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2,000년 전 이 땅에 온 허황옥은 혈연과 불연, 그리고 교류의 인연을 맺어준 메씬저이자 교류인으로서, 오늘날까지도 우리와함께 있다. 문명은 이러한 메씬저와 교류인들에 의해 알려지며 교류된다. - P84
지구상의 어디든, 고대국가의 건국 과정은 거의 신화로 윤색되어 전해오고 있다. 신화의 주인공은 예외 없이 건국자이며, 신화의 구성은대체로 건국의 기틀이 마련된 후에 완성되는데, 그때까지를 ‘신화시대‘라고 한다. 따라서 건국신화의 내용은 건국과정을 때로는 사실적으로, 때로는 상징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그래서 건국신화는 오래 전승되는 ‘왜곡 없는 윤색‘이니, ‘강요하지 않는 신앙‘이니 하는 평을 받는다. - P86
우선 고구려건국신화는 다양한 신화소를 갈무리하고 있다. 천강소(天降素)인 하늘의 신 (해모수)과 물의 신(하백)의 딸의 결합은 천지조화를 말하며 여기에 난생(卵生素)가 얹히는데,원래 천강은 북방유목민들의 신앙이고 난생은 남방농경민들의 신앙이나, 그것이 주몽신화에서는 하나로 어우러진다. 게다가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놓아주는 기적(奇蹟素)도 곁든다. 한마디로, 하늘의 도움과 신의 보우를 받는 천조신우(天助神佑)의 신화소가 대단히 돋보이는 복합화다. 이에 비해 로마의 건국신화에는 신화소가 빈약하다. 씰비아가 동굴에서 마르스 신을 만나 쌍둥이 형제를 낳고, 그 아이들이 늑대의젖을 먹고 자라난 것 말고는 별다른 신화소가 없다. - P92
고구려의 옛 땅 옌볜(延邊)은 필자가 나서 자란 고장이다. 거기서 고구려의 떳떳한 후예로 자부하면서 겨레의 역사를 배웠고 겨레의 얼과 넋을 키웠다. - P108
이렇게 고구려는 필자뿐만 아니라, 우리겨레 모두의 가슴속에 마냥 살아 숨 쉬고 있는 실체다. 중국은 이러한 실체를 무시한 채 관변의 힘으로 ‘동북공정(東北工程)‘이라는 어마어마한 괴물을 가설해놓고 여러 가지 강변과 요설로 고구려사를 중국사에 끌어들이면서 고구려의 정체성을 냉큼 지워버리려고 한다. - P112
역설적으로 우리는 이러한 강변과 억지들을 지켜보면서 우리가 지켜나가야 할 고구려의 정체성을 재확인하게 된다. 그 정체성이란 고구려의 종족은 외부에서 들어온 것이 아닌 자생의 예맥족계라는 것, 고구려는 조공이나 책봉에 얽매인 ‘중원 왕조의 지방정권이 아니라중국 왕조사에는 전무후무하게 700년 이상 장수한 자주독립국가라는것, 고구려는 고조선을 계승하고 발해와 고려로 이어지는, 한민족 역사의 정통국가라는 것, 고구려는 ‘중화문명‘과는 무관하게 독자적인선진문명을 가진 나라라는 것 등이다. 고구려의 정체성을 지키는 것은 우리 민족사의 뿌리를 지키는 일이다. - P115
역사는 누가 지운다고 해서 지워지거나 바꾼다고 해서 바꿔지는 법이 없다. 왜냐하면 역사는 사실로만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토주권‘이 ‘역사주권과 다르다는 것은 역사학의 상식이다. 현실적으로 옛 고구려 땅을 지배한다고 해서 그 역사까지 마구 지배할 수는없는 것이다. - P115
역사에서 보면, 한 나라의 생존은 다른 나라들과의 관계, 즉 그 국제성에 크게 의존한다. 특히 역사의 격변기에는 그 의존도가 더욱 높아진다. 그런데 이러한 국제성은 국가의 권력행위에서 나타난다. 국제관계에서 권력행위란 다른 나라에 대하여 영향력을 행사하는 능력과다른 나라로부터의 영향을 거부하는 능력을 발휘하는 행위를 말한다. - P117
