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에 비춰볼 때 이렇게 소통이 되지 않는 사람들은 몇 가지 유형이 있다.

첫 번째는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나서 듣게 될 상대방의 반응을 지나치게 걱정하는 유형이다.

두 번째 유형은 자폐적 성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사회생활을 성공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학습과 기억 및 그 결과물을 활용하는 인지 기능이 정상적으로 작동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므로 사회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사람은 과연 인간답게 생존하고 있는가에 대한 철학적 물음에 직면하게 된다.

공감, 마음이론과 같은 타인에 대한 이해, 소통 등의 중요성은 사회생활의 필요성이 없이 개별적인 인지 기능만이 강조되며 개발되고 있는 지금의 인공지능보다 사람의 뇌가 발휘하는 자연지능이 얼마나 뛰어난지 새삼 깨닫게 해준다.

뇌는 매우 오래전에 단순한 세포에서 매우 복잡한 장기로 진화했는데, 진화의 과정에서 방향을 결정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바로 ‘어떻게 하면 생존 확률을 높일 수 있을 것인가’이다.

절차적 학습과 기억 시스템을 사용하는 것처럼 잦은 빈도로 해마를 비롯한 내측측두엽의 영역들을 사용한다면 기억의 노화를 늦출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친구들도 많이 만나고 열심히 학습하고 기억하는 일을 나이가 들더라도 적극적으로 해야 한다. 뇌를 계속 쓰는 것이 학습과 기억의 노화를 더디게 하는 최선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학습해야 할 정보는 종류가 다양하므로 우리 뇌에는 종류별로 학습 및 기억을 관장하는 시스템이 따로 있다. 뇌세포들은 서로 긴밀하게 정보를 주고받으며 학습하고 기억하는 기능적 네트워크 혹은 신경망을 이루는데, 이 신경망의 위치와 기능 역시 학습의 종류에 따라 다르다.

이세돌을 이겼던 알파고 역시 엄청난 에너지와 자원을 쓰면서 이세돌을 상대했다. 컴퓨터는 이세돌처럼 바둑을 두러 집에서 대국장으로 이동할 필요도 없고 대국이 끝나고 집에 갈 필요도 없다. 이동할 필요도 없고 잠을 잘 필요도 없고 오로지 바둑이라는 게임만을 위해 그 엄청난 자원을 쓴 알파고를 상대로 1.5킬로그램 정도의 무게를 가진 인간의 뇌 하나가 홀로 그토록 선전했다는 것 자체를 오히려 경이롭게 여겨야 한다.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라는 프랑스 작가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홍차와 마들렌 과자가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게 만드는 사건은 바로 일화기억의 전형적인 인출 형태 중 하나이다.

우리 뇌에 다양한 기억 시스템이 존재한다는 것을 어떻게 알아냈을까? 그 진정한 출발점은 해마 연구였다. 해마는 우리가 매일매일 평생 겪는 일을 차곡차곡 기록하고 저장한다. 사건을 기억하고, 길을 기억하고, 이러한 기억을 토대로 의사결정에도 관여한다. 해마의 작동 원리를 과학적으로 이해하면 뇌의 학습과 기억의 미스터리가 풀릴 것이며, 뇌 지능의 정수를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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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learning)
생명체가 알지 못하던 것을 알게 되는 일을 말한다. 특수한 무언가를 배워서 시험을 치르는 것은 뇌의 학습 시스템 측면에서 보면 아주 작은 부분이다. 갓난아기나 동물의 새끼가 태어나 죽을 때까지, 뇌가 생존을 위해 쉬지 않고 수행해야 하는 기본적인 인지 기능이다. 우리를 둘러싼 환경은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에 우리의 뇌는 매 순간 학습한다.

