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에서 희생자가 고루 발생하였다면 모르지만, 평양에서만 집중적으로 사망자가 발생하였다는 사실은 평양의 폭동에 ‘검은 손’이 작용하였을 가능성이 매우 컸음을 강력히 시사한다. 즉 일본, 특히 만주의 관동군과 연결된 조선 주둔 일본군이 만주침략을 앞두고 조선인과 중국인을 이간시키기 위해 음모를 꾸몄다는 것이다.

중국으로 급히 귀환한 화교들은 일본인이 조선옷을 입고 폭동을 선동했다고까지 증언하기도 했다.

만주를 강점하고 괴뢰 만주국을 세운 뒤 관동군 사령관은 일본인 관리에게 "조선인과 중국인의 사이는 소원해야지 친밀해서는 안 된다. 두 민족이 충돌할 때, 시비가 동등한 경우에는 조선민족의 편을 들어 한민족을 억누른다"라는 비밀지령을 내려 이간책을 계속했다.

"차이나타운이 없는 나라, 화교자본이 성공하지 못한 나라, 화교 수가 계속 줄고 있는 나라." 이 세 조건을 만족시키는 나라는 한국뿐이다.

베트남전에서의 민간인 학살의 상당 부분이 하필이면 한국군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한국과 베트남은 역사적으로 많은 공통점을 지닌 나라였다. 두 민족은 중국이라는 거대한 국가의 곁에서 독립과 자주를 지키기 위해 노력해온 자존심 센 민족이었으며, 똑같이 유교문화권에 속해 있었다.

박정희는 "미국이 너무 혼자서 많은 부담을 지고 있다"면서 "자유세계의 일원으로서 미국의 과중한 부담을 덜어준다"는 명목으로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을 제안한 것이다. 이 뜻밖의 제안에 케네디는 박정희와 예정에 없던 정상회담을 또 한번 가졌고, 베트남 파병 제안으로 박정희가 자기를 아주 기분좋게 해주었다고 치하했다.

박정희 정권 말기 한-미관계가 악화된 뒤 열린 미 의회의 프레이저 청문회에서 전 주한미국대사 포터는 중앙정보부와 박동선의 로비 등 "의심스러운 한국인들의 활동"에 대해 미국이 효과적인 행동을 취하지 못했던 것도 한국의 베트남전 참전을 참작한 행정부 고위관리들의 관대함 때문이었다고 증언했다.

박정희에게 어차피 파병하기로 한 이상 미국으로부터 최대한 받아낼 것을 받아내자고 건의했다. 그러나 박정희는 "미국이 어려운 틈을 타서 우리가 타산적으로 나간다면 너무 야박하지 않은가"라는 입장을 보였다.

누구의 이익을 지켜야 하는 대통령인지 모를 박정희의 태도가 낳은 결과는 참담했다. 한국군 사단장인 소장이 미국으로부터 받는 월급여가 354달러인 반면, 필리핀군과 타이군의 소대장인 소위는 각각 매월 442달러, 389달러를 받았다. 일반 사병들의 경우는 남베트남군의 월급여에도 미치지 못하는 형편없는 대우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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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치유 라이팅북 필사 네번째

윤동주, 1917년~1945년
일제강점기에 짧게 살다 간 젊은 시인. 
어둡고 가난한 생활 속에서 인간의 삶과 고뇌를 사색하고, 일제의 강압에 고통받는 조국의 현실을 가슴 아프게 생각한 고민하는 철인이었다. 28세의 젊은 나이에 옥중에서 타계하였으며 <별 헤는 밤>, <자화상>, <서시> 등 주옥같은 작품을 남겼다.

김영랑, 1903년~1950년
본명 김윤식, 1930년 『시문학』 동인지에 서정시를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이어 <내 마음을 아실이>, <모란이 피기까지는> 등의 작품을 내며 1935년 첫 시집 《영랑시집》을 간행하였다. 잘다듬어진 언어로 섬세하고 영롱한 서정을 노래해 순수서정시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 한국어의 시적 아름다움을 극대화한 시인이다.

