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옛 지도 한양도성도」와 「경조도」서울은 누가 뭐래도 우리나라의 상징이자 자존심이다. 대한민국의 수도로 자체 인구 1천만 명, 수도권까지 합치면 2천5백만 명, 총인구의 반이상이 삶을 영위하는 대도시다.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서울의 국가적 위상이 실로 너무 커서 ‘서울공화국‘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다. 옛날 당나라의 수도가 장안이었던 시절 "장안의 풀로 태어나는 것이 지방의 꽃으로 피어나는 것보다 낫다(生長安草 勝爲邊地花)"고했다는데 지금의 서울이야말로 모든 분야의 최고와 최하가 공존하면서모순 속에서도 우리 시대 문화를 선도해 나아가고 있다. - P15
서울의 옛 모습을 말할 때면 나는 2개의 고지도가 절로 머리에 떠오른다. 하나는 한양도성 안쪽을 그린 「한양도성도(漢陽都城圖)」다. 이를 보면 서울은 동서남북으로 낙산(125미터), 인왕산(338미터), 남산(265미터), 북악산(342미터) 등 반경 약 2킬로미터의 내사산(內四山)에 둘러싸여 더없이 아늑한 분지에 자리하고 있음을 명확히 알 수 있다. 산줄기를 타고부정형의 타원을 그리는 한양도성이 옛 한양의 영역을 명확히 드러내주는 울타리로 둘려 있어 한 나라의 수도로서 권위와 품위가 살아나고있다. - P17
역사도시로서 서울의 이미지와 도시 공간의 매력은 자리앉음새에서나온다. 우리는 너무도 익숙해 크게 의식하며 살지 않지만 서울처럼 도심의 사방이 산으로 감싸이고 그 남쪽으로 큰 강을 끼고 들판이 넓게 펼쳐져 있는 도시는 지구상 어디에서도 달리 찾아보기 힘들다. - P16
서울을 그린 또 하나의 고지도는 한양도성의 외곽까지 그린 경조도(京兆圖)다. 경조란 서울지역이라는 뜻이니 ‘수도권 지도인 셈이다. 이를 보면 북쪽의 북한산(미터), 동쪽의 용마산(348미터), 남쪽의 관악산(629미터), 서쪽의 덕양산(125미터) 등 반경 약 8킬로미터의 외사산(外四山)이 넓게 펼쳐져 있다. 도성 북쪽으로는 준수하고도 장중한 삼각산과 도봉산이 받쳐주고, 남쪽으로는 활모양의 긴 호를 그리면서 유유히 흘러가는 한강 남쪽의 드넓은 들판 너머에 관악산이 듬직한 수문장인 양안쪽을 지켜주고 있다. - P17
서울의 로케이션은 아주 독특하다. 사방에 뾰족하고 높고 힘찬 산들이 민가가 들어선 곳까지 뻗어 내려오면서 빙 둘러싸고 있는 것이서울의 모습이다. 이런 전망(view)을 가진 서울은 이 세상에서 우리가가장 아름답다고 꼽는 군주국 도시 명단에 들어가야 할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서울을 페르시아 수도 테헤란과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와 비교해보면 비슷한 점이 많다. - P21
그러나 서울에는 (…) 잘츠부르크처럼 웅장하고 엄숙한 기사의 성채가 없고, 테헤란의 (-) 위엄 넘치는 다마반드(Damavand) 산처럼 거대한산도 없다. 그러나 서울보다 고도가 약 300미터 높을 뿐인 남산에서 내려다보면 놀라운 광경이 펼쳐진다. - P22
우뚝 솟은 높은 산이 하늘과 맞닿았으니 한양은 하늘이 열리면서 이루어진 것이로다 굳건한 대륙은 삼각산을 떠받치고 있고 오대산에서 내려오는 긴 강물은 바다로 흘러든다 - P23