절차적 기억(procedural memory)
어떤 과제를 해결하거나 행동을 수행하는 데 요구되는 일련의 지식이나 기능에 대한 기억을 의미한다. 절차적 기억은 자주 사용함에 따라 의식적인 노력 없이 자동적으로 접근하여 사용할 수 있게 된다. 자전거를 타거나 악기를 연주하거나 운전하는 등의 행동을 포함한다. 오로지 행동을 통해서만 내가 해당 기억을 갖고 있음을 보일 수 있다.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행동하도록 만드는 아주 중요한 기억이다.

서술적 기억(declarative memory)
사실과 사건에 관련된 기억으로, 절차적 기억과 달리 학습되어 저장된 기억의 내용을 언어를 사용해서 의식적으로 남에게 말해줄 수 있다. 일화기억, 재인, 회상 등은 모두 서술적 기억의 예로, 특히 일화기억은 서술적 기억 시스템의 핵심이다.

일화기억(episodic memory)
개인의 경험, 즉 자전적 사건에 대한 기억으로 사건이 일어난 시간, 장소, 상황 등의 맥락을 포함한다. 우리의 일상생활에 대한 기억을 저장하는 것이기 때문에 개인이 살아온 역사를 저장하고 있는 소중한 기억이기도 하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자동적으로 학습하고 이를 기억으로 저장한 뒤, 훗날 기억 속에서 특정 사건이 일어난 시점부터 벌어진 일을 순차적으로 말할 수 있게 한다.

해마(hippocampus)
일반인들이 많이 들어본 알츠하이머성 치매라는 뇌질환이 생기면 뇌의 해마가 다른 뇌 영역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먼저 손상을 입는다. 해마 연구는 우리 뇌의 서로 다른 영역이 다른 종류의 학습과 기억에 관여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줌으로써 현대 뇌인지과학의 출발점을 제공했다.

뉴런(neuron)
뇌세포는 다른 장기의 세포들과 모양도 다르고 기능도 달라서 뇌세포라고 부르지 않고 뉴런이라고 부른다. 뇌는 기본적으로 뉴런이라는 세포로 구성되어 있고, 특정 뇌 영역이 담당하는 기능에 따라 다양한 모양의 뉴런이 존재한다. 뉴런들이 서로 연결되어 이루는 네트워크를 신경회로 혹은 신경망이라고 부른다.

시냅스(synapse)
뉴런과 뉴런이 서로 연결되는 부위에는 화학적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 시냅스라는 공간이 있다. 뉴런들은 시냅스에서 여러 가지 신경전달물질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주고받으며 서로 소통한다. 그리고 소통한 방식과 소통한 내용의 중요도에 따라 그 소통은 기억되기도 하고 잊히기도 한다. 시냅스의 강도가 기억되는 것이다. 학습이 일어나는 최소 단위이기도 하다. 학습은 뉴런들 사이의 소통이 시냅스를 통해 일어나면서 그 시냅스의 흥분된 상태가 지속되어야만 뇌에 ‘새겨지는’ 것이다.

외상후스트레스장애(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PTSD)
뇌가 특정 기억을 과하게 간직하고 있어도 정상적인 생활을 하는 데 때로는 큰 방해가 된다. 극도의 공포와 불안을 동반했던 일화기억은 세월이 지나도 잊히지 않고, 그 사건과 비슷한 일만 봐도 다시 등에서 식은땀이 나고 몸이 움직이지 않는 반응이 나올 정도로 뇌가 과민반응을 보일 수 있다.

"생명체는 ‘생명‘이 붙어 있는 한 학습한다.
그리고 기억한다. 당연히 목적은 생존이다.‘

뇌가 어떻게 학습하는지 연구하는 뇌인지과학자의 입장에서 본 학습의 개념은 매우 간단하다. 학습은 생명체가 알지 못하던 것을 알게 되는 일을 말한다.

생명체는 ‘생명’이 붙어 있는 한 학습한다. 그리고, 이를 기억한다. 당연히 목적은 죽지 않고 생존하는 것이다.
"알지 못하던 것을 알게 된다." 너무도 단순한 이 정의에 뇌의 신비와 생존의 신비가 숨어 있다.

