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렇게 우수한 도자문화의 전통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한때우리보다 뒤처졌던 사람들도 해온 일들을 미처 따라잡지 못했다. 그것은 우리만의 울타리 안에서 맴돌다보니 우리의 도자문화를 보편화·세계화시키지 못한 탓이다. 단언컨대, 자포니즘 도자기의 어디엔가는 조선백자의흔적이 묻어 있을 것이다. 다만 우리가 등한시하다보니 발견하지 못했을 따름이다. 우리가 그것을 발견했을때, 우리는 세계에 대고 우리의 도자문화가 유럽에 영향을 미쳤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P194

이제 우리는 자신을 세계사적 지평에 올려놓고 우리가
가졌던 것과 갖지 못했던 것을 반듯하게 가려내면서 이어가야 할 것은 또한 무엇인가 깊이 사색해봐야 할 것이다. - P195

유용한 수산지원이나 광물자원이 풍부하다.  그러나 제대로 개발해 활용하고 있지못하다는 것이 그들의 일치된 평가다. "한국은 가난한 국가가 아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한국국민의 잠재된 에너지는 거의 사용되고 있지 않다"는 것이 비숍의 지적이다. - P199

조선인들의 성정(性情)이나 생활관습은 언제  어디서나 이방에서온 서양인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조선인들의 건전한 도덕과따뜻한 인정은 서양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음을 곳곳에서 찾아볼수 있다. 한반도를 8년간 12번이나 여행하고 『한영대사전』을 편찬해우리나라 영어교육에 큰 족적을 남긴 캐나다 출신의 선교사 게일(J.S. Gale)은 저서 『전환기의 조선』 (1909)에서 한국인은 정직해서 신뢰할 수 있고, 신용을 중시하며 문서가 아니라 구두로 한 약속도 철저히 지키는 등서양인보다 더 훌륭하다는 호평을 내린다. - P201

조선에 대한 서양인들의 이해나 이미지는 이토록 다르다. 이러한편차는 근원적으로 보면, 동양에 대한 서양의 지배주의적 · 우월주의적 사고방식인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의 인식지평에서 바라보는가 아니면 남을 있는 그대로 발견하고 이해하려는 타자의 인식지평에서 바라보는가 하는 근본입장에 따라 다를 것이다. 여기에 더해 그들의 조선체류기간이나 체험의 심도, 그리고 정보수집대상과 경로의 차이도 그러한 편차를 낳게 한 객관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 P203

서양인들이 본 조선을 떠올리노라면 비분강개하기도 하고 애상이나 회한에 젖기도 하지만, 그럴수록 우리는 그것을 피하지하게 되돌아봐야 한다. 왜냐하면 공자가 "논어"의「학이(學而篇)」에서 말하듯이 "어디로  가려는지 알고 싶거든 어디서 왔는지 되돌아봐야 하기 [往而知來者]" 때문이다. - P204

고구마가 알려지면서 재배된 시기는 1760년대다. 당시 예조참의였던조엄(趙)이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와 쓴 기행문인 『해사일기 (海事日記)』에 의하면,  그가 일본으로 가던 길에 쓰시마섬[對馬島]에서  고구마를 발견해 들여왔다고 한다. 그는 이 책에서 쓰시마섬에 감저(甘藷)라는 것이 있는데, ‘효자‘ 혹은  ‘고귀위마‘로 부른다고 하면서, 이것을 가져다가 심으면  문익점의 목면처럼 백성들을 매우 이롭게할 것이라고 말한다. - P219

1905년에 국내 최초의궐련으로 ‘이글‘이 생산되었으며, 일제시대에는 30여 종의 담배가 출시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문화로서의 담배 도입은 당초부터 적지 않은 저항을 받아왔다. 우리나라에서는 담배에 인이 박인다는 이유로1650년경에 인조가 금연령을 내렸다. 그러나 오래가지는 못했다. - P224

조상들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때에도 그것을 통째로 삼키는 것이아니라 우리의 기호와 실정에 맞게 고치고 새김질하여 완전히 소화함으로써 전통문화로 승화 고착시켰다. 이것은 문명교류에서 보기드문 순기능적 수용의 본보기다. - P225

끝으로 『표해록』의 행간마다에서 저자 최부의 높은 소양과 도도한기질을 엿볼 수 있다는 것도 이 책만의 특성이라 말할 수 있다. 최부는 조선의 문사로서 
포학지사(範學之士, 박식한 인사)다움을, 
조선의 사람으로서 정도직행지사(正道直行之士,  바른길을 꿋꿋이 걸어가는 인사)다움을 
조선의 관리로서 충군애국지사(忠君愛國之士)다움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 P233

최부의 표해록』이 3대 중국기행문의 하나라면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은 4대 세계기행문의 하나로 꼽힌다. 이렇듯 우리는 자랑스러운 세계적 문화유산을 다수 가지고 있으며, 그만큼 세계적 문명교류에도 기여해왔다고 당당히 자부할 수 있다. - P234

우리 겨레의 5,000년 문명사를 되돌아보면, 어느 순간도 세계와 동떨어져 살아본 적이 없었음을 알 수 있다. 늘 남들과의 어울림 속에서무언가를 서로 주고받으면서 살아왔다. 예나 지금이나 그 주고받음은 공간적 매체인 길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문명사에서는 문명을 소통시키는 길을 통틀어 씰크로드(Silk Road)라고 한다. 씰크로드를 제쳐놓고 문명의 교류나 세계성을 논할 수 없다. - P237

요컨대 씰크로드는 문명의 유대이고 세계로의 이음길이다. 그런데 이 본연의 유대와 이음길이 무시당해왔으니 실로 개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 P238

한 나라의 세계성은 비단 보편적 가치의 공유,
즉 보편성에서만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독창적인 가치의 창출, 즉 개별성에 의해서도 보장된다. 사실 모든 보편성은 교류를 통한 개별성의승화다. 개별성을 떠난 보편성이란 있을 수 없다. - P251

‘문명교류기행‘은 우리 역사와 문화에 대한 교류사적 이해에서 시동을 건긴 여정으로서, 그 지향점은 ‘한국 속의 세계와 그 세계성을가늠하는 데 있다. 비록 영욕이 엇갈린 역사지만 그것이 우리와 운명을 같이해온 역사이고, 또 그 연장선상에서 영원히 살아가야 하기에,
우리는 더 냉철하게 어제를 성찰하고 오늘을 점검하며 내일을 설계 - P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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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덕 李五德, 본관?

