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교류에서 타 문명을 선택적으로 수용하여 자신의 전통문화를 가일층 발전 · 풍부화시키는 이른바 융합(融合)의 묘미를 살린 데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 문화유산 중에는 이러한 융합물이 적지 않지만, 고려청자는 단연 그 수작으로 꼽힌다. 문명교류사에서 보면 융합성을 구현한 문명만이 선진의 반열에 올라 세계성을 인정받게 된다. - P94
작기도 하여라 푸른 옷 입은 동자 고운 살결 옥과 같구나. 너의 고마움을 무엇으로 갚을손가, 깨지지 않게 소중히 간직하리. - P98
고려청자는 시대를 넘기면서 조선시대의 분청사기(粉靑沙器)와 백자(白磁)로 그 맥을 넘겨주었고 덕분에 적어도 17세기까지는 세상에서 자기를 만들어 쓰는 나라는 우리와 중국뿐이었다. 그것도 우리는여러 면에서 중국을 앞섰다. 이렇듯 문명간의 융합성을 최상의 수준에서 구현한 고려청자는 ‘꼬레아‘의 상징으로, ‘미스 고려‘의 화신으로 우리 문화사뿐만 아니라 세계 도자사를 빛나게 수놓고 있다. - P102
그러나 최초의 인쇄술은 그 첫 단계인 단순인쇄 단계에서 출현한 날인인바 그 시원은 중국이 아니라 5,000년 전의 메소포타미아이며, 인쇄술의 꽃이라고 하는 금속활자의 도입에서는 우리에게뒤지고 있다. 목판인쇄의 경우에도 중국사람들은 자존심을 걸고1966년 불국사 석가탑에서 발견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약칭『무구정경』)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본이라는 사실을 극구 부정하면서 신빙성도 별로 없는 몇몇 목판인쇄본 유물을 들고 나와 우리보다 앞섰다고 강변에 가까운 주장을 하고 있다. 이러한 점들을 감안할 때, 인쇄술이 중국의 발명품이라고 하는 통념은 이제 깨져야 할 것이다. - P105
세계 최고의 목판인쇄본과 금속활자본을 함께 보유하고 있는 우리나라는 인쇄문화에 관한 한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우리가 인쇄문화의 당당한 창도자라고 한들, 여기엔 하등의 하자가 없다. - P107
중국에서 금속활자인쇄에 실제로 성공한 것은 15세기 말엽 명나라 때다. 우리의 『직지』보다 한 세기나 뒤에나온 인본들을 보면 활자의 주조나 조판 기술은 우리 것과 비교가 안될 정도로 허술하다. - P111
일찍이 미국의 저명한 인쇄문화연구가카터(T. F. Carter)는 고려 말과 조선 초 무렵에 "한국은 인쇄술에서세계를 선도하고 금속활자의 사용을 고도로 발전시켜 중국에 ‘역수출까지 했다고 지적하면서, 활자인쇄가 고려로부터 유럽에 전해졌을개연성은 있으나, 그 ‘확실한 증거는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고 했다. 오늘의 사정도 크게 다를 바 없다. 그러나 퍽 의미 있는 지적이다. - P112
* 2005년 5월 19일 서울 신라호텔에서 열린 ‘서울디지털 포럼 - 세계정보기술 정상회의‘에 참석한 미국 전 부통령 고어(Albert Gore)는 기조연설에서 "한국의 유비쿼터스는 금속인쇄술에 이어 세계가 한국에 두번째로큰 신세를 지는 커뮤니케이션 부문의 큰 성과"라고 하면서 "독일의 구텐베르크가 만든 금속인쇄술은 한국에서 건너온 기술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했다. - P114
대장경(大藏經)이란 ‘3개의 광주리‘ 라는 뜻의 산스크리트어 ‘트리피타카‘ (Tripitaka)를 번역한 말로서 ‘삼장경‘ 혹은 ‘일체경‘이라고도 한다. 여기에는 부처의 가르침인 경(經)‘과 불자나 교단이 지켜야 할 계율인 ‘율장(律藏)‘, 그리고 ‘경장‘과 ‘율장‘에 관한 다양한 해석인 ‘논장의 3가지 내용이 포함된다. 처음에는 인도에서 불전을 나뭇잎에 새겼기 때문에 일괄해서 ‘패엽경(貝葉經)‘이라고 불러오다가 경장과 율장, 논장을 3개의 광주리에 나누어 보관했다는 데서 ‘대장경이란 이름이 유래되었다. 이러한 불전을 영구보존하기 위해 중국 송나라를 비롯한 동양 각국에서는 경문을 나무에 판각하기 시작했는데, 그 종류가 20여 종에 이른다. 그 가운데 가장 방대하고도 완벽한것이 바로 고려대장경이다. - P117
