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가타 유지, 24세. 미요시 아키에, 22세. 그것이 그들이었다.

오전에 도호쿠 신칸센으로 그들은 사에구사와 함께 센다이로 떠났다. 그들의 시계를 되감는 작업의 시작이었다.

시치고산七五三
어린이의 성장을 축하하고 건강을 비는 의식으로 남자는 3, 5세, 여자는 3, 7세 되는 해에 전통복장으로 신사 등에 참배함

이 얼굴, 이 눈. 본 기억이 있다. 너무나도 잘 아는 표정이다. 유지 자신이 요 며칠 사이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볼 때 발견한 표정이었다.

두려움이다.

미야마에 다카시는 두려워하고 있다. 태세를 갖추고 있다.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무서워해야 할 존재가 앞길에 기다리고 있는 것을, 이 사진 속의 당시 불과 열일곱이던 소년은 알고 있었을까.

정말로 미요시 유키에의 탓이었을까. 그녀가 마음대로 되지 않아서, 라는 단지 그것뿐일까. 혹은 열일곱 살 때 네가 본 ‘뭔가 두려워해야 하는 존재’가 사이와이 산장에 있었나 ― .

"사라져 가는 방언이군."

"그러게요. 좋은지 나쁜지 모르겠습니다. 특색이 없어져 버리니까. 요즘 젊은이들은 모두 도쿄의 녀석과 구분이 가지 않아요. 애쓰고 있는 건 오사카 사투리뿐이고."

"그 남자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으니까 말이야, 라고 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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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바탕 비가 올 것 같군." 그렇게 말하면서 그녀의 손을 잡았다. 작고 차가운 손이었다.

"여보, 에쓰코를 부탁합니다"였다. 딸에게 환갑을 맞이하려는 남편을 부탁하는 게 아니라 남편에게 딸을 부탁하고 갔다.

"시작하면 돌아올 수 없는 게임이 있니?"

유카리는 웃었다. "그런 건 무섭잖아. 게임하고 있는 사람이 게임 안에서 갇혀서 나올 수 없는 것 같아."

― 신교지 씨……구해
신교지 씨, 구해줘요.
미사오는 그렇게 말하려 했다.

처음으로 그녀의 볼을 가볍게 만지고 그는 말했다. "당신은 정말로 감이 좋아."

"조심해."

외롭지만 친구를 만들어서 생기는 번거로움이 싫으니까, 타인과 직접 접촉해서 생기는 문제들이 싫으니까, 전화로 목소리밖에 들을 수 없는 우리를 원하는 거지요. ‘전화로 목소리밖에 들을 수 없다’는 말은 바꿔 말하면 ‘전화 속만의 교제로 끝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아시겠습니까?"

네버랜드와 같은 형태의 전화 피난소가 존재하는 이상, 절대 조건은 ‘이쪽에서는 결코 파고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 유카리, 미사오 언니 좋아해. 엄마, 파이팅!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유카리의 격려뿐이다.

"그러니까 원래의 우리도 지금의 우리도 같은 인간인 것은 변함없으니까, 이름은 하나로 족합니다. 새로운 이름을 붙이면 ― 비록 그것이 임시라 해도 ― 그 순간에 다른 인간이 탄생하는 셈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원래 이름의 존재로 돌아갔을 때는 임시 이름을 붙였던 존재는 죽는 게 됩니다. 그게 싫습니다."

"고마워. 나, 임시 고용한 이름 따위 갖고 싶지 않아."
"같은 의견이라서 한시름 놨네."

그는 문득 그녀가 이전에도, 즉 사라져 버린 과거의 어딘가에서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상태를 경험한 적이 있었던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명의는 ‘사토 이치로’라고 합니다."

사에구사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건 니혼타로(한국에서 흔히 예시로 드는 ‘홍길동’처럼 쓰이는 이름)나 마찬가지군."

"딱 좋군. 당신들 이사 기념 메밀국수다(일본에서는 새로 이사하면 메밀국수를 이웃에 인사로 돌림)."

"더구나 미사오는 아직 고교생이니까."

에쓰코가 말하자 기리코는 아하하 하고 웃었다. "학생이냐 사회인이냐는 상관없어요. 지금은 모두 자유롭고 돈을 갖고 있으니까요. 지금은 젊은 여자애에게는 황금시대죠. 뭐든 할 수 있고 대개의 소망은 이루어지고."

그런 건가 ― 하고 에쓰코는 생각했다. 유카리도 그렇게 될까. 시대가 그런 빛을 하고 있으니까 물들어 가는 것일까.

"대개의 인간은." 사에구사는 웃었다. "책임감이 강하니까. 틀렸다는 걸 알면 제대로 알려 주거든."

"오토인가. 그건 여자나 타는 거야. 차종이나 차 색깔은 떠오르지 않나? 번호라면 더 좋고. 그것만 알면 바로 당신 신원을 파악할 수 있는데."

몸이 무겁다. 뇌가 있어야 할 곳에 톱밥이라도 가득 차 있는 듯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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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생각했을 때, 거의 동시에 ‘총포전래’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일오사삼 총포전래.’
1543년, 총포전래銃砲傳來.
어처구니없고, 스스로도 기가 막혔다.