출생 1925년 11월 14일

사망 2003년 8월 25일 (향년 77세)

이오덕을 읽어보자
이렇게 많은 책이 있는줄 미처 몰랐다.
읽은책, 가지고있는책 단 1권 ㅠㅠ

<알라딘 저자소개>
1925년 11월 4일에 경북 청송군 현서면 덕계리에서 태어나 2003년 8월 25일 충북 충주시 신니면 무너미 마을에서 세상을 떠났다. 열아홉 살에 경북 부동공립초등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시작해 예순한 살이던 1986년 2월까지 마흔두 해 동안 아이들을 가르쳤다. 스물아홉 살이던 1954년에 이원수를 처음 만났고, 다음 해에 이원수가 펴내던 <소년세계>에 동시 ‘진달래’를 발표하며 아동문학가로 첫발을 내디뎠다. 그 뒤 이원수의 권유로 어린이문학 평론을 쓰게 된다. 1973년에는 권정생을 만나 평생 동무로 지냈다. 우리 어린이문학이 나아갈 길을 밝히기 위해 1977년에 어린이문학 평론집 《시정신과 유희정신》을 펴냈다. 이 책에서 절대 자유의 창조적 정신을 발휘한 어린이문학 정신을 ‘시정신’, 그에 반하는 동심천사주의 어린이문학 창작 태도를 ‘유희정신’이라 했으며, 현실에서 살아가고 있는 어린이의 눈과 마음으로 보고 느끼고 생각할 수 있는 어린이문학의 ‘서민성’을 강조했다. 또한 모든 어린이문학인이 새로운 문명관과 자연관, 아동관에 서지 않고서는 진정한 어린이문학을 창조할 수 없다고 이야기했다. 어린이문학의 발전을 위해 작가들과 함께 어린이문학협의회를 만들었으며, 어린이도서연구회를 만드는 데도 힘을 보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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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화가 2022-10-23 08: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많네요. 얼마 전에 <우리글 바로쓰기 1>권만 읽었어요^^; 한 작가를 파려면 다른 읽기는 물리쳐야 하는데 그러기가 쉽지 않네요~ㅎㅎ

대장정 2022-10-23 08:31   좋아요 1 | URL
선생님, 요즘은~ 7년전에 한권읽었어요. 퐁당퐁당 읽으면 그래도 괜찮더라구요. 책 준비해서 한번 해볼랍니다.ㅎㅎ^^.

프레이야 2022-10-23 09: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제 이오덕 읽기 대장정 시작하시네요. ^^
모아놓으니 이렇게나 많군요. 집에 두세 권 있는데 읽었던 게 까마득합니다. 깨끗한 우리말 쓰기 이오덕 선생님 불러주셔서 다시 생각해보게 되네요. 심한 번역투도 그렇고 오염된 우리말 우리글 쓰고 있진 않은지 말이죠.

대장정 2022-10-23 09:26   좋아요 2 | URL
ㅎㅎ 아직요, 준비가 아직 안됐습니다. 정수일교수님 책 사기만하고 읽지 않은게 많아서 교수님 책 좀 빼고 연장준비해서 시작하려구요. 제가 하는일이 건설쪽이라 아직 일본말이 많이 남아있고 저 자신도 무의식?중에 아주 많이 사용하고 있네요.ㅠㅠ 선생님책 읽으면서 반성좀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문명교류에서 타 문명을 선택적으로 수용하여 자신의 전통문화를 가일층 발전 · 풍부화시키는 이른바 융합(融合)의 묘미를 살린 데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 문화유산 중에는 이러한 융합물이 적지 않지만, 고려청자는 단연 그 수작으로 꼽힌다. 문명교류사에서 보면 융합성을 구현한 문명만이 선진의 반열에 올라 세계성을 인정받게 된다. - P94

작기도 하여라 푸른 옷 입은 동자
고운 살결 옥과 같구나.
너의 고마움을 무엇으로 갚을손가,
깨지지 않게 소중히 간직하리. - P98

고려청자는 시대를 넘기면서 조선시대의 분청사기(粉靑沙器)와 백자(白磁)로 그 맥을 넘겨주었고 덕분에  적어도 17세기까지는 세상에서 자기를 만들어 쓰는 나라는 우리와 중국뿐이었다. 그것도 우리는여러 면에서 중국을 앞섰다. 이렇듯 문명간의 융합성을 최상의 수준에서 구현한 고려청자는 ‘꼬레아‘의 상징으로, ‘미스 고려‘의 화신으로 우리 문화사뿐만 아니라 세계 도자사를 빛나게 수놓고 있다. - P102

그러나 최초의 인쇄술은 그 첫 단계인 단순인쇄 단계에서 출현한 날인인바 그 시원은 중국이 아니라 5,000년 전의 메소포타미아이며, 인쇄술의 꽃이라고 하는 금속활자의 도입에서는 우리에게뒤지고 있다. 목판인쇄의 경우에도 중국사람들은 자존심을 걸고1966년 불국사 석가탑에서 발견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약칭『무구정경』)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본이라는 사실을 극구 부정하면서 신빙성도 별로 없는 몇몇 목판인쇄본 유물을 들고 나와 우리보다 앞섰다고 강변에 가까운 주장을 하고 있다.
이러한 점들을 감안할 때, 인쇄술이 중국의 발명품이라고 하는 통념은 이제 깨져야 할 것이다. - P105

세계 최고의 목판인쇄본과 금속활자본을 함께 보유하고 있는 우리나라는 인쇄문화에 관한 한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우리가 인쇄문화의 당당한 창도자라고 한들, 여기엔 하등의 하자가 없다. - P107

중국에서 금속활자인쇄에 실제로 성공한 것은 15세기 말엽 명나라 때다. 우리의 『직지』보다 한 세기나 뒤에나온 인본들을 보면 활자의 주조나 조판 기술은 우리 것과 비교가 안될 정도로 허술하다. - P111

일찍이 미국의 저명한 인쇄문화연구가카터(T. F. Carter)는 고려 말과 조선 초 무렵에 "한국은 인쇄술에서세계를 선도하고 금속활자의 사용을 고도로 발전시켜 중국에 ‘역수출까지 했다고 지적하면서, 활자인쇄가 고려로부터 유럽에 전해졌을개연성은 있으나, 그 ‘확실한 증거는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고 했다. 오늘의 사정도 크게 다를 바 없다. 그러나 퍽 의미 있는 지적이다. - P112

* 2005년 5월 19일 서울 신라호텔에서 열린 ‘서울디지털 포럼 - 세계정보기술 정상회의‘에 참석한 미국 전 부통령 고어(Albert Gore)는 기조연설에서 "한국의 유비쿼터스는 금속인쇄술에 이어 세계가 한국에 두번째로큰 신세를 지는 커뮤니케이션 부문의 큰 성과"라고 하면서 "독일의 구텐베르크가 만든 금속인쇄술은 한국에서 건너온 기술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했다. - P114

대장경(大藏經)이란 ‘3개의 광주리‘ 라는 뜻의  산스크리트어 ‘트리피타카‘ (Tripitaka)를 번역한  말로서 ‘삼장경‘ 혹은 ‘일체경‘이라고도 한다. 여기에는 부처의 가르침인 경(經)‘과 불자나 교단이 지켜야 할 계율인 ‘율장(律藏)‘, 그리고 ‘경장‘과 ‘율장‘에 관한  다양한 해석인 ‘논장의 3가지 내용이 포함된다. 처음에는 인도에서 불전을 나뭇잎에 새겼기 때문에 일괄해서 ‘패엽경(貝葉經)‘이라고 불러오다가 경장과 율장,  논장을 3개의 광주리에 나누어 보관했다는 데서 ‘대장경이란 이름이 유래되었다. 이러한 불전을 영구보존하기 위해 중국 송나라를 비롯한 동양 각국에서는 경문을 나무에 판각하기 시작했는데, 그 종류가 20여 종에 이른다. 그 가운데 가장 방대하고도 완벽한것이 바로 고려대장경이다. - P117

경판의 길이는68~78cm이고, 폭은 약 24cm, 두께는 2.7~3.3cm, 무게는 3~3.5kg정도이다. 한 면에 23행, 한 행에 14 자로 앞뒤 양면에 644 자이니, 전체 글자 수는 줄잡아 5,200 만 자를 헤아린다. - P121

