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랑과 사랑으로 쓴 서울 이야기 1『나의 문화유산답사기』가 돌고 돌아 바야흐로 서울로 들어왔다. 내가어릴 때 단성사, 명보극장 같은 개봉관에 새 영화가 들어올 때면 ‘개봉박두(開封迫頭)‘와 함께 ‘걸기대(乞期待)‘라는 말이 늘 붙어 다니곤 했는데혹시 나의 독자들이 ‘답사기의 한양 입성‘을 그런 기분으로 기대했는지도 모르겠다. 다른 곳도 아닌 서울이니까. - P4
서울은 누가 뭐래도 대한민국의 자존심이자 세계 굴지의 고도중 하나다. 한성백제 500년은 별도로 친다 해도 조선왕조 500년의 역사도시이면서 근현대 100여 년이 계속되고 있는 현재진행형의 수도이다. - P4
서울 답사기는 모두 네 권으로 구상하고 시작했다. 첫째 권은 조선왕조의 궁궐이다. 역사도시로서 서울의 품위와 권위는 무엇보다도 조선왕조 5대 궁궐에서 나온다. 종묘와 창덕궁은 이미 1997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때만 해도 생각이 조금 모자랐던것 같다. 제대로 문화외교 전략을 펼쳤다면 서울의 5대 궁궐을 한꺼번에등재했어야 했다. 일본 교토(京都)는 14개의 사찰과 3개의 신사를 묶어서 등재했고, 중국의 소주(蘇州, 쑤저우)는 9개의 정원을 동시에 등재했다. 그리하여 세계만방에 교토는 사찰의 도시, 소주는 정원의 도시임을 간명하게 각인시키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서울은 궁궐의 도시이다. - P5
첫째 권의 제목으로 삼은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은 말한다‘는 창덕궁 존덕정에 걸려 있는 정조대왕의 글에서 빌려온 것이다. - P5
둘째 권은 조선왕조가 남긴 문화유산들을 답사한 것으로 한양도성,성균관, 무묘인 동관왕묘, 근대 문화유산들이 어우러진 덕수궁, 그리고조선시대 왕가와 양반의 별서들이 남아 있는 속칭 ‘자문밖‘ 이야기로 엮었다. 둘째 권의 제목은 ‘유주학선 무주학불(有酒學仙 無酒學佛)‘로 삼았다. 술이 있으면 신선을 배우고 술이 없으면 부처를 배운다는 이 글은 오래전에 흥선대원군의 난초 그림에 찍혀 있는 도장에서 본 것인데 석파정 답사기를 쓰면서 생각났다. - P6
아직은 구상단계이지만 앞으로 셋째 권은 인사동, 북촌, 서촌, 성북동등 묵은 동네 이야기로 내가 서울에 살면서 보고 느끼고 변해간 모습을담을 것이다. 도시는 시간의 흐름 속에 계속 바뀌어왔다. 과거 위에 현재가 자리잡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사라진 과거를 다시 되살리려는 현재의 노력도 있다. - P6
넷째 권에는 서울의 자랑인 한강과 북한산 이야기를 담을 예정이다. 서울이 확장되면서 편입된 강남의 암사동, 풍납토성, 성종대왕 선릉과중종대왕 정릉, 봉은사 그리고 사육신묘, 양천관아까지 한강변의 유적들과 북한산 비봉의 진흥왕순수비, 승가사, 진관사, 북한산성, 도봉서원터를 이야기할 생각을 하면 나도모르게 가슴이 열리는 기분이다. - P7
내가 삶의 충고로 받아들이는 격언의 하나는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는 아프리카인의 진득한 마음자세이다. 어쩌면그렇게 독자들과 함께 가고자 했기 때문에 답사기가 장수하면서 이렇게멀리 가고 있는지 모른다. 나는 계속 그렇게 갈 것이다. - P9
조선왕조의 상징적 문화유산 인간이 자연계의 어떤 동물과도 다른 점은 자연을 개조하며 살아가면서 문화를 창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인간이 만들어낸 문화는 정신문화와 물질문화 두 가지가 있는데 정신문화는 무형유산으로 전하고, 물질문화는 유형유산으로 남는다. - P15
조선왕조 500년이 남긴 수많은 문화유산 중에서 종묘(宗廟)와 거기에서 행해지는 종묘제례(宗廟祭禮)는 유형, 무형 모두에서 왕조문화를 대표한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가 모든 것을 다 말해주지는 않지만 종묘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 (1995) 유형유산 중하나이고, 종묘제례는 2001년 유네스코 세계 무형유산에 제일 먼저 등재되었다. 이는 종묘가 조선왕조의 대표적 문화유산일 뿐만 아니라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는 유네스코의 국제적인 시각으로 볼 때도 형식과 내용 모두에서 위대한 문화유산임을 확인해준 셈이다. - P15
승효상이 본 월대 건축가 승효상은 종묘의 박석을 두고 "불규칙하지만 정돈된 바닥 박석들은 마치 땅에 새긴 신의 지문처럼 보인다"라고 찬탄해 마지않았다. 사진은 승효상이 촬영한 월대의 박석이다. - P21
일찍이 일본 건축계의 거장이었던 시라이 세이이치(白井晟一, 1905~83)는 1970년대에 이 종묘를 보고 "서양에 파르테논 신전이 있다면 동양엔 종묘가 있다"라고까지 극찬한바 있다. 이는 이후 많은 일본의 건축가와 건축학자가 종묘를 방문하는계기가 되었다. - P23
"15년 만에 보아도 감동은 여전하군." 소감을 묻는 질문에 그는 조용히 대답했다. "정말 아름답지 않은가. 아름다운 것은 말로 설명할 수 없다. 마치 아름다운 여성이 왜 아름다운지 이유를 대기 어려운 것처럼. 이곳에 들어서는 순간 누구나 그것을 다 느낄 텐데." - P25
"이 아래 공간과 위의 공간은 전혀 다른 곳이란다. 그 차이를 생각하면서 즐기렴." - P25
"이같이 장엄한 공간은 세계 어디서도 찾기 힘들다. 비슷한 느낌을 받았던 곳을 굳이 말하라면 파르테논 신전 정도일까?" - P26
"흥미로운 것은 이것이 미니멀리즘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심플하고 스트롱하지만 미니멀리즘이 아니다. 간단한 것을 미니멀리즘이라고 많은 사람이 오해하는데, 미니멀리즘은 감정을 배제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에서는 살아 있는 느낌이 든다. 당시 이것을 만든 사람들의 감성과 열정이 느껴지지 않는가." - P27
"한국 사람들은 이런 건물이 있다는 것을 감사해야 한다. 자기만의 문화를 이해하고 존경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 - P27
사직에서 사(社)는 토지의 신, 직(稷)은 곡식의 신을 말한다. 즉 백성(인간)들의 생존 토대를 관장하는 신을 받들어 모신 것이다. 한편 종묘는 왕의 선조들을 모신 사당을 말한다. - P28
종묘는 조종(祖宗, 임금의 조상)을 봉안하여 효성과 공경을 높이는 것이요, 궁궐은 국가의 존엄성을 보이고 정령(政令, 정치와 행정)을 내는것이며, 성곽(城)은 안팎을 엄하게 하고 나라를 굳게 지키려는 것으로, 이 세 가지는 모두 나라를 가진 사람들이 제일 먼저 해야 하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천명(天命)을 받아 국통(國國)을개시하고 여론을 따라 한양으로 서울을 정했으니, 만세에 한없는 왕업의 기초는 실로 여기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 P29
종묘는 조선왕조 역대 왕과 왕비의 혼을 모신 사당으로 일종의 신전이다. 유교에서는 인간이 죽으면 혼(魂)과 백(魄)으로 분리되어 혼은 하늘로 올라가고 백은 땅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무덤(墓)을 만들어 백을 모시고 사당을 지어 혼을 섬긴다. 후손들은 사당에 신주(神主)를 모시고 제례를 올리며 자신의 실존적 뿌리를 확인하고 삶의 버팀목으로 삼는다. 역대 임금의 신주를 모신 종묘는 곧 왕이 왕일 수 있는근거였다. - P28
건국 초의 종묘 건설 이성계가 역성 (易姓)혁명에 성공하여 조선의 건국을 선포한 것은 1392년 음력 7월 17일이었다. 제헌절은 바로 이 날짜에서 유래한 것이다. - P29
특히 태종은 건축에 높은 식견과 안목을 갖고 있었다. 그는 미천한 신분의 박자청(朴子靑)을 공조판서에까지 등용해 수도 한양의 건설 공사를 주도하게 하였으며, 신하들이 박자청의 무리한 공사 진행을 성토할때에도 그를 끝까지 보호해주었다. 창덕궁 인정문 밖 행랑이 잘못 시공되었을 때는 그를 하옥시키기도 했지만 이내 다시 풀어주었다. - P31
조종(祖宗)을 위한다면서 토목공사를 어렵게 여겨 옛 전각을 사용한다는 것은 예의가 아니니, 마땅히 옛날의 제도를 따라서 대실(大室, 정전)의 서쪽에 별묘를 세우라. 별묘의 이름은 마땅히 영녕전(永寧殿)으로 하라. 그 뜻은 조종과 자손이 함께 편안하다는 뜻이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3년(1421) 7월 18일자) - P3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