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우리는 대체로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세계와 고립시켜 통시적으로만 헤아려왔지, 세계와의 관련 속에서 공시적으로 이해하는데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근간에 와서 ‘세계 속의 한국‘이란 구호는 버젓이 내걸었지만, 도대체 세계 속에서 한국이 차지하는위상은 어떠했는지 아직 제대로 밝혀지지 않고 있다. 더욱이 우리들속에 들어와 있는 세계, 즉 ‘한국 속의 세계‘ 가 과연 어떤 것인지는그 개념조차 낯설다. 그 결과 남들이 우리더러 ‘은둔국‘이라고 해도우리는 그저 그런가보다 하고 지냈으며, 스스로가 ‘닫힌 나라‘라는자학적인 사관에서도 헤어나지 못했다. - P5
사실 ‘세계 속의 한국‘은 바깥에서 세계와 만남이고, ‘한국 속의 세계‘는 안에서 세계와 만남이다. 이 두 개념은 ‘세계성‘에서 서로 접합된다. ‘세계성‘이란 한마디로 세계에 대한 앎을 추구하고 세계와 삶을함께하는 정신을 말한다. - P5
우리에게 이러한 ‘세계성‘은 오늘과 내일에 필요한 정신일 뿐만 아니라, 어제부터 있어온 실체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제대로 읽어내지못했을 뿐이다. 우리의 유구한 역사와 문화의 갈피마다 이러한 ‘세계성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어느 것 하나 세계와 무관한 것이 없다. 가까이는 중국이나 일본, 멀리는 아랍이나 로마와도 서로 주고받으면서 역사와 문화를 함께 가꾸어왔다. 이를테면, 우리 속에는 일찍부터세계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했기에 비로소 오늘의 우리가 있게 된것이다. - P6
‘한국 속의 세계‘란 조금은 생소한 개념이지만, 실제로 지난날의현실이었고, 또 오늘과 내일은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기에 감히 이개념을 가지고 우리 역사와 문화에 접근해봤다. 모난 돌도 자꾸 굴리다보면 둥글어지는 법이다. 첫 시도니만치 부족하거나 어설픈 점이없을 리 없으므로, 독자 여러분의 질정과 가르침을 바라 마지않는다. - P6
문명교류란 서로를 알아가는 현장이다. 인류는 실로 오랫동안 서로를 모르고 살아왔다. 13세기 마르고 뽈로는 동방에 와 직접 본 여러가지 문명 업적들을 동방견문록』이란 여행기에서 실감나게 소개했다. 그러나 서양인들은 당대는 물론, 그 후 수세기 동안 그 내용을 믿지 않았다. 뽈로가 임종을 앞두었을 때, 그의 친구들은 영혼의 평화를 위해 이 견문록에 수록되어 있는 것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회개하라고 권유했다. 그러나 뽈로는 한숨을 몰아쉬며 회개는커녕 오히려 그가 본 동양의 놀라운 일들을 절반도 기술하지 못했다고 못내 아쉬워하면서 눈을 감았다. - P15
그런가 하면 그로부터 500년이나 지난 뒤, 당대 최고의 지성인이라고 자부한 철학자 헤겔조차도 "중국이라는 나라가 존재한다는 것 외에는 중국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고 자인했다. - P15
문명교류는 서로의 삶을 소통시키는 현장이기도 하다. 문명은 언제어디서 창출되든 간에, 모방성이란 속성으로 인해 널리 퍼지고 받아들여져서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해준다. 문명교류를 떠난 역사의 발전이나 인류의 생존은 상상할 수 없다. - P15
바늘로부터 인공위성에 이르기까지, 먹는 낟알로부터 입는 옷가지에 이르기까지, 간단한 춤사위로부터 복잡한 정치제도에 이르기까지, 그 어느 것 하나도 교류의 결괴물이나 혜택이 아닌 것이 없다. 인류 역사의 전 과정이그러했고, 오늘은 물론 앞으로는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 - P15
