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영희
본관 평창 이씨
출생 1929년 12월 2일, 평안북도 운산군 북진면
사망 2010년 12월 5일 (향년 81세), 서울특별시 중랑구 면목동 녹색병원

리영희 李泳禧 1929년 평안북도 운산군 북진면에서 태어났고, 1950년 한국해양대를 졸업했다. 합동통신 외신부 기자, 조선일보 · 합동통신외신부장을 역임했고, 미국 노스웨스턴대 신문대학원에서 연수했다. 
1976년 한양대 문리과대학 교수로 재직중  박정희 정권에 의해 해직되었다가 1980년 복직되었고,  같은 해  전두환 정권에 의해 다시 해직되었다가  1984년 복직되었다. 1987년 미국 버클리대에 부교수로 초청되어 강의하였으며 1995년 한양대 교수직에서 정년퇴임 후 1999년까지 같은 대학 언론정보대학원 대우교수를 역임했다. 
저서로 
『전환시대의 논리』 ,『우상과 이성』,
『분단을 넘어서』 , 『 80년대 국제정세와 한반도』 ,
『베트남 전쟁』 , 『역설의 변중』 ,『역정』 ,
『自由人, 자유인』 ,『인간만사 새옹지마』 ,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스핑크스의 코』 , 
『반세기의 신화』 ,『대화』 ,『分斷民族의 苦惱』,
『朝鮮半島의 新』 가, 편역서로 『8억인과의 대화』 
『중국백서 10억의 나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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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6-21 06:1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전환시대의 논리에 실린 베트남 전쟁 논문 대학교 1학년때 읽고 완전 충격받았어요. 내가 믿고 있던 세계가 한꺼번에 무너지는 느낌. 지금 생각하면 그 시절에 그런 논문을 써낸 이영희선생님 정말 용기를 존경할만한 학자이십니다.

대장정 2022-06-21 06:30   좋아요 2 | URL
네, 우리 사는 세상은 온통 알면 충격과 공포스런 이야기들로 가득차 있어요. 존경받아야 마땅하신분이고 존경하고 있습니다. 저는 리영희 선생님하면 항상 신영복 선생님이 같이 생각나요~~☆☆
 

언어는 다른 누구보다 시인이 가장 괴롭게 느끼는 결손이요 이승의 짐이다. 때로 시인은 이를 정말로 증오하고 비난하며 저주를 퍼붓는다. - P117

자신의 예술을 위한 독자적인 도구가 없다는 사실, 자기만의 집, 혼자만의정원, 하늘에 뜬 달을 내다볼 나만의 다락방 창문조차 하나 없이 그 모든 것을 일상과나누어야 하는 시인은 얼마나 가련한가! - P118

공짜인쇄물이 한 무더기씩 집 안에 쌓이는 데 익숙해진 우리는 글이 쓰였거나 인쇄된 종이라면 모조리 신성시하는 중국인들을 우스꽝스럽게 여긴다. - P127

올바른 독자들에게 한 권의 책을 읽는다는 것은, 타인의 존재와 사고방식을 접해 그것을 이해하고자 노력하고 그를 친구로 삼는 것을 뜻한다. 특히나 문학작품을 읽노라면 비단 몇몇 인물과 사건들만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고살아가는 작가의 방식과 기질, 내면의 풍경, 나아가 작풍이나예술적 기법, 사고와 언어의 리듬까지 접하게 된다. - P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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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1500년 이후 300년 동안 세계 무역량이 20배 정도 성장한 데비해, 19세기와 20세기를 합치면 200년 동안1,600배(40배 × 40배)로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크게 성장했다. 그런데 20세기는 19세기에 비해경제 성장이 훨씬 크다. 이상의 여러 수치를 종합해서 해석하면 그 의미를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첫째, 19세기 이후에는 지난 시대에 비해 무역이 비약적으로 성장했고, 둘째, 20세기와 비교해볼 때 19세기에 무역의 성장이 경제성장에 훨씬 더 큰 기여를 했다. 다시 말해 19세기는 세계 무역이 급성장하고 이것이 경제의거대한 도약을 가능케 한 시대다. 국제 무역의확대가 세계 경제를 결정적으로 변화시킨 시대는 19세기였다.

