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전 가락국수로왕(首露王)의 배필로 이 땅에 온 현숙한 외방여인 허황옥(許黃玉,  허왕후)은 지금도 우리 속에 살아있다. 2002년부산 아시안게임 개막식에서는 36억 아시아인의 하나 됨을 상징하여수로왕과 허왕후의 만남이 재현되었다. 해마다 치러지는 김해의 수로제에서 왕은 왕후 일행을 반갑게 맞이한다. - P76


댓글(2)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람돌이 2022-10-20 18: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은지 한참 되어서 기억도 안나는데 앞으로 대장정님 덕분에 다시 떠올릴 수 있겠네요. ^^

대장정 2022-10-20 18:52   좋아요 2 | URL
사놓고 안 읽었던 책들을 읽고 있네요.ㅎㅎ^^~
 

우리와 남들을 이어주는 유대치고 벼만큼 끈끈하고 오래된 것은 없다. 그것은 아마 벼야말로 ‘벼문화권이란 하나의 유대로 묶여 있는사람들 모두의 생명원으로서 수천 년 동안 서로 간의 문화적 공유성과 상관성을 줄곧 유지할 수 있게 했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천지개벽이 일어나지 않는 한, 이 유대는 결코 끊이지 않을 것이다. - P57

그뿐이랴. 벼는 생태적으로 환경을 보전하는 기능을 한다. 우리나라에서 홍수가 지는 여름철은 벼농사가 한창인 때라서 논은 홍수조절기능을 하는 거대한 댐과 같다. 보통 논둑 높이를 27cm로 치면 우리나라전체 논(1,345,000ha)에 가둘 수 있는 물은 춘천댐 저수량의 24배에 맞먹는 약 36억 톤이나 된다고 한다. 다목적댐 건설비용으로 환산하면 무려 15조 원이나 공얻는 셈이라고 하니, 실로 크나큰 혜택이아닐 수 없다. 그 밖에 논은 비탈진 밭에서 씻겨 내리는 흙을 받아서보존하기도 하고, 물이 논으로 들어와 작물생산에 이용되는 동안 정화되어 수질이 좋아지며, 벼가 논에서 자라는 동안 광합성 작용을 통해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고 산소를 방출함으로써 대기를 정화하는 역할도 해내 환경이 보전된다. - P60

벼농사의 긴 역사가 보여주듯이, 친화성과 순화력은 문명의 산생과성장을 결과하며, 문명의 보편성과 개별성을 조화시켜주는 중요한요인이다. 그것을 이탈하거나 상실했을 때, 문명은 생존 근거를 잃게되어 결국 도태되고 만다. - P6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카야마 시치리, 가와이 간지

히가시노 게이고식 추리소설이 가끔 식상해지거나 지겨워질 때 외도했던 책

좋다.

나카야마 시치리. 책을 이렇게나 많이 썼을줄 몰랐다. 제목에 교향곡 작곡가가 많네
다 읽어봐야겠다.

아직 5권밖에 못 읽었다. 공짜 e북으로

가와이 간지 4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금도 우리는 심심찮게 민속축제 마당에서 청사자와 황사자의 탈을쓰고 두 패로 나뉘어 굿거리장단에 맞춰 꼬리를 휘저으며 덩실덩실춤을 추는 흥겹고 익살스러운 장면을 목격한다. 탈을 쓰고 추는 춤이라고는 하지만, 사자가 없는 이 땅에서 과연 어떻게 사자춤이 생겨났을까. 그것도 천몇백 년을 내려오면서 굳어질 대로 굳어진 우리의 한민속놀이로 줄곧 이어져왔으니 말이다. 그 해답은 서역(西域)이라는 새로운 세계와의 대면에서 찾게 된다. - P220

서역이란 원래 중국인들이 막연하게 중국의 서쪽 지역을 가리키는말로서, 우리를 포함해 한자문명권에서는 근세에 이르기까지 줄곧사용되어왔다. - P221