뇌에게 학습은 선택이 아니라 필연적 숙명이다. 왜 그럴까? 뇌가 학습을 멈추는 순간 어떤 일이 일어날까? 단순하게는 세상 속에 계속 존재하기 위해, 더 나아가 세상에 더 잘 적응하고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 뇌는 끊임없이 학습하고 기억한다.

자연계에서 포식자와 피식자의 뇌는 서로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경쟁하고, 경쟁에서 승패를 좌우하는 것은 비슷한 경쟁에 대한 경험적 학습이 얼마나 되어 있는가이다. 우리 인간의 사회생활도 아마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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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고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형식면에서 우리 판단력에 대해서는 반-목적적이고, 우리의 현시능력에 대해서는 부적합하며, 상상력에 대해서는 폭력적이다.
- 『판단력비판』 §23

칸트는 문화적 존재자로서의 인간을 창조의 최종 목적으로, 도덕적 존재자로서의 인간을 창조의 궁극 목적으로 정의한다. 신이 인간을 창조한 것은 그를 통해 자연 저편에 문화의 세계를 건설하고 마침내 이상적인 윤리의 세계를 수립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문화적 인간은 특정 목적을 계획하고 그것에 적합한 수단을 찾아 실현한다. 반면 도덕적 인간은 모든 목적-수단 관계를 벗어난, 그래서 어떠한 다른 목적에 의해서도 제약되지 않는 법칙을 제정한다. 도덕적 인간이 창조의 궁극 목적인 이유는 여기에 있다.

취미를 정초하기 위한 참된 예비학은 윤리적 이념들의 발달과 도덕 감정의 교화에 있다.
- 『판단력비판』 §60

칸트는 첫 번째 비판서인 『순수이성비판』에서 이론철학을 신학에서 해방하면서 위대한 역사적 전환을 가져왔다. 그러나 두 번째 비판서인 『실천이성비판』과 세 번째 비판서인 『판단력비판』에서는 신학이 다시 살아나 때로는 실천철학에, 때로는 예술철학에, 그리고 마침내는 이론철학에까지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신학은 더 이상 근대 학문 위에 군림하는 신학이 아니다. 그것은 다만 근대 학문에 맞추어 개조된 신학에 불과하다.

신학은 문화의 중심에 있는 학문이 아니라 그 주변부로 밀려난 학문, 근대의 문화적 조건 속에서 실체를 잃어버린 학문일 뿐이다. 이제 신학은 이 세상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반성적 주체의 자기 정향 속에 유령처럼 어른거리는 그림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 그림자는 근대 과학에 의해 사막화된 자연에 오아시스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된다.

칸트는 인간 문화 전체의 기원을 동물과 구별되는 인간만의 고유한 자질에서 찾았다. 그 자질은 다름 아닌 계획 능력에 있다. 자연에 의해 저절로 이루어질 수 없는 목적을 설정하는 것, 목적 실현을 위한 적합한 수단을 찾고 단계적 절차를 설계하는 것, 절차에 따라 실행하는 것, 이런 것들이 모든 문화적 성취의 배후에 있는 활동이다.

구제해야 할 것은 자연이라기보다 인간이다. 파스칼이 사막화된 자연 앞에서 느낀 공포는 허무주의의 위험성에서 온다. 맹목적인 물리법칙이 몰고 오는 허무주의에서부터 인간을 구제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칸트가 목적론적 판단의 필요성을 정당화하고 이를 위해 신학을 되살리는 마지막 이유일 것이다.

칸트의 『영구 평화를 위하여』(1795)는 이런 역사 진보의 마지막 단계로서 세계적 단위의 영구 평화를 달성하기 위한 조건을 논하고 있다. 그 조건은 국제법을 제정하고 세계 법정을 수립하는 데 있다.

단일한 세계국가를 건설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지만 사실상 불가능하므로 평화로운 국제 질서를 위해서는 국가 간 분쟁을 해결할 수 있는 세계 법정을 설립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오늘날 UN의 실질적인 모태가 되었다. 칸트의 『판단력비판』 후반부는 이런 역사의 합목적성과 그 원리들을 체계적으로 정당화하는 위치에 있다.

