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상태에서 명화 다섯 점을 확보한 것은 결코 적은 것이 아니다. 세상엔 명화가그리 많은 것도 아니고 어디 가서 평생 잊을 수 없는 그림 하나를 만난다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닐진대 다섯 점을 꼽고도 적다고 한 것은 나의 단순한 남북유물 비교였던 것이다. - P157

김두량의 소몰이꾼은 모두가 인정하는 명화다.
목동이 소를 나무등걸에 느슨하게 매놓고 풀밭에서 배꼽까지 드러내놓은 채 늘어지게 낮잠 자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곁눈으로 옆을 응시하며 한가로이 풀을 뜯는 소의 크고 맑은 눈망울과 늘어지게 낮잠 자는 소몰이꾼의 모습이 극명하게 대비되면서 시골의 서정과 세태 풍자가동시에 느껴진다. 이런 그림은 본래 전통적으로 ‘전가낙사(田家樂事)‘라고 해서 전원생활의 한가로운  즐거움을 표현하는 소재로 그려져왔던 것이다. - P158

그런데 김두량은 이 서정적인 소재를 대단히 현실감있게 표현했다. 우선 소의 모습을 보면 여지없는 조선의 소로 종래의 화가들이 그리던 남양의 물소와는 판연히 다른 리얼리즘을 보여준다. 그리고 목동의 얼굴과잠자는 포즈에는 한가하고 평화로운 낮잠이 아니라 오히려 노동으로 지친 머슴의 피곤이 느껴질 정도로 땀냄새조차 풍긴다. 그러니까 김두량은전원의 한가한 풍경화를 박진감 넘치는 속화(俗畵)로 전환시킨 것이었다.  그것은 조선후기 속화의 탄생을 말해주는 또 하나의 경로였다. - P159

작품에 취해 말없이 한참을 구경하고 있는데 안내원이 이윽고 침묵을깼다.
"교수 선생, 정말로 잘 그리지 않았습니까? 소몰이꾼이 낮잠 자면서코고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지 않습니까? 야! 이거야 사진 같습니다." - P159

그런데 참으로 묘한 것은 평양의 조선미술박물관에는 몇 안되는 명품중에 김득신의 「농민과 양반」이라는 그림이 소장되어 있는 것이다. 이작품은 조선후기의 세태를 반영한속화 중에서도 계급적 갈등을 가장 리얼하게 묘사한 그림인 것이다. 이른바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예술관에 가장 잘 들어맞는 그림이 평양에 있다는 것은 유물에도 팔자가 있다는 헛소리를 내던지게 하는 것이다. - P160

김득신으로 말할 것 같으면 단원 김홍도의 충실한 후계자로 단원의 속화는 배경 없이 인물의 몸동작을 드러내는 데 역점을 둔 반면, 김득신은은은한 배경처리로 회화적 효과를 높였다는 평을 받고 있는 화가다. 이「농민과 양반은 그런 명성에 값하고도 남음이 있는 명화였다. 그리고김득신 이후 우리의 속화는 퇴락의 길을 면치 못해 이 작품이 그 찬란하던 조선시대 속화의 세계에서 마지막으로 피어났던 꽃이었다. - P160

북한에서 고고학을 비중있게 다룬 것은 민족적 정통성을 증명하기 위한 작업이었고 민속학은 인민의 삶과 생활정서를 존중하는 입장에서 연구해온 것이다. 사회과학원에서 발행하는 학술지의 이름도 ‘고고민속‘
이다. - P163

이에 반해 미술사는 근본적으로 지배층문화의 소산이기 때문에 부정적 시각으로 보며 아주 홀대하고 있다. 사회과학원 안에 미술사연구 분야가 따로 있지 않고 조선미술사』를 펴낸 곳도 미술사연구회가 아니라조선미술가동맹으로 되어 있으니 미술실기의 부수적 사항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 P163

단원의 자화상
평양의 조선미술박물관 회화 수장품 중에는 예외적이라 할 정도로 이인상, 이인문(李寅文, 1745~1821),  김홍도의 작품이 여러 점 있었다. 이인상은 소나무 아래서」라는 대작 외에 수옥정(玉亭)」 「구학정(龜鶴亭)」등 진경산수(眞景山水)를 그린 8폭화첩이 있고,  이인문의 작품은 「여름산수(夏景山水圖)」  「72세작 가을 산수」 등 빼어난 소품이 다섯 점이나 있다. 이들은 모두 한차례 명품해설감이 되고도 남음이 있는데, 세인의 관심을 살 만한 작품은 역시 김홍도의 그림일 것 같다. - P168

겸재 그림의 미덕
얼마전에 열린 한 문화재 관계 세미나장에서 제자뻘 되는 후배가 정감의 표시로 가볍게 던진 인사말이 내게는 약간 당황스러웠다.
"선생님은 역시 겸재를 별로 높이 보지 않으신 게죠?"
"왜?"
"단원 그림에는 그렇게 애정을 보이면서 겸재는 건너뛰어 뒤로 미뤄놓았으니까요" - P174

겸재는 조선 300년 역사 속에 보기 드문 화가다. 가만히 생각해보건대 우리나라 산수화가들은 산의 다양한 모습을 보지 못하고 화본(畵本)에 얽매여 그리므로  매양 똑같았다. 그러나 겸재는 금강산과 영남의 명승을 두루 답사하며 새로운 화법으로 이를 담아내니 조선적인 산수화법은 바로 겸재로부터 새롭게 출발했다고 할 것이다. - P175