이 시기에는 토지와 노동이라는 생산요소의 부존도 차이에 따라 무역이 이루어진다는 고전적인 헥셔-올린(Heckscher-Ohlin) 법칙이 작동한 것이다.

고래잡이의 실상이 어떤지 실감나게 알 수있는 방법 중 하나는 소설 《모비딕》을 참고하는 것이다.

아르메니아계 터키인 칼루스트 굴벤키안(CalousteGulbenkian) 같은 ‘석유 거인‘들이 등장했다. 굴벤키안은 모술 지역 유전을 개발하여 엄청난부를 쌓았는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리스본에정착한 뒤 그동안 조성한 세계 최고 수준의 예술품 컬렉션을 기증하여 굴벤키안 박물관을 건립했다.

디젤엔진은 원래 석탄 가루를 사용하는 엔진이었지만, 재가 실린더와 피스톤을 더럽혀서 결국 석유 연료로 대체했다.(Rhodes)

1916년에는 사이크스-피코(Sykes-Picot)협정을 통해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오스만제국 영토를 어떻게 분할할 것인지를 정했다(오늘날 중동갈등의 먼 원인으로 흔히 이 비밀협정을 지목한다). 페르시아만, 시나이반도 동부, 아나톨리아 남부 지역 등을 놓고 영국-프랑스 간 일종의 관할 지역을 정한 것인데, 당시는 정확한 석유 매장량파악이 힘들었기 때문에 클레망소는 모술 지역을 영국에 넘기는 데 쉽게 동의했다. 결국 영국이 최대 수혜자가 되었다.

18세기에 먼저 인도가 영국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인도(India)‘라고 이야기하지만 사실 이 전체가 하나의 통합된 단위가 된 것은 이 지역의 오랜 역사의 산물이라기보다 역설적으로영국 지배의 산물이었다. 영국이 식민 지배를 한 지역 전체가한 단위의 국가로 만들어져 후일 독립했기 때문이다. 바꾸어 이야기하면 인도 전체가 통합성을 갖추지 못한 점이 침략자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조지오웰은 영국의 특성으로 축구, 펍, 차 세 가지를 들었다.(Moore)

중국은 지대물박(地大物博, 땅이 넓고 물자가  풍부하다)하여 오랑캐와 물품을 교환할 이유가 없다는 건륭제의 답변이 그들의 태도를 잘 보여준다. 사절단은 굳이 와서 장사를 하려면 중국의 법규를 준수해야 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즉각 추방한다는 내용의 칙서를 받고 영국으로 귀환하였다.

중국을 보고 온 매카트니의의견은 어땠을까? "중국은 여러 방면에서 서방 국가들에 비해낙후하며 청조는 외형은 강한 것같이 보이나 실은 부패가 심하고 쇠약한 나라이므로 일격에 공략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정수일, 221~222) 교역 특권을 얻는 데 실패한 후 영국이 생각해내 것이 아편이다.

인도의 식민지 총독 워런 헤이스팅스
(Warren Hastings)는 "아편은 파멸적인 사치품이다. 이것은오직 외국 무역의 대상으로서만 허가해야 한다. 앞날을 내다보는 정부의 과제는 국내 시장에서 아편을 추방해버리는 일이다"
라고 말했다. (쉬벨부쉬, 244) 그의 의견대로 영국은 부족한 결제 수단을 확보하기 위해 중국에 아편을 대량으로 수출하는 후안무치한 정책을 시행했다.

중국의 중체서용(中體西用), 한국의 동도서기(東道西器)에 대응하는 것이 일본의 화혼양재(和魂洋才)이며, 이것은 성공적인 문화 수용 전략이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 슬로건이 실제 서구 제도와 조직의 도입이나 기술의 도입과 개발 현장에서 어떠한역할을 했는가에 대해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화혼양재는 현장에서 사용할 수 있는 문화 수용의 지도 원리라기보다는 구호와 상징으로서 더 중요했던 것 같다. (한경구, 46)

영어의 ‘쿨리(coolie)‘는 힌두어 ‘kuli‘에서 나온 말이며한자로는 ‘고력(苦力)‘이라고 쓴다. 이 말이 쓰이기  전에는 ‘저자(猪仔, 새끼돼지)‘라고 불렀으며, 그래서 중국 노동자송출을 ‘돼지무역(pig trade)‘이라고도 한다. 중국 남자의변발이 돼지 꼬리처럼 생겨서 그런 말이 나온 듯하다.

