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서울)역에서 경원선을 타고 철원에서 하차해 금강산전철을 갈아타면내금강에 갈 수 있습니다. 매년 5월부터 10월까지는 직접 연결해주는 기차가 따로 있고, 일요일·공휴일 전날 밤 10시에 떠나는이등·삼둥 침대차는 새벽 6시에 내금강역에 도착합니다. 역에서 장안사까지는 걸어서 20분,승합버스로 5분 걸립니다. - P237
가마 타고 금강산 구경 가는 양반들 단발령에서는 40리 밖의 금강산 1만2천 봉우리가 서릿발처럼 하얗게환상적으로 피어올라 사람들은 이 고갯마루에 오르는 순간 너나없이 "차라리 머리 깎고 중이 돼 거기서 살고 싶다"는 말을 자신도 모르게 내뱉곤 했단다. 그래서 단발령이라는 이름을 얻었고, 겸재 정선 이래로 ‘단발령에서 바라본 금강산‘, 일러 ‘단발령망금강(斷髮嶺望金剛)‘이라는 것이 하나의 화재(畵材)가 되었다. - P238
"금강산은 돌이 만가지로 재주 부리고 물이 천가지로 재롱 부리며만든 자연의 조화입니다. 같은 금강산이라도 안팎이 달라시, 내금강은 은은하고 얌전하고 밋밋하고 우아하고 수리하여 안 내(內)자를 쓰고, 외금강은 웅장하고 기발하고 기세차고 당당하고 씩씩하여 바깥 외(外) 자를 씁니다. - P242
리정남 선생과의 대화 속에서 항시 느끼게 되는 것은 내가 대강을 물으면 그는 교과서적 지식으로 대답하는 것이었다. 나는 느낌과 기분이중요하다면 그는 사실과 지식이 더 중요했다. 이것이 우리 둘의 성격차이인지 남과 북 ‘학자‘의 성향차이인지는 아직 단정짓지 못하겠지만 남과 북 지식인상을 말할 때 한번쯤은 생각해볼 만한 일이었다. - P246
나는 하나의 전통이 민속이라는 이름으로 치장될 때 그것은 이미 죽은전통이 되고 만다고 생각한다. 초가집과 기와집이 옹기종기 어우러져 다정다감한 정취를 이루어낸 우리의 농가 표정은 이제 남이고 북이고 민속촌에나 가야 볼 수 있는 것이 되고 말았으니 그런 환경, 그런 건축과 함께나누던 정서는 이제 박제화된 민속으로 사라져버린 셈이다. 표정도 운치도 없이 늘어선 탐거리 북한 농가에서 그래도 인간적 체취를 느낄 수 있는 것은 집집마다 성글게 엮어올린 울타리로 완두콩이 푸르게 뻗어올라주황빛 예쁜 꽃을 피우고 있는 모습이었다. - P249
그리하여 졸옹(翁) 최해(崔瀣, 1287~1340)는 금강산으로 떠나는 어느 스님에게 드리는 글에서 금강산에 유람 가는 사람들 때문에 이곳 백성들이 혹심한 고통을 받고 있다며, 자신은 그런 꼴을 보고 싶지 않아 금강산에 가고 싶지도 않고 가는 사람들을 말리고 싶다며 그곳 주민들이한탄하는 소리를 이렇게 전했다. "저 산은 어찌하여 다른 데 있지 않고 여기에 있어 우리를 이렇게고생시키는가!" - P230
세상사엔 언제나 이런 올바른 생각과 시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있어서삶의 용기와 희망을 말하게 된다. 그런 진보적인 지식인들이 자신의 소신을 굽힘없이 펼 수 있고 또 그런 목소리가 한 시대의 기류를 형성한다면 그들의 목소리는 더이상 외롭지 않고 세상의 흐름이 그쪽으로 바뀌게되어 있다. 그것이 역사 속에서 진보적 지성의 가치라 할 것인데, 고려말이 되면 졸옹 최해나 근재 안축 같은 이의 소견은 넓어지고 마침내 조선왕조의 등장과 함께 그런 병폐는 사라지게 된다. - P251
그리고 세상사는 참으로 묘하고 묘해 그렇게 큰소리치던 불교의 세상이 끝나니, 금강산 유람을 위한 고관. 양반들의 행차에 가마 메는 고역은중에게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것도 업(業)이라고 할 것인가. - P251