그 결론만 여기서 줄여 말한다면 겸재의 진경산수는 사실에서 출발해사실성을 목표로 하는 이형사형(以形形)이 아니라 사실에 기초해 정신에로 나아가는 이형사신(以形寫神)의 세계였던 것이다.  이하곤이 강조한신운이란 바로 이런 것이었다. 그렇다면 겸재는 개별적인 것에서 출발해보편적인 것에 이른 대가였던 것이다. - P176

북한의 미술사가들도 이 점에 주목하며 옹천의 파도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겸재의 이런 사실주의적·민족주의적 미덕에 만족하지 못하고 ‘애국적 관점‘에서 강조하고 싶어했다. 그래서 1992년에펴낸 『금강산 일화집』에서는 겸재가 이 고장 한 어부로부터 백성들의 영웅적인 싸움 이야기를 듣고서 「옹천의 파도를 비로소 감동스럽게 그렸다는 새로운 일화를 만들어냈다. 그리고『조선전사(朝鮮全史)』(전33권) 제11권  365 면에서는 이 그림을 해설하면서 다음과 같은 설명을 글머리에덧붙여놓았다. - P179

우리 인민이 일찍이 강원도에 쳐들어왔던 왜놈들을 바닷속에 깊이처넣은 옹천을 묘사한 그림. - P179

북한학자들이 그렇게 말하는 심정과 사연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지금 우리는 전설의 시대가 아니라 사실의 시대에 살고 있다. 사실 자체를 말하면서 겸재의 뜨거운 애국심을 상기시킬 수 있을 때 비로소 설득력을 갖는 것이 아닐까. 나라면 차라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싶다. - P179

"겸재의 진경산수에는 이처럼 조국 강산에 대한 사랑과 자랑이 넘쳐흐르고 있다." - P179

반면에 북한에서는 의식적으로 조선화 장르를 개발해왔다. 그 첫 단초는 모든 일이 그렇듯이, 김일성 교시에서 시작되었다. 1954년 김일성은조선화를 발전시키는 데 대한 강령적 교시를 다음과 같이 내린다.

우리는 조선화의 선명하고 간결한 전통적 화법을 연구해 그것을우리 시대의 요구에 맞게 더욱 발전시켜야 합니다. - P184

누구는 이를 일러 "이발소 그림 같다"고 혹평했다. 그러니까 조선화의이상(理想)에는 잘못이 없었지만 그것의  시행과정을 보면 사안을 너무단순하게 처리함으로써 조선화의 무궁한 가능성을 개발한 것이 아니라아주 작은 일부분만 획득한 셈이다. - P189

그것은 북한사회의 다른 분야에서도 간취되는 현상이기도 했다. 결국북한의 조선화는 중국의 농민화, 미국의 소수민족 벽화, 남미의 나이브페인팅처럼 어느 제한된 범위에서는 독특한 위치를 가질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조선화의 전부일 수는 없었던 것이다. 40년 전에김용준이 말한 다음과 같은 경고가 새삼 생생하게 울려온다. - P189

조선화의 특색은 필묵이 근간이다. (・・・) 만일 필묵의 표현을 채색으로 대행한다면 벌써 모필 조선화는 성립하지 못하고 그 의의는 상실하고 말 것이다. - P189

북한의 현대수예
북한이 남한에 대고, 또는 세상에 내놓고 자랑할 수 있는 현대예술 장르를 나는 수예라고 생각한다. 묘향산 입구에는 국제친선전람관이라고해서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위원장이 외국사절에게 받은 선물들을 전시해놓고 있는데, 관례에 따라 북한에서 외국사절에게 답례한 것으로는 수예작품이 가장 많았다고 한다. 1972년 7.4남북공동성명을 위해 당시 이후락(李厚洛) 중앙정보부장이 평양을 다녀왔을 때 김일성 주석이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에게 선물로 보낸 것도 수예 신선도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 P189

안주벌 열두삼천골을 지나며
평양에 온 지 엿새째 되던 날 우리는 멀리 묘향산으로 3박4일 답사길에 오르게 되었다. 여행중에 여행을 맞는 이 기분은 참으로 묘했다. 여장을 꾸리고 방을 정리하는 손길이 마치 집에서 답사 떠날 때와 마찬가지로 바쁘고 마음이 가볍게 들뜨기도 했다. - P197

묘향산은 평안남도·평안북도·자강도 3도가 만나고 갈라지는 분계령이 되고 있지만, 답사와 관광지로서 묘향산은 평안북도 향산군(香山郡)향암리(香岩里)를  일컫는다. 그래서 묘향산에 가려면 예나 지금이나  반드시 향산을 거쳐야 한다. - P197

여행이란 목적지 못지않게 가는 과정이 풍요롭고 흥미로운 여정(旅情)을 실어주는 법인데 그걸 누리지  못함이  아쉬웠고, 특히 가는 길목에있는 관서제일루(關西第一樓)라는 안주 백상루(樓)에 들르지 못하게된  것은 차라리 억울했다. - P198