경판의 길이는68~78cm이고, 폭은 약 24cm, 두께는 2.7~3.3cm, 무게는 3~3.5kg정도이다. 한 면에 23행, 한 행에 14 자로 앞뒤 양면에 644 자이니, 전체 글자 수는 줄잡아 5,200 만 자를 헤아린다. - P121
그리고 글자를 새기는 과정은 그야말로 지성(至誠)의 발현 그 자체다. ‘1자 1배‘, 즉 글자 한자를 새길 때마다 한 번씩 절을 하면서 열과 성을 다했기에 그 천문학적 숫자에 달하는 각자(字)에 오자나탈자가 거의 없다고 하니, 이것은 세계 인쇄사에 전무후무한 기적이라 아니할 수 없다. 각자공한 사람이 하루 평균 40자를 새긴다고 하면, 각자에만도 연인원 130만 명이 동원된 셈이다. 그밖에 필사공, 목공, 칠공, 운반부, 교정사, 기도승 등의 인력도 매일 200명 이상이함께했으니, 판각을 완성하는 데는 연인원 약 250만 명이 참여한 것으로 추산된다. 한 장의 무게를 3킬로그램씩만 잡아도 240톤이나 되는 경판 전체를 지천사에서 해인사로 옮기는 데만 꼬박 2년이 걸렸다고 한다. - P122
고려 500년사는 국권을 지키기 위해 주변국들과 화전(戰) 양면의교착관계를 유지하면서 다양한 교류를 펼쳐온 역동적인 과정이다. 특히 후반기에 와서는 강화도로 파천(播遷)까지 하는 국난 속에서도 30년간(1231~1259) 몽골의 7차 내침을 막아내고, 근 100년간(1259~1351) 의원간섭기를 슬기롭게 타개함으로써 몽골중심 천하에서유일하게 나라의 자주권을 지켜냈던 것이다. - P126
념으로 1278년 쿠빌라이를 찾아갔다. 협상 끝에 원의 주둔군과 다루가치를 철수시키고 조세징수의 권한을 돌려받는 등 몇 가지 국권회복 사항에 합의함으로써 20년 전 원세조가 부왕에게 한 ‘불개토풍‘의약속과 그 연장선상에서 고려의 존속을 보장받는 사대관계의 기조를 재확인했다. 이렇게 원 세조 때 양국 간의 관계를 규제하기 위해모색된 체제를 ‘세조구제(世祖)‘라고 한다. 이 ‘세조구제‘는 향후양국 간의 국가적 관계는 물론 교류관계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 P128
그 밖에 우리말로 굳어져버린 낱말들에서 몽골어의 잔재를 찾아볼수 있다. 왕과 왕비에게 붙이는 ‘마마‘, 세자와 세자비를 가리키는 ‘마누라 (마노라)‘, 임금의 음식인 ‘수라‘, 궁녀를 뜻하는 ‘무수리‘ 등 주로 몽골 출신 공주들의 활동무대였던 궁중에서 쓰는 이러한 호칭들은 몽골어에 그 어원을 두고 있다. ‘벼슬아치‘나 ‘장사치, 속어인 ‘양아치‘에서 어미 격인 ‘치‘는 ‘다루가치‘나 ‘조리치‘ (청소부), 화니치‘ (거지), ‘시파치‘ (매사냥꾼) 등 직업을 나타내는 몽골어의 끝글자 ‘치‘를취한 것이다. 매나 말과 관련된 ‘보라매‘나 ‘송골매‘, ‘아질게말‘ (망아지), ‘가라말‘(검은말) 등도 몽골어에서 유래된 것이다. - P132
이와 같이 고려풍‘과 ‘몽골풍‘으로 대변되는 고려와 원나라 간의교류에서 우리는, 비록 이질 문명이지만 생산적인 융합이 이루어질때문명 본연의 상보 · 상조적 교류가 실현 가능하게 되며, 문명은 모방성이란 근본속성으로 인해 ‘불개도풍‘ 같은 인위적인 제어도 무릅쓰고 사방으로 전파되고 필요에 따라 선택적으로 수용된다는 등 문명교류의 유의미한 원리들을 터득하게 된다. - P132
역사는 언제나 냉철하다. 누가 뭐라고 해서 그대로 되는 법도 없고, 또 누가 아니라고 해서 무턱대고 부정되는 것도 아니다. 1,000년 전부터, 어쩌면 그보다도 더 일찍부터 있어온 한국과 아랍 이슬람 세계간의 교류상을 감안할 때, 한국은 결코 ‘은자(隱者)의 나라‘가 아니라, 열린 나라였다. 그러기에 한국과 이슬람의 만남은 신라를 이어고려와 조선조, 그리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끊이지 않고 면면히 지속되어왔다. - P135
『고려사』의 기록에 의하면 고려 초기인 1024년과1025년, 1037년에 열라자(悅羅慈)와 하선(夏)을 비롯한 회회상인들이 100여 명씩이나 무리를 지어 개경에 와서 수은이나몰약(沒藥, 방부제), 소목(蘇木, 외과용 약) 같은 진귀한 공물을 진상했다. 고려왕은 그들에게 객관(客)까지 마련해 후대하고, 돌아갈 때는 황금과비단을 하사하기도 했다. 열린 나라 고려의 아량이며, 이질 문명 간의 범상찮은 만남이었다. - P134
