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처럼 둥글둥글해지고 개처럼 길들여진 나는 사회로 돌아가더라도 아무 일도 하지 않고 하루 종일 멍하니 지내게 될 것이다. 마치 폐인처럼.
처음에 문윤은 ‘청원서’를 보내 심의회 출석을 요구한다. 그때 출석을 거부한 자, 혹은 ‘청원서’를 무시한 자에게는 ‘소환장’을 보낸다. 소환장의 안내대로 C역에 도착하면 시치후쿠진하마 요양소로 연행된다.
요양소에서는 자유를 빼앗기고 작가의 존엄도 침해받고 수치스러운 전향을 강요당한다. ‘갱생’에 굴복하지 않되 과감하게 반항하지 못하는 자에게는 은밀하게 이런저런 방법을 동원하여 미치게 유도한다. 나약한 인간은 절벽에서 몸을 던지고 싶어질 게 뻔하다. 자살을 택하는 것은 문윤이 원하는 바이다. 그것은 나약한 작가가 스스로 택한 거니까.
그래서 거울 따위는 필요가 없다는 거겠지. 거울은 말하자면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고 싶은 충동을 실현시켜 주는 물건이니까. 그것은 사회성으로 통한다. 이 병실에서 평생을 보낼 인간에게 사회성은 필요 없다.
중식을 거른 탓인지 석식이 조금 빨리 나왔다. 나는 안도하며 복잡한 심정으로 미카미를 맞았다. 늘 굶주린 나는 식사를 가져오는 미카미가 구세주처럼 느껴졌다. 그것이 싫었다.
미래의 희망이 생겨나면 사람은 아무래도 과거를 반추하게 되는 모양이다. 경험칙이 곧 다가올 미래에 대비해 마음의 준비를 시키는 걸까?
"콘텐츠가 아냐. 작품이지. 내가 피와 땀과 눈물로 쓴 작품이야. 그걸 콘텐츠라고 말하지 마. 당신들은 그래도 콘텐츠니까 그건 안 된다 이건 안 된다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 그건 잘못된 거야. 누군가가 쓴 작품에는 경중도 없고 선악도 없어. 멋대로 차별하지 말란 말이야."
"뭐라고 떠드는 거야. 자유에는 한계가 있어. 뭐든지 해도 좋다는 건 있을 수 없어. 그게 사회의 상식 아닌가."
"시시한 논리 들먹이지 마. 작품은 자유야. 인간의 마음은 자유니까. 무엇을 표현해도 돼. 국가권력이 그걸 금지하면 안 돼. 그게 검열이야, 파시즘이라고."
희망 따위도 애당초 없는 편이 나았을 텐데. ‘전향할 테니까 용서해 주세요’라고 소마 따위에게 애원하던 내 모습이 떠오른다. 전향. 얼마나 고풍스러운 단어인가.
‘전향이라니, 고바야시 다키지 시대도 아니고, 그런 고리타분한 얘기는 하지 마세요. 누가 들을까 겁나네.’
하지만 나는 전향했다. 변절했다. 상상력을 멋대로 구사해서 작품을 쓰면 안 된다는 말에, 예, 그리 할 테니까 용서해 주세요, 라고 굴복했다. 오로지 이 구속복이 무서워서.
"부디 당신의 불타는 능력을 밝은 세계에서는 쓰지 마시기를. 밝은 세계는 밝은 세계. 어차피 어둠 쪽에 있는 사람과는 인연이 없는 세계입니다."
2020년에 출간된 『일몰』은 작가 자신을 닮은 소설가와 권력의 대립을 다룬다는 점이 흥미롭다. 퇴행하는 일본 사회에 경고를 던지는 디스토피아 소설이랄 수 있는데, 일본 사회라고 한정할 일은 아니겠다. 신자유주의의 기승 아래 정치권력과 문화에 반동의 기운이 세계적으로 팽배하고 있는 만큼 어느 나라에서나 나름 현실성 있는 풍자로 읽힐 수 있다.
시골 바닷가 외딴 곳에 있는 ‘요양소’는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현대 사회를 상징하는 공간이다. ‘밥’으로 길들이며 올바른 작품을 쓰라고 강요하는 주체는 소장을 비롯한 공무원들이지만, 그들 뒤에는 무자비한 시장과 다양성을 거부하는 대중이 있다.
소설에도 ‘공모죄’라는 말이 여러 번 등장하지만, 2017년에 성립한 공모죄는 도쿄올림픽을 앞두고 테러 방지를 위해 도입된 법안이다. 다만 권력의 의지에 따라서는 반反원전 활동 등 정부를 비판하는 활동에 대해서도 악용될 수 있거니와, 범죄를 실행하지 않았지만 계획하는 것만으로도 처벌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많은 비판이 있었다.
일본에서는 2000년대 초반부터`『배틀 로얄』처럼 유혈과 살인이 난무하는 작품에 대한 대중의 비난이 있었고, 이에 따라 작가들이 잔인한 장면을 삼가자는 자숙의 분위기가 생겨났다. 기리노 나쓰오처럼 거침없이 소설을 써 왔던 작가에게는 이런 자기검열의 분위기처럼 커다란 위협은 없었을 것이다.
마쓰 유메이의 입을 빌어 작가는 이렇게 토로한다. "세계 어디서나 통하는 토를 달 수 없는 정론. 그런 선의의 정론이 전 세계에 만연해 있어서 참으로 숨이 막혔다."
자유를 두려워하는 대중은 지도자에게 열광하거나 국가니 정의니 하는 도그마로 도피한다. 그들은 대세에 추종하고 침묵의 동조를 하며 자유로운 영혼을 공격하는 것이다.
"아사하라가 내세운 세계관은 기본적으로 하나의 픽션이었다. 그러나 픽션에 익숙하지 않은 신자들은 아사하라가 제시한 픽션을 사실과 뒤죽박죽 섞어 고스란히 받아들였다, 다시 말해 픽션이 본래적으로 발휘하는 작용에 대한 면역성을 갖추지 못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잡문집』)라고 진단했다.
"누구나 논란을 두려워하고 위축되어 거슬리지 않는 말만 하게 되죠. 거기서 미디어는 의견이 있는 사람에게 대변시켜서 어떻게든 양쪽 의견을 병기해 균형을 잡으려고 하지만, 대론(對論)조차 되지 않는, 한쪽의 단순한 트집일 경우에도 양론(兩論)이라고 하기 때문에 그런 트집이 당당히 세상에 나와 버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움직임은 머지않아 소설가의 표현물에도 영향을 줄 것"이라고 기리노 나쓰오는 말한다.
언젠가 미야베 미유키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나쁜 일은 눈에 잘 띄지만 좋은 부분은 잘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세상이 전부 나빠졌다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 (제가)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은 많은 사람들의 잠 못 드는 밤을 위로해 주는 작품을 쓰는 것입니다."
반면 기리노 나쓰오는 어떤가. "꿈이나 희망이 없으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픽션에서까지 그런 걸 요구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꿈을 향해 달려가라든지 너는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존재라는 말을 듣고 감동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렇게 쉽게 넘어가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굳이 정의하자면 전자는 휴머니즘, 후자는 니힐리즘 정도가 될까.
"다들 너무나 능숙하고 잘 쓰지만 한편으로 ‘이걸 쓰면 안 된다’는 두려움이 내면화된 것 같다"며 안타까워하는 작가가 던진 마지막 한 마디는 "다양한 비난이나 장벽에 부딪칠지언정 나에 대해서도, 세상에 대해서도 도전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게 그 기개가 없어지면 끝장이죠"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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