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의 관문, 알프스를 넘어 만나는 첫 문예의 중심 - P165
밀라노에 들어서면 지금껏 봐왔던 여느 이탈리아 도시와다른 느낌을 받는다. 고대 로마나 중세시대의 흔적은 찾아보기 힘든 반면, 도시 가득 들어선 고층빌딩으로 인해 현대적인 대도시의 느낌만 들기 때문이다. 밀라노는 세계 4대 패션쇼 중 하나인 밀라노 패션위크, 프라다로 대표되는 명품, 알파로메오 같은 고성능 차량, 프로축구 AC밀란의 연고지로 더 잘 알려진 곳이다. 아울러 증권가와 수많은 금융회사가대거 포진한 이탈리아의 경제 수도이다. - P165
로마시대 기독교를 음지에서 양지로 끌어올린 기념비적인 칙령이 선포된 장소였으며, 중세에는 이탈리아 북부 르네상스를선도하기도 했다. 근대에 들어와 밀라노에서 펼쳐진 외세에 대항한 독립운동은 오늘날의 통일 이탈리아가 형성되는데 무엇보다 중요한 산파 역할을 했다. - P166
밀라노는 유럽의 터줏대감이라 할 수 있는 켈트족이 살던 땅이었다. - P166
흐르는 물은 썩기 어렵고, 문화는 섞일수록 강해지는 법이다. 밀라노는 이러한 지리적 이점으로 인해 일찍이 상공업 발달로 번성했다. 3세기말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제국을 동서로 나눠 다스릴 때 밀라노는서로마의 수도로 지정되어 그 위상이 한층 높아졌다. - P167
4세기 초, 서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와 비잔티움 황제 리키니우스Licinius, 재위 308 ~324는 밀라노에서 종교의 자유를 선포하여 탄압받던 기독교는 비로소 자유를 얻었다. 이는 밀라노 칙령‘이란 사건으로 역사에기록된다. - P167
교황청이 있는 로마로 진군하려면 밀라노를 거쳐야 했으니 장점이 곧 단점이 되는 슬픈 운명을 가진 곳이기도 했다. - P167
13세기부터 비스콘티 가문이 이곳을 통치한다. 인간은 자신은 소멸하더라도 명성은 영원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 P167
밀라노 대성당, 세상에서 가장 야심 찬 프로젝트 - P169
우리는 세계 최고 혹은 최대 같은 기록에 열광한다. 혹은그렇게 하도록 보이지 않게 강요된다. 4등, 5등은 몰라도 1등은 무조건알아야 하며 운 좋으면 2, 3등까지는 기억을 한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의본성은 변하지 않았다. 700년 전 밀라노의 군주도 세상에서 가장 큰 교회를 건설하기 위한 프로젝트를 실행했으니 말이다. - P169
로스 킹은 『브루넬레스키의 돔』에서 "이탈리아 건축가들은 전통적으로 (고딕 양식의) 공중 부벽을 흉물스럽고 부자연스러운 미봉책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또한, 진통직으로 피렌체와 경쟁 관계에 있는 독일, 프랑스, 밀라노의 건축양식을 절대수용하지 않겠다는 자존심도 작용했을 것이다"라며 이탈리아에서 고덕건축이 드물게 보이는 이유를 설명한다. - P170
밀라노 대성당 건설에 고딕 양식을 적용한 이유도 밀라노가 과거부터교역을 위해 알프스 북쪽의 도시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기 때문이 아닐까. 고립된 사회보다는 다양한 사회와 교류하는 곳이 개방적이고 진취적일 확률이 높다. - P172
레오나르도 다빈치, 거장이 도시에 깊게 새긴 흔적들 - P174
레오나르도 사후 500주년이었던 2019년의 밀라노 거리에는 다른 어느 도시보다 레오나르도의 초상화와 이름이 유독 많이 보였다. 밀라노는 레오나르도의 인생 중 가장 길었던 17년이나 머물렀던곳이기에 그만큼 그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는 곳이다. 앞서 살펴본 밀트노 대성당에도 레오나르도의 흔적은 희미하게 남아 있다. - P172