그러나 비슷한 연대 맞히기를 몇 개쯤 기억해 내는 것은 가능하다. 좋은 나라 만들자 가마쿠라 막부. 무사고의 날 없음 다이카 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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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판 없는 거리

정거장 플랫폼에
내렸을 때 아무도 없어.

다들 손님들뿐,
손님 같은 사람들뿐,

집집마다 간판이 없어
집 찾을 근심이 없어

빨갛게
파랗게
불붙는 문자도 없이

모퉁이마다
자애로운 헌 와사등에
불을 켜 놓고, - P77

손목을 잡으면
다들, 어진 사람들
다들, 어진 사람들

봄, 여름, 가을, 겨울,
순서로 돌아들고. - P78

무서운 시간

거 나를 부르는 것이 누구요,

가랑잎 이파리 푸르러 나오는 그늘인데,
나 아직 여기 호흡이 남아 있소.

한번도 손들어보지 못한 나를
손들어 표할 하늘도 없는 나를

어디에 내 한 몸 둘 하늘이 있어
나를 부르는 것이오.

일이 마치고 내 죽는 날 아침에는
서럽지도 않은 가랑잎이 떨어질 텐데...

나를 부르지 마오. - P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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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밤

솨- 철석! 파도 소리 문살에 부서져
잠 살포시 꿈이 흩어진다.

잠은 한낱 검은 고래 떼처럼 설레어
달랠 아무런 재주도 없다.

불을 밝혀 잠옷을 정성스리 여미는
삼경(三更).
염원.

동경(憧憬)의 땅 강남에 또 홍수질 것만  싶어,
바다의 향수보다 더 호젓해진다. - P57

이적

발에 터분한 것을 다 빼어 버리고
황혼이 호수 위로 걸어오듯이
나도 사뿐사뿐 걸어보리이까?

내사이 호숫가로
부르는 이 없이
불리어 온 것은
참말 이적‘이외다.

오늘따라
연정, 자홀(自), 시기, 이것들이
자꾸 금메달처럼 만져지는구려

하나, 내 모든 것을 여념 없이,
물결에 써서 보내려니
당신은 호면(湖面)으로 나를 불러내소서.

1. 이적 (異蹟): 기적. - P60

아우의 인상화

붉은 이마에 싸늘한 달이 서리어
아우의 얼굴은 슬픈 그림이다.

발걸음을 멈추어
살그머니 앳된 손을 잡으며
"너는 자라 무엇이 되려니"
"사람이 되지"
아우의 설운 진정코 설운 대답이다.

슬며시 잡았던 손을 놓고
아우의 얼굴을 다시 들여다본다.

싸늘한 달이 붉은 이마에 젖어,
아우의 얼굴은 슬픈 그림이다. - P61

코스모스

청초한 코스모스는
오직 하나인 나의 아가씨,

달빛이 싸늘히 추운 밤이면
옛 소녀가 못 견디게 그리워
코스모스 핀 정원으로 찾아간다.

코스모스는
귀또리 울음에도 수줍어지고,

코스모스 앞에 선 나는
어렸을 적처럼 부끄러워지나니,

내 마음은 코스모스의 마음이요
코스모스의 마음은 내 마음이다. - P62

슬픈 족속

흰 수건이 검은 머리를 두르고
흰 고무신이 거친 발에 걸리우다.

흰 저고리 치마가 슬픈 몸집을 가리고
흰 띠가 가는 허리를 질끈 동이다. - P63

달같이

연륜이 자라듯이
달이 자라는 고요한 밤에
달같이 외로운 사랑이
가슴 하나 뻐근히
연륜처럼 피어나간다. - P66

장미 병들어

장미 병들어
옮겨 놓을 이웃이 없도다.

달랑달랑 외로이
황마차 태워 산에 보낼거나

뚜ㅡㅡㅡ구슬피
화륜선 태워 대양에 보낼거나

프로펠러 소리 요란히
비행기 태워 성층권에 보낼거나

이것 저것
다 그만두고

자라가는 아들이 꿈을 깨기 전
이내 가슴에 묻어다오. - P67

산골 물

괴로운 사람아 괴로운 사람아
옷자락 물결 속에서도
가슴속 깊이 돌돌 샘물이 흘러
이 밤을 더불어 말할 이 없도다.
거리의 소음과 노래 부를 수 없도다.
그신듯이‘ 냇가에 앉았으니
사랑과 일을 거리에 맡기고
가만히 가만히
바다로 가자.
바다로 가자.

1.그신듯이: 끌리듯이. - P70

자화상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 P71

팔복-・마태복음 5장 3-12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 - P75

병원

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 병원 뒤뜰에 누워, 젊은 여자가 흰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 놓고 일광욕을 한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앓는다는 이 여자를 찾아오는 이, 나비 한 마리도 없다. 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 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에서 금잔화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 안으로사라진다.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ㅡ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던 자리에누워 본다. - P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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