는 길지인데 내가 그렇게 말할 리 있겠는가. - P43

상춘재 
청와대를 방문하는 외국 국빈들에게 우리나라 전통 가옥을 소개하고 의전 행사를 치르기 위한 목적으로세운 건물이다. 전형적인 한옥 구조로 되어 있으며 수령 200년 된 금강송을 사용해 그 재질감이 아주 뛰어나다. - P44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가 말하기를 서화를 보는  눈은 ‘금강안(金剛眼) 혹리수(酷吏手)‘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 즉, 금강역사처럼 부릅뜬눈으로 보고, 혹독한 관리가 세금을 메기는 손끝처럼 치밀하게 따져야그 진면목을 알 수 있다고 했는데 이 책이야말로 ‘혹리수‘가 펴낸 책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나는 몇 가지 사항에 대해서만 재확인을 해주고 기꺼이 추천사를 써주었다. 그리고 그해 ‘대한민국 문화유산상‘ 시상식 때이성우 본부장에게 문화재청장 감사패를 수여했다. 이 책은 2019년에개정판이 발간되었다. - P46

고종의 문집인 『주연선집 (珠淵選集)』에 실려  있는데 그중 등옥련정(玉蓮亭)은 다음과 같다.

화려한 산 저절로 우뚝 솟았고
그 아래 옥련정이 놓여 있구나
여름날엔 맑은 기운 많기도 한데
긴 계곡엔 푸른 나무 가득하네

華山天作屹
下有玉蓮亭
夏日多佳氣
溪長萬木靑 - P50

이 글씨는 누군가가 오래전에 북악산에 올라 한양을 내려다보면서과연 복지임에 감동해 새겨놓은 것이라는 설이 있다. 그런가 하면 암각상태로 볼 때 200년 이상은 되어 보이지 않기 때문에 혹시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복원을 정당화하기 위해 누군가를 시켜 새기게 한 것이 아닌가 의심하는 사람도 있다. 그 내막이야 어떻든 북악산에서 서울을 내려다보면 여기는 천하의 복지라는 생각이 절로 들게 된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600년 이상 수도를 이어가고 있겠는가.  - P55

그래서 수헌거사(樹軒居士, 유득공의 아들 유본예로  추정)는 『한경지략(漢京識略)』에서 이렇게 말했다.

백악이 도성 북쪽에 있는데 평지에 우뚝 솟아났고, 경복궁이 그 아래 기슭에 있다. 서울 도성을 에워싼 여러 산 중에 이 산이 북쪽에 우뚝 뛰어나니 조선왕조 국초에 이 산으로 주산을 삼고 궁궐을 세운 것은 잘된 일이다. - P55

현실적으로 이미 개방된 청와대의 문을 다시 닫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장기적인, 나아가서는 최종적인  개방 형태에 대해서는 명확한그림을 제시해야 한다. 청와대라는 역사적이고 상징적인 공간을 앞으로어떻게 사용할 것이라는 마스터플랜을 제시해야 하는데, 이는 대통령혹은 문화부장관이나 문화재청장 개인의 상식적인 소견에서 나오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전문가들의 의견을 듣는 것도 단편적이고 아이디어제공이라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 P56

이럴 경우 가장 좋은 방법은 ‘건축설계 경기‘를 여는 것이다. 그리고이것은 세기적인 설계 경기로 국제적으로도 크게 주목받을 것이다. 이때 반드시 커미셔너나 코디네이터 주도 하에 추진해야 한다. 지금 정부에서 해야 할 일은 뛰어난 건축가에게 이 책임을 맡기는 것이다. 그리고그 설계 경기는 국내외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세계적인 프로젝트로 진행해야 좋은 마스터플랜도 구할 수 있고 더불어 국제적으로도 큰 반향을 일으키며 국가 홍보에도 보탬이 될 것이다. 나는 이런 방향에서 청와대가 재정비되어 우리 시대의 문화유산으로 남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간절하다. - P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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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상티망 같은 피해의식이 있어요. 아라시마 씨가전형적인 그런 부류죠."
*실패자가 성공자에게 품는 증오, 질투, 원한, 복수심.

"그 사람들은 될수있으면 소설처럼 귀찮은 것은쓰고 싶지 않아해요. 그러니까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돌려쓰기처럼 다른상에서 낙선한 작품으로 다른신인상에 또 응모하죠. 그들은 작가라는 타이틀을갖고 싶을 뿐입니다. 현실의 자신을 과거에 묻고 작가라고 소개하며 거들먹거리고 싶은 거죠. 그런 놈들이 득실득실합니다."