이름보다 더 맑은 청천강
청천강은 투명하다 못해 짙은 초록빛을 내뿜고 있었다. 강변에는 흰모래와 강자갈이 천연의 모습 그대로 깔려 있었다. 강 건너 저쪽으로는아침 안개가 채 걷히지 않은 안주읍내가 한 폭의 수묵화로 다가왔다. 강과 들과 산이 어우러지는 이 맑고 조용한 풍광은 남쪽에서는 이미 오래전에 잃어버린 무공해시절의 옛 모습 그대로였다. 나는 그동안 쓴 남한의 답사기에서 환상의 드라이브 코스를 얘기하면서 구례에서 하동까지섬진강을 따라가는 길을 큰 생각 없이 우리나라에서 ‘둘째‘로 아름다운길이라고 했는데, 그 첫째는 바로 여기를 위해 남겨둔 것이었던가 생각되기도 했다. 나는 스쳐가는 풍광을 놓치지 않으려고 느낌이 닿는 대로이렇게 메모해갔다. - P200

옛날에 실학자 초정(楚亭) 박제가(朴齊家, 1750~ 1805)가 묘향산 기행문(妙香山記)」에서 이 물수제비 뜨는 모습을 아주 정겹게 묘사한 것이있는데 200년 뒤 나 또한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다. 북한에서는 이를 ‘겹물놀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하염없이 맑은 강물을 바라보는데 용강 선생이 또 내 습성을 잘 알아 묻는 말이 있었다.
"교수 선생, 청천강에 대해선 무얼 조사해 왔습니까? 청천강을 읊은 멋진 시를 찾아낸 게 있습니까?" - P201

정말로 그랬다. 내가 지금 그렇듯이 길손의 서정이란 그렇게 산들바람같은 데가 있다. 나는 김일성종합대학 조선어문학과 출신인 강 선생이뭔가 패기있는 시를 알고 있을 것 같아 하나 알려달라고 했더니, 청천강과는 관계없다며 한사코 사양하다가 나의 쇠귀신 같은 요구를 못 이겨조선시대 시조 한 수를 읊는데 정말로 센 시였다. 그 정도면 청천강의 을지문덕 장군도 벌떡 일어날 만했다. - P203

벽상에 칼이 울고 흉중에 피가 뛴다
살 오른 두 팔뚝은 밤낮으로 들썩인다
시절아 너 돌아오거든 왔소 말을 하여라.

나중에 ‘조선문학사를 찾아봤더니 18세기 시조로 작자는 무명씨라고 되어 있었다. - P203

"한설야(韓雪野)의 『대동강」이 들판에 백설이  불어대는 아련한 분위기가 일품이라면리기영(李箕永)의 『두만강』은 소똥내조차 풍기는구수한 내음이 진합니다. 소설 두만강』은 첫 문장부터 장중하죠, ‘바람은 연사흘째 분다.‘ 천세봉(千世鳳)의  『석개울의 새봄』 을 보면 안개에 대한 세심한 표현이  아련하고 정서의 유현미가 그윽합니다." - P204

"리용악은 조국해방전쟁 이후 평남관개시초(南灌漑詩抄)」에서송아지 매매 우는 고개도 같고 용용한 물줄기도 같은 시를 썼고, 열정의 시인 조기천의 백두산은 조선의 고등중학생이라면 누구나한 구절씩은 외우는 명시입니다. 특히 조기천은 조선말 어휘에 색깔을 입힐 줄 알아서 ‘첩첩충암이 창공을 치뚫으고 청년 하나이 바위에 올라섰다‘라고 하면서 ‘하나가‘가 아니라 ‘하나이‘라고 맛과 힘을 냈습니다. - P204

석윤기의 전사들은 전쟁물을 생활화하는 데 성공했고 정문향은딱딱한 것, 쇠붙이에도 향기가 있음을 노래해 ‘파괴된 용광로에 새들이 집을 짓는다‘고 했어요. 정서천의 날이 밝는다」 같은 시는 감정의폭이 장중합니다. 그가 읊은 「메밀꽃」은 ‘메밀꽃 흐드러지게 핀 초가을/잠시 밭둑에 낫 놓고 이마의 땀을 씻노니/이야! 좋구나‘ 하고 낙차 큰 폭포처럼 떨어집니다." - P205

나는 말없이 그가 한평생 간직해온 문학의 진수들을 공으로 듣고 또이렇게 공으로 풀어놓고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용강 선생의 문학감상론이 귀에 쟁쟁하게 울리는 것을 느낀다. 그런데 나중에 알아보니북한에서는 시를 암송하는 것이 하나의 교양으로 자리잡아 식당 의례원(웨이트리스)과 접대원(호스티스)들도 즉석에서 애송시를 읊어주곤 했다. 그것은 북한의 또다른 면모였다. 아무튼 그는 나에게 문학이 삶 속에 살아있을 때 얼마나 풍요로운 서정과 행복한 꿈을 갖고 사는가를 생생히 알려주었다. 그것은 청천강과 안주 열두삼천골을 본 것 못지않은 이번 답사의 보람이고 성과였다. - P205

단천령의 피리 부는 것을 들어보면 입김이 피리를 울려서 소리를내는 것 같지 않고 천지에 가득한 피리소리가 조그만 피리 속으로 들어가려고 하다가 다 들어가지 못하고 남아서 허공에 흩어지는 것 같았다. - P206

달은 하늘 복판에 가까이 와서 있고 흰 구름장은 온 하늘에 군데군데 떠 있었다. 구름이 밝은 빛 가리는 것을 달은 좋게 여기지 아니하여 여러 구름장들을 한달음에 뚫고 나가려고 달음질을 치는 것같이보이었다. 달이 구름장에 들어가면 희미하고 나오면 환하여 희미하고환한 것이 연해 섞바뀌어 변하였다. - P206