이 말은 기원전 60년에 전한(前漢)이 숙적 흉노를  제압하기 위해 타림 분지의 중앙부에 위치한 오루성(烏壘城)에 서역도호부(西域都護府)를 설치하면서부터  사용되기 시작하였는데, 당시는 주로 오늘의  신장웨이우얼자치구 영내의 수십 개 나라들이 포함되었다. 이것이 좁은 의미의 서역이다.  - P221

그러나 한대 이후 중국의 대외 교섭과 교류가 점차 확대됨에 따라 서역의 포괄범위가 서쪽으로 더 넓어져서 7세기 당대에 이르러서는 중앙아시아와 인도뿐만 아니라, 멀리 페르시아(이란)와 대식(大食, 아랍)까지를  망라하게 되었다. 이것이 넓은 의미의 서역으로서  근세까지의 개념이다.  - P221

한국에서 서역이란 용어는 『고려사』에 처음으로  나타난다. 통일신라가 상대한 서역은 넓은 의미의 서역으로서, 지역이 광대하고 민족이나 문화도 다양하여 교류의 폭도 그만큼 넓었다 - P221

태평성대를 구가하던 신라인들이 서역문물에 대해 갖는 호기심은대단했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귀족 사대부들은 물론 일반인들까지도 앞을 다투어 서역에서 들어온 호화품들을 장만하고 남용하는 바람에 무분별한 사치풍조까지 일고 있었다. 그리하여 일찍이 지위고하에 따라 옷[色服], 탈것(車騎], 그릇(器用], 집(屋舍] 등에서서역문물을 사용할 데 대한 세칙을 발표한 바 있다. 그러나 그것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자 흥덕왕(興)은 834년에 사치를 금하는 칙령을 내렸는데, 그 서문에서 일부 호화를 일삼는 사람들이 외래품만을선호하고 국산품을 혐오하는 방자한 작태를 힐책하면서 이 사용금지세칙을 위반하는 자는 국법으로 다스리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 P222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괘릉 무인석이 오른쪽 옆구리에지름이 10cm가량 되는 복주머니를 차고 있다는 것이다. 복주머니는 동양, 특히 한국 고유의 장신구로서 신라땅에서 서역인이 복주머니를 차고 있다는 사실은 조각상의 예술성보다는 신라에 온 서역인들이 신라문화를 기꺼이 받아들였다는 점, 즉 두 문명이 융합한 결과라는 데 더 큰 의미가 있다. - P235

이상에서 살펴본 무인석이나 흙인형은단지 상징적 염원만을 담은 조각이 아니라,
늦어도 7세기경부터는 서역인들이 신라땅에 와서 살면서 무장이나 문관으로까지 기용되고 있었음을 시사하는, 상당한 정도의 사실성이 투영된 증거물이다. 기나긴 세월의 풍속에서도 의연히 서 있는 저 무인석과 흙인형은 우리가 서역인들과서로의 문화를 주고받으면서 삶을 함께해온 그 옛날의 만남과 어울림의 역사를 무언으로 증언하고 있다. - P236

우리와 이웃하면서 한 문명권에서 살아온 중국이나 일본 말고 이 세상에서 우리를 가장 먼저 알고 찾아와서 교제한 사람들은 과연 누구일까? 그동안 그 해답은 제대로 주어지지 않았다.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한 서양사람들이 우리더러 세상과 동떨어진 호젓한 ‘은둔(隱遁)의 나라‘라고 하니, 남들은 물론 우리마저도 그저 그런가보다 하고무심히 넘겨버렸다. 그러나 알고 보면 결코 그렇지가 않다. 그 해답은 중세 아랍사람들이 주고 있다 - P237

그러나 루브루크보다 400~500년, 쎄스뻬데스보다는 무려 700~800년 앞서 신라에 많은 아랍인들이 오갔을 뿐만 아니라 정착까지 했다는 기술과 더불어 신라에 관한 귀중한 사료들이 중세의 여러 아랍문헌에 기록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오고 있다. 요컨대 한(漢)문명권 밖에서 처음으로 한국(신라)을 알고 그 존재를 세계만방에 알린 사람들은다름 아닌 9세기 중엽의 아랍인들로서 그 역사는 자그마치 1,00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면 그들의 눈에 비친 신라의 모습은과연 어떠했으며, 그들은 신라를 세계에 어떻게 알리고 있었던 것일까? 그 모습은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자화상이기도 하고, 세계 속에서 일찍이 우리 겨레가 누리던 드높은 위상이기도 해서 자못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 P238

