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선암 돌개구멍 요선암의 강바닥은 화강암 너럭바위이기 때문에 돌개구멍이 유난히 만질만질하고 보는 위치에따라 다양한 모습을 연출하여 더욱 자연의 신비로움과 장엄함을 느끼게 한다. 요선암이 있는 주천강변 약 200미터구간의 강바닥은 천연기념물 제543호로 지정되어 있다. - P36
그 구멍이 지름 1미터 깊이 2미터가량 되고 생김새가 다양하다. 화강암에 자연스럽게 뚫린 이런 구멍을 지질학에서는 포트홀(pothole)이라고 한다. ‘둥근 항아리 모양의 구멍‘이라는 뜻일 텐데 순우리말로는 ‘돌개구멍‘이라고 한다. 이런 돌개구멍은 하천의 상류지역에서 빠른 유속으로 실려온 자갈들이 강바닥의 오목한 암반에 들어가 물결의 소용돌이와 함께 회전하면서암반을 마모시켜 이루어진 형상이다. 얼마나 긴긴 세월 돌이 구르고 맴을 돌았다는 이야기인가. - P37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1970년대 유신독재 시절 많은 학생·노동자·지식인들이 민주화를 외치다 투옥되었다. 그 고난의 세월에 이들에게 큰 힘이 되어준 것은 무료변론을 맡아준 변호사들이었다. 이분들은메마른 세상의 소금 같은 희망이었다. 우리는 이분들을 인권변호사라고부르고 민변(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은 1988년에 이분들의 정신을 이어받은 변호사들이 결성한 것이다. - P39
적악산(치악산) 동북쪽에 있는 사자산은 수석(水石, 계곡이 30리에걸쳐 있으며, 주천강의 근원이 여기이다. 남쪽에 있는 도화동과 무릉동도 모두 계곡의 경치가 아주 훌륭하다. 복지(福地)라고 할 만하니 참으로 속세를 피해서 살 만한 땅이다. - P41
법흥사는 바로 그 사자산 턱밑에 자리잡고 있다. 그래서 사자산 법흥사라고 부른다. 법흥사가 등지고 있는 사자산은 영월 ·횡성·평창에 걸친험준한 산이다. 사자산이라는 이름은 법흥사가 창건될 때 불교를 수호하는 상징적 동물인 사자를 일컬어 바꾼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원래 전래되던 이름이 사재산(四財山)이었다는 전언도 있다. 네 가지 재화가 있다는 것인데, 이는 산삼 꿀 옻나무 흰 진흙이란다. - P41
법흥사의 옛 이름은 홍녕사(興寧寺)다. 이 흥녕사는 우리 불교사에서두 가지 기념비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하나는 자장율사가 모셔온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진신사리 4대 봉안처‘ 중 한 곳이라는 점이다. 나머지 세 곳은 양산 통도사, 태백산 정암사, 오대산 상원사다. 혹은설악산 봉정암까지 여기에 넣어 5대 봉안처라고 일컫기도 한다. 자장율사가 귀국한 것은 선덕여왕 12년(643) 이고 율사가 이 절을 창건할 때의이름이 흥녕사이다. - P42
또 하나의 의미는 누누이 말해왔듯 9세기 후반 하대신라의 구산선문중 하나라는 사실이다. 구산선문을 말할 때는 개창조와 법통이 중요한데 개창조는 징효대사(澄曉大師) 절중(折中, 826~900)이고 법통은 화순 쌍봉사의 철감(澈鑒國師) 도윤(道允 798-868)을 이어받았다. 그리고산문(山)의 이름은 사자산이라 했다. - P42
세상을 움직이는 주도적인 이데올로기가 불교에서 유교로 바뀐 것은 어쩔 수 없는 시류였다고 하겠지만 당시엔 문화재라는 개념이 없어 폐불정책이 결국 엄청난 문화재 파괴로 이어졌다는 것은 아픈 얘기다. - P43
그러나 이는 우리 역사만의 상처가 아니다. 일본은 19세기 메이지시대에 폐불훼석(廢佛毁釋)이라는 광란의 세월이 있어 엄청난 불교 문화재 파괴가 있었고, 오늘날에도 탈레반에 의한 불상 훼손과 이슬람 국가(IS)의 고대 신상 파괴를 볼 수 있으니 그저 무서운 것이 이데올로기일뿐이다. - P43
그런데 내가보기에 이것은 아주 잘못된 문화재 지정이다. 이런 경우는 승탑과 탑비를 일괄 유물로 지정하는 것이 옳다. 더욱이 승탑이 탑비와 함께유존한다는 사실은 문화재적 가치를 한층 높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화재청장 시절 이처럼 잘못 지정된 것을 고쳐보려고 시도한 적이있었다. 그러나 이런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고 이걸 모두 정정하면 교과서 - 백과사전 · 지도 등을 모두 바꿔야 하는 사회적 경비가 만만치 않아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이는 언젠가는 사회적 합의하에 한번은 정정해야할 사항임에 틀림없으니 현명한 후손들이 나서서 해주기를 부탁한다. - P45
