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로 통하는 녹슨 철제 계단은 폭이 좁고 경사가 급했다. 그는계단 끝까지 내려가 전등 스위치를 찾아 벽을 더듬었다. 이윽고 희끄무레한 25와트짜리 백열등 불빛이 손바닥만 한복도를 가득 채웠다.
문고리에 살짝 힘을 주자 육중한 철문이 소리도 없이 열렸다. 문소리에 그녀가 깰세라 부지런히 문에 기름을 쳐둔 덕분이다. 달콤한 꽃향기가 따뜻한 공기에 섞여 얼굴을 간지럽혔다. - P7

그의 취향은 아니지만,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가수기때문에 항상 틀어놓는다. 마음에 안 들어도 잠시만 참자고 생각하는것이다. 언제나처럼 그녀는 말이 없다. 그녀는 말을 하는 법이 없다.질문에 답하는 일도 없다. 그러나 그는 상관하지 않는다. - P7

"이제 가봐야 해." 그가 아쉬운 듯 말했다. "할 일이 많거든."
그는 화병에서 시든 백합을 빼 들고 나서 그 옆에 놓인 병에 콜라가가득 있는지 확인했다.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라도 말해, 알았지?" - P8

그는 이따금 그녀의 미소가 못 견디게 그립다. 그럴 때면 슬픔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물론 그도 그녀가 죽었다는 사실을 잘 안다. 그러나 모르는 척하는 것이 훨씬 마음 편하다. 그래야만 그녀의 미소를다시 볼 수 있다는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간직할 수 있기 때문이다. - P8

또 보자는 인사는 생략했다. 출소하는 사람은 또 보자는 말을 하지 않는 법이다. 지난 10년간 얼마나 자주 이 순간을 상상했던가. 그러나 교도소를 나서자마자 그는 깨달았다. 그 상상은 언제나 자유 속으로 첫발을 내딛는 순간에 끝났었음을.………. 막상 자유의 몸이 되자막막하기만 한 미래 때문에 겁이 더럭 났다. - P9

하르트무트 자토리우스의 야윈 얼굴 위로 한 줄기 기쁨의 빛이 스쳤다. 그는 더 이상 예전의 당당하고 활기 넘치는 아버지가 아니었다. 그저 옛 모습의 잔영일 뿐이었다. 한때 풍성했던 잿빛 머리는 희끗희끗해졌고 그나마 숱이 확 줄어 있었다. 구부정해진 어깨는 그가져야 했던 삶의 무게를 짐작게 했다. - P17

그는 떠나지 않을 것이다. 이집, 이 레스토랑, 이 마을, 아무 죄도없는 부모님을 그토록 괴롭힌 이 빌어먹을 마을에 남을 것이다. - P19

오후 9시 30분, 호프하임 지방경찰청 강력계 수사반장 올리버 폰보덴슈타인이 집에 돌아왔을 때 그를 맞아준 유일한 생명체는 집에서 기르는 개였다. 개는 반갑다기보다는 미안한 기색이었다. 뭔가 잘못한 것이 있는게 분명했다. 뭘 잘못했는지는 굳이 보지 않아도 냄새로 바로 알았다. - P27

그는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안다. 처음에는 경찰이, 그다음에는변호사가, 그다음에는 검사와 판사가 말해주었다. 모든 정황이 맞아떨어졌다. 단서도 있고 증인도 있었다. 자신의 방, 옷, 자동차에서 혈흔이 발견됐다. 그러나 그의 기억 속에 그 2시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블랙홀처럼 뻥 뚫린구멍일 뿐이었다. - P39

"난 죗값을 치렀습니다. 그래서 돌아온 겁니다."
토비아스가 사람들을 차례대로 하나씩 둘러보며 말했다. 사람들은당황해 서둘러 눈을 내리깔았다.
"당신들이 좋든 싫든 그건 내 알바 아닙니다." - P48

반면 그의 아버지는 여든 노인네처럼 무기력하고 지쳐 보였다. 집과 농장 상태만 봐도 알 수 있듯 그는 더 이상 살아갈 용기가 없는 사람이었다. 말 그대로 삶의 폐허 뒤에 숨어 살고 있었다. 모든 살인자의 부모가 힘든 삶을 살겠지만, 알텐하인처럼 작은 마을에서 매 순간을 바늘방석에 앉은 기분으로 버텨야 했던 토비아스의 부모는 얼마나더 힘들었을까. 토비아스의 어머니가 이혼을 선택하게 된 것도 결국은 이를 견디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그녀는 남편을 홀로 두고 떠났다.
분명히 양심의 가책을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새 출발은 성공적이지못했다. 그녀의 아파트를 지배하던 온기 없는 공허가 그 증거다. - P75

길 왼편으로 마리아 케텔스 할머니의 작은 집이 보였다. 마리아 할머니는 사건 당일 저녁 늦게 스테파니를 봤다고 증언함으로써 유일하게 토비아스에게 유리한 증인이 될 뻔한 사람이다. 그러나 법정에서 그녀의 말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모두들 그녀가 치매에 걸렸다는 사실, 눈이 어둡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당시에도 여든이 넘은 나이였으니 지금쯤은 아마 교회 묘지로 이사를 했을 것이다. - P78

이 동네에서는 좀 오래 걷는다 싶으면 먼 친척 하나쯤은 만나게돼 있고, 누구나가 누구네 집 숟가락이 몇개인지, 누가 누구와 어떤관계인지 훤히 다 알았다. 마을에는 공공연한 비밀이 나돌았고 사람들은 이웃의 실패, 불운, 지병에 대해 침을 튀기며 이야기했다. 알텐하인은 좁은 분지지형때문에 개발의 바람이 비껴간 지역이다. 이주해 오는 사람도 거의 없었기 때문에 100년 전에 살던 사람들이 대를이으며 그대로 살고 있다. - P78