잎새마다 태고의 기운을 드리운 거무충충한 전나무들이 짓궂게 가리고 싸건마는 그대로 비집고 나오는 금강의 향기와 빛깔은 걸음걸음 사람을 취하게 합니다. - P254
못 보던 산의 모습 처음 보는 돌의 모습, 다른 데 없는 계곡소리, 여기서만 듣는 냇물소리 금강산의 특유라 할 ‘미(美)의 떼거리‘가 부쩍부쩍 사람에게로 달려들 적에는 도리어 어떻게 주체해야 옳을지를모릅니다. (일부 현대문으로 개고) - P254
장하던 금전벽우(金殿碧宇) 찬 재되고 남은 터에 이루고 또 이루어 오늘을 보이도다. 흥망이 산중에도 있다 하니 더욱 비감하여라. - P262
남효온이 전하는 이 전설은 당시 형식에 치우쳐 사치를 일삼은 교종(敎宗)의 행태에 대한 비판과 선종(禪宗)의 진정성을 강조하려는 이야기로 생각된다. 그런데 이 전설은 울소의 생김새나 삼불암과는 결합되어있지 않다. 훗날 나옹화상이 삼불암을 조성하면서 이 울소의 전설은 삼불암과 연계하여 재창조되었다. - P266
부처는 석가. 아미타・미륵으로 현재.과거 · 미래의 구원을 상징하고,양 보살은 중생의 제도를, 60불은 법계의 장엄함을 나타낸다 - P266
이 전설 또한 불교의 물질적·형식적 숭배보다 마음과 도덕 수양이 중요함을 강조한 것이다. - P268
장안사에 원나라 기황후가 후원한 것이나 김동사의 사치스러움은 바로 이 시절 불교의 한 병폐현상을 말해주는 것이다. - P269
이때 불교계의 개혁을 주장하고 나온 이가 바로 나옹화상이었다. 나옹은 20세 때 친구의 죽음으로 무상을 느끼고 출가하여 양주 회암사(檜巖寺)에서 크게 깨달음을 얻고, 원나라로 건너가 연경(燕京, 오늘날의 뻬이징) 법원사(法源寺)에서 인도 승려 지공의 가르침을 받고, 원나라 순제로부터 금란가사받을 정도로 지극한 예우를 받은 큰 스님를이었다. - P269
1358년에 귀국한 나옹은 여러 사찰을 순력할 때 금강산 장안사에 들어와 한때를 보냈는데 그때의 전설이 이 삼불암에 서려 있다. 1371년 나옹은 왕사(王師)에 봉해져 불교계를 이끌면서 당나라의 고승 임제(臨濟)의 선풍을 도입하여 "염불은 곧 참선"이라는 유명한 명제를 내놓게 되었다. - P271
나옹의 이런 노력은 당시 구산선문을 일문(一門)으로 통합하려는 태고(太古) 보우(普愚, 1301~82)의 노력과 함께 고려말 불교를 지탱한 양대지주로 이후 조선불교와 현대불교의 초석이 되었다. 그러나 세월의 흐름은 나옹 같은 고승도 어쩔 수는 없는 일이었다. 삼불암의 조각은 당시로서는 김동을 물리치는 명작이라는 전설까지 낳았지만 그 실체를 보면 여지없는 고려말의 퇴락한 시대양식을 반영하고있다. - P271
장안사와 표훈사의 갈등 삼불암의 전설은 물질적·형식적 숭배보다 마음과 도덕의 수양으로서의 불교를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이 전설의 행간을 읽으면 장안사와 표훈사의 세력다툼이 심했다는 것을 알수 있다. - P272
주인은 손님에게 꿈 이야기를 하고 손님은 주인에게 꿈 이야기를 하누나. 지금 꿈 이야기 하는 두 사람 그 역시 꿈속의 사람인 줄 뉘 알리오. - P280
主人夢說客 客夢說主人 今說二夢客 亦是夢中人 - P280
만국의 도성들은 개미집 같고 고금의 호걸들은 하루살이 같네. 청허한 베갯머리에 흐르는 달빛 끝없는 솔바람만 한가롭구나. - P280
萬國都城如蟻垤 千家豪傑若醯鷄 一窓明月清虛枕 無限松風韻不齊 - P280
소나무 소나무 잣나무 잣나무 바위 바위를 돌아서니 산산물물 가는 곳곳마다 신기하구나. 松松栢栢巖巖廻山山水水處處三 - P284
표훈사에서 가장 특이한 건물은 판도방이었다. 절집의 본전은 각각 모신 부처님에 따라 대웅전(석가모니) · 극락전(아미타불) · 대적광전(비로자나불)등으로 부르고, 부속건물은 명부전(지장보살) · 관음전(관세음보살) · 산신각(산신님) 등으로 부르지만, 누마루는 만세루, 살림채는 심검당(尋劒堂), 스님방은 적묵당(寂默堂)· 설선당(說禪堂) 등의 별칭을 갖고 있다. - P284