하고 오래 살아남지만, 그러지 못하고 옹졸하게 문을 걸어 잠근 채우물 안의 개구리로 살아온 민족은 영락없이 후진을 면치 못하고 일찍 조락하고 말았다. 이것이 문명교류로부터 얻은 인간의 통절한 교훈이다. 교훈은 살려야 값지다. - P17
또 우리는 이 교류의 현장을 통해서 구체적인 환경과 역사적 맥락에서 타 문명을 이해하고 평가하는 ‘분명타자관‘을 몸에 익혀야 한다. - P18
인골형질학적으로 그들은 종래 일본의 원주민인 죠오몬인(文人)과는 전혀 다른 집단인 야요이인(彌生人)들이 다. 죠오몬인은 남방계인종으로서 이마가 넓고 눈이 크며 턱이 넓적하나, 야요이인은 북방계 인종으로서 얼굴이 갸름하며 눈썹이 가늘다. - P187
그런데 이 야오이인들이 다름 아닌 기원전 3~4세기에 한반도로부터 건너가 벼농사를가르쳐준 사람들로서 농경을 중심으로 한 야요이문화를 일구어놓았다. 도이가하마 해안의 인골이 이 야요이인들인 것이다. - P187
그들이 20도각으로 향한 서북쪽이 바로 한반도에서 초기 벼농사를 가꾼 호남 일대이며, 그 방향으로 머리를 돌린 것은 고향을 그리워하는 수구지심(首丘之心)과 영혼을 고향으로 날려 보내려는 바람 때문이었다 - P187
이처럼 한반도와 일본열도 간의 만남은 문화의 주고받음으로부터 시작했다. - P187
이에 아직은 무학 상태에서 허덕이던 일본사람들은 이 박사들을 가리켜 ‘문인(文讀人)‘ 즉 ‘글을 읽는 사람‘이라고 부르면서 무척 부러워하고 우대했다. - P188
그러한 사실을 실증하는 수많은 유물 중에는 이른바 ‘칠지도(七枝刀, 七支刀)‘라는 특수한 유물이 하나 있다. 그 특수성이란 유물의 문화사적 가치보다는 정치사적 의미가 견강부회되기 때문이다. 나라현 텐리시(天理市)의 이소노까미신궁 (石上神宮)에는 국보로 지정된 ‘칠지도‘란 보물이 ‘판도라의 궤 같은 특수상자 속에 갇혀 있다. - P190
중국 『수서(隋書)』에 보면 ‘백제‘란 이름은 ‘백가제해(百家濟海)‘, 즉100가(家)가 바다를 건너다‘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말하자면, 많은사람들이 바다를 오간 데서 나온 이름이란 뜻이다. 이것은 해상왕국백제가 바다를 통해 많은 사람들과 국제적으로 교류했다는 것을 시사한다. - P195
무령왕릉은 왕이 붕어하기 11년 전부터 만들기 시작했으며, 사후시신은 2년간 가묘(假墓) 상태에 있다가 이 무덤에 안장하는 두벌묻기법(二次葬法)을 따랐다. - P197
부여로부터 고구려로 이어지는 북방대륙문화와 마한(馬韓)으로부터 이어지는 남방해양문화가 여기서 접목되는가 하면, 가깝게는 일본과 중국의 문화가, 멀리로는 그리스-로마문화와 서역문화가 여기서 만나기도 한다. 무령왕릉이야말로 여러 문명을 한자리에서 어울리게 한 ‘문명의 집합처‘로서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백제문화의 국제성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 P198
한편 나무널의 재질을 분석한 결과 세계적으로 한 종밖에 없는 일본산 금송(金松)이라는것이 밝혀졌다. 상록침엽교목인 금송은 일본 혼슈우(本州)의 저위도 지방과 큐우슈우(九州)나 시꼬꾸(四國) 등 남부지방에 만 분포하며 대체로 해발 600~1,200m의 고지대에서 자생한다. 무령왕릉의 왕과 왕비의 관을 만드는 데는 수령 350 년 내지 600년, 직경 130cm 이상 되는 거대한 금송들이 수십 그루 사용되었다. 이 같은 사실은 동북아 해상강국으로 군림하던 공주시대 백제가 중국 남조나 일본 야마또(大和) 정권과 밀접한 외교관계와 교류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입증한다. - P200
필리그리 (filigree)기법이라고 부르는 누금기법은 원래 이집트에서 발생한 후 중앙아시아를 거처 중국과 한반도까지 전파되었다. - P201
