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은 지나쳐 가고 우리는 어른이 되고 —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아무튼, 하루키 | 이지수
어떤 책을 하도 많이 읽은 나머지 삶의 곳곳에서 그 책의 문장들이 머릿속에 자동 재생 될 때가 있으신지. 내게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가 바로 그런 책이다. * 윤성원 옮김, 문학사상, 2006.
나는 중학생의 현실 도피에 유용한 도구는 술이나 담배보다 하루키의 소설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리포트가 잘 안 써지면 "완벽한 문장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아. 완벽한 절망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이라는 문장을 곱씹으며 스스로를 달랬다.
"결국 글을 쓴다는 건 자기 요양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자기 요양을 위한 사소한 시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라는 대목을 곧잘 떠올렸다.
"모든 건 스쳐 지나간다. 누구도 그걸 붙잡을 수는 없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그 문장이 나를 데려간 곳 — 『노르웨이의 숲』
나는 서른일곱 살이었고 그때 보잉 747기의 좌석에 앉아 있었다. 그 거대한 비행기는 두터운 비구름을 뚫고 내려와 함부르크 공항에 착륙하려는 참이었다. 11월의 쌀쌀한 비가 대지를 어둡게 물들여 비옷을 입은 정비공들과 밋밋한 공항 건물 위에 서 있는 깃발, BMW 광고판과 같은 모든 것을 플랑드르파의 음울한 그림 배경처럼 보이게 했다. 이런, 또 독일이군. 나는 생각했다.
모든 건 스쳐 지나간다.
누구도 그걸 붙잡을 수는 없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무라카미 하루키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의 참담한 기분은 지워지지 않는 얼룩처럼 늘 마음에 달라붙어 있었다. 언어를 자유롭게 알아듣고 쓰지를 못하니 나라는 인간 자체의 능력이 몹시 저하된 것 같았다.
맥락을 따라잡지 못해서, 속도가 너무 빨라서, 모르는 단어가 섞여 있어서 애매한 미소로 알아들은 척 흘려보내고는 했던 일본 친구들과의 대화와는 달리 하루키의 문장은 언제까지고 나를 같은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충직한 개처럼, 끈기 있는 스승처럼, 배신하지 않는 연인처럼.
생각해보면 나를 그 타향의 침대 위로 데려간 것도 하루키의 문장이었다. 그 문장들과 함께 나는 내가 원래 속했던 곳에서 나날이 멀어져갔다. 나날이 낯설어져갔다. 나날이 가벼워져갔다. 그리고 그것은 과거 어느 시절의 내가 간절히 바라던 바였다.
안됐다면 안됐고 우스꽝스럽다면 우스운 이방인 생활 — 『이윽고 슬픈 외국어』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의 미국 생활에 관해 쓴 에세이 『이윽고 슬픈 외국어』*에서 "외국어를 말하는 작업에는 많든 적든 ‘안됐다면 안됐고 우스꽝스럽다면 우스운’ 부분이 있다"**고 말했는데 나의 외국 생활에도 그런 구석이 있었던 것 같다.
한편 『이윽고 슬픈 외국어』에는 이런 문장도 나온다. 외국에서 지내는 것의 메리트 중의 하나는 자기가 단순히 한 사람의 무능력한 외국인, 이방인에 불과하다고 실감할 수 있는 것이다. (…) 가령 약자로서 무능력한 사람으로서, 그런 식으로 허식이나 군더더기가 없는 완전한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는(혹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을 가져보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귀중한 경험이 아닐까 하는 느낌마저 든다.
한데 나에게서 모국어와 모국의 문화를 제거했더니, 거기에 남아 있는 것은 남의 집 현관에서 신발도 제대로 정리 못 할 정도로 순발력 떨어지고 예상치 못한 배려에 곧잘 당황하는 어설픈 인간이었다.
한밤중에 내게로 오는 자전거 소리 — 「한밤중의 기적에 대하여, 혹은 이야기의 효용에 대하여」
말하자면 그 애가 내게 오며 만드는 모든 소리가 ‘한밤의 기적 소리’였다.
팬심은 무엇을 어디까지 참게 하는가 — 『기사단장 죽이기』
어째서 육아는 더럽게 고생스럽고 피눈물 나게 힘든 일이라고 말해주는 이가 여태 없었을까. 분명 인류 멸망을 막기 위한 모종의 엠바고 같은 거겠지. 아니면 육아에 뒤따르는 희생을 모성과 부성으로 승화시키려 하는 사회 분위기상 갖은 고생담은 경험자들끼리만 쉬쉬하며 나누는 것일 수도 있다.