v 레오나르도 다빈치 박물관. 이곳에서는 레오나르도가 17년 동안 밀라노에 머물 때 스케치했던다양한 기계들을 실제 모델로 만들어 전시하고 있다. - P176
대부분 작품을 미완성으로 남긴 그의 삶을 되돌아보면 완성만이 우리가 추구하는 목표일까 생각해본다. 어쩌면 우리가 추구하고 열광하는 것은 완성이라는 목표가 아닐지도 모르겠다. 완싱보다는 그곳까지 도달하려는 과정에서 땀 흘리며 얻는 성취감을 통해 우리는 살아 숨 쉬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임을 자각하기 때문이다. - P178
오스트리아의 침략, 통일의 기운이 일어나다 - P179
가진 것이 많은데도 불행해지는 아이러니를 석유를 생산하면서도 가난에 허덕이는 남미와 아프리카의 몇몇 나라에서 살펴볼 수있다. 풍족한 나라일수록 효율적인 자원관리, 높은 정치 청렴도, 국민 통합이 더없이 중요하다. 달콤함이 있는 곳에는 늘 전쟁, 배신, 음모가 암약하며 빈틈을 사정없이 노리고 있기 때문이다. - P179
프랑스대혁명과 나폴레옹 지배를 경험하며 이탈리아 사람들은 운명은 정해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며, 자신들에게도 그러한 힘이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 P182
고기를 안 먹어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먹어본 사람은 없듯, 정치체제를 돌려놓는다고 해서 자유와 평등의 달콤함을 맛봤던 사람들의 생각까지 되돌릴 수 없었다. - P182
한편, 유럽 전쟁이 극에 달했던 1813년 무렵 밀라노에서 남쪽으로100km 떨어진 파르마 공국의 작은 마을에서 음악에 두각을 보이는 아이가 태어났다. 베르디라는 이름을 가진 소심하고 허약한 아이가 향후50년 뒤 이탈리아 통일의 주역이 될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 P182
베르다. 가거라 상념이여 금빛 날개를 타고 - P183
고된 삶의 현장에서는 늘 음악이 흐른다. 카리브해 사탕수수 농장의 노예들에게 삶을 더욱 맛깔나게 해주는 살사Blu라는 음악과춤이 있었기에 그들은 뜨거운 태양 아래서 하루 16 시간 이상의 고된 노동을 견뎌낼 수 있었다. - P183
음악은 인류에게 힘든 시간을 이겨낼 힘을 준다 - P184
1842년, 베르디의 세 번째 오페라 「나부코(Nabucco」가 라 스칼라 극장의 무대에 처음 올려졌다. 나부코는 기원전 6세기, 메소포타지역 고대왕국이었던 바빌론의 왕 ‘나부카드네자르 2세‘의 이탈리아어 표현이다. 오페라는 약속의 땅 유다왕국이 침략당해 많은 히브리인이 바빌론으로끌려갔던 역사를 모티프로 한다. 3막이 오르고 바빌론에서 비참한 삶을살아가는 히브리 노예들이 유프라테스 강변에서 고향을 향한 간절한 마음을 담아 부른 합창곡 「가거라 상념이여 금빛 날개를 타고가 극장에울려 퍼졌다. - P184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기도 하는 운명이라는 손님은 어느날 갑자기 자신도 모르게 찾아온다. - P186
라 스칼라 극장, 이탈리아 통일의 발화점 - P188
이로써 로마와 베네치아를 제외한 이탈리아의 대부분 지역이 사르데냐왕국에 의해 통일되었다. 그리고 10년 뒤 그토록 염원했던 이탈리아의통일이 로마 멸망 후 1,400년 만에 마침내 달성되었다. - P189
밀라노를 방문한 관광객이 시간이 허락한다면 꼭 들리는곳이 호반의 도시 꼬모 Como 이다. 꼬모는 이탈리아와 스위스 국경에 면한 작은 도시로 밀라노에서 차로 1시간 정도 거리에 위치한다. 알프스의 만년설이 빚어놓은 호수 한편에 자리한 꼬모는 고대 로마 때부터 수려한 자연경관과 서늘한 기온 때문에 귀족의 여름철 휴양지로 유명했다. - P192