북한의 대찰, 보현사
향산에 와서는 향산마을에 들를 것 없이 곧장 묘향산 쪽으로 꺾어도니이내 세모뿔 모양의 특색있는 건물인 향산호텔에 다다랐다. 호텔에 여장을 풀고 우리는 당연히 제일 먼저 보현사(普賢寺)를 찾아갔다.  묘향산 보현사는 북한에서 가장 큰 절일 뿐만 아니라 북한 불교의 총림(叢林)격이었다. 남한으로 치자면  서울의 조계사에 송광사나 해인사를 합친 위상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북한에서 절 하면 보현사였다. - P207

"이거 말입니까? 누운측백나무 향기랍니다. 향기가 정말로 곱고 진하죠. 그래서 ‘묘할 묘‘자, ‘향기 향자 묘향산이라 부르는 거 아니겠습니까!" - P210

그러다 보현사 넓은 절간을 두루 살피고 대웅전 툇마루에 걸터앉아 빵뚫린 요사채 빈터 너머로 우뚝한 탁기봉(卓峰)을 바라보노라니 스스로일으켰던 그 의문의  실마리가 풀린다. 그것은 무엇보다 바로 저 요사채가 복원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절집의 요사채는 스님들이 기거하며 밥먹고 잠자는 일상생활의 공간이지만, 건축가 민현식(閔賢植)씨가  적절히 지적했듯이, 성속(聖俗)이 어우러진 격조 높은  공간으로 승화된 경우가 많았다. 혹자는 요사채의 자유로운 건축으로 법당의 긴장감을 망친다고 불만을 말하기도 하지만, 기실은 빈틈없고 냉랭한 신앙행태에 숨통을 열어주며 신과 대중의 중계자구실을 할 수 있는 공간형식이다. - P211

그러나 북한의 스님들은 대개 대처승으로, 절에서 기거하지 않고 사하촌(寺下村) 격인 아랫마을에 살며  출퇴근한다. 그러니 설선당이고 심검당이고 일없이 복원할 까닭이 없었던 것이다. 북한의 스님은 남한과 여러면에서 달랐다. 머리를 삭발하지 않은 분도 많고, 법의는 우리 식으로 먹물을 들인 회색빛 납의(禍)가 아니라 일제강점기 때 입던 검은 옷에 붉은 가사를 걸치고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남한에서 대해온 스님들의 수도자로서, 성직자로서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간혹은 그저 절간 관리인 같아 보였다. - P212

나는 불교신도도, 기독교신자도 아니다. 나에게는 오직 문화유산에 대한 믿음밖에 없다. 그러나 나는 단 한번도 성직자적인 삶의 가치를 부정해본 적이 없다.
종교라는 것은 인간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만들어낸 인류의정신적 문화유산 가운데 하나이며, 그 죽음의 무서움을 볼모로 하여 인간의 삶 자체에 규율과 구속을 가함으로써 현실사회에 높은 도덕과 평온한 질서를 부여해준다. 그것이 신이 있는 나라의 강점이다. 그런데 북한은 그런 신이 없는 나라로 비친다. - P212

남북이 갈라진 지 50여년이 짧지 않은 어찌 생각하면 길지 않은세월 속에 불교라는 신앙의 형태는 이렇게 큰 차이를 낳은 것이다. 하지만나는 낙관한다. 남북의 스님들이 자유롭게 오가는 때가 오면 아마도어렵지 않게, 언제 그랬냐는 듯이 부처님의 이름으로 신앙의 형식을 통일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럴 수 있는 것이 또 종교의 매력이며 힘이니까. - P213

더욱이 묘향산으로 말하자면 그 옛날에는 태백산(太白山)이라고 하여단군이 탄생한 전설의 고향으로, 지금도 법왕봉(法王峰)으로 오르는 길에는 단군굴이 있는  성산(聖山)임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이처럼 보현사의 역사에 전설은 없고 사실(史實)과  사실(事實)만 있는 것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그것은 묘향산의 지정학적인 위치문제였다. - P214

이 창건불사를 담당한 스님은 탐밀(密)과 굉곽(宏廓) 이었으며 그 자세한 내력은 지금 보현사 입구에 세워져 있는 김부식 찬(撰), 문공유(文公裕) 글씨의 ‘묘향산 보현사지기‘에 자세히 씌어 있다. - P215

묘향산 보현사는 탐밀, 광곽 두 대사가 처음으로 이룩한 절이다. 탐밀의 본성은 김씨인데 황주(黃州) 용흥군(龍興郡) 사람이다. 25세에 출가하여 힘든 고행을  계속했다. 옷 한 벌과 발은 하나로 여간 춥지않아서는 신발을 신지 아니하고 하루 한끼의 식사로써 계(戒)를 지니고 배움을 부지런히하였다. 이름난 고승들을 찾아 화엄교관(華嚴敎觀)을 전해받고 현종 19년(1028) 에는 연산에 들어가 난야(蘭若, Aranya, 조용한 수행처) 를 짓고 살았다. 그뒤 정종 4년(1038)에는 탐밀의  조카로 그의 제자가 된 광곽이 이곳으로 와서 사방에서 모여드는 학승들을 수용할 절을 다시 짓게 되었다.  이때가 정종 8년(1042)으로서 저 동남쪽으로 100여 보되는 장소에 땅을 택해 정사(精舍)를 무려 243 간이나 이룩했다. 그리고 산 이름은 향산이요, 절은 보현이라  하였다. 두 스님이 죽은 뒤에도 제자들이 상속하여 불사를 더욱 일으켰다. 문종21년(1067)에는 임금이 이를 듣고 기뻐하여 땅과 밭을 내렸다. - P216