이슬람세계로 말하면 이때는 압바스조 이슬람제국(751~1258)의 전성기로서 이슬람문명이 세계를 향해 종횡무진으로 파급되어 급기야는 그 물결이 직·간접적으로 한반도까지 밀려왔던 때다. 그러다가몽골군의 서정(西征)으로 인해 이슬람제국이 붕괴되자 그 물결은 일시 가라앉고 말았다. 그래서 고려 중기에는 만남의 자취를 별로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문명 간의 만남에는 한때의 멈춤은 있어도 영원한 끊임은 없으며, 그 멈춤조차 또 다른 만남을 위한 쉼표이자 뜀대에 지나지 않는다. - P135
쌍화점에 쌍화를 사러가니 회회아비가 내 손목을 쥐었다. 이 소문이 상점 밖에 퍼진다면 조그마한 새끼 광대인 네가 퍼뜨린 것인 줄 알리라. - P138
고려와 이슬람세계간의 교류물 중에는 오늘날까지도 우리의 일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으니, 그것이 바로 소주다. 서양에서는 ‘취중진담(醉中眞談)‘이란 이유를 들어 술을 신이 인간에게 하사한 최고의 선물이라고 한다. 이러한 술이 한국과 이슬람의 만남을 주선한 매체가 되었다면 이것이야말로 신이 두 문명에 하사한 실로 진중하고 신기한 선물이 아닐 수 없다. - P139
이처럼 고려와 이슬람의 만남과 교류는 주로 몽골의 내침과 간섭이란 특수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거의 일방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역설적으로 이러한 만남이었기에 이슬람의 전파나 수용은 역동적일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길지 않은 만남이었지만 그 영향은 자못 심대해 오늘날까지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 P140
이렇게 문익점의 3년간 귀양살이 여부가 기록에 따라 다르며, 따라서 원으로부터 귀국한 때도 3년간의 차이 (1334년과 1337년)를 보이고있다. 게다가 당시 원나라에서 목화씨 반출이 금지되어 목화씨 10개를 붓뚜껑 속에 감추고 들어왔다는 기록은 사적에 명시되어 있지 않다. 이것은 아마 그의 절절한 애국애민정신을 강조하기 위해 후세에가공 · 윤색한 전설적 일화라고 짐작된다. 역사는 이런 유의 전설을얼마든지 허용하고 있으니, 굳이 허구라고 나무랄 필요는 없다. - P145
작금 시빗거리로 떠오르고 있다. 일부에서는 목숨을 걸고 가져온 소중한 목화씨를 남에게 부탁해 심게 할 수는 없었을 것이라는 ‘심증‘을들어 천익과의 협력재배를 부인하며, 또한 실 뽑는 기구인 ‘물레는호승의 도움을 받아 천익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문익점의 손자인문래(萊)가 만든 것으로서 그 이름 역시 문래에서 유래했다고 하면시, 천익은 목화재배나 수명과는 무관하다고 주장한다. 그런가 하면다른 편에서는 목면재배에 성공한 사람은 문익점이 아니라 정천익이므로 사적 108호인 ‘문익점면화시배지‘란 명칭을 응당 ‘목면시배지로 바꾸어야 한다며 행정소송까지 제기한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자못 안타깝고 낯 뜨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 P147
고려조 우왕(禑王) 때에는 문익점이 살던 배양리에 효자비를 세웠고, 조선 정종 때는 그가세상을 뜨자 묘사를 짓게 했으며, 태종 때는 조선왕조에서 관직을 지내지 않았음에도 예문관제학(禮文館提學)을 하사하고 강성군(江城君)으로 봉하면서 시호를 충신(忠)이라 했으며 부조묘도 세우게했다. 세종대왕에 이르러서는 영의정을 증직하고, 그가 백성의 살림을 넉넉하게 했다고 해서 ‘부민(富民侯)‘란 칭호를 추서했다. 실로 문익점이야말로 문명교류사에서 보기 드물게 목화씨 전래와 무명의전파란 장거로 국민을 복되게 한 부민교류의 큰 별이다. - P149