알텐하인 사람들은 그를 원치 않는다. 이 사실에는 어떤의심의 여지도 없다. 그러나 어떻게 아버지를 혼자 둔단 말인가! 그는 부모님에게 갚아야 할 빚이 많다. 살인죄로 감옥에 들어간 아들을한시도 저버린 적이 없는 부모다. - P79

토비아스는 교회 건물을 돌아 처마 밑으로 들어갔다. 그러다 오른쪽에서 뭔가 움직이는 기척을 감지하고 깜짝 놀랐다. 자세히 보니 검은 머리의 여학생이 기둥 옆 가로등 아래 나무 벤치에 앉아서 담배를피우고 있었다. - P79

갑자기 그의 심장박동이 빨라졌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거기앉아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스테파니 슈네베르거였다! - P79

뭘 잘못 먹었길래 냉소적인 전과자를 식사에 초대한  걸까? 명예, 아름다움, 부를 모두 가진그녀를 기다리는 돈 많고 유머러스한 멋진 남자들이 줄을 섰을 텐데말이다. - P94

"그런데 참 이상하지?" 아멜리는 혼자서 상상의나래를폈다. "토비아스는 그 아이들을 어떻게 했을까? 왜 끝까지 아무 말도 안 한 걸까? 말을 했으면 그렇게 오랫동안 감옥에 있지 않아도 됐을 텐데………." - P107

눈처럼 희고, 피처럼 붉고, 흑단처럼 검어라... - P113

"야, 그거 기억나? 내 동생이 아버지 주머니에서 열쇠 훔쳐가지고비행기 격납고에서 내기 경주했던 거? 진짜 죽여줬지!" - P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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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서울)역에서 경원선을 타고 철원에서 하차해 금강산전철을 갈아타면내금강에 갈 수 있습니다. 매년 5월부터 10월까지는 직접 연결해주는 기차가 따로 있고, 일요일·공휴일 전날 밤 10시에 떠나는이등·삼둥 침대차는 새벽 6시에 내금강역에 도착합니다. 역에서 장안사까지는 걸어서 20분,승합버스로 5분 걸립니다. - P237

가마 타고 금강산 구경 가는 양반들
단발령에서는 40리 밖의 금강산 1만2천 봉우리가 서릿발처럼 하얗게환상적으로 피어올라 사람들은 이 고갯마루에 오르는 순간 너나없이
"차라리 머리 깎고 중이 돼 거기서 살고 싶다"는 말을 자신도 모르게 내뱉곤 했단다. 그래서 단발령이라는 이름을 얻었고, 겸재 정선 이래로 ‘단발령에서 바라본 금강산‘, 일러 ‘단발령망금강(斷髮嶺望金剛)‘이라는 것이 하나의 화재(畵材)가 되었다. - P238

"금강산은 돌이 만가지로 재주 부리고 물이 천가지로 재롱 부리며만든 자연의 조화입니다. 같은 금강산이라도 안팎이 달라시, 내금강은 은은하고 얌전하고 밋밋하고 우아하고 수리하여 안 내(內)자를 쓰고, 외금강은 웅장하고 기발하고 기세차고 당당하고 씩씩하여 바깥 외(外) 자를 씁니다. - P242

리정남 선생과의 대화 속에서 항시 느끼게 되는 것은 내가 대강을 물으면 그는 교과서적 지식으로 대답하는 것이었다. 나는 느낌과 기분이중요하다면 그는 사실과 지식이 더 중요했다. 이것이 우리 둘의 성격차이인지 남과 북 ‘학자‘의 성향차이인지는 아직 단정짓지 못하겠지만 남과 북 지식인상을 말할 때 한번쯤은 생각해볼 만한 일이었다. - P246

나는 하나의 전통이 민속이라는 이름으로 치장될 때 그것은 이미 죽은전통이 되고 만다고 생각한다. 초가집과 기와집이 옹기종기 어우러져 다정다감한 정취를 이루어낸 우리의 농가 표정은 이제 남이고 북이고 민속촌에나 가야 볼 수 있는 것이 되고 말았으니 그런 환경, 그런 건축과 함께나누던 정서는 이제 박제화된 민속으로 사라져버린 셈이다. 표정도 운치도 없이 늘어선 탐거리 북한 농가에서 그래도 인간적 체취를 느낄 수 있는 것은 집집마다 성글게 엮어올린 울타리로 완두콩이 푸르게 뻗어올라주황빛 예쁜 꽃을 피우고 있는 모습이었다. - P249

그리하여 졸옹(翁) 최해(崔瀣, 1287~1340)는  금강산으로 떠나는 어느 스님에게 드리는 글에서 금강산에 유람 가는 사람들 때문에 이곳 백성들이 혹심한 고통을 받고 있다며, 자신은 그런 꼴을 보고 싶지 않아 금강산에 가고 싶지도 않고 가는 사람들을 말리고 싶다며 그곳 주민들이한탄하는 소리를 이렇게 전했다.
"저 산은 어찌하여 다른 데 있지 않고 여기에 있어 우리를 이렇게고생시키는가!" - P230

세상사엔 언제나 이런 올바른 생각과 시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있어서삶의 용기와 희망을 말하게 된다. 그런 진보적인 지식인들이 자신의 소신을 굽힘없이 펼 수 있고 또 그런 목소리가 한 시대의 기류를 형성한다면 그들의 목소리는 더이상 외롭지 않고 세상의 흐름이 그쪽으로 바뀌게되어 있다. 그것이 역사 속에서 진보적 지성의 가치라 할 것인데, 고려말이 되면 졸옹 최해나 근재 안축 같은 이의 소견은 넓어지고 마침내 조선왕조의 등장과 함께 그런 병폐는 사라지게 된다. - P251