우리는 슬기로운 선조들의 창의성과 노력에 의해 인류 모두에게 보편주의적 가치를 선사할 수 있는 세계적 문화유산을 수두룩하게 가지고 있다. 그중 고구려 문화유산이 가장 뛰어나거니와, 그 가운데서도 고분벽화는 가위 백미(白眉)라고 할 수 있다. 역사의 해명에서 벽화가 갖는 의미는 각별하다. 기록은 기록자에 의해 실상이 가감될 수있지만, 벽화만은 그대로의 현실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래서어느 학자는 벽화를 보유하고 있는 민족은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는민족보다 훨씬 위대하고 강하다‘고 했다. 일리가 있다. 우리는 세계에서 몇 안 되는 그러한 민족 중의 하나다. - P127
이러한 교류상은 멀리 서역과의 교류에서 그 전형을 찾아볼 수 있다. 벽화에서 보다시피 고구려인들은 서역인들과 같은 유형, 즉 카프탄형 (kaftan, 앞 여밈형, 전개형前開型)의 복식을 착용하고 있다. 이 형은고대 아시아 유목기마민족의 복식에서 시원하여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를 포함한 서역 일원에서 널리 유행하다가 마침내 범아시아적인 전통복식으로 정착되었다. - P128
문화에서 유형(類型, type)은 공통되는 문화형식을 말하는데, 그것은 주로 전파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에 비해 양식(樣式, style)은드러난 문화의 가변적인 표현형식을 말하는 것으로서, 시대나 환경에 따라 변할수 있다. 벽화에 나타난 고구려복식과 서역복식을 양식적 측면에서 비교 · 검토해보면, 다 같이 바지와 저고리를 착용하고, 깃이나 섶, 도련, 소매 끝에 다른 색의 천으로 단(연緣)을 두르는 가연법(加緣法)을 취하며, 고깔형의 모자인 변형모(弁形帽)와 조우관(鳥羽冠) 같은 둥근 모자를 쓰는 등의 공통점을 발견하게 된다. - P129
그리고 벽화에 나타나는 이색적인 서역인상은 당시 서역과의 인적교류를 말해준다. 안악 3호분의 수박(手搏, 손잡고 겨루기) 그림과 각저총(角抵塚)의 씨름 그림에서 고구려인과 겨루는 상대는 큰 눈과 높은매부리코를 지닌 심목고비(深目高鼻)의 서역인임이 틀림없다. 그림속의 서역인이 우리가 흔히 절에서 보는 수호 담당의 사천왕이나 금강역사 등 험상궂고 우락부락한 상징적 존재와는 달리, 평범한 생활속에서 겨루기를 즐기는 인물로 등장한다는 것은 서역인이 고구려땅에 와서 함께 살면서 서로의 문화를 주고받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같은 시기의 북중국 벽화에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현상으로서, 고구려가 중국을 거치지 않고 서역과 직접 교류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 P130
끝으로, 고구려 벽화를 아름답게 수놓고 있는 몇 가지 무늬도 알고보면 서역에서 들어온 것이다. 우선 가장 눈에 띄는 것이 연꽃무늬인데, 연화총(蓮花塚)을 비롯한 고구려 고분에서는 벽화뿐만 아니라 건축장식에까지도 널리 쓰이고 있다. - P132
그 과정에서 고구려의 대중국 교류는 인접한 한 나라와의 유무상통이었을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이러한 교류상을 갖췄기에 고구려의 당당한 국제성과 고구려 문화유산의 보편주의적 가치가 비로소공인되는 것이다. - P138
고구려는 명실 공히 대제국답게 세계를 향해 가슴을 열고 세계인과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기원과 계통을달리하는 당대의 다원적인 가용문화(文化)를 적극 수용한 후 그것을 ‘고구려문화‘라는 용광로 속에 용해시켜 특유의 선진문화를 창출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더욱 완숙시켜 신라나 백제, 심지어 일본에까지 넘겨줌으로써 문명전달의 교두보 역할도 수행했다. - P127