한용운, 1879년~1944년
독립운동가 겸 승려이자 시인. 
일제강점기 때 시집 <님의 침묵>을 출판했다. <님의 침묵>의 시 전편은 고도의  상징적 수법과 여성적인 정감의 어조로 사랑을 노래한 서정시이다. 하지만그 내면에는 잃어버린 조국과 민족의 독립을 향한 강인한 신념과 희망이 담겨 있다. 사상과실천을 일치시켜 저항운동에 앞장선 대표적 민족시인이다.

김소월, 1902년~1934년
본명은 김정식. 한국의 전통적인 한을 노래한 시인이다. 짙은 향토성을 바탕으로 서정적인 작품을 발표해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으로 꼽힌다. 한국 서정시의 기념비적 작품인 <진달래꽃>으로 널리 알려졌으며, <금잔디>, <엄마야 누나야>, <산유화> 등 수많은 작품으로 오늘날까지 사랑받고 있다.

백석, 1912년~1996년
본명은 백기행. 방언을 즐겨 쓰면서도 모더니즘을 발전적으로 수용한 시들을 발표했다. 1938년 시집 <사슴>으로 문단에 데뷔하였고, 토속적이고 민족적인 작품으로 특이한 경지를 개척하는 데 성공했다. 광복 이후에는 고향인 북에 머물렀으며, 대표작으로는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 <모닥불>, <고향> 등이 있다.

박용래, 1925년~1980년1955년
 『현대문학』에 <가을의 노래>로 박두진의 추천을 받아 문단에 나왔다. 향토적인 사물이나 지나쳐버리기 쉬운 것들을 시적으로 여과시켜 전원적·향토적인 서정의 세계를 심화하였다. 한국적 정서를 간결한 언어의 아름다움으로 표현한 시인으로 평가받으며 《싸락눈》, 《강아지풀>, <먼 바다》 등의 시집을 발표했다.

이용악, 1914년~1971년
일본 조치대학 재학 중인 1935년, 『시인문학」에 <패배자의 소원>을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시집 《분수령》과 《낡은 집》으로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당시 조선 민중의 궁핍한 현실을 예민한감수성과 풍부한 사상으로 작품에 녹여냈으며, 서정주 · 오장환과 함께 3대 시인으로 불렸다.
<오랑캐꽃》, 《이용악집》 등의 시집을 펴냈다.

신석정, 1907년~1974년
중앙불교전문강원에서 불전을 연구한 신석정은 1931년 김영랑, 정지용 등과 함께 시문학』동인으로 활동하며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전개했다. 1939년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아직은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가 수록된 처녀 시집 <불>을 통해 전원시인, 목가시인이라는평가를 받으며 동양적 낭만주의에 입각한 작품을 남겼다.

박목월, 1915년~1978년
본명 박영종, 1940년 정지용의 추천을 받아 『문장』에 <길처럼>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민족 정서를 깊이 있게 탐구하여 우리 민족의 감수성과 상상력의 높은 경지를 보여준 시인이다. 저서로는 박두진, 조지훈과의 3인 합동 시집 《청록집》과 개인 시집 <산도화>, <난· 기타>, <청담>등이 있다.

이병기, 1891년~1968년
시조학자이자 국문학자였던 가람 이병기는 시조 부흥운동을 주도한 한국 대표 시조 시인이다. 주시경 선생의 조선어문법 강의를 들었고, 조선어연구회와 시조회를 발족해 민족 문학을보급하는 데 앞장섰다. 그는 시조는 낡은 규범을 그대로 따르는 게 아니라 창작하는 것이라고주장하며 새로운 운동을 펼쳤다. 저서로는 《가람시조집》, 《가람문선》 등이 있다.

노자영, 1898년~1940년
낭만적 감상주의에 기초하여 1920년대 청춘기의 정서를 표현하는 시를 썼다. 시와 산문에서 소녀적인 취향의 문장으로 명성을 떨쳤다.

임화, 1908년~1953년
시인, 문학평론가, 영화배우, 혁명가로 활동하며 ‘조선의 랭보‘라 불렸다. 프롤레타리아 문학과 계급혁명 운동을 주도했다.

