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을 가졌다고는 해도 역시 애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은 아내가 훨씬 많다. 엄마가 하는 말은 아이─특히 엄마랑 사이좋은 딸에게는 신의 계시에 가까운 효력을 지니는 법이다.

"그게 참 재미있다니까. 애들이 ‘어머니’는 혼동하지 않아. 나인지 할머니인지 확실히 안대. 신기하지?"

"세상에는 하느님도 부처님도 없어요."

세상에는 하느님도 부처님도 분명히 있다. 그저 당신이 필요로 했을 때 하필 다들 휴가를 떠났을 뿐이다.

반장은 그걸 생각하면 늘 그렇듯 하시바가 못 견디게 가여웠다. 이 사람은 무엇 하나 잘못하지 않았다. 그저 하느님과 부처님이 휴가 간 사이에 나쁜 장소에서 나쁜 상대와 맞닥뜨리고 말았을 뿐인데 그걸로 인생이 망가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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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벨 소리에 벽시계를 쳐다보았다. 새벽 두시 반. 동생 말대로 어김없이 정각이었다.

벨은 계속 울렸다. 착신을 가리키는 빨간 등이 조급하게 깜빡였다. 나는 동생을 채근해서 수화기를 들게 했다.

아까도 얘기했죠? 물건에도 영혼이 깃들 때가 있어요. 영혼이 있는 존재에는 반드시 자정 작용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언제든지 자신을 가장 좋은 상태로 유지해 두려는 기능이요.

왜 그렇게 웃으세요? 네? 만든 얘기? 제가 지어낸 얘기로 당신을 협박하려고 한다는 겁니까?

엄마인 이사코는 다소 무리하더라도 이왕이면 고급품을 사라고 했다. 어차피 또다시 신용카드 신세를 지는 꼴이 되기야 하겠지만, 안타깝게도 불과 사흘 전에 회사 근처 부티크에서 사만 팔천 엔짜리 가을 정장을 산 참이었다. 엄마 말대로 고가의 물건에 손을 댔다가는 다음 달 카드 값 막기가 엄청나게 버거워지고 만다.

점원의 명쾌한 주장을 듣고서 디자인이 약간 귀엽고 실루엣이 예쁜 상복을 골랐다. 상복을 입으면 여자는 누구든 삼십 퍼센트쯤 예뻐진다.

당신은 말했어요. 인간은 내일 덜컥 죽어 버릴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아플 만큼 절실히 깨달았다, 사는 동안에 하고 싶은 걸 해 두지 않으면 분명히 후회할 거다, 자신의 마음에 정직하게 살지 않으면 죽어도 죽을 수 없을 거라고. 그러니까 나랑 함께 살고 싶다고 말해 주었어요.

우리의 추억이 훼손될 만한 일은 그만두고 모든 걸 찬란했던 기억 속에 담아 주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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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꽃 무늬의 넥타이.

잘못 본 게 아니었다. 착각도 아니다. 분명히 그 무늬다. 쪽빛 천에 손으로 그린 붉은 동백.

잊을 리가 없다. 용서 없는 붉은 빛깔을.

하지만 우리는 괜찮은 짝. 흩뿌려진 퍼즐에서 옆에 놓여야 하는 올바른 조각.

지각을 해도 웃으며 용서해 줄 사람을 기다리게 한 여자들만의 특권. 그녀들은 웃는 낯으로 혼잡한 인파를 밀치면서 이렇게 말한다.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저를 기다리는 남자가 있어서요─.

인간이 ‘행복’을 느끼는 곳은 분명 심장이리라. ‘행복’한 일을 만날 때마다 심장은 쿵쾅거린다. 애인과 단둘이 있을 때 심장 박동이 빨라지는 이유는 상대의 손이 그 행복을 확인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너는 나를 죽여 놓고서 "잘 지내"라고 손을 흔들며 헤어질 생각인 거야.

‘어머니가 끝내 반대하셔서.’
‘이대로는 너도 불행해질 뿐이고.’
‘잘해 나갈 자신이 없어졌어.’