그리고 글자를 새기는 과정은 그야말로 지성(至誠)의  발현 그 자체다. ‘1자 1배‘, 즉 글자 한자를 새길 때마다 한 번씩 절을 하면서 열과 성을 다했기에 그 천문학적 숫자에 달하는 각자(字)에 오자나탈자가 거의 없다고 하니, 이것은 세계 인쇄사에 전무후무한 기적이라 아니할 수 없다. 각자공한 사람이 하루 평균 40자를 새긴다고 하면, 각자에만도 연인원 130만 명이 동원된 셈이다. 그밖에 필사공, 목공, 칠공, 운반부, 교정사, 기도승 등의 인력도  매일 200명 이상이함께했으니, 판각을 완성하는 데는 연인원 약 250만 명이 참여한 것으로 추산된다. 한 장의 무게를 3킬로그램씩만 잡아도 240톤이나 되는 경판 전체를 지천사에서 해인사로 옮기는 데만 꼬박 2년이 걸렸다고 한다. - P122

고려 500년사는 국권을 지키기 위해 주변국들과 화전(戰) 양면의교착관계를 유지하면서 다양한 교류를 펼쳐온 역동적인 과정이다.
특히 후반기에 와서는 강화도로 파천(播遷)까지 하는  국난 속에서도 30년간(1231~1259) 몽골의 7차 내침을 막아내고, 근 100년간(1259~1351) 의원간섭기를 슬기롭게 타개함으로써 몽골중심 천하에서유일하게 나라의 자주권을 지켜냈던 것이다. - P126

념으로 1278년 쿠빌라이를 찾아갔다. 협상 끝에 원의 주둔군과 다루가치를 철수시키고 조세징수의 권한을 돌려받는 등 몇 가지 국권회복 사항에 합의함으로써 20년 전 원세조가 부왕에게 한 ‘불개토풍‘의약속과 그 연장선상에서 고려의 존속을 보장받는 사대관계의 기조를 재확인했다. 이렇게 원 세조 때 양국 간의 관계를 규제하기 위해모색된 체제를 ‘세조구제(世祖)‘라고 한다.  이 ‘세조구제‘는 향후양국 간의 국가적 관계는 물론 교류관계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 P128

그 밖에 우리말로 굳어져버린 낱말들에서 몽골어의 잔재를 찾아볼수 있다. 왕과 왕비에게 붙이는 ‘마마‘, 세자와 세자비를 가리키는
‘마누라 (마노라)‘, 임금의 음식인 ‘수라‘, 궁녀를 뜻하는 ‘무수리‘ 등 주로 몽골 출신 공주들의 활동무대였던 궁중에서 쓰는 이러한 호칭들은 몽골어에 그 어원을 두고 있다. ‘벼슬아치‘나 ‘장사치, 속어인 ‘양아치‘에서 어미 격인 ‘치‘는 ‘다루가치‘나 ‘조리치‘ (청소부), 화니치‘
(거지), ‘시파치‘ (매사냥꾼) 등 직업을 나타내는 몽골어의 끝글자 ‘치‘를취한 것이다. 매나 말과 관련된 ‘보라매‘나 ‘송골매‘, ‘아질게말‘ (망아지), ‘가라말‘(검은말) 등도 몽골어에서 유래된 것이다. - P132

이와 같이 고려풍‘과 ‘몽골풍‘으로 대변되는 고려와 원나라 간의교류에서 우리는, 비록 이질 문명이지만 생산적인 융합이 이루어질때문명 본연의 상보 · 상조적 교류가 실현 가능하게 되며, 문명은 모방성이란 근본속성으로 인해 ‘불개도풍‘ 같은 인위적인 제어도 무릅쓰고 사방으로 전파되고 필요에 따라 선택적으로 수용된다는 등 문명교류의 유의미한 원리들을 터득하게 된다. - P132

역사는 언제나 냉철하다. 누가 뭐라고 해서 그대로 되는 법도 없고,
또 누가 아니라고 해서 무턱대고 부정되는 것도 아니다. 1,000년 전부터, 어쩌면 그보다도 더 일찍부터 있어온 한국과 아랍 이슬람 세계간의 교류상을 감안할 때, 한국은 결코 ‘은자(隱者)의 나라‘가 아니라, 열린 나라였다. 그러기에 한국과 이슬람의 만남은 신라를 이어고려와 조선조, 그리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끊이지 않고 면면히 지속되어왔다. - P135

『고려사』의 기록에 의하면 고려 초기인 1024년과1025년, 1037년에 열라자(悅羅慈)와 하선(夏)을  비롯한 회회상인들이 100여 명씩이나 무리를 지어 개경에 와서 수은이나몰약(沒藥, 방부제), 소목(蘇木,  외과용 약)  같은 진귀한 공물을 진상했다.  고려왕은 그들에게 객관(客)까지 마련해 후대하고, 돌아갈 때는 황금과비단을 하사하기도 했다. 열린 나라 고려의 아량이며, 이질 문명 간의 범상찮은 만남이었다. - P134

이슬람세계로 말하면 이때는 압바스조 이슬람제국(751~1258)의 전성기로서 이슬람문명이 세계를 향해 종횡무진으로 파급되어 급기야는 그 물결이 직·간접적으로 한반도까지 밀려왔던 때다. 그러다가몽골군의 서정(西征)으로 인해 이슬람제국이 붕괴되자 그 물결은 일시 가라앉고 말았다. 그래서 고려 중기에는 만남의 자취를 별로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문명 간의 만남에는 한때의 멈춤은 있어도 영원한 끊임은 없으며, 그 멈춤조차 또 다른 만남을 위한 쉼표이자 뜀대에 지나지 않는다. - P135

쌍화점에 쌍화를 사러가니
회회아비가 내 손목을 쥐었다.
이 소문이 상점 밖에 퍼진다면
조그마한 새끼 광대인 네가 퍼뜨린 것인 줄 알리라. - P138

고려와 이슬람세계간의 교류물 중에는 오늘날까지도 우리의 일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으니, 그것이 바로 소주다. 서양에서는 ‘취중진담(醉中眞談)‘이란  이유를 들어 술을 신이 인간에게 하사한 최고의 선물이라고 한다. 이러한 술이 한국과 이슬람의 만남을 주선한 매체가 되었다면 이것이야말로 신이 두 문명에 하사한 실로 진중하고 신기한 선물이 아닐 수 없다. - P139

이처럼 고려와 이슬람의 만남과 교류는 주로 몽골의 내침과 간섭이란 특수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거의 일방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역설적으로 이러한 만남이었기에 이슬람의 전파나 수용은 역동적일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길지 않은 만남이었지만 그 영향은 자못 심대해 오늘날까지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 P140

이렇게 문익점의 3년간 귀양살이 여부가 기록에 따라 다르며, 따라서 원으로부터 귀국한 때도 3년간의 차이 (1334년과 1337년)를 보이고있다. 게다가 당시 원나라에서 목화씨 반출이 금지되어 목화씨 10개를 붓뚜껑 속에 감추고 들어왔다는 기록은 사적에 명시되어 있지 않다. 이것은 아마 그의 절절한 애국애민정신을 강조하기 위해 후세에가공 · 윤색한 전설적 일화라고 짐작된다. 역사는 이런 유의 전설을얼마든지 허용하고 있으니, 굳이 허구라고 나무랄 필요는 없다. - P145