이렇듯 중세 아랍인들의 캔버스에는 윤색 같은 것이 없지는 않지만, 신라의 넉넉하고 진취적인 자화상이 생생히 그려져 있다. 이런 것을 알 바 없는 서구인들은 19세기 말 우리를 ‘은둔‘의 화신으로 곡필했고, 거의 같은 시기에 일본사람들은 엉뚱하게도 신라에 관한 중세 아랍문헌의 기술은 신라가 아닌 일본에 관한 기술이라고 아전인수하는 이른바 ‘신라일본비정설‘을 들고 나와 반세기 동안이나 사람들을 현혹시켰고, 그 여파는 우리네 학계에까지 미쳤다. 나라가 힘이 약하고 학문이 뒤처지면 참역사가 난도질당한다는 뼈저린 교훈이다. - P244

원래 신화(mythology)란 단순한 과거 이야기거나 인간이 만들어낸 허구적 이야기가 아니라 일정한 역사적 경험의 반영이나 상징이다. 그 속에는 역사적·문화적 경험과 이상향 같은 꿈도 들어 있다. - P21

일반적으로 신화는 여러가지 내용을 일정한 논리체계 속에 조합하고 은유와 상징으로 표현하지만, 그 속에는 일정한 역사성과 설화성도 공존한다. ‘단군신화‘도 예외는 아니다. 더욱이 이 신화는 우리 겨레의 개국이나 국조와 관련된 신화이기 때문에 그 위상과 의미가 각별하다. - P21

단군신화의 문명교류사적 의미는 한마디로 당대의 여타 문명과 신화소(神話素), 즉 신화를 꾸미는 여러 가지  구성요소를 공유한다는 데 있다. - P21

다음으로, 두 신화의 가장 큰 상이점은 이념적 지향점이다. 「길가메시 서사시는 매사에서 갈등과 상극, 살해와 분열로 탈출구를 찾고있으나, 단군신화는 조화와 상생, 합일에 지향점을 맞추고 있다. ‘홍익인간(弘益人間)‘ 즉  ‘널리 인간세계를 이롭게 한다‘는 건국이념에서 시작하여 부지자의(父知子意) 즉 ‘아버지는 아들의 뜻을 알기‘
에, 천신인 환인이 아들 환웅의 웅지를 알아서 지상에 내려 보내고, 환웅은 웅녀의 청을 받아들여 결합하고,  약속을 어긴 범에게도 관대하다 - P26

이처럼 우리의 단군신화는 신화 특유의 공유성이나 보편성을 갖고있지만, 투철한 동양사상에 바탕하고 우리 겨레의 건국이념에 충실한 신화다. 그래서 세계의 무수한 신화 속에서도 고고 위상한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 P27

유물은 역사의 진실을 말하는 증인이고 시비를 가려내는 판관이다.
그 값어치는 시간이 올라갈수록 더 높다. 1925년 대홍수가 진 후 한강 하류에 위치한 서울 암사동에서 우연히 빗물에 씻겨나간 빗살무늬토기(일명 즐문토기 櫛文土器) 조각들이 발견되었다. 이때를 전후해 우리나라의 60곳 넘는 데서 이런 유의 토기가 발굴되었다. - P28

그리하여 빗살무늬토기문화권은 거석문화권과 채도(彩陶) 문화권, 세석기(細石器) 문화권과 함께  신석기시대의 4대 문화권 중 하나로 자리매김되었다. - P29

비록 발원지나 유동경로가 모호하기는 하지만, 분명한 것은 신석기시대에 북방의 드넓은 지역에 동서로 빗살무늬토기대가 형성되어 문명교류사의 서장을 장식했다는 사실이다. - P31