누금이란 가는 금줄과작은 금알을 늘여 붙여서 물형을 만드는정교한 세공기법이다. - P201
이에 비해 감옥은 금테두리 안에 여러 가지 색깔의 옥을 박는 공예기법으로서 이른바 다채장식양식(多彩裝飾樣式)으로 알려져있는데, 기원 초 그리스, 로마등지에서 유행하다가 페르시아와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과 한반도에 전해졌다. 이 두 가지 기법이 고구려에서는 드물지만, 백제나 신라에서는 널리 이용되어 장신구 장식기법의 하나로 정착되었다. 그런가 하면 연꽃무늬 벽돌에는 앞서 말했던 고대 유럽의 팔메트무늬도 보인다. - P201
끝으로, 무령왕릉은 고대 유리제품의 진열장을 방불케 한다는 데서, 백제문화의 교류상이나 국제성을 더욱 실감케 한다. - P201
이상의 몇 가지 대표적 유물에서 보다시피 무령왕릉은 말 그대로문명의 ‘용광로‘ 이고 ‘집합‘로서 한국문명사의 영광스러운 한 장을수놓았다. 백제는 동아시아의 요로에 위치한 해상성국답게 동서남북 방방곡곡의 문화를 진취적으로 수용하고 소화하여 자신의 문화를 찬란하게 꽃피웠으며, 그러한 문화적 진취성은 나라를 강하게 만드는 원동력이었다. - P203
문명한 민족은 강한 민족이고 문명한 나라는 대국이다. 그래서 아마 다산(茶山)은 백제가 삼국 가운데서 가장 강성한 나라였다고 추단한 것 같다. 백제의 이러한 진취성은 해상국이란 지정학적 이점을 최대한 살려서 해로를 통한 국제적 교류를 활성화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 P203
문화현상 가운데서 종교는 전파성이 가장 강한 분야다. 특히 불교 같은 보편종교는 자연이나 혈연 구조에 기반을 둔 자연종교와는 달리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의 종교적 이상까지도 추구하는 노력, 즉 전파를통한 전도를 꾸준히 진행하게 된다. 이 같은 종교의 전파는 필연적으로 초보적 전달과정인 초전(初傳)과 문화적인 변용 (metamorphosis)을 수반하는 공전(公傳)의 두 단계를 거쳐 점진적으로 실현된다. - P204
초전은 주로 민간에서 잠행적으로, 개별적으로 이루어지는 전파이며, 공전은 일정한 초전과정을 거친 후 국가나 권력의 공식적인 허용, 즉 공허(公許)에 의해 공개적으로, 광범위하게 이루어지는 전파다. 따라서 종교가 언제부터 전파되었는가 하는 시원은 응당 초전에서 찾아야 하지, 공전 시기를 그 시원으로 간주하는 것은 분명 무리다. - P205
즉 순도가 고구려의 불교를 창시했다는 ‘순도(順道肇麗)‘와 마라난타(摩羅難陀)가 백제불교를 개척했다는 ‘난타벽제(難陀闢濟)‘, 그리고 아도가 신라 불교의 기반을 닦았다는 ‘아도기라(阿道基羅)‘가 지금까지 한국 불교의 전래과정이나 전래시조 및 전래기원에 관한 통설로 되고 있다. - P205
고구려에서는 소수림왕 때 순도가 온 지 2년 후에 전도를 위해 고구려를 찾은 아도의 전기에서 고구려 불교의 초전 사실을 찾아볼 수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3세기 중반에 중국 위나라의 아굴마(我堀摩)가 고구려에 사신으로 왔다가 고구려 여인 고도령(高道寧)과 사통하여 낳은 자식이 바로 아도인데, 그는 5살 때 어머니의 뜻으로 출가하였다가14살 때 어머니 나라인 고구려로 다시 돌아왔다. 이렇게 순도가 고구려에 오기 100년 전에 아도 어머니 고도령은 이미불교를 신봉하고 있어서 어린 아들을 출가시켰다고 하니, 이것은 당시 불교가 이미 유행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 P207
