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 돌아가신-내 나이 열살 83년.-아버지 대신 어머니는 우리 4형제를 위해 뼈가 삭도록 일을 하셨다.

태산 같은 걱정을 앞세우고 강길을 걷고 있는데, 누군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뒤돌아보니 어머님이었다. 어머님께서 강길을따라 뛰어오고 있었다. 어머님도 울고 계셨다. 어머님은 마른 풀잎처럼 서서 울고 있는 내 손에 무엇인가를 쥐여주었다. 참으로 까칠한 손이었다. 가시덤불 같은 손으로 내 손에 2천원을 쥐여주시며 어머님은 눈물 바람으로 "용택아, 어디 가든지 밥 잘 먹고 건강혀야헌다. 꼭 편지허고, 알았쟈" 하셨다. 나는 돌아서서 뛰었다. 혁, 바람이 내 가슴을 막았다. 눈물이 범벅된 얼굴로 얼마를 뛰다가 길모퉁이에서 뒤를 돌아다보았다. 어머님께서 그때까지 마른풀들이 쓰러지는 강바람 속에 마른 풀잎처럼 바람을 타며 서 있었다. 손을 흔드는 것 같았다. 마른 풀잎 같은 손길이었다. 어머님 뒤 마을에 살구꽃이 찬바람 속에 하얗게 피고 있었다.
- P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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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료의 무게에 눌려 땅으로 꺼질 것 같았다. 시간이갈수록 집은 멀어지고 사료는 무거워지면서 나는 정말 사료 무게만큼이나 외로웠다. 그때 그 외로움을 생각하면 지금도 나는 그 어떤힘든 일도 다 견딜 것 같다. 외로움의 무게는 사료의 무게보다 더 무겁고 컸으니까. 등에서는 땀이 나고 고무신 속 발에도 땀이 났다. 들가운데 논두렁에 지게를 받쳐놓고 지게 밑에 앉아 쉴 때 귀싸대기를때리던 추위를 견디던 내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지게 밑에 앉아 어깨를 들먹이며 나는 혼자 얼마나 울었던가.
- P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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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가정형편때문에 나는 공고를 가야만했다. 둘째라서. 할머니께서는 큰형밖에 대학에 보낼수밖에 없다 하셨다. 중3 담임선생님께선 어머니를 학교에 네번 부르셨고 나는 중학교옆에 붙어있는 후졌지만 인문계 고등학교에 겨우 진학할수 있었다. 그 선생님 덕분에 서울에 있는 공립 4년제 대학에 갈수 있었고 ROTC장교를 나왔고, 지금은 남들 부러워하는 직장에 다닐수 있었다. 고마우신 그 선생님 덕분에, 그 분 말씀을 따라주신 어머님 덕분에!

내가 다니던 농림고등학교에 ‘영농학생‘이라는 제도가 있었다. 영농학생에 가입하면 학교에서 공부보다 농사일을 더 많이 해야 했다.
논과 밭이 많은 학교였기 때문이다. 물론 모내기나 벼 베기, 묘포장에 풀베기 같은 일은 전교생이 나서야 했지만 자잘한 일은 영농학생들이 했다. - P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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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을 위해 새벽부터 일하시는 어머니.
내 어머니도 새벽부터 석회 후레쉬를 들고 고동-우리 동네에선 다슬기를 고동이라 불렀다.-잡으러 냇가로 나가셨고 이른 아침이면 그 고동을 사러 고동장수가 트럭을 몰고 우리 동네에 왔다. 고동은 그 시절 7~80년대 우리 마을의 주 수입원이었다

어머니는 달 뜬 새벽 강을 건너가 밭을 매셨다.
호미 끝에 걸려 뽑히는 작은 돌멩이들이 돌아눕는 아픈 숨소리가 잠든 내 등에서 딸그락거렸다.
젖은 돌멩이 몸에 파인 호빗자국이 강을 건너는 다리가 되었다. 아프고도 선명한 그 다리를 건너 나는 세상으로 나갔다.
- P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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