이와 더불어 신석기시대에 고아시아인들과 함께 일구어놓은 빗살무늬토기문화는 적어도 청동기시대 이전까지 우리의 고대문화가 중국과는 무관하다는 역사적 사실을 시사해주고 있다. 채도(彩陶)에서흑도(黑陶)로, 다시  백도(白陶)로 전승되는 중국의 토기는 우리의 토기와는  다른 길을 걸어왔다. 이것은 중국의 중화사상이나 우리의 사대주의 유습에 일침을 놓는 질그릇의 엄정한 증언이다. 그래서 우리는 빗살무늬토기를 역사적 만남의 시비를 가려낸 귀중한 문화유산으로 높이 평가하고 있다. - P35

세상에 흔한 것이 돌이라 흔히들 돌을 무지나 아둔함, 그리고 무언(無言)에 빗댄다. 그러나 인간의 슬기가  스며들었을 때, 돌은 ‘영원불멸의 상징‘이나 ‘수호신‘으로 둔갑하기도 하고 말도 한다. 이것은 동서양 어디서나 마찬가지다. 우리 민간신앙에서 돌은 ‘서낭바위‘ ‘마을수호신‘ 등으로 신격화되는데, 그것은 돌이 풍요나 다산, 번식, 기후의 순조로움, 전승, 평화를 가져다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 P36

문화유산은 색다르고 생소한 지식의 세계로 우리를 여행시켜주는 학습의 공간이다. - P37

거석기념물은 지역에 따라 제작연대나 형태 및 기능이 조금씩 다르지만, 총체적으로 유형화하여 고찰할 수 있다. 긴 기둥 모양의 돌 하나를 지상에 수직으로 세운 멘히르(menhir, 독석獨石, 수석竪石, 선돌)와 돌기둥을  두 개 세우고 그 위에 평평한 돌을 한 개 가로 얹은 트릴리톤(trilithon), 그리고 돌을 여러 개 세운 위에 평평한 뚜껑돌을 얹은 돌멘(dolmen)이 있다. - P37

돌멘 앞에 큰 돌로 출입하는 통로를 만들고흙을 쌓은 코리도툼(corridor-tomb, 연도분羨道墳, 널길무덤)과  기둥 모양의 돌을 여러 줄 배열한 알리뉴망(alignements, 열석), 여러 개의 돌을 일정한 간격에 따라 원형으로 둘러 세운 크롬렉 (cromlech, 환상열석環狀列石)도  있다. 그 밖에 사람의 형상을 한 석상(石像)도  거석기념물에 속한다. - P39

고인돌은 한반도 전역에 걸쳐 널려 있는데, 대개는 무리를 지어 있어 그 분포밀도가 상당히 높을 뿐만 아니라, 형태나 껴묻거리도 다양하다. 알려지기로는 지금 세계에 약 55,000기의 각종 거석유물이 있는데, 그중 고인돌은 그리 많지 않다. 거석유물이 많다고 하는 아일랜드에도 고인돌은 고작 1,500기밖에 없다. 그런데 한반도에는 약40,000기(북한에 14,000~15,000기)가 집중되어 있다. 그중 전남 지방에서 발견된 것만 약 20,000 기나 되니, 정말로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고인돌 밀집지역이다. ‘고인돌의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2000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화순·고창·강화 지역의 고인돌군을 세계문화유산 제977호로 등록했다. 고인돌이 대표적 거석기념물이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우리는 커다란 문화적 긍지를 갖게된다. - P42

이처럼 고인돌은 그 옛날 우리겨레의 삶을 지켜주고 빛낸 값진 문화유산이기에 후손들은 늘 마음속 깊은 곳에 간직해왔다. - P43

이러한 얼과 넋은 겨레의 갈라짐을 넘어 딛고 오늘로 이어지고 있다. 2002년 남북한 고인돌학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벙어리 냉가슴앓듯 하다가 만남의 물꼬가 트이는 순간이었다. 반세기라는 한 맺힌세월이 고인돌의 이름에서부터 그 기원과 제작연대에 이르기까지 남북한 학자들 사이에 얕지 않은 골을 파놓았다. - P46