징효대사 승탑 징효대사 승탑은 하대신라에 유행한 평범한 팔각당 형식으로 기단부 탑신부 · 상륜부로 이루어졌다. 네모난 지대석 위에 장구 모양의 기단부, 팔각당의 탑신과 지붕돌을모두 갖추고 있으며, 탑신에는 문짝과 자물통이 새겨져 있고 지붕돌의 모서리에는 귀꽃이 높이솟아 있다. - P46
징효대사 탑비 높이 약 4미터로 제법 우뚝하고 돌거북 받침(귀부)의 조각을 보면 부릅뜬 두 눈과 여의주를 물고 있는 얼굴에 생동감이 있다. 용머리 지붕돌(이수)의 조각도정교하다. 무엇보다도 최언위가 짓고 최윤이 글씨를 쓴 비문의 금석학적 가치가 높아 보물 제612호로 지정되었다. - P47
법흥사 적멸보궁 솔숲이 끝나면 사자산을 바짝 등에 진 번듯한 적멸보궁이 나타난다. 모든 적멸보궁은 불상을모시지 않고 뒤쪽에 있는 진신사리탑을 향해 열어둔다. 그러나 법흥사 적멸보궁 뒤에는 고려시대 석실분이 있다. - P49
법흥사 소나무길 법흥사 적멸보궁으로 가는 길에는 준수하게 자란 키 큰 소나무들이 줄기마다 붉은빛을 발하며우리를 맞아준다. 그 길이 자그마치 300미터나 되니 발걸음이 상쾌하다. 오늘의 법흥사가 내세우는 가장 큰 자랑이며 법흥사에 올 때면 이 길을 걷게 된다는 기쁨과 기대가 있다. - P48
법흥사 적멸보궁 뒤편 법흥사 적멸보궁 뒤쪽엔 마땅히 있어야 할 진신사리 장치는 보이지 않고 엉뚱하게 고려시대 석실분이 축대 위에 입구를 드러낸 채 자리잡고 있어 당황스럽다. 무언가 착오가 있었던 모양이다. - P50
그리고 900년(효공왕 4년), 스님의 나이 75세 되던 해 3월 9일 징효대사는 제자들을 불러놓고는 "삼계(三界)가 다 공(空)하고 모든 인연이 전부고요하도다. 내 장차 떠나려 하니, 너희들은 힘써 정진하라"고 당부하고는 앉은 채로 입적했다고 한다. 법랍 56년이었다. - P52
징효대사 탑비(오른쪽)와 비문 디테일(왼쪽) 징효대사 탑비는 스님의 일생을 증언한다는 사실뿐 아니라 비문을쓴 이가 최언위라는 사실에서도 큰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이 비석을 말하면서 최언위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다면 비석의 금석학적 가치를 반도 전하지 않는 셈이다. 징효대사의 탑비에 새겨진 비문은 이 절집의 인문적 가치를 밝히 드러내주고 있다. - P53
낭혜화상 백월보광탑비(왼쪽), 낭공대사 백월서운탑비(오른쪽) 최언위는 문장과 글씨 모두에서 당대 최고였다. 보령 성주사의 ‘낭혜화상 백월보광탑비‘는 최치원이 문장을 짓고 최언위가 글씨를 쓴 것이다. 태자사의 ‘낭공대사 백월서운탑비는 최언위가 문장을 짓고 김생의 글씨를 집자하여 새긴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그의 문장과 글씨가 어떠했는지 알 만한 일이다. - P54
통일신라 말에 당나라 빈공과에 합격한 인물로는 최언위 이외에 최치원(崔致遠, 874년 합격)과 최승우(崔承祐, 893년 합격)가 있다. 이 세명의 최씨를 일찍이 일대삼최(一代三崔)라 했다. 최언위는 최치원의 사촌동생으로 전주 최씨의 시조이기도 하다. 나말여초라는 혼란기를 거치면서 이 세 명의 최씨는 각기 운명을 달리했다. 최치원은 벼슬을 사직하고 각지를 떠돌다 해인사에 은거하여 신라인으로서 생을 마쳤다. 최언위는 왕건에게로 가 고려인이 되었고 최승우는 견훤 밑으로 들어가 후백제인이 되었다. - P54
팔공산 전투를 치르고 나서 국서를 교환할 당시 양쪽에서 이를 담당한이가 고려의 최언위와 후백제의 최승우였다니 일대삼최의 운명은 묘한것이었다. - P55
최언위는 문장과 글씨 모두에서 당대 최고였다. 구산선문의 하나인보령 성주사의 ‘낭혜화상 백월보광탑비(국보 8호)는 최치원이 문장을 짓고 최언위가 글씨를 쓴 것이다. 김생(金生)의 글씨를 집자한 것으로 유명한 태자사의 ‘낭공대사 백월서운탑비‘는 최언위가 문장을 지은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그의 문장과 글씨가 어떠했는지 알 만한 일이 아닌가. - P55
나는 최언위의 일생을 통해 통일신라가 왜 망했고 고려가 어떻게 새왕조를 세웠는가를 생각해본다. 통일신라는 끝내 골품제를 벗어나지 못했다. 당나라 과거에 급제한 지식인들을 여전히 6두품에 두어 아찬(阿飡) 이상 올라갈 수 없게 했다. 최치원이 제시한 ‘시무십조(時務士條)‘라는 개혁안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기득권을 갖고 있던 보수적인 귀족들이개혁은커녕 자신들의 보호막을 더욱더 두껍게 두르다가 종국엔 멸망의길로 들어갔던 것이다. - P55
