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상태에서 명화 다섯 점을 확보한 것은 결코 적은 것이 아니다. 세상엔 명화가그리 많은 것도 아니고 어디 가서 평생 잊을 수 없는 그림 하나를 만난다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닐진대 다섯 점을 꼽고도 적다고 한 것은 나의 단순한 남북유물 비교였던 것이다. - P157
김두량의 소몰이꾼은 모두가 인정하는 명화다. 목동이 소를 나무등걸에 느슨하게 매놓고 풀밭에서 배꼽까지 드러내놓은 채 늘어지게 낮잠 자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곁눈으로 옆을 응시하며 한가로이 풀을 뜯는 소의 크고 맑은 눈망울과 늘어지게 낮잠 자는 소몰이꾼의 모습이 극명하게 대비되면서 시골의 서정과 세태 풍자가동시에 느껴진다. 이런 그림은 본래 전통적으로 ‘전가낙사(田家樂事)‘라고 해서 전원생활의 한가로운 즐거움을 표현하는 소재로 그려져왔던 것이다. - P158
그런데 김두량은 이 서정적인 소재를 대단히 현실감있게 표현했다. 우선 소의 모습을 보면 여지없는 조선의 소로 종래의 화가들이 그리던 남양의 물소와는 판연히 다른 리얼리즘을 보여준다. 그리고 목동의 얼굴과잠자는 포즈에는 한가하고 평화로운 낮잠이 아니라 오히려 노동으로 지친 머슴의 피곤이 느껴질 정도로 땀냄새조차 풍긴다. 그러니까 김두량은전원의 한가한 풍경화를 박진감 넘치는 속화(俗畵)로 전환시킨 것이었다. 그것은 조선후기 속화의 탄생을 말해주는 또 하나의 경로였다. - P159
작품에 취해 말없이 한참을 구경하고 있는데 안내원이 이윽고 침묵을깼다. "교수 선생, 정말로 잘 그리지 않았습니까? 소몰이꾼이 낮잠 자면서코고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지 않습니까? 야! 이거야 사진 같습니다." - P159
그런데 참으로 묘한 것은 평양의 조선미술박물관에는 몇 안되는 명품중에 김득신의 「농민과 양반」이라는 그림이 소장되어 있는 것이다. 이작품은 조선후기의 세태를 반영한속화 중에서도 계급적 갈등을 가장 리얼하게 묘사한 그림인 것이다. 이른바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예술관에 가장 잘 들어맞는 그림이 평양에 있다는 것은 유물에도 팔자가 있다는 헛소리를 내던지게 하는 것이다. - P160
김득신으로 말할 것 같으면 단원 김홍도의 충실한 후계자로 단원의 속화는 배경 없이 인물의 몸동작을 드러내는 데 역점을 둔 반면, 김득신은은은한 배경처리로 회화적 효과를 높였다는 평을 받고 있는 화가다. 이「농민과 양반은 그런 명성에 값하고도 남음이 있는 명화였다. 그리고김득신 이후 우리의 속화는 퇴락의 길을 면치 못해 이 작품이 그 찬란하던 조선시대 속화의 세계에서 마지막으로 피어났던 꽃이었다. - P160
북한에서 고고학을 비중있게 다룬 것은 민족적 정통성을 증명하기 위한 작업이었고 민속학은 인민의 삶과 생활정서를 존중하는 입장에서 연구해온 것이다. 사회과학원에서 발행하는 학술지의 이름도 ‘고고민속‘ 이다. - P163
이에 반해 미술사는 근본적으로 지배층문화의 소산이기 때문에 부정적 시각으로 보며 아주 홀대하고 있다. 사회과학원 안에 미술사연구 분야가 따로 있지 않고 조선미술사』를 펴낸 곳도 미술사연구회가 아니라조선미술가동맹으로 되어 있으니 미술실기의 부수적 사항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 P163