우리는 인공지능의 자기에 맞설 수 있는 사유 및 자유의 형식을 발견해야 하는 과제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런 과제에 부딪혀 우리에게 가장 커다란 용기와 지침을 주는 철학자가 있다면, 그가 바로 새로운 마음의 모델을 제시한 칸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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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무의 주관적 조건은 ‘도덕법칙에 대한 존경’에 있다. 존경이라는 주관적 조건을 결여한 채 도덕법칙과 일치하는 행위가 있을 수 있지만, 그렇게 객관적 조건만 만족시키는 행위는 아직 도덕적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다만 합법적 행위에 불과하다.

도덕성과 합법성의 구분은 칸트 윤리학의 주요 특징이 드러나는 결정적인 대목이다. 칸트 윤리학이 의무의 윤리학이라 불리는 것도 도덕성과 합법성의 구분을 배경으로 한다.

도덕법칙과 일치하는 행위는 외견상 의무와 구별할 수 없는 행위를 말한다. 이런 유사성은 결과에 있다. 결과에 있어 어떤 행위는 의무와 동일할 수 있으나 아직 도덕적 행위라 불릴 수 없다. 그 동기가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도덕법칙에 따른 행위는 그 동기가 도덕법칙에 대한 존경에 있는 행위를 말한다. 칸트는 존경이라는 동기에서 나온 행위만을 도덕적 행위로 인정한다.

의무와 유사한 또 다른 용어는 책임이다. 책임에 해당하는 서양 말로는 ‘responsibility’도 있다. 이 경우 책임은 의무에 대한 능동적이고 자발적인 부담을 가리킨다. 반면 ‘obligation’으로서의 책임은 의무에 대한 수동적이고 강제적인 부담을 의미한다.

별이 빛나는 하늘, 내 안의 도덕법칙
칸트가 1804년 80세의 나이로 인생을 마감했을 때 수천 명의 사람들이 모여 그의 위대한 삶을 기렸다. 그리고 그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을 새겨 넣었다.

내 위에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안의 도덕법칙
The starry heavens above me and the moral law within me.

그것에 대해 자주, 그리고 계속해서 숙고하면 할수록 점점 더 새롭고 점점 더 커다란 경탄과 외경으로 마음을 채우는 두 가지 것이 있다. 그것은 내 위에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안의 도덕법칙이다. (···) 전자[별이 빛나는 하늘]는 내가 외적 감성 세계 안에서 차지하는 자리에서 시작해서 내가 서 있는 그 연결점을 무한 광대하게 세계들 위의 세계로, 천체들 중의 천체들로, 뿐만 아니라 그것들의 주기적인 운동의 한없는 시간 속에서 그 시작과 지속을 확장한다. 후자[내 안의 도덕법칙]는 나의 볼 수 없는 자아, 나의 인격성에서 시작해서 참된 무한성을 갖는, 그러나 지성에게만 알려지는 세계 속에 나를 표상한다. (···) 무수한 세계 집합의 첫 번째 광경은 동물적 피조물로서의 나의 중요성을 말살해버린다. 동물적 피조물은 질료를 짧은 시간 동안 생명력을 부여받은 후에 다시금 (우주 안의 한낱 점에 불과한) 유성에게 되돌려줄 수밖에 없다. 이에 반해 두 번째 광경은 예지자로서의 나의 가치를 나의 인격성을 통해 한없이 드높인다. 인격성에서 도덕법칙은 동물성으로부터, 나아가 전 감성 세계로부터 독립해 있는 생을 나에게 개시한다.
- 『실천이성비판』 맺음말 전집 5권 161~162쪽

이론은 진의 가치를, 실천은 선의 가치를, 예술은 미의 가치를 추구한다. 칸트의 3대 비판서는 각각 이론적 지식, 실천적 행위, 예술적 창조가 어떻게 서로 다른 가능 조건 위에 서 있는지 밝히고, 따라서 각각의 타당성 영역이 어떻게 다른지 입증했다.