이에 반해 고려는 달랐다. 고려는 이 개혁적이고 진보적인 지식인들을 기꺼이 받아들여 새 국가 건설의 브레인으로 삼았다. 신라에서 6두품에 지나지 않던 최언위가 고려왕조에 와서는 태자사부(太子師傅)를 거쳐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렀다. 이것이 통일신라와 고려의 운명을 가른 것이었다. - P55
고승의 비문을 보면 거의 예외 없이 스님의 남다름을 말해주는 일화가 나오는데 이 비문 중에 징효대사가 도담선사에게 배움을 구할 때 주고받은 선문답 이야기는 참으로 오묘하다. - P56
어느 날 징효대사가 도담선사를 뵙고 배움을 구하고자 절을 올렸는데 처음 뵙는 분 같지가 않았다고 한다. 도담선사도 그러한 느낌이었는지 징효를 보면서 "이렇게 늦게야 상봉하니 그동안이 얼마나 되었는가?" 하고 물으니 징효는 앞에 있는 물병을 가리키며 "이 물병이 물병이 아닌때는 어떠했답니까?"라고 대답했단다. 이에 도담선사는 속으로 ‘어쭈, 제법이네‘라고 생각하고는 다시 수준을 높여 이렇게 물었다.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 "절중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절이 아닌 때는 누구인가?" 이렇게 나오면 징효는 당황하여 대답을 잘 못할 줄 알았다. 그러나 징효는 당당히 받아넘겼다. "절중이 아닌 때는 이와 같이 묻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 P56
선문답이란 이처럼 대단히 매력적인 대화법이다. 그 속엔 철리를 꿰뚫는 인식론과 실천론이 다 들어 있다. 한번은 법흥사 답사를 마치고 영월로 가기 위해 버스에 오르는데 답사에 처음 따라왔다는 한 중년 아주머니가 내게 특청이 있다고 했다. - P57
"법흥사 답사는 법흥사로 가는 길이 아름다울 뿐 절 자체는 그저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비문에 실려 있는 도담과 징효 스님이 주고받은 선문답을 듣고 보니 참으로 느끼는 바가 크네요. 우리 시아버지는 대화 중에 말이 안 통하면 ‘선문답하네‘라며 외면하곤 하셔서 저는 그저 선문답이라는 것이 엉뚱한 소리인 줄로 알았는데참으로 오묘하네요. 선생님, 가면서 이런 선문답 이야기 좀 더 해주실 수있으셔요?" - P57
"밖에 누가 왔느냐?" "예, 아무개가 가르침을 구하고자 찾아왔습니다." "일없다. 돌아가거라." - P58
"밖에 누가 왔느냐?" "예, 스님께 배움을 구하고자 하는 제가 또 찾아왔습니다." "밖에 눈이 오느냐?" "예, 많이 옵니다." "그러면 더 오기 전에 빨리 내려가거라. 길을 잃어버릴라." - P58
"밖에 누가 왔느냐?" "예, 제가 또 왔습니다." "밖에 눈이 오느냐?" - P58
"예, 길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많이 옵니다. "길이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찾아왔느냐?" "옛길을 더듬어 찾아왔습니다." "그러면 이제 옛길을 버리면 되겠구나." - P59
이 마지막 말에 수도승은 문득 ‘옛길을 버리면 새길이 열린다‘는 깨달음을 얻어 "예, 잘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하고는 다시는 찾아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곧 고전으로 들어가 새것으로 나온다는 입고출신(入古出新)의자세이다. 옛것을 익혀 새것을 안다는 온고지신(溫故知新), 옛것을 본받아 새것을 만든다는 법고창신(法古創新), 옛것을 빌려와 현재 상황을 풀어낸다는 차고술금(借古述), 옛것을 가지고 현재를 지탱한다는 이고지금(以持), 그 모두가 비슷한 개념이지만 이 선문답은 개념적 언어가아니라 현재 처한 상황에 입각한 비유법을 통하여 그 깊은 뜻을 인식론이아니라 실천론적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선문답의 묘미이다. - P59
관란정 관란정은 생육신의 한 분인 원호가 단종이 영월로 유배되자 이곳에 내려와 살며 충절을 지키다 세상을 떠난 곳에 세운정자다. 법흥사에서 영월로 가는 길목인 신천리라는 곳의 강 언덕에 있다. - P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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