일본은 현실과 괴리된 방향으로 가고 있었으니, 야마토(大和)호와 무사시(武蔵)호 등 괴물 같은 거대 전함을  건조했다. (Paine, L., 571) 소이탄을 발사하는 46센티미터(18.1인치) 주포는 당시까지 함선에 탑재했던역사상 최대의 함포였다. 이게 과연 전투에서 효율적이었을까? 야마토호에 탄 한 하급 장교는 이렇게 평했다.  세계사에 3대 바보짓이 있으니, 만리장성, 피라미드, 그리고 야마토호! 이 초대형 전함은 1945년 4월 7일 오키나와에서 출항했다가 미군 항공기 300대의 공격을 받아 침몰했다. 승무원 3,000여 명중270여 명만 생존하고 대부분 사망했다.

이제 세계의 역사는 다시 한 페이지를 넘겨새로운 시대로 들어갔다. 맥아더는 "지난 과거의 유혈과 학살에서 벗어나 더 나은 세계가 등장하리라는 진정한 희망"을 피력했지만 그런희망은 실현되지 않았다. 오히려 정반대 상황이 벌어진 듯하다. 새 시대는 평화의 시대가 아니라 여전히 참혹한, 그리고 아마도 훨씬 더 극심한 폭력의 시대로 들어갔다. 패권 경쟁의 틀이 바뀌고 더 심화되었다. 이제는 단지 바다 위에서 전투를 벌이는 정도를 넘어, 바다 속에서그리고 하늘과 우주에서 전투를 벌이고, 더 나아가서 바다를 통째로 지배하려는 단계로 들어가려 한다. 해양은 갈등의 장소로 변모했다.
20세기 후반 이후 세계는 ‘냉전과 열전 사이‘를 오갔다.

이 시기에 나온 군사·안보 개념이 상호확증파괴전략(Mutual assured destruction, MAD)이다. 상대방을 불신하고 증오하는 핵 경쟁의 시대에 강대국들은 그야말로 미친 경쟁을 하고 있었다. 1960년대 초에 미국 국방장관 로버트 맥나마라(Robert Strange McNamara)가 처음 사용한 이 용어는 강력한 무기를 사용하겠다는 위협을 통해 적이 똑같은 무기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억제한다는 독트린을 가리킨다.

1886년 캐나다에서 잡은 바닷가재의 수는 9,000만 마리였다. (Earle, 95) 당시 미국에서는 죄수들에게 매일 바닷가재를 주어 한때 이것을 거부하는 폭동이 일어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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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직업인들의 몸짓에서 늘 읽게 되는 반응은, ‘우릴 좀 가만 내버려둬요! 뭐 그렇게까지 심각하게 생각할 것 있냐고요! 보세요, 우리는 날이면날마다 지긋지긋한 부역에 치일 지경이랍니다. 우리가 써대는 모든 글들을 그런 식으로 꼼꼼하게 뜯어볼라치면 어떻게일을 하겠소?‘였다. - P89

간단히 말해, 만약 진정한 문학작품의 작가더러 누군가가
"차라리 다른 소재를 선택했더라면 좋지 않았을까?"라고 묻는다면, 그건 마치 어떤 의사가 폐렴에 걸린 환자더러 "아, 차라리 콧물감기로 정하시지 않고요!" 하고 말하는 것과 진배없는 일이다. - P99

시는 시인의 호흡,
그의 아우성, 그의 꿈, 그의 미소, 그의 주먹질이다. - P114

이러한 ‘아름다운‘ 시들이 가끔 너무나 지겹고 미심쩍어진다. 마치 길들여지고 다듬어진 모든 것들처럼, 교수들과 공무원들처럼 말이다. - P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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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기선이 범선보다 더 우월해지는 시점은 대략 1860년 이후의 일이다.
다시 말해 19세기 중엽은 범선이 최후의 정점을 맞는 동시에 다음 시대를 책임질 증기선이발전하던 전환의 시대였다. 이것은 마치 증기기관이 산업의 모든 분야를 석권하기 전에 물레방아가 최고로 발전하고 또 증기기관과 동시에 사용되던 현상과 유사하다. (Allen, 177) 세계의 바다를 연결하는 기본적인 네트워크는 우선범선으로 구축한 다음 증기선으로 더욱 확실하게 강화했다.