박두진, 1916년~1998년
청록파 시인 중 한 명으로 자연을 통해 시대의 부정적 가치를 비판하면서도 절대적 가치를 추구하는 작품을 발표했다.

함형수, 1916년~1946년
서정주, 김동리, 오장환 등과 동인지 「시인부락을 창간했다. 불안과 비애, 사랑과동경에 관한 30여 편의 작품을 남겼다.

조지훈, 1920년~1968년
민족 정서를 섬세하고 우아하게 노래한 시인으로 유명하다. 청록파 시인 중 한명으로 서정적이고 동양적인 미를 추구했다

이장희, 1900년~1929년
섬세한 감각과 심미적인 이미지를 작품에 표출시킨 시인이다. 주요 작품으로 <봄은 고양이로다>, <하일소경> 등이 있다.

오장환, 1918년~1948년
15세 어린 나이에 등단하여 <성>, <헌사>, <병든 서울> 등의 시집을 냈다. 서정주. 이용악과 함께 ‘시단의 천재‘로 화려한 주목을 받았다.

박인환, 1926년~1956년
<목마와 숙녀>, <세월이 가면> 등의 시를 썼고, 도시 문명의 우울과 불안을 감상적인 시풍으로 노래했다.

이상화, 1901년~1943년
식민지 치하의 민족적 비애와 일제에 항거하는 저항의식을 기조로 삼은 민족주의시인이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의 침실로>가 유명하다.

신동엽, 1930년~1969년
<껍데기는 가라>를 쓴 1960년대 대표적인 민족주의 시인이자 참여 시인이다. 치일한 현실의식과 역사의식,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시를 썼다.

이육사, 1904년~1944년
시인이자 독립운동기. <광야>, <절정>처럼 강인하고 담대한 민족시 외에도 <청포도>처럼 서정적이고 목가적인 작품을 남겼다.

강경애, 1907년~1943년
사회의식을 강조한 사실적인 작품으로 억압받는 하층 여성을 대변했던 식민지시기 최고의 소설가다. 1930년대 문단에 독특한 위치를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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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1917년~1945년
일제강점기에 짧게 살다 간 젊은 시인. 
어둡고 가난한 생활 속에서 인간의 삶과 고뇌를 사색하고, 일제의 강압에 고통받는 조국의 현실을 가슴 아프게 생각한 고민하는 철인이었다. 28세의 젊은 나이에 옥중에서 타계하였으며 <별 헤는 밤>, <자화상>, <서시> 등 주옥같은 작품을 남겼다. - P15

김영랑, 1903년~1950년
본명 김윤식, 1930년 『시문학』 동인지에 서정시를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이어 <내 마음을 아실이>, <모란이 피기까지는> 등의 작품을 내며 1935년 첫 시집 《영랑시집》을 간행하였다. 잘다듬어진 언어로 섬세하고 영롱한 서정을 노래해 순수서정시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 한국어의 시적 아름다움을 극대화한 시인이다. - P39

한용운, 1879년~1944년
독립운동가 겸 승려이자 시인. 
일제강점기 때 시집 <님의 침묵>을 출판했다. <님의 침묵>의 시 전편은 고도의  상징적 수법과 여성적인 정감의 어조로 사랑을 노래한 서정시이다. 하지만그 내면에는 잃어버린 조국과 민족의 독립을 향한 강인한 신념과 희망이 담겨 있다. 사상과실천을 일치시켜 저항운동에 앞장선 대표적 민족시인이다. - P61

김소월, 1902년~1934년
본명은 김정식. 한국의 전통적인 한을 노래한 시인이다. 짙은 향토성을 바탕으로 서정적인 작품을 발표해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으로 꼽힌다. 한국 서정시의 기념비적 작품인 <진달래꽃>으로 널리 알려졌으며, <금잔디>, <엄마야 누나야>, <산유화> 등 수많은 작품으로 오늘날까지 사랑받고 있다. - P83

백석, 1912년~1996년
본명은 백기행. 방언을 즐겨 쓰면서도 모더니즘을 발전적으로 수용한 시들을 발표했다. 1938년 시집 <사슴>으로 문단에 데뷔하였고, 토속적이고 민족적인 작품으로 특이한 경지를 개척하는 데 성공했다. 광복 이후에는 고향인 북에 머물렀으며, 대표작으로는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 <모닥불>, <고향> 등이 있다. - P107