작금 시빗거리로 떠오르고 있다. 일부에서는 목숨을 걸고 가져온 소중한 목화씨를 남에게 부탁해 심게 할 수는 없었을 것이라는 ‘심증‘을들어 천익과의 협력재배를 부인하며, 또한 실 뽑는 기구인 ‘물레는호승의 도움을 받아 천익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문익점의 손자인문래(萊)가 만든 것으로서 그 이름 역시 문래에서 유래했다고 하면시, 천익은 목화재배나 수명과는 무관하다고 주장한다. 그런가 하면다른 편에서는 목면재배에 성공한 사람은 문익점이 아니라 정천익이므로 사적 108호인 ‘문익점면화시배지‘란 명칭을 응당 ‘목면시배지로 바꾸어야 한다며 행정소송까지 제기한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자못 안타깝고 낯 뜨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 P147

고려조 우왕(禑王) 때에는 문익점이 살던 배양리에  효자비를 세웠고, 조선 정종 때는 그가세상을 뜨자 묘사를 짓게 했으며, 태종 때는 조선왕조에서 관직을 지내지 않았음에도 예문관제학(禮文館提學)을 하사하고  강성군(江城君)으로 봉하면서 시호를 충신(忠)이라  했으며 부조묘도 세우게했다. 세종대왕에 이르러서는 영의정을 증직하고, 그가 백성의 살림을 넉넉하게 했다고 해서 ‘부민(富民侯)‘란 칭호를 추서했다. 실로 문익점이야말로 문명교류사에서 보기 드물게 목화씨 전래와 무명의전파란 장거로 국민을 복되게 한 부민교류의 큰 별이다. - P149

교류사에서 보면, 일본의 면직업은 문익점을 통한 간접전파의 결과물이다. 그러던 일본의 면직업은 우리를 앞질러 근대화를 선도한 산업으로 도약했다. 우리나라도 조선조의 면업장려정책으로 인해 17세기 중엽까지도 함경도를 제외한 전국 각지에서 면작이 이루어졌고,
명나라사신들에게 면직포를 하사할 정도로 면업이 발달해 그 질이높았다. 그러나 그 후의 쇄국정책으로 인해 우리의 면업은 근대화의문턱에서 그만 머뭇거리다가 급기야 망국과 더불어 조락하고야 말았다. 뼈저린 역사의 교훈이다. - P150

흔히들 우리 겨레는 ‘한핏줄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성씨 가운에서절반 가까이가 외부에서 들어온 귀화성이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결코 그렇지만은 않다. 혈통을 따질 때, 우리들 중 순혈과 혼혈의 비중이 어느 정도인지는 밝혀진 바가 없으나, 분명한 것은 귀화에 의한혼혈이 만만찮은 비중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아마 100여 년 전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 (1895)의 저자인 푸른 눈의 쌔비지 - 랜도어 (A. H. Savage-Landor)의 눈에 조선은  다민족의 혼혈사회로 비쳤나보다. 그런데도 우리가 굳이 ‘한핏줄‘이라고 말하는 것은 대대로 포용성과 융합성이 남달리 강한 한민족(韓民族)의 ‘용광로‘ 속에서  귀화인들을용해시켜 적어도 생활문화나 의식구조에서는 동질성을 확보했기때문일 것이다. 많은 나라들이 우리와 경우가 비슷하지만, 다민족화를 방치한 나머지 전근대적 민족갈등을 빚고 있는 사정을 감안할 때,
우리는 우리 겨레의 역사에 자부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주체적 구심력이 강할 때만 인간을 포함한 외래의 문물을 순기능적으로 수용할 수 있다는 진리를 다시 한 번 실감케 한다. - P158

당쟁을 한국인의 고질적 ‘민족성‘이라고 냉소하면서,
조선시대의 큰 병폐 때문에 나라가 망해 결국 한일합방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강변하는 일제식민사학의 해악을 갈파하고 있는 오늘, 같은 맥락에서 또 다른 병폐라고 꼬집는 이른바 ‘쇄국‘에 대해 재고를 요청하고, 조선은 ‘닫힌 나라‘가 아니라 ‘열린 나라‘ 였다고 항변한들 과연 그것이 무리일까. - P164

동양 3국은 근대화와 서구에 대한 대응을 위한 방편으로서 공히 서학을 수용한 점에서는 역사의 궤를 같이했지만, 그들이 처한 역사적환경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서학에 대한 수용태도라든가 서학이 3국의 근대화에 미친 영향은 서로가 사뭇 다르다. 이러한 현상은 한·일양국의 서학수용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 P179

흔히들 조선의 서학수용을가리켜 ‘동도서기(東道西器)‘, 즉 우리의 전통적인 제도와 사상은 지키면서 근대서구의 과학기술을 받아들인다고 하며, 일본의 란가꾸수용은 일본의 정신 위에 서구의 유용한 것을 가져와 사용한다는 화혼양재(和魂洋才)‘로 표현한다.  그런가 하면 중국의 경우는 중국 학문을 바탕으로 하여 서구 학문을 받아들인다는 의미에서 ‘중체서용(中體西用)‘이란 말을 쓴다. 용어는 달라도 뜻은 그것이 그것이다. 여기서 ‘동도‘나 ‘화혼‘ ‘중체‘는 ‘이적 측면을, ‘서기‘나 ‘양재‘ ‘서용‘은 ‘기적‘ 측면을 염두에 둔 낱말들이다.  여기서의 공통된 난제는 서학을 받아들이면서 어떻게 전통을 지키고 계승하는가 하는, 이를테면전통과 근대의 조화 문제다. - P180

이러한 넉넉함과 질박함은 우리나라 도자문화의전통이다. 미술사학자 김원룡(金元龍)은 중국도자기가  장대하고 완벽하게 잘 차린 경극배우 같다면,  일본도자기는 화려하게 꾸민 기생 같고, 한국도자기는 수수하게 차린 가정부라고 했다.  - P192

그럴듯한 익살스러운 비교다. 바꾸어 말하면, 중국도자기는 다양하고 완벽한 모습을, 일본도자기는 화려한 색깔로 꾸민 모습을, 한국도자기는 무던하고 소박한 모습을 각각의 특색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 P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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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밝은 달밤에 밤늦도록 노닐다가
들어와 잠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로구나.
둘은 내 것인데 둘은 누구의 것인가.
본래 내 것이지만 빼앗겼으니 어찌하리.

『삼국유사』에 나오는 「처용가(處容歌)」다. - P13

이 같은 처용설화의 전체 문맥을 종합해보면, 크게 3가지 주제로나눌 수 있다. 그 첫째는 흥미소가 다분한 처용-처-역신(姦夫) 간의 애정적 갈등을 내용으로 한 민담적간의성격의 주제이고, 둘째는 왕과 처용의 신이한 힘과 무속적 효험을 과시하는 신화적 성격의 주제이며, 셋째는 사찰의 영험을 확산하는 불사연기(佛事설적 성격의 주제다. 이렇게 처용설화는 민담과 신화,전설의 서로 다른 3가지 주제가 융합된 복합설화라고할 수 있다. - P15

이러한 복합성은 신라사회 자체가 무속과 불교가 혼재한 무불습합(巫佛習合) 사회라는 데서 비롯된다. 바로 이같은 복합적 성격으로 인해 처용설화는 노래와 춤, 주술과 가면 등다양한 기능을 공유하면서 오랫동안 전승되어왔으며, 또한 다각적인논의의 소지를 낳게 되었다. - P16