그리고 세상사는 참으로 묘하고 묘해 그렇게 큰소리치던 불교의 세상이 끝나니, 금강산 유람을 위한 고관. 양반들의 행차에 가마 메는 고역은중에게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것도 업(業)이라고 할 것인가. - P251

잎새마다 태고의 기운을 드리운 거무충충한 전나무들이 짓궂게 가리고 싸건마는 그대로 비집고 나오는 금강의 향기와 빛깔은 걸음걸음 사람을 취하게 합니다. - P254

못 보던 산의 모습 처음 보는 돌의 모습, 다른 데 없는 계곡소리, 여기서만 듣는 냇물소리 금강산의 특유라 할 ‘미(美)의 떼거리‘가 부쩍부쩍 사람에게로 달려들 적에는 도리어 어떻게 주체해야 옳을지를모릅니다. (일부 현대문으로 개고) - P254

장하던 금전벽우(金殿碧宇)
찬 재되고 남은 터에
이루고 또 이루어
오늘을 보이도다.
흥망이 산중에도 있다 하니
더욱 비감하여라. - P262

남효온이 전하는 이 전설은 당시 형식에 치우쳐 사치를 일삼은 교종(敎宗)의 행태에 대한 비판과 선종(禪宗)의  진정성을 강조하려는 이야기로 생각된다. 그런데 이 전설은 울소의 생김새나 삼불암과는 결합되어있지 않다. 훗날 나옹화상이 삼불암을 조성하면서 이 울소의 전설은 삼불암과 연계하여 재창조되었다. - P266

부처는 석가. 아미타・미륵으로 현재.과거 · 미래의 구원을 상징하고,양 보살은 중생의 제도를, 60불은  법계의 장엄함을 나타낸다 - P266

이 전설 또한 불교의 물질적·형식적 숭배보다 마음과 도덕 수양이 중요함을 강조한 것이다. - P268

장안사에 원나라 기황후가 후원한 것이나 김동사의 사치스러움은 바로 이 시절 불교의 한 병폐현상을 말해주는 것이다. - P269

이때 불교계의 개혁을 주장하고 나온 이가 바로 나옹화상이었다. 나옹은 20세 때 친구의 죽음으로 무상을 느끼고 출가하여 양주 회암사(檜巖寺)에서 크게 깨달음을  얻고, 원나라로 건너가 연경(燕京, 오늘날의 뻬이징)  법원사(法源寺)에서 인도 승려 지공의 가르침을 받고,  원나라 순제로부터 금란가사받을 정도로 지극한 예우를 받은 큰 스님를이었다. - P269

1358년에 귀국한 나옹은 여러 사찰을 순력할 때 금강산 장안사에 들어와 한때를 보냈는데 그때의 전설이 이 삼불암에 서려 있다. 1371년 나옹은 왕사(王師)에  봉해져 불교계를 이끌면서 당나라의 고승 임제(臨濟)의 선풍을 도입하여 "염불은 곧 참선"이라는 유명한 명제를 내놓게 되었다. - P271

나옹의 이런 노력은 당시 구산선문을 일문(一門)으로  통합하려는 태고(太古) 보우(普愚, 1301~82)의  노력과 함께 고려말 불교를 지탱한 양대지주로 이후 조선불교와 현대불교의 초석이 되었다.
그러나 세월의 흐름은 나옹 같은 고승도 어쩔 수는 없는 일이었다. 삼불암의 조각은 당시로서는 김동을 물리치는 명작이라는 전설까지 낳았지만 그 실체를 보면 여지없는 고려말의 퇴락한 시대양식을 반영하고있다. - P271

장안사와 표훈사의 갈등
삼불암의 전설은 물질적·형식적 숭배보다 마음과 도덕의 수양으로서의 불교를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이 전설의 행간을 읽으면 장안사와 표훈사의 세력다툼이 심했다는 것을 알수 있다. - P272

주인은 손님에게 꿈 이야기를 하고
손님은 주인에게 꿈 이야기를 하누나.
지금 꿈 이야기 하는 두 사람
그 역시 꿈속의 사람인 줄 뉘 알리오. - P280

主人夢說客
客夢說主人
今說二夢客
亦是夢中人 - P280

만국의 도성들은 개미집 같고
고금의 호걸들은 하루살이 같네.
청허한 베갯머리에 흐르는 달빛
끝없는 솔바람만 한가롭구나. - P280

萬國都城如蟻垤
千家豪傑若醯鷄
一窓明月清虛枕
無限松風韻不齊 - P280

소나무 소나무 잣나무 잣나무 바위 바위를 돌아서니
산산물물 가는 곳곳마다 신기하구나.
松松栢栢巖巖廻山山水水處處三 - P284

표훈사에서 가장 특이한 건물은 판도방이었다. 절집의 본전은 각각 모신 부처님에 따라 대웅전(석가모니) · 극락전(아미타불) · 대적광전(비로자나불)등으로 부르고, 부속건물은 명부전(지장보살) · 관음전(관세음보살) · 산신각(산신님) 등으로 부르지만, 누마루는 만세루, 살림채는 심검당(尋劒堂), 스님방은 적묵당(寂默堂)· 설선당(說禪堂) 등의 별칭을 갖고 있다. - P284