그리하여 착수 3개월 뒤인 12월 초에 정도전은 종묘사직단·경복궁등 왕실 건축은 물론 도로와 시장까지 신도의 기본 설계를 완성했다. 불과 3개월이라는 물리적인 시간 내에 오늘날 볼 수 있는 서울의 마스터플랜을 마련한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거의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 P35
한양도성의 공사 실명제 경복궁과 종묘가 완성된 것은 태조 4년(1395) 9월이었다. 이제 다음 공사는 무학대사가 건의한 한양도성의 축성이었다. 그해에는 마침 9월에윤달이 들어 다음 달인 윤9월부터 한양도성 축성에 들어갔다. 태조는 곧바로 ‘도성 조축도감(都城造築都監)‘을 설치하고 이 또한 정도전에게 기본 계획을 세우도록 했다. - P36
이렇게 결정된 한양도성은 북악산·낙산·남산·인왕산을 잇는 총 길이 59,500척(약 18.6킬로미터)에 평지는 토성(土城), 산지는 석성(石城)으로 축조하기로 계획되었다. - P36
한양도성의 성곽 축조공사는 총 길이 59,500척을 600척(약 180미터)씩모두 97구역으로 나누어 진행했다. 성곽 전체를 600척으로 나누면 97척하고도 1,300척이 남는데 이는 인왕산 자락의 자연 암반과 절벽을 성곽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 P36
명나라 사신 예검 倪謙 등루부 登樓賦
북악산이 뒤에 솟고 궁궐이 빛을 더하고 남산이 앞에 높고 성벽이 사면으로 둘렸네 높은 성벽 서쪽으로 구불구불둘려 있고 잇달아 휘둘려서 높고 낮게 동편으로 뻗어갔네 - P45
물을 말하노라면 개천이 동서로 흐르는데 은하수가 꽂힌 것 같고 한강수는 넓게 흘러 발해로 들어가니 물고기를 편하게 키워주고 논밭이 기름지게 해주네 - P46
수도 서울의 입지적 강점은 현대사회로 들어서면서 도시가 팽창할 수밖에 없었을 때 한강 남쪽에 얼마든지 뻗어나갈 수 있는 들판이 있었다는 점이다. 이것이 조선왕조의 한양에 이어 서울이 여전히 대한민국의수도가 될 수 있었던 이유다. 이 점은 로마나 아테네 같은 고도와 크게다르다. - P46
단적으로 말해 한양도성은 전란을 대비해 쌓은 성곽이 아니라 수도 한양의 권위와 품위를 위해 두른 울타리다. 집에 담장이 있고, 읍에 읍성이 있듯이 수도 서울에 두른 도성이다. 영어로 말해서 포트리스(fortress)가 아니라 시티 월(city wall)이다. 만약에 전쟁을 대비해 성곽을 축조했다면 석벽을 사다리꼴로 높이 쌓고 성곽 둘레에 해자를 깊게파서 두르는 등 겹겹의 방어시설을 구축했어야 했다. 도성이 울타리이기때문에 숭례문을 비롯한 관문도 사람들이 드나드는 통행문 이상의 기능을 하지 않았다. 동대문을 옹성처럼 두른 것은 전투를 의식해서가 아니라 풍수상허하다는 서울의 동쪽 지세를 보완한다는 의미였을 뿐이다. - P48
태조 이성계가 무학대사에게 이 자리가 도읍지로 어떠냐고 물었을 때그가 전제로 내세운 첫마디는 "도성을 쌓으면"이었다. 고려시대까지 평범한 고을이던 한양과 조선왕조가 수도로 건설한 한양의 차이는 도성이있고 없고의 차이였다. 그리고 생각해보라. 한양도성이 있는 서울과 없는 서울의 역사적 품격의 차이를. - P49
그 대신 한양도성은 자연과 인공이 어우러진 자연공원으로 서울 사람들이 사철 산책하고 등산하며 즐기는 곳으로 자리잡았다. 서울 사람들은성곽을 따라 걸으면서 도성 안팎의 풍경을 감상하고 봄가을로 꽃과 단풍을 음미했는데, 이를 ‘순성(城)‘이라고 했다. 풀어 쓰면 ‘성곽 순례‘쯤된다. - P54
이 순성을 가리키며 ‘도성을 한바퀴 빙 돌면서 도성 안팎의 풍경을 구경하는 멋있는 놀이‘라고 했고, 그의 아들인 유본예柳本藝)는 한경지략(漢京)에서 순성놀이를 좀 더 자세히 설명했다.
봄과 여름이 되면 한양 사람들은 도성을 한 바퀴 돌면서 주변의 경치를 구경했는데 해가 떠서 질 때까지 시간이 걸린다.