불교 전파는 초전이건 공전이건 간에 모두 북방루트(주로육로)를 통해 진행된 것이다. 한편, 다분히 초전단계에 속하는 가야불교나 동남해안 일대에 남겨진 불교 흔적들을 추적해보면, 북방루트에 앞서 남방해로를 통해서도 불교가 전래되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하여 북방루트인 인도→ 서역 → 중국 한반도 순의 전래과정과 그 유포내용을 ‘북래설‘로, 그에 비해 남해로를 통한 전래과정과그 유포내용을 ‘남래설‘이라고 일단 이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는 ‘북래설‘에만 치우쳐 ‘남래설‘에는 마땅한 관심을 돌리지 못했다. - P211
어느 외국 학자는 상당한 논리적 근거를 제시하면서 삼국시대의 신라는 ‘로마문화의 왕국‘이라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 그리고 그 근거로 동아시아에서는 그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신라에 로마문화가 넓고 깊게 스며들었다는 사실을 든다. 사실 지금까지는 신라문화가 북방대륙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은 데다가 남방해양문화가 가미되어 발달해왔다는 것이 국내외 학계의 통설이었다 - P212
한반도 동남부 일각에서 일찍이 꽃핀 가야문화를 포용한 신라문화에는 상층문화건 기층문화건 할 것 없이 곳곳에서 로마문화의 흔적이 또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러한 흔적은 4세기부터 6세기까지의신라 고분 유적과 유물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아직은 비교문화직인 연구가 미흡하기 때문에 확연하지는 않지만, 소재와 형식, 기법등을 감안하면, 대체로 로마문화와 공유성을 갖고 있는 것과, 로마문화를 그대로 받아들인 것, 그리고 그것을 창조적으로 변용·발전시킨것 등, 3가지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이것은 신라문화 특유의 국제성과진취성, 독창성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 P213
기원 전후 황금의 성산지 알타이 지방을 중심으로 하여 유라시아 북방 초원지대에 찬란한 황금문화시대가 열리면서 이 유목민족들의 이동에 의해 수목형 관식을 갖춘 금관이 동서 여러 곳에서 만들어지게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관식은 당대 중국이나 일본의 유물에서는 찾아볼 수 없음은 물론, 고구려나 백제의 유물에서도 극히 드물다. 신라문화의 국제성과 독창성이 돋보이는 일례다. - P214
로마세계에서는 1세기경부터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 모자이크무늬의상감옥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것이 중국에는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멀리 신라까지 전해졌으니, 글자 그대로 ‘기행(奇行)‘이라고 아니할수 없다. - P215
원래 귀걸이와 반지, 팔찌, 목걸이 같은 장신구는 그리스-로마문화에서는 필수적이나, 동아시아 문명권에서는 거의 관심 밖에 있었다. 그래서 로마의 누금·감옥기법으로 만들어진 이러한 세공장식품들이 당대 중국이나 일본 유물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고구려에도 별반 없으며, 백제는 신라와 관계가 좋았을 때의 유물에서만 약간 나온다. 그러나 신라의 경우는 천마총에서 출토된 금반지에서 보다시피 모양은 대체로 로마 금반지의기본형식인 마름모꼴을 취하나, 자신들의 취향에 맞게 여러 가지 모양으로 변형시키고 있다. 같은 고분에서 출토된 허리띠와 띠드리개는 로마나 시베리아에서 유사품이 발견되기는 했으나, 훨씬 화려하고 개성 있게 꾸며졌다. - P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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