그런 중 손님이 묵어가는 방을 선불장(選佛場) 또는  판도방이라고 하는데, 그 이름을 막바로 내거는 경우는 드물고 대개는 운치있게 청류헌(淸流軒). 침계루(林溪樓) 하며 그 풍광에 걸맞은 당호를 붙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판도방‘이라고 써놓은 것은 요즘 말로 치면 ‘객실(客室)‘이라고 한 것이나 다름없으니, 이는 하도  찾아와 묵어가는 사람이 많으니까 거두절미하고 ‘여관방‘이라고 써놓은 셈인 것이다. 그것도 아주 크게
신경질적으로 달아놓았다. 이 판도방 현판 하나로 나는 금강산 유람객에게 있어서 표훈사의 위치를 남김없이 알 수 있었다. - P284

그렇구나! 이제 알겠다! 예부터 내금강에 들어오다보면 단발령에서머리 깎겠다는 마음을 먹게 되고, 또 저 고갯마루에 다다르면 저절로 큰절을 두어번 하게 되어 배재령(拜再嶺)이라고 했단다. - P287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임금이 되고서 금강산에  왔을 때 저 고갯마루에 당도하자 멀리서 법기보살(法起菩薩, 담무갈이라고도 부름)이 그의 권속1만 2천을  거느리고 나타나 광채를 방사하기에 황급히 엎드려 절을 올렸다고 전한다. - P287

그때 절한 지점을 배점(拜岾, 배재령)이라고 했고,  법기보살이 빛을 발한 곳을 방광대라 이름짓고는 거기에 정양사를 지었다. 그리고 방광대너머 보살 닮은 봉우리를 법기봉(法起峰)이라 이름짓고는 표훈사  반야보전엔 법기보살을 모셔놓되 동북쪽법기봉을 향하게 했다는 것이다. - P287

금강산 한복판에 정양사가 있고 절 안에헐성루(歇惺樓)가 있다. 가장 요긴한 곳에 위치하여 그 위에 올라앉으면 온 산의 참모습과 참정기를 볼 수 있다. 마치 구슬굴 속에 앉은 듯 맑은 기운이 상쾌하여 사람 뱃속 티끌까지 어느 틈에 씻어버렸는지 깨닫지 못한다. - P292

겸재의 강력한 지지자로 당대의 감식안이었던 이하의 말을 빌리면 "겸재의 금강산 그림은 전신(傳神)수법에  가까웠다"며 초상화를 그릴 때겉모습만 닮게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 내면적 리얼리티의 정신까지 그리는 자세와 같았다는 것이다. 이런 것을 옛사람들은 이형사신(以形寫神), 즉 ‘형상에 기초해 정신을 그린다‘고 했다. - P296

나의 벗 정선은
주머니에 붓이 없어
때때로 그림 흥이 일어나면
내 손의 것을 빼앗지.
금강산에 갔다온 후
휘둘러 그리는 것 더욱 방자해. - P296

吾友鄭元伯
囊中無畫筆
時時畫興發
就我手中奪
自入金剛來
揮洒太放恣 - P296

우리가 막연히 생각할 때는 진경산수란 직접 사생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지만, 정작 겸재의 진경산수가 보여준 미학은 이처럼 사생을 뛰어넘은 고차원의 형상미였던 것이다.
지금 금강산 처녀들이 겸재의 금강전도를 보면서 "맞긴 맞는데 아닌데요"라고 말한 것은 미술사 용어를 쓰지 못했을 뿐이지, 이형사신과이형득사의 미학을 증언한 셈이었다. - P297

그렇다면 내가 정양사에서 찾고자 했던 물음의 정답을 바로 찾은 셈이었다. 나는 정양사에 오르지 못하는 아쉬움을 안내단장에게 내색하지 않기로 했다.
능파루에서 일어나면서 나는 그들에게 악수를 청했다. 금강산 처녀들은 내가 맘껏 쥘 수 있도록 손을 반듯이 길게 펴주었고, 여군은 그쪽에서내 손을 꽉 잡아주었다.
2001, 1. - P297

이상수의 동행산수기
만폭동 금강대 너럭바위에서 나는 금강산 가면 꼭 꺼내 읽겠다고 적어온어당 이상수의 「동행산수기」의 만폭동부분을 펴들었다.

물은 본래 그러해야 하겠다는 의지가 없었다. 그 모든 변화는 다 돌을 만난 때문이다. 돌이 가로세로로 뽐내면서 물한테 굳이 맞설 적마다 곧 중대한 정세를 조성하게 되어 서로 힘으로 싸워지지 않으려고하니 드디어 백가지 기변을 일으키며 가는 것이다. 급히 떨어지는 데를 만나면 노하여 폭포가 되고, 우묵한 데에 가서는 깊고 넓게 고여말갛게 되어 쉬기도 한다. 그러나 이렇게 겨우 국면을 수습하고 나면앞으로 또다시 새 싸움이 벌어져서 시내는 문득 털이 꺼칠해지고 잎이 돋쳐 성난 표정을 짓는다. 이런 때 계곡 양옆으로 벌려선 산봉우리들은 몸을 솟구쳐 고개를 내밀고서 그 승부를 내려다보고 있다. - P303

감격적으로 말해서, 우리에겐 만폭동 같은 아름다운 동천(洞天)이 있고, 양봉래의 ‘봉래풍악 원화동천‘ 글씨,  겸재의 만폭동 그림, 어당의「동행산수기」 문장처럼 그 아름다움을 인문정신으로 구현한 빼어난 문학과 예술이 있다.
그것이 어디 보통 문화유산이더냐! - P307

천개의 바위는 아름다움을 다투고
만개의 골짜기는 흐름을 경쟁하네.

千巖競秀
萬壑爭流 - P311

나는 청산이 좋아서 들어가는데
녹수야 너는 어이해서 밖으로 나오느냐.