박용래, 1925년~1980년1955년
 『현대문학』에 <가을의 노래>로 박두진의 추천을 받아 문단에 나왔다. 향토적인 사물이나 지나쳐버리기 쉬운 것들을 시적으로 여과시켜 전원적·향토적인 서정의 세계를 심화하였다. 한국적 정서를 간결한 언어의 아름다움으로 표현한 시인으로 평가받으며 《싸락눈》, 《강아지풀>, <먼 바다》 등의 시집을 발표했다. - P135

이용악, 1914년~1971년
일본 조치대학 재학 중인 1935년, 『시인문학」에 <패배자의 소원>을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시집 《분수령》과 《낡은 집》으로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당시 조선 민중의 궁핍한 현실을 예민한감수성과 풍부한 사상으로 작품에 녹여냈으며, 서정주 · 오장환과 함께 3대 시인으로 불렸다.
<오랑캐꽃》, 《이용악집》 등의 시집을 펴냈다. - P157

신석정, 1907년~1974년
중앙불교전문강원에서 불전을 연구한 신석정은 1931년 김영랑, 정지용 등과 함께 시문학』동인으로 활동하며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전개했다. 1939년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아직은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가 수록된 처녀 시집 <불>을 통해 전원시인, 목가시인이라는평가를 받으며 동양적 낭만주의에 입각한 작품을 남겼다. - P179

박목월, 1915년~1978년
본명 박영종, 1940년 정지용의 추천을 받아 『문장』에 <길처럼>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민족 정서를 깊이 있게 탐구하여 우리 민족의 감수성과 상상력의 높은 경지를 보여준 시인이다. 저서로는 박두진, 조지훈과의 3인 합동 시집 《청록집》과 개인 시집 <산도화>, <난· 기타>, <청담>등이 있다. - P207

이병기, 1891년~1968년
시조학자이자 국문학자였던 가람 이병기는 시조 부흥운동을 주도한 한국 대표 시조 시인이다. 주시경 선생의 조선어문법 강의를 들었고, 조선어연구회와 시조회를 발족해 민족 문학을보급하는 데 앞장섰다. 그는 시조는 낡은 규범을 그대로 따르는 게 아니라 창작하는 것이라고주장하며 새로운 운동을 펼쳤다. 저서로는 《가람시조집》, 《가람문선》 등이 있다. - P233

노자영, 1898년~1940년
낭만적 감상주의에 기초하여 1920년대 청춘기의 정서를 표현하는 시를 썼다. 시와 산문에서 소녀적인 취향의 문장으로 명성을 떨쳤다.

임화, 1908년~1953년
시인, 문학평론가, 영화배우, 혁명가로 활동하며 ‘조선의 랭보‘라 불렸다. 프롤레타리아 문학과 계급혁명 운동을 주도했다.

박두진, 1916년~1998년
청록파 시인 중 한 명으로 자연을 통해 시대의 부정적 가치를 비판하면서도 절대적 가치를 추구하는 작품을 발표했다.

함형수, 1916년~1946년
서정주, 김동리, 오장환 등과 동인지 「시인부락을 창간했다. 불안과 비애, 사랑과동경에 관한 30여 편의 작품을 남겼다.

조지훈, 1920년~1968년
민족 정서를 섬세하고 우아하게 노래한 시인으로 유명하다. 청록파 시인 중 한명으로 서정적이고 동양적인 미를 추구했다

이장희, 1900년~1929년
섬세한 감각과 심미적인 이미지를 작품에 표출시킨 시인이다. 주요 작품으로 <봄은 고양이로다>, <하일소경> 등이 있다. - P256

오장환, 1918년~1948년
15세 어린 나이에 등단하여 <성>, <헌사>, <병든 서울> 등의 시집을 냈다. 서정주. 이용악과 함께 ‘시단의 천재‘로 화려한 주목을 받았다.