단원의 자화상 평양의 조선미술박물관 회화 수장품 중에는 예외적이라 할 정도로 이인상, 이인문(李寅文, 1745~1821), 김홍도의 작품이 여러 점 있었다. 이인상은 소나무 아래서」라는 대작 외에 수옥정(玉亭)」 「구학정(龜鶴亭)」등 진경산수(眞景山水)를 그린 8폭화첩이 있고, 이인문의 작품은 「여름산수(夏景山水圖)」 「72세작 가을 산수」 등 빼어난 소품이 다섯 점이나 있다. 이들은 모두 한차례 명품해설감이 되고도 남음이 있는데, 세인의 관심을 살 만한 작품은 역시 김홍도의 그림일 것 같다. - P168
겸재 그림의 미덕 얼마전에 열린 한 문화재 관계 세미나장에서 제자뻘 되는 후배가 정감의 표시로 가볍게 던진 인사말이 내게는 약간 당황스러웠다. "선생님은 역시 겸재를 별로 높이 보지 않으신 게죠?" "왜?" "단원 그림에는 그렇게 애정을 보이면서 겸재는 건너뛰어 뒤로 미뤄놓았으니까요" - P174
겸재는 조선 300년 역사 속에 보기 드문 화가다. 가만히 생각해보건대 우리나라 산수화가들은 산의 다양한 모습을 보지 못하고 화본(畵本)에 얽매여 그리므로 매양 똑같았다. 그러나 겸재는 금강산과 영남의 명승을 두루 답사하며 새로운 화법으로 이를 담아내니 조선적인 산수화법은 바로 겸재로부터 새롭게 출발했다고 할 것이다. - P175
그 결론만 여기서 줄여 말한다면 겸재의 진경산수는 사실에서 출발해사실성을 목표로 하는 이형사형(以形形)이 아니라 사실에 기초해 정신에로 나아가는 이형사신(以形寫神)의 세계였던 것이다. 이하곤이 강조한신운이란 바로 이런 것이었다. 그렇다면 겸재는 개별적인 것에서 출발해보편적인 것에 이른 대가였던 것이다. - P176
북한의 미술사가들도 이 점에 주목하며 옹천의 파도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겸재의 이런 사실주의적·민족주의적 미덕에 만족하지 못하고 ‘애국적 관점‘에서 강조하고 싶어했다. 그래서 1992년에펴낸 『금강산 일화집』에서는 겸재가 이 고장 한 어부로부터 백성들의 영웅적인 싸움 이야기를 듣고서 「옹천의 파도를 비로소 감동스럽게 그렸다는 새로운 일화를 만들어냈다. 그리고『조선전사(朝鮮全史)』(전33권) 제11권 365 면에서는 이 그림을 해설하면서 다음과 같은 설명을 글머리에덧붙여놓았다. - P179
우리 인민이 일찍이 강원도에 쳐들어왔던 왜놈들을 바닷속에 깊이처넣은 옹천을 묘사한 그림. - P179
북한학자들이 그렇게 말하는 심정과 사연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지금 우리는 전설의 시대가 아니라 사실의 시대에 살고 있다. 사실 자체를 말하면서 겸재의 뜨거운 애국심을 상기시킬 수 있을 때 비로소 설득력을 갖는 것이 아닐까. 나라면 차라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싶다. - P179
"겸재의 진경산수에는 이처럼 조국 강산에 대한 사랑과 자랑이 넘쳐흐르고 있다." - P179
반면에 북한에서는 의식적으로 조선화 장르를 개발해왔다. 그 첫 단초는 모든 일이 그렇듯이, 김일성 교시에서 시작되었다. 1954년 김일성은조선화를 발전시키는 데 대한 강령적 교시를 다음과 같이 내린다.