我向靑山去
綠水爾何來 - P311

숲에는 안정된 가지가 없고
내에는 평온한 물결이 없네.

林無靜枝
川無停波 - P311

뭇 봉우리들은 조용히 말하고자 하는데
정양사 누대에선 종이 울리네.

衆峰悄慾語
鐘動正陽樓 - P312

형법 가운데는 산림에 숨어들어 나무를 베고 돌을 깨뜨리는 것에다 일정한 형벌을 가한다는 조항이 있는데 속된 선비가 명산을 더럽힘에도 불구하고 법이 이를 금하지 않음은 웬일인가. 청산(靑山) 백석이 무슨 죄가  있다고 까닭없이 그 얼굴에 자자(刺字)를 가하고 그  살을  째놓는가. 아! 진실로 어질지 못한 일이로구나!
- P315

그리고 이상수는 하늘에 대고 왕계중(重)의 영원기(記)에 나오는 말을 외쳤다.

폐하께 원하옵건대 신(臣)으로 하여금 역마를 타고 천하를 돌게 하시되 신에게 먹 만 섬을 내리시고 또 달 같은 도끼를 더 주시와 명승지를 지나다가 쓸 만한 시문만 남겨두고 나머지 제명은 모조리 도끼로 패고 먹으로 뭉개버린 후 찬 샘물로 3일간씩 씻어 산천의 치욕을온통 풀어주게 하옵소서. - P315

이상수의 이 발원은 오늘의 나에게도 그대로 통하니 나는 금강산 산신령께 이렇게 빌고 싶다.

통일이 되거든 산신령께선 내게 1만 톤의 컴프레서와 1억 톤의 접착돌가루를 내리셔 저 못된 글발과제명을 땜빵하여 산천을 성형수술케 해주시옵소서. - P315

내가 이 불상에 대해 본 기록으로는 오직 육당 최남선이 『금강예찬』을쓰면서 "전문학자들의 고찰을 청하고 싶다"며 "이 파안일소(破顔一笑)할것 같은  입초리에선 비지(悲智, 중생을 구제하는 자비와 도를  깨닫고자 하는 지혜)가 뚝뚝 떨어질 듯하다"는 격찬과 함께 혹시 비로자나불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정해본 것이 전부다. - P345

나는 여기서 이 마애불을 전문적 학구적으로 더 따지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이 불상을 왜 묘길상이라 부르게 되었는지 그 연원을 확실히해둘필요를 느끼고 있다. 이 불상은 결코 묘길상일 수가 없다. 묘길상이란 문수보살(文殊菩薩)의  별칭인데 이 마애불은 보살상이 아니라 명백히 부처상인 것이다. - P346

식산 이만부는 금강산에서이렇게 말했다.

금강산은 어떤 비유로도 다 묘사할 수 없는 산이다. 차라리 내 몸에금강산의 교훈을 받아들이는 것만 못하니 그 산의 편안하고 중후함을 취하여 인(仁)의 표본으로 삼고, 그 유창하고 통달함을 취하여 지知)의 표본으로 삼고, 그 험준하고 단절됨이 명쾌하고 시원한 점을취하여 의의 표본으로 삼고, 그 존엄하고도 태연함을 취하여 덕(德)의 표본으로 삼고, 그 어떤 사물, 그 어떤 정경도 없는 곳이 없음을 취하여 도(道)의 표본으로 삼고, 그 빛나고 찬란함을 취하여 문장(文章)의 표본으로 삼는다면  비로소 금강산을 대하는 도리를 얻게 될것이다. - P350

이 이상의 금강예찬이 있을 수 있을까.

아! 위대하여라 금강산이여.
아! 자랑스러워라금강산이여.
나는 금강을 다시 예찬하노라. - P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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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길 흰 비단을 드리웠는가
만 섬진주알을 뿌리었는가. - P144

千丈白練
萬斛眞珠 - P144

성난 폭포가 한가운데로 쏟아지니
사람을 아찔하게 하는구나. - P144

怒瀑中瀉
使人眩轉 - P144

산에 들어와 구룡연을 보지 않으면
금강산을 보지 아니한 것 같다네.
만폭동 벽하담은
사람으로 치면 얼굴이겠지만
그것도 구룡연에 비하면
아들 손자뻘인걸. - P146

人山不見九龍淵
不如不山金剛山
萬瀑洞中碧霞潭
在山如人目在顏
縱然較却比龍淵
猶與兒孫等一般 - P146

이름을 적어 선계(仙界)에 부쳤더니
산승이 구룡연에서 탑본(本)하여 보냈네.
모호하여 완연히 천년 전의 글자인 듯
삼생석(三生石)의 전설을 징험하였네.
붉은글자를 산에새긴 것은 한 소중한 인연이니
바다기운이 땅에 가득하고 붓은 서까래와 같네
이름을 일만이천봉우리 위에 부쳤으니
무량수불 같은 나이 누리기를 빌어보네. - P148

名姓寄題凌紫煙
山儈榻得九龍淵
模糊宛是千年字
可證三生石上綠
丹字鑱山一重綠
滄溟滿地筆如椽
托名萬二千峰上
乞與無量壽佛年 - P148

해강이 쓴 구룡폭의 ‘미륵불‘은 오늘날 볼 때 별 흠잡을 것 없는 거작으로 사람의 마음을 신비롭게 이끄는 그 무엇이 있다. 그러나 당시 문인·문객들의 눈에는 그것이 맘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육당 최남선은 분명히 보았을 이 글씨에 대하여 일언반구도 없다. 
또 춘원(春園) 이광수(李光洙, 1892~1950)는  금강산유기(金剛山遊記)」에서 이 글씨를 보고는 이렇게 불쾌감을 말했다. - P152