칸트의 비판철학은 결국 마음을 해부하여 이론적, 실천적, 예술적 보편성이 어떻게 서로 다른 조건에 근거하며 따라서 어떻게 서로 다른 타당성 범위를 거느리는지를 보여주는 작업이다.

칸트는 『판단력비판』 전반부에서 숭고의 미학을 제시하며 조화의 논리에 갇혀 있던 과거의 예술철학을 비로소 전복한다. 칸트는 근대 미학의 문을 열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탈근대 미학의 초석을 마련한다.

세 번째 코페르니쿠스적 전회
칸트는 근대 미학의 출발점으로 간주된다. 심미적 체험의 독특한 특성을 포착하는 것은 물론, 심미적 판단1이 지닌 보편적 타당성을 정당화하는 길을 처음 열어놓았기 때문이다. 칸트는 이런 두 가지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반성적 판단’이라는 개념을 끌어들였는데, 이것은 칸트가 철학사에서 일으킨 또 하나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라 할 수 있다.

칸트는 이렇게 우연한 사실로부터 새로운 보편자로 나아가는 판단을 ‘반성적 판단reflexive judgement’이라 명명한다. 그리고 이것을 보편적 개념에서 출발하여 특수한 사실로 나아가는 ‘규정적 판단determining judgement’과 구별한다.

‘규정’과 ‘반성’을 말과 사물 사이의 관계를 중심으로 새롭게 정의해보자. 즉 규정이란 말에서 사물로 가는 판단이고, 반성이란 사물에서 말로 가는 판단이다. 아이가 말을 배우는 과정을 생각해보면 규정적 판단과 반성적 판단이 무엇인지 좀 더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천재성은 배우거나 가르칠 수가 없다. 따라서 과학에서는 천재가 있을 수 없다. 과학적 지식은 논리적으로 설명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보편적으로 전달 가능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칸트는 셰익스피어와 더불어 천재의 사례로 꼽히던 뉴턴을 천재로 인정하지 않았다.

앙꼬 없는 찐빵은 찐빵이 아닌 것처럼, 감성적 이념이 빠진 작품은 작품이 아니다.

어떤 시는 정말로 산뜻하고 우아할 수 있으나 정신이 결여되어 있을 수 있다. 어떤 이야기는 정확하고 정연하나 정신이 결여되어 있다. 어떤 축하 연설은 철저하고 동시에 엄숙하지만 정신이 결여되어 있다. 회화會話도 즐거움은 없지 않지만 정신은 결여되어 있는 게 많다. 심지어 어떤 귀부인에 대해서도 그녀는 예쁘고 사근사근하고 얌전하지만 정신을 결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면 도대체 여기에서 정신이라는 말이 뜻하는 바는 무엇일까? 정신이란 미학적 의미에서는 마음에 생기를 일으키는 원리를 말한다.
- 『판단력비판』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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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있다. 생산된 지식들은 파편들처럼 방치되는 것이 아니라 총체적으로 체계화되어야 한다. 이런 체계화의 요구에 부응하는 능력이 이성이다.

칸트의 모든 비판서에는 변증론이 등장한다. 변증론의 주된 목적은 철학사 해체에 있다. 칸트는 변증론을 통해 자기 이전의 사상사를 간결한 삼단논법으로 재구성한 후 순식간에 무너뜨린다.

『순수이성비판』의 변증론이 겨냥하는 대상은 전통 형이상학, 특히 17세기 대륙 이성론이다. 서양에서 형이상학은 영혼, 우주, 신이라는 세 가지 문제와 싸워왔다. 이 세 가지 이념에 대한 이론적 인식을 추구해온 것이 서양 형이상학이다. 칸트는 변증론을 통해 전통적인 영혼론, 우주론, 신론을 차례대로 와해해간다.