이후 보현사는 고려시대에 나옹선사(懶翁禪師)가  주석하고 조선시대에는 서산대사가 머무르면서 우리나라 불교사에서 우뚝한 존재로 그 여세를 오늘까지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 P216

"어디서 오셨습니까?"
"평양에서 신혼여행 왔습니다."
"그런데 일행이 많습니다."
"부모님하고 신부 친구들이 같이 왔습니다."
그러자 운석 동무가 북한에서는 신혼여행을 곧잘 이런 식으로 온다고보완설명을 해주었다. 순간 나는 북한사람들의 일상생활에 생각 밖의 측면이 있음을 골똘히 생각하느라 잠시 말을 잊었다. 그러고는 그 짧은 침 - P220

"남의 신혼여행에 뭐하러 따라옵니까? 좋아서 왔습니까, 부러워서왔습니까?"
그러나 처녀들은 부끄러움을 타는 듯 만세루 기둥 뒤로 돌아 숨으며미소로 대답을 대신하는데, 농담 잘하는 운석 동무가 한마디 했다.
"저런 걸 후천성 시집 매렴증이라고 합니다." - P221

"교수 선생, 그만 가자요. 교수 선생처럼 처녀들에 취해 일어나지못하는 사람을 두고 북조선에서 애들이 장난으로 만든 말이 있습니다."
"뭔데요?"
"선천성 장가 고픔증이라고 합니다." - P222

장이역수(壯而亦秀)의 산
산에 관해 또는 우리나라 지리에 관해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대개 묘향산을 한없는 동경의 산으로 여겨 마지않는다. 심지어 그리움이 넘쳐 "요다음 통일되면  금강산보다 묘향산에 먼저 가보고 싶다"는 말을 서슴없이 하기도 한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묘향산이 그토록 매력적인 산으로 각인된 것은 무엇보다  서산대사의 그 유명한 말씀 한마디 때문이다.

금강산은 수려하나 장엄하지 못하고
지리산은 장엄하나 수려하지 못하지만
묘향산은 장엄하고도 수려하다.

秀而不壯
壯而不秀
壯而亦秀 - P223

백두산에서 개마고원을 거쳐 느릿하게 뻗어내린 묘향산맥이 비로봉(1,909미터)에 이르러 불끈 솟아난 것이 묘향산의 정상인데, 여기부터 산세는 강파르게 깎이며 진귀봉.천태봉·향로봉·오선봉으로 100미터씩낮아지면서 법왕봉(1,388미터)에 다다라 문득 멈춘다. 이 비로봉과 법왕봉사이 30리 산마루는 봉우리마다 계곡을 형성하니 그것이 문수동계곡·만폭동계곡·천태동계곡·칠성동계곡이다. 우리는 그중 가장 장엄하다는만폭동(萬瀑洞)계곡부터 답사했다. - P224

"교수 선생 묘향산에선 아낄 것이 두개 있으니 하나는 감탄사요또 하나는 필름입니다. 그만 갑시다." - P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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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악3호무덤의 실물대 모형 안에서
안악3호무덤! 한국미술사의 최대 논쟁거리인 이 무덤을 나는 결코 말없이 지나갈 수 없다. 안악3호무덤은 현재까지 북한과 중국에서 발견된90기의 고구려 벽화무덤 중 가장 규모가 크고, 가장 풍부한 벽화를 갖고있으며, 가장 이른 시기에 축조된 무덤으로, 묵서명(墨書銘, 먹으로 써놓은글씨)이 있어 고구려 고분벽화의 시원을 알려주는 기념비적인 유물이다. - P143

"북한에서는 저분을 고국원왕(國原王)으로 보는 학설이 굳어져가는 게죠?"
"그렇습니다. 미천왕(美川王)설은 이젠 들어갔습니다."
"남한에서는 아직 동수의 무덤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입니다."
"그렇다고 들었습니다만……… 이제 보시니 어떻습니까?"
우리의 선문답 같은 이 몇마디에는 사실상 안악3호무덤의 50년 연구사가 다 들어 있었다. - P144

‘동수‘과 ‘미천왕‘설
1949년 황해도 안악(安岳)의 한 언덕에서 이 무덤이  발견되었을 때 발굴 담당자였던 고고학자 도유호(都有浩, 1905~82)는  간단한 보고서를 통해 이 무덤은  묵서명에 보이듯 동수의 묘라고 했다. 그리고 한국전쟁이끝나고 다시 발굴조사되면서 동수의 무덤이라는 주장이 크게 보강되었다. 문제의 동수는 『자치통감(資治通鑑)』 등 중국  역사책에도 나오는 연나라 장수다. - P144

안악3호무덤의 피장자
 이 무덤의 주인공이 과연 누구인가를 놓고 50년에 걸쳐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남한에서는연나라에서 귀화한 장수인 동수의 무덤으로 보고 있으나, 북한에서는 미천왕릉설을 거쳐 지금은 고국원왕의 무덤으로 보고 있다. - P145

그리고 함남 신포시 오매리(梧梅里)에서는 압해산 (432미터) 절골에서고구려 때 절터 위에 발해 절간이 올라앉은 유적층을 발견했다. 이는 칠보산(七寶山)  개심사(開心寺)를 복구할 때 대들보에서 중창기  상량문을 발견했는데 거기에 826년, 즉 발해시대에  창건했다는 기록을 찾아낸 것과 함께 대표적인 발해 불교유적으로 손꼽히게 되었다. - P154