1869년 수에즈운하 개통이 범선의 쇠퇴를불러온 또 하나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범선으로는 운하를 통과하는 것이 어려운 반면, 증기선으로 수에즈운하를 통과하면 아시아와 유럽 간 항해 거리가 훨씬 짧아진다. 특히 인도와실론에서도 차가 재배되자 중국에서 차를 운송해오던 차 클리퍼는 막을 내렸다. 1870년대이후 범선의 시대가 저물어갔다.

증기기관의 발명은 인류 역사의 흐름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았지만, 사실 증기기관의 원리자체는 고대부터 알려져 있었다. 알렉산드리아의 헤론(AD 10~70)은 물을 가열할 때 나오는 수

증기의 부피가 크게 팽창하는 성질을 이용해최초의 증기기관(aeolipile)을 만들었다. 그렇지만 이처럼 원리를 아는 것과 그것을 실제로 산업에 적용하는 것은 천지 차이다. 과학 지식 자체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실용 기술로 발전시켜 실질적으로 산업에 적용하는 능력이 중요하다. 산업혁명의 영웅들이 한일이 바로 그런 것들이다. 인건비와 목재가 갈수록 비싸지는 상황에서 풍부하고 값싼 석탄을사용하는 기계를 만들어 산업 활동을 혁신한것이다.

미시시피강의 증기선에 대한 자세한 기록을 남긴 작가는 마크 트웨인이다. 그는 강 위로 증기선이 다니는것을 보며 자랐고 실제로 이런 배의 도선사로 일했다.
그의 주요 작품인 《톰 소여의 모험》(1876)과 《허클베리 핀의 모험》(1884)은 미시시피강을 주요 무대로 한다. 다만 그가 소설을 쓸 때는 이미 증기선 운항이 사양 사업이 되었고 철도가 그 역할을 대신하기 시작했다.(Thomas Smith) 언제나 그렇듯 성장과 발전이 곧모든 사람의 행복을 증대시키지는 않는다. 이 강을 통해 100만 명 가까이 노예로 팔려갔고, 이들이 힘겹게생산한 엄청난 양의 원면이 뉴올리언스를 통해 영국으로 수출되었다.

영국과 미국 내부의 강이나 호수, 연안 지역을 오가는 데에 증기선을 성공적으로 사용했다고 해도, 대양 항해에 증기선을 투입하는 것은또 다른 문제다. 일찍이 1819년 사바나(Savannah)호가 31일 만에 대서양을 건넜다고하나, 실제로 증기기관을 사용한 건 8시간에불과하고 나머지 항해에는 돛을 사용했다. 이배는 후일 엔진을 걷어내고 범선으로 돌아갔다.

다. 다른 배들도 위급한 상황을 맞거나 혹은 정박지에서 출항 · 입항할 때만 증기기관을 사용하곤 했다. 대양 항해 전 구간에 걸쳐 엔진을사용한 사례는 쿠라사오(Curaçao)호가 처음이다. 이 배는 영국에서 건조하고 네덜란드가 구매한 438톤 크기의 외륜선으로, 1827년 승객

홍해 측 수에즈 사이의 162.5킬로미터를 수로로 연결했다. 하상 부분의 폭이 22미터이고 수면 부분의 폭은60~90미터, 깊이 6미터인 이 운하는 프랑스의 기술과 이집트의 자금 및 인력으로 만들었지만 완공 후 이익의 태반은 영국에게 돌아갔다. 기원전 6세기에 네코 2세가 이집트에 운하를파면 야만인에게만 이익이 돌아가리라는 신탁을 듣고 사업을중단했는데, 마치 그 예언이 2,500년 후에 실현된 것 같았다.

영국 정부는 큐너드사에 보조금을 지급해서 240미터 길이에 총톤수 3만2,000톤인 루시타니아(Lusitania)호와 모리타니아(Mauretania)호를 건조하게 했고, 마침내 1907년 루시타니아호가 블루리본을찾아왔다(이 배는 1915년 독일 잠수함 공격을 받고 침몰했는데, 이것이 미국의 참전을 불러오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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