인간은 그 형이상학적 세계에서 자라나는 물음에 응답하지 않는다면 삶의 의미를, 나아가 자연에 대한 체계적 이해를 구할 수 없다.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을 통해 인식의 본성을 밝히고 그 한계를 분명히 한 궁극의 목적도 여기에 있다.

우리는 대상을 사물로서 인식할 수 없다 해도 적어도 그것을 사유할 수 있어야 한다. (···) 그러므로 나는 신앙을 위한 자리를 얻기 위해 지식을 폐기해야만 했다.
- 『순수이성비판』 재판 서문 XXVI쪽, XXX쪽

순수 이성 비판의 진정한 목적은 이성의 사유에 올바른 문제를 제기하는 것, 이성의 사유에 올바른 방향과 좌표를 제시하는 것, 참된 학문의 체계와 믿음의 근거를 구축하는 것이다.

경험적 인식의 중심에 있는 것이 지성이라면, 인식의 영역 바깥으로 사유가 나아갈 때 올바른 문제를 가리키며 방향과 구도를 열어주는 것은 이성이다. 그리고 이런 이성의 사유로 가기 위한 예비적 과정이 지금까지의 순수 이성 비판인 셈이다.

칸트 이전까지는 명제를 분석명제와 종합명제로 나누었다. 분석명제에서는 술어에 해당하는 속성이 주어에 이미 포함되어 있다. 분석명제는 주어에 이미 포함된 속성을 바깥으로 끄집어내고 있을 뿐이다.

‘삼각형은 세 변을 가진다’ 또는 ‘삼각형은 넓이를 지닌다’ 같은 명제를 보자. 여기서 술어인 ‘세 변’과 ‘넓이’는 모두 주어인 삼각형의 정의 속에 함축되어 있다. 이런 명제는 결코 틀릴 수 없다. 언제나 보편적이고 필연적이다.

종합명제에서는 주어에 없는 속성이 술어에 의해 덧붙여진다. ‘이 삼각형은 금으로 만들어져 있다’ ‘저 삼각형은 초록이다’ 같은 명제를 보자. 여기서는 술어에 있는 ‘금’이나 ‘초록’은 삼각형의 정의에 없는 요소다. 삼각형 자체와 무관한 경험적 성질이 계사(‘~이다’)에 의해 주어와 결합된다.

종합명제는 보편적이지도 필연적이지도 않다. 다만 개연적이며, 그래서 언제나 오류 가능성에 빠질 위험에 있다.

영국 경험론은 모든 지식의 기원을 감각적 경험에 두었고, 그 결과 학문적인 명제 일반은 개연적이거나 확률적인 타당성밖에 가지지 못한다는 회의론으로 귀착했다.

칸트는 합리론과 경험론의 대립을 넘어 그 두 가지 입장을 종합한다. 칸트는 뉴턴의 물리학도 수학적 진리만큼 보편적이고 필연적이라고 간주했다. 거꾸로 형식과학의 명제도 경험과학의 명제 못지않게 내용의 증가를 동반한다고 보았다.

칸트에게서는 인식이든 사유든 마음속의 모든 일은 4가지 인식능력(감성, 상상, 지성, 이성)에 의해 일어난다.

『순수이성비판』 초판 서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인간의 이성은 자신의 본성에 의해 부과되기 때문에 거부할 수 없는, 그렇지만 자신의 능력을 벗어남으로 도대체 대답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 문제들로 인해 괴롭힘을 당하는 운명이다.
- 『순수이성비판』 초판 서문 VII쪽

첫 번째 코페르니쿠스적 전회의 귀결들
칸트는 자신의 철학을 초월론적 철학이라고 부른다. 원어인 ‘트랜센덴탈transcendental’의 의미는 칸트 전공자들 사이에서도 그 번역을 놓고 많은 이견이 오갈 만큼 해석이 쉽지 않다. 이 문제에 적절한 해법을 제시하기 위해 먼저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이룬 코페르니쿠스적 전회의 의미를 그것이 초래하는 여러 결과들을 통해 정리해보도록 하자.