이런 고고학적 성과는 발해라는 나라가 주민의 다수는 말갈족이었지만 그 상층부는 고구려인으로 고구려의 문화를 이어받은 한민족 역사의현장임을 확인시켜주는 것이었다. 유물의 양식과 세련미를 보면 마치고구려의 패기있고 활기찬 성격이 점점 다듬어진 듯 거친 맛은 정리되면서우아한 기품까지 드러내는 것이었다. - P154

"지금 중국에서는 북한 고고학자의 입국비자를 내주지 않고 있습니다. 만주지역 고조선 · 고구려 발해에 대한  우리의 관심을 아주 예민하게 경계하고 있어요. 『조선유적유물도감』 전20권 중 제8권이 발해편인데 이 책을 위해 발해 상경의 궁궐터 사진이라도 찍어오려고 기자로 가장까지 해보았지만 귀신같이 족집게로 집어내듯 학자는 다뽑아냈습니다. 아주 안타깝습니다. 남쪽 학자들은 만주에 자유롭게가신다니 그쪽 답사는 남쪽에 일단 맡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 P154

이것은 좀처럼 믿어지지 않는 충격적인 사실이었다. 훗날 일어날지도모르는 국경분쟁의 불씨를 원천적으로 차단하자는 뜻인가? 설혹 그렇기로서니 학자의 입국까지 거부하다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 P155

그림 속 목동의 코고는 소리가 들리는 듯
어느 나라를 가든 나의 여행은 곧바로 박물관 관람으로 이어진다. 그것이 나의 본업이고 본색이다. 하물며 평양에 와서 그렇게 보고 싶었지만 사진으로만 접해왔던 우리의 유물들을 보지 않고 무엇을 보겠는가.
평양에는 세개의 큰 박물관이 있다. 조선중앙력사박물관, 조선미술박물관, 조선민속박물관 그중 나의 관심은 당연히 미술박물관에 있었다. 거기는 이른바 아트뮤지엄으로 우리가 예술의 진수로 손꼽고 있는 회화·조각·공예의 명품들이 전시되어 있는 것이다. - P156

"평양의 박물관엔 조선시대 회화가 제법 있다지?"
"그러나 명품은 많지 않은 것 같아요. 만약 관장님께서 소장처에대한 고려 없이 조선시대 명화선집을 편찬하신다고 하면 300점을 뽑아야 다섯 점 정도 고르실걸요."
"무얼 꼽을 수 있나?"
"이암(李巖)의 고양이와 강아지」, 김두량의  소몰이꾼(午睡)」, 이인상(李麟祥)의 소나무 아래서(松下獨坐)」, 김홍도의 「구룡폭(九龍瀑)」, 김득신(金得臣)의 농민과 양반(路上講見)」 정도겠죠."
"자네는 그렇게 잘 꼽으면서도 적다고 말하나?" - P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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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고조선의 강역이 랴오뚱이 아니라 평양을 중심으로 펼쳐졌다고 믿는 학자들이 줄곧 있어왔다. 이들은 고려사(高麗史)』 조선시대 기록에서도 평양의 단군릉 존재를 확인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1530년에완성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강동현(江東縣)에 "현 서쪽 3리에 둘레 410자나 되는 큰 무덤이 있는데 이를 단군묘라고 한다"는 기록에 주목한다. - P124

그러면 북한에서는 왜 그렇게 단군릉 개건에 열중했는가라는 물음이남게 되는데, 이에 대해서는 조선중앙력사박물관의 장정신(張正信, 58세)관장이 대담중에 "주체를  올바로 세우는 뜻에서 3대 시조에 대한 개건사업을 전개했다"고 한 말의 행간에서 읽을 수 있다. 즉 고조선의 단군, 고구려의 동명성왕,  고려의 왕건, 그런 식으로……… - P127

김일성 주석은 결국 자신의 생애 마지막 대역사였던 이 단군릉 개건사업의 완성을 3개월 남겨두고 세상을 떠났고, 1994년 10월 29일에 그 유훈을 이어 준공을 보게 되었다. 그것이 지금의 단군이다. - P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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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고인돌은 오덕형입니다."
"그렇고말고요."
"그런데 그 오덕리 고인돌은 이번에 가보기 힘듭니까?"
"오덕리 고인돌요? 그건 잠깐 미역감으러 갔습니다."
"미역감으러 가다니요? 아! 알았습니다. 저수지에… - P119

"리선생, 염려 마십시오. 전라남도 승주 주암댐에는 고인돌 100개가 미역은 고사하고 그대로 수장됐답니다. 
누가 누굴 흉보겠어요. 오히려 리선생의 넉넉한  유머감각에 놀랄걸요." - P119