폭포 왼쪽 어깨라 할 수 있는 미륵봉의 머리 복판에 ‘미륵불‘ 세자를 커다랗게 새기고 그 곁에 세존응화(世尊應化) 몇천몇백년 해강 김규진이라 하였으니 이만 해도 이미 구역질이 나려는데 그 곁에 시주는 누구누구, 석공은 누구누구, 무엇에 누구누구 하고 무려 수십명 이름을 새겨놓았으니, 이리 되면 차마 볼 수 없어서 눈을 가리우고 아까운 대자연의 파경(景)된 것을 생각하여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아주 없어지려면 무슨 천재지변이 없는 한 몇천년을 경과해야 할 것이니, 해강 김규진은 실로 금강산에 대하여 대죄 (大罪)를범한 자라  하겠습니다. - P152

옛 기록에 보면 신계사 창터솔밭창대리의 뒷산 문필봉에서 온정리 뒷산인 하관음봉 노장바위 사이에는 두 마을을 잇는 고갯길이 있어 극락(極樂)재라고  불렸는데, 북한에서 나온 자료를 보면 이 고개를 ‘원호고개‘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 고갯길을 통해 361 고지 전투 때 군사물자를원호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고갯길은 이미 끊긴 지 오래고 그 길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알 수 없는데, 하관음봉 꼭대기에 괴나리봇짐을 진형상의 노장바위만이 새롭게 드나드는 남쪽 금강산 관광객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 P170

그런가하면 저 건너에 엄지손가락처럼 생긴 우뚝한 작은 봉우리는 신선들이 장기두는 데 훈수를 심하게 하여 멀리 밀려난 ‘선암‘이란다. 언젠가 관광객 중의 한 중학생이 안내원의 이런 얘기를 다 듣고 난 다음 하는 말이 걸작이었다.
"독선암은커녕 왕따봉이다." - P181

안심대에서 높은 벼랑을 바라보고 곧장 오르면 맑은 샘이 하나 있다.
물이 귀한 만물상에서 천선대 오르기 직전 이 높은 곳에 샘이 있다니 더욱 반갑고 신비로운데 그 물맛이 아주 차고 달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물맛에 취해 지팡이도 잊고 그냥 간다고 해서 망장천(忘杖泉)이라고 한다. - P188

추사 김정희는 만물상 유람에서 별 재미를 보지 못했던 모양이다. 아마도 안개에 가리어 그 실상을 다 보지 못했는지 신계사 만루에서 쓰다(題明溪寺萬歲樓)」라는 시에서 자못  실망어린 말끝에 이런 말을 하였다.

금강산 만물상 구경거리는
이름이 실제보다 훨씬 낫다.
그 속엔 허황된 말이 너무 많아
본 모양을 모두 잃어버렸네.
게다가 일 만들기 좋아하는 사람은
다시 신만물상을 정했다고 하더군 - P189

金剛萬物觀
最爲名過實
其語本自誕
面目殊全失
又有好事者
拈起新萬物 - P189

하늘땅 생겨날 때 이 산 먼저 태어나고
인간이 태어날 때 만물초가 생겨났다네.
만약에 풀이 먼저 생겼다고 한다면
금강산의 풀과 나무 그 누가 마련했다. - P192

此山天地最初開
草創人間萬物來
若說形形先有草
金剛草木又誰裁 - P192

그런데 조선시대 문인들은 자신들의 금강행을 꼭 유람(遊覽)이라고했다.  오늘날 우리의 어감으로는 놀유(遊)자를 쓰는 것이 너무 한가하고일없이 노는 것 같아 어색하게 들리지만 오히려 옛사람들은 이 말에서큰 매력과 의미를 새기고 있었던 것 같다. - P203

옛 문인들에게 있어서 ‘유‘란 그냥 노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편안하게자적하며 함께 어우러지는 것을 의미했다. 그래서 옛사람의 행장(行狀)을 보면 "어려서 퇴계에게 배웠다"고 하지 않고 "퇴계 밑에서 놀았다"고 했다. - P203

그러니까 명산을 찾아 거기를 유람하는 것은 곧 자연을 통하여 자신의정서를 함양하고 자연과의 교감 속에서 사물에 대한 인식의 폭을 넓히는계기가 되었다. 그렇게 명산을 유람하며 심신을 도야하는 것은 공자가
‘유어예(遊於藝)‘한 것을 ‘유어명승(遊於名勝)‘하는 것이니 놀 유자를 쓰는 것이 당당했던 것이다. 
그래서 옛사람들의 금강산 기행문은 김창협의「동유기」, 홍여하(洪汝河, 1620-74)의  유풍악기(遊記)」 등 거의 대부분 기(記)  앞에 유(遊, 또는 游)자를 붙였다. - P203

그리하여 삼일포는 예부터 관동8경의 하나로 이름났는데 이중환煥, 1690~1752)은 『택리지(擇里志)』에서 이렇게 말했다.
조선 팔도 모든 도에 호수가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영동에 있는호수들만이 인간세상에 있는 것이 아닌 듯하다. 그중 고성의 삼일포는 맑고 묘하면서도 화려하고 그윽하며, 고요한 중에 명랑하다. 마치숙녀가 아름답게 단장한 것 같아서 사랑스럽고 공경할 만하다. - P206