첫째, 칸트의 첫 번째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는 단순히 대상 중심의 인식론이 주체 중심의 인식론으로 바뀐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또한 철학, 특히 형이상학이 신학에서 완전히 벗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6 칸트 이전의 철학, 특히 합리론의 독단적 형이상학은 신학에서 해방되지 못했다.

둘째, 칸트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는 시간 개념에서도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칸트 이전의 사상사에서 시간은 자연의 규칙적인 운동(특히 천체의 운동)을 기준으로 측정되는 객관적인 사태였다. 그러나 칸트의 인식론에서 시간과 공간은 더 이상 인식 주체와 무관하게 실재하는 어떤 것이 아니다. 이것들은 다만 우리 의식이 외부 세계로부터 자극을 수용하는 감성적 직관의 형식에 불과하다. 의식의 바깥에 있던 시간이 자연의 운동에서 해방되어 의식 안으로 귀속된 것이다.

셋째, 철학적 이성이 수학적 이성으로부터 해방된다. 철학적 이성은 당시까지 과학과 철학을 지배하던 수학적 이성과 분리되어 이제 자기 고유의 논리를 발견하게 된다. 17세기 과학혁명 이후 수학은 학문의 모델이었다. 이성은 언제나 수학적 이성을 의미했다. 합리성이란 측정 가능성과 연역적 증명에 기초한 수학적 합리성이었다. 따라서 모든 학문은 보편수리학의 이념 아래 하나로 통합되는 형국이었다.

철학마저 수학의 방법에 의존할 때만 엄밀한 학문으로 인정받았다. 가령 스피노자의 대표작 『윤리학』의 원제는 ‘기하학적 순서로 증명된 윤리학Ethica in ordine geometrico demonstrata’이다. 기하학적 논증을 모델로 철학적인 논증이 이루어지던 당대의 일반적 추세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칸트는 수학과 철학을 분리하면서 동시에 인식과 사유, 그리고 지성과 이성을 구별한 것이다. 이전까지는 신학에, 그 이후에는 수학에 예속되어 있던 철학은 이로써 학문의 여왕이라는 우월한 위치를 다시 획득한 셈이다.

나는 대상들이 아니라 대상들 일반에 대한 우리의 선험적 개념들을 다루는 모든 인식을 초월론적이라 부른다. 그러한 개념들의 체계는 초월론 철학이라 일컬어질 것이다.
- 『순수이성비판』 초판 서론 11~12쪽

철학의 신대륙을 발견하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초월론적’이라는 용어는 ‘트랜센덴탈transcendental’의 번역어다. 이 말의 어원에는 트랜스-카테고리알trans-categorial, 다시 말해서 ‘범주-초과적’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이 단어는 1128년에 철학자이자 독일 지역 궁중대신 필리페Philippe라는 인물이 처음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초월론적 차원은 칸트가 철학사에 가져온 가장 위대한 발견이다. 칸트는 철학 고유의 영토, 신대륙을 발견한 철학의 콜럼버스다. 칸트 이후의 철학사는 초월론적 차원의 발굴 및 확장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칸트는 『실천이성비판』을 통해 근대적인 삶에 부합하는 새로운 윤리학을 제시한다. 칸트의 ‘자유’ 개념은 한없이 작고 유한한 인간일지라도 광대한 우주에 맞설 수 있는 용기를 가져다주었다. 이것이 바로 칸트가 우리에게 주는 희망의 근거이자 품격의 원천이다.

두 번째 코페르니쿠스적 전회
앞에서 『순수이성비판』을 중심으로 칸트가 이론철학에 가져온 코페르니쿠스적 전회에 대해, 이 전회의 귀결점들에 대해 논의했다. 이제부터는 『실천이성비판』을 중심으로 칸트가 실천철학에 가져온 변화에 대해 알아보자. 칸트는 인식론에서뿐만 아니라 윤리학에서도 거대한 전환을 가져왔는데, 그 전환 역시 코페르니쿠스적 도식으로 집약할 수 있다.