우리는 조선화의 선명하고 간결한 전통적 화법을 연구해 그것을우리 시대의 요구에 맞게 더욱 발전시켜야 합니다. - P184
누구는 이를 일러 "이발소 그림 같다"고 혹평했다. 그러니까 조선화의이상(理想)에는 잘못이 없었지만 그것의 시행과정을 보면 사안을 너무단순하게 처리함으로써 조선화의 무궁한 가능성을 개발한 것이 아니라아주 작은 일부분만 획득한 셈이다. - P189
그것은 북한사회의 다른 분야에서도 간취되는 현상이기도 했다. 결국북한의 조선화는 중국의 농민화, 미국의 소수민족 벽화, 남미의 나이브페인팅처럼 어느 제한된 범위에서는 독특한 위치를 가질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조선화의 전부일 수는 없었던 것이다. 40년 전에김용준이 말한 다음과 같은 경고가 새삼 생생하게 울려온다. - P189
조선화의 특색은 필묵이 근간이다. (・・・) 만일 필묵의 표현을 채색으로 대행한다면 벌써 모필 조선화는 성립하지 못하고 그 의의는 상실하고 말 것이다. - P189
북한의 현대수예 북한이 남한에 대고, 또는 세상에 내놓고 자랑할 수 있는 현대예술 장르를 나는 수예라고 생각한다. 묘향산 입구에는 국제친선전람관이라고해서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위원장이 외국사절에게 받은 선물들을 전시해놓고 있는데, 관례에 따라 북한에서 외국사절에게 답례한 것으로는 수예작품이 가장 많았다고 한다. 1972년 7.4남북공동성명을 위해 당시 이후락(李厚洛) 중앙정보부장이 평양을 다녀왔을 때 김일성 주석이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에게 선물로 보낸 것도 수예 신선도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 P189
안주벌 열두삼천골을 지나며 평양에 온 지 엿새째 되던 날 우리는 멀리 묘향산으로 3박4일 답사길에 오르게 되었다. 여행중에 여행을 맞는 이 기분은 참으로 묘했다. 여장을 꾸리고 방을 정리하는 손길이 마치 집에서 답사 떠날 때와 마찬가지로 바쁘고 마음이 가볍게 들뜨기도 했다. - P197
묘향산은 평안남도·평안북도·자강도 3도가 만나고 갈라지는 분계령이 되고 있지만, 답사와 관광지로서 묘향산은 평안북도 향산군(香山郡)향암리(香岩里)를 일컫는다. 그래서 묘향산에 가려면 예나 지금이나 반드시 향산을 거쳐야 한다. - P197
여행이란 목적지 못지않게 가는 과정이 풍요롭고 흥미로운 여정(旅情)을 실어주는 법인데 그걸 누리지 못함이 아쉬웠고, 특히 가는 길목에있는 관서제일루(關西第一樓)라는 안주 백상루(樓)에 들르지 못하게된 것은 차라리 억울했다. - P198
이름보다 더 맑은 청천강 청천강은 투명하다 못해 짙은 초록빛을 내뿜고 있었다. 강변에는 흰모래와 강자갈이 천연의 모습 그대로 깔려 있었다. 강 건너 저쪽으로는아침 안개가 채 걷히지 않은 안주읍내가 한 폭의 수묵화로 다가왔다. 강과 들과 산이 어우러지는 이 맑고 조용한 풍광은 남쪽에서는 이미 오래전에 잃어버린 무공해시절의 옛 모습 그대로였다. 나는 그동안 쓴 남한의 답사기에서 환상의 드라이브 코스를 얘기하면서 구례에서 하동까지섬진강을 따라가는 길을 큰 생각 없이 우리나라에서 ‘둘째‘로 아름다운길이라고 했는데, 그 첫째는 바로 여기를 위해 남겨둔 것이었던가 생각되기도 했다. 나는 스쳐가는 풍광을 놓치지 않으려고 느낌이 닿는 대로이렇게 메모해갔다. - P200
옛날에 실학자 초정(楚亭) 박제가(朴齊家, 1750~ 1805)가 묘향산 기행문(妙香山記)」에서 이 물수제비 뜨는 모습을 아주 정겹게 묘사한 것이있는데 200년 뒤 나 또한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다. 북한에서는 이를 ‘겹물놀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하염없이 맑은 강물을 바라보는데 용강 선생이 또 내 습성을 잘 알아 묻는 말이 있었다. "교수 선생, 청천강에 대해선 무얼 조사해 왔습니까? 청천강을 읊은 멋진 시를 찾아낸 게 있습니까?" - P201
정말로 그랬다. 내가 지금 그렇듯이 길손의 서정이란 그렇게 산들바람같은 데가 있다. 나는 김일성종합대학 조선어문학과 출신인 강 선생이뭔가 패기있는 시를 알고 있을 것 같아 하나 알려달라고 했더니, 청천강과는 관계없다며 한사코 사양하다가 나의 쇠귀신 같은 요구를 못 이겨조선시대 시조 한 수를 읊는데 정말로 센 시였다. 그 정도면 청천강의 을지문덕 장군도 벌떡 일어날 만했다. - P203
벽상에 칼이 울고 흉중에 피가 뛴다 살 오른 두 팔뚝은 밤낮으로 들썩인다 시절아 너 돌아오거든 왔소 말을 하여라.
