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미양요, 350명 전사했어도 격퇴?

우리와 미국은 참으로 특별한 관계를 맺어오고 있다. 두 나라의 기구한 만남은 전쟁으로 시작되었다. 1871년의 이른바 신미양요(辛未洋擾).

이른바 ‘거중조정’(good offices) 조항인데, "만약 다른 열강이 체약국 정부에 대해 부당하게 또는 억압적으로 대하는 일이 있을 때에는 체약당사국은 그러한 사건에 관하여 통지를 받는 대로 원만한 타결을 위하여 거중조정을 다함으로써 그 우의를 표시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김규식은 "자국의 이타주의 지향성과 민주주의 원칙의 범세계적 적용을 그토록 떠들어온 위대한 미공화국"이 가면을 벗어던지고 "영국·프랑스·일본 등 악명 높은 3대 흡혈귀 국가와 가증할 4강협정을 체결함으로써" 흡혈귀 국가가 되었다고까지 말했다.

학살의 무덤 위에 선 대한민국을 장악한 친일파들은 무럭무럭 자라났다. 한탄강 일대의 들쥐들이 들녘을 뒤덮은 전사자들의 시체를 파먹고 유행성 출혈열균을 키워갔듯 학살의 무덤 속에서 후천성 반미결핍증 병원균은 걷잡을 수 없이 배양되었다.

2002년 12월14일 시청 앞 집회에서 촛불시위를 처음 제안한 ‘앙마’라는 아이디를 쓰는 청년은 ‘여러분의 오른손을 들어 왼쪽 가슴을 만지면 보이지 않는 손, 바로 여러분의 양심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라는 말로 일침을 놓았지만, 나는 선후배 동료들이 숱하게 거쳐간 1970~80년대 공안기관의 어두컴컴한 조사실을 떠올렸다.

10년 전 또는 100년 전 범죄행위를 현재 우리는 당당히 우리의 권리로 누리고 있지 않은가? 역사는 그렇게 발전해가는 것이다. 이루지 못할 것 같은 불온한 꿈을 이뤄가면서.

미국의 오만은 국경이 없다. 그래서 우리의 분노도 국경이 없다. 미국의 오만에 상처받은 사람들, 우리는 모두 하나다. 촛불의 힘으로, 아무도 감히 경험해보지 못한 평화의 힘으로 우리는 하나가 되고 있다.

징병제도는 국가와 시민 간의 계약에 의한 것이어야 한다. 국가가 시민들에게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한다면 국민병제도의 장점을 살릴 길이 없다. 더구나 바람의 아들, 신의 아들, 장군의 아들 등 특권층을 중심으로 병역비리와 기피가 판을 치고, 사람의 아들들과 어둠의 자식들은 현행 징병제가 국민개병제가 아니라 ‘빈민개병제‘라고 비아냥거리는 현실을 언제까지 두고 볼 것인가? 이제 우리는 민주주의의 발전, 시민사회의 성숙, 경제발전, 남북관계의 개선에 걸맞은 병역의무를 시행하는 제도를 만들기 위해 현행 징병제도를 근본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

프랑스가 신분의 차이를 넘어서서 국민개병제에 입각한 국민군대를 형성한 성과는 나폴레옹의 유럽 석권으로 나타났다.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국가의 생존을 위해서라도 시민계급과 농민계급에 많은 정치적 양보를 하면서 국민개병제에 입각한 징병제도를 수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럽에서 징병제도 발전의 역사는 한편으로는 참정권 등 시민적 권리의 확대과정이기도 했다.

징병제도는 국가와 시민 간의 계약에 의한 것이어야 한다. 국가가 시민들에게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한다면 국민병제도의 장점을 살릴 길이 없다. 더구나 바람의 아들, 신의 아들, 장군의 아들 등 특권층을 중심으로 병역비리와 기피가 판을 치고, 사람의 아들들과 어둠의 자식들은 현행 징병제가 국민개병제가 아니라 ‘빈민개병제’라고 비아냥거리는 현실을 언제까지 두고 볼 것인가?

이제 우리는 민주주의의 발전, 시민사회의 성숙, 경제발전, 남북관계의 개선에 걸맞은 병역의무를 시행하는 제도를 만들기 위해 현행 징병제도를 근본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

이런 방대한 군은 1950년대에는 국가예산의 40% 이상을, 1980년대 후반까지 30% 가량을 할당받아 물질적으로 한국사회의 다른 어떤 집단과도 비교할 수 없는 풍요를 누렸다.