본의 아니게 하나의 역사를 놓고 서로 다르게 둘로 써왔다. 어찌 고인돌뿐이랴. 우리 겨레 앞에 놓인 숙명적 과제는 본디 하나를 둘 아닌 하나로만 되게 하는 일이다. - P47

이딸리아 동남부에 위치한 브룬디씨움(Brundisium)시는 청동 교역으로 이름난 고장으로, 이 도시 이름을 따서 청동을 ‘브론즈(bronze)라고 명명했다고 전해진다. - P5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금까지 우리는 대체로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세계와 고립시켜 통시적으로만 헤아려왔지, 세계와의 관련 속에서 공시적으로 이해하는데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근간에 와서 ‘세계 속의 한국‘이란 구호는 버젓이 내걸었지만, 도대체 세계 속에서 한국이 차지하는위상은 어떠했는지 아직 제대로 밝혀지지 않고 있다. 더욱이 우리들속에 들어와 있는 세계, 즉 ‘한국 속의 세계‘ 가 과연 어떤 것인지는그 개념조차 낯설다. 그 결과 남들이 우리더러 ‘은둔국‘이라고 해도우리는 그저 그런가보다 하고 지냈으며, 스스로가 ‘닫힌 나라‘라는자학적인 사관에서도 헤어나지 못했다. - P5

사실 ‘세계 속의 한국‘은 바깥에서 세계와 만남이고, ‘한국 속의 세계‘는 안에서 세계와 만남이다. 이 두 개념은 ‘세계성‘에서 서로 접합된다. ‘세계성‘이란 한마디로 세계에 대한 앎을 추구하고 세계와 삶을함께하는 정신을 말한다. - P5

우리에게 이러한 ‘세계성‘은 오늘과 내일에 필요한 정신일 뿐만 아니라, 어제부터 있어온 실체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제대로 읽어내지못했을 뿐이다. 우리의 유구한 역사와 문화의 갈피마다 이러한 ‘세계성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어느 것 하나 세계와 무관한 것이 없다. 가까이는 중국이나 일본, 멀리는 아랍이나 로마와도 서로 주고받으면서 역사와 문화를 함께 가꾸어왔다. 이를테면, 우리 속에는 일찍부터세계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했기에 비로소 오늘의 우리가 있게 된것이다. - P6

‘한국 속의 세계‘란 조금은 생소한 개념이지만, 실제로 지난날의현실이었고, 또 오늘과 내일은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기에 감히 이개념을 가지고 우리 역사와 문화에 접근해봤다. 모난 돌도 자꾸 굴리다보면 둥글어지는 법이다. 첫 시도니만치 부족하거나 어설픈 점이없을 리 없으므로, 독자 여러분의 질정과 가르침을 바라 마지않는다. - P6

문명교류란 서로를 알아가는 현장이다. 인류는 실로 오랫동안 서로를 모르고 살아왔다. 13세기 마르고 뽈로는 동방에 와 직접 본 여러가지 문명 업적들을 동방견문록』이란 여행기에서 실감나게 소개했다. 그러나 서양인들은 당대는 물론, 그 후 수세기 동안 그 내용을 믿지 않았다. 뽈로가 임종을 앞두었을 때, 그의 친구들은 영혼의 평화를 위해 이 견문록에 수록되어 있는 것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회개하라고 권유했다. 그러나 뽈로는 한숨을 몰아쉬며 회개는커녕 오히려 그가 본 동양의 놀라운 일들을 절반도 기술하지 못했다고 못내 아쉬워하면서 눈을 감았다.  - P15

그런가 하면 그로부터 500년이나 지난 뒤, 당대 최고의  지성인이라고 자부한 철학자 헤겔조차도 "중국이라는 나라가 존재한다는 것 외에는 중국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고 자인했다. - P15

문명교류는 서로의 삶을 소통시키는 현장이기도 하다. 문명은 언제어디서 창출되든 간에, 모방성이란 속성으로 인해 널리 퍼지고 받아들여져서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해준다. 문명교류를 떠난 역사의 발전이나 인류의 생존은 상상할 수 없다. - P15