나중에 ‘조선문학사를 찾아봤더니 18세기 시조로 작자는 무명씨라고 되어 있었다. - P203
"한설야(韓雪野)의 『대동강」이 들판에 백설이 불어대는 아련한 분위기가 일품이라면리기영(李箕永)의 『두만강』은 소똥내조차 풍기는구수한 내음이 진합니다. 소설 두만강』은 첫 문장부터 장중하죠, ‘바람은 연사흘째 분다.‘ 천세봉(千世鳳)의 『석개울의 새봄』 을 보면 안개에 대한 세심한 표현이 아련하고 정서의 유현미가 그윽합니다." - P204
"리용악은 조국해방전쟁 이후 평남관개시초(南灌漑詩抄)」에서송아지 매매 우는 고개도 같고 용용한 물줄기도 같은 시를 썼고, 열정의 시인 조기천의 백두산은 조선의 고등중학생이라면 누구나한 구절씩은 외우는 명시입니다. 특히 조기천은 조선말 어휘에 색깔을 입힐 줄 알아서 ‘첩첩충암이 창공을 치뚫으고 청년 하나이 바위에 올라섰다‘라고 하면서 ‘하나가‘가 아니라 ‘하나이‘라고 맛과 힘을 냈습니다. - P204
석윤기의 전사들은 전쟁물을 생활화하는 데 성공했고 정문향은딱딱한 것, 쇠붙이에도 향기가 있음을 노래해 ‘파괴된 용광로에 새들이 집을 짓는다‘고 했어요. 정서천의 날이 밝는다」 같은 시는 감정의폭이 장중합니다. 그가 읊은 「메밀꽃」은 ‘메밀꽃 흐드러지게 핀 초가을/잠시 밭둑에 낫 놓고 이마의 땀을 씻노니/이야! 좋구나‘ 하고 낙차 큰 폭포처럼 떨어집니다." - P205
나는 말없이 그가 한평생 간직해온 문학의 진수들을 공으로 듣고 또이렇게 공으로 풀어놓고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용강 선생의 문학감상론이 귀에 쟁쟁하게 울리는 것을 느낀다. 그런데 나중에 알아보니북한에서는 시를 암송하는 것이 하나의 교양으로 자리잡아 식당 의례원(웨이트리스)과 접대원(호스티스)들도 즉석에서 애송시를 읊어주곤 했다. 그것은 북한의 또다른 면모였다. 아무튼 그는 나에게 문학이 삶 속에 살아있을 때 얼마나 풍요로운 서정과 행복한 꿈을 갖고 사는가를 생생히 알려주었다. 그것은 청천강과 안주 열두삼천골을 본 것 못지않은 이번 답사의 보람이고 성과였다. - P205
단천령의 피리 부는 것을 들어보면 입김이 피리를 울려서 소리를내는 것 같지 않고 천지에 가득한 피리소리가 조그만 피리 속으로 들어가려고 하다가 다 들어가지 못하고 남아서 허공에 흩어지는 것 같았다. - P206
달은 하늘 복판에 가까이 와서 있고 흰 구름장은 온 하늘에 군데군데 떠 있었다. 구름이 밝은 빛 가리는 것을 달은 좋게 여기지 아니하여 여러 구름장들을 한달음에 뚫고 나가려고 달음질을 치는 것같이보이었다. 달이 구름장에 들어가면 희미하고 나오면 환하여 희미하고환한 것이 연해 섞바뀌어 변하였다. - P206
북한의 대찰, 보현사 향산에 와서는 향산마을에 들를 것 없이 곧장 묘향산 쪽으로 꺾어도니이내 세모뿔 모양의 특색있는 건물인 향산호텔에 다다랐다. 호텔에 여장을 풀고 우리는 당연히 제일 먼저 보현사(普賢寺)를 찾아갔다. 묘향산 보현사는 북한에서 가장 큰 절일 뿐만 아니라 북한 불교의 총림(叢林)격이었다. 남한으로 치자면 서울의 조계사에 송광사나 해인사를 합친 위상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북한에서 절 하면 보현사였다. - P207
"이거 말입니까? 누운측백나무 향기랍니다. 향기가 정말로 곱고 진하죠. 그래서 ‘묘할 묘‘자, ‘향기 향자 묘향산이라 부르는 거 아니겠습니까!" - P210