‘그때 나타난 그녀에게 끌리고 말았어. 이런 기분은 처음이야.’

‘미안, 너한테는 정말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어. 이제 너를 사랑하지 않아. 그녀를 사랑해. 거짓말 못하겠어. 미안, 정말 미안.’

몇 번이고 반복되는 공허한 말. 알맹이를 잃은 병 속에서 울리는 배신의 목소리. 미쓰루는 그걸 봉인해 버리는 대신 번쩍 치켜들어 아사코를 쳤다.

산산조각이 날 때까지.

약혼과 결혼 준비에 든 돈. 일실 이익逸失利益. 사내 연애였기 때문에 아사코는 약혼과 동시에 회사를 그만두었다. 대기업이었으니 그대로 다녔다면 괜찮은 월급을 계속 받을 수 있었으리라. 그걸 일실 이익이라고 하는 모양이다. 그리고 위자료.

"여자에게는 일과 사생활이 이상한 식으로 불리하게 엮이는 일이 잦죠."

"사장 비서."
"멋지네요."
"겸 내연녀. 그쪽이 끝나서 잘렸어."

택시 운전사나 아사코 같은 웨이트리스, 신칸센에서 옆에 앉았을 뿐인 처음 본 승객─그런 낯선 이에게 속내를 얘기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다. 뒤탈 없이 흘려들어 주겠지, 하고 생각하기 때문이리라.

"당연히 했지. 소용없었어. 부인은 내 일부터 시작해서 전부 알고 있더라고. ‘여자 놀음은 남편의 병이에요. 죽을 때까지 낫지 않을 테죠’라던데? 내 꼴만 우스워졌지."

"계속 지하에 있으면 비가 내려도, 줄곧 내려도 전혀 눈치채지 못하지? 그런데 어느 순간 별생각 없이 옆 사람을 보니 젖은 우산을 들었어. 아, 비가 내리는구나, 그때 비로소 알지. 그러기 전까지 지상은 당연히 화창하리라고 굳게 믿었던 거야. 내 머리 위에 비가 내릴 리가 없다고."

‘나도 사실은 웃는 게 아니야’라는 비웃음일 때는 괜찮다. 하지만 ‘나는 웃어 주겠어’라고 진심으로 생각하기 시작하면 위험하다. 웃고 웃고 웃으면서 역 승강장에서 뛰어내리는 꼴이 되기 십상이니까.

"돈 문제가 아니야. 나는 남겨지고 싶지 않아. 세상이 나만 따돌리는 걸 허락하고 싶지 않아. 다들 잘하고 있잖아. 왜 나만 안 되지?"

아사코와 그녀, 조금 전 ‘모리이 요코’라고 이름을 밝힌 여자는 테이블을 사이에 둔 채 마주 보고 우뚝 섰다. 서로 이름을 들은 순간 천적이었음을 깨닫기라도 한 것처럼.

요코는 핸드백을 열고 아쓰시의 명함을 안에 쓱 집어넣더니 소리 내서 닫았다. 손놀림이 꼭 ‘붙잡았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아사코, 비슷한 재난을 당한 사람이 둘 있으면 말이야. 너만 먼저 빠져나가게 할까 보냐 하는 기분이 드는 법이야. 누구든 그래."

"넥타이를 주는 건 ‘나는 당신에게 목맸다’라는 뜻이야."

요코는 그렇게 말하고 웃더니 날카롭게 찌르는 것처럼 아사코를 보며 이렇게 덧붙였다.

"하지만 ‘배신하면 이걸로 목을 졸라 버리겠어’라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지……."

쥐 죽은 듯 조용한 늦은 밤의 도시는 그 자체가 부드러운 사람들의 몸을 감싸고 있는 알과 비슷한, 어디로도 깰 수 없고 침입할 길이 없는 하나의 물체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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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장 행복한 탐정 시리즈 4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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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넓은 세상에는 우리의 상식 범위 안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사고를 가지고 그 사고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들이 우리가 막연히 예상하는 것보다 훨씬 많다.”

희망장 | 미야베 미유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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