그런 중 손님이 묵어가는 방을 선불장(選佛場) 또는 판도방이라고 하는데, 그 이름을 막바로 내거는 경우는 드물고 대개는 운치있게 청류헌(淸流軒). 침계루(林溪樓) 하며 그 풍광에 걸맞은 당호를 붙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판도방‘이라고 써놓은 것은 요즘 말로 치면 ‘객실(客室)‘이라고 한 것이나 다름없으니, 이는 하도 찾아와 묵어가는 사람이 많으니까 거두절미하고 ‘여관방‘이라고 써놓은 셈인 것이다. 그것도 아주 크게 신경질적으로 달아놓았다. 이 판도방 현판 하나로 나는 금강산 유람객에게 있어서 표훈사의 위치를 남김없이 알 수 있었다. - P284
그렇구나! 이제 알겠다! 예부터 내금강에 들어오다보면 단발령에서머리 깎겠다는 마음을 먹게 되고, 또 저 고갯마루에 다다르면 저절로 큰절을 두어번 하게 되어 배재령(拜再嶺)이라고 했단다. - P287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임금이 되고서 금강산에 왔을 때 저 고갯마루에 당도하자 멀리서 법기보살(法起菩薩, 담무갈이라고도 부름)이 그의 권속1만 2천을 거느리고 나타나 광채를 방사하기에 황급히 엎드려 절을 올렸다고 전한다. - P287
그때 절한 지점을 배점(拜岾, 배재령)이라고 했고, 법기보살이 빛을 발한 곳을 방광대라 이름짓고는 거기에 정양사를 지었다. 그리고 방광대너머 보살 닮은 봉우리를 법기봉(法起峰)이라 이름짓고는 표훈사 반야보전엔 법기보살을 모셔놓되 동북쪽법기봉을 향하게 했다는 것이다. - P287
금강산 한복판에 정양사가 있고 절 안에헐성루(歇惺樓)가 있다. 가장 요긴한 곳에 위치하여 그 위에 올라앉으면 온 산의 참모습과 참정기를 볼 수 있다. 마치 구슬굴 속에 앉은 듯 맑은 기운이 상쾌하여 사람 뱃속 티끌까지 어느 틈에 씻어버렸는지 깨닫지 못한다. - P292
겸재의 강력한 지지자로 당대의 감식안이었던 이하의 말을 빌리면 "겸재의 금강산 그림은 전신(傳神)수법에 가까웠다"며 초상화를 그릴 때겉모습만 닮게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 내면적 리얼리티의 정신까지 그리는 자세와 같았다는 것이다. 이런 것을 옛사람들은 이형사신(以形寫神), 즉 ‘형상에 기초해 정신을 그린다‘고 했다. - P296
나의 벗 정선은 주머니에 붓이 없어 때때로 그림 흥이 일어나면 내 손의 것을 빼앗지. 금강산에 갔다온 후 휘둘러 그리는 것 더욱 방자해. - P296
吾友鄭元伯 囊中無畫筆 時時畫興發 就我手中奪 自入金剛來 揮洒太放恣 - P296
우리가 막연히 생각할 때는 진경산수란 직접 사생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지만, 정작 겸재의 진경산수가 보여준 미학은 이처럼 사생을 뛰어넘은 고차원의 형상미였던 것이다. 지금 금강산 처녀들이 겸재의 금강전도를 보면서 "맞긴 맞는데 아닌데요"라고 말한 것은 미술사 용어를 쓰지 못했을 뿐이지, 이형사신과이형득사의 미학을 증언한 셈이었다. - P297
그렇다면 내가 정양사에서 찾고자 했던 물음의 정답을 바로 찾은 셈이었다. 나는 정양사에 오르지 못하는 아쉬움을 안내단장에게 내색하지 않기로 했다. 능파루에서 일어나면서 나는 그들에게 악수를 청했다. 금강산 처녀들은 내가 맘껏 쥘 수 있도록 손을 반듯이 길게 펴주었고, 여군은 그쪽에서내 손을 꽉 잡아주었다. 2001, 1. - P297
이상수의 동행산수기 만폭동 금강대 너럭바위에서 나는 금강산 가면 꼭 꺼내 읽겠다고 적어온어당 이상수의 「동행산수기」의 만폭동부분을 펴들었다.