단서암 꼭대기에는 또다른 비석을 세운 흔적이 남아 있다. 그것은 이른바 매향비(理香碑)다.  매향은 부처님께 공양하기 위한 질 좋은 향을 만들기 위해 향나무를 바닷물이나 갯벌에 오래 묻어두는 고려 때의 풍속이며, 매향비는 이런 일을 기록하고 복을 비는 기원문을 적은 기념비다. 이매향비는 1309년 강릉태수 김천호가 세운 것으로 19세기 초 기행문에서도 이미 그 비문을 읽을 수 없다고 하였고, 왕왕 중들이 물속에서 항목을꺼내 썼다는 글만 남아 있다. - P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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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내린 빗물 받아 늪이 불었다.
바람은 안 불어도 날씨 싸늘해
이내 몸 신선세계 찾아들었나
생각하니 그림폭을 번져가는 듯
그 누가 삐뚠 바위 먼저 오를까.
아슬한 구름다리 보기조차 두렵네.
온 나라가 이처럼 깨끗하건만
서울아 너만 어이 어지러우냐 - P128

潭潤新添雨
無風也自寒
眞如仙界坐
翻訝畫中看
側石登誰捷
危橋望亦難
一邦斯潔淨
回首歎長安 - P128

옥류동 무대바위 
외금강에서 가장 금강산 다운 산세와 계류를 보여주는  곳이다. 옥류동, 무대바위, 그리고 멀리천화대의 뾰족한 봉우리가 완벽한 회화적 구도를 연출하고 있다.

"교수 선생, 금강산의 날씨는 천가지로 재주 부리고 만가지로 변하니, 이러다가는 구룡폭도 못 봅니다." - P141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나는 이 순간을 멋진 사진으로 남겨야겠다는 마음이 일어 카메라 가방을 열고 망원렌즈를 꺼내 우산 속에서 갈아끼웠다. 그리고 사격수처럼 정조준하여 조리개를 당기는데 아뿔싸! 그사이비봉폭포는 안개 속에 자취를 감추었다. 말로만 듣던 금강산의 풍운조화였다. 그제야 나는 안내원의 말을 잘 들었어야 했다고 후회했다. 엄영실양은 벌써 저 앞으로 나아가 안개가 밀고 올라오기 전에 빨리 구룡폭에오르자고 소리친다. 나는 그제야 카메라가방을 들쳐메고 뛰기 시작했다. - P140

비봉폭포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폭포로 물줄기가 139미터나 된다. 폭포는 역시 물이 많아야 제멋을 풍기기 때문에 여름날의 비봉폭포가 가장 아름답다. 허리춤 아래부터 층층이 꺾인 바위결을 타고 내리기 때문에 마치 봉황의날개 같은 형상을 이룬다. 그래서 이름하여 비봉폭포다. - P141

구룡폭포
연담교에서 구룡폭을 향하여 길을 꺾어들면 오른쪽으로는 거대한 노적가리 모양의 암봉이 기세차게 뻗어올라가고 그 아래로는 김일성 주석이 이름지었다는 ‘주렴(珠簾)폭포‘가 구슬발  같은 물줄기를 내리쏟는다.
그리고 사위에선 마치 대로변 고층아파트에서 들을 수 있는 자동차 소리같은 웅웅거리는 소리가 어딘가에서 들려온다. 산중에 무슨 소음 같은굉음인가. 게다가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소리가 더 커지다가 마침내 쿵 쿵 소리로  들리면 그제야 구룡폭포가 쏟아지며 물 찧는 소리인 줄 알고놀라게 된다. - P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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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에서 유람 온 사람으로서는 참으로 갑갑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런통제는 그 나름의 강점도 있었다. 금강산을 다녀온 사람들이 너나없이어떻게 금강산이 그렇게 깨끗이 보존될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고 말하는이구동성의 표현을 들을 때마다 내가 대답할 수 있는 말은 유람의 낭만과 서정을 맘껏 즐기는 우리와 ‘탐승질서위반‘을 처벌규정으로 만들어관리해온 그네들의 삶의 방식 자체에 너무도 큰 차이가 있다는 사실이다. - P63

금강산려관 
금강산에 있는 유일한 관광호텔로 객실이 240여개 있다. 그러나 내가 5박6일을 머무는 동안 이곳에묵어간 손님은 거의 없었다. - P70

내가 금강산에 와서 가장 맛있게 먹은 것은 명태국이었다. 명태의 원산지는 함북 명천으로 본래 함경도 요리의 자랑인데 그 솜씨가 원산을거쳐 강원도 금강산까지 내려왔다. 같은 동해바다에서 사는 명태라도 꼭명천에서 잡힌 것이 맛있는 이유는 서해바다 조기가 법성포 칠산 앞바다에서부터 연평도 사이에서 잡힌 것이 맛있는 것과 같다. 어떤 사람은 신토불이를 인정하지만 같은 서해바다 조기인데 왜 중국 배가 잡은 조기는중국산으로 값이 싸고, 한국 배가 잡은 조기는 비싸냐며 신토불이론을부정하는 것인지 지지하는 것인지 의구심을 표명한다. - P71

명색은 "백성의 고통을 알고자 지방을 순행하는 것"이었지만 속내용은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그중 가장 큰 목적은 그가 평생 고생한 피부병을 치료하기 위해 온정리온천에 가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가는 길에 금강산도 구경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 P75

한편 이에 따른 부차적인 목적은 대단히 정치적인 것으로 사대부 신하들에게 왕권을 과시하기 위함도 있었다. 그는 조카를 죽이고 왕이 된만큼 쿠데타 독재자들이 갖고 있는 불안과 횡포를 버릴 수 없었다. 그래서자신의 위용으로 왕권의 정통성을 수시로 확인시킬 필요가 있었으니, 행차 도중 많은 신하들이 본보기로 걸려 곤욕과 수모를 당하여 기가 꺾였다. 또다른 목적은 불교의 중흥을 몸소 실천함에 있었다. 그는 행차 도중여러 방식으로 불교를 지원했다. 세조는 이런 제반의 개인적·정치적 목적을 품고 온정리온천을 향하여 금강산으로 떠났던 것이다. - P75