요즘 해마다 울산에서는 처용문화제를 열어 처용을 기리는 문화 한마당을 흥겹게 펼치고 있다. 자칫 그 주인공이 외래인이라고 해서 탐탁찮게 여길 수도 있는데, 이것은 한낱 단견이고 기우이며 닫힘이다.
전승을 포함해 모든 문화현상은 어디서 왔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슬기롭게 받아들여서 제 것으로 만들었는가가 더중요하다. 건국신화들을 비롯해 우리네의 많은 문화전통 중에는 그뿌리에 외래적인 요소가 적잖게 묻어 있다. 처용설화가 오랫동안의변이과정을 거쳐 전승으로 굳어져서 오늘로 이어진 경우가 그러하다. 이것이 바로 문명의 만남이고 수용이며 열림이다. - P20

지금으로부터 약 1,200년 전에 지어진 석굴암石窟庵)은 동서문명이시·공을 초월하여 서로 만나서 이루어낸 귀중한 결과물이다. 고대서양의 헬레니즘문화를 진취적으로 수용한 불교문명은 인도에서부터 중앙아시아와 중국을 거쳐 멀리 여기 신라땅에까지 전파되어 증세문명의 찬란한 한 장을 열었다. 그 가운데서도 석굴암은 건축구조에서부터 내용물의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문명교류의 화신으로 석굴미술사에 우뚝 서 있다. - P21

문명이 교류하는 것은 문명이 지니고 있는 근본속성의 하나인 모방성 때문이다. 문명이란 일단 생겨나면 주위에 퍼질 뿐만 아니라, 주위의 문명과 어울리면서 필요한 것은 본받아 자기 것으로 만들어 문명전반을 살찌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교조적인 베낌이 아니라 창의적인 모방이다. 이 점에서 석굴암은 독보적인 모범을 보여주고 있다. - P22

이것은 석굴암 자체가 불법의 소산이기 때문일 것이다. 원래 석굴암은 암자가 아니라 석불사(石佛寺)라는 독립된 절이었으나, 임진왜란  이후 불국사에 소속되었다가 1910년경부터 일본인들이 석불암 대신 석굴암으로 불렀다. 그것이 오늘날까지 그대로 쓰이고 있다. 이 이름에 대해 한번쯤 재고가 필요할 성싶다. - P25

그 후 주먹구구식으로 대여섯 차례 보수공사를 하면서범한 잘못들은 그 보존에 심각한 후유증을 유발하고 있다. 1913년 일본인들이 돔 외부를 보강한답시고 덧칠한콘크리트는 내부의 공기 흐름을 차단해 이슬 맺힘 현상을 낳았고, 그 후 그들이 이런 현상을 없앤다면서 두 차례 보수하면서 마구증기세척을 해댄 것이 결국 석재의수명에 치명타를 가하고 말았다. - P29

석굴암의 이상세계를 추구하는 불교와 그에 바탕을 둔 복합적 문명체인 불교문명은 예나 지금이나 살아 숨 쉬는 문명이다. 그런데 미국의 안보전략가인 헌팅턴은 이른바 ‘문명충돌론‘에서 기상천외하게도일본은 하나의 문명권으로 설정하면서도, 불교문명은 아예 문명권에서 제외시키고 있다. 불교가 탄생지 인도에서 이미 소멸되었고, 중국과 일본 등지에서 ‘토착문화에 통합되어 그 실존성을 잃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 P30

동남아와 동북아의 넓은 지역에 깊이 뿌리박고, 오늘도 여전히 생기를 잃지 않고 있으며,  유럽인들마저도 심취되어가는 불교문명을 주제넘게 거세하는 것은 ‘눈감고 아웅하는 식의 어불성설이다. - P31

자고로 한 나라의 위상은 그 나라가 세계성을 지닌 세계인을 얼마만큼 배출했는가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계성을 지닌 세계인이 많으면 소국도 강국이 되며, 세계에 대한 기여도도 그만큼 높아진다. 세계성이란 세계에 대한 앎을 추구하고 세계와 삶을 함께하는 정신을 말하며, 이런 정신을 지니고 실천하는 사람이 곧 세계인이다. 우리나라에서 이런 정신을 지닌 첫 세계인이 바로 신라 고승 혜초 스님이라고 말할수 있다. - P32

달 밝은 밤에 고향길을 바라보니
뜬구름은 너울너울 돌아가네.
내 나라는 하늘가 북쪽에 있고
누가 소식 전하러 계림으로 날아가리. - P37

月夜瞻鄉路월야첨향로
浮雲颯颯歸부운삽삽귀
我國天岸北이국천안북
誰爲向林飛수위향림비 - P37

그리고 여행기에 나타난 대식 관련 기사는 특별한 문명사적 의미를 지닌다. 혜초는 사상 최초로 여행기에서 아랍을 ‘대식‘으로 명명하고 한(漢)문명권에서는 처음으로 대식 현지에서의 견문을 여행기에 담아 전한 사람이다. - P39

바다는 강이든 물결은 어느 지점에서 수직으로 딱 멈춰 서지 않고잔잔한 여파를 남기면서 서서히 가라앉는다. 종교의 전파도 마냥 그러하다. 고대 동방기독교의 동전 물결은 중국에서 중단되지 않고 멀리 한반도까지 그 여파를 몰고 왔다. 아직은 사료와 연구의 부족으로전파 시기와 내용, 성격, 영향, 결과 등 실상을 구체적으로 밝힐 수는없지만, 그 개연성을 넘어 초전(初傳) 단계의 유입으로는 볼 수 있을것  같다. - P44

경주 불국사 경내에서 기독교의 상징물인 돌십자가가 발견된 사실,
즉 불교와 기독교가 한곳에서 어우러진 사실을 과연 어떻게 설명할것인가? 불상과 예수상이 한곳에 모셔졌다면 청천벽력이 일어날 오늘의 현실에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이상야릇한 일이다. 선이 악으로 변한 세상에서 다시 선으로 돌아가기에는 인간의 지혜가아직 너무 모자라는 현실에선 그저 그 선을 염불처럼 되될 수밖에 없다. 종교들의 어울림이라는 ‘선‘ 앞에서 말이다. 이것이 현대의 퇴행이자 고민이다. - P49

오늘도 분처상은 그 무언가를 증언하면서 그 자리에 오도카니 서있다. 무언 중의 유언, 그것이 바로 역사이다. 이 역사를 알아듣지못해 생긴 것이 이른바 ‘역사의 비밀‘이다. 역사의 비밀은 역사의 심연 속에 일시 가려진 것일 뿐, 영원한 것은 아니다. 그 심연을 파헤치다보면, 어느 날엔가는 그 비밀이 허무해지는 법이다. 분처상의 비밀도 종당에는 그러할 것이다. - P59

고선지는 우리 겨레 고유의 기개를 떨치면서 중세 동서관계사와 전쟁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영걸이다. 그는 망국의비운을 삼키며 이국 땅 당나라에 강제로 끌려간 고구려유민(遺民)의 후예다. 아버지 고사계(鷄)는  고구려가 망한 후 성인으로 당에 끌려가 처음에는 하서군(河西郡, 현 깐쑤성)에서 중급장교로 있다가 점차  공을 세워 안서군(安西郡, 현 쿠처)의 사진교장(四鎭校將)으로 승격된 군인이었다. 이처럼 무인 집안에서 태어난 고선지는 어려서부터 무예를 연마하면서 아버지를 따라 안서군에 들어갔다. 그는 용모가 빼어나고 활을 잘 쏘며 말을 잘 탈 뿐만 아니라, 용감대담하고 인품이 출중해 20대에 벌써 유격장군(游擊將軍)에 올랐다. - P61

이 같은 급속한 승격은 그 자신의출중한 자질 덕분이었겠지만, 당시 파쟁에 휘말려 있던 한인 장군들과는 달리 쉽게 통제할 수 있는 ‘빈천하고 무식한 번장(藩將, 이민족장군)들을 끌어들이는 이른바 ‘장기용정책‘과도 관련이 있다. - P63