상류층 자제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줄줄이 병역면제를 받는 현실에서 우리의 국민개병제는 허울뿐이고, 사실은 ‘빈민개병제’가 되었다는 비아냥거림이 나온 지 오래다. 현역 복무자들의 상대적 박탈감은 폭발 직전이다.

조선의 법제상 양반이란 신분의 개념이 아니라 문반과 무반의 관료를 뜻하는 것이며, 법제상의 신분은 양반을 포함한 양인과 천민만을 구분하는 양천제(良賤制)였다. 그러나 이 제도는 하나의 이상이었을 뿐, 시간이 흐르면서 양반은 특권귀족화하였다.

중종대에 이르면 당대의 권신 김안로(金安老)가 향교는 군역을 피하려는 자의 소굴이라고 개탄했을 정도로 향교는 교육적 기능을 상실했다. 더구나 군역면제의 특권이 있는 양반들은 평민들이 군역을 피하려고 득시글대는 향교에 자제들을 보내는 것을 치욕으로 여겼다. 17세기 이후 사교육기관인 서원이 발달하고, 공교육기관인 향교의 교육 기능이 붕괴한 것도 군역제도와 깊은 관련이 있다.

다산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비꼬는 말이 아니라 진지하게 차라리 그대로 두는 것이 더 좋다고 말했다. 아전이라는 것들은 일이 없으면 먹을 것이 없고, 일이 있어야 먹을 것이 생기니, 군정을 닦는다고 호적을 재정리하면 아전의 이익이 될 뿐 오히려 농민에겐 부담이 될 뿐이라서, 군정수는 현명한 수령이 할 짓이 못 된다는 것이었다. 다산 같은 철저한 개혁가도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지 모를 정도가 된 것이다.

병역의무의 형평성을 파괴하여 합법적으로 특혜받는 사람들을 양산하거나, 병역의 의무를 진 젊은이들을 정권연장의 도구로 삼은 것이다. 병역특례 제도가 특권층을 위한 수단으로 쓰인 것은 전두환 집권 이후 석사장교 제도가 도입되면서 절정에 달했다.

4개월 훈련에 2개월 전방실습만 받으면 예비역 소위로 제대하는 엄청난 특혜가 있는데 굳이 위험부담을 감수하면서 서류를 조작하거나 신검 판정을 위해 뇌물을 쓸 일도 없었던 것이다. 말 많은 이 제도는 전두환·노태우 두 군사독재자의 아들들이 혜택을 본 뒤 1990년 대학원 입학자들을 마지막으로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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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근리 학살을 거론하고, 맥아더의 동상에 대해 시비를 거는 게 배은망덕이라고? 입장을 바꾸어 북한이 만일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의 동상을 세웠다면 얼마나 꼴불견일까? 노병은 죽지 않고 사라질 뿐이라지만, 죽어서도 사라지지 않는 노병의 동상을 보며 나는 자꾸 숨이 막힌다.

"양쪽은 마치 휴전이 아니라 전쟁선포에 합의하는 것처럼 보인다"라고 보도했다. 정전체제하의 또 다른 전쟁은 이렇게 시작되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이제는 전쟁의 달 6월을 기념하지 말고 불완전하나마 전쟁의 정지를 가져온 7월을 기억하자. 2003년은 정전협정 체결 50돌이 되는 해다. 우리는 그 불완전한 50돌을 어떻게 보내고 있는가?

가해자 쪽인 주한미군이 뻔뻔스럽게 나온 데는 역사적·구조적 배경이 있다. 약칭으로는 주둔군 지위에 관한 협정 또는 소파(SOFA·Status of Forces Agreement), 정식명칭으로는 ‘대한민국과 아메리카 합중국 간의 상호방위조약 제4조에 의한 시설과 구역 및 대한민국에서의 합중국 군대의 지위에 관한 협정’이라는 아주 긴 이름의 협정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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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구 교수(姜禎求, 1945년 3월 18일~)는 대한민국의 사회학자이다. 동국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를 역임하였다. 후학을 양성하면서 통일 운동에도 참여하였다. 1945년 3월 18일(79세)
일제강점기 조선 경상남도 창녕군 출생

김대중 정부·노무현 정부 시절
2001년 8월 17일 8·15 축전 때 만경대에 들러 방명록에 ‘만경대 정신 이어받아 통일 위업 이룩하자.‘라고 써 친북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그 방명록으로 말미암아 그는 국가보안법상의 찬양고무죄에 저촉돼 구속 기소되었다가 보석으로 풀려났다.