교류사에서 보면, 일본의 면직업은 문익점을 통한 간접전파의 결과물이다. 그러던 일본의 면직업은 우리를 앞질러 근대화를 선도한 산업으로 도약했다. 우리나라도 조선조의 면업장려정책으로 인해 17세기 중엽까지도 함경도를 제외한 전국 각지에서 면작이 이루어졌고, 명나라사신들에게 면직포를 하사할 정도로 면업이 발달해 그 질이높았다. 그러나 그 후의 쇄국정책으로 인해 우리의 면업은 근대화의문턱에서 그만 머뭇거리다가 급기야 망국과 더불어 조락하고야 말았다. 뼈저린 역사의 교훈이다. - P150
흔히들 우리 겨레는 ‘한핏줄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성씨 가운에서절반 가까이가 외부에서 들어온 귀화성이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결코 그렇지만은 않다. 혈통을 따질 때, 우리들 중 순혈과 혼혈의 비중이 어느 정도인지는 밝혀진 바가 없으나, 분명한 것은 귀화에 의한혼혈이 만만찮은 비중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아마 100여 년 전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 (1895)의 저자인 푸른 눈의 쌔비지 - 랜도어 (A. H. Savage-Landor)의 눈에 조선은 다민족의 혼혈사회로 비쳤나보다. 그런데도 우리가 굳이 ‘한핏줄‘이라고 말하는 것은 대대로 포용성과 융합성이 남달리 강한 한민족(韓民族)의 ‘용광로‘ 속에서 귀화인들을용해시켜 적어도 생활문화나 의식구조에서는 동질성을 확보했기때문일 것이다. 많은 나라들이 우리와 경우가 비슷하지만, 다민족화를 방치한 나머지 전근대적 민족갈등을 빚고 있는 사정을 감안할 때, 우리는 우리 겨레의 역사에 자부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주체적 구심력이 강할 때만 인간을 포함한 외래의 문물을 순기능적으로 수용할 수 있다는 진리를 다시 한 번 실감케 한다. - P158
당쟁을 한국인의 고질적 ‘민족성‘이라고 냉소하면서, 조선시대의 큰 병폐 때문에 나라가 망해 결국 한일합방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강변하는 일제식민사학의 해악을 갈파하고 있는 오늘, 같은 맥락에서 또 다른 병폐라고 꼬집는 이른바 ‘쇄국‘에 대해 재고를 요청하고, 조선은 ‘닫힌 나라‘가 아니라 ‘열린 나라‘ 였다고 항변한들 과연 그것이 무리일까. - P164
동양 3국은 근대화와 서구에 대한 대응을 위한 방편으로서 공히 서학을 수용한 점에서는 역사의 궤를 같이했지만, 그들이 처한 역사적환경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서학에 대한 수용태도라든가 서학이 3국의 근대화에 미친 영향은 서로가 사뭇 다르다. 이러한 현상은 한·일양국의 서학수용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 P179
흔히들 조선의 서학수용을가리켜 ‘동도서기(東道西器)‘, 즉 우리의 전통적인 제도와 사상은 지키면서 근대서구의 과학기술을 받아들인다고 하며, 일본의 란가꾸수용은 일본의 정신 위에 서구의 유용한 것을 가져와 사용한다는 화혼양재(和魂洋才)‘로 표현한다. 그런가 하면 중국의 경우는 중국 학문을 바탕으로 하여 서구 학문을 받아들인다는 의미에서 ‘중체서용(中體西用)‘이란 말을 쓴다. 용어는 달라도 뜻은 그것이 그것이다. 여기서 ‘동도‘나 ‘화혼‘ ‘중체‘는 ‘이적 측면을, ‘서기‘나 ‘양재‘ ‘서용‘은 ‘기적‘ 측면을 염두에 둔 낱말들이다. 여기서의 공통된 난제는 서학을 받아들이면서 어떻게 전통을 지키고 계승하는가 하는, 이를테면전통과 근대의 조화 문제다. - P180
이러한 넉넉함과 질박함은 우리나라 도자문화의전통이다. 미술사학자 김원룡(金元龍)은 중국도자기가 장대하고 완벽하게 잘 차린 경극배우 같다면, 일본도자기는 화려하게 꾸민 기생 같고, 한국도자기는 수수하게 차린 가정부라고 했다. - P192
그럴듯한 익살스러운 비교다. 바꾸어 말하면, 중국도자기는 다양하고 완벽한 모습을, 일본도자기는 화려한 색깔로 꾸민 모습을, 한국도자기는 무던하고 소박한 모습을 각각의 특색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 P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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