통역은 필요없고, 전화는 안되는 곳
평양에 온 지 나흘째 되던 날 저녁식사 뒤 여느 때처럼 둘러앉아 차를마시며 환담을 나누는데 권영빈 단장이 불현듯 묻고 나왔다. 바람을
"우리가 평양에 온 지 겨우 나흘밖에 안됐나? 그런데 왜 한달은 된것 같지?"
49바다 "왜? 객지 나오면 다 그런 거지"
사람"다 그렇긴? 일년에 몇번씩 외국에 나다녔어도 이런 감정은 처음이다." - P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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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이 이처럼 천연의 요새이기는 했지만 그 방위의 기본이 강줄기이고 산이 아닌지라 이를 보강함이 평양성의 기본 계획이 되었음은 설명없이도 짐작할 수 있는데, 실제로 고구려시대부터 평양성은 내성·외성·중성 · 북성 등 겹겹이 네개의 성으로 둘러싸였다. 북성에는 군대, 내성에는 관아가 들어가 있었고, 중성 · 외성에는 민가가 자리잡았는데 그 중성의 서쪽 대문이 바로 보통문이다. 보통문은 이처럼 산과 강이 마주보는자리에 있어 주변풍광이 참으로 곱다. 그래서 일찍이 평양8경의 하나로꼽혀왔다. - P79

전란에도 살아난 신문
또한 보통문은 예부터 신문이라고 불렸다. 임진왜란 중 평양성 탈환작전 때 불화살이 문에 어지러울 정도로 날아들었으나 끝내 불에 타지 않았으니 사람들이 그때부터 귀신 같은 문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 또한 지세 덕이었는가, 보통문의 사주팔자였던가. 그로부터350년 뒤 한국전쟁에서 평양은 아주 심하게 폭격을 당해 전쟁이 끝났을때 시내에 온전한 건물이라고는 딱 두 채뿐이었다 - P79

"교통 위반하면 벌금을 냅니까?"
"아니요. 교육을 받습니다."
"교육? 무슨 교육을 받나요?"
"곳곳에 교통지도소가 있는데 큰판에 교통안전수칙 30여가지 적어놓은 것을 다 외워야 보내줍니다. 다 못 외우면 이튿날 또 와야 해요. 교수 선생도 그걸 다 외우려면 못 걸려도 서너 시간은 걸립니다."
- P80

천하명문, 채제공의 중건기
나는 뒤로 돌아 들보 쪽을 올려다보았다. 혹시나 무슨 시판중수기(記)라도 있을까 살피니 현판이 하나 걸려 있었는데, 뜻밖에도 채제공(蔡濟恭, 1720~99)이 쓴  ‘보통문 중건기‘었다.
정조 때 가장 유능한 재상으로 이름높았던 채제공이 50세 때 평안감사가 되어 이 보통문을 고치고 낙성할 때 써붙인 현판이다. 더듬거리며 한자씩 풀어보자니 그 뜻이 참으로 크고 아름다웠다. - P82

지금 평양에서 고쳐야 할 것은 이 보통문만이 아니다. 나라 곳간이텅 비고 재정이 고갈된 것은 문의 기둥이 썩는 것과 무엇이 다르며, 백성들이 가렴주구(苛斂誅求)로 시달리는 것은 서까래 네 구석이 무너져내리는 형세와 무엇이 다르며, 풍속이 퇴폐해 날로 낮은 데로 흘러감은 기와가 땅에 떨어지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물건이 허물어진 것은 혹은 기다려 고치면 되겠지만 백성의 삶이 허물어진 것은 장차 어디에 기대해야 할 것인가. 나는 이 말을 여기에 기록해두어 내가 근본을 버리고 그 말엽만 힘쓴 것을 부끄러워했음을 알게 하고자 하노라.

이런 글을 일러 명문이라 하는 것이리라. - P83

집 한 채 지은 것을 축하하는 가운데에서도 생활과 사상과정치가 분리되지 않는 경륜이 바로 기문에 잘 나타나는 것이다. 청풍 한벽루(寒碧樓)에 붙인 하륜(河崙,  1347-1416)의 기문은 정자를 고친다는 것은 한 고을 수령 된 자가 하는 미미한 일에 지나지 않지만 그 정자를 보면 오히려 고을의 정치와 도덕까지 알 수 있음을  논했고, 공주 취원루(聚返樓)에 붙인 서거정의 글은 정자란 한갓 놀고 쉬는 곳이 아니라 민생의 현장을 모두  볼 수 있는 곳임을 말했는데, 채제공은「보통문 중건기」에서 관과 민이 할 일을 두루 다 말하고 있다.  옛 문장가들의 뜻은 그처럼 원대했다.  - P84

"용강 선생, 나도 소장 아바이라고 불러도 됩니까?"
"물론입네다. 아바이는 존칭입니다."

설명을 들으니 북한에는 ‘동무‘ ‘동지‘ ‘아바이‘라는 호칭이 있다. 동무는 친구나 손아랫사람의 이름이나 관직에 붙이고, 동지는 윗사람이나나이든 사람의 이름이나 직함에 붙이는 존칭이다. 과장 동무, 철수 동무는 낮춤이고 과장 동지, 철수 동지는 존칭이다. 그리고 동지라고 부르기에는 나이가 많으면 아바이가 붙는다는 것이다. 소장 아바이, 관리원 아바이, 부장 아바이... - P90

북한에서 ‘님‘이라는 어미가 붙는 것은 수령님 · 장군님 · 원수님 등 특수한 경우에 한하고, 나처럼 체제 밖에 있는 사람에게는 모두 이름이나직함 뒤에 선생을 붙인다. 기자 선생, 의사 선생, 홍준 선생 등으로 부르는것은 선생님이라는 뜻이 아니라 남한말의 씨(氏), 영어로 ‘미스터‘(Mr.)에 해당한다. 그래서 그들은 나를 꼭 ‘교수 선생‘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 P91