순성은 근대에 들어 의도적으로 도성의 일부를 허물기 전까지 이어져왔다. 1901년 경의선 부설의 자문을 위해 프랑스에서 초빙된 에밀 부르다레(Émile Bourdaret)는 그의 저서 『대한제국 최후의 숨결 (정진국 옮김, 글항아리 2009)에서 순성놀이를 이렇게 말했다. - P55
서울의 이 성벽은 하루 만에 한 바퀴를 다 돌 수 있다. 잘 걷고 산을잘 타는 사람에게는 아주 흥미로운 산책이 된다. 대단한 구경거리로서 비범한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특히 좋은 계절에 소나무와 꽃이 우거진 남산 비탈을 따라가면 흠잡을 데 없이 그림처럼 펼쳐지는 구석구석을 즐길 만하다. - P56
2007년 4월 5일 북악산이 개방되던 날 노무현 대통령은 기념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북악산의 도시공학적 가치를 돈으로 환산한다면 도대체 얼마나될까요? 이 산을 푹 떠서 뉴욕이나 파리에 내다 팔면 얼마를 받을까요? 이런 아름다운 공간을 대통령이 혼자 독차지하고 있다는 것이 너무도 미안하고 안타까웠습니다. 이제 문화재청의 정성 어린 정비작업을 거쳐 대통령이 된 지 4년 만에 완전 개방해 시민 여러분과 함께 오르게 되니 정말 기쁩니다. - P58
별것도 아닌 일이 그렇게 힘들었다 우선 내가 문화재청장에 부임하게 된 것부터 간단치 않았다. 참여정부 인수위는 1급 관리직이었던 문화재청장을 차관급으로 격상해서 전문가에게 맡길 방침이라며 내게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다만 문화재청은 현법기관이므로 차관급이 되려면 정부조직법을 개정해야 하니 좀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나는 구두로 내정을 받고 기다렸지만 당시는 여소야대였던지라 정부 뜻대로 되지 않아 1년이 지나도록 이 법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지않았다. 그동안 내 처지는 아주 애매해서 무얼 할 수도, 안 할 수도 없었다. 천신만고 끝에 정부조직법이 통과되었을 때는 노대통령의 탄핵사태가 일어났다. 이에 나도 아예 잊고 살았는데 6개월 지나 대통령이 업무에복귀한지 얼마 안 된 2004년 9월 1일 청와대 비서실에서 연락이 왔다. "유교수님, 비서실장께서 오전 중에 청와대로 급히 들어오시라고 합니다." "불가능합니다. 지금 제주도에 있습니다." "아이쿠, 큰일났네요. 다시 전화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얼마 뒤 전화가 다시 왔다.
"오늘 12시에 문화재청장으로 임명한다는 발표가 있을 겁니다." "어, 그거 안 되는데요." "왜요? 무슨 일이 있습니까?" "우리 집사람한테 물어봐야죠." "네-에?" 나는 집사람에게 전화를 걸어 이제 와서 문화재청장을 하라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냉정하기가 돌부처 같은 집사람은 잠시뜸을 들이더니 이렇게 말했다. "거긴 월급 얼만데?" 벼슬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일해볼 만한 직장‘이면 가서 해보라는 뜻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인수위의 구두발령‘ 후 1년 반이 지나 문화재청장이 되었다. 문화재청은 과연 일해볼 만한 직장이었다. 문화재의 소극적인 관리에서 적극적인 활용으로 정책을 바꾸어 먼저 경복궁 경회루를 43년 만에 개방하니 국민들이 좋아했고 경복궁도 자못 활기를 얻었다. 나는 한양도성의 북악산 성곽도 어떻게 하면 개방할 수 있을까 준비했다.
하산길에 성벽 밑에서 잠시 쉬는데 노대통령이 내게 말했다.
"유청장님이 신문사에다 글을 쓰겠다고 하면 지면을 내주겠지요? 어느 신문에는 이 좋은 산을 대통령이 독차지하면 되겠느냐고 호되게 비판하는 글을 좀 기고해주십시오."
대통령이 이처럼 북악산 개방에 뜻을 보인 것이 놀랍고 반가웠다.