현재도 여전히 알프스의 매력을 물씬 느낄 수 있는 곳으로, 이제 귀족이머물렀던 저택은 할리우드 스타들의 별장으로 대체되었다. - P192
그러나 권투 선수 마이크 타이슨이 "누구나 그럴듯한 계획이 있다, 쥐어 터지기 전까지는"이라고 했듯, 변덕스러운 운명이 그의 그럴듯한 탈출 계획을 섬길지는 미지수였다. - P194
몇 년 전, 20세기 혁명의 아이콘 체 게바라의 흔적을 따라볼리비아의 바예그란데까지 힘겹게 찾아간 적이 있다. 그런데 생각과 다르게 그곳에서 체 게바라와 관련된 장소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에게 물었으나 그가 누구인지조차 알지 못했다. 다행스럽게도 그 지역 관광 가이드를 만나 대화할 수 있었고,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한 충격을받았다. - P195
혁명이 성공한 쿠바에서 체 게바라는 국가 영웅이다. 그러나 남미에서 미국 제국주의로부터 민중의 해방을 위해 싸웠던 그에 대한 평가는 단순 테러리스트에 불과했다. 심지어 바예그란데 사람들은 그가 누구인지 관심조차 없었다. - P195
쿠바의 혁명은 성공했지만, 볼리비아에서의 혁명은 실패했기 때문이다. - P195
^ 세뇨르 데 말타 병원 내 세탁실, 1967년, 혁명가 체 게바라는 볼리비아 정부군에 의해 사살되어 이곳 세탁실에서 언론에 공개된다. - P196
어떤 대상의 평가는 늘 상대적일 수 있고, 세상에 절대적 관점은 있을 수 없다는 교훈을 얻었던 에피소드였다. 이탈리아 통일의 관점도 북부와 남부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그 매울 수 없는간극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힘겹게 이룩한 이탈리아 통일의 옥에 티로남았다. - P196
초기 이탈리아 왕국에서 실행했던 경제정책은 주로 북부 공업 도시에 혜택이 집중되었다. 반면, 농업 중심이며 여전히 봉건제의 영향이 지배적이었던 남부 지역은 발전에서 소외되었다. 남부의 대표 도시였던 나폴리, 시칠리아는 서서히 몰락했다. 농민들의 세금 부담은 커졌고, 불합리한 토지 분배는 또 다른 신흥 부자를 만들어낼 뿐 민중의 삶은 전보다비참해졌다. 통일이 과연 남부에는 어떤 혜택을 주었으며 왜 삶은 전보다 더 비참해지는지 비관하며, 농민들은 더는 참지 않고 정부를 향한 투쟁을 선택했다. - P197
무솔리니, 꼬모에서 맞은 파시스트의 최후 - P199
1914년, 사라예보의 ‘라틴 다리‘에서 울려 퍼진 두 발의총성이 전 세계를 전쟁의 도가니로 몰고 갔다. 제1차 세계대전의 시작이었다. 통일 후 꾸준히 북부를 중심으로 성장하고 있던 이탈리아는 1915년 연합군으로 참전해 승전국이 되었지만, 허울뿐인 영광이었다. 많은젊은이가 전쟁에 끌려나가 희생되었고 스페인 독감으로 국토는 만신창이가 되었다. 인구의 감소로 국내 산업 전반의 생산량은 급감해 경제는나락으로 떨어졌다. - P199
승전국 이탈리아에 돌아온 몫은 예상과는 다르게 남티롤 정도의 조그만 땅덩어리에 불과했다. 이는 같은 승전국인 프랑스, 영국이 차지한 영광과 비교해 한참 부족했다. 사회는 생기를 잃고 국민은 패배 의식에 휩싸였다. - P199
"사과가 얹어졌던 이 머리로부터 자네들을 위한 새롭고 더 나은 자유가 싹틀 거야. 옛것은 무너지고 시대는 변하고, 폐허로부터 새로운 삶이 꽃피는 거지" 『빌헬름 텔』, 프리드리히 실러 - P207
고타르트 고개, 고립을 넘어 세상과 ㅅᆢ통하다 - P209
루체른 호수, 빌헬름 텔이 쏘아 올린 스위스 건국 - P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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