만경대의 사립문

강 교수는 만경대혁명학원을 떠올리고 만경대정신을 방명록에 썼지만, 나는 아마도 김일성이 회고록에서 서술한 바 있는 만경대의 사립문 이야기를 썼을 것이다. 김일성은 “이 집에서 할아버지, 할머니를 하직하고 고향을 떠날 때에는 모두들 나라를 찾고서야 돌아오겠다면서 씩씩하게 사립문을 나섰”지만 “그들 가운데에서 조국으로 돌아온 것은 나 하나뿐이었다”면서, “나는 그때부터 남의 집 사립문에 들어설 적마다 이 사립문으로 나갔다가 돌아온 사람은 몇이며 돌아오지 못한 사람은 얼마일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하였다. 이 나라의 모든 사립문들에는 눈물에 젖은 이별의 사연이 있고 살아서 돌아오지 못한 혈육들에 대한 목메인 그리움과 뼈를 에는 상실의 아픔이 있다”고 회고했다. 이국 땅에서 쓸쓸히 병사한 아버지 어머니, 유해도 찾지 못한 전사한 동생 철주, 그리고 옥사한 작은삼촌 김형권, 13년 8개월의 오랜 감옥생활 끝에 죽기 직전 병보석으로 풀려난 외삼촌 강진석 등을 그리면서 김일성은 만경대의 사립문을 보며 독립을 찾기 위해 나선 모든 가정의 사립문에 서린 아픔을 그렸던 것이다.

필자가 만경대의 사립문을 보며 살아 돌아오지 못한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목메인 그리움과 뼈를 에는 상실의 아픔’을 떠올리며 방명록에 글을 남겼다면 필자도 결코 온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영락없이 김일성 일가의 ‘날조된’ 항일투쟁을 찬양한 몸이 되었을 터이니 말이다.

대한민국사 1 | 한홍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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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적게 잡아도 50만, 어쩌면 100만 명이 ‘빨갱이’라는, ‘반동’이라는 손가락질 하나로, 심지어 그런 가족을 두었다는 이유만으로 목숨을 잃어야 했다.

모든 학살은 잘못된 것이다. 어떤 학살은 괜찮고 어떤 학살은 잘못된 것이 아니라 모든 학살은 다 나쁜 것이다. 설혹 빨갱이라 할지라도 그가 민간인이라면 국가권력이나 국가의 비호를 받는 무장집단이 한국전쟁 전후의 빨갱이사냥처럼 그런 식으로 마구 죽여서는 안 되는 것이다.

연좌제와 국가보안법의 그늘 아래 빨갱이 자식으로 모진 목숨을 이어가야 했던 유가족들의 이야기야 어찌 무딘 필치로 제한된 지면에 담을 수 있으랴. 이 땅에 살기 위해 부모를 처형한 우익반공단체의 열성 간부가 된 아들의 심경을 누가 헤아릴 수 있으랴.

한국 현대사에는 두 가지 건드려서는 안 되는 금기가 있었다. 하나는 친일파 청산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바로 민간인 학살이다. 그런데 이 두 사건은 서로 분리된 별개의 문제가 아니라 깊이 연결된 문제이기도 하다. 이 두 가지 문제가 상호 관련되어 있다 함은 친일세력이 민간인 학살의 가해자나 지원자로 등장했다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한국전쟁 전후의 민간인 학살에서 최대규모의 학살인 보도연맹원 집단처형, 크고 작은 집단학살을 숱하게 낳은 ‘공비토벌’ 전술, 그리고 학살의 주체로 등장한 군과 경찰, 청년단에서는 일제의 잔재가 짙게 묻어난다.

더불어 사는 사회란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나 나에게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산다는 것이 아니다. 더불어 사는 사회는 내가 싫어하고 미워하는 사람들, 어딘가 부족하고 힘없는 사람들, 소수자들과 더불어 산다는 것이다.

한국전쟁 이후 우리 사회에서 자기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 또는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에게 빨갱이, 공산주의자라는 등의 딱지를 붙이는 것은 너무나 일상화 되어 있다. 정권교체가 이루어지고 절차적 민주주의가 진전되고 있음에도 이 나쁜 버릇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특히 민주화의 진전과 시민사회의 성장에 따라 수구세력들의 위기감이 진전되면서 이 나쁜 버릇이 오히려 도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동학농민군을 비난하면서도 그들의 어려운 처지에 공감하고, 그들을 난에 이르게까지 한 학정을 더 매섭게 비난한 사람이 이건창이다. 창강 김택영(滄江 金澤榮)이 고려와 조선 천년을 통해 아홉 사람의 문장가를 꼽았을 때 그 마지막을 장식한 이가 바로 이건창이었다. 그는 조선 후기 사상사를 화려하게 장식한 강화학파의 중심인물이기도 했다.