박인환, 1926년~1956년
<목마와 숙녀>, <세월이 가면> 등의 시를 썼고, 도시 문명의 우울과 불안을 감상적인 시풍으로 노래했다.

이상화, 1901년~1943년
식민지 치하의 민족적 비애와 일제에 항거하는 저항의식을 기조로 삼은 민족주의시인이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의 침실로>가 유명하다.

신동엽, 1930년~1969년
<껍데기는 가라>를 쓴 1960년대 대표적인 민족주의 시인이자 참여 시인이다. 치일한 현실의식과 역사의식,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시를 썼다.

이육사, 1904년~1944년
시인이자 독립운동기. <광야>, <절정>처럼 강인하고 담대한 민족시 외에도 <청포도>처럼 서정적이고 목가적인 작품을 남겼다.

강경애, 1907년~1943년
사회의식을 강조한 사실적인 작품으로 억압받는 하층 여성을 대변했던 식민지시기 최고의 소설가다. 1930년대 문단에 독특한 위치를 차지했다. - P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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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실린 글들은 대부분 대한민국의 주류를 형성해온 사람들이 지워버리려 애쓴 기억들을 되살리는 날이 선 글들이었기에 몇몇 독자분들은 1권을 읽고 시궁창물을 뒤집어쓴 느낌이라는 항의 편지를 보내 주시기도 했다. 그분들께는 내 소년 시절의 길잡이였던 김수영의 절창 ‘거대한 뿌리’의 한 구절로 뒤늦은 답을 대신하고자 한다. “(…) 썩어빠진 대한민국이/ 괴롭지 않다. 오히려 황송하다 역사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 진창은 아무리 더러운 진창이라도 좋다/ 나에게 놋주발보다 더 쨍쨍 울리는 추억이/ 있는 한 인간은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

나는 여기에 모인 글들을 쓰면서 누구보다도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사람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는 없지만 이대로 끝낼 수 없는 문제들을 붙잡고 씨름하는 인권단체, 시민단체 활동가들에게 나의 역사이야기가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었으면 하는 마음을 가졌다. 그러나 이런 오만한 기대와는 달리 정작 나와 같이 일하는 베트남전 진실위원회의 차미경, 김숙경, 이수효 님,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 실현과 대체복무제도 개선을 위한 연대회의의 최정민, 정용욱 님을 비롯한 많은 활동가들께는 가난한 집 제사 돌아오듯하는 원고 마감을 맞추어야 한다는 핑계로 내 몫의 일을 못해 오히려 부담만 준 것 같아 미안함과 고마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나야 안정된 직장에 글을 쓰면 원고료에 인세 수입도 생기지만, 말도 안 되는 활동비와 근무 여건 속에서 자신의 인권은 반납한 채 남들의 인권을 위해 애쓰는 이런 분들과 함께할 수 있었던 것은 내게는 놋주발보다 더 쨍쨍한 추억을 쌓아가는 축복이었다.

대한민국사 2 | 한홍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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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용담에 환호하고 박수치던 아이들 중의 하나가 자라서 현대사 연구자가 되어 그 무용담에 가려진 진실의 참혹한 한 단면을 보게 되었을 때, 나는 그것을 외면할 수 없었다. 베트남 역사를 체계적으로 공부해보지는 못했으나, 베트남은 늘 내게 우리 역사를 비추는 마음의 거울이었다.

그 감춰진 역사

미국인들이 노근리를 비롯한 한국전에서의 민간인 학살을 인정하는 것이 고통스러운 일인 것처럼, 우리가 베트남에서의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의 진실과 마주서는 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다. 베트남 사람들에게 미안함을 전하는 마음은 일차적으로 우리가 피해를 준 사람들에게 사죄하는 것이지만, 꼭 피해자들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한번도 전쟁의 상처를 치유한 적 없이 전쟁을 정당화하고, ‘기념‘해 온 우리 내면의 상처를 극복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급보는 오보였다. 오보도 단순한 오보가 아니라 일본제국주의자들이 만주침략의 길을 닦으려는 목적으로 조선인과 중국인의 감정을 악화시키기 위해 제공한 허위정보에 속아 넘어간 역사적인 오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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