"개방하라는 뜻이죠?" "물론이죠." - P60
성가퀴 따라가는 순성길 성곽 지붕인 성가퀴가 일정한 높이로 경사면을 따라 오르내리며 연이어 달리는 모습은 참으로 아름답고 장대한 설치미술이자 대지미술이다. 성곽의 구조는 매우 단순해 돌축대를 높이 쌓은 뒤 지붕을 얹은 형태인데 성벽 바깥쪽은 높고 안쪽은 사람 키 정도로 낮다. 성곽의 윗부분 담장을 여장(女墻)이라고 하는데 이를 순우리말로는 성가퀴라고 부른다. - P74
한양도성의 가장 멋진 부분은 역시 곡장(曲墻)과 치성 (雉城) 구역이다. 밖에서 성벽에 기어오르는 것을 방어하기 위해 성곽 중 일부를 자연지세에 맞춰 돌출시킨 것을 치성이라고 하는데 마치 꿩의 머리처럼 돌출되었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며, 성벽이 반원형으로 굽어 돌아가는 부분은 곡장이라고 한다. 외줄로 달리던 성곽이 곡장과치성에 이르러서는멋진 곡선을 그리며 한껏 그 자태를 뽐내니 이는 한양도성의 꽃이라 할수 있다. - P76
중늙은이 이상은 그 난리를 생생히 기억할 테니 긴 설명이 필요없겠지만 젊은 세대들은 아마도 그저 이름으로만 알지도 모르겠다. 특수훈련을 받은 북한의 무장공비가 청와대 습격을 목적으로 침투해 창의문 부근에서 군경과 총격전을 벌이기 시작해 무려 14일간의 추격 끝에 29명은 사살하고 1명은 끝내 도주하고 1명(김신조)만 생포한 뒤 끝난 사건이었다. 신출귀몰하는 그들의 민첩한 전투력은 많은 사람을 놀라게 했고이 사건을 계기로 1968년 4월 1일에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예비군이창설되었다. - P78
북악산 개방에 앞서 편의시설과 탐방로를 마련하면서 얼마 전 세상을떠난 ‘말하는 건축가‘ 정기용에게 환경에 맞춰 설계해달라고 의뢰했다. 정기용은 나와 함께 처음 현장답사를 나가 여기서 시내를 내려다보더니갑자기 "하하하!" 하며 통쾌하게 웃음을 터뜨리고는 한마디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하하하! 너희들이 마냥 까불었다마는 여기서 보니 부처님 손바닥에있었구나. 하하하! 멋모르고 고층빌딩이라고 높이 솟으려고 발버둥쳤지만 대자연 앞에선 개미 형상을 못 벗어나는구나. 어이, 유청장, 이 전망대이름이 뭐야?" "나도 알아보았는데, 없대요." - P79
"너무 오래 닫아두어 다 잊어버린 거겠지. 이렇게 좋은 전망대에 이름이 없다니. 북한산 백운대에 오른 것만큼 시원하구먼." "그러면 우리 여기는 청운대라고 부를까?" "그거 좋네." - P80
"정기용이 만난 프랑스의 한 건축가는 언컨트롤드(uncontrolled)라는표현을 쓰더래요. 건축은 공간을 컨트롤할 수밖에 없는데 한국의 건축과성곽을 보면 컨트롤한 것 같지가 않다는 뜻이었어요." "바로 그 점이 외국인의 눈에 확 들어오나 봐요. 그러한 자연과 인공의관계는 한국인들에게 익숙하지만 서구인들에겐 낯선 것이니 좀 더 깊이설명하고 내세워도 좋겠다는 의견을 주었어요." - P81
내 어린 시절의 자문밖 서울 사람들은 창의문이라면 몰라도 ‘자문밖‘이라면 금방 안다. 정식동네 이름은 부암동·신영동 구기동·평창동·홍지동이지만 나 어렸을 때는 그저 자문밖이라고 불렀다. 한양도성의 북소문인창의문(彰義門)의별칭이 자하문(紫霞門)인데 ‘자하문 밖‘을 줄여 그냥 자문밖이라고 부른것이다. 올해(2017)로 5회째를 맞이하는 이 동네 축제의 이름도 ‘자문밖축제‘라고 한다. - P87
창의문 바깥 울창한 숲과 계곡을 언제부터인지 자하동천(紫霞洞天), 줄여서 자동이라 불렀다. 동천(洞天) 이란 계곡을 일컫는 말로 신선이사는 곳이라는 뜻이 있는데, 이 그윽한 골짜기에 붉은 노을이 깃들 때 더욱 환상적으로 보였던지 자줏빛 자, 노을 (를 써 자동이라 했다. 이 계곡 덕에 창의문은 자연스레 자하문이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다. - P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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