지금도 기억에 생생히 남아 있는 것은 우물이나 사진관, 식당 등에 ‘고구려‘나 ‘발해‘란 이름이 뒤섞여 있었다는 사실이다. 고구려땅이아니었는데도 ‘고구려‘란 이름이 지금까지 그토록 쓰이고 있는 것은현지인들의 말을 빌리면 고구려와 발해는 ‘그것이 그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를테면, 발해는 고구려를 이은 나라란 뜻이다. 발해의 정체성을 압축한 말이다. - P141
일찍이 조선 후기 실학자인 박제가(朴濟家, 1750~1805)는 "우리나라 선비들이 신라 주 안에서 태어나 그 바깥의 일에 대해서는 눈과 귀를 틀어막아버리니 ・・・・・・ 어찌 발해의 역사를 알 수 있겠는가 하고 개탄한 바 있다. 이것은 부끄러운 일이거니와 그 무지와무시가 마침내 천여 년을 넘어선 오늘에 와서 그 참역사가 송두리째말소될 위기를 자초하고야 말았으니, 참으로 비탄스러운 일이 아닐수 없다. - P142
이것은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의 불완전성이 낳은 후과이기도 하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민족국가 형성의 기반을 마련했다는 데는 일정한 역사적 의미가 있지만, 그것이 우리의 또 하나의민족국가인 북방의 발해까지 아우르는 완전한 통일로 이어지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남북국가 분립시대를 연계기가 되었다는 것은 이른바일통삼한(一統三韓)‘의 내재적 한계성이며, 우리 겨레가 두고두고 반추해야 할 뼈저린 역사적 교훈이다. 그것이 아니었던들, 발해는우리 역사의 주류에서 밀려나지 않았을 것이며, 발해의 기나긴 수난에 허무한 빌미도 제공되지 않았을 것이다. - P142
우리의 해동성국 발해는 오늘날까지도 그 수난의 역사를 멈추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치욕의 역사를 더 이상 연장시킬 수는 없다. 이젠종지부를 찍어야 한다. 우리는 역사에서 교훈을 찾고 귀감을 얻어 발해사의 정체성과 정통성을 오롯하게 밝혀냄으로써 왜곡과 변조를 막아내야 한다. 우리에게는 흙탕을 헤집고 솟아 흐르는 샘물처럼 수난을 극복하는 슬기와 용기가 있다. - P146
우리의 역사 정통을 지키느냐 마느냐 하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 출구는 오직 하나, 지켜내는 일뿐이다. 그러자면 무엇보다 중요한것은 우리의 민족사 정통에 뿌리박은 발해의 정체성을 명백히 가려내는 일이다. 그 정체성이란한마디로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우리 민족의정통 주권국가라는 것이다. - P148
총체적으로 볼 때, 발해의 종족은 고조선과 고구려를 구성하고 있던 예맥·부여 계통의 고구려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만 거론되는말갈인이란 어떤 특정 종족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쑹화강(松花江)유역의 속말(粟末) 말갈이니, 백두산 지역의 백산(白山) 말갈이니 하는 것과 같이 지역에 따라 주민 일반을 가리키는 중국 측의 비칭(稱)인 것이다. 쑨진지 같은 중국 학자도 말같은 어떤 민족이나 종족도 아닌 예맥이나 숙신(肅), 고아시아의 3개 종족으로 이루어진 일부 부락군이나 부락연맹 같은 것이라고 하여 말갈의 종족성을 부정하고 있다. 따라서 중국이 말하는 것처럼 발해는 말갈인들이 세운 지방정권이 아니라, 고구려의 후예들이 세운 고구려의 당당한 계승국인 것이다. - P151
발해의 고구려 계승성을 가장 뚜렷이 보여주는 것은 발해인들의 생활문화다. 인간집단의 생활문화는 장시간의 답습과 축적 등 전승을통해서만 이루어지는 법이다. 전승 없이 어느 순간에 급조되지는 않는다. - P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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