바늘로부터 인공위성에 이르기까지, 먹는 낟알로부터 입는 옷가지에 이르기까지, 간단한 춤사위로부터 복잡한 정치제도에 이르기까지, 그 어느 것 하나도 교류의 결괴물이나 혜택이 아닌 것이 없다. 인류 역사의 전 과정이그러했고, 오늘은 물론 앞으로는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 - P15

하고 오래 살아남지만, 그러지 못하고 옹졸하게 문을 걸어 잠근 채우물 안의 개구리로 살아온 민족은 영락없이 후진을 면치 못하고 일찍 조락하고 말았다. 이것이 문명교류로부터 얻은 인간의 통절한 교훈이다. 교훈은 살려야 값지다. - P17

또 우리는 이 교류의 현장을 통해서 구체적인 환경과 역사적 맥락에서 타 문명을 이해하고 평가하는 ‘분명타자관‘을 몸에 익혀야 한다. - P18

인골형질학적으로 그들은 종래 일본의 원주민인 죠오몬인(文人)과는 전혀 다른 집단인 야요이인(彌生人)들이 다. 죠오몬인은 남방계인종으로서 이마가 넓고 눈이 크며 턱이 넓적하나, 야요이인은 북방계 인종으로서 얼굴이 갸름하며 눈썹이 가늘다.  - P187

그런데 이 야오이인들이 다름 아닌 기원전 3~4세기에 한반도로부터 건너가 벼농사를가르쳐준 사람들로서 농경을 중심으로 한 야요이문화를 일구어놓았다. 도이가하마 해안의 인골이 이 야요이인들인 것이다.  - P187

그들이 20도각으로 향한 서북쪽이 바로 한반도에서 초기 벼농사를 가꾼 호남 일대이며, 그 방향으로 머리를 돌린 것은 고향을 그리워하는 수구지심(首丘之心)과  영혼을 고향으로 날려 보내려는 바람 때문이었다 - P187

이처럼 한반도와 일본열도 간의 만남은 문화의 주고받음으로부터 시작했다.  - P187

이에 아직은 무학 상태에서 허덕이던 일본사람들은 이 박사들을 가리켜 ‘문인(文讀人)‘
즉 ‘글을 읽는 사람‘이라고 부르면서 무척 부러워하고 우대했다. - P188

그러한 사실을 실증하는 수많은 유물 중에는 이른바 ‘칠지도(七枝刀, 七支刀)‘라는 특수한 유물이 하나 있다.  그 특수성이란 유물의 문화사적 가치보다는 정치사적 의미가 견강부회되기 때문이다. 나라현 텐리시(天理市)의 이소노까미신궁 (石上神宮)에는 국보로 지정된  ‘칠지도‘란 보물이  ‘판도라의 궤 같은 특수상자 속에  갇혀 있다. - P190

중국 『수서(隋書)』에 보면 ‘백제‘란 이름은 ‘백가제해(百家濟海)‘, 즉100가(家)가 바다를 건너다‘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말하자면, 많은사람들이 바다를 오간 데서 나온 이름이란 뜻이다. 이것은 해상왕국백제가 바다를 통해 많은 사람들과 국제적으로 교류했다는 것을 시사한다. - P195

무령왕릉은 왕이 붕어하기 11년 전부터 만들기 시작했으며, 사후시신은 2년간 가묘(假墓) 상태에 있다가  이 무덤에 안장하는 두벌묻기법(二次葬法)을 따랐다. - P197

부여로부터 고구려로 이어지는 북방대륙문화와 마한(馬韓)으로부터 이어지는 남방해양문화가 여기서 접목되는가 하면, 가깝게는 일본과 중국의 문화가, 멀리로는  그리스-로마문화와 서역문화가 여기서 만나기도 한다.  무령왕릉이야말로 여러 문명을 한자리에서 어울리게 한 ‘문명의 집합처‘로서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백제문화의 국제성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 P198