라시마 씨. 이들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서라도 우리회사는 『변화의 조기 문고화‘와 『유현의 숲』의 동시 출간을 결정했습니다."
일본에서는 보통 책을 단행본으로 먼저 출간한 다음 일정 시간이 흐른 뒤 문고판으로 재출간한다.
그 대단한 이누카이도 말문이 막혔다. 살인사건피해자와 범인, 두 사람의 작품을 팔아먹으려는 심산이다.
그야말로 기회를 놓치지 않는 민첩함과 빈틈없는상술에 이 상황에 가장 어울리는 말을 떠올렸다.

떨어진 동전, 먼저 줍는 사람이 임자다.

"인간의 체온은 외부 온도와 상관없이 항상 일정온도를 유지해. 하지만 자율신경에 이상이 오면 체온 조절이 불가능해져서 신체 기능에 지장을 주지.
즉 원인은 자율신경 이상이기에 동사가 반드시 추운곳에서만 일어나는 게 아니란 말이야. 설령 한여름뙤약볕이라고 해도 조건만 맞으면 동사해. 원래 동사라는 건 특이소견이 적긴 한데, 저온 상태에서 헤모글로빈과 산소가 결합해 산소 헤모글로빈 농도가높아지므로 시반이 선명한 붉은색을 띠어. 같은 이유로 좌우 심실의 혈액 색상에도 차이가 나지. 그리고 온몸을 도는 심장의 피는 추출해서 내버려 두면응고돼. 또 이번 경우에는 다른 요인으로도 동사를추정할 수 있어."

"알코올은 뇌를 마비시켜 일정량 이상을 섭취하면 심박 기능을 제어하는 뇌간부, 나아가 생명유지에 관여하는 중추 부분까지 마비시키지. 혈중알코올농도 0.40퍼센트를 넘으면 만취자의 절반은 한두시간 만에 사망해. 잘 걷지못하고 의식이 흐릿하고말도 제대로 못 하지. 한번 넘어지면 일어나지도 못해. 알코올 때문에 혈관이 확장돼서 빠르게 체온을빼앗겨. 공원 벤치에 쓰러지면 꼼짝도 못 하는 상황에서 체온이 떨어지기 시작하지."

"빈축은 돈을 내고라도 사라, 라는게 우리사훈이라서요."
자조 섞인 웃음을 짓는 얼굴은 어딘가 측은하게느껴졌다.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자신이 시궁창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자랑하는 존재는 물고기 정도일 테다.

"자신이나 자신이 몸담은 조직을 정당화하는 인간보다 현실을 제대로 인식한 인간을 더 믿을 수 있거든요. 자신과 다른 사람의 능력을 옳게 평가할 수있으니 일을 할 때도 실패가 적죠."

이누카이는 종이 한 장을 더 꺼냈다.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변화는 계절만의 것이아니다. 시대도 유행도 마치 가을 하늘의 구름처럼흘러간다. 내 주위에서는 아내의 태도가 그러했다.
예전에는 햇살처럼 따스했던 아내가 지금은 북풍처럼 차갑다. 그것은 마치 온도를 한껏 내린 냉장고처럼………."

"너처럼 살면 너 나 할 것 없이 다 나쁜 인간으로 보이나 보지."
"그건 아니지."
데루유키는 비뚜름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인간은 원래 다 나빠. 정도에 차이만 있을 뿐이지."
"너란 놈은!"

"옛날부터 도덕주의자였던 형은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 인간은 누구나 가슴속에 악의를 품고 있어. 우리 야쿠자들의 악의는 겉으로 티라도 나니 애교지. 아무튼 간판이니까. 그런데 평소에 숨기고 있는 아마추어들은 감당이 안 된다니까."

노노개호: 노인이 노인을 간병하는 사회현상을 뜻하는 말로, 초고령사회 일본에서 나타난 신조어,

"바뀌었다기보다는 완화됐다고 해야겠지. 성동일성 장애자의 성별 취급에 관한 특례법, 이름이 길지? 성별을 바꾼 것을 사회가 인정한다는 뜻으로, 요점은 뭐 호적이나 주민등록표 내용을 변경하는 거야. 그 조건이 예전보다 완화됐어요. 즉 세상이 그런 사람들을 받아들인다는 뜻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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