그러다 보현사 넓은 절간을 두루 살피고 대웅전 툇마루에 걸터앉아 빵뚫린 요사채 빈터 너머로 우뚝한 탁기봉(卓峰)을 바라보노라니 스스로일으켰던 그 의문의 실마리가 풀린다. 그것은 무엇보다 바로 저 요사채가 복원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절집의 요사채는 스님들이 기거하며 밥먹고 잠자는 일상생활의 공간이지만, 건축가 민현식(閔賢植)씨가 적절히 지적했듯이, 성속(聖俗)이 어우러진 격조 높은 공간으로 승화된 경우가 많았다. 혹자는 요사채의 자유로운 건축으로 법당의 긴장감을 망친다고 불만을 말하기도 하지만, 기실은 빈틈없고 냉랭한 신앙행태에 숨통을 열어주며 신과 대중의 중계자구실을 할 수 있는 공간형식이다. - P211
그러나 북한의 스님들은 대개 대처승으로, 절에서 기거하지 않고 사하촌(寺下村) 격인 아랫마을에 살며 출퇴근한다. 그러니 설선당이고 심검당이고 일없이 복원할 까닭이 없었던 것이다. 북한의 스님은 남한과 여러면에서 달랐다. 머리를 삭발하지 않은 분도 많고, 법의는 우리 식으로 먹물을 들인 회색빛 납의(禍)가 아니라 일제강점기 때 입던 검은 옷에 붉은 가사를 걸치고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남한에서 대해온 스님들의 수도자로서, 성직자로서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간혹은 그저 절간 관리인 같아 보였다. - P212
나는 불교신도도, 기독교신자도 아니다. 나에게는 오직 문화유산에 대한 믿음밖에 없다. 그러나 나는 단 한번도 성직자적인 삶의 가치를 부정해본 적이 없다. 종교라는 것은 인간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만들어낸 인류의정신적 문화유산 가운데 하나이며, 그 죽음의 무서움을 볼모로 하여 인간의 삶 자체에 규율과 구속을 가함으로써 현실사회에 높은 도덕과 평온한 질서를 부여해준다. 그것이 신이 있는 나라의 강점이다. 그런데 북한은 그런 신이 없는 나라로 비친다. - P212
남북이 갈라진 지 50여년이 짧지 않은 어찌 생각하면 길지 않은세월 속에 불교라는 신앙의 형태는 이렇게 큰 차이를 낳은 것이다. 하지만나는 낙관한다. 남북의 스님들이 자유롭게 오가는 때가 오면 아마도어렵지 않게, 언제 그랬냐는 듯이 부처님의 이름으로 신앙의 형식을 통일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럴 수 있는 것이 또 종교의 매력이며 힘이니까. - P213
더욱이 묘향산으로 말하자면 그 옛날에는 태백산(太白山)이라고 하여단군이 탄생한 전설의 고향으로, 지금도 법왕봉(法王峰)으로 오르는 길에는 단군굴이 있는 성산(聖山)임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이처럼 보현사의 역사에 전설은 없고 사실(史實)과 사실(事實)만 있는 것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그것은 묘향산의 지정학적인 위치문제였다. - P214
이 창건불사를 담당한 스님은 탐밀(密)과 굉곽(宏廓) 이었으며 그 자세한 내력은 지금 보현사 입구에 세워져 있는 김부식 찬(撰), 문공유(文公裕) 글씨의 ‘묘향산 보현사지기‘에 자세히 씌어 있다. - P215