한편 나무널의 재질을 분석한 결과 세계적으로 한 종밖에 없는 일본산 금송(金松)이라는것이 밝혀졌다.  상록침엽교목인 금송은 일본 혼슈우(本州)의 저위도 지방과 큐우슈우(九州)나 시꼬꾸(四國) 등 남부지방에 만  분포하며 대체로 해발 600~1,200m의 고지대에서 자생한다. 무령왕릉의 왕과 왕비의 관을 만드는 데는 수령 350 년 내지 600년, 직경 130cm 이상 되는 거대한 금송들이 수십 그루 사용되었다. 이 같은 사실은 동북아 해상강국으로 군림하던 공주시대 백제가 중국 남조나 일본 야마또(大和) 정권과 밀접한 외교관계와  교류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입증한다. - P200

필리그리 (filigree)기법이라고 부르는 누금기법은 원래 이집트에서 발생한 후 중앙아시아를 거처 중국과 한반도까지 전파되었다. - P201

누금이란 가는 금줄과작은 금알을 늘여 붙여서 물형을 만드는정교한 세공기법이다. - P201

이에 비해 감옥은 금테두리 안에 여러 가지 색깔의 옥을  박는 공예기법으로서 이른바 다채장식양식(多彩裝飾樣式)으로 알려져있는데, 기원 초 그리스, 로마등지에서  유행하다가 페르시아와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과 한반도에 전해졌다. 이 두 가지 기법이 고구려에서는 드물지만, 백제나 신라에서는 널리 이용되어 장신구 장식기법의 하나로 정착되었다. 그런가 하면 연꽃무늬 벽돌에는 앞서 말했던 고대 유럽의 팔메트무늬도 보인다. - P201

끝으로, 무령왕릉은 고대 유리제품의 진열장을 방불케 한다는 데서, 백제문화의 교류상이나 국제성을 더욱 실감케 한다. - P201

이상의 몇 가지 대표적 유물에서 보다시피 무령왕릉은 말 그대로문명의 ‘용광로‘ 이고 ‘집합‘로서 한국문명사의 영광스러운 한 장을수놓았다. 백제는 동아시아의 요로에 위치한 해상성국답게 동서남북 방방곡곡의 문화를  진취적으로 수용하고 소화하여 자신의 문화를 찬란하게 꽃피웠으며, 그러한 문화적 진취성은 나라를 강하게 만드는 원동력이었다.  - P203

문명한 민족은 강한 민족이고 문명한 나라는 대국이다. 그래서 아마 다산(茶山)은 백제가 삼국 가운데서 가장  강성한 나라였다고 추단한 것 같다. 백제의 이러한 진취성은 해상국이란 지정학적 이점을 최대한 살려서 해로를 통한 국제적 교류를 활성화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 P203

문화현상 가운데서 종교는 전파성이 가장 강한 분야다. 특히 불교 같은 보편종교는 자연이나 혈연 구조에 기반을 둔 자연종교와는 달리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의 종교적 이상까지도 추구하는 노력, 즉 전파를통한 전도를 꾸준히 진행하게 된다. 이 같은 종교의 전파는 필연적으로 초보적 전달과정인 초전(初傳)과 문화적인 변용 (metamorphosis)을  수반하는  공전(公傳)의  두 단계를 거쳐  점진적으로 실현된다. - P204

초전은 주로 민간에서 잠행적으로, 개별적으로 이루어지는 전파이며, 공전은 일정한 초전과정을 거친 후  국가나 권력의 공식적인 허용, 즉 공허(公許)에 의해  공개적으로, 광범위하게 이루어지는 전파다. 따라서 종교가 언제부터 전파되었는가 하는 시원은 응당 초전에서 찾아야 하지, 공전 시기를 그 시원으로 간주하는 것은 분명 무리다. - P205

즉 순도가 고구려의 불교를 창시했다는 ‘순도(順道肇麗)‘와 마라난타(摩羅難陀)가 백제불교를 개척했다는  ‘난타벽제(難陀闢濟)‘, 그리고 아도가 신라 불교의 기반을  닦았다는 ‘아도기라(阿道基羅)‘가 지금까지  한국 불교의 전래과정이나 전래시조 및 전래기원에 관한 통설로 되고 있다. - P205