드디어 751년 7월 고선지가 인솔한 7만 대군과 석국-이슬람 연합군과의 격전이 톈산산맥의 서북단에 있는 탈라스(현 올리아타)에서 벌어졌다. 이것이 당의 서역경영의 운명을 판가름하고 중세 동서관계사에획기적 의미를 지닌 탈라스전쟁, 즉 고선지의 제5차 서역원정이다.
불과 닷새밖에 걸리지 않은 이 전쟁에서 고선지는 전략·전술상의 착오로 패전의 고배를 마신다. 그는 상승일로에 있는 이슬람군의 위력을 과소평가함으로써 대비책을 소홀히 했으며, 당과 동맹을 가장한카를루크족의 배반을 예견치 못하고 방심함으로써 결국 카를루크족과 이슬람군의 좌우협공을 받아 전멸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당군은대부분이 사살되고 일부(2만 명)는 이슬람군에게 포로가 되었으며 고선지를 포함해 구사일생으로 패주한 자는 몇천 명에 불과했다. - P64

인간은 존재양식에 따라 크게 순수 생물학적 존재로서 자기만을 위해 살아가는 ‘단순 인간과 사회관계 속에서 남을 위해 남과 더불어살아가는 ‘사회적 인간‘의 두 부류로 대별된다. 그런데 역사인으로서의 이 사회적 인간‘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사건적 인간‘과 남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사건창조적 인간‘으로나누어진다. - P73

이 ‘사건창조적 인간‘이 바로 역사에서 말하는 위인 (혹은영웅)인 것이다. 이러한 위인은 대체로 역사의 격변기에 나타나 그 격변을 타개하는 데서 선도적 역할을 한다. 그러나 위인도 어디까지나사회관계 속의 인간인만큼 역사와 시대의 피조물일 수밖에 없다. - P74

그러나 정치의 유혹은 이 의롭고 현명한 위인을 무모한 정치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었다. 그는 자의 반 타의 반 중앙귀족들의 왕권쟁탈전에 휘말리면서 딸을 46대 문성왕(文聖王)의 두번째 비로 바치기로 한다.  그러나 청운의 꿈도 잠시, 그의 세력 확대를 우려한 중앙귀족들의 사촉을 받은 부하 염장(長)에게 술자리에서 피살되고 만다. 해상왕국 건국 18년 만인 846년의 일이다. 장보고 피살 후 청해진은 염장에 의해 한동안 관장되다가 851년에 해체되고 주민들은 벽골제(碧骨堤,  현 김제시)로 강제이주되면서 찬란했던 장보고의  해상왕국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만다. - P79

신라인들의 도움 속에서 재당 9년 반 중 2년 반이나 신라인들의 도량인적산법화원에 기거한 천태종 3대조 엔닌도 귀국해서는 신라명신(新羅明神)‘에게 사은하는  예를 올렸으며, 그의 제자들은 스승의 유지를 받들어 적산선원을 세워 ‘적산대명신‘ (적산신라신)을 모셨다. 얼마 전 방영되었던 한드라마에서 장보고와 신라선단의 신묘한 활동을 ‘해신(海神)‘에 비유한 것은 이래서  일리가 있다고하겠다. - P81

고려는 우리 겨레사에서 첫 자주적 민족통일국가다. 그 역사적 위상에걸맞게 고려는 세계를 향해 선진해양국다운 면모를 보여주었다. 3면이 바다로 에워싸여 있는 우리나라는 늘 대륙문명과 해양문명이 만나 조화를 이루는 속에서 역사를 개척해왔고, 특히 바다를 잘 경영할때는 국운이 흥해 나라가 강성했다. 고려가 바로 그 선례다. - P84

우리 겨레의 문화유산 가운데서 세계적인 자랑거리를 들라면 으레고려청자가 빠질 수 없다. 왜냐하면 고려청자야말로 우리나라를 세계 도자기사의 선구로 자리매김하게 한 독창적인 문화유산이며, 우리 선조들이 창조한 세계적 수준의 자랑스러운 예술품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결코 우리들의 자화자찬이 아니고 유수의 전문가들이 이구동성으로 평가하는 바다. - P92

조선도자기에 매료되어 도예가의 길로 전향한 영국의 세계적도예이론가인 버나드리치(Bernard Leach)는 백자에 엷게 비치는 청색을 보고 "이 색을 낸다면 사람들을 얼마나 행복하게 할 수 있을까!"라고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면서 감탄했다고 하며, 영국의 한 박물관 도자기 부장인 허니 (W. B. Honey)는 중국 및 극동 각국의 도자기』 (1945) 란 저서에서 "최상급의 한국도자기는 세계 도자기 중에서가장 우아하고 진실하며 도자기가 가지는 모든 장점을 구비하고 있으니, 그것은 행복한 민족의 소산임을 첫눈에 말해주고 있다"고 격찬을 아끼지 않는다. - P93

그러나 같은 송대 사람인 태평노인(太平老人)은  『수중금(袖中錦)』이란 책자에서 천하제일론 (天下第一論)」이란 글을 쓰면서 천하의 제일가는 것을 쭉  열거하는 가운데 "고려 비색(즉 청자)이 천하제일이다"라고 사실을 실토하고 만다. - P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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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이 형성되는 과정은 세 가지로 나뉜다. 우선 기억의 바탕이 되는 정보를 뇌에서 부호화하는 ‘암호화‘, 다음으로 그 정보를 축적하는 ‘저장‘, 마지막으로 저장된 정보를 검색해 재생하는 ‘회수‘. 그러니까 가나에의 기억장애는세 번째 ‘회수‘ 단계에서 발생한 문제였다.

외국 어딘가 같아 보인다. 한 남자가 마을 아이들을 이끌고 앞장서서 걷는 그림, 남자는 피에로 분장을 하고 피리를 불고 있다. 아이들은 피리 소리에 이끌리듯 걷고 있다.
마키시마는 그 옛날 어린 시절 기억에 남아 있는 너무나도 유명한 동화를 떠올렸다.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 그림이었다.

1284년, 하멜른은 쥐로 인한 피해에 시달렸다. 도시에 쥐 퇴치자를 자처하는 남자가 나타나 도시 사람들과 쥐 퇴치 계약을 맺는다. 남자는 피리를 연주하며 쥐떼를 베저강으로 유인해 전부 빠뜨려 죽인다.
그런데 주민들이 보수를 지불하지 않자 화가 난 남자는 어느 날 주민들이 교회에 간 틈을 타 쥐떼를 유인한 것과같은 방법으로 피리를 불어 도시의 아이들 130명을 유인한다. 그러고는 앞장서서 아이들을 동굴 안으로 몰아넣은뒤 동굴 안에서 입구를 막아 버렸다.
피리 부는 사나이와 함께 사라진 130명의 아이들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는 민간설화였다.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라면 나도 알아.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유괴범의 아버지 같은 존재잖아."

이누카이는 예전에 연기학원에서 연기 공부에 매진했던 시기가 있었다. 그 무렵에 표정 근육의 미세한 움직임이나 무의식중에 보이는 행동으로 상대의 거짓을 꿰뚫어 보는 기술을 배웠다. 이 기술은 형사로 직업을 바꾸고 나서용의자의 거짓말을 간파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현재 경시청 내에서 검거율 1, 2등을 다투게 된 이유 중 하나도 이기술 덕분이었다.