묘향산 보현사는 탐밀, 광곽 두 대사가 처음으로 이룩한 절이다. 탐밀의 본성은 김씨인데 황주(黃州) 용흥군(龍興郡) 사람이다. 25세에 출가하여 힘든 고행을 계속했다. 옷 한 벌과 발은 하나로 여간 춥지않아서는 신발을 신지 아니하고 하루 한끼의 식사로써 계(戒)를 지니고 배움을 부지런히하였다. 이름난 고승들을 찾아 화엄교관(華嚴敎觀)을 전해받고 현종 19년(1028) 에는 연산에 들어가 난야(蘭若, Aranya, 조용한 수행처) 를 짓고 살았다. 그뒤 정종 4년(1038)에는 탐밀의 조카로 그의 제자가 된 광곽이 이곳으로 와서 사방에서 모여드는 학승들을 수용할 절을 다시 짓게 되었다. 이때가 정종 8년(1042)으로서 저 동남쪽으로 100여 보되는 장소에 땅을 택해 정사(精舍)를 무려 243 간이나 이룩했다. 그리고 산 이름은 향산이요, 절은 보현이라 하였다. 두 스님이 죽은 뒤에도 제자들이 상속하여 불사를 더욱 일으켰다. 문종21년(1067)에는 임금이 이를 듣고 기뻐하여 땅과 밭을 내렸다. - P216
이후 보현사는 고려시대에 나옹선사(懶翁禪師)가 주석하고 조선시대에는 서산대사가 머무르면서 우리나라 불교사에서 우뚝한 존재로 그 여세를 오늘까지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 P216
"어디서 오셨습니까?" "평양에서 신혼여행 왔습니다." "그런데 일행이 많습니다." "부모님하고 신부 친구들이 같이 왔습니다." 그러자 운석 동무가 북한에서는 신혼여행을 곧잘 이런 식으로 온다고보완설명을 해주었다. 순간 나는 북한사람들의 일상생활에 생각 밖의 측면이 있음을 골똘히 생각하느라 잠시 말을 잊었다. 그러고는 그 짧은 침 - P220
"남의 신혼여행에 뭐하러 따라옵니까? 좋아서 왔습니까, 부러워서왔습니까?" 그러나 처녀들은 부끄러움을 타는 듯 만세루 기둥 뒤로 돌아 숨으며미소로 대답을 대신하는데, 농담 잘하는 운석 동무가 한마디 했다. "저런 걸 후천성 시집 매렴증이라고 합니다." - P221
"교수 선생, 그만 가자요. 교수 선생처럼 처녀들에 취해 일어나지못하는 사람을 두고 북조선에서 애들이 장난으로 만든 말이 있습니다." "뭔데요?" "선천성 장가 고픔증이라고 합니다." - P222
장이역수(壯而亦秀)의 산 산에 관해 또는 우리나라 지리에 관해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대개 묘향산을 한없는 동경의 산으로 여겨 마지않는다. 심지어 그리움이 넘쳐 "요다음 통일되면 금강산보다 묘향산에 먼저 가보고 싶다"는 말을 서슴없이 하기도 한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묘향산이 그토록 매력적인 산으로 각인된 것은 무엇보다 서산대사의 그 유명한 말씀 한마디 때문이다.
금강산은 수려하나 장엄하지 못하고 지리산은 장엄하나 수려하지 못하지만 묘향산은 장엄하고도 수려하다.
秀而不壯 壯而不秀 壯而亦秀 - P223
백두산에서 개마고원을 거쳐 느릿하게 뻗어내린 묘향산맥이 비로봉(1,909미터)에 이르러 불끈 솟아난 것이 묘향산의 정상인데, 여기부터 산세는 강파르게 깎이며 진귀봉.천태봉·향로봉·오선봉으로 100미터씩낮아지면서 법왕봉(1,388미터)에 다다라 문득 멈춘다. 이 비로봉과 법왕봉사이 30리 산마루는 봉우리마다 계곡을 형성하니 그것이 문수동계곡·만폭동계곡·천태동계곡·칠성동계곡이다. 우리는 그중 가장 장엄하다는만폭동(萬瀑洞)계곡부터 답사했다. - P224
"교수 선생 묘향산에선 아낄 것이 두개 있으니 하나는 감탄사요또 하나는 필름입니다. 그만 갑시다." - P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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