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스페인에서 프랑코와 나치 파시스트 40명을 사살했지만 결국 놈들에게 졌다. 적을 죽인 것은 전혀 후회하지 않지만, 지금도 처음으로 죽인 인간의 얼굴을 잊지 못해. 인간이라면 잊어서도 안 되겠지.
"그러나 죽음을 택하려고 하지 마라, 이리나. 그건 자네 인생에 대한 배신이야."
"죽기 위해 전장에 갈 생각은 없습니다, 동지."
"제가 아는 누군가가…… 자신이 무엇을 경험했는지, 자신이 왜 싸웠는지, 자신이 도대체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듣고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했는지를…… 소련 인민을 고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를 변호하기 위해서도 아니라, 그저 전달하기 위해서 말할 수 있다면…… 그때 제 전쟁은 끝납니다."
한곳에 머무르지 마라! 네가 쏜 적병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상대를 무시하지 마라! 너만 똑똑하다고 생각하지 마라!
"지, 진정해. 인간은 태생으로 가치가 정해지는 게 아니잖아."
"이, 있잖아, 귀족이라지만 조상이 데카브리스트의 난*에 참가했다가 유배된 유서 깊은 혁명파 가문이고, 혁명전쟁 때도 붉은 군대에 협력했어. 아버지는 혁명 후에도 소련의 공무원으로 일했고. ……뭐, 나한테 이런 이름을 지어준 엄마는 프랑스인 가정교사랑 같이 망명해 버렸지만."
* 1825년 12월, 나폴레옹의 침공을 격퇴한 알렉산드르 1세가 사망한 뒤 니콜라이 1세에게 충성하기를 거부한 청년들이 입헌군주제 시행과 농노제 폐지, 전근대적인 러시아의 전면 계획을 요구하며 일으킨 봉기. 그러나 실패로 끝났다.
파시스트 독일은 여성을 부엌에 밀어 넣고, 미국 여성은 치어리더가 되었어. 그러나 우리 소련은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나라임을 인정한 거야. 기회만 있으면 영웅도 되고 장군도 될 수 있어. 나는 그걸 실현해 보일 거야.
지킬 수 없었던 엄마. 앞으로는 다른 누군가의 엄마를 구하고 싶다. 능욕당하고 살해당하는 딸들이 더는 없도록 딸들을 지키고 싶다.
"전면 전쟁이 한창인 이때, 저격병이 유용하게 쓰이는 판국은 어디나 지옥이다. 거기에 갈 각오가 없는 자는 이름을 대라." 전원 침묵으로 대답했다. 지옥으로 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너도 사냥꾼이었으니까 기억하지? 사격하는 그 순간에 도달하는 경지. 내면이 한없이 무無에 가까워지고 끝없는 진공 속에 나만 있는 기분. 그리고 사냥감을 쏘는 순간의 기분. 거기에서 평소의 자신으로 돌아오는 감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