오랜 세월을 같이 있어도
기억 속에 없는 이 있고
잠깐 만나도 잠깐 만나도
심장 속에 남는 이 있네.
아, 아! 그런 사람,
나는 귀중해, - P87

아, 아름다워라, 금강송이여
외금강 탐승의 양대 코스, 만물상과 구룡폭 어느 쪽을 먼저 가든 우리가 금강산 초입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놀라움과 기쁨은 아름다운 솔밭이다. - P91

금강송(金剛松), 흔히 금강산 미인송으로 칭송되는  이 소나무는 이제까지 우리가 보아온 소나무와 너무도 다른 아름다움을 갖고 있다. 하늘을찌를 듯 곧게 뻗어올라간 줄기는 붉은 기를 머금은 채 짙은 나뭇빛을 발한다. 곁가지도 없이 족히 20미터를 치솟은 미인송은 하늘가에서만 연둣빛 솔잎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을 뿐이다. 한여름 습기를 잔뜩 머금어 붉은 줄기에 윤기가 흐를 때면 늘씬한 각선미를 자랑하는 미인이 알몸으로부끄럼을 빛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그 고고한 귀티엔 한 점 속기(俗氣)도 없으니 청신하다고는 할지언정  요염하다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 P91

이것은 종교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와 전통의 문제인 것이다. 아무 까닭 없이 산길을 따라 금강산 바위와 계곡의 수려함과 기이함만 바라보고다니는 것과 산과 더불어 역사의 자취를 느끼며 탐승하는 것은 엄청난감동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 P102

금강산 관광을 다녀온 사람들 가슴에 무엇인가 허전하게 느껴지는 것은 탐승길에 그런 문화유산이 없기 때문이다. 빈터일망정 신계사에 들르는 일도 없고, 이 세상을 바로잡고 아름답게 가꾸려고 애썼던 인간의 이야기가 빠져 있기 때문이다. - P102

"어디서 오셨는고?"
"유점사에서 왔습니다."
"그래, 유점사에서 여기까지는 몇 걸음에 왔는고?"
"예?"
"유점사에서 여기까지 몇 걸음에 왔냐고 물었네." - P104

"아, 예・・・・・・ 바로 이렇게 왔습니다."
그러고는 효봉은 방을 한 바퀴 삥 돌아 앉았다. 느닷없는 질문에 서슴없는 행동으로 답한 것이다. 이에 석두스님은 흡족해하며 이렇게 말했다.
"어쭈, 제법이다. 그대는 오늘부터 내 웬수로다." - P105

"잘들 놀았군, 금강산 귀뚜라미들!" - P107

오선암 유감
해방 전, 금강산 탐승에서 옥류동·구룡연(九龍淵) 코스는 신계사를 기점으로 해서 오선암(五仙巖)까지를 등산의 초입으로 삼았다. 신계사에서신계천을 따라 송림을 헤치며 걷다보면 ‘배소고개‘라는 낮은 언덕을 넘게 되는데, 언덕마루에서 신계천을 내려다보면 마치 배 모양 같은 큰 못이 있어 이를 배소, 선담(潭)이라고 했다. - P109

글발의 내력은 그렇게 이루어진 것이지만 ‘지원‘이라는 말 자체의 내력은 그보다 더 옛날로 올라간다. 이 말은 삼국지(三國志)』에 나오는 제갈량(諸葛亮)이 자신의  서재에 써서 걸어놓은 글에서 따온 것이다. 그 원문은 "담박명지(澹泊明志) 영정치원(寧靜致遠)"이다.  "맑은 마음으로 뜻을 밝히고, 편안하고 고요한 자세로 원대함을 이룬다." - P118

이 글귀는 이후 큰 뜻을 품은 사람, 비장한 각오를 한 사람들에게는 항시 마음에 새기는 글로 기억되어 안중근(安重根) 의사가 뤼순감옥에서쓴 글씨도 있고, 백범(白凡) 김구(金九) 선생이 쓴 글씨도 남아 있다.  한때 비디오가게에 가면 빌릴 수 있었던 삼국지 40부작 중 ‘삼고초려(三顧草廬)‘편을 보면 제갈량의 서재에  이 글씨가  씌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글의 정확성을 위하여 이 글의 원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P118

맑은 마음이 아니면 뜻을 밝힐 수 없고
마음이 편하고 고요하지 않으면 원대함을 이룰 수 없다.
非澹泊 無以明志 非寧靜 無以致遠 - P118

우리는 그만 상팔담으로 가자고 했다. 상팔담은 금강산 탐승의 절정으로 교과서에 나오는 전설 「나무꾼과 선녀의 고향이다. 구룡폭에서 상팔담을 내려다보는 구룡대(九龍臺)까지 800미터, 철사다리 14개에 370계단을  올라야 한다. - P120

금강문을 나서며 눈을 들다가는 문득 ‘에쿠‘ 소리를 질렀습니다. 석두(石竇) 하나를 지내 나온 것일 뿐이어는  광경이 어찌 이다지도 틀렸으리까? 얼른 말하면 문밖까지의 그것은 꺼풀 금강산임을 깨닫고 놀라는 줄 모르고 놀란 것입니다. 금시에 좋아져도 무척 더 좋아졌습니다.
아주 평범한 글 같지만 이렇게 서슴없이 "에쿠" 소리를 문장 속에 쓸수 있는 것이 역시 대가의 솜씨인 것이다. 그는 삼일포 봉래대(蓬萊臺)에올라서는 그 경관이  너무 시원해서 "이히 소리를 질렀다"고 천연덕스럽게  쓰기도 했다. - P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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