다만 문제도 있었다. 이 기술은 여자를 상대로는 전혀 통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연기학원 시절, 배역을 따려고온갖 남자들의 버릇을 끊임없이 관찰했다. 애당초 여자는 대상이 아니었다. 생각해 보면 그것이 원인인 듯했다. 여자의 마음에 무지한 이유는 하나 더 있었다. 학창 시절 남자답게 잘생겨서 굳이 애쓰지 않아도 여자들이 먼저 다가왔기 때문이다. 상대방이 알아서 다가오니 깊이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고 헤어져도 금세 새 상대가 다가왔기에 반성과 학습의 기회도 없었다. 삼십대 중반에 이혼 두 번이라는 불명예도 전부 여자의 심리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이해하려고 하지 않은 태도 때문이었다.

"아빠, 제발."
날카롭게 주시하는 사야카의 시선에 이누카이는 꿈쩍할 수 없었다.
"꼭 가나에를 무사히 구출해 줘."
"평소대로 전력을 다할 거야."
"전력을 다하기만 해서는 안 돼."
사야카의 말은 가차 없었다.
"나중에 블로그를 보면 알겠지만 가나에와 엄마는 병마와 싸우는 사람들의 희망이야. 만약 가나에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모두가 절망할 거야."

예방 접종은 후생노동성의 후원으로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후생노동성이 2010년부터 백신 접종 긴급 촉진 사업을 실시하며 자궁경부암 백신을 포함한 해당 백신 접종 사업에 보조금을 지급한 것이다.
보조금을 지원하는 이 접종 사업에 각 지방자치단체가 달려들었다. 접종 대상자인 초등학교 6학년부터 고등학교1학년 여학생은 무료 또는 저가로 접종할 수 있게 됐다. 2013년 4월부터는 예방접종법에 근거해 정기접종으로 운영되고 있다.

그러나 이 백신을 접종한 소녀들에게서 발열이나 아나필락시스쇼크 등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수는 2013년 3월까지 약 1천 2백 건. 그중 백여 건은 장애와 같은 중증 후유증이 남았다. 그리고 2013년 3월에 피해 소녀의보호자들이 모여 ‘전국 자궁경부암 백신 피해자 대책 모임‘을 결성했다.
"가나에의 기억장애도 짐작이 가는 원인은 그것밖에 없었어요."

"그 사람은 딸을 위하는 순수한 마음에서 블로그에 글을 올리는 걸지도 몰라.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제약회사를 고발하는 운동으로 번졌잖아. 그런 운동에는 반드시 반대세력이 존재하지."
"그 반대세력이 가나에 양을 유괴했다는 말입니까?"
"아직 몸값을 요구하지 않았어. 애당초 그 집은 막대한 몸값을 낼 형편도 안 되고, 돈이 목적이 아니라면 그밖에추측할 수 있는 목적은 가해 또는 음란행위지. 하지만 애 어머니가 사회 고발을 한 인물이라면 또 다른 동기가 떠오르잖아."
"고발 저지・・・・・…."
"현재 쓰키시마 모녀에게 밀려드는 건 동정과 걱정이야. 자궁경부암 백신에 대한 비판은 조용하지. 만약 범인이딸을 인질로 잡고 제약회사를 향한 비난을 멈추라고 요구하면 그 어머니가 거절할 수 있을 것 같아?"

"목소리가 작은 사람들은 종종 신중해. 그리고 신중한 사람은 자신들의 적을 속속들이 알고 있어."

"딸이요. 살아 있었으면 가나에 양과 동갑이었겠군요. 아야코 씨에게 들어 아시겠지만 제 딸도 넓은 의미에서 자궁경부암 백신 희생자였습니다."
"그런 걸 백신 부작용이라고 한다더군요. 하지만 백신 부작용으로 사망자가 나왔다는 이야기는 처음 듣습니다."
"직접 사인이 부작용이 아니니까요. 미사키는・・・・・ 딸은 백신 접종 후 사지 기능 장애를 겪었습니다. 테니스부서 활약하던 아이였는데 안타까운 일이었죠."

약해 에이즈 사건
* 1980년대에 일본에서 혈우병 환자들에게 HIV 바이러스에 오염된 비가열성 혈우병 치료제를 투여해 수많은 에이즈 감염 환자를 낳은 사건.

"제약회사와 후생노동성과 의사. 이 삼각 구도의 유착은 어제오늘 일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그들이 또 약해 에이즈의 전철을 밟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은 우선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압살하는 일이겠죠."

무라모토의 온화한 얼굴이 조금 일그러졌다.
"약해 에이즈 사건 때, 최초 보고 사례를 철저히 묵살하고 피해자 한 사람 한 사람 확실하게 입막음해 두었다면 후생노동성과 제약회사, 의사를 둘러싼 소송전으로 번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일부 관계자는 여전히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 패거리들에게는 블로그 투병 기록으로 세간의 이목을 끌어 자궁경부암 백신 피해의 상징이 된 쓰키시마씨 모녀가 위협적인 존재일 겁니다."

-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면 떨어진 돈을 주머니에 슬쩍 주워 담는 사람도 많겠죠.
만약 유괴된 가나에가 건강한 사람이라면 범인의 행동은 자연히 제한된다. 인질을 살해하려면 그 작업과 사체 처리에 많은 시간과 수고가 든다. 인질을 살려둔다면 범인과 장소를 특정할 수 없도록 정보를 차단해야 한다. 어느 쪽이든 대단한 수고가 필요한 일이다.
이 기여가

"예를 들어 가정 폭력이든 리벤지 포르노든 죄상은 그냥 상해죄나 명예훼손이지만 피해자는 죄상 이상으로 상처받고 두려움에 떨어요. 지금의 법은 약자에 대한 배려가 충분하지 않습니다. 마치 강자의 시선으로 만들어진 법 같아요. 만약 이번 사건이 장난이나 충동의 연장선에서 계획된 범행이라도 극형에 처해야 해요."

아소처럼 오랫동안 범죄 수사에 몸을 담은 사람조차 인터넷의 악의에는 익숙해지지 않는 모양이다.
일상에 숨어 있는 혼탁한 앙심.
사교적인 미소 뒤에 깔린 잔학성.
그것들이 어떠한 계기로 표출되어 이러한 범죄로 이어졌을 가능성을 끊어낼 수 없다.
언뜻 머리를 스친 범인상에 이누카이는 몸서리칠 뻔했다.

"자궁경부암 백신 부작용 사례는 현재까지 1천 2백 건 보고됐을 뿐이지만 저는 빙산의 일각이라고 생각해요. 물밑에 가려져 안 보이는 부분이 드러나는 건 2년 후나 5년 후, 아니면 10년 후………. 그때가 되면 피해자는 도대체 몇만 명으로 늘어날까요. 그리고 그들에게 누가 어떤 형태로 보상할 수 있을까요? 생각할 때마다 같은 의료인으로서부끄럽습니다만, 약해 에이즈 사건 때 제약회사나 비가열성 치료제를 승인한 후생노동성나 사건에 관여한 의사나모두 추악한 행태가 만천하에 드러났습니다. 권력과 욕심에 찌든 자는 어리석어요. 어리석으니 몇 번이나 같은 잘못을 반복하고 몇 번이나 같은 추태가 까발려지죠."