한반도 최초의 인간이 살던 곳
나의 첫 북한답사는 1997년 9월 23일부터 10월 4일까지 행해졌다. 그중 4일은 묘향산에 다녀왔고 나머지 7일은 내내 평양지역을 답사했다.
그럴 정도로 평양은 답사의 보고(寶庫)였다. 남한에서  어느 도시가 일주일을 머무르면서 매일 답사를 다닐 만큼 많은 유적을 갖고 있을까. 글쎄, 서울과 경주 정도일 것이다. - P97

검은모루유적의 발견은 해방 후 북한 고고학계의 최대 성과로, 한반도에도 구석기시대가 있었음을 확인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지금은 남한에서도 경기도 연천군 전곡리, 충남 공주시 석장리 등 30여곳에서 구석기유적이 발견되었지만 그때로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 P99

특히 일제강점기에 일본에서 먼저 구석기유적이 발견되어 그들이 식민사관을 조장할 때 그 점을 항상 강조했던 것인데, 검은모루유적은 이를 통쾌하게 극복하면서 한국의 역사를 물경 50만년 전으로 끌어올려놓았다. 그리하여 검은모루유적은 남북한을 막론하고 한국역사의 첫 페이지를 장식하게 되었고, 나 또한 해마다 맡아 가르치는 한국미술사 시간에 첫날 첫번째 슬라이드로 비추는 곳이 바로 이 유적이다. 그 기념비적인 유적을 답사하게 되었으니 어찌 가슴이 설레지 않겠는가. - P99

"교수 선생, 검은모루에 가면 실망이 클 겁니다. 학생 때 가보았는데,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공연히 북조선의 유적은 형편없다고 쓰면영 야단 아닙니까." - P100

"운석 동무, 걱정 안해도 됩니다. 교수 선생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보면 망한 절에 뒹구는 돌을 보고도 폐사지의 아름다움이라고말하는 분 아닙니까." - P100

"이것은 그냥 ‘깨진 돌‘이고 뗀석기는 형태와 쓸모를 머릿속에 구상한 다음 내리쳐서 만든 ‘깨뜨린 돌‘입니다. 대개는 내리쳐깨기와 때려깨기로 만들었지요. 즉 행위에 목적과 의식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 P106

"야! 고고학과 미술사라는 게 굉장하구나! 나는 경제만 아는 무식쟁이였구만 ‘깨진 돌‘하고 ‘깨뜨린 돌‘ 사이에 그런 철학적인 차이가있었단 말인가. 이야! 아는 만큼 보인다더니 이거 놀랍구나!" 
운석 동무는 검은모루를 돌아 내려가도록 ‘뗀석기에는 행위의 목적과의식이 있다‘는 말을 내내 되뇌고 있었다. - P106

일본의 큐우슈우(九州)에 약간 있을 뿐, 주로 한반도 전역에 퍼져 있는우리나라 고유의 거석(巨石) 기념물이다.  북한에는 약 2만 기, 남한에는어림잡아 3 만기 정도가 확인되고 있다. 2, 3천년 전의 유물이 5만점이나있는 셈이다. 유네스코가 이것을 세계의 문화유산으로 지정하든 말든 나는 세계미술사의 지평에서 한국미술을  평가할 때 당당히 내세울 수 있는 첫번째 유물은 고인돌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2000년에 강화도·고창·화순의 고인돌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 P108

"룡곡리의 20여기 되는 고인돌 가운데 제4호무덤에서는 사람뼈가나왔습니다. 절대연대 측정값은 4,539+-167년입니다. 그리고 바로 옆 제5호 무덤에서는  청동비파형(靑銅琵琶形) 창끝이 출토되었습니다."

북한의 고고학은 이처럼 엄청스러운 데가 있다. ‘약‘이라는 말은 차치하고, 아주 당당하게 십단위 아래까지 계산에 넣곤 한다. - P110

"우리도 얼마전까지는 기원전 12세기 정도로 보았죠. 그러나 단군릉이 조사되면서 이제는 기원전 30세기부터 청동기시대가 시작됐음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는 리선생의 얘기를 듣고만 있었다. 내 전공도 아닌 분야에 섣불리대들 일도 아니었고, 설혹 이견이 있더라도 내가 지금 그 논쟁을 하러 온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고인돌의 연대에 관한 남북 고고학자들의 견해차는 너무도 컸다. 학문교류가 없는만큼 그 간격이 넓고 깊어 보인다. - P111

"선생, 일없습니다. 고인돌이라는 것이 넓적한 바윗덩어리니 옥수수가리를 내려놓지 않아도 다 짐작할 수 있습니다. 내가 보고 싶은것은 고인돌이 어떤 위치에 있는가였지 하나하나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조상님들덕에 농부들은 옥수숫대를 잘 말리게 되었고, 우리는 고인돌 덕에 이 용곡리 산골까지 들어와보게 되었으니 모두 문화유산의 공 아니겠습니까." - P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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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10-04 22: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즘 문화유산 답사기 계속 읽으시네요. 유홍준씨 글맛이 있죠. 저는 오래전에 나올때마다 보다가 어느 순간 멈춘듯해요. 그러고보니 이 책도 서울이랑 제주편은 못읽었네요. ㅎㅎ

대장정 2022-10-04 22:34   좋아요 1 | URL
일본, 중국포함 총 18권중 8,9,10,4,5 5권 안읽었더라구요. 책 나올때 바로바로 읽는다고 읽었는데 게을러서 그렇죠. 이참에 다 읽어야죠.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