하루키는 피츠제럴드의 소문난 팬이며, 이 소설에서 멘시키가 골짜기 건너편 집을 바라보는 설정과 캐릭터 조형은 『위대한 개츠비』에서 따왔다고 스스로 밝혔다(『수리부엉이는 황혼에 날아오른다』, 무라카미 하루키・가와카미 미에코 지음, 홍은주 옮김, 문학동네, 2018, 194쪽).
그러나 내게는 손목 통증을 참아가며, 귀중한 자유 시간을 바쳐가며 읽을 만한 책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이 가장 유감스러운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다.
유명 작가의 신작이 나오면 띠지나 뒤표지의 광고 문구에 꼭 들어가는 ‘집대성’이니 ‘최고작’이니 하는 단어를 독서가 끝난 후 냉소적으로 바라보게 될 때가 있다.
하루키는 "편파적인 사랑이야말로 내가 이 불확실한 세상에서 가장 편파적으로 사랑하는 것들 중 하나"*라고 했고, 어쩌면 나 역시 하루키를 편파적으로 사랑해서 그의 신간이라면 무조건 구매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하루키가 이름만으로 책을 파는 작가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과거 일본 문학에 열광했던 독자들이 이제는 더 이상 요시모토 바나나나 무라카미 류, 에쿠니 가오리를 읽지 않는다는 사실이 내게는 가끔 쓸쓸하게 느껴진다. 같은 쓸쓸함을 하루키에게서만은 느끼고 싶지 않다는 것이 오랜 팬으로서의 내 솔직한 심정이다.
파스타를 만들고 재즈를 듣는 남자들 —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
팀 플레이가 필요한 운동은 아무리 해도 좋아할 수 없었다. 다른 사람과 점수를 놓고 겨루는 경기도 싫었다. 내가 좋아한 운동은 오로지 혼자서 묵묵히 하는 수영뿐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런 데이트의 세계로부터 진작 멀어졌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내 아들에게라도 스니커즈를 사 주고 파스타 만드는 법을 가르치는 것뿐이다. 아들이 요리하는 파스타를 얻어먹을 나 자신을 위해, 혹은 미래에 아들의 연인이 될 누군가를 위해.
앙코르와트를 무너뜨리고 인도의 숲을 태우는 멋지고 기념비적인 사랑 — 『스푸트니크의 연인』
직업으로서의 번역가 —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하루키는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서 번역은 기본적으로 기술적인 작업이기 때문에 대체로 일상적으로 할 수 있다고 했는데 이는 정말이지 옳은 말이다.
나 역시 하루키를 본보기 삼아 그간 준체육인이 되려는 시도를 소심하게나마 해왔다. 시간이 남아돌던 번역 초창기에는 자전거로 30분을 달려 수영장에 가 한두 시간 헤엄친 뒤 다시 자전거로 30분 되돌아오는 강도 높은 유산소운동을 거의 매일 했다. 그런데 여기에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운동만으로 너무 기진맥진해서 나머지 시간은 시체처럼 누워 있어야 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대를 뛰어 넘는 소설’은 있어도 ‘시대를 뛰어 넘는(=견디는) 번역’은 웬만해서는 존재하기 힘들다. 가령 1989년에 번역 출간된 『상실의 시대』에서는 나오코(여성)가 동갑인 와타나베(남성)에게 존댓말을 하는 것으로 번역되어 있다. 1993년에 번역 출간된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원서는 둘 다 반말).* * 두 책 다 최근 펴낸 개정판에는 반말로 수정되어 있다.
하루키도 『장수 고양이의 비밀』*에서 처음부터 독특한 맛을 내려고 노린다면 번역자로서는 이류이며, 번역의 참된 묘미는 세세한 단어 하나하나까지 얼마나 원문에 충실하게 옮기는가에 있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입구가 있으면 출구가 있다 — 『1973년의 핀볼』
입구가 있으면 출구가 있다. 그 여행에서 내내 떠올렸던 문장이다. 입구가, 있으면, 출구가, 있다.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건 아주 오래전에 죽어버린 시간의 단편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도 얼마 안 되는 그 따스한 추억은 낡은 빛처럼 내 마음속을 지금도 여전히 방황하고 있다. 그리고 죽음이 나를 사로잡아서 다시금 무의 도가니에 던져 넣을 때까지의 짧은 한때를 나는 그 빛과 함께 걸어갈 것이다.*
난 이런 글이라면 얼마든지 쓸 수 있거든 — 『무라카미 라디오』 1, 2, 3
그런데 이 글을 쓰기 위해 자료를 찾던 도중 ‘오이처럼 서늘한(침착한)’이 실은 영어 숙어 ‘cool as a cucumber’를 그대로 옮긴 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루키 오리지널 표현이 아니었다니, 덕후로서 못내 아쉽지만 오이처럼 침착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겠다. 오늘 저녁은 오이냉국이 좋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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