"이런 약물 피해 사건은 오래되고도 새로운 문제입니다. 몇 년 주기로 발생하고 의사와 제약회사와 후생노동성의유착이 밝혀지며 관계자가 체포되고 재판이 오랫동안 진행되면서 환자 몇 명이 희생되고 나서야 마침내 구제가 시작되죠. 그러나 그때가 되면 이미 또 다른 약물 피해 사건이 물 밑에서 진행되는 실정입니다. 즉 해결되는 듯 보여도근본적인 부분은 전혀 개선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제약회사는 부작용 있는 백신을 계속 만들고, 의사는 의료 수가를 받으려고 의심스러운 백신을 환자들에게 계속 투여하며, 후생노동성은 낙하산 욕심에 백신을 순순히 허가하고접종을 권장하는 구조가 사라지지 않고 이어집니다. 그러나 의사로서 말씀드리면 이상이 있는 약은 즉시 사용을 중단하고 경고해야 합니다. 이런 당연한 말이 입찬소리 같이 들리겠지만, 의사와 후생노동성의 사명은 국민의 건강을지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유효성이 보증되지 않은 백신을 충분한 설명 없이 권장하는 것은 범죄 행위나 마찬가지입니다. 환자의 이익과는 무관한 논리로 백신 접종을 권장하는 후생노동성과 의료기관은 망국의 무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또 그놈의 인터넷인가. 빌어먹을, 마약이니 권총이니 요즘에는 일반 시민들이 인터넷에서 그런 위험한 물건을 살수 있다니. 조만간 인터넷에서 핵미사일도 팔게 생겼어."

"우선 출산이라는 게 시간을 미리 정해 놓는 일이 아니니까 의사가 한밤중이나 꼭두새벽에 호출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연스럽게 근무 시간이 불규칙해지죠. 게다가 산부인과는 다루는 범위가 매우 넓습니다. 대학이라면 산부인과 안에서 업무를 세분화할 수 있지만, 일반 병원에서는 여의치 않죠. 근무 환경이 그렇게나 혹독한데 대가는 너무작습니다. 의사도 성인군자는 아닙니다. 먹고살아야 하니 노동에 상응하는 합당한 수입이 없으면 근로 의욕도 줄어들죠."
"확실히 출산은 시간을 가리지 않죠."

"그리고 출산은 새 생명을 다루는 일이라서 관계자들은 당연히 크게 기대합니다. 무사히 태어나는 것이 당연하다는 분위기죠. 하지만 현실은 출산에도 위험은 존재합니다. 근대의학 이전 시대에는 그야말로 수많은 태아가 사산됐으니까요. 그런데 오늘날 그런 인식은 없습니다. 그래서 태아나 산모에 타격이 있으면 자칫 의료과실로 소송에 걸려 버립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산부인과 의사는 전체 의사의 5퍼센트밖에 안 되는데 소송 비율은 전체의 12퍼센트를 차지합니다. 불합리하다는 생각 안 드십니까?"

마키노 회장의 목소리가 조금 상기되자 이누카이는 몹시 동정심이 일었다. 이누카이는 딸이 입원 치료를 받고 있기도 해서 치료하는 입장에서 생각해 본 적은 좀처럼 없지만, 사람의 목숨을 맡으면서 소송 위험까지 짊어진다는 사실은 확실히 가혹하긴 하다.

"산부인과 의사는 글자 그대로 임부를 포함한 여성의 건강과 생명을 지키는 직업입니다. 그런데 고작 보험 점수따위의 당치도 않은 걸 우선시한 나머지 산모나 미래에 어머니가 될 아이들의 몸에 장애를 남길 만한 약물을 투여하고도 수치를 모른다니 산부인과 의사로서 상종 못 할 인간들입니다. 따지고 보면 모든 여성의 적이죠. 달리 표현하면 모든 어머니, 모든 여성이 그들을 증오할 겁니다."

도쿄의 중심가에서는 불법 주차를 볼 일이 적다. 2006년 도로교통법 개정으로 탄생한 주차감시원의 꾸준한 활동으로 해마다 감소하고 있다. 그런데 오사카에서는 불법 주차 차량이 당당하게 늘어서 있고 보행자들도 신호를 거의지키지 않았다. 도로에 차가 달리지 않으면 신호등이 빨간불이어도 아무렇지 않게 길을 건넜다.
"뭐, 반권력이랄까, 옛날부터 나라님이 정한 일 따위 내 알 바냐, 하는 정서가 있어서요."
구게가 변호하듯 덧붙였다.

"분명 오사카만큼 시민이 경찰을 싫어하는 곳도 얼마 없을 겁니다. 저도 갓 순경이 됐을 때 길을 걸어가던 초등학생 여자애에게 ‘짭새‘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을 정도니까요."
그렇게 말하며 구게는 또 머리를 쓰다듬었다.

*지방 공공 단체. 일본의 행정 구역은 총 47개 도도부현(都道府県)으로 나뉘며  도쿄도(都), 홋카이도(道), 오사카부(府), 교토부(府), 43개의 현(県)이 있다.

옛날 어느 위정자는 인명은 지구보다도 무겁다고 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정치적인 고려를 호도하려는 궤변에 불과했다.
사람의 목숨보다 무거운 것 따위 현실에 얼마든지 존재한다. 아니, 종교나 정치에서 그것은 먼지만 한 가치도 없지 않은가. 이 나라도 그렇다. 정부 기관의 이익과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자신과 자신의 가족 외에 다른 사람의 목숨 따위 길바닥의 돌멩이처럼 여기는 인간이 썩어날 정도로 많다. 그렇지 않고서는 약물 때문에 발생하는 피해문제가 몇 번이고 되풀이되는 현실을 설명할 수 없다.

"관리관뿐 아니라 건물 위층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는 인간들의 생각이란 늘 똑같아. 새삼스럽게 내 입으로다시 설명해야 해?"

"그래, 저게 바로 네가 직감으로 알아챈 쓰키시마 아야코가 숨기던 진실이자 무라모토가 내뱉던 거짓말이야. 계획의 세부내용을 짠 사람은 무라모토였어. 협조자를 모은 사람은 쓰키시마 아야코였고, 하지만 이 계획을 처음 제안한 사람은 마키노 아미였지. ‘하멜른의 피리부는 사나이‘는 그녀였어."

자신을 바라보는 가나에의 눈이 여느 때와 다른 빛을 내뿜고 있었다. 불안한 기색은 여전하지만 곤혹스러운 감정도 느껴졌다.
한동안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가 가나에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엄마?"
아야코가 아크릴판에 손을 대자 가나에도 맞은편에서 손을 맞댔다. 이윽고 아크릴판 너머로 가나에의 온기가 전해졌다.

1796년 영국의 의학자 에드워드 제너는 소젖을 짜다가 우두에 감염되었던 사람들은 천연두에 걸리지 않는다는사실에 주목했습니다. 그래서 우두 환자의 고름을 채취해 동네 농부의 어린 아들의 팔에 주입했고, 6주 후 천연두농을 주입하는 실험을 했습니다. 우두접종으로 면역력이 생긴 소년은 천연두에 걸리지 않았고, 이렇게 여러 실험을거치면서 우두 균으로 천연두를 예방할 수 있다는 인류 최초의 백신인 종두법이 만들어졌습니다. 이후 제너가 발명한 종두법은 천연두 사망자를 줄이는 데 크게 공헌했고, 세계보건기구(WHO)는 1980년에 천연두 종식 선언을 했습니다. ‘백신(Vaccine)‘이라는 용어도 ‘소 천연두‘를 의미하는 라틴어 ‘바리올라에 바키나에(Variolae Vaccinae)‘에서유래됐죠. 사회파 미스터리의 대표주자 나카야마 시치리, 이번에는 백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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