물은 본래 그러해야 하겠다는 의지가 없었다. 그 모든 변화는 다 돌을 만난 때문이다. 돌이 가로세로로 뽐내면서 물한테 굳이 맞설 적마다 곧 중대한 정세를 조성하게 되어 서로 힘으로 싸워지지 않으려고하니 드디어 백가지 기변을 일으키며 가는 것이다. 급히 떨어지는 데를 만나면 노하여 폭포가 되고, 우묵한 데에 가서는 깊고 넓게 고여말갛게 되어 쉬기도 한다. 그러나 이렇게 겨우 국면을 수습하고 나면앞으로 또다시 새 싸움이 벌어져서 시내는 문득 털이 꺼칠해지고 잎이 돋쳐 성난 표정을 짓는다. 이런 때 계곡 양옆으로 벌려선 산봉우리들은 몸을 솟구쳐 고개를 내밀고서 그 승부를 내려다보고 있다. - P303
감격적으로 말해서, 우리에겐 만폭동 같은 아름다운 동천(洞天)이 있고, 양봉래의 ‘봉래풍악 원화동천‘ 글씨, 겸재의 만폭동 그림, 어당의「동행산수기」 문장처럼 그 아름다움을 인문정신으로 구현한 빼어난 문학과 예술이 있다. 그것이 어디 보통 문화유산이더냐! - P307
천개의 바위는 아름다움을 다투고 만개의 골짜기는 흐름을 경쟁하네.
千巖競秀 萬壑爭流 - P311
나는 청산이 좋아서 들어가는데 녹수야 너는 어이해서 밖으로 나오느냐.
我向靑山去 綠水爾何來 - P311
숲에는 안정된 가지가 없고 내에는 평온한 물결이 없네.
林無靜枝 川無停波 - P311
뭇 봉우리들은 조용히 말하고자 하는데 정양사 누대에선 종이 울리네.
衆峰悄慾語 鐘動正陽樓 - P312
형법 가운데는 산림에 숨어들어 나무를 베고 돌을 깨뜨리는 것에다 일정한 형벌을 가한다는 조항이 있는데 속된 선비가 명산을 더럽힘에도 불구하고 법이 이를 금하지 않음은 웬일인가. 청산(靑山) 백석이 무슨 죄가 있다고 까닭없이 그 얼굴에 자자(刺字)를 가하고 그 살을 째놓는가. 아! 진실로 어질지 못한 일이로구나! - P315
그리고 이상수는 하늘에 대고 왕계중(重)의 영원기(記)에 나오는 말을 외쳤다.
폐하께 원하옵건대 신(臣)으로 하여금 역마를 타고 천하를 돌게 하시되 신에게 먹 만 섬을 내리시고 또 달 같은 도끼를 더 주시와 명승지를 지나다가 쓸 만한 시문만 남겨두고 나머지 제명은 모조리 도끼로 패고 먹으로 뭉개버린 후 찬 샘물로 3일간씩 씻어 산천의 치욕을온통 풀어주게 하옵소서. - P315
이상수의 이 발원은 오늘의 나에게도 그대로 통하니 나는 금강산 산신령께 이렇게 빌고 싶다.
통일이 되거든 산신령께선 내게 1만 톤의 컴프레서와 1억 톤의 접착돌가루를 내리셔 저 못된 글발과제명을 땜빵하여 산천을 성형수술케 해주시옵소서. - P315
내가 이 불상에 대해 본 기록으로는 오직 육당 최남선이 『금강예찬』을쓰면서 "전문학자들의 고찰을 청하고 싶다"며 "이 파안일소(破顔一笑)할것 같은 입초리에선 비지(悲智, 중생을 구제하는 자비와 도를 깨닫고자 하는 지혜)가 뚝뚝 떨어질 듯하다"는 격찬과 함께 혹시 비로자나불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정해본 것이 전부다. - P345
나는 여기서 이 마애불을 전문적 학구적으로 더 따지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이 불상을 왜 묘길상이라 부르게 되었는지 그 연원을 확실히해둘필요를 느끼고 있다. 이 불상은 결코 묘길상일 수가 없다. 묘길상이란 문수보살(文殊菩薩)의 별칭인데 이 마애불은 보살상이 아니라 명백히 부처상인 것이다. - P346
식산 이만부는 금강산에서이렇게 말했다.
금강산은 어떤 비유로도 다 묘사할 수 없는 산이다. 차라리 내 몸에금강산의 교훈을 받아들이는 것만 못하니 그 산의 편안하고 중후함을 취하여 인(仁)의 표본으로 삼고, 그 유창하고 통달함을 취하여 지知)의 표본으로 삼고, 그 험준하고 단절됨이 명쾌하고 시원한 점을취하여 의의 표본으로 삼고, 그 존엄하고도 태연함을 취하여 덕(德)의 표본으로 삼고, 그 어떤 사물, 그 어떤 정경도 없는 곳이 없음을 취하여 도(道)의 표본으로 삼고, 그 빛나고 찬란함을 취하여 문장(文章)의 표본으로 삼는다면 비로소 금강산을 대하는 도리를 얻게 될것이다. - P350
이 이상의 금강예찬이 있을 수 있을까.
아! 위대하여라 금강산이여. 아! 자랑스러워라금강산이여. 나는 금강을 다시 예찬하노라. - P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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