고구려에서는 소수림왕 때 순도가 온 지 2년 후에 전도를 위해 고구려를 찾은 아도의 전기에서 고구려 불교의 초전 사실을 찾아볼 수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3세기 중반에 중국 위나라의 아굴마(我堀摩)가 고구려에 사신으로 왔다가 고구려 여인 고도령(高道寧)과  사통하여 낳은 자식이 바로 아도인데, 그는 5살 때 어머니의 뜻으로 출가하였다가14살 때 어머니 나라인 고구려로 다시 돌아왔다.
이렇게 순도가 고구려에 오기 100년 전에 아도 어머니 고도령은 이미불교를 신봉하고 있어서 어린 아들을 출가시켰다고 하니, 이것은 당시 불교가 이미 유행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 P207

불교 전파는 초전이건 공전이건 간에 모두 북방루트(주로육로)를 통해 진행된 것이다. 한편, 다분히 초전단계에 속하는 가야불교나 동남해안 일대에 남겨진 불교 흔적들을 추적해보면, 북방루트에 앞서 남방해로를 통해서도 불교가 전래되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하여 북방루트인 인도→ 서역 → 중국 한반도 순의 전래과정과 그 유포내용을 ‘북래설‘로, 그에 비해 남해로를 통한 전래과정과그 유포내용을 ‘남래설‘이라고 일단 이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는 ‘북래설‘에만 치우쳐 ‘남래설‘에는 마땅한 관심을 돌리지 못했다. - P211

어느 외국 학자는 상당한 논리적 근거를 제시하면서 삼국시대의 신라는 ‘로마문화의 왕국‘이라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 그리고 그 근거로 동아시아에서는 그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신라에 로마문화가 넓고 깊게 스며들었다는 사실을 든다. 사실 지금까지는 신라문화가 북방대륙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은 데다가 남방해양문화가 가미되어 발달해왔다는 것이 국내외 학계의 통설이었다 - P212

한반도 동남부 일각에서 일찍이 꽃핀 가야문화를 포용한 신라문화에는 상층문화건 기층문화건 할 것 없이 곳곳에서 로마문화의 흔적이 또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러한 흔적은 4세기부터 6세기까지의신라 고분 유적과 유물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아직은 비교문화직인 연구가 미흡하기 때문에 확연하지는 않지만, 소재와 형식, 기법등을 감안하면, 대체로 로마문화와 공유성을 갖고 있는 것과, 로마문화를 그대로 받아들인 것, 그리고 그것을 창조적으로 변용·발전시킨것 등, 3가지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이것은 신라문화 특유의 국제성과진취성, 독창성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 P213

기원 전후 황금의 성산지 알타이 지방을 중심으로 하여 유라시아 북방 초원지대에 찬란한 황금문화시대가 열리면서 이 유목민족들의 이동에 의해 수목형 관식을 갖춘 금관이 동서 여러 곳에서 만들어지게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관식은 당대 중국이나 일본의 유물에서는 찾아볼 수 없음은 물론, 고구려나 백제의 유물에서도 극히 드물다. 신라문화의 국제성과 독창성이 돋보이는 일례다. - P214

로마세계에서는 1세기경부터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 모자이크무늬의상감옥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것이 중국에는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멀리 신라까지 전해졌으니, 글자 그대로 ‘기행(奇行)‘이라고  아니할수 없다. - P215

원래 귀걸이와 반지, 팔찌, 목걸이 같은 장신구는 그리스-로마문화에서는 필수적이나, 동아시아 문명권에서는 거의 관심 밖에 있었다. 그래서 로마의 누금·감옥기법으로 만들어진 이러한 세공장식품들이 당대 중국이나 일본 유물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고구려에도 별반 없으며, 백제는 신라와 관계가 좋았을 때의 유물에서만 약간 나온다. 그러나 신라의 경우는 천마총에서 출토된 금반지에서 보다시피 모양은 대체로 로마 금반지의기본형식인 마름모꼴을 취하나, 자신들의 취향에 맞게 여러 가지 모양으로 변형시키고 있다. 같은 고분에서 출토된 허리띠와 띠드리개는 로마나 시베리아에서 유사품이 발견되기는 했으나, 훨씬 화려하고 개성 있게 꾸며졌다. - P21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