고대인들은 동일한 문화적 관습과 전통 안에서 공동체를 이루며 살았다. 그렇기에 구성원들의 사고방식이 대체로 동질적이었다. 동질적인 구성원들 사이에서는 인생에서 가장 좋은 것(선)을 놓고 합의한다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종교, 풍속, 교육 배경이 같은 사람들에게 이상적인 인간형과 최선의 삶에 대해 토론하고 의견 일치를 끌어낸다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출생 지역, 문화나 교양, 종교적 신념이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인 도시에서 이상적인 인간이란 무엇이고 최선의 삶이란 무엇인지를 놓고 합의한다는 것은 쉬운 문제가 아니다.

문화적 배경이 다른 사람들이 이합집산하는 곳일수록 규칙을 적게 하는 것이 평화의 길이다. 구성원들이 사이좋게 살기 위해 요구되는 최소의 규칙을 정하는 것, 그렇게 정해진 규칙은 무조건 따르는 것, 이것이 평화롭게 사는 길이다. 법 중심의 윤리학은 이런 필요성에서 유래한다. 법 중심의 윤리학에서 도덕법칙은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구속력을 지니고, 그런 의미에서 의무라 불린다.

인간을 (감성 세계의 일부로서의) 자신을 넘어서게 하는 바로 그것, (···) 그것은 인격성이다. 인격성은 자연 전체의 기계적 질서로부터의 자유이자 독립성이며 동시에 자신에 고유한, 자기 자신의 이성에 의해 주어진 순수 실천 법칙들에 복종하는 존재자의 능력으로 보이는 어떤 것이다. (···) 인간은 비록 충분히 신성하지는 못하지만, 그러나 그의 인격에서 인간성은 그에게 신성하지 않을 수 없다. (···) 인간은 곧 그의 자유가 지닌 자율의 힘에 의해 신성한 도덕법칙의 주체다.
- 『실천이성비판』 전집 5권 86~87쪽

칸트 철학의 근본 물음들로 돌아가자.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는 무엇을 희망할 수 있는가?

칸트가 말하는 의지는 욕망의 일종이다.8 여기서 칸트가 상위의 인식능력으로 세 가지를 꼽았음을 다시 기억하자. 인식(앎)의 능력, 욕망의 능력, 감정(쾌-불쾌)의 능력이 바로 그것이다. 그중 실천의 세계를 여는 최초의 능력 혹은 상위의 능력은 욕망이다.

존경, 도덕적 판단의 원동력
의지 다음에는 존경respect이 있다. 존경이란 정확히 말하면 ‘도덕법칙에 대한 존경’을 의미한다. 칸트는 도덕적 판단이 일어날 수 있게 만들어주는 ‘동기’를 존경에서 찾았다. 이 말의 독일 원어 ‘Triebfeder’는 원동력을 의미하는데, 요즘 말로는 엔진이나 모터 같은 동력 장치에 해당하는 용어다.

칸트의 존경은 성리학의 ‘경敬’과도 비교해볼 수 있다. 퇴계는 『성학십도』에서 성리학 전체를 ‘경’이라는 한 글자로 압축한다. 칸트 윤리학과 비교해 함께 살펴볼 만한 대목이다.

자율, 적극적 의미의 자유
이제 자유를 의미하는 자율autonomy을 보자. 칸트 철학에서 자율은 의지의 자율을 말한다. 의지의 자율은 ‘초월론적 자유’와 구별되는 ‘실천적 자유’를 정의한다.

책임과 의무를 규정하는 규칙이다. 아무것이나 다 할 수 있는 상태가 자유가 아니라는 것이요, 책임이나 의무와 함께 갈 때만 자유는 비로소 의미 있는 자유가 된다는 것이며, 그런 책임과 의무를 규정하는 것이 규칙이라는 것이다.

다른 한편 책임과 의무를 규정하는 규칙은 외부로부터 강요된 규칙이 아니라 행위자 스스로 제정한 규칙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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