황현은 시골 선비라 차별을 받아 과거에 떨어지고 생원시에 장원급제하여 부모의 원을 풀었으나 도무지 벼슬길에 나갈 마음이 없었다. 도깨비 나라의 미친놈들 속에 들어가 미친 도깨비가 되라 하느냐며 황현은 초야에 남았다.

"그대 홀로 누운 것 서러워 마소, 살아서도 그대는 혼자가 아니었던가."(無庸悲獨臥 在日已離群)

고향에 돌아온 황현에게 끝내 나라가 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그는 아편을 준비했다. 그 밤 조선의 마지막 대시인인 황현은 절명시(絶命詩)를 짓는다. "가을 등불 아래 책을 덮고 옛일을 생각하니, 지식인이 된다는 게 참으로 어려운 일이로다."(秋燈俺券懷千古 難作人間識字人) 몇 해 전 첫 손자를 보았을 때 갓난아이에게 글 아는 사람이 되어라 하고 축원해 주었던 그 황현이었다.

그들만이 아니었다.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이석영(李石榮), 이회영(李會榮), 이시영(李始榮) 형제들. 모두 판서의 자제로 한 분은 양자로 가서 영의정의 아들이요, 한 분은 고종의 측근이요, 다른 한 분은 영의정 김홍집의 사위였다.

그 6형제가 지금으로 치면 재벌 부럽지 않을 많은 재산을 처분하여 만주로 가 독립운동의 길에 나섰다.

그런 면에서 보면 밴댕이 소갈딱지보다 더 속좁은 우리 사회는 통일을 위한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다. 남쪽의 ‘관제 주사파’에 대해 수구세력은 호들갑을 떨지만, 우리가 함께 통일을 이루려 하는 이북에는 철두철미한 주사파가 2천만 명이나 있다.

친일파들은 정말 목숨을 걸고 민족 대 반민족의 대립구도를 이념이라는 전혀 다른 기준이 적용되는 좌우대립의 구도로 바꾸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진정 통일을 원한다면 북은 남을 고무·찬양해야 하고 남은 북을 고무·찬양해야 한다. 북은 남이 거둔 물질적 성과를 단군 이래 최대의 풍요로 찬양해야 한다. 남은 또 북이 큰 나라들에 대해 큰소리쳐온 역사를 연개소문 죽고 처음이라고 부추겨주어야 한다.

요즈음도 연좌제란 말을 많이 쓰는데 한자로는 緣坐制와 連坐制 두 가지가 혼용되다가 요즈음은 連坐制로 굳어져 있는 형편이다. 그런데 緣坐라 함은 혈연관계로 인해 당사자가 아닌 친족들이 처벌받는 것이고, 連坐는 스승과 제자, 친구 등 비혈연적 관계에 의해, 또는 다른 관리의 문제에 연대책임을 지는 것이다.

다산 정약용이 『목민심서』에서 분명히 지적한 바와 같이 이는 잘못된 것이다. 원래 3족이란 3대에 걸친 친족으로 아버지와 아버지의 형제인 조족(祖族), 형제와 그 소생인 부족(父族), 그리고 본인의 아들 및 손자를 가리키는 기족(己族)을 말하는 것이다.

조선왕조의 법률체계의 모법이 되는 『대명률직해』나 『경국대전』을 비롯한 각종 법전에서 연좌제의 적용을 받는 친족의 범위도 친가, 외가, 처가의 3족이 아니라, 조족, 부족, 기족의 3족으로 국한되어 있다.

아끼던 김일성이 공산주의 사상에 물들어 화성의숙에서 중퇴하려 하자 최동오는 몹시 노여워하였지만, 결국 "조선을 독립시키는 주의라면 나는 민족주의건 공산주의건 상관하지 않겠네. 아무튼 꼭 성공하게"라며 격려해 주었다고 한다.

‘운동권‘의 반미와 청소년, 네티즌들의 반미는 그렇게 만나고 있었다. 아직까지 미군보고 당장 나가라고 하는 사람은 그 엄청난 촛불의 바다에서도 소수일 것이다. 그러나 ‘이따위로 하려면 나가라‘는 점에 공감하지 않는 사람들은 없어 보였다." 어머님, 아버님, 힘내세요, 우리가 있습니다"를 외칠 때 우리는 서로 반미냐 미국 반대냐를 따지지 않았다. 호들갑을 떠는 수구세력에 하나가 되어 ‘반미감정 좀 가지면 어때?‘라고 모두 외치는 듯했다.

『임진왜란과 한중관계』의 저자인 한명기 교수는 재조지은을 강조할수록 당시 권위가 실추된 선조나 대신들은 어려운 입장이 다소나마 완화될 수 있었다고 그 정치적 의미를 분석했다.

즉, "위기를 극복해낸 공로의 대부분을 명군의 것으로 돌리고, 나아가 명군을 불러온 주체가 자신들임을 부각함으로써 전쟁 초반의 연이은 패배 때문에 실추된 권위를 어느 정도 만회할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재조지은을 강조하면 이순신이나 권율 같이 정규군을 이끈 명장들이나 김덕령(金德齡), 곽재우(郭再祐) 등 의병을 이끈 진짜 구국영웅들의 역할과 의미는 축소되고, 명군을 불러들인 조정 신료들이나 왕을 호종한 사람들의 정치적 입장이 강화된다.

실제로 임진왜란이 끝난 뒤 전공을 세운 사람들을 공신으로 봉한 선무공신(宣武功臣)에는 이순신·권율 등 18명만이 책봉되었는데 그나마 의병장은 단 한 명도 끼지 못했다.

반면 선조를 따라 의주까지 도망가서 명나라에 파병을 청해 불러들인 공로로 정곤수(鄭崑壽)를 일등공신에 봉한 것을 필두로 무려 86명이 공신이 되었다.

명군의 노략질이 오죽했으면 민중 사이에 왜군이 얼레빗이라면 명군은 참빗이라는 말까지 돌았을까? 명군의 행패가 심해지자 민심의 이반은 극에 달해 "어찌하여 왜적이 오지 않아 이런 고통을 겪게 하는가?"라는 한탄이 나올 정도였다.

임재해 교수는 당시 민중은 "대국과 소국 간의 종속관계란 혈연의 친연성이나 혈맹관계 운운으로 호혜평등의 원칙에 의한 선린이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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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이는 모든 방법이 동원된 한국전쟁

참으로 죽이는 방법도 가지가지였다. 때려죽이는 타살(打殺), 구살(毆殺), 주먹으로 쳐죽이는 박살(搏殺), 몽둥이로 때려죽이는 박살(撲殺), 격살(擊殺), 쏘아죽이는 사살(射殺), 총살(銃殺), 포살(砲殺), 칼로 찌르거나 베어죽이는 자살(刺殺), 찢어죽이는 육살(戮殺), 육시(戮屍), 생매장해 죽이는 갱살(坑殺), 바퀴로 치어죽이는 역살(轢殺), 단근질해 죽이는 낙살(烙殺), 밟아죽이는 답살(踏殺), 깔아죽이는 압살(壓殺), 독을 먹여죽이는 독살(毒殺), 껍데기를 벗겨죽이는 박살(剝殺), 끓는 물에 삶아죽이는 팽살(烹殺), 불에 태워죽이는 분살(焚殺), 소살(燒殺), 베어죽이는 참살(斬殺), 여기서도 머리를 베어죽이는 참수(斬首), 허리를 끊어죽이는 요참(腰斬)이 있다. 또 물에 빠뜨려 죽이는 익살(溺殺), 수장(水葬), 잡아죽이는 포살(捕殺), 굶겨죽이는 아살(餓殺), 목졸라 죽이는 교살(絞殺), 액살(縊殺), 채찍질하여 때려죽이는 추살(捶殺), 철퇴로 쳐죽이는 추살(鎚殺), 몽둥이로 쳐죽이는 추살(椎殺), 발로 차죽이는 축살(蹴殺), 높은 데서 내던져 죽이는 척살(擲殺), 곤장으로 때려죽이는 장살(杖殺), 폭탄을 터뜨려 죽이는 폭살(爆殺), 기둥에 묶고 창으로 찔러죽이는 책살(磔殺), 꾀어내어 죽이는 유살(誘殺), 죽일 사람이 없을 때 가족 등 다른 사람을 대신 죽이는 대살(代殺) 등 인류의 역사에 있었던 사람 죽이는 방법이 모두 동원된 것이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의 현실이었다.

죽이는 방법도 가지가지고, 학살이 일어난 곳도 전국 방방곡곡이지만, 한 가지 공통점은 문자 그대로 죽은 자들의 뼈